병정님
- 감독
- 방한준
- 제작년도
- 1944
- 출연
- 남승민, 김일해, 김양춘, 홍청자, 김령, 독은기, 서월영, 전옥, 최운봉, 이금룡, 김한, 마금희, 히라마 분주, 계정식, 조택원, 리코란, 김천, 서재헌, 김영두, 남홍일, 미야모토 요시오, 이흥열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영화가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 유명 연예인과 셀럽을 초청해 개최하는 VIP 시사회라는 것이 있다. 관객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 위한 홍보 수단의 하나로, 영화는 이곳에 참석한 셀럽의 사진 한 장만으로도 대중에게 그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다. 그런데 VIP 시사회라는, 나름 효율성 높은 이 홍보 방식은 언제부터 도입된 걸까? 굳이 홍보 목적이 아니었더라도, 유명 인사들을 초청하는 시사회는 언제부터 개최되었던 것일까? 영화 < 집없는 천사 >(최인규, 1941)의 시나리오 작가, 니시키 모토사다(西龜元貞)의 컬렉션 을 들여다본 순간부터 이런 궁금증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1910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니시키 모토사다는 1924년, 조선총독부 위생과에 부임한 부친을 따라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중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고등학교를 나왔고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대학을 중퇴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경성일보 학예부 기자로 취직했다. 니시키는 여기서 조선영화계의 여러 인물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덕분인지 이후 그는 영화의 길을 걸으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 < 수업료 >(최인규, 방한준, 1940)를 기획했고, <집없는 천사>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이 외에도 이 시기에 그가 시나리오를 쓴 작품 중 현재 필름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 병정님 >(방한준, 1944)이 있다. *주1 고려영화협회 단체사진(1940년 여름께 추정)_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1열] 최인규(좌1), 김학성(좌2), 김신재(좌3), 이창용(좌7), 강홍식(좌8), 니시키 모토사다(좌9),박기채(좌11) [2열] 방한준(좌5), 심영(좌7), 왕평(좌8) [3열] 임화(좌6), 서광제(좌7) 2005년과 2008년, 니시키 모토사다의 유족, 니시키 유리코가 기증한 그의 컬렉션에는 그가 조선에서 활동했던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의 조선영화 관련 사진들이 모여 있다. 일부는 그가 기획했거나 시나리오를 집필했던 <수업료>, <집없는 천사>, < 우르러라 창공 >(김영화, 1943) 관련 사진들이고 일부는 경성일보사 학예부의 조선영화 담당 기자로 재직할 당시에 수집했을 것으로 보이는 사진들로, 총 21편의 영화에 대한 것들이다. (좌 상단부터 시계 방향) <집없는 천사>, <우르러라 창공>, <한강>, <도생록> _시나리오 작가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 조선영화 편 < 도생록 >(윤봉춘, 1938), < 한강 >(방한준, 1938), < 무정 >(박기채, 1939), < 복지만리 >(전창근, 1941) 등, 대부분 필름이 남아 있지 않은 영화인지라 그가 생전에 소중히 간직했을 이 사진들은 잃어버린 영화에 대한 상상을 무한히 자극한다. 와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사진이 한 장 있다. 바로 영화 <무정>의 시사회에 참석한 원작자 이광수 와 주연배우 한은진 , 감독 박기채 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무정>의 공식 개봉 하루 전인 1939년 3월 14일, 지금의 서울 중구 을지로 4가에 위치한 황금좌 (黃金座, 국도극장의 전신)에서 개최된 시사회에는 춘원 이광수를 비롯해 각 방면의 인사 백여 명이 참석했는데, *주2 박기채 감독은 이 시사회를 위해 이광수에게 의전 차량까지 보냈다고 전해진다. *주3 그만큼 이날은 무척이나 특별한 날이었을 것이다. 이 특별한 날의 행사는 지금으로 치면 ‘VIP 시사회’라 해도 무방할 테지만, 당시 언론은 이를 ‘시사회’라는 보통의 용어로 소개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이 특별함을 강조할 용어가 딱히 없었던 까닭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한 이래로 일반인 대상의 시사회라든지 관계자 시사회(지금의 기술 시사회), 언론 시사회 등이 개최되었다는 소식은 왕왕 보도되었지만, <무정>처럼 유명 인사들을 대거 초청한 시사회는 당시에 흔하게 목격되는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정> 시사회에 참석한 한은진, 이광수, 박기채 (1939년 3월 14일, 황금좌) _시나리오 작가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 조선영화 편 어찌 되었든 이 특별한 날의 분위기는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의 이 사진에서도 여실히 전달된다. 배우 한은진이 입고 있는 두툼한 외투는 3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꽃샘추위로 코끝이 시렸을 그날의 날씨를 짐작하게 한다. 다소 경직돼 보이는 한은진과 박기채 감독의 표정은 또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당대 최고의 작가, 춘원과 함께 앉은 데서 오는 긴장감과 훗날 근대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기록될 소설 「무정」을 영화로 만든 데서 오는 결연함 등이 교차하는 표정이지 않았을까. 더욱이 이 작품으로 스크린 데뷔식을 치른 배우 한은진에게는 긴장감과 결연함 사이 어디쯤의 감정이 더욱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같이 성대한 시사회가 개최될 정도로, 영화 <무정>은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된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동시대인이라면 반드시 읽었어야 할 소설 「무정」을 원작으로 한 만큼 소설 팬들이 영화에 거는 기대가 컸고, <무정>을 제작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이하 조영)는 조선영화계에서 최초로 설립된 주식회사로, 고려영화협회와 함께 영화계를 이끌어갈 기대주로 주목받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영은 창립 제1회 작품 <무정>을 홍보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크랭크 인(1938년 3월)과 크랭크 업(1938년 7월) 소식, 평양 로케이션 촬영 소식, 현상과 녹음, 편집을 위한 일본 도쿄 출장 소식 등이 일간지에 틈틈이 단신으로 보도되었고, 크랭크 업 후인 같은 해 10월에는 최남용 과 장세정이 주제가를 취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등, *주4 영화 <무정>에 관한 소식은 1938년 한 해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적극적인 홍보는 작품에 그만큼 자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 그 같은 자신감은 영화가 한창 촬영 중이던 1938년 5월, 대중문화잡지 《삼천리》에 <무정> 시나리오를 공개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주5 여기서 다시,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 속 <무정> 시사회 사진으로 돌아가 보자. 사실 이 사진은 2008년, 유족 니시키 유리코의 이름으로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될 당시 “조선영화주식회사” 이름이 인쇄된 낡은 봉투에 다른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담겨 있었다. 봉투 겉면에는 경성일보 학예부 니시키 모토사다에게 김정혁 이 보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조선영화주식회사 발행 봉투 (한구영화박물관 상설 전시 자료) 이는 경성일보 학예부 기자로 재직 중이던 니시키가 조영 소속으로 <무정>의 시나리오를 윤색한 김정혁에게 받은 사진이라는 말이며, 역으로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언론 홍보를 위해 경성일보사에 보낸 사진이라는 의미이다. 실제 발행된 《경성일보》에 실리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근대문학의 거장 춘원 이광수와 전도유망한 엘리트 감독 박기채, 촉망받는 신예 배우 한은진이 함께한 이 사진은 여러모로 특별한 순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전례 없이 특별한 순간에 이들이 느꼈을 긴장감과 결연함을, 언젠가 이 영화를 보게 될 우리도 느끼게 될까? 1939년 영화 <무정>의 필름이 우리에게 돌아올 날을 기다려본다. *** 주1. 니시키 모토사다의 이력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KMDb 컬렉션, “시나리오 작가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 조선영화 편”에 수록된 이화진의 「해제: 니시키 모토사다와 조선영화」를 참조할 것. 주2. “<무정> 봉절 15일부터 황금좌에서”, 《동아일보》, 1939. 3. 16., 5면. 주3. 춘원, “영화 <무정>으로 공개장, 감독 박기채 씨에게 보내는 글”, 《삼천리》 제11권 제7호, 1939. 6. 1., 132쪽. 주4. “무정의 주인공 주제가를 취입”, 《조선일보》, 1938. 10. 22., 4면. 주5. 이광수(원작), 박기채(각색), “토-키 씨나리오, 무정”, 《삼천리》 제10권 제5호, 1938. 5. 1., 275~295쪽.
내가 손전 (孫傳)이라는 배우를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 내가 넘은 38선 >(손전, 1951)이라는 영화를 단체관람으로 보고 나서다. 그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이 작품은 북한에서 지주를 반동으로 모는 데 앞장섰던 청년이 귀순해 국군이 되어 먼저 월남한 지주의 아들과 함께 북진 대열에 참여했다가 전사한다는 이야기다. 이후 그는 < 공포의 밤 >(1952, 각본?주연)과 < 여자의 열쇠 >(1963)에 이어 < 쌍무지개 뜨는 언덕 >(1965)의 메가폰을 잡았다. 이 가운데 <쌍무지개 뜨는 언덕>을 제외한 두 편은 보지 못했으나, <내가 넘은 38선>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렇게 알게 된 손전 선생과 1980년대 초 인사를 나눈 것으로 기억된다. 영화인협회가 지방에서 주최한 세미나 자리였다. 그때 나는 연사로 참석했었다. 그러니까 그가 전성기를 보내고 제2의 영화의 길로 들어선 지 한참 지난 시기였다. 1부 행사를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에 그가 먼저 인사를 했다. 그 뒤 한번은 < 도쿄 이야기 >와 <맥추(麥秋)> 등 시나리오를 게재한, 일본의 어느 출판사에서 간행한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작품집>을 서명을 넣어 보내주기도 했다. 그는 달필이었다. 그는 배낭에 성경책과 영어사전을 늘 챙겨 넣고 다녔다. 이런 손 선생과 더욱 가까워지게 된 것은 내가 몇 년째 심사를 맡고 있는 청룡영화상에서 그가 특별공로상을 받게 되면서부터다. 1994년 12월 제15회 때였다. 이해 처음 1000만 원 상금이 걸린 특별공로상 부문이 신설되었는데, 시상식이 끝난 며칠 뒤 손 선생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약속한 어느 호텔 레스토랑에 나갔더니 고맙다며 점심을 샀다. 솔직히 말하면 심사위원 대부분은 그를 단역배우로만 알고 있을 뿐 주연과 감독 경력이 있는 전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손 선생은 그 뒤부터 연말이면 연하장을 보냈다. 5개월쯤 지나서였을까. 차나 한잔하자고 해서 뵈었더니 메고 있던 배낭에서 원고 한 뭉치를 꺼내는 것이었다. 집에 와서 읽어보니 영화에 대한 견해와 걸어온 자취를 기록한 원고지 300매 분량의 <배우는 누구나 될 수 있다>(부제 ‘나의 영화 인생 60여 년’)는 제목의 글이었다. 당시 ‘일간스포츠’나 ‘스포츠서울’ 같은 연예 스포츠 신문에는 배우들의 이야기가 연재되는 일이 많았다. 그는 이 같은 지면을 의식한 모양이었다. 그의 글을 지면으로 소개하기엔 대중성이 떨어지고, 단행본으로 엮기엔 분량이 모자란다고 판단했다. 한 달 뒤 약속 장소에서 다시 만나게 되자 일단 내용을 보충하고 분량도 늘릴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손 선생은 완성된 원고를 내게 건네지 못한 채 1999년 9월 8일 89세의 나이로 별세하고 말았다. 1910년 1월 27일 경상북도 대구 태생인 손전 의 본명은 손병철(孫秉喆)이다. 그는 손자까지 영화의 대를 잇게 해달라는 뜻으로 손전(孫傳)이라는 예명과 함께 손일포(孫一圃)라는 또 하나의 예명을 가졌다. 그가 영화에 처음 출연한 것은 스물여섯 살 때인 1936년 이규환 감독의 < 무지개 >의 삼촌 역을 맡으면서부터다. 이를 발판 삼아 신경균 감독의 < 순정해협 >(1937)에선 주연급으로 올라섰고, 일제강점기 말에는 조선영화사의 관제 영화 < 젊은 모습 >(1943), < 조선해협 >(1943), < 거경전 >(1944), < 병정님 >(1944) 등에 출연했다. 광복 후에는 < 똘똘이의 모험 >(1946)의 똘똘이(구민 역)의 아버지 역을 비롯해 < 민족의 새벽 >(이상 이규환 감독, 1947), < 조국의 어머니 >( 윤대룡 , 1949)에 출연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데뷔작인 < 무지개 >부터 < 똘똘이의 모험 >, <민족의 새벽>에 이르기까지 이규환 감독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전성기는 < 내가 넘은 38선 >을 정점으로 그 후광에 기대 명맥을 이은 < 쌍무지개 뜨는 언덕 >(1965)까지 14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이성구 감독의 < 일월 >(1967) 의 형사 역을 계기로 30여 년 동안 개런티 개념이 아닌 일당을 받는 단역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 한 >(1967), < 사랑 >(1968), < 역전파출소 >(1969), < 태백산맥 >(1975), < 장마 >(1979), < 안녕하세요, 하나님 >(1987), < 서울 무지개 >(1989)>, < 개벽 >(1991) 등 1500여 편에 그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는 한때 서울 창신동 언덕배기 2만5000원짜리 전셋집에 살며 단역배우 생활로 300만 원을 모으는 데 1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가 필자에게 건넨 원고에는 몇 가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그중 하나가 광복 전부터 영화인들이 크랭크인에 앞서 고사(告祀)를 지낸 관행이다. 조선영화사는 촬영에 앞서 반드시 가미사마(神樣) 앞에 스태프와 배우를 모아놓고 제를 올렸다. 정종, 팥밥(赤飯), 기타 음식을 차려놓고 예를 올리고 사원들에게 배불리 대접하는 것이 상례였다. 또 한 가지는 이규환 이 어용 영화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배경이다. ‘연조가 깊고 실적이 있었던’ 그가 조선총독부의 통제 아래 들어간 관제 조선영화주식회사의 감독 진용에 누락, 졸지에 ‘무직자’가 되면서 수원 탄광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규환 감독의 < 새 출발 >(1939) 기술시사회가 명동의 명치좌에서 열렸을 때 일본인 시나리오작가 니시키 모토사다(西龜元貞)가 들어왔다. 이를 본 이감독이 불청객이 들어왔다며 단호히 제지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이 사람이 조선영화사의 고문이 될 줄은 몰랐다. 그 보복으로 감독진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최운봉 (崔雲峯, 1914(?) ~ ?)의 공식적인 영화 이력은 최초의 조선어 발성영화 < 춘향전 >(1935)의 단역으로 출발한다. 원래 그는 기술 분야에 뜻을 두고 영화계에 입문해, 경성촬영소의 < 홍길동전 후편 >(1936)의 촬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38년 방한준 감독의 < 한강 >에서 한강 뱃사공 중 한 사람으로 출연하면서부터 배우로 전향해, < 도생록 >(1938), < 국경 >(1938), < 귀착지 >(1939) 등으로 점차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실질적인 데뷔작 < 한강 > 이후 최운봉 이 주연급 연기자로 이름을 알린 영화는 최인규 감독의 < 국경 >이다. 여기서 그는 빚쟁이에 몰려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밀수를 하고, 그마저도 성공하지 못해 귀향한 날 과실치사(過失致死)로 징역을 살게 되는 ‘세림’ 역을 맡았다. 국경지대의 음울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했던 이 영화는 일본에서도 호평을 얻었는데,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는 ‘영자’ 역을 맡은 김소영 에게 집중되었을 뿐 최운봉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 방한준 감독이 정비석 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 성황당 >(1938)에서는 산에서 숯을 구우며 살아가는 ‘현보’ 역을 누구보다도 잘 소화하며, 그때까지 출연작 중 가장 좋은 연기였다는 호평을 얻었다. <국경>과 <성황당>에서 그가 맡은 배역의 이미지는 자신이 속한 세계(‘고향’ 혹은 ‘자연’)가 외부의 폭력에 위협당한 선량한 사람이었다. ‘애인’이나 ‘아내’를 빼앗아가는 식민지 근대의 위력, 그리고 그러한 위기에 몰린 남성 주체의 무기력이란 나운규 의 무성영화들로부터 이어지는 조선영화의 일관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최운봉이 연기한 인물들은 나운규의 영화처럼 그 무기력이 살인이나 방화로 이어지는 ‘피의 세계’가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자연의 섭리를 믿는 ‘땅의 세계’에 존재했다. 이러한 그의 남성 이미지는 1940년대 들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박영희 원작을 안석영 이 연출한 < 지원병 >(1941)에서 최운봉 은 우울과 무기력에 휩싸여 있는 ‘춘호’ 역을 맡았다. 중학을 중퇴하고 부친의 뒤를 이어 마름 일을 하고 있는 ‘춘호’는 김 첨지의 모략으로 마름 자리에서도 밀려나고, 사랑하는 약혼녀 ‘분옥’( 문예봉 )과도 오해가 쌓여 궁지에 몰린다. 영화는 이러한 춘호의 무기력과 우울,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갈등 상황을 ‘조선인도 황군(皇軍)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춘호에게 출정(出征)의 기회를 던져줌으로써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지원병이 되어 출정 기차에 올라타는 마지막 순간 좀처럼 웃지 않는 ‘춘호’=최운봉의 얼굴에서 출정의 감흥을 읽기는 어렵다. 이 장면에서 클로즈업되는 최운봉의 표정에서는 연인과 노모(老母), 어린 여동생을 남겨두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식민지 청년의 비애를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후 최운봉 은 < 그대와 나 >(1941) < 병정님 >(1944) < 감격의 일기 >(1945) < 우리들의 전장 >(1945) 등 여러 편의 선전영화에 출연한다. 그러나 모두가 적극적이고 자발적이며 건강하고 명랑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던 그 시기에, 우울하고 무기력한 식민지 남성의 이미지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법인 조영에서 남승민과 같은 새로운 배우가 부상하는 가운데, 최운봉은 조연이나 단역으로 밀려났고, 때로는 코믹 릴리프(comic relief)를 담당하는 희극적인 역할을 맡았다. 해방 후 그는 한때 조선영화동맹에 가담하여 서울지부 집행위원으로 영화 대중화 운동에 참여했고, < 똘똘이의 모험 >(1946) < 새로운 맹서 >(1947) < 마음의 고향 >(1949) 등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많은 월북영화인들이 그러했듯이, 남한의 영화 제작 환경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미 그의 ‘좋았던 시절’은 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1950년 5월 정인택 원작을 영화화하는 <하얀 쪽배>에 출연할 예정이라는 기사(「<하얀쪽배> 영화화」, 「경향신문」 1950년 5월 18일 자)를 마지막으로 최운봉 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한국전쟁 중 월북했으리라 짐작되는데, 월북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