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안관 사라
- 감독
- 주드 테일러
- 제작년도
- 1981
- 출연
- 아이린 브레넌, 페넬 로버츠, 브루스 데이비슨
156분의 러닝 타임 동안 어둠의 한가운데로 인간을 몰아넣는 초자연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 곡성 >(2016)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라스트 신의 페이드아웃으로 종결된다. < 추격자 >(2008)와 < 황해 >(2010)로 이어지는 전작에서와 같이 나홍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괴적이 되어가는 서사를 통해 능숙하게 통제된 폭력 장면들을 단계적으로 제공한다. 기이하게 뒤틀린 내러티브와 감정의 격동을 야기하는 대담한 묘사를 내장한 이 영화는 물과 나무, 약초, 동물, 산으로 둘러싸인 전라남도의 작은 마을 곡성을 미스터리에 휩싸이게 한다. <곡성>의 줄거리는 뇌우, 번개, 안개, 악몽, 좀비, 퇴마사, 교수형에 처해지는 사내 심지어 죽은 사슴의 시체를 먹는 악마와 같은 이미지를 통해 조형되는 공포의 확장에 의존한다. 주술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고요한 마을에서 끔찍한 죽음이 발생하고 그 뒤를 좇아 기이한 사건들이 공동체를 압박한다. 동네 경찰이자 아버지인 종구(곽도원)가 미스터리를 조사하는 탐정 역할을 맡는데, 이 순박하고 익살스러운 시골 경찰이 광기와 착란의 상태로 변질되는 과정이 서사의 주조를 이룬다. 이 병증을 퍼뜨리고 있는 용의자는 깊은 산중에 사는 과묵한 일본인(쿠니무라 준)이다. 외지인으로 불리는 그가 불길한 기운을 몰고 오면서 종구의 딸 효진(김환희)에게도 발진이 돋고 험악한 말을 내뱉기 시작한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반쯤 벌린 종구는 아버지의 본능이 발동하면서 공격적이고 위협적으로 변한다. 어린 소녀의 천진함에 반해 선과 악의 공존은 인간의 본성이며 감정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비극을 더욱 강조할 수 있는 소재이다. < 엑소시스트 >(1973)와 < 캐리 >(1976), < 유전 >(2018) 같은 전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원을 추정하기 힘든 악령의 공세는 어린 소녀를 향할 때 더욱 끔찍하게 느껴진다. 마을 사람들의 소문, 속담, 신념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공포와 불편함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무기력한 느낌을 전하는, 반복되는 롱 쇼트가 암시하듯이 악령은 공동체 곳곳에 그윽하게 도사리고 있다. 나홍진의 전작들이 도시 환경의 조건을 활용한 착란적인 편집을 구사한 것에 비해, 원시적인 시골 마을을 무대로 한 <곡성>은 쇼트의 지속시간을 늘림(퇴마의식을 묘사하는 신들)으로써 공포의 시간을 부채질한다. 공포가 퍼지고, 스며들면서 도입부에 존재했던 어두운 유머를 빠르게 쓸어버리면서 나홍진은 관객을 마지막 동굴의 공포로 인도하기 위해 그럴듯한 개연성을 만든다. 믿음에 대한 성찰로 장식된 이 무자비한 어둠의 움직임은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영화적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나홍진은 그가 다루는 영화의 언어 규범을 숙달했다는 증거를 보여주면서 관객을 원하는 곳으로 안내하거나 이야기를 조작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돌리는 데 있어 능숙함을 보여준다. 마을을 휩쓴 테러의 원인이 영원한 수수께끼로 봉인되기 때문에 종구의 탐색과 구조 노력이 무너지고 마을 사람들은 광기와 영적 위기의 가장자리로 내몰린다. 관객은 종구와 마찬가지로 길을 잃고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딜레마를 감수해야만 한다. 당황한 인물들 역시 세상이 점진적으로 사악해져가는 이유에 대해 해명할 길이 없다. 악은 어디서 오는가? 나홍진의 영화는 냉정하게 답한다. 이유는 없고, 인간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먹잇감이고, 악은 상황의 문제일 뿐이다. 등장인물들에게 내리는 폭우도 공포와 유혈 사태를 씻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무력함을 동반한 채 악마가 숨어 있는 지하 통로를 배경으로 하는 피날레는 타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곡성>이 던지는 질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라는, 영적인 차원에 놓여 있다. 악마의 확연한 존재 앞에서 보이지 않는 신을 믿을 수 있는가? 신성에 대한 의문과 확신 사이에서 동요하는 이 영화는 따라서 보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관계를 형식적으로 구축한다. 기독교의 교리에 근거한 스토리 안에서 나홍진은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사실과 증거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애쓴다. 외지인의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은 이와 관련된다. 일본인으로 설정된 외지인의 정신은 너무 괴물적이어서 그의 육체적 한계를 넘어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에 대한 역사적인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국가 혹은 민족적 경계를 흐리는 이 인물은, 순박한 무지렁이들의 세계를 교란한다. 일본인이 공동체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관념은 국가 정체성의 형성과정에서 축적된 뿌리 깊은 위기의식을 소환한다. 컨텍스트와는 무관하게 세상에 만연한 악의 본성은 그것이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통제불가능한 것이다. 일종의 보안관인 종구는 가족, 공동체, 민족의 수호자로서 정당한 이유가 없이 횡행하는 악마의 공격에 맞서야 한다. 심리 지리학이라는 관점에서 주목할 것은 외지인이 기거하는 어둡고 허름한 집을 묘사하는 두 개의 신이다. 종구와 그의 동료 경찰 성복(손강국)이 처음 외지인의 집을 탐문할 때 카메라는 안에서 방으로 향하는 종구를 찍고 있다. 조류도감과 음화 등이 발견되는 이 날의 탐사에서 종구는 찢어진 창호지에 난 구멍 사이로 불이 켜진 신당을 훔쳐보다 돌로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진입한다. 종구의 액션이 진행되는 동안 성복의 수색이 교차편집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방 안의 가려진 장소를 들춰내기 위해 문을 여는 성복의 액션과 신당으로 들어서는 종구의 액션이 평행하게 이어지는 상황에서 두 인물은 각자의 시점으로 밀실의 풍경을 본다. 기괴한 형상의 조형물과 무당 의식용 밧줄, 향로, 흑백 사진이 붙은 신당과 죽음의 이미지가 덕지덕지 붙은 사진들의 몽타주를 카메라가 훑는 동안 카톨릭 부제 양이삼(김도윤)의 발을 물고 짖어대는 맹견의 흉포함이 또 하나의 계열을 형성하며 나란히 놓인다. 개에 물려 바지가 뜯겨나가는 소동은 마을에서 벌어진 죽음의 이미지를 촬영한 사진들의 몽타주와 편집된다. 삼분할 액션을 나열한 이미지들의 조합은 연쇄적인 죽음의 모티프를 환기하면서 신성(神聖)의 침탈과 그 대가를 형상화한다. 외지인의 집에 대한 두 번째 방문은 동일한 궤적으로 진행되지만 반대의 방향에서 조망된다. 종구와 양이삼, 두 사람만 등장하는 이 신에서 카메라는 종구의 위치에서 방을 찍는다. 그가 처음 방으로 들어갔을 때 보이는 것은 낡은 상 위에 삶은 닭발이다. 극단적으로 낮아진 위치에서 찍은 로우 앵글의 측면 쇼트는 벗겨진 벽지와 서까래를 배경으로 프레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는 종구의 위태로운 움직임을 보여준다. 방 안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찢어진 신문지가 너덜너덜 붙은 벽을 배경으로 시효를 다한 향로와 초들이 놓인 신당이 드러난다. 카메라는 마침내 종구가 보는 것을 드러내는데 완전히 꺼진 제단은 그 위에 소용돌이치는 증오와 처벌의 앞날을 예고한다. 첫 번째 방문에서 이삼의 바지를 문 맹견이 종구를 공격하기 위해 방안으로 뛰어들면서 응징이 시작된다. 촬영감독 홍경표는 이때 혼돈의 우주 속 인물의 고립을 강조하고 사건의 임의성을 강조하는 수평적인 와이드 쇼트를 별안간 보여준다. 이성을 상실한 종구가 귀신들린 집 안에서 맹견과 사투를 벌일 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외지인의 모습은 바스트 쇼트에서 익스트림 롱 쇼트로 후퇴하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거리로 퇴각한 카메라는 익명의 눈을 암시하듯 느리게 앞으로 이동한다. 이 시선의 주체는 누구인가? 두 장소 간의 교차편집은 신체의 정신적 혼란과 그 병이 즉각적인 공간으로 확장되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한다. 외지인의 방은 심리 지리학의 시각적 구현이다. 벗겨진 벽지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흉가가 숨겨진 정신병의 공간화라면 곡성은 그 증상이 발현되는 곳이다. 건축학적으로 이 집은 바깥에서는 그리 눈에 띄는 공간이 아니다. 친숙하고 무해해 보이는 집은 표면은 깊고 불길한 내부 방을 숨기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곡성>의 미장센은 경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면서 여러 겹의 레이어와 비밀을 숨긴 공간을 설정한다. 나홍진에게 이런 설정은 익숙한 것이다. 데뷔작 <추격자>에서 그는 연쇄살인마의 음울한 내면을 시각화한 집을 <곡성>의 그것과 동일한 형상으로 구조화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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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의 패착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에는 전장의 광기와 폭력 그리고 비극이 승리의 기념비를 위한 영웅적이고 애국적인 헌신으로 전화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전장의 ‘1일’을 채우고 있는 민간 선박에 관한 에피소드는 그러한 영웅적 서사로 가장 강력하게 수렴된다. 항구에 정박되어 있던 민간 선박에까지 국가의 징발령이 내려진다. 그러자 큰아들을 이미 이 전쟁에서 잃은 한 아버지는 해군에 배를 넘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직접 자신의 다른 어린 아들과 동네 소년까지 태운 채 전장에 참여한다. 그 와중에 동네 소년이 불의의 사고로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지만, 그 아버지는 소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배를 돌려 항구로 되돌아가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한 사람의 소년보다는 덩케르크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무수한 병사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을까? 크리스토퍼 놀런은 영화의 말미에 결과론적으로 아버지의 선택이 옳았다는 당위성을 부여한다. 한 아이를 잃는 대신 더 많은 병사를 구했으며, 그 소년은 바라던 대로 마을 신문을 통해 영웅으로 보도되었다. 주제적 차원에서 <덩케르크>는 영웅과 승리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전쟁 드라마이다.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헌신, 마지막 사병 하나까지도 챙기고자 했던 전투 지휘자, 위험을 감수하고도 끝까지 전투기를 몰았던 전투 조종사.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에 내래이션되는 승리의 오마주들. 그런데 이 순간 불현듯 떠올라 크리스토퍼 놀런의 국가와 역사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압도해버리는 영화가 있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쇼헤이는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체제에 순응하고 동화할 수 없는 자)이 유년기 겪었던 국가와 권력, 아버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전쟁 중 일본 역시 자국 민간 어선들에 대한 징발을 명령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유일한 생계수단인 어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군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통 사정을 하게 된다. 이 장면을 목격한 주인공은 아버지를 굴복시키며 생존수단을 강탈하려는 군인들에게 달려들고, 결국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는 징발에 수긍하게 되는 장면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쇼헤이에게 국가와 전쟁은 결코 애국이나, 대의, 승리로 설명될 수 없는 실체이다. 전범 국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전쟁이 위정자들의 게임이이고 권력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 생활을 했던 노벨 문학상 수상자, 컷트 보네컷의 『제 5 도살장』에는 부제가 달려있다.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이다. 그가 전장에서 마주친 적군-악의 실체는 사실상 이제 막 13-4살을 넘긴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아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전장의 게임은 그 어떤 승리의 명분도 수립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탄식만이 가능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거대하게 몰려드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한 공포로 자폭을 선택했던 일본 병사들 역시, 죽음 직전에 엄마와 가족에게 편지를 남기며 울부짖었던 어린 소년들에 불과했다. 이스트우드는 그들이 자발적인 애국주의에서가 아니라 국가의 강요된 대의와 명분에 의해 이끌려왔음을 묘사한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광의 길> 역시, 전장의 최전선에 서 있는 병사들이 위정자들 혹은 권력자들의 승리를 위한 비인격화된 수단들로 간주되는지를 냉혹한 게임처럼 묘사한다. 세상에 대한 성찰의 시선을 가진 거장들에 의해 그려진 전쟁은 적과 아, 승리와 패배, 정복과 굴복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다. 모든 전쟁은 불모한 폭력에 불과하며, 그 무수한 이름 없는 죽음들 앞에 그 어떤 승리도 영광도 존재할 수 없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가 무려 6만 5천여 명이 죽어간 전장을 승리의 기념비로 다시 써 내려가는 순간, 이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우매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것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에도 흥미로운 지점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 이 영화가 적어도 중반에 이르기 전까지 전장은 공격하는 자가 의해서가 아니라, 공격받는 자들에 관한 세계로서 묘사한다. 사실 주류 영화뿐만 아니라 서방세계에 의해 지배되는 뉴스 미디어, 드라마 등은 언제나 공격하는 자의 입장과 정당성에 입각해 서술되고 조작된다. 반면 <덩케르크>는 영화의 본편이 공개되기 이전부터 트레일러를 통해 전쟁에 관한 새로운 체험 감각(불안과 공포)을 제안하였다. 잔교에 운집한 병사들이 폭격기 소리와 함께 공포에 사로잡히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는 안타깝게도 언제나 본편보다는 트레일러가 더 훌륭하다). 실제로 영화의 초반부 및 잔교에서의 1주일을 묘사하는 많은 장면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청년(토미)의 불안과 필사의 생존 의지를 묘사하는데 충실하다. 무엇보다도 호이테 반 호이테마가 촬영한 와이드한 전장의 풍경들은 그 드넓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시한폭탄처럼 짹각거리는 스코어 사운드와 더불어 주인공 및 관객을 심리적으로 고립시키는 효과가 탁월하다. 이 영화에서 더욱 흥미로운 두 번째 지점은 영화가 중반에 이르기 전까지 전개된 영화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흥미로운 아이디어들 때문이었다. 놀란 감독은 영화의 존재를 ‘시간’의 축으로서 구조화한다. <메멘토>로부터 <인셉션> <인터스텔라>, 그리고 <덩케르크>까지 그는 영화가 어떻게 아날로그적 시간에 대한 감감을 해체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덩케르크>는 이 영화가 초반에 제시하듯, 명시적으로는 3개의 시간을 병렬적으로 배치한다. 해안가 잔교에서의 1주일, 선박을 타고 병사를 구출하기 위해 나선 가족의 하루, 그리고 공중폭격을 위해 출격한 항공기에서의 한 시간. 명백하게 서로 다른 길이로 구성된 시간이지만, 놀런은 이 영화의 서사 구조 내에서 교차 편집을 통해 세 개의 시간 층위를 동등하게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야심을 피력한다. 물론 이러한 배치가 온전히 새로운 영화적 실험은 아니다. 사실 영화는 조르쥬 멜리에스의 ‘트릭’이 발생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시간의 구조물이었다. 영화의 모든 시간들은 생략되거나 연장될 수 있으며, 압축될 수 있다. 다만 이미 1930년대, 할리우드 고전기에 이른 성과는 그 시간의 트릭을 관객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다시 말해 철저하게 인공적으로 선택되고 배열되는 시간의 파편들을 관객들이 서사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고 인과론적인 실체로서, 영화의 조작 가능성을 비가시화하는 심리적 구성물로 완성해냈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놀런의 시간 구조는 새로운 영화적 시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연화된 고전적 서사의 시간을 탈구시키는 것, 즉 선형적이고 인과론적 서사로 수렴되었던 시간을 비선형적 단위로 재구성하는 행위에 가깝다. 여기서 핵심은 그가 영화의 논리 혹은 시간의 논리를 분절적이고, 비선형적인 디지털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가 지독히도 아날로그적인 질료인 필름을 고집하고 있음에도 그의 영화적 시간 감각은 철저하게 디지털화된 감각이다. 선형적이고 물질적이며, 연속성과 원본(본질)성에 대한 감각인 아날로그와 달리 디지털적 감각은 비선형적이며 비물질적이며, 불연속성과 절대성의 속성을 지니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의 예술에 대한 분석적 이해를 시도하는 연구자 찰리 기어는 예술과 디지털의 상관관계를 자본주의적 형식논리(상품의 추상화, 표준화, 수량화의 논리. 그로 인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류의 새로운 분절적 감각과 논리) 속에서 파악한다. 자본주의가 가장 고도화된 형식논리로 작동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시간과 공간의 가치와 크기는 근대 이후 형성된 서구적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가장 미시적으로 파편화하거나 압축하고 해체한다. 밀레니엄 시대를 전후로 고조된 디지털적 감각에 대한 예술의 인식은 당장은 비선형성(랜덤 액세스)과 상호작용성의 신화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경우의 수를 디자인하는 예술형식으로 무수하게 발현되어 왔다. 하나의 절대성, 하나의 인과론적 서사, 하나의 감각으로 통일된 시공간 구조의 수사학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덩케르크>에서 크리스토퍼 놀런이 디지털적 감각으로 시간과 공간을 구축한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세 개의 시간(1주일, 하루, 한 시간)을 병렬적으로 분절해 제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덩케르크>는 사실 굉장히 관습적이고 장르적인 컨벤션과 스릴, 긴장 구성에 충실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관습을 배치하는 방법에서 눈에 띄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영화의 초반부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대의 인물들을 마치 동시적인 시간처럼 교차 편집을 통해 구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일주일의 시간을 대변하는 토미가 잔교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다른 이와 함께 함선으로 호송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거의 실시간적 시간 흐름을 가지고 서사에 배치되는데, 그 사건을 통해 관객의 긴장을 자아내기 위해 함선 장교의 출항 명령, 군집한 병사들로 인해 쉽게 나아가지 못하는 토미의 호송, 심지어 그 와중에 진행된 폭격과 진행을 가로막는 잔교의 끊어짐 등이 묘사된다. 이 순간들은 토미가 과연 배에 승선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지독히도 관습적인 긴장과 병렬의 편집방식을 채택한다. 그런데 이 장면의 트릭은 다시금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긴박한 순간과 교차편집된다. ‘하루’의 시간을 보여주는 민간 선박 출항의 긴박함(해군들이 배를 징발하기 위해 다가오는 순간, 그들을 따돌리고 출항해 버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연료계가 고장 난 폭격기의 불안한 항공 등이 그것이다. 표면적으로는 1주일, 하루, 한 시간의 시간 위에 배치된 인물과 사건들은 교차편집을 통해 마치 동시적 시간인 양, 그것도 거의 실시간적인 방식으로 구성된다. 만일 이 영화가 초반에 세 개의 인물군이 서로 다른 길이의 시간을 배분받고 있음을 자막을 통해 알려주지 않았다면 관객들은 분명히 동시적 시간으로 인식했을 순간이다. 그러나 서사의 정황상 이 시간들은 전혀 다른 시간대에 발생한 사건들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영화가 편집이라는 장치를 통해 서로 다른 시간대에 얼마나 랜덤하고 자의적인 방식으로 접근 가능한지를 실험한다. 이 실험에서 ‘놀라움의 효과’를 유발하는 것은 놀런의 영화 그 자체라기보다는, 관객의 고전주의적이고 관습적인 관람행위(인과론적이고 선형적인, 무엇보다도 편집의 이음매 없는 연결이 구성한 영화적 일루전의 리얼리티 효과) 그 자체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으로서 영화의 시간과 공간을 새롭게 구조화하는 장인이다. <트윈 픽스>의 25년, 과거 혹은 미래? 이러한 크리스토퍼 놀런은 야심 많고 흥미롭지만, 그는 언제나 특정 한계치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부한 주제의식도 여기에 한 몫 하지만, 영화적 트릭과 야심이 영화의 존재 그 자체를 재구성하는 전복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비선형적, 랜덤 액세스 되는 시간이 서로 다른 서사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올해의 성취는 역시 25년만의 귀환, 데이빗 린치의 <트윈 픽스> 시리즈이다 노장의 예술가 데이빗 린치가 <트윈 픽스 3>를 통해 보여주는 세계는 놀랍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미학을 대변하는 호이테 반 호이테마의 웅장한 스펙터클의 위용이 없을지라도 그는 키치적이고 B급 영화적인 생략과 응축, 유머를 통해 감히 범접하기 힘든 불가해한 예술 세계를 달성한다. 린치에게 영화는 단순한 시공간적인 트릭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공간의 세계로 진입하는 ‘열린 문’이다. 25년 전 <트윈 픽스> 시리즈를 봤던 관객이라면, 시즌 2의 후반부 붉은 방의 로라 팔머가 쿠퍼 요원에게 25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것은 정말로 25년이 지난 2017년, 시즌 3를 시작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억해야만 하는 또 한 가지. <트윈 픽스 3>의 붉은 방에서, 외팔이 사내는 여전히 그 공간에 앉아 있는 쿠퍼에게 지금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질문한다.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를 결과를 미리 언급하자면, 시즌 3의 최종화에서 쿠퍼가 도달한 세계는 영화적 서사의 과거일까? 미래일까? 놀랍게도 시즌 3의 최종화는 전 에피소드들의 최종적인 귀착점이자 원점으로 돌려버린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트윈 픽스>는 영화의 안과 밖에서 두 개의 시간 구조를 제시한다. 영화 밖에 존재하는 첫 번째 시간은 정말로 25년의 공백 이후에 도착한 이 영화에 새겨진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다. 시즌 3에서 우리는 25년 만에 다시 뭉친 놀라운 출연진들을 거의 다 만나게 된다. 붉은 방에 갇혀 있던 쿠퍼는 말할 것도 없이 트윈 픽스의 보안관 사무실과 그 마을에서 살아가던 거의 모든 배우들이 시간의 흔적을 온 육체와 얼굴에 새기며 다시 등장한다. 그래서 이 시즌의 절대적 주제는 ‘시간’처럼 보인다. 시즌 3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서사와 상관없이 25년의 공백(혹은 점핑)이 주는 놀라운 연속성과 단절성을 지속적으로 상기하고 인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역시 영화적 구조가 내재한 미궁과도 같은 세계를 관통하는 시간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시즌 3의 최종화는 이 모든 이야기의 귀착점이자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쿠퍼와 주요 인물들은 불가해한 세계의 문을 통과해 초월적 우주와 붉은 방,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시간의 경계,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의 경계는 불가해한 미스터리로서만 제시될 뿐이며, 심지어 죽음이 존재의 끝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린치는 단일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우주로 통하는 문들을 통해 하나의 서사가 아니라 언제든 변용가능한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트윈 픽스 3의 최종화의 마지막 대사는 “지금이 몇 년인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별거 아닌, 그러나 거대한 매혹 철학자 들뢰즈로부터 영화 연구자 데이빗 노먼 로도윅까지 그들은 영화를 ‘공간에 기반한 시간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영화는 공간의 구성을 통해 시간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한 시간매체이다. 시간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시간이 영화의 존재론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이며, 모든 시간이 시작되는 탄생과 소멸되는 죽음까지도 영화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로 작동한다. 올해 나의 사사로운 주목을 받았던 영화와 감독들은 모두 ‘시간’을 영화 그 자체로서 인식하는 감독들이자 영화들이다. 혹은 나에게 ‘영화적 시간’에 대한 사유를 재촉했던 작품들이다. 수십 년 만에 스크린으로 공개된 고다르의 <작은 독립영화사의 흥망성쇠>는 린치의 영화처럼 시간의 점핑과 함께 우리 앞에 도착했다. (당연히 이 영화 역시 여느 고다르의 영화들처럼 영화라는 매체의 자의식과 영화의 시간을 실험하는 이미지들로 구성된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순간은 이 영화 속에서 아직 젊었던 장 피에르 레오가 영화 상영 이후 실제로 극장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영화가 불멸의 시간을 소망한다던 바쟁의 말처럼 스크린 속 과거의 젊은 레오와 달리 그는 현실의 노쇠한 육신으로 관객들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장 피에르 레오 그 자신의 스타성과 영화적 역사들을 응축하는 것으로 점철되는 스와 노부히로의 영화 <오늘 밤 사자는 잠든다> 역시, 그가 죽음을 연기하는 장면으로 시작되고 종결된다. 그리고 극 중 영화 현장을 떠난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이 깃든 과거의 공간들을 여행하며, 그곳에서 역시 먼저 죽어간 이들의 유령을 마주한다. 스와 노부히로는 이 영화에서 영화야말로 죽음에 저항하고 죽음을 기록할 수 있는 매체임을 새삼스레 상기한다. 그리고 언제나 나만의 베스트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구로사외 기요시는 전작 <은판 위의 연인>(사진과 죽음, 영화에 관한 고혹적 괴담)에 이어 세계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 한다. 시간의 끝, 죽음과 영화가 온전히 만나는 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디지털 시대에 영화는 그 스스로 디지털적인 속성(비록 아날로그였던 셀룰로이드라 할지라도 분절된 프레임으로 존재했던 영화적 이미지와 시간들)을 세상에 대한 인식론과 존재 그 자체로 현시한다. 파편화되고 불연속적이며 절대성의 위계를 상실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압축과 파편화. 최근 무수한 영화와 드라마들이 시간의 절대성을 넘어서는 서사들(평행적 세계, 4차원을 넘어 5차원의 세계, 우주적 시간, 비선형적 내러티브 등)은 포스트 모던을 넘어선 또 다른 예술적 시간의 재현능력을 탐닉하게 한다. 영화와 예술, 디지털적 감각과 영화적 시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수렴되는 형식 논리들. 이러한 것들이 요즘 나를 사로잡는 사사로운 매혹들, 사사로운 영화들이다.
영화 스태프로서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20대에서 시작해 벌써 30대의 중반이니 영화와 함께 자라온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첫 영화를 했을 때는 너무도 신기한 사회에 들어와 있구나 생각하며 적응해나가기 바빴지만, 현재는 현장 녹음팀으로서 지금까지도 현장의 소리들과 싸우며 지내고 있다. 아마 영화를 그만둘 때까지는 계속 싸울 예정이다. 현장 녹음팀은 대략 3~4명으로 구성되어있다. 4명일 때는 현장 녹음감독 밑으로 붐 오퍼레이터-세컨드 붐 오퍼레이터-붐 어시스던트 순으로 구성이 된다. 3명 시스템이라면 세컨드 붐 오퍼레이터가 빠지는 경우이다. 그중 나의 직책은 붐 오퍼레이터다. 붐 오퍼레이터란 붐폴이라는 긴 장대에 달려있는 마이크를 컨트롤 하여 녹음감독이 원하는 대로 수음을 할 수 있는 기술자를 말한다. 그리고 그 붐 오퍼레이터는 녹음팀의 제1 조수를 담당한다. 많은 사람들이 붐맨이라고들 하지만 정확히는 붐 오퍼레이터가 맞는 표현이다. 요즘은 여성들도 많이 하고 있으니 예전처럼 ‘맨’이라는 표현은 바르지 않다. 여느 다른 팀과 비슷하게 제1 조수가 되려면 어쩔 수 없이 오랜 경험에서 얻은 노하우가 필요하다. 기술적인 부분은 이론으로 배워서는 쉽지가 않다. 학교에서 이론으로 배운 친구들이 오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이런 부분 같다. 교육 과정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수많은 경우의 수가 영화에는 여기저기 존재한다. 카메라의 앵글과 조명의 그림자, 배우의 동선을 항상 신경 써야 하고, 대사를 숙지하면서 주변의 소리를 신경 써야 하며, 오퍼레이팅을 할 수 있는 공간도 확보해야 하는 등 그야말로 신경이 아주 많이 쓰이는 일투성이인데, 이들을 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은 결국 수많은 경우의 수를 경험해본 노하우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예를 들어 카메라 앵글사이즈를 가늠해 알맞게 마이크를 배치해 놓았다고 해도, 더 좋은 수음을 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배우와 근접해지는 위치에 마이크를 둬야 한다. 그러려면 조명으로 생기는 마이크의 그림자가 나오지 않게 해야 하고, 카메라 앵글을 잘 피해 가면서도 연기하는 배우 쪽 마이크가 더 정확한 위치에서 수음을 할 수 있게 항상 오퍼레이팅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순간도 같은 장면이 없는 영화현장에서는 그래서 더더욱 이론보다 경험이 중요해진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NG는 특히나 사운드에 의해 생기는 것이 많다. 언제 어디서 잡소리가 날지 알 수가 없기에 촬영 준비 중에 계속 체크해야 한다. 갑자기 비행기가 지나가거나, 동네의 개들이 짖어 대거나, 누구의 폰이 울리기도 하는 등의 상황이 벌어지면 바로 NG다. 평소에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시계의 초침 소리나 냉장고, 환풍기 소리 또한 미리 체크하여 끄지 않으면 소리의 톤이 많이 달라져서 깔끔하지 못한 녹음이 된다. 그렇게 미리 체크를 했다 해도,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한 상황들로 웃지 못할 상황이 생긴다. 특히나 여름은 미리 체크를 해두어도 어디선가 날아온 매미들로 사운드가 고르지 않게 되어버린다. 그럴 때는 위에서 말한 현장의 노하우를 십분 발휘해 매의 눈으로 매미를 찾아 쫓아낸 후 다시 촬영에 들어간다. 생각보다 예민한 녹음 상황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스태프와 배우들을 괴롭히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덥고 추워도 에어컨과 히터를 항상 꺼야 잡소리가 없기 때문에 나 또한 매우 덥고 또는 매우 춥지만 에어컨과 히터를 내 손으로 꺼야 한다. 자주 발생하는 또 다른 NG의 경우는 배우들이 정해진 동선과 대사대로 연기하지 않고 애드리브를 친다거나 했을 때이다. 오른쪽으로 돌면서 대사를 치기로 했는데, 다른 쪽으로 돌면서 대사를 친다든지 해버리면 마이크는 약속했던 동선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린다. 애드리브로 수많은 명장면이 나왔다곤 하지만, 현장에서의 애드리브는 재미있으면서도 당황스러운 존재다. 그런 상황이 많이 발생하는 장르가 코미디이고, 기억에 남는 작품이 2012년 찍었던 < 사랑이 무서워 >란 작품이다. 임창정 배우와 김규리 배우의 연기도 좋았지만, 정말 김수미 배우의 현란한 애드리브 덕분에 현장 사람들 모두 웃지 않으려고 혀를 깨물어야 했다. 촬영 중에 터지는 나의 웃음 때문에 재미있는 컷을 망칠 수는 없는 일이니 정말 매 순간 정신을 다잡으며 집중을 했어야 했다. 애드리브 말고도 < 베를린 >이나 <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 > 등과 같이 외국어 대사가 많은 작품들도 오퍼레이팅 하기가 쉽지 않다. 마이크는 배우가 대사를 할 때, 그 배우와 매우 가깝게 있어야 하기 때문에 두 사람 정도가 대화를 하는 씬이면 마이크는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가며 움직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대본을 외워야 하는데 그 대본의 대사가 외국어가 되어 버리니 실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실수가 없기 위해 외국어 대사라 할지라도 촬영 내내 대본을 계속 보며 외워야 한다. 해외 촬영 시에는 언어로 인한 어려움뿐 아니라, 주변 소리 통제도 쉽지가 않다. 일단 언어소통이 쉽지 않아 식당의 음악 소리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통제하려면 통역하는 사람을 불러 현지 제작부에게 설명을 해야 하니 빠른 진행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해외 촬영을 다니며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해외에선 사이렌이 우리나라보다 더 많이 울린다는 것이다. 슛 중에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NG이기 때문에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얼마 전 < 보안관 >을 촬영할 때는 그야말로 ‘바람과의 전쟁’이었다. 기장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영화라 늘 바닷가 근처에서 촬영을 하기 때문에 마이크에 바람 소리가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윈드젬머라는 바람 소리를 부수는 역할을 하는 커버를 마이크에 씌워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다 보니 선배들의 경험에서 나온 나름 특수한 아이템을 하나 추가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스타킹이다. 스타킹을 씌우면 바람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어 생각보다 많이 바람 소리를 잡아준다. 그러나 현장에서 쉽사리 사기도 어려워 현장의 여자 스태프들에게 변태라는 놀림을 받으며 스타킹 구걸(?)을 해야 하는 정말 뜻밖의 어려운 점이 있었다. 사극 또한 녹음이 어려운 장르 중에 하나이다. < 방자전 > 때 섭외된 많은 장소들이 있었는데 그 중 민속촌 촬영 때에는 한옥 특유의 낮은 천장과 좁은 공간 때문에 녹음이 쉽지가 않았다. 마이크는 인물의 머리 위에 위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낮은 천장 때문에 마이크의 높이가 낮아 화면에 마이크가 노출되는 NG도 많이 생겼다. 어느 정도 소리의 톤을 무시하고 인물 밑으로 마이크 위치를 설정해보기도 했지만 이 역시 좁은 공간 때문에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또한 사극 특성상 촬영 장소가 유적지나 관광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멀리서 들려오는 도로 소음이 많은 문제가 되었다. 특히나 버스나 대형트럭 등이 지나갈 때면 어김없이 NG가 나곤 했다. 그 시대엔 차량이 없으니 자연스러운 소리를 담기가 무척 어려웠다. <방자전>을 촬영할 땐 배드씬이 많았는데, 그런 씬 들을 촬영할 때는 무척이나 긴장을 해야 한다. 현장의 자연스러운 소리를 얻으려면 모든 스태프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야 함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인원만 현장에 남아 슛을 간다. 베드씬은 배우들도 후시 녹음을 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나에겐 부담이 많이 되는 촬영 중 하나이다. 이렇듯 영화에서 자연스러운 소리를 담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실제 영화를 봤을 때 관객에게 배우의 숨소리까지 내 손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정확한 소리를 잡아내고 그 소리로 영화의 집중도를 더 높여 줄 수 있는 직업. 그것이 붐 오퍼레이터인 것이다. 물론 만들어지는 소리들도 있겠지만 좋은 소리를 녹음해야 결국 좋은 사운드 디자인도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려고 노력한다. 모두에게 자연스러운 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바로 내가 영화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다음 영화에도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좋은 소리를 담을 수 있는 붐 오퍼레이터가 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