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과 미스터 프리즈
- 감독
- 보이드 커클랜드
- 제작년도
- 1998
- 출연
- 케빈 콘로이, 마이클 안사라
< 둥글고 둥글게 >(2020)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중심에 두면서 1980년대를 조망하는 오디오-비주얼 프로젝트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이 기획한 이 프로젝트는 역사적 영상물들을 편집한 파운드 푸티지 필름으로 단순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 이미지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환기한다. 미디어 아티스트 장민승은 <보이드>(2016), <보이스리스>(2019), < 오버 데어 >(2019) 등에서처럼 음악감독 정재일과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이 작품에서도 ‘빛과 소리’의 특별한 시공간 체험을 선사한다. 여기서 ‘빛’은 ‘빛고을(光州)’이라는 이름을 가진 광주와 그 역사적 존재들이 남긴 흔적인 만큼, 차원들을 넘어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와 그 역량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소리’는 기도와 종교음악이 그래왔던 것처럼 역사적 존재들과 현재의 관객이 만나 신에게 고통을 하소연하고 죽은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제의적 공간을 형성한다. <둥글고 둥글게>는, < 박하사탕 >이 가장 순수했던 ‘나’를 찾기 위해 5.18 광주 직전으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을 했던 것처럼, 시청각적 이미지와 역사의 잠재성을 재차 질문하고 그 역사-영화로부터 고통 받고 소외당한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 작품은 5.18 광주를 한국 근대사의 기원이나 갑작스러운 독립된 사건으로 부각하지 않는다. <둥글고 둥글게>는 88올림픽부터 시작해 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까지 시민과 기자들이 찍은 사진, 전두환 정권이 정권홍보를 위해 만든 뉴스영화, 텔레비전 뉴스보도영상 등을 현재에 촬영한 이미지 컷들과 교차편집하며 차근차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초점을 맞추는 것은 88올림픽의 아이콘이었던 ‘굴렁쇠를 굴리는 아이’뿐만 아니라 지금은 텅 비어있는 올림픽 스타디움이며, 87년 6월 민주항쟁을 이끈 시위대뿐 아니라 공장과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익명의 사람들의 일상의 감정과 노동환경, 작은 정치적 움직임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5.18 광주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고 5.18 광주는 1980년에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역사들에 다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기억하려 한다. 실제로 영화 후반부에는 ‘Memorare(기억하라)’라는 합창이 반복해 울려 퍼진다. ‘Memorare’는 기존에 이미 기억된 것을 넘어서 기억하려는 의지이자 염원이다. 마지막 시퀀스에 등장한 88개의 피아노 건반이 모두 자기 소리와 존재의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역사관을 전달하기 위해 <둥글고 둥글게>가 지속적으로 각인하는 것은 존재의 본질 혹은 물질의 기본 요소이다. 오프닝 장면부터 작디작은 빛의 입자, 사라져가는 연기, (피아노 건반과 공장의 기계음을 비롯한 여러) 소리의 파동을 가능한 개별적으로 또렷하게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을 최대화하기 위해 장민승 작가는 전통적 영화 방식을 버린다. 빛을 스크린에 투사하는 프로젝터가 아니라 전류가 흐를 수 있는 유기물 고체를 이용해 자체 발광하는 디스플레이 OLED를 선택한 것이다. OLED는 빛의 전달 속도가 빨라 잔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선명한 화질을 제공한다. 이는 매우 작은 입자들까지도 그 존재를 도드라지게 할 뿐만 아니라, 빛은 빛으로, 어둠은 어둠으로 그 본질을 감각하게 하며 전기적 운동의 이미지로 표현되는 영화의 새로운 존재방식까지 고민하게 한다. 빛은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고 역사적 존재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시공간의 차원들을 연결하는 역할도 해왔다. 87년 민주항쟁 당시 시위대가 고가도로에 올라가 아래쪽에 있는 전경들을 방해하기 위해 거울을 들어 빛을 반사시키는 장면은 그런 면에서 매우 SF 영화적인 순간을 만든다. 이때 시위대의 시선에서 관객은 프레임 아래쪽에 배치된 전경과 유사한 위치에 놓이기 때문에, 시위대가 반사시키는 거울 빛은 스크린을 넘어서 관객을 직접적으로 비추는 효과를 만든다. 2차원에서 3차원, 과거에서 현재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반사된 빛은 ‘기억하라’는 기호를 전송하는 조난신호처럼 보인다. 오프닝에서 5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하나의 초가 타오르고 꺼지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이명박 정권 당시 용산참사의 망루 이미지를 구김이 있는 반투명한 스크린에 투사해, 제사에서 죽은 자를 위로하기 사용되는 종이인 소지(燒紙)처럼 태워 버리는 장면 역시 거기와 여기를 연결하는 빛들을 전면화한다. 이러한 영화적 순간들은 극장상영이 아니라 무대가 있는 공연형식(2020.11.28.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연)으로 상영되었을 때 더 극적인 방식으로 연출된다. 87년 민주항쟁 당시 최루탄이 터지는 장면에서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무대에 연무가 뿌려지고, 5.18 광주 당시의 흑백 필름이 현재 광주의 공간과 교차편집 될 때 여러 개의 핀조명이 무대에 떨어지면서 2차원의 스크린과 관객이 있는 3차원의 공간의 경계는 무너진다. 이미지로 표현되는 역사적 존재와 현실의 관객은 ‘둥글고 둥글게’라는 제목처럼 사이-공간에 공통의 대기로 감싸 안아지게 된다. 5.18 광주의 파운드 푸티지 영상이 본격적으로 삽입되는 영화의 후반부는 죽은 자들의 말을 대신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씻김굿에 가깝다.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기를 원하고 운명을 원망하는 구절로 가득한 시편을 후반부에 삽입하며, 당시의 광주시민들을 영웅적 투사로 세워 기념하기보다는 그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더불어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항쟁을 ‘소요와 난동’으로 규정하는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영화로 시작하는 후반부는 영화라는 매체의 윤리적 책임을 묻는다. 영화는 무엇을 보여주고 그렇지 않아왔는가? 광주를 비롯한 역사적 비극들에 영화의 책임은 무엇인가? 이후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폭행·살해당하고 부모들이 죽은 자식의 관을 붙잡고 우는 모습이 담긴 네가 필름들이 그 사건이 일어났던 현재의 공간과 함께 교차편집 된다. 계엄군에 의한 온갖 폭행과 고문이 일어났던 옛 광주교도소와 국군광주병원은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자연의 침입과 보호를 동시에 받고 있다. 카메라는 수평으로 뼈대만 남아있는 문과 문, 창문과 창문, 기둥과 기둥, 벽과 벽 사이를 이동한다. 이 움직임은 빛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플리커링(flickering) 효과를 만들며, 이 사적지들을 영화관 그 자체로 만든다.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현재 카메라의 움직임과 과거의 촬영된 흑백의 푸티지들이 교차편집 되며 관객들은 과거와 현재를 반복적으로 오가는 체험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공간 이동은 현존과 부재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어서게 한다. 장민승 작가는 ‘작가와의 대화’(진행 이은선)에서 ‘둥글고 둥글게’라는 제목에 대해 순환과 반복의 메타포이며, 광주시민들이 전라남도청 분수대를 에워싸고 있던 사진의 모양이고, 80이라는 숫자의 기호이고, 돌고 돌아 역사가 자꾸 제자리로 회귀하는 것에 대한 허망함이며, 한국 근대사의 경제성장에서 쇳물을 부어 제련하던 사람들의 노동을 가리킨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그것은 영화의 가장 기본 요소인 빛의 모양이기도 하다. <둥글고 둥글게>는 마지막 시퀀스에서까지 88개의 건반을 모두 보여주고 들려주며 그 존재들, 그리고 그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까지 모두 기억하려 한다는 점에서 철저히 유물론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역사와 영화를 제련하여 그 존재를 다시 묻고, 잊지 않으려 하고, 그들이 부재하는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대기 중에 남아있는 빛의 입자와 미세한 숨결을 매개해 위로하려는 의지, 그것이 88분간 이 프로젝트가 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빛의 입자와 미세한 숨결은 단순히 수동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그곳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증거이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거기의 사건과 존재들을 체험하게 하는 역사의 행위소(actant)가 된다.
1971년 한국 사람들이 섹스와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영화 시나리오 한 편을 소개한다. 그러니까 나라 밖에서는 < 시계태엽 오렌지 > < 프렌치 커넥션 > 같은 영화들이 나오던 시절이다. 감독은 < 독짓는 늙은이 > < 나무들 비탈에 서다 >를 감독한 최하원 , 신성일 과 고은아 가 부부로 나왔던 모양이다. 당시엔 멀쩡한 사람들이 만든 멀쩡한 영화였을 것이다. 아, 제목은 < 고백 >이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김현과 오지나라고 한다. 둘 다 가톨릭 신자이고 부부이고 주희라는 딸이 있다. 현은 ‘한성물산 에리뜨’ 사원이다. 영화는 이들이 금슬 좋고 행복한 부부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몇몇 클리셰들을 동원하는데 이건 소개할 필요가 없다. 현은 집 안의 인테리어를 손보기 위해 서강호라는 디자이너를 고용한다. 그런데 아내 지나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서강호는 현 앞에서 대놓고 그거 이전에 지나와 아는 사이였음을 고백한다. “옛날엔 참 예뻤읍니다. (비정한 냉소) 남자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죠.” 이 대사에 대한 현의 반응은 이후 영화의 진행 방향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이건 오늘 인용할 영화 대사 중 가장 덜 느끼한 것이다. “우리 집 사람은 내가 잘 알죠. 인형처럼 예쁜 바보였겠죠. 말도 제대로 못하는. 하하...” < 고백 > 포스터 물론 그럴 리가 없다. 알고 봤더니 지나와 강호는 옛날 연인 사이였고 (그러니까 71년 한국 사람들 언어로 번역하면 “순결을 빼앗겼고”) 심지어 지나는 강호의 아기까지 가졌었다. 회상 장면을 보니 엄격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딸이 한때 혈기로 반항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지나는 곧 강호에게 진력이 났고 강호는 다른 여자와 저지른 불륜 때문에 간통죄로 감옥에 들어갔다. 지나는 아기를 지우고 현과 결혼했다. 감옥에서 일찍 나온 강호는 지금 주희가 자기 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 딸 아이의 나이를 캔다. 조금만 계산해도 이게 말도 안 되는 의심이란 걸 알 텐데, 이 영화의 사람들은 깊은 생각을 못 한다. 강호는 지나를 스토킹하고 (한국어 사용자들이 이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90년대부터이니 당연히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게 스토킹이란 걸 모른다) 멋대로 집에 들어와 지나를 거의 강간하는 단계까지 간다. 이 정도만 해도 지나는 충분히 동정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데, 영화는 이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지나에게 이런 대사들을 준다. “난 미안하지만 당신에게 순결을 빼앗기지 않았어요. 그 순간 아무런 신비도 애정도 없었으니까요. 오직 고통 뿐이었어요. 그 순간 내게서 뺏은 건 순결이 아니라 하찮은 손을 벤 정도의 상처 뿐이었어요...” “남편은 내 생명의 전부예요. 남편 이외엔 난 돌처럼 굳은 석녀예요. 뭐든 누구든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추하고 더러워요!” 지나를 조건부 석녀로 만든 각본치곤 강호의 성폭행 시도 장면의 선정성은 현란하기 그지 없는데, 굳이 그 지문을 다 받아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의심하던 현도 사실을 알았다. 강호가 지나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현은 절규한다. “난 천사로 착각했었다. 천사, 천사. 그 썩어빠진 입으로 신앙을 얘기하고 인생이 가야할 바를 얘기하고 난 얼마나 병신처럼 네게 감동하고 감격했는지... 아! 위대해, 위대해!” “천사였었다, 천사!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순결과 고귀함의 상징이었다!” 현의 천사 타령 지금까지 아내를 천사라고 생각한 남자가 이런 일을 겪었으니 그의 다음 단계는 무엇이다? 이제 그는 바깥으로 싸돌아다니며 여자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억울했어. 여자라면 너 하나밖에 몰랐던 내가 더없이 초라해 보이드군. 여자를 샀지. 이 여자! 저 여자! 제각기 그맛이 다르다는 걸 경험했구! 당신것두 뭐 별게 아니였다는 것두 알았지.” 이러면서 그는 자기가 ‘산’ 여자들과의 경험을 하나씩 아내에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 「테스」스러운 상황은 멎을 줄을 모른다. 그는 계속 돌아다니면서 여자들을 만나는데 그 중엔 은아라는 여자 대학생도 포함되어 있다. 섹스신이 꽤 긴데, 여기서 중점이 되는 것은 역시 은아가 현에게 ‘순결을 주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는 아내와 섹스를 거부하는데 나중엔 아내의 옷을 벗기더니 “그놈에게 했던 것처럼 해줘!”라고 떼를 쓰다가 결국 아내를 구타하고 강간한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부부간 강간의 개념이 없었으니 이게 강간인지도 몰랐지만. 결국 현은 가출한다. 영화도 절반을 훌쩍 넘겼으니 슬슬 나는 현이 정신을 차리길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긴다. 하지만 암만 기다려도 현은 개선의 기미가 안 보인다. 억울함은 멎을 줄을 모르고 방탕함은 끝이 없다. 여기엔 또 은아의 친구인 명지를 꾀어서 자는 장면도 꽤 길게 그려져 있는데, 아마 최종 영화에서는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간 그의 여정의 절정은 세상 모든 여자들에 대해 쌍욕을 퍼부어대는 장면인데 굳이 그걸 받아적을 생각은 들지 않는다. 누구 좋으라고. 그래도 어떻게 이야기가 마무리 되긴 한다. 당연히 결말은 현이 각성을 하고 지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현이 저지른 일들을 보자. 과연 이 사람이 자신과 딸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가? 나로서는 지나가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로 잡고 다른 상대를 찾길 바랄 뿐이다. 아무리 70년대 한국이라고해도 현보다 나은 남자는 얼마든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