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보이즈
- 감독
- 야구치 시노부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츠마부키 사토시, 다마키 히로시, 미우라 아키부미, 콘도 코엔, 가네코 타카토시, 히라야마 아야, 다케나카 나오토, 미나베 카오리
2017년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이 드러나면서 미투 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전 세계는 물론이고 영화계도 큰 폭의 변화를 맞아왔다. 영화 산업 내부에서 여성들이 노골적으로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드러났고, 그동안 얼마나 적은 수의 영화가 여성의 크레딧을 달고 생산됐는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동안 영화계가 남성들만의 친목과 우정, 그리고 지배 카르텔 안에서 굴러왔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이후 변화는 극적이라 할만하다.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해가 갈수록 더 많이 만들어지고, 여성 캐릭터가 중심에 나서는 영화들의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영화도 줄어드는 분위기다. 최근 가장 두드러지는 경향은 여성 전기영화 붐이다. 방사능 연구에 혁혁한 공헌을 세워 두 차례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의 이야기 < 마리 퀴리 >(마르잔 사트라피, 2019), 멜버른컵이라는 경마대회에 우승한 최초의 여성을 다룬 < 라라걸 >(레이첼 그리피스, 2019), 여성의 정체성을 노래로 승화했던 호주 가수 헬렌 레디의 이야기 < 아이 엠 우먼 >(문은주, 2019),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스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삶을 네 배우(주로 줄리안 무어와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통해 들려주는 <더 글로리아스 The Glorias>(줄리 테이머, 2019), 1960년에서 70년대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했다가 FBI의 무차별 공격에 시달린 영화배우 진 시버그의 이야기 <시버그 Seberg>(베네딕트 앤드류, 2019), 어린 날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쓸쓸한 말년을 보내는 주디 갈랜드에 관한 < 주디 >(루퍼트 굴드, 2019) 등이 실존했던 굵직한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본 전기영화다. 폭스뉴스 사장 로저 에일스의 성추문을 그린 <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제이 로치, 2019)은 전기영화는 아니지만 실존하는 두 여성과 폭스뉴스에서 일했던 여성들을 일체화한 가공의 여성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유사한 면이 있으며, 1970년 미스 월드 대회 반대 투쟁을 벌였던 여성들의 < 미스비헤비이어 >(필리파 로소프, 2020)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전기영화적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화제의 미국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 Mrs. America>(크리에이터 다비 월러, 연출 안나 보덴, 라이언 플렉, 엠마 아산테, 로르 드 클레르몽-토네르, 자니크자 브라보, 2020)는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걸출한 인물들의 삶을 교차시키며 보여주는 '옴니버스 전기영화'로 볼 수 있다. 이들 전기영화/ 드라마가 중요한 이유는, 당연한 얘기지만 실존했던 인물들을 통해 여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영화는 온갖 제약을 뚫고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주인공을 다루거나(<마리 퀴리> <라라걸>) 여성의 삶을 바꾸기 위해 헌신하는 인물을 담아낸다(<아이 엠 우먼> <더 글로리아스>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미스비헤이비어> <미세스 아메리카>). 상당수가 여성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 또한 의미 깊다. <라라걸> 같은 경우 여성 스태프들의 힘만으로 만들어졌을 정도라고 한다. 결국 이들 여성 전기영화는 그 내용 뿐 아니라 생산 방식에서도 미투 운동 이후 세계 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2020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인 수산나 니키아렐리 감독의 < 미스 마르크스 >도 여성 전기영화다. 이 전기의 주인공은 무려 카를 마르크스의 막내딸 엘리노어 마르크스(1855~1898)다. 그 옛날 마르크스주의를 익혔던 사람들조차 채 알지 못했겠지만, 엘리노어는 카를 마르크스의 공식 후계자로 여겨지면서 19세기 중후반 온갖 분야에서 열렬한 활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1855년 런던에서 카를과 예니 폰 베스트팔렌 부부의 일곱째 아이(이중 넷은 사망했다)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우며 ‘사회주의 신동’의 면모를 드러냈다. ‘투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그녀는 14살 때부터 <자본론> 저술을 도왔고 16살 때부터는 아버지의 비서 역할을 하며 여러 투쟁의 현장을 쫓아다녔다. 성인이 된 뒤로 그녀는 당연하게도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나선 최초의 여성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 반열에도 올랐다. 또한 맹아 단계에 있던 여성운동에서도 가장 앞줄에 선 인물이었다. <미스 마르크스>는 엘리노어 생애의 후반기인 1883년부터 1898년까지의 삶을 다룬다. 이야기는 카를의 장례식식장에서 시작된다. 이 첫 시퀀스에는 이후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모든 인물이 등장한다. 돌아가신 카를부터 그의 영원한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미 사망한 큰 언니 예니첸의 남편 샤를 롱게와 아들 조니, 또 다른 언니 라우라의 남편 폴 라파르그,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 그리고 엘리노어의 사랑이자 원수가 되는 에드워드 에이블링까지. 이들 인물을 담은 영화는 세 개의 축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첫 번째는 운동가 엘리노어의 모습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급속히 퍼져감과 동시에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고 사회주의 사상이 막 퍼지기 시작하던 19세기 중후반, 카를 마르크스의 공식적 계승자는 절친 엥겔스였지만, 아버지로부터 유산 관리권을 물려받으며 사실상 '후계자'로 지명됐던 엘리노어 또한 이 '운동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영화는 엘리노어가 여러 투쟁에 참여하는 모습과 함께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 모습을 직접 화법으로 보여준다. 엘리노어가 <자본론>의 자본 축적 법칙에 관한 구절을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며 읊는다든지 당대로선 매우 급진적이었던 여성 평등에 관한 연설 장면을 꽤 길게 편집하는데, 이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바가 19세기를 넘어 현재의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듯 보인다. 두 번째는 가족들과 관련된 이야기다. 카를 집에서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했던 데무트에게는 프레데릭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데무트는 죽을 때까지 아들의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엘리노어는 여자 관계에선 방탕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엥겔스가 프레데릭의 친부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죽기 직전 엥겔스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면서 엘리노어는 혼란에 빠진다. 또한 언니 예니첸이 사망한 뒤 자신이 돌보고 있던 조카 조니가 아버지 롱게에게로 가면서 그녀의 외로움은 더욱 커진다. 세 번째 축은, 어쩌면 그녀의 삶에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실질적 남편 에드워드 에이블링과의 이야기다. 엘리노어에게 에이블링과의 사랑은 유부남과의 사랑이라는 당대의 틀을 깨는 파격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입는다. 마르크스 가문이나 엘리노어 마르크스에 관한 대다수의 전기가 얘기하는 것처럼, 에이블링은 엘리노어에게 아킬레스의 건과 같은 존재였다. 공식적으로 에이블링은 엘리노어와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곳곳에 설파한 운동가로 기록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엄청난 낭비벽과 쉴 줄 모르는 성편력으로 엘리노어의 삶을 자글자글 갉아먹었다. 이 영화에는 간략하게 언급되지만 에이블링은 미국 유세여행에서 고급 와인과 꽃을 마음껏 질러대며 비용을 낭비해 이들을 초청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을 곤경에 빠뜨렸고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엘리노어가 물려받은 유산 또한 펑펑 낭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노어는 인생의 거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에이블링을 신뢰하려 애썼고 그것이 그녀 삶 최대의 불운이었다. 영화는 가뜩이나 힘겨운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의 나날을 살아가던 엘리노어가 아버지의 과거사에 배신당하고 에이블링에게 연달아 결정타를 맞으면서도 분투하지만 끝내 스스로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사실, <미스 마르크스>에서 아쉬운 부분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워낙 파란만장하고 굴곡이 뚜렷한 삶을 살았던 주인공을 그려서인지 영화는 순간순간 에피소드를 단순 나열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운동가로서의 엘리노어 보다는 한 남성과 가족 관계에 휘둘리는 면모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듯하며, 워낙 많은 인물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다 보니 그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풍부한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감독은 나름의 '필살기'를 보여준다. 한때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나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던 전설적 가수 니코가 1980년대를 맞아 독자적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그린 여성 전기영화 < 니코, 1988 >(2017)로 데뷔한 수산나 니키아렐리는 자신의 두 번째 장편영화에서 전기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펼친다. 전기영화의 한계라 하면 실재했던 인물의 삶이라는 굴레에서 궁극적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일 텐데, 니키아렐리는 여러 장치를 통해 엘리노어 마르크스에게 새로운 '영화적 삶'을 부여하려 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은 후반부 엘리노어가 펑크록 사운드에 맞춰 격렬한 춤을 추는 장면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갑갑함과 버젓이 자신을 두고도 다른 여성과 결혼한 에이블링을 보는 괴로움에 둘러싸여있던 엘리노어는 이 장면에서 그동안의 고통을 벗어버리려는 듯 무아지경의 상태가 되도록 몸을 마구 내던진다. 어쩌면 진혼 의식이나 살풀이와도 같은 이 장면을 통해 니키아렐리 감독은 엘리노어 마르크스에게 순간의 해방을 선물한다. 그리고 이 한 장면은 앞서 언급한 여성 전기영화보다 이 영화가 한 발 앞선 지점이며, 어쩌면 이 지점이 앞으로 영화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P.S. 영화 속 ‘살풀이 의식’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미국 밴드 다운타운 보이즈 Downtown Boys의 음악이다. 영화의 문을 여는 장면에서 사용된 'Waves of History'부터 엥겔스가 사망하는 장면 직후에 흘러나오는 '인터내셔널가 L'Internationale'까지 여러 장면에서 곁들여지는, 좌빨 성향 농후한 이 미국 밴드의 거침없는 사운드는 어릴 적부터 "Go Ahead"라는 인생의 모토를 갖고 살아온 엘리노어 마르크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잘 드러낸다.
2005년 윤종빈 감독의 < 용서받지 못한 자 >는 군대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절대 따르지 않으면서 결국 다른 이들마저 불편하게 만든 남자.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다수의 문제인 것일까. 아니면 적당한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한 그의 문제일까. 저예산 영화인 <용서받지 못한 자>는 영화평론가협회와 디렉터스컷 영화상에서 신인남우상을 받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았다. 3년 뒤, 윤종빈 감독은 상업영화 < 비스티 보이즈 >로 돌아온다. <비스티 보이즈>는 군대만큼 폐쇄적인 강남 호스트바의 세계를 보여준다. 군대와 호스트바는 전혀 다른 이미지이지만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군대에서 제대한 승우는 집안이 몰락한 것을 알게 된다. 이미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던 누나 한별을 만나고, 남자친구인 재현의 소개로 승우는 청담동 호스트바에서 일하게 된다. 곱상하게 생긴 승우는 금방 인기를 얻으며 잘 나가는 호스트가 된다. 손님으로 온 호스티스 지원을 만나게 되고,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비스티 보이즈>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밑바닥을 보여준다. 낮에는 금융과 IT 산업의 중심인 강남이지만 밤에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신한다. 잘 나가는 남자들이 룸싸롱에서 호스티스를 끼고 술을 마신다. 남자들에게 시달린 호스티스들은 다시 호스트바를 간다.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살 수 있는 세계. 조금만 빈틈이 보이면 파고들어 ‘공사’를 치는 남과 여. 누가 포식자인지는 막판에야 알 수 있다. 승우는 새로운 세계에 잘 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원과 사귀면서 내심을 드러낸다. 승우는 이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잣집 아들로 자라났고, 취향도 있고, 폼도 잡고 싶은 승우는 이곳이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희들과 달라!” 그것이 < 비스티 보이즈 >의 비극이다.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 잠깐 일하는 거야.” 지원에게 그렇게 말한 승우는, 지원의 생활을 의심한다. 자기 말고 다른 애인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집에 남자가 들어온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길에서 지원을 때리기까지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어딘지 망각한 것이다. 아니 이 세계는 허상일 뿐이고, 언젠가 나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믿고 있다. 그렇기에 승우는 스스로 몰락한다. 승우와 대비되는 인물은 지원이 아니라 재현이다. 호스트바의 리더인 재현은 오로지 순간의 즐거움만을 쫓는다. 만나는 모든 여자는 ‘공사’의 대상이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계단일 뿐이다. 재현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는 빚쟁이뿐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재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또 누군가를 공사 쳐서 막으면 되는 일이니까. 재현은 이곳이 자신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만을 위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재현은 기꺼이 자신을 내맡기고 그 어떤 것에도 번뇌하지 않는다. < 비스티 보이즈 >는 사회의 밑바닥이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화려하고 돈도 많은 양아치와 화류계 인생을 적나라하게 아니 아주 날카롭게 한 지점을 파고든다. 현실을 거부하며 이상을 좇지만 결코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승우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재현. 빚쟁이에게 쫓기던 재현은 한별에게 애걸한다. 한별은, 자신을 담보로 빚을 내면서 재현에게 돈을 빌려준다. 그다음 장면은, 발리 구두를 사는 재현의 모습이다. 역시 이 인간은 변하지 않았구나. 누군가의 순정이나 진심 같은 것은 애초에 관심이 없는 ‘소시오패스’. 한별에게 받은 돈으로 명품 구두나 사 신는 한심한 놈. 하지만 오산이었다. 재현은 단지 사치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일본으로 도망가, 그곳의 호스트바에서 재현은 다시 모든 것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큰 공사를 쳤으니까 잠시 피해야 한다는 계략을 세우고 바다를 건넌 것이다. 교활함. 재현은 결코 화류계의 현란함에 휩쓸려 몰락하는 유형이 아니다. 타인을 짓밟고 대신 불구덩이에 누군가를 집어 던진 후 그의 머리를 짓밟고 일어서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들이 화류계만이 아니라, 사회의 밑바닥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전체에 득시글거린다. 그러니까 승우는 죽어야 한다. 지원을 의심하는 승우는 사실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다. 있지 말아야 할 세계에 있는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존재는 지원라고 승우는 착각하고 혼자 믿는다. 자신을 사랑하는 지원은, 이 세계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심으로 나만을 사랑하고, 나만을 바라보는 여인이 되어야만 한다. 유아적인 생각에 몰두한 승우는 결국 자신의 일상마저 파괴하게 된다. 여기가 아니라면서 다른 것을 바라보던, 그러나 이 세계에서 발을 뗄 생각을 하지 않는 승우는 반드시 파괴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다만 유감은 굳이 지원을 희생시키면서 승우를 몰락하게 만드는 설정이다. 그것이 아니었어도, 지원을 굳이 찾아가 해하지 않더라도 승우는 스스로를 파괴할 것이다. 승우의 결정은 10년 전의 한국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나만의 여인은 순결하고, 지고지순해야 한다는 소위 ‘한남’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반영하고 있으니까. < 비스티 보이즈 >는 단지 청담동 호스트바의 그들만이 아니라 보통의 한국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10년 전에 이미 한국 남자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망상의 바다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스티 보이즈>는 선구적인 영화다.
꿈과 희망! 얼마나 좋은 말인가. 사람은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단다. 밥만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살려고만 살면 살 수가 없는 거라더라. 이 말은 일정 부분 위로지만 많은 부분 기만이다. 꿈이라는 건 어차피 양념이라고, 그건 삶의 어드메에 조금 쟁여놓고 ‘나도 이런 게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만 되면 된다는, 그런 말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종종 말한다. 어영부영 살다간 이도 저도 안돼서 한 사람 몫도 못 하고 살 거라고. 이 말의 표본 같은 군상들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매형의 공장에 얹혀살며 하루하루 그냥 보내는 게 일인 일록(백승환). 뻔뻔함만은 트럼프 뺨치는, 미국 생활 20년을 어영부영 보내다 돌아온 예건(이웅빈). 여기에 희한한 몰골의, 하지만 묘하게 예의 바른 생선가게 직원 대용(신민재), 도나츠 푸드트럭을 하고 있는 준세(김충길)이 합세한다. 막 인생 꼬여서 곧 죽을 것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뭐 잘살고 있냐하면 그것도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운 그런 인생들. 이들은 예건이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남성 4중창 대회에 출전하기로 결의한다. 이쯤 되면 지질한 일상에서 분연히 일어나 열심히 하다가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그러면서 결국 대회에 나가 수상은 못 해도 뭔가 깨닫고서는 우리 존재 파이팅! 하는 이야기를 떠올릴 텐데, < 델타 보이즈 >는 그런 얘기가 아니다. 2시간에 가까운 영화에 연습하는 장면은 아마 10분도 안 될 거다. 노래하자고 모여서 일단 밥부터 먹자며 하여간 먹기는 오지게 먹는다. 라면 먹고 고기 먹고 술 먹고 취하고 화나고 인생 지지부진 어영부영... 그 관성 어디 가겠는가?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던 가장 큰 부분이 이것이다. 희망이니 목표니 하는 거, 그런 게 생기면 무슨 하늘의 계시를 받은 양 삶의 태도를 바꾸고 옛날부터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있었던 선수마냥 열심히 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 솔직히 좀 역겨웠다. 그럴 리가.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도 않을뿐더러, 천재일우의 기회가 와도 그놈의 습관 때문에 다 망가트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게 ‘평범한 인간’이라는 카테고리다. 문제는 또 있다. ‘꿈’이란 게, 정말로 입 밖에 꺼내놓고 뭔가를 하려는 순간, 그것이 삶을 몇 배는 더 피곤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 대용은 자주 가게를 비워 결국 스스로 일을 그만두게 되고, 준세는 함께 푸드트럭을 운영하는 아내와 크게 다툰다. 일록은 헛짓거리를 한다고 모욕하는 매형에게 반항하며 일하고 있던 그의 사업장을 떠난다. 아슬아슬하게 대충 ‘평범’을 유지하던 이들에겐 그저 작은 4중창 대회 참가라는 목표마저도 그 하중이 상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꿈을 양념의 위치에 두려고 했던 것일까? 팍팍한 인생에 가끔 한 번씩만 꺼내 툭툭 치면서 그래 나도 이런 게 있지, 하는 게 안전하니까? 그러나 이 바보 4인조는 멈추지 않는다. 이쯤에 와서는, 대회출전이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를 미련하게나마 긍정하려는 안간힘이다. 누가 어떻게 보든 상관없다. ‘나는 노래하고 싶을 뿐이다.’ 영화는 거창한 결말이나 메시지 같은 걸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삶이라는 게 마냥 거지 같지만은 않다는 경험. 나는 내가 생각한 것만큼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각. 딱 그 정도의 용기를 얻은 4명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 마지막, 마치 정말 무대에 오른 듯 옷까지 잘 차려입고 부르는 노래, ‘Joshua Fit the Battle of Jericho’가 끝나도 달라질 것은 없다. 오히려 상황은 시작 전보다 더 나빠졌다. 하지만 별로 걱정은 안 된다. 얼굴이 좋아졌다. 머리도 단정해졌다. 왠지, 예뻐졌다. 뭘 하든 전보단 잘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