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후드
- 감독
- 리차드 링클래이터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엘라 콜트레인, 패트리샤 아퀘트, 에단 호크, 닉 크로즈
나의 <보이후드>를 떠나보내며 근래 본 영상 중 가장 가슴이 두근거렸던 건 올해 블리즈컨에서 공개된 <디아블로4>의 시네마틱 트레일러였다. 호러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이 영상은 단편영화라 해도 손색없는 완성도로 보는 이를 홀린다. 트레일러는 게임을 위한 일종의 예고 영상이지만 게임 <디아블로>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영상 속 소환된 악마 릴리트의 오싹한 자태를 마주하는 순간 감각적으로 반할 만 하다.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시선이 아래로 흘낏 향할 때 형용하기 어려운 감흥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건 독립된 창작물로 충분히 즐길만한 영상이다. 하지만 <디아블로>의 설정과 사전 정보를 숙지할 때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쾌감을 선사하리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한 단계 나아가 이 영상을 접한 시청자는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 하면 릴리트의 오묘한 눈빛을 계속 떠올리며 또 다른 생생함을 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본래 시네마틱 트레일러의 목적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 <디아블로>의 시네마틱 트레일러는 9분 20초의 단독작품인 동시에 안팎으로 연결되는 의미망을 통해 확장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엉뚱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비슷한 사례를 픽사의 애니메이션 < 업 UP >(피터 닥터, 밥 비터슨, 2009)에서 발견한다. <UP>이 픽사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하긴 어려워도 <UP>의 초반 칼의 인생을 압축한 무성 몽타주 시퀀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열 개 남짓한 쇼트로 구성된 이 몽타주 시퀀스의 역할은 이후 전개될 영화를 위해 캐릭터의 전사(前史)를 설명해주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감히 단언컨대 이 우아한 몽타주 시퀀스는 <UP>의 전체 서사보다 훨씬 격렬하고 효과적으로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고전무성영화를 연상시키는 이 몽타주 없이 <UP>의 정점은 성립되지 않는다. 반대로 칼의 70년 인생을 3분 남짓한 시간에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시퀀스는 <UP>을 다 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완결성을 지닌 짧은 영상들에 감탄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문득 한 편의 영화를 어떻게 감상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한 편의 영화는 감독에 의해 창조된 고유의 호흡과 리듬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종종 단일영화에 구속되지 않는 순간들을 마주하며 ‘어떻게 즐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피어오른다. < 어벤져스: 엔드게임 >(2019)(이하 <엔드게임>에 별 네 개 반을 준 뒤 한동안 ‘영화 보는 안목이 형편없다’는 쓴 소리에 시달렸다. 별점은 최소한의 가이드라고 생각해온 입장에서 별점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비판이 따라올 걸 짐작하면서도 굳이 <엔드게임>에 높은 평가를 남긴 건 일종의 고백이자 포스트 시네마를 향한 탐색 때문이었다. <엔드게임>이 잘 만든 영화냐고 묻는다면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어렵다. 단순히 기계적인 완성도로만 놓고 봐도 전작인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2018)가 좀 더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인피니티 워>가 발상을 뒤집어 타노스를 중심으로 히어로들의 역학관계를 재배치했다면 <엔드게임>은 벌려 놓은 이야기들을 수습하는데 공을 들인다. 전 우주를 무대로 하면서 흩어진 이야기들을 모아나가는 방식 역시 <인피니티 워>가 <엔드게임>보다 좀 더 영리하고 실수가 적다. <인피니티 워>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대단원의 서막답게 이야기의 탁월한 균형 감각이 빛난다. 수많은 캐릭터를 적재적소 배치하는 조율 능력이야 말로 오늘날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완성한 원동력이다. 반면 <엔드게임>은 서사는 좋게 말해 안정적이고 나쁘게 보자면 다소 밋밋하다. 우연과 행운이 남발되는 등 이야기의 구멍이 꽤 있는 편이고 토니의 장례식과 캡틴의 은퇴 등 후반부 사족도 적지 않게 늘어진다. 무엇보다 <인피니티 워>가 깔아놓은 무대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놀라움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나를 뒤흔든 쪽은 <엔드게임>이었다. <엔드게임>에는 11년간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반칙 같은 감동이 있다. 나 역시 개별 영화는 각각의 성취로만 판단되어야 한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거장의 작품이라고 더 보탤 것도 없고 신인의 영화라고 얕봐서도 안 된다. 영화는 러닝 타임 안에 구축된 독립된 세계이며 온전히 영화 내적인 완성도로 평가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엔드게임>을 한 편의 영화로만 감상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상영 시간 내내 불쑥불쑥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다른 영화들이 치고 들어와 마치 추억의 앨범을 꺼내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간 토니 스타크가 아버지를 대면할 때 < 아이언맨3 >에서 홀로그램으로 재현된 자신의 기억을 마주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배불뚝이가 된 토르가 과거의 아스가르드로 몰래 잠입할 땐 < 토르: 라그나로크 >는 물론 고전 오페라 같던 < 토르 > 1편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캡틴 아메리카가 < 어벤져스 > 1편 시점의 스타크 타워로 잠입해 들어가는 장면은 또 어떤가. 캡틴이 귓속말로 “헤일, 하이드라”라고 속삭이며 < 윈터 솔저 >의 유명한 엘리베이터 씬을 재현할 때의 즐거움을 개별영화에서 느낄 수 있을까. <엔드게임>은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연속극의 최종장에 가깝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11년의 세월동안 개별영화 간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관을 이어 붙여 거대한 우주를 창조했다. 이건 단순히 설정과 정보를 공유한다는 차원을 넘어 관객의 시간이 축적되어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체험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들은 일견 매우 느슨하면서도 강력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개별영화로도 충분히 즐길 만 하지만 22편의 경험들이 축적되었을 때 발생하는 쾌감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이 새로운 종류의 어트렉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통적인 영화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혹은 평가 절하 할 수 밖에 없다. <엔드게임>을 철저히 개별영화로 논하자면 무난한 완성도의 기획영화의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3시간의 상영시간이 기계적인 조립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 아이리시맨 >(2019)이 비슷한 3시간동안 한 호흡으로 감싸여 있다면, <엔드게임>은 1시간은 분절된 3편의 에피소드가 연속되는 형태다. 첫 1시간은 타노스의 핑거 스냅으로 전 우주의 절반이 날아간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상실감을 다룬다. 이 에피소드는 한적한 행성에서 소임을 마치고 농사를 짓고 있는 타노스의 목을 날려버리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문제의 원인을 제거했지만 상처는 회복할 수 없고 남겨진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을 버텨야만 한다. 블록버스터 프렌차이즈 영화에서 이렇게 무겁고 정적인 분위기로 시작하는 건 이례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작에서 한껏 끌어올렸던 피날레의 분위기를 차분히 가라앉힌다는 점에서 영리하고 합리적인 판단이다. 이어지는 1시간은 시간여행을 통해 인피니티 스톤을 모아오는 미션을 보여주는데 <어벤져스> 초창기의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있는 에피소드다. 무엇보다 이 파트는 11년을 이어온 팬들을 위한 서비스라는 인상이 강하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지난 시간으로 돌아가 숨겨진 얼굴을 다시 대면하는 건 개별영화 바깥으로 체험을 확장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단원의 1시간은 그야말로 블록버스터답게 물량을 쏟아 붓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미리 본 미래의 계획이 발동하여 모든 히어로들이 한 자리에 집결할 때 짜릿한 전율이 관통한다. 이건 <엔드게임>의 피날레가 아니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11년 동안 준비한 피날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난한 완성도와 쉽게 가라앉히기 힘든 흥분 사이에는 거대한 괴리가 있다. 이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어떻게 설명할지가 나의 고민과 질문이었다. 다시 돌아가, 명쾌한 답을 낼 순 없었지만 우선 내가 느낀 ‘감정’에 충실하기로 하고 높은 별점을 매겼다. 시간이 지나 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 얼마 전 마틴 스코세이지는 <아이리시맨> 개봉과 함께 마블영화에 점령된 극장가에 일침을 가하며 ‘시네마’ 논쟁을 촉발시켰는데 그가 자신의 견해를 밝힌 뉴욕타임즈의 기고문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글의 제목은 “왜 마블영화는 시네마가 아닌가”였지만 나는 거꾸로 거기서 마블영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마틴 스콜세이지는 말한다. “히치콕 자체가 하나의 프랜차이즈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그는 우리의 프렌차이즈였다. 새로운 히치콕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이벤트였다....(중략) 극장 안에 형성된 관객과 영화 사이의 팽팽한 교감 혹은 화학작용 때문이었고, 이를 실제로 체험하는 것은 가히 짜릿했다.” 여기서 ‘히치콕 영화’를 ‘마블 영화’로 바꾸면 이상한 짓일까. <엔드게임>은 21세기의 프렌차이즈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이벤트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 <엔드게임>과 같은 종류의 영화들은 극장이란 한정된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 바깥으로 촉수를 넓혀나간다는 점이다. 개별영화가 가지는 팽팽한 교감과 화학반응은 분명 <아이리시맨>과 같은 시네마(좁혀서는 내러티브 영화)에 비해 떨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엔드게임>은 3개의 분리된 에피소드를 느슨하게 조립한 구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분리된 에피소드들, 조각난 시퀀스들은 몇 년 전 다른 영화에서 뿌려놓은 떡밥들을 회수하고 연결되기 시작한다. <엔드게임>은 관객의 체험 속에서 <아이언맨>의 특정상황과 연결되고, < 앤트맨 >의 장면들과 이어지며, < 닥터 스트레인지 >의 세계와 겹쳐진다. 요컨대 이것은 한 편의 영화가 아니다. 한 편의 영화, 극장이라는 밀폐된 시공간으로 볼 땐 느슨하고 조악해보였던 조각들이 11년의 세월동안 뿌려놓은 다른 조각들을 소환하며 전혀 다른 종류의 서사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엔드게임>을 한 편의 영화로 감상할 수 없다. 굳이 비슷한 사례를 찾는다면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12년 동안 촬영한 < 보이후드 >(2014)를 봤을 때 유사한 감흥을 느꼈다. <보이후드>에는 서사의 절정이 없다. 매 순간 진실이 묻어있고 각자의 정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관객을 향해 열려 있는 영화다. <보이후드>가 시간을 압축하는 방식을 통해 시간 흐름 자체를 목격할 수 있다면, <엔드게임>은 11년의 체험과 축적을 통해 각자의 시간을 기억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아이언맨>의 탄생을 목격한 내가 핑거스냅을 튕기는 아이언맨의 대사 ‘나는 아이언맨이다’를 듣는 다는 건 단순히 한 편의 영화 안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엔드게임>이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라고 칭송하고 싶진 않다.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 미학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는지도 아직은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이른바 세계가 ‘변했다’는 사실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아니 <엔드게임>은 비록 영화의 껍질, 영화산업의 육체를 빌리고 있지만 이미 ‘(전통적인 개념의) 영화가 아닌 어떤 것’이다. 21세기 프렌차이즈의 결과물을 보며 새로운 종류의 체험이 당도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엔드게임>의 피날레에서 느꼈던 전율은 단지 3시간의 결과물이 아니라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 어느덧 11년의 세월동안 길들여진 끝에 나온 보상이었다. 가치판단을 잠시 미뤄두고 이야기해보자. 이제 영화를 온전히 영화라는 틀 안에 가둬놓을 수 있을까. 여전히 전통적인 개념을 갈고 닦아 나가는 시네마들도 있겠지만 동시에 이제 극장의 문이 열려버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우주의 탄생 역시 사실 우연이었다. <아이언맨>의 성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오늘의 결과를 낳았다.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끝은 필연과 의지의 산물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니 드디어 한편의 영화가 끝이 났다. 물론 또 다른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계속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다시 그 세계에 첫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교통사고처럼 나를 덮쳤던 2008년 <아이언맨> 이후 11년 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즐거움만큼이나 피로도 안겨주었다. 어쩌면 <엔드게임>을 향한 나의 찬사와 박수에는 이별의 홀가분함도 약간은 묻어 있으리라. 이렇게, 아니 이제야 한 편의 영화를 떠나보낸다.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F/02184 청춘, 성장, 정체성. 여기까지만 들으면 풋풋하고도 쓰라린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는 시절을 그린 성장영화들이 떠오른다. 구스 반 산트의 < 파라노이드 파크 >나 이와이 슈운지의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같은. 그런데 이 단어들 사이에 섹스를 던져 넣으면 방향이 미묘하게 뒤틀린다. 섹스를 통해서 젊은 날의 방황을 진지하게 그리는 영화들도 더러 있지만 청춘과 섹스라면 대개 ‘청춘 섹스 코미디’로 연결된다. 도발적이거나 유희로 풀어내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청춘 섹스 코미디의 시작이라면 1983년에 개봉한 < 그로잉 업 >을 들 수 있다. 고등학교 남자애들이 성에 눈을 뜨며 벌어지는 갖가지 이야기들. 당시에는 할리우드 영화라고 생각하고 봤는데 후일 알고 보니 이스라엘 영화였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남녀가 함께 입영 훈련을 하는 장면도 있었다. 야하기는 했지만 가슴 뭉클하기도 했는데, 1978년 이스라엘에서 개봉했을 때 인구의 40%가 본 화제의 국민영화였다. 골든글로브 해외영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제임스 딘의 < 이유 없는 반항 >(1955)이나 < 폭력교실Blackboard Jungle >(1955)을 비롯하여 이전에도 청춘영화는 있었지만 하나의 장르로서 형성된 것은 1980년대였다. < 그로잉 업 >의 영향을 받아 더욱 선정적이고 머리는 비운 <포키스>가 나온 것이 1981년. 1980년대에는 청춘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수작도 많았다. 에이미 해커링의 < 리치몬드 연애소동Fast Times at Ridgemont High >(1982), 프랜시스 코폴라의 < 아웃사이더 >(1983), 폴 브릭먼의 < 위험한 청춘Risky Business >(1983) 등등. 한때 청춘영화의 셰익스피어라고 과찬을 받았던 존 휴즈는 1984년부터 <아직은 사랑을 몰라요Sixteen Candles>(1984) < 브렉퍼스트 클럽 >(1985) < 페리스의 해방Ferris Bueller’s Day Off >(1986) 등을 만들었다. 청춘영화에 성적 체험이 빠질 수는 없었지만 두드러지게 섹스를 내세운 영화는 < 리치몬드 연애소동 >과 < 위험한 청춘 >이다. 1995년에 < 클루리스 >를 만들기도 했던 에이미 해커링은 숀 펜, 제니퍼 제이슨 리, 피비 케이츠를 출연시킨 <리치몬드 연애소동>에서 남자의 성적 모험만이 아니라 여성의 관점에서 청춘의 한 시절을 그려냈다. <위험한 청춘>은 아이비리그에 진학하려던 모범생이 콜걸을 만나 대학을 때려 치고 포주로 나아가는 ‘위험한’ 결말을 보여주었다. 주인공은 무려 톰 크루즈. ‘청춘 섹스 코미디’는 어느 정도 감동과 후련함을 주지만 그 이상은 결코 쉽지 않다. < 아메리칸 파이 >(1999)는 아주 재미있고, 지나간 시절의 추억과 감동을 함께 주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성적 충동은 때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일상을 보내지는 않으니까. 야한 책과 영화를 보고 자위를 매일 할지라도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무엇인가를 한다.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거나 배신하기도 하고, 왕따를 당하며 괴로워하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불안으로 방황하기도 한다. 그런 고뇌와 일상의 풍경을 스쳐 지나면서 섹스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청춘 섹스 코미디는 애초에 한계가 명확하다. < 에브리바디 원츠 썸!! >도 제목만으로는 그랬다. 누구나 ‘썸’을 원해. 일단 이성을 만나고, 연애 이전에 탐색을 하며 섹스를 하고 미래로 나아갈까 말까 하는 단계. 기왕이면 연애 이전에 썸만 수없이 타면 더욱 좋지 않을까? 연애는 아주 아주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 훗날 하면 되는 것이고. 제목만 듣고 <에브리바디 원츠 썸!!>은 가벼운 만남과 섹스를 보여주는 청춘 섹스 코미디이겠지, 라고 생각했다. 감독이 리차드 링클레이터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감독을 알고는 바로 선입견을 내렸다.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연출한 청춘 섹스 코미디의 방점은 당연히 ‘청춘’일 테니까. 1991년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데뷔작 < 슬래커 >는 다수의 젊은이들을 따라간다. 에피소드마다 이야기가 흐르고, 자잘한 에피소드들이 섞이고 뭉쳐서 커다란 이미지로 남게 한다. 다음 작품인 < 멍하고 혼돈스러운Dazed and Confused >(1993)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다양한 청춘의 풍경을 그려낸다. 스치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다. 이후 < 비포 선라이즈 > 3부작과 아카데미 수상작인 < 보이후드 >로 대중의 사랑과 평단의 찬사를 모두 얻은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영화는 순간을 포착하면서, 그 순간들이 어떻게 거대한 흐름으로 수렴하는지를 보여준다. 개별적이고 파편적이면서도 거대한 그림의 조각으로 맞춰지는 영화. < 에브리바디 원츠 썸!! >은 대학 개강을 하기 전, 3일 15시간의 풍경을 보여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제이크가 차를 몰고 대학으로 가는 장면에서 낵의 ‘마이 샤로나’가 흘러나온다. 1980년 8월의 풍경이다. 전작인 < 보이후드 >의 마지막 장면이, 성장한 소년이 대학에 입학하여 차를 타고 떠나가는 것임을 생각하면 일종의 연장선이다. 혹은 < 멍하고 혼돈스러운 >이 1976년의 고등학생들 이야기였던 것을 기억한다면 <에브리바디 원츠 썸!!>은 그들이 대학에 들어가 겪는 사흘간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동시에 리차드 링클레이터 자신이 겪었던 1980년의 대학이기도 하고. 명목상의 시간은 <멍하고 혼돈스러운>의 다음이고, 상징적으로는 <보이후드>의 연속선에 놓여 있다. 고등학교에서 투수였던 제이크는 대학에서도 야구부 활동을 한다. 제이크의 동료, 선배들은 모두 개성이 강하다.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사소한 내기에 지는 것도 싫어하고, 후배들을 은근히 경쟁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에서만은 일치단결한다. 여자를 만나는 것. 디스코 클럽, 컨트리 클럽, 펑크록 공연 그리고 코스튬 파티까지 오로지 여자를 만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그들의 목적은 섹스다. 뭐 어떤가. 혈기왕성한 스무 살의 청년인데.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다. 제이크는 말한다. 디스코, 컨트리, 펑크를 오락가락하다 보니 뭐가 진짜이고 뭐가 아닌지 헷갈린다고. 신입생인 뷰터도 말한다. 대학은 생각할 것이 너무 많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 만약 프로에 가지 못한다면, 그들의 인생은 확 달라질 것이다. 더 이상 그라운드에 오르지 못하고, 공부를 하거나 직장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공은 중요하지 않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대학에 오니 주전에 끼기도 쉽지 않다. 제이크가 좋아하게 된 베벌리는 공연 예술 전공이다. 고등학교 때는 다들 주연이었는데 이제는 캐스팅만 되어도 감지덕지다. 사흘 동안, 선배들과 대학이라는 공간을 만나서 알게 된다. 이제부터가 진짜 인생의 시작이라는 것을. 나이가 엄청 많은, 좋았던 시절을 버릴 수 없어 대학을 떠도는 월러비는 말한다. “너희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해. 자신을 찾는 경험을 두려워하지 마.” 하지만 그 역시 진짜 자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만 있다. 월러비가 쌓아놓은 <환상특급>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제이크가 한 에피소드를 말한다. 어떤 여자가 예뻐지기 위해 성형을 하려고 하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가 아름답고 다른 이들이 엉망이었다고. 그들은 모두, 자신이 별종이라고 생각한다. 사춘기 때는 대개 그렇다. 나는 왜 이렇지? 나는 누구지? 어디로 가야 하지? 뭐가 맞는 것일까? 아무리 이성을 찾아 하룻밤을 탕진하며 생각을 멈춰도 마음속의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월러비는 원소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결합방식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말 많은 핀은 재료가 아니라 재료를 느끼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그들 자신이 아니다. 남들이 평가하는 무엇, 나도 알고 있는 나 자신, 그것은 이미 존재한다.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결합해 갈 것인가. 대학은 찾아가는 과정이다. 어른이 된다는 역시. 마지막 코스튬 파티에서 그들은 평소의 모습 그대로 간다. 하지만 알고 있다. 지금의 모습 자체도 가면이라고. 우리는 항상 가면을 쓰고 있고, 어쩌면 가장 파티에서의 가면이 자신의 진짜 얼굴이거나 미래인 것일지도 모른다. 투수는 혼자 마운드에 올라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지만, 또한 팀원들의 도움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나를 찾는 것과 동시에 타자를 만나고 어우러져야 한다. 그게 대학이고, 세상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1980년대는 싸워야 하는 대상이 사라진 시대였다. 68혁명의 여파가 이어지던 낙담과 쾌락의 70년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 모든 것이 반짝거리고 부유하는, 텅 빈 세계. 그러나 젊은이들의 존재는 언제나 똑같다. 시대가 변해도, 그들의 불안은, 그들의 고독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 에브리바디 원츠 썸!! >은 결국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경험했던 1980년대의 번들거리는 풍경을 통해 그려낸 청춘의 표상이다.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말해준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지를.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청춘 영화들은 언제나 별종들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결국은 ‘Freak’ 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많은 여자들과 썸을 타다가 베벌리를 만난 제이크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쓴 에세이에 대해서 말한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빗대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의미가 생긴다고. 세상이 뭐라던 내가 할 일을 하고, 좋든 나쁘든 다가올 것을 받아들인다고. 베벌리도 말한다. 어떤 일에 열정을 갖는 것은 아름답지 않아? 그렇기에 바보처럼 보일 배짱을 가지고 예술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아마도 수없이 꺾이고 나뒹굴겠지만 시지프스를 떠올리면서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니까. < 에브리바디 원츠 썸!! >은 청춘 섹스 코미디다. 사려 깊고, 원숙한 시선으로 방탕한 청춘의 사흘을 그려낸 섹스 코미디. 하지만 인생은 그보다 길다. 사흘만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한순간의 섹스에 대한 욕망과 바보 같은 열정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무모하고도 요란한 청춘의 순간을 절묘하게 이어붙이면서 새벽, 아침의 개강 순간으로 관객을 끌어간다. 그건 파티가 끝난 후의 적막이 아니라 일상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작의 열정이다. 아침의 열정. 섹스가 끝난 후 남아 있는 미열을 느끼며 미소 짓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애초 작성한 리스트에는 23편의 영화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10편만 선정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여러 편의 영화를 제외해야 했다. 2014년의 영화로 선택한 < 보이후드 >의 리뷰에 앞서 전체 리스트를 수정 공개함을 알려 드린다. 이용철 영화평론가의 23편 2014년의 영화 보이후드 Boyhood , 리처드 링클레이터, 2014 다섯 편의 장르영화 나를 찾아줘 Gone Girl , 데이비드 핀처, 2014 더 홈스맨 The Homesman , 토미 리 존스, 2014 다크 밸리 Das Finstere Tal , 안드레아스 프로차스카, 2014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The Wolf of Wall Street , 마틴 스콜세지, 2013 콜드 인 줄라이 Cold in July , 짐 미클, 2014 로버트 패틴슨이 나온 두 편의 영화 더 로버 The Rover , 데이비드 미쇼드, 2014 맵 투 더 스타 Maps to the Stars ,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2014 다섯 편의 아트하우스 더 원더스 Le meraviglie , 알리체 로바허, 2014 도원경 Jauja , 리산드로 알론조, 2014 실스 마리아 Clouds of Sils Maria , 올리비에 아싸야스, 2014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 장 뤽 고다르, 2014 에덴 Eden , 미아 한센 로브, 2014 두 편의 다큐멘터리 야만의 땅 Pays Barbare , 예르반트 지아니키안/안젤라 리치 루키, 2013 위로공단 , 임흥순 , 2014 두 편의 한국 드라마 절경 , 남근학 , 2014 한여름의 판타지아 , 장건재 , 2014 여섯 편의,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한 영화 호스 머니 Cavalo Dinheiro , 페드로 코스타, 2014 사랑스러운 자매 Die Geliebten Schwestern , 도미닉 그라프, 2014 프랑스 공주 La Princesa de Francia , 마티아스 피녜이로, 2014 아프리오리 Mula sa kung ano ang noon , 라브 디아즈, 2014 신이 되기는 힘들다 Trudno Byt Bogom , 알렉세이 게르만, 2014 위플래쉬 Whiplash , 데미언 차젤, 2014 (링클레이터는 < 스쿨 오브 락 >의 개봉 후에 아역 배우들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영화지 「사이트 앤 사운드」와의 인터뷰 도중 그 편지에 관한 질문을 받고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멋진 시간을 함께 보냈음을 상기시키는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배우의 길을 걸어가라고 부추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의 인생에서 보낸 하나의 좋은 챕터가 곧 가장 좋은 시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당신 곁에 머무는데, 나는 그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긍정적인 순간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그게 완성된 것이 아닌 경험을 위한 것이라 여긴다. 부모의 이혼으로 메이슨과 누나 사만다는 엄마와 함께 산다. 아빠는 멀리 알래스카에서 일한다고 했다. 뒤늦게 학업을 시작한 엄마는 공부와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친정이 있는 휴스턴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한다. 때마침 아빠도 근처로 거처를 옮긴 차였다. 이후 12년 동안의 시간 흐름을 담은 < 보이후드 >는 제목 그대로 메이슨의 소년기이자 누나 사만다의 소녀 시절 이야기이고 엄마와 아빠의 이혼의 기록이다. 촬영은 실제로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진행되었으며, 그 사실만으로도 <보이후드>는 충분히 감탄을 불러낼 만하다. 링클레이터는 이미 ‘비포 연작’을 통해 (동일한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과 그들의 관계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잘 보여주었던 감독이다. 그리고 < 스쿨 오브 락 >(2003)이나 < 배드 뉴스 베어즈 >(2005) 같은 장르영화를 만들 때면 어김없이 어린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던 사람이다. 그에게 <보이후드>가 뜬금없는 작업이 아니란 이야기다. 기실 영화가 12년 정도의 시간 흐름을 담았다고 해서 무조건 열광할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마이클 앱티드는 1964년부터 지금까지 50년이 지나도록 ‘업(Up) 연작’을 계속 연출하고 있다. 소년의 성장을 20년 넘게 극화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투안 두아넬 연작’은 또 어떤가. 그래서 <보이후드>에서 우선 관심이 갔던 것도, 시간 속에서 인물을 포착하는 감독의 태도였다. TV 프로그램의 한 코너로 시작된 ‘업 연작’은 매번 유명한 문구 - ‘7살 때까지 아이를 맡겨 달라. 그러면 인간을 보여주겠다’ - 로 문을 연다. 이 문구를 살짝 바꾸면 곧 < 보이후드 >의 모토가 된다. ‘7살짜리 꼬마를 맡겨 달라. 그러면 소년 시절을 보여주겠다.’ <보이후드>를 본 평자들은 누구나 ‘업 연작’의 영향을 이야기하며, 링클레이터 또한 인터뷰에서 앱티드의 영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처지였음을 내비친 적이 있다. 2012년의 <56 업>까지 매 7년마다 한 편씩의 영화로 발표된 ‘업 연작’은 현실의 인물에서 ‘가족, 친구, 애정, 교육, 계급, 타자, 빈부, 정치, 기회, 종교, 도덕, 꿈’을 읽어내 영국의 미래를 논하고자 했던 작품이다. 사회의 축소판이자 거대한 실험장으로 발전한 ‘업 시리즈’의 감동은 삶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나온다. 신비롭게 자유자재로 흘러가는 삶의 전개 방향이야말로 다큐멘터리로서 ‘업 시리즈’가 드러낸 진정한 가치인 것이다. <보이후드>의 주인공 엘라 콜트레인은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는 평범한 6살 아이였으며 영화가 만들어지는 12년 사이에도 배우로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보이후드>는 콜트레인과 직업 배우들이 서로 소통하며 찍은 반 다큐의 느낌을 준다. 링클레이터는 매해 소년에게 일어난 변화를 영화에 반영했음은 물론 콜트레인이 직접 소년기의 대사를 풀어낼 수 있도록 이끌었다고 한다. ‘업 연작’이 시간의 경과 위로 사회와 문화의 지도를 그리려 한 작품이라면, <보이후드>는 한 소년의 얼굴 그리기에 더 치중한 작품이다. 긴 세월에 걸쳐 콜트레인이라는 배우와 메이슨이라는 인물이 은연중에 작가처럼 참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년의 성장을 연대순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 보이후드 >는 ‘앙투안 두아넬 연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트뤼포는 앙투안 역할을 맡을 배우로 어린 장 피에르 레오를 선택했고, 감독과 배우와 인물이 어우러진 다섯 편의 영화 - < 400번의 구타 >(1959), < 앙투안과 콜레트 >(1962), < 훔친 키스 >(1968), < 부부의 거처 >(1970), < 사랑의 도피 >(1979) - 가 긴 시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그런데 트뤼포 자신이 말했듯이 ‘앙투안 두아넬 연작’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드라마이며, 그러한 성격은 <보이후드>의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지향점과 어느 정도 상치되는 부분이다. 꼭 그 점이 아니어도 나는 <보이후드>와 비교되어야 할 작품이 ‘앙투안 두아넬 연작’이 아니라 장 외스타슈의 < 나의 작은 연인들 >(1974)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소년 다니엘의 딱한 형편은 <보이후드>의 메이슨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니엘은 할머니와 살다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 남부로 이사 가게 된 소년이며, <나의 작은 연인들>도 소년 다니엘이 성장해 어른의 문턱에 이르기까지를 다룬다. 단, 외스타슈가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링클레이터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보이후드>와 상반되게) <나의 작은 연인들>은 극 중 소년의 외모가 별로 변하지 않은 상태를 지속시키며 외부의 세계와 단절된 인상을 강화한다. ‘앙투안 두아넬 연작’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나의 작은 연인들>을 굳이 불러내 비교하려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짧은 장면 때문이다. 다니엘은 한 소녀와 노변 풀밭에 누워 있다. 곧 어른이 돼 순수의 시대와 작별을 고할 소년은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그의 눈에서 금방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다. 이 장면은 <보이후드>의 첫 쇼트 - 여섯 살 메이슨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 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흡사 링클레이터는 고통스럽고 아픈 소년 시절을 보낸 다이넬의 시간을 돌려 메이슨이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른 태도로 새롭게 쓰려는 듯하다. 그는 감상에 빠지지 않도록 애쓴다. 자신을 포함해 당신들도 소년 시절의 통증을 겪었음을 알고 있는 까닭에, 극에 뛰어들어 아파하는 척하지도 않는다. 링클레이터 영화의 특징은 ‘단순한 자연미’다. 장르 영화를 찍을 때도 그렇지만, 그것이 더 잘 드러나는 경우는 그만의 소품을 찍을 때다. < 비포 미드나잇 >(2013)이 몇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었는지 확인해보라. 영어에 ‘Don’t make a scene(야단법석을 떨지 마라)’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의미는 달라도 링클레이터 영화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매년 사나흘 동안 제작진과 배우들이 모여 15분 분량의 촬영을 거듭한 < 보이후드 >에는 사건이라 부를 만한 게 일어나지 않는다. 상업영화로서 너무 심심해 보일까 걱정해야 할 판이다. 어느 날 어느 십 대 소년의 집을 방문해서 목격한 장면을 손질하지 않고 내놓는 것, 그 이상을 영화는 욕심 내지 않는다. 지금 장면이 어떤 해에 벌어진 일인지 구분해 밝히지 않기에, 흐르는 음악과 열중하는 게임과 구경 간 스포츠 경기와 정치적 이슈에 대한 이야기 등으로 대충 어느 정도 지점의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어떤 장면에서는 배우가 카메라를 보는 실수를 하는데도 숨기지 않아 자연스러운 맛을 강조하기도 한다. 부모를 비롯한 인물들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소년이 겪을 성싶은 일들이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게 다인 것 같은데 <보이후드>는 시간의 에센스를 놓쳤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그건 소년의 얼굴 덕분이다. 그냥 몸이 커지고 머리 스타일이 바뀌는 게 다가 아니다. 시간이 흘러가고 세상이 변화하면서 흘린 흔적은 차곡차곡 쌓여 메이슨의 얼굴에 자국을 남긴다. 16살 생일을 맞는 해에 메이슨의 얼굴은 밉다. 이전까지 오랫동안 사랑스러운 모습을 유지했던 콜트레인은 무슨 일인지 잔뜩 우울한 표정과 지저분한 얼굴로 메이슨이란 인물을 연기한다. 사춘기여서 그랬을 터인데, 링클레이터는 일부러 예쁘게 분장하지 않았고, 콜트레인도 통과 중인 시기가 입혀준 표정을 거짓 마스크로 가리지 않는다. 링클레이터는 < 보이후드 >를 찍는 과정이 결과물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끝을 맺을지 궁금했다. 상영시간이 165분인 영화가 대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에서 막을 내릴까. 평범한 영화였다면 메이슨이 차를 몰고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끝났을 것이다. <보이후드>로 인해 유명해진 인디그룹 ‘패밀리 오브 더 이어’가 부른 <히어로>가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나는 당신이 바라는 큰사람이 될 마음이 없어요. 나는 여기저기서 사람들과 싸우고 싶어요. 나를 놓아줘요’라는 가사가 엄마의 품을 떠나는 장면과 썩 어울려 이 정도면 엔딩으로 훌륭하다 싶었다. 끝없이 뻗은 텍사스의 도로를 보며 누구나 감동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링클레이터는 그런 감상을 빚을 생각이 없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소년은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며, 배경음악으로 ‘콜드플레이’의 <옐로>가 흐른다. 노래의 가사는 ‘별을 바라봐, 별은 너와 너의 행동을 모두 보고 있어’이다. 소년이 무엇을 보는지 모르는 나는 대낮인데 설마 별을 보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다. 또는 내 생각과 달리 소년이 자신만의 별을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소년이 보는 것은 화면 바깥에 놓인 무엇이었다. 곧 누군가 소년을 부르고 소년은 극 중 현실로 돌아온다. 이어 12년의 시간을 산다. 내성적인 소년은 사진을 사랑하는 청년으로 자라 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이제 소년은 하늘이 아닌 자기 앞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조금 슬픈 얼굴의 여섯 살 소년은 엷은 미소를 띤 열여덟 살 청년으로 컸다. 변하지 않은 것 하나, 첫 장면처럼 마지막 장면에서도 메이슨은 화면 바깥을 응시한다. 청년이 된 메이슨이 바라보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또 다른 메이슨에 해당하는 자신을 바라본다고 말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앞에 펼쳐진 미래를 기대하는 게 아니겠냐고 말할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보이후드>는 시간을 과거에 흘러간 어떤 것이라는 개념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시간은 언제나, 살아가야 할 매 순간이자 현실이라고 <보이후드>는 말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나의 소년기를 향수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나의 소년기 혹은 삶의 한순간을 다시 한 번 더 살고 있었던 거다. 메이슨의 알싸한 성장통이 나의 것인 양 내 몸이 반응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