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덕방
- 감독
- 최병권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정재광, 윤미경, 브레넌 클리브렌드, 이현서, 김현목, 안민영, 최유송, 윤태희, 정해성, 손용범
[사진] 김승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혈맥>의 한 장면 ● 연극으로 시작한 3대 독자 김승호는 1918년 7월 13일 강원도 철원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농사를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 어려움을 모른 채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일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승적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본인은 이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양친께서 석왕사(釋王寺)에서 불교를 신봉하셨다” (『국제영화』 1959년 10월호) 고 말한 적이 있어 뜬소문만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어릴 때 이 복덩이에게 붙여진 이름은 해수(海壽)였다. 그가 네 살이 되자 부모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종로 청진동에 정착한 뒤 복덕방과 전당포를 하며 사림을 꾸려 나갔으나 얼마 못가 숙박업으로 전환하였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옥 맞은편 서울관광호텔 옆 골목에 있었던 대흥여관이 바로 그 출발이었다. 그가 입학한 수송국민학교는 집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래서 공휴일에도 조무래기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운동장에 나가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명문인 보성(普成)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수재들과의 경쟁이 벅차서였는지, 1년 만에 그만 두고 말았다. 그 대신 집 근처에 있는 우미관이나 낙원동의 조선극장, 수은동의 단성사 등 극장을 찾아다니며 연극과 영화 보기를 즐겨 했다. 그때 이미 ‘분바른 무대 인생’의 길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스무 살 되던 해 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황금좌로 박진(朴珍)을 찾아갔다. 연출부장인 박진은 당돌하게 연극을 하게해 달라고 조르는 이 초면의 청년에게 대뜸 호떡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영문인지 잘 몰랐지만 그는 사실대로 잘 먹는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같이 고생을 하자”며 입단을 허용했다 .(김승호, 「나의 청춘과 예술의 편력」, 『국제영화』 1956년 3월호) 연구생 신분이었다. 그는 오래가지 않아 이 질문의 뜻을 알게 되었다. 공연지를 따라다니는 동안 정말 지겹도록 이 호떡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연극인들은 호떡으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 그러나 김승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허기진 배를 참아가며 연극에 빠졌다. 선배들의 시중은 물론 단체의 잡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전원교향악>이란 연극을 공연할 때였다. 그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장님 역할을 맡고 있는 선배에게 떡을 사다가 권하며 아첨을 떨었다. 선배는 이런 호의가 기특했는지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런데 공연 시간을 앞두고 급히 먹은 떡이 체했는지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에게 대역의 기회가 왔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선배의 연기를 보며 익힌 보람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캐스팅되었다. 그 첫 작품이 홍해성 연출의 <임자 없는 자식들>이었다. 1938년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그 뒤 <백진주>, <아들의 심판>과 같은 연극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집에서는 이런 ‘광대 짓’을 못 마땅히 여겼다. 부모가 얼마나 완고했는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의 연극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이 무렵 동양극장 무대에 올려 크게 성공한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6, 임선규 작, 홍해성 연출)가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극장주인 홍순언이 김승호를 주연인 황철의 친구 역으로 나오게 해주었다. 그런데 현상 기사가 실수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황문평, 『인물로 본 연예사: 삶의 발자국 1』 ‘서민의 우상 명배우 김승호’ 도서출판 선. 1998, 334쪽) 그는 해방 후 변기종이 주도한 자유극장으로 옮겨 연기부장을 맡아 박상익, 송재로, 김신재 황정순 등과 함께 2년 여 동안 활약했다. 그 뒤 서월영, 유계선 등과 함께 극단 청탑(靑塔)을 창단하기도 했다. 김영수의 <민중전(閔中殿)>(1945)과 <망향>(1946), <선구자>(1946) 등이 이때 공연한 레퍼토리였다. [사진 ] <박서방>의 한 장면, 황정순은 오랫동안 김승호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다 ● 특유의 발성법으로 연기력 과시 김승호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한 시대를 누빈 대기만성형의 배우였다. 그가 활동한 1958년부터 1968년까지의 10년간은 한국영화 전성기와 일치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명배우로서 부합될 만큼 큰 것이었다. 하지만 제작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1967년 처음 만든 <돌무지>의 흥행 성공과 제6회 대종상 최우수반공영화상 작품상 수상으로 받은 외화수입쿼터 보상에 힘입어 제작한 <영원한 모정>(원명 ‘머슴 칠복이’ 조긍하)이 실패한 뒤에도 부채를 안고 강행한 <7인의 밀사>(원제 사화산)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고혈압에 시달리다가 1968년 12월1일 아침 자택에서 세수를 하다가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서른 살에 얻은 외아들(김희라)이 1년 뒤 <독짓는 늙은이>(1969, 최하원)로 영화배우의 꿈을 이룬 모습도 보지 못한 안타까운 51년의 짧은 생애였다. [사진 ] 영화 <돌무지>(1967)의 한 장면 [사진 ] 김승호의 장례식 장면 혀와 입술 사이에서 더듬듯이 굴려 내는 독특한 발성법과 안면을 수축시키며 만들어내는 표정 연기는 김승호 연기의 특징이었다. <박서방>, <마부>, <혈맥> 등의 경우처럼 탁월한 연기력으로 어려운 현실에도 순응하며 살아가는 서민의 정서와 애환을 적절히 녹여내는가 하면,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로맨스그레이> 등에서 볼 수 있었듯이 ‘능청스런 익살’ 연기로 관심을 끌었다. 반면에 한 가장이 화목한 가정을 깬 죄책감으로 고행의 길을 걸어간 <육체의 길>(1959, 조긍하)에서는 오버액션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단연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서민 역할에서 빛났다.
이형표는 1960~70년대에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수놓았던 흥행 감독이며,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최초’라는 수식이 붙어다닌다. 1922년 황해도 출생으로 서울 효재국민학교 입학(1930), 경성사범학교에 진학(1937)하여 서울대 사범대학 영문과를 졸업(1949)했다. 미술에 재능을 보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1943)하고 김기림, 김순남, 이인성 등으로부터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소양을 얻는다. 대학 졸업 후, 그는 USIS(주한 미공보원 영화과)의 영화 제작 보좌관으로 입사하여 미국 문화영화의 자막 번역을 맡으며 처음으로 영화계를 접하게 된다. 이윽고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서울에서 조선미술가동맹 일원으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며 인민군 점령 시기를 견뎠다. 그러나 이 사실이 문제가 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미공보원을 떠나게 된다. 이후 유엔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운크라)에서 뉴스를 비롯해, 홍보영화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한국에서의 만남 Encounter in Korea>(리차드 배글리(Richard Baegley), 1952) 등의 제작에 참여한다. (사진1)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배글리, 이형표, 코넌트, 여자주인공 기순, 촬영조수였던 임병호 (사진2)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촬영 현장에서 이형표(맨 왼쪽), 카메라를 잡고 있는 임병호 <고집>에서 이형표는 통역 겸 연출 조수를 맡았는데, 녹음기사로 참여한 미국 영화인 테드 코넌트(Theodore Conant, 1926~2015)를 통해 처음으로 자기녹음기(마그네틱 레코더)를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이형표는 미국 파라마운트사가 제작한 3D 입체영화 <휴전 Cease Fire>(오원 크럼프(Owen Crump), 1953)의 통역 겸 조연출로 일하면서 남보다 먼저 할리우드 특수영상 제작 현장을 경험한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활발하게 참여하던 시기에, 이형표가 조력자의 입장에서 제작 주체로 거듭나는 데에는 동료였던 테드 코넌트의 영향이 컸다. 테드 코넌트 1) 는 1952년 유엔 한국재건단(UNKRA) 영화팀원으로 한국에 와서 1960년경까지 약 8년간 전쟁 및 전후 복구 중인 한국의 모습을 기록하는 한편 이형표와 돈독한 우정을 쌓으며 협업 창작 활동을 했다. 또한 코넌트는 한국영화계에 많은 기여를 했는데, 1956년 유네스코와 운크라가 한국 정부와 공동으로 설립한 신생활교육원에서 시청각 교육을 담당했고, 1958년에 미 국무부 산하 국제협조처가 한국 영화인 교육 및 영화제작소 설립을 지원하기 위해 시라큐스 대학과 맺은 ‘시라큐스 컨트랙트’에 참여하여 공보실 영화과의 사운드 분야 인력 교육을 담당했다. 이형표는 테드 코넌트와의 교류를 계기로 외교 파우치를 통해 들어온 서구 문화를 다양하게 흡수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인 문화 체험을 바탕으로 공동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한다. 이는 이후 이형표의 영화 창작 세계를 구축하는 데 단단한 초석이 된다. 1953년부터 그는 대한민국 공보처 영화과에서 대한뉴스를 비롯해 공보처에서 주관하는 기록영화 제작을 전담하게 된다. 영화 <한국의 시각 Korean Perspective>(1953)과 <낙원 제주>(1953) 등이 이형표가 감독한 기록 영화들이다. 이 두 작품들은 천연색 코닥크롬(Kodakchrome)으로 촬영한 컬러 영화이고, 한국의 자연경관과 명승고적을 소개하는 <한국의 시각>은 한형모 감독이 촬영을 맡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단편영화 <한국에서의 만남>(1952)에서 조연출을 했던 이형표는 이 이야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장편 시나리오 <불사조의 언덕>을 썼고 2) , 공보처에서 이를 영화화한다.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에는 감독 전창근, 조연출 김한일, 촬영 한형모, 조명 김흥만, 스크립터 홍은원 등의 영화인들이 참여했다. (사진3)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제작진들, 둘째줄 왼쪽 두번째부터 이형표, 전창근, 홍은원, 배우 나애심 또한, 이형표는 테드 코난트와 함께 다큐멘터리 <한국의 환상 Korean Fantasy>(1955), <한국의 예술가(Korean Artist)>(1955), <위기의 아이들(Children in Crisis)>(1955)을 만든다. <한국의 환상>은 전후 한국의 폐허와 재건 및 전통문화 등을 다뤘고, 화가로서의 이형표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한국의 예술가 Korean Artist>(1955)는 1956년 제1회 마닐라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위기의 아이들>은 한국전쟁 고아를 비롯한 전후 어린이들이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열악한 생활상을 담았다. 이 작품은 나레이션을 배제하고 녹음기를 사용하여 현장음만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 형식의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다. 이형표는 당시 전후 서울의 아이들을 보여주는 많은 장면을 직접 촬영했는데, 콘덴서 마이크로폰(condenser microphone)을 사용하여 레코더를 군용 트럭에 숨겨둔 채 거리 촬영을 진행했기 때문에 매우 생생한 거리의 소리들을 담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3) 작품 후반부에는 ‘북진통일’ 관제 데모와 전체주의적 교육에 동원되는 학생들 역시 ‘위기의 아이들’로 보여주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를 취한다. 4) 이 때문에 이형표는 한국전쟁 중 부역 전력으로 고초를 겪은 바 있는 자신의 신상을 염려하여 스스로 공동연출자로서의 크레디트를 포기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이승만 정권 측으로부터 ‘공산주의적’이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제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당시로서는 드문 다수의 제작 경험을 통해 한국 영화제작기술의 열악함을 통감하고, 유엔 한국재건단(UNKRA)에서 원조를 받아내 공보처에 영화 기자재를 들여온다. 더불어 이를 기반으로 스튜디오를 지어 활용하도록 하는 등, 전후 한국영화의 제작 기반과 환경을 조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한다. 1950년대 중반까지 다큐멘터리 활동을 하는 동시에, 화가로서의 정체성도 유지하며 그림을 그리던 이형표는 신상옥 감독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극영화계에 본격 뛰어들게 된다. 신상옥은 이형표가 영화제작 과정과 기술 전반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점을 간파하고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무영탑>(신상옥, 1957)의 각색 및 <동심초>(신상옥, 1957) 등의 제작에 이형표를 참여하도록 한다. 이윽고 이형표는 신필름 기술부장으로 입사하여, 1961년 장안의 화제였던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에서 촬영을 맡는다. 그는 이 영화에서 컬러 영화 제작을 위한 기술 전반에 관여하며 직접 분장까지 맡는다. 이형표는 이미 천연색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본 경험이 있는 바, 이번엔 코닥 이스트만 필름을 사용하여 국내 최초로 컬러 시네마스코프 극영화를 촬영함으로써 한국 극영화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데 큰 몫을 해낸 것이다. 같은 해 그는 신상옥이 제작자로 나선 <서울의 지붕밑>(1961)으로 감독 데뷔한다. 이 작품은 조흔파의 소설 『골목 안 사람들』을 영화화한 것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김승호, 황정순, 김희갑, 허장강, 최은희, 도금봉, 김진규 등을 초호화 캐스팅한 도시 서민 코미디로 관객과 평단의 큰 호응을 얻으며 성공한다. “대표작이 될 것”이라는 신상옥의 예견이 적중한 것이다. 기성 세대 한의사인 김승호가 자녀의 결혼 문제를 계기로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산부인과 의사 김진규와 각을 세우며 시의원 선거에도 나서보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자녀 세대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낙천적으로 그려냈다. (사진4)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촬영 현장 빌리 와일더나 윌리엄 와일러의 작품 세계를 동경했다는 이형표의 바램대로,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간적인 결함을 가진 인물들의 애환을 가슴에 와닿는 코미디로 완성했다. 또한 <서울의 지붕밑>은 독특한 구도와 새로운 카메라 기법을 이용하여 서울의 다양한 풍경들을 담아낸다. 각각의 쇼트들에는 화가가 되고자 했던 이형표 감독의 미적 감각과 영화 테크니션으로서의 실력이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사진5) <대심청전>(이형표, 1962)의 용궁 장면 (사진6) <대심청전>(이형표, 1962)의 세트 촬영장에서 제작진들. 뒷줄 가운데가 이형표 이듬해, 그는 고전 심청전을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영화화한 <대심청전>(1962)을 연출한다. ‘미러 워크’라는 특수 효과를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시도하였고, 일본에서 촬영한 용궁 수중 장면 등의 특수 촬영이 압권이다. (사진7)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 촬영 현장, 주연 배우 태현실 옆에 앉아있는 이형표 (사진8)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 촬영 현장, 카메라에 손을 올리고 있는 이형표 1960년대 청춘영화의 시초격으로 불리는 영화 <아름다운 수의>(1962)는 주역을 신인 배우들만으로 구성하였고 배우 태현실, 최난경, 한문정, 트위스트 김 등의 영화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이형표 감독의 쾌적한 템포, 유려한 카메라 구사, 재치있는 커팅이 인상적” 4) 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연달아 청춘물 <말띠 여대생>(1964), <연애졸업반>(1964), <백발백중>(1966) 등을 연출한다. (사진9)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포스터 (사진10)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의 한 장면 (사진11) <연애졸업반>(이형표, 1964) 제작진. 둘째줄 왼쪽 세 번째부터 조감독 김기풍, 배우 엄앵란, 이형표 감독, 배우 남미리 <말띠 여대생>(1963)은 개봉 후 대학 측으로부터 그런 학생이 어디 있느냐는 항의를 받는 등 영화의 리얼리즘 문제를 놓고 공방이 펼쳐지기도 했으나, 당시 외화만 보던 젊은 세대 관객들까지도 끌어들일만한 경쾌한 템포와 시원한 전개로 흥행에 성공한다. 이어 속편 <말띠 신부>(김기덕, 1966), <말띠 며느리>(이형표, 1979)가 제작되어 한국영화 최초의 시리즈물이 된다. 이형표는 1963년 무렵 신필름 전속을 그만두고 한양영화사, 극동흥업, 합동영화사 등을 오가며 청춘영화, 문예영화, 통속 멜로, 변장 코미디, 하이틴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상업영화를 만들며 대중과 소통한다. (사진12) <아름다운 눈동자>(이형표, 1965)의 주연 배우 엄앵란과 김용연, 각각 청룡여우주연상과 청룡특별상(아역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눈동자>(1965)는 순박하지만 당찬 식모와 애정결핍인 주인집 아들이 훈훈한 정을 나누는 이야기로, 감독의 안정되고 세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웃음이 터지는 박자를 놓치지 않는 센스 있는 템포와 면밀한 씬 구성, 정확한 콘티뉴이티가 관객을 편안하고 즐겁게 몰입하도록 한다. 식모 역할을 맡은 배우 엄앵란은 출산 후 컴백하여 연기생활 11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하는 열의를 보였으며, 제 3회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형표의 다방면에 걸친 박식하고 해박한 소양은 영화 기술적인 성과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취하는 영화 소재나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가는 방식에도 묻어난다. <애하>(1967)에서는 인공수정이라는 당시에는 낯선 소재를 삼각관계가 얽힌 미스터리한 구성으로 대담하게 전개한다. 획기적인 참신함으로 주목 받았던 이 작품은 제6회 대종상 각본상(이형우)과 남우조연상(윤일봉)을 수상한다. 또한 성(性)을 주제로 한 다수의 섹슈얼한 문예영화들 <밤은 무서워>(1968), <너의 이름은 여자>(1969), <방의 불을 꺼주오>(1970) 등을 통해 젊은 남녀의 내밀한 심리 세계를 긴장감 있게 표현한다. (사진13) <회전의자>(이형표, 1966)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 옆에 이형표 (사진14) <밤은 무서워>(이형표, 1968) 포스터. 위에서부터 배우 남궁원, 윤정희, 박노식 일체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거추장스럽게 여긴 이형표 감독의 자유로운 사고 방식은 그의 주특기 장르인 코미디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언니는 좋겠네>(1963), <청색 아파트>(1963), <심술각하>(1966), <오대 복덕방>(1968), <산에 가야 범을 잡지>(1969), <내 것이 더 좋아>(1969), <염통에 털난 사나이>(1970), <방자와 향단이>(1972), <맹물로 가는 자동차>(1974) 등의 작품들에서 세태 풍자와 함께 권위를 조롱한다. 또한 웃음에 야박하고 저급하다고 폄하하는 기존의 시선을 가볍게 뛰어넘어 넌센스 코미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자유자재로 시도한다. 특히, 연기자 서영춘을 기용해 여러 작품을 만들었던 이형표는 당시 그의 뛰어난 희극 배우로서의 재능이 ‘저속 코미디언’으로 분류 되어, 높이 평가받지 못했던 점을 안타까워했다. (사진15) <청색아파트>(이형표, 1963) 오른쪽부터 배우 이대엽, 이형표 (사진16) <소문난 여자>(이형표, 1966) 촬영장에서 연기 연출 중인 이형표와 배우 고은아 (사진17)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 주연 배우 구봉서와 서영춘(오른쪽) (사진18) <염통에 털난 사나이>(이형표, 1970) 왼쪽부터 배우 서영춘, 구봉서, 김희갑 1970년대 TV 보급시대에도 이형표는 누구보다 빨리 변화하는 관객의 감성에 적응해갔으며, 당대 인기 배우들을 기용한 그의 청춘영화들은 꾸준히 인기를 누렸다. “이형표 감독을 잡으면 돈을 번다”는 말이 당시 제작자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이형표는 경제성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대중이나 제작자 모두가 요구하는 탁월한 상업영화 감각을 유지했다. 이는 그가 영화는 오락이고 유행이라고 생각하며, 그 유행에 맞춰 관객과 상호 작용하는 유연함을 스스로 즐길 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진19) <모범운전사 갑순이>(이형표, 1972) 포스터 (사진20) <리칭의 여선생>(이형표, 1972) 촬영장에서 이형표 감독과 중국 배우 리칭(오른쪽) 6) (사진21) <리칭의 여선생>(이형표, 1972) 포스터 (사진22) <너무 너무 좋은 거야>(이형표, 1976) 포스터. 주연 전영록, 임예진 1970년대 중반에는 하이틴 영화의 붐을 타고 <이런 마음 처음이야>(1976), <너무 너무 좋은 거야>(1976), <제7교실>(1976), <괴짜만세>(1977) 등을 연출했고, 1980년대 한국영화 침체기에도 이형표는 성룡의 <취권>(1978)을 패러디한 코미디물 <애권>(1980)을 흥행시키며, <여애권>(1982), <애권(신)>(1982), <소애권>(1983) 등의 속편을 연달아 연출한다. (사진23) <아가씨 참으세요>(이형표, 1981) 포스터 그는 1980년대에 계속되는 저예산 흥행영화 제작 와중에,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일상서민극 <젊은 시계탑>(1984)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형표는 1986년 작품 <먼 여행 긴 터널>을 끝으로 극영화 연출 활동을 마치고, 국내 최초의 360도 서클 비전 영화 <내사랑 금수강산(1990)>을 제작하여 전시 영상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 이후 몇 년간 전시 영상 분야에서 새로운 영상에 대한 끊임없는 개척정신을 보이는 활동을 이어갔다. (사진24) <젊은 시계탑>(이형표, 1984) 촬영 현장. 오른쪽부터 배우 송승환, 이형표 감독, 배우 김현주 이형표의 영화 인생은 한국영화 제작 기술 발전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그는 전후 폐허에서 출발하는 1950년대 한국영화계를 위해 영화 기자재 도입에 앞장 섰고, 그 제작 기술을 안내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뿐만 아니라 19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변모하는 세태에 뒤쳐지지 않고, 항상 새롭게 대중의 감수성을 포착해내고 섭취하는 감독이었다. 이렇듯 대중의 기호와 관심에 부응한 결과, 그의 영화 연출작들 대다수가 준수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이형표는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발현하기보다는,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이해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유쾌하게 향유할 수 있는 영화 만들기를 추구했다. 그는 영화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특유의 낙천적인 개성으로, 가족 드라마 <서울의 지붕밑>(1961)부터 코믹 액션물 <아가씨 참으세요>(1981), 한국판 뱀파이어물 <관 속의 드라큐라>(1982) 등과 같은 기발한 재미와 웃음을 선사했다. "그림을 아는 스타일리스트" 7) 이형표는 다양한 장르에서 편협한 시각을 벗어내고, 규범을 해체하는 데서 생겨나는 통쾌한 오락으로 대중과 함께 하는 감독이었다. *이 글은 필자가 쓴「관객과 함께 웃는 영화 패셔니스타(Fashionista), 이형표 감독」, <서울의 지붕밑>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2008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이방인이 기록한 전후 한국, 영화_시어도어 코넌트 컬렉션』, 한국영상자료원, 2015 참고. 2) 앞의 책, 297쪽 참고. 3) 앞의 책, 293쪽 인용. 4) 앞의 책, 292쪽 참고. 5) 「[신영화] 병든 청춘의 풍속도/ 이형표 감독 <아름다운 수의>」, 《한국일보》, 1962년 11월 18일. 6) “톱감독과 톱스타 계보 (제4회)/이형표 편”,《영화잡지》통권116호, 1973년 5월, 190쪽. 7) 「[새영화] ‘스케치북’ 넘기는 재미/ 이형표 감독 <연애졸업반>」, 《서울신문》, 1964년 6월 17일
「검열서류를 통해 본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 I」에서 살펴보았듯이 <오대복덕방> 사건으로 한창 강화된 검열 속에서, <내것이 더 좋아>는 세 차례에 걸친 시나리오 검열과 실사검열 이후의 (조건부) 상영허가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대본의 상당 부분이 삭제되거나 수정되어야할 것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필름 자체에는 검열의 흔적이 그다지 기입되지 않았으며, 그럼으로써 서영춘 코미디의 ‘불온함’을 잘 드러낸 영화였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 이 영화는 구봉서와 서영춘이 공동주연을 맡고 있으나 서영춘이 여장남자 역할을 하면서 극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중심인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서영춘 코미디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영춘이 중심인물을 맡았던 <내 것이 더 좋아>는 ‘저속’을 검열 차원에서 단속했다는 의미에서, 매우 문제적인 영화였다. 한국영화사에서 1968년부터 1971년은 ‘섹스영화’가 ‘폭발’했던 시기였다. 특히 1969년에는 ‘섹스’가 한국영화의 주류로 부상했다고 할 수 있는데, 남성동성애를 다룬 김수용 감독의 <시발점>과 동성애적 표현 수위가 상당히 높았던 신상옥 감독의 <내시> 등이 이 해 제작된 영화들이었다. 또한, 이 해 이형표, 신상옥, 박종호는 외설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 제작되었던 <내 것이 더 좋아>는 동성애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제기하는 영화였다.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상경한 성춘(서영춘)은 가진 돈을 몽땅 소매치기 당한 뒤, 우연히 식당에서 만난 봉수(구봉서)에게 얹혀 살게 된다. 봉수는 성춘 만한 덩치를 가진 ‘여편네’와 함께 살다가 얼마 전 헤어진 상태로, 하숙집 아주머니가 맞선을 주선한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자 얼결에 성춘을 시골에서 올라온 ‘본 마누라’라고 소개한다. 이때부터 여장을 하게 된 성춘은 봉수와 함께 살면서 자신의 여성성을 마음껏 뽐낸다. 한편, 맞은 편 집에 살고 있는 부부 역시 여성 동성애 부부로, 두 쌍의 동성 부부가 엮이게 되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성춘은 부부 중 아내 역할을 하는 분임(고은아)에게 마음을 두고, 그녀에게 “정상적인 부부”의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결국 성춘은 분임과, 봉수는 강자(이금희)와 연결되면서 두 쌍의 동성 커플은 두 쌍의 남녀 커플로 ‘정상화’된다. 그런데 제작신고 시 제출했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는 이와 상당히 다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하루만 재워주겠다고 성춘을 집으로 데려 갔던 봉수가 먼저 성춘에게 “마누라”가 될 것을 제안하는 다음의 장면이다. #20. 봉수의 방 성춘: ... 근데 혼자 사세유? 봉수: 그래 한달 전에 내쫓았어! 난 여자라면 신물이 난다구! 여편네라구 어디서 바가지만 박박 긁구 귀찮구 재수없는 존재란 말야.. 하다가 성춘을 천천히 뜯어본다. 성춘: 뭐가 잘못 됐시유? 봉수: 너 밥도 잘한다고 했지? 성춘: 그쯤이야 누워 코풀기지 뭐유. 힛힛... 봉수: 그럼 너 내 마누라 안돼볼래? 성춘: 예? 마누라유? 제가유? 아이고메... 남자가 어찌 여자가 된단 말이예유? 봉수: 그럼 넌 아내로서 언제까지나 이 집에서 살아두 되는 거야 성춘: 허지만 난 가수가 될려고 왔지, 아내가 될려고온 건 아닌데유? 봉수: 야 여기 살면서 저 전축으로 열심히 배워서 가수가 되는 길을 더듬어 보는 거야! 성춘: 오라 그것도 좋은 생각이유! 봉수: 그럼 우리 간단히 초례나 올릴까? 성춘: 어떻게유? 봉수: 찬물 떠놓고 올리면 되는 거지. 예식장에 갈 필요가 없잖아. 성춘: 허지만 여자옷도 한 벌 없는데. 봉수: 옷이 왜 없겠니. 봐라 보구만 죽으라구! 하며 양복장 문을 드르륵 열어 보인다. 쪼옥 걸려있는 옷가지들. 봉수: 양장에 한복에 수두룩하다! 먼저 살던 여편네가 등치가 너만 했으니까 잘 맞을거야. 아무거나 골라 입으라구. 난 냉수 떠올게. 하며 나간다. 놓여지는 냉수 한 그릇. 밤이다. 정한수 떠놓고 마주서서 예를 올리고 있는 봉수와 성춘. 봉수가 절하면 성춘도 절하고. 봉수: 우리 두 부부 일생을 화목하게 지내도록 해 주시고 아들 딸 낳고 백년해로하게 해 주시옵소서. 성춘: 여봐. 아들 딸을 어떻게 낳아 봉수: 글쎄 우선 그렇게 해두는 거야. 자! 식은 끝났구.... 사랑의 선물로 키쓰나 한 번 하자! 하며 성춘의 뺨에 입술을 갖다댄다. 봉수: 아이 따거! 야 수염이나 좀 깎어라! 성춘: 정말 별꼴이야... 에이 퇴! 봉수: 여보 이제부터 우린 부부야. 남편 말 잘 듣고 착한 아내가 되라구! 이어지는 첫날 밤, 봉수와 성춘이 자고 있는데, “서로 다리와 다리를 엉키구 부둥켜 안고 자고 있는 두 사람의 꼴이 가관”이다. 다음 날 아침 봉수는 “그럼 다녀오리다”하는 인사와 함께 성춘의 뺨에 뽀뽀를 하고 출근하며, 퇴근하는 길에는 성춘에게 주기 위해 “케키집”에 들러 “케키상자”를 들고 나온다. 현재 남아 있는 영화에서는 이 장면들이 모두 삭제되었으며, 봉수가 성춘을 끊임없이 ‘이 새끼야’ 등으로 칭하고 구박하는 장면과 대사로 대치되었다. 두 사람이 애정을 표현하거나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장면 역시 성춘을 귀찮아하고 내보내고 싶어하는 봉수의 대사들로 바뀌는데, 검열 이후 재녹음된 이 대사들은 화면의 입모양과 동조되지 않는다. 한편, 맞은 편 집에 살고 있는 여성 동성애 부부에 대해서는 ‘부부’임을 암시할 수 있는 모든 단어들을 지워져 있다.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서는 처음 분임과 강자를 본 성춘이 부부냐고 묻자 봉수는 “그야 부부지만 예사 부부가 아니지”, “동성연애를 하고 있는 거야”라고 대답한다. 동성연애가 뭐냐고 묻는 성춘에게 “여자끼리 남편이 되구 여편네가 되구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거지.”라고 대답한다. (그림 1) <내 것이 더 좋아>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신 #20 분임-강자 부부의 성적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내는 이 대화는 영화에서 저들이 부부냐고 묻는 성춘의 질문에 “아니야. 둘 다 여자야.”라는 봉수의 대답으로 부정되고 축소된다. ‘부부’라는 표현이나 ‘남편’이라고 칭하는 분임의 대사 역시 ‘강자 씨’ 등의 일반적인 호칭으로 대치되며, 이들의 관계를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들도 대부분 삭제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애정 표현 또한 거의 삭제된다. 그런데 여성 커플의 다정한 장면이 대부분 삭제된 것과 달리, 남성 커플의 애정 행각은 좀 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성춘이 “여보 나 예쁘지? 난 당신이 좋아 죽겠어”라고 애교를 부리는 모습, 노래 자랑 대회에 나가 ‘코미디언 서영춘’의 레퍼토리 중 하나인 “삐빠빠룰라”를 부를 때 다정하게 봉수의 이름을 부르고 “여보”라고 칭하는 장면, 팔짱을 끼고 음식을 서로 먹여주며 데이트 하는 장면 등 이들의 애정이 드러나는 부분은 그대로 남겨진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오가는 서영춘의 행위가 ‘코믹함’을 위해 상당수 남겨질 수 있었던 반면 여성 동성애를 묘사하는 장면은 삭제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당대 검열이 구분했던 ‘불온’의 위계를 짐작해볼 수 있다. 다시 검열 서류로 돌아가 보자. 전술했듯이, 이 영화는 제작신고 시 시나리오 검열에서 제작불가 통보를 받았다. 무엇보다 남장여자, 여장남자를 등장시켜 동성애 커플을 다뤘다는 것과 여장남자의 ‘저속한 행동’이 문제가 되었으며,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고 돈을 안 내는 도주 및 사기 행각, 도둑놈의 도둑질 행위, 깡패들의 돈 갈취 행위 등도 불가의 사유로 지적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검열에 의해 여장 남자의 저속한 행위로 규정되어 삭제되어야 할 것으로 구체적으로 지적된 것들이 매우 일상적인 행위들이며 또한 이 영화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들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검열에서 지적한 ‘저속한 행동’에는 빨래하는 것, 시장보고 음식하는 것, “식모노릇”, 마사지 하는 것, 여장남자의 부부생활, 산부인과 소동, 얼굴을 할퀴는 등의 난동, 남장 여인 부부 침실에 뛰어드는 행위가 포함된다. (그림 2) 작성자 불명, 「극영화 “내 것이 더 좋아” 각본심의의견」, 1968.11.(추정) 이 심의의견서는 ‘씨나리오검토의견’이라는 제목이 명시된, 일정한 형식이 있는 문서 네 건(심사 날짜가 11월로 되어 있는 것 두 건, 심사 날짜가 12월로 되어 있고 ‘재심분’이라고 표기된 것 두 건)과 달리 수기로 쓰여 있으며 특정한 문서의 형식이 없다. 그리고 당부의견에서 영화 제작 ‘불가 또는 개작 통보’ 중 불가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두고 있다. 제작 불가 판정을 받은 한 달 뒤인 12월 10일, 제작자인 합동영화사의 곽정환은 27곳의 대사를 삭제하거나 삽입했다고 하면서, 시나리오의 재심을 요청했다. 현재 남아 있는 서류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12월 14일 시나리오검토의견에서 또 다시 불가 판정을 받았으나 12월 23일 검토에서는 제작 ‘가’ 판정을 받았다. 재검토 이후 10일 간의 공백을 두고 다시 한 번 검토가 이루어진 것인데, 12월 26일 제작사에 통보된 「제작신고수리 및 시정사항통보」에 “12월 23일에 제출된 극영화 ‘내것이 더 좋아’에 대한 검토”라고 명시된 것으로 미루어, 이 문건은 12월 14일 이루어졌던 재검토에서 제작 불가 판정을 받은 이후 한 차례 더 수정이 이루어진 뒤 세 번째 시나리오 검열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12월 26일에 통보된 검열의 내용에서 지적하는 바 역시 그 이전에 적시되었던 불가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림 3) 공보부, 「극영화 “내 것이 더 좋아” 제작신고수리 및 시정사항 통보」, 1968.12.26.) 이 통보서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수정된 시나리오 중 12곳을 더 삭제하거나 시정하도록 요청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지적은 “동성끼리 부부를 가장하여 생활하는 설정 자체가 불건전”하기 때문에 “모든 장면 묘사는 어디까지나 가벼운 넌센스 코메디 스타일의 텃치로 건전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동성 부부관계의 애정 묘사 등 비정상적인 표현을 일체 삭제”하라고 주문한다. 또한 “여장남자의 저속하고 추잡한 모든 장면이나 대사를 건전하게 시정”하고 “동성부부가 서로 성감을 느끼는 듯한 일체의 묘사를 삭제하거나 달리 시정”하도록 지시한다. 이는 곧 동성애는 그 자체가 “불건전”하고 “비정상적”인 것이므로, 삭제되어야 하거나 혹은 “가벼운 넌센스 코메디 스타일의 텃취”로 그려질 때만 “건전”하게 취급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의미인 셈이다. 즉, ‘동성 부부’라는 설정 자체가 없어지면 이 영화의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제작이 불가능한데, 제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동성애자 부부’임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가벼운 넌센스 코메디 스타일의 텃취”를 통해 이 영화의 불온함을 가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벼운 넌센스 코메디”의 웃음 유발 장치로 활용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요소들은 ‘저급’하므로 삭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검열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 지키면서 코미디영화의 형식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따라서 이 영화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딜레마 속에 놓인 이 영화가 살아남은 방식이다. 앞서 언급했던 내용들을 포함하여 재검열을 위해 자진 삭제하였다고 제시한 부분을 제외하고, 제작신고 수리 시 시정사항으로 통보된 내용들, 그리고 필름 검열합격 후 삭제 또는 단축할 제한사항으로 지적된 26개의 장면 또는 대사 대부분이 필름에 남아있다. (그림 4) 공보부, 「장편영화 “내 것이 더 좋아” 검열합격」, 1968.12.31. 서류에 따르면 심지어 이 영화는 사전제작 위반작이었는데, 1차 개작 이후에도 두 차례에 걸친 시나리오 검열과 실사 검열을 거치면서 “불건전”하고 “비정상적”이라고 지적되어 ‘시정’ 혹은 ‘삭제’되어야 했던 부분들은 대부분 서류상으로만 삭제되었던 것이다. 임검까지 가능했던 당시의 검열 속에서 ‘저속’하므로 삭제되어야 했던 이 영화는 삭제되지 않은 ‘저속’함으로 남은 경우였다. 서영춘 코미디와의 비교를 위해 이 영화와 거의 동시기에 제작되었던 구봉서의 코미디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 후반 구봉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남자와 기생>(심우섭, 1969)이나 <남자 식모>(심우섭, 1968), 그리고 <남자 미용사>(심우섭, 1968)는 검열에서 훨씬 관대한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들에서 구봉서는 여장을 하고 시장을 보며, 청소와 식사준비, 바느질 등의 집안일을 도맡고 마사지를 하기도 한다. 특히 <남자와 기생>에서 구봉서는 여장을 하고 요정에서 남성들에게 술과 웃음을 파는 기생 역할을 맡는다. 그럼에도 검열에서 구봉서의 코미디는 서영춘의 코미디와 결이 다른 것으로 취급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구봉서의 ‘남자 시리즈’는 검열에서 대체로 ‘건전’하며 ‘명랑’한 ‘풍자 코미디’로 평가 받았다. <남자기생>은 제목이 “너무나 직선적인 퇴영적 인상”이 강하므로 “건전한 이메지의 것”으로 개제하라는 지적에 따라 <남자와 기생>으로 변경되었고 그 외 섹슈얼리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들에 ‘주의’를 요하면서 “각별히 저속하지 않게 묘사”할 것을 주문하는 정도가 검열에서 지적된 내용이었다. (그림 5)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극영화 “남자 기생” 각본심의결과통고서」, 1968.9.14. <남자 식모>에서는 여성 식모들을 비하하거나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듯한 발언들, 예를 들어 “식모 주제에”, “예쁜 식모라도”, “여자 식모들 살맛이 나는데” 등의 대사 등을 삭제하라고 지시한 것을 제외하면, 제명에 대한 언급 정도가 검열에서 지적한 사항이었다. “제명은 일기경박하고 저속한 감 불무하나 작품자체가 코메디텃취이고 주인공이 남성이기 때문에 원제명을 인정”한다는 것 정도의 언급이 있을 뿐이다. (그림 6)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극영화 “남자식모” 각본심의결과보고서」, 1968.3.29. 1967년까지 ‘씨나리오심의의견서’ 또는 ‘각본심의의견서’였던 사전 시나리오 검열서류는 1968년 초 ‘각본심의결과보고서’를 거쳐 1968년 4월 이후 ‘각본심의결과통고서’로 변모했다. 한편, <남자와 기생>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남자기생 태호(구봉서)가 요정에서 술 마시는 남자들을 앞에 놓고 춤과 노래로 풍자하는 대목인데, 검열에서 일부 삭제되었다. 삭제된 부분은 “네놈들 때문에 우리들은 돈벌이 잘 되지만 너희들도 국가를 위해 무언가 할 생각을 해 보아라”라는 대사였는데, 노골적으로 교훈을 설파하는 구절이 삭제된 것이다. 검열 서류에서 따로 적시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 대사가 삭제된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코미디 영화에서 ‘국가’를 거론하는 것 자체의 ‘불온함’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진 삭제의 구절은 차치하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봉서 코미디에 대한 지적들은 서영춘 코미디가 ‘저속함’을 이유로 검열에 의해 제지되었던 것과 다른 결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즉, 구봉서가 영화에서 여장을 하거나 여자들의 직업(<남자 식모>, <남자 미용사>)에 도전하는 것은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타락한 사업가’나 ‘일부 유한계급의 여성들’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므로 대체로 “건전”하고 “명랑”한 것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반면, 서영춘의 여장은 이와 다른 위치에 놓인다. <내 것이 더 좋아>의 마지막 부분, 봉수와 크게 싸우고 집을 나가는 장면에서 성춘은, 내가 여태 갈 데가 없어 안간 줄 알아유! 너 인생이 불쌍해서 못갔다! 네 놈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여자 구실하다 그 좋은 육체마저 요렇게 갈비처럼 살이 쏙 빠졌다! 먹고 싶은 오징어 다리 하나 안 사먹고 하고 싶은 가수 한 번 못하고 너 구린내 나는 양말쪽 깁느라고 허송세월만 했어! 라고 화를 낸다. 생계를 위해서만 여장을 한 것이 아니라 봉수에 대한 연민과 애정으로 함께 살고 있었음을 고백한 성춘의 문제적 위치는 ‘남자시리즈’의 구봉서의 행위와 달리 ‘위험’하고 ‘불온’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성춘은 분임과 있는 장면에서는 남성성을 과시하지만, 봉수와 둘만 있는 자리에서는 항상 풀 메이크업에 브래지어까지 갖춰 예쁜 옷을 차려 입고 목소리도 가냘프게 변조하는 등 여성성을 적극 드러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느끼는 대상도 의미심장하다. 남성의 역할을 맡았던 이들끼리, 여성의 역할을 맡았던 이들끼리 사랑을 느껴 파트너를 바꾸는 마지막 씬은 ‘정상화’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동성애적 코드이다. 우여곡절 끝에, 삭제하라는 모든 부분을 삭제하지는 않은 채 개봉된 이 영화에는 검열로도 채 다 삭제하지 못한 ‘불건전한’ 성적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이영일은 한국영화전사 (2004)에서 1960년대 후반이 “저속취향의 풍조”를 보이는 “이상 현상”의 시기였다고 규정하면서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가 “서민대중 관객의 저속취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영일이 건전한sound 코미디로 언급했던 것이 사회적 교훈, 경구를 풍자적으로 그린 코미디들임을 감안할 때, 1960년대 후반 코미디가 ‘저속취향’이라고 단정한 이면에는 ‘풍자’하거나, 적어도 ‘풍속’을 그리는 ‘건전’한 코미디가 코미디의 위계상 상위에 놓인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당대를 살았던 평론가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영일을 비롯한 당대 평론가들이 이 시기의 코미디를 ‘저속취향’이라고 규정한 것은 이 코미디들이, 당대 검열의 언어를 통해 말하자면, 국가가 규율한 ‘명랑’과 ‘건전’으로 수렴되지 않는다고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서민대중’의 ‘취향’을 형성할 정도의 대중적 파급력과 일종의 장르성을 가진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재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서영춘이 영화에서 담당했던 역할들이 주로 시골에서 올라온, 성적 정체성이 모호한 노동계급의 남성이었다는 점은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서영춘 코미디의 특성은 그가 맡은 캐릭터들의 성적, 계급적 위상에서 잘 드러난다. 먼저, 서영춘의 젠더 형상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는 경우(<여자가 더 좋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부장으로 복권되면서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결말(<내 것이 더 좋아>)이라고 해도, 서영춘의 코미디에는 ‘시각적’으로는 여성적인 포지션을 포기하지 않는 이른바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그로테스크한 신체’가 중심에 놓인다. 서영춘의 ‘그로테스크한 신체’는 회복되지 않은 ‘남성성’과 포기되지 않은 ‘여성성’의 기묘한 공존을 시각적으로 전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적 모호함은 특히 1960년대 후반이라는 경직된 시대에 맞닥뜨렸을 때 한층 더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서영춘의 코미디가 직업, 젠더, 섹슈얼리티, 가족과 같이 사회적으로 규정된 규범 및 영역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독해될 여지를 남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구봉서의 코미디가 ‘건전한’ 상식을 바탕으로 ‘남성성’을 재설정하면서 종결될 때, 서영춘 코미디는 ‘도착적’ 남성성과 성적 에너지를 드러냄으로써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서영춘 캐릭터의 계급성과 이로부터 비롯된 언어적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술했듯이 서영춘은 주로 시골에서 상경하여 곤란에 처한 구직자 역할이나 실직자, 수위, 중국집 배달부, 세탁소 직원 등 도시 하층계급의 저임금 노동자 역할을 맡으면서 비속어, 욕설, 그리고 욕망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한 날 것 그대로의 언어를 사용했다. ‘저속’한 언어를 활용한 코미디는 ‘건전’한 코미디가 줄 수 없는 해방감과 일탈의 만족을 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다소 뻔뻔할 정도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비속한 언어로 감정을 표출함으로 인해, 서영춘이 맡은 캐릭터들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가거나 간혹 골탕을 먹게 될 때도, 불쌍한 느낌과 연민을 자아내기 보다는 관객들에게 통쾌한 느낌을 주었다. 굳이 비교해서 말하자면, 동일시와 위안의 즐거움이 구봉서 코미디의 몫이었다면, 가학과 위반의 쾌감이 바로 서영춘 코미디의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요컨대, 서영춘의 코미디는 성정체성이 모호한 여장 남자, 시골에서 올라온 노동계급의 남성, 비속어와 욕설, 성적 뉘앙스가 담긴 저급한 언어의 사용 등으로 ‘저속’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정서의 규율’로서의 ‘명랑’과 ‘건전’을 벗어나는 위반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서영춘의 “그로테스크한 신체”와 하층 계급 남성의 ‘상’스럽고 생생한 언어는 “성스러운 것, 두려운 것, 권력, 지배체제”로부터의 “해방” 1) 을 선사해주는 것이자 ‘불온한’ 공범자로서의 웃음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서영춘의 코미디 스타일은 검열을 통해 ‘저속함’으로 규정되었으나 시대가 강제했던 ‘명랑’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명랑’을 구현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으로써 그로테스크한 웃음과 위반의 쾌락을 근간으로 했던 서영춘 코미디는 ‘명랑하라’는 시대적 명제와 더불어 공생할 수 있었다. 1) 게리 솔 모슨, 캐릴 에머슨 지음, 바흐친의 산문학 , 2006. * 참고문헌 게리 솔 모슨, 캐릴 에머슨 지음, 오문석, 차승기, 이진형 옮김, 바흐친의 산문학 , 책세상, 2006. 박선영,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명랑’과 ‘저속’ - 서영춘코미디의 불온함과 검열의 문제」, 한국극예술학회, 한국극예술연구 51집, 2016.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 도서출판소도,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