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레로: 불멸의 선율
- 감독
- 앤 폰테인
- 제작년도
- 2024
- 출연
- 라파엘 페르소나즈, 도리아 틸리에, 잔느 발리바, 엠마뉴엘 드보, 뱅상 뻬레
기계적 반복은 산업 시대 이후의 미학이다. 그럼에도 산업시대에 발명된 오락물인 필름의 내용적 미덕은 ‘반복’과는 거리가 있어 왔다. 대중에게 반복은 지루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수 실험작 중에는 반복이라는 모티프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밀어붙이는 것이 가능하기도 했다. 즈비뉴 립진스키(Zbigniew Rybczynski)의 1983년도 오스카 수상작 < 탱고 Tango >가 그런 작품이다. 작품은 하나의 방을 보여준다. 곧이어 공이 튀어 오르고, 조심스럽게 공을 주우려는 한 아이가 들어온다. 아이가 공을 챙겨서 방을 나갈 때까지, 우리는 무슨 사건이 진행될지 기대하며 지켜보게 된다. 아이가 창문으로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다시 튀어 오르는 공에 의해 그런 기대는 깨진다. 뒤이어 수유하는 여성이 등장하고 차례차례 각자의 볼일을 보는 인물들이 나타난다. 어떤 인물들은 그 연관성이 나중에 발견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각자가 전혀 다른 시공간에 있는 듯 보인다. 얇은 셀로판지처럼 겹쳐진 다중우주 같기도 하다. 이에 대해 “단절된 채 일상을 반복하는 소시민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2007년 제5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소개된 바 있다.(daum 영화 정보) 하지만 2017년에서까지 ''단절된 소시민''이라는 모티프로 읽고자 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낡은 독해가 될 것이다. 설사 립진스키 본인이 작업 의도에 대해 현대 도시인의 단절을 언급했다고 하더라도, 실험을 위한 구실 정도로 보는 게 적절하다고 본다.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인물들의 입장 및 퇴장의 반복은 기이한 리듬을 만들어내고, 점증되는 인물 군상이 새로운 악장을 더하는 것처럼 전체를 확장시킨다. 시각적 볼레로라고나 할까. 난장판이라고 해야 할 만큼 혼잡해지는데도 오히려 정적이고 안정적이다. 질서정연한 난장판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심지어 고정된 카메라의 위치는 관객에게 연구실에서 표본을 지켜보는 관찰자와 같은 느낌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우리 관찰자들에게 립진스키는 일상 동작의 개별소를 계속 더해 조합하는 것만으로 얼마나 이질적 영상을 구사할 수 있는지 차분하게 보여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임계점에 달해 어떤 에너지로 치환한 듯 인물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반복되던 움직임 대신 새로운 무언가-임종을 기다리던 노인이 공을 줍고 퇴장하는 결말-로 이행된다. 반복 확장되는 엔트로피 현상을 관찰한 듯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쯤에서 다시 산업 시대 미학을 이야기해 보자. 산업 시대의 미학은 두 가지 층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산업적 차원에서의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 위한 시도 끝에 나온 미적 특성이고, 두 번째는 파생적 특성으로서 산업적 미를 차용해 미학적 시도를 추구하는 경우이다. 실례로 이에 따라 기계 미학이 등장한 바 있다. 이 도식을 < 탱고 >에 적용한다면 산업 시대 이후에 나타난 기계적 반복과 그것의 인간 삶에 전이된 양상을 시각적으로 펼쳐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조금 더 소박하게 말한다면, 애니메이션 산업에서 경제적 이유로 고안된 반복 기법을 형식 실험의 주제로 활용한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일상적 풍경을 소재로 삼은 많은 애니메이션이 낭만적 시선을 담지하는 반면, < 탱고 >는 끝까지 냉철함을 잃지 않는다. 철두철미한 시각 실험가의 리포트다.
영화업자가 극장 안에서 관객들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 < 판타지아 >(1940)를 소개한다. 그러나 할리우드로부터 상영이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고는 <판타지아>의 ‘모조품’을 만들기로 하고, 감옥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애니메이터들을 데려온다. 영화가 시작되면 여섯 곡의 클래식 음악과 함께 디즈니 <판타지아>에 대한 패러디와 풍자가 넘쳐나는 전복적인 애니메이션 에피소드들이 펼쳐진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블 음반 ‘더 월 The Wall’을 영상으로 옮긴 알란 파커 감독의 <더 월 The Wall>(1982), 비틀즈 음악을 소재로 만든 애니메이션 < 옐로우 서브마린 Yellow Submarine >(1968) 등과 함께 음악을 모티브로 한 영화 가운데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 알레그로 논 트로포 Allegro non Troppo >는 이탈리아의 애니메이션 작가 브루노 보제토(1938~ )의 1976년 작품으로 <서부와 소다 West and Soda>(1965), <빕, 나의 형제 슈퍼맨 The Super Vips>(1968)에 이은 그의 세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 알레그로 논 트로포 >의 에피소드들 이 유머러스하고 디즈니 보수주의에 저항하는 대담한 옴니버스 장편 애니메이션 < 알레그로 논 트로포 >의 첫 곡은 드뷔시의 관현악 ‘목신의 오후 전주곡’으로 시작하는데, 감독은 < 판타지아 >의 ‘전원 교향곡’ 에피소드를 패러디하여 젊고 아름다운 목신(牧神)이 아닌 늙은 목신의 여성을 향한 관능적 몽상을 허망하게 그리고 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7번’이 흐르고, 파시즘과 독재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풍자가 빛을 발한다. < 알레그로 논 트로포 >의 대표적인 이미지인 콜라병이 등장하는 세 번째 에피소드는 반복적인 메타모르포제 리듬을 타는 라벨의 ‘볼레로’를 배경 음악으로 하여 인류의 탄생과 진화를 충격적인 반전으로 패러디한 영상이다. 시벨리우스의 ‘슬픈 왈츠’를 애니메이션 화한 네 번째 에피소드는 철거로 파괴된 황량한 도시에 살고 있는 작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음악과 어우러진 서정적인 화면은 아마도 이 작품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을 주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비발디의 ‘협주곡 C장조‘를 소재로 하였는데, 식사 준비를 방해받은 벌의 반격으로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애니메이터까지 싸움이 벌어져 온통 난장판이 되는 이야기이며,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로 시작되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아담과 이브 그리고 뱀을 등장시켜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병폐와 모순을 거침없이 들춰내고, 다시 한 번 디즈니의 < 판타지아 >를 조롱하는 피날레로 이어진다. <타품! 무기의 역사! Tapum! Weapons History!>(1958), <서부와 소다 West and Soda>(1965) <미스터 로시, 자동차를 사다 Mister Rossi Buys a Car>(1966), <오페라 Opera>(1973) 이탈리아의 ‘애니메이션 국민작가’로 불리는 브루노 보제토는 1938년 밀라노 태생으로 10대 시절 만든 8mm 단편 애니메이션 <도날드 덕 카툰>(1953)을 시작으로 하여, 20세가 되던 해에 만든 단편 <타품! 무기의 역사! Tapum! Weapons History!>(1958)를 계기로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 그는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미스터 로시, 자동차를 사다 Mister Rossi Buys a Car>(1966), 바르셀로나 영화제 등에서 수상한 <피클즈 Pickles>(1971), 안시 영화제 등에서 수상한 <오페라 Opera>(1973), 히로시마 영화제에서 수상한 <지그문트 Sigmund>(1983), 베를린 영화제에서 수상한 <미스터 타오 Mister Tao>(1988),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바 있는 <메뚜기 Grasshoppers>(1990), 카툰스 온 더 베이 등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스파게티 가족 Spaghetti Family>(1996), <바쁘게 사는 자들의 세상에 대한 역사(History of the World for Those in a Hurry>(2001), <인생 Life>(2003), <도로의 무기 Weapons on the Road>(2008), <섹스&펀 Sex & Fun>(2012> 등 지난 60여 년 동안 거의 매해 거르지 않고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들어 발표해왔으며, 각종 영화제에서 120여 회에 달하는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끊임없는 창작 의지로 일생을 바쳐 만든 70여 편의 단편 애니메이션과 라이브액션 그리고 일곱 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통해 인간과 사회 그리고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특유의 풍자를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의 거장 브루노 보제토, 그의 다양한 애니메이션들은 유튜브 채널( www.youtube.com/user/BrunoBozzettoChannel )에서 온라인으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