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 감독
- 문진호
- 제작년도
- 2017
<사랑은 낙엽을 타고>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가 간직한 이미지의 존엄에 관해 벨라 타르는 영화감독을 은퇴하면서 설립한 영화학교 ‘필름팩토리’의 취지문에서 이미지의 존엄성(dignity)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가 자신의 영화를 말할 때도 이따금 사용하던 단어다. 영화 작업은 존엄을 보존하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다. 벨라 타르는 연출자다운 확신의 언어로 말하지만, 존엄의 이미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확한 논리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영화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그의 믿음엔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이 있다. 하지만 존엄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존엄의 이미지는 어떻게 스크린에 정착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영화가 세계의 가려진 진리를 밝히는 안내서가 되길 바라지만 그런 믿음은 언제나 불투명한 결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사적인 인상이지만, 많은 이들에게 경험의 빈칸처럼 남겨진 코로나19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그 불투명한 자국은 더욱 짙게 남겨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시기에 존엄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절실한 필요성을 가질 것이다. 지극히 사소하고 범용한 사물이지만, 올해 지켜본 두 편의 영화에 나온 두 장의 종이가 마음에 남는다. 하나는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거장의 영화에 등장하고, 다른 하나는 팬데믹 시기에 촬영된 영화에 나온다. 모든 사회적 활동의 절차가 온라인과 디지털로 정립된 시기에 종이를 다루는 영화의 감각은 무척 희박하거나 시대착오적이라 말하기 쉽다. 두 편의 영화는 그처럼 미약하기 짝이 없는 종이의 물질성과 그 위로 글씨를 쓰는 손짓을 잊기 힘든 동작으로 새겨둔다. 두 장의 종이가 존엄을 증명하는 이미지의 사례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그 이미지들을 떠올리면 존엄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입에서 내뱉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들다. 한 장의 종이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 사랑은 낙엽을 타고 >에 나온다. 앞서 벨라 타르를 말하며 거론한 단어들(공장, 인간, 존엄)에 더없이 적합한, 일찍이 타르 또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카우리스마키의 신작이다. 슈퍼마켓 계약직으로 일하는 안사와 건설노동자인 훌라파는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의 사정으로 일자리에서 해고된다. 계약직과 일용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익숙한 광경이다. 그들은 노동의 권리를 잃어버린다. 물품을 다루고 건설 도구를 쥐던 손, 유통기한이 지난 샌드위치를 가져가고 술병을 들던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안사가 일하던 식당이 문을 닫자 갈 곳이 없어진 두 사람은 밤의 극장으로 향한다. 영화를 보고 나온 안사는 종이에 연락처를 적어 훌라파에게 건넨다. 안사가 떠나고 훌라파가 담배를 피우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다 그만 연락처가 적힌 종이가 바람에 날려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종이를 잃어버린 훌라파는 아무런 단서도 없이 극장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안사를 기다린다. 극장 문 앞에 두 사람이 있었고, 한 사람이 사라진다. 다른 한 사람이 기다리다 마저 사라지면 그가 피운 담배가 바닥에 남는다. 단순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이 막연한 기다림이 말로 설명되지 않는 깊은 비애감을 불러온다. 극장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려 본 사람이라면 연인을 기다리며 피우고 버려진 담배에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카우리스마키의 화면은 평면적이고 정적이다. 공간이 침묵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물들조차 몸을 움직이고 동작을 구사하는 것에 서투르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그의 화면은 몇 개의 단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름이 떠다니는 천국과도 같은, 하지만 카우리스마키가 다루는 인물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하늘(< 어둠은 걷히고 >의 원제는 ‘지나가는 구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인물들이 머무는 지상의 벽과 바닥이 있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공간을 극도로 단순화하는 절차에 속한다. 이러한 절차는 카우리스마키가 밝힌 촬영의 과정에 깃들어 있다. 그가 밝힌 화면의 단순화 과정은 이런 식이다. 하나의 벽이 있고, 벽 앞에 두 사람이 머무른다. 그 위로 미약한 빛과 깊은 어둠을 드리우고, 한 사람을 사라지게 한다. 그러면 남은 한 사람과 벽과 공간에 드리운 빛과 어둠이 있다. 남은 한 사람을 마저 사라지게 하면 벽과 빛과 어둠이 남는다. 벽을 제거하면 빛과 어둠이 남겨지고 마지막으로 빛을 제거하면 어둠이 남는다. 카우리스마키는 그 과정에 영화가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안사와 훌라파는 극장 문 앞의 벽에 선다. 그들 뒤에는 (두 사람이 함께 보고 나온 영화인) 짐 자무쉬의 < 데드 돈 다이 >와 데이비드 린의 <밀회>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안사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남기고 떠나면 훌라파가 남는다. 훌라파가 자리에서 벗어나면 벽과 빛과 어둠이 담긴다. 극장은 카우리스마키가 제시한 영화의 원리를 전하는 연인들의 장소다. < 그들 각자의 영화관 >에 수록된 카우리스마키의 짧은 단편 <주조공장>은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쉬는 시간을 묘사한다. 그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공장 안에 있는 영화관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카메라에 담아낸 뤼미에르의 단편영화를 본다. 건조하고 무뚝뚝하지만 친밀한 감정을 공유하는 관객들의 장소. 돈이 없는 채로 갈 곳을 잃은 안사와 훌라파가 일시적인 도피와 무뚝뚝한 사랑을 이루는, 상실된 만남을 기다리고 다시 재회하는 장소도 영화관이다. 과거 없는 남자가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그들은 기억 없는 극장에서 다른 시간으로 들어서고, 다른 현실의 경로를 택한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애틋하게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인간적 존엄과 기억의 흔적을 흰 종이나 천에 담아낸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 과거 없는 남자 >의 첫 장면에서 기차에 도착한 남자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집어 든 종이, 그리고 기억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그의 몸에 둘린 흰 붕대. 그것들을 바라보는 카우리스마키의 시선은 인물의 시선이 위치한 곳보다 더 낮은 곳을 향한다. 안사가 떨어뜨린 종이와 훌라파가 피운 담배는 모두 바닥에 남는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듯이 지상에 당도하는 시간을 담아낸 영화다. 영화 초반부, 안사가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들른 인터넷 카페가 30분에 10유로를 받는 규칙을 설정해두듯, 어느새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도 시간은 자본의 논리에 붙잡혀 있다. 카우리스마키가 전제하는 영화적 실천의 방법은 그 시간의 질서에 격렬히 저항하기보다는 다른 속도의 시간을 동반하는 데 있다. 극장 앞에서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는 상대방과 다시 만날 때까지 서 있는 믿음과 기다림의 시간이 그러할 것이다. 극장 불이 꺼지고 훌라파가 화면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그가 기다린 시간이 영화에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카우리스마키의 카메라에 포착된 이들은 세계의 질서를 벗어나 높은 곳으로 향하는 이상적 천사들이 아니라 지상의 중력에 속한 평범한 노동자이자 관객들이며 연인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그들은 어딘가로 떠난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엔딩에서 인물들은 배를 타고 바깥으로 떠나거나, 지상에 남아 삶을 이어간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결말은 조금 다른 인상을 남긴다. 안사와 훌라파는 어디론가 떠나간다. 하지만 그들은 바닥에 닿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한 마리의 개가 있다. 안사는 개의 이름으로 ‘채플린’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지만, 그들은 채플린의 떠돌이처럼 세계의 바깥을 배회하다 어느새 돌아오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곳에 있을 것이다. 그들 사이의 한 마리 개는 탈출을 모색하는 대신 이곳에 남아 삶을 지속하도록 이끄는 조건이다. 그렇게 두 사람과 한 마리 개의 뒷모습을 담아낸 마지막 장면이 이어진다. 존엄은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지상에서 대응하는 자들의 뒷모습에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종이에 대해 짧게 말하고 싶다. 미야케 쇼의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에서 주인공이 작성하는 공책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한 영화는 아닐 것이다. 다른 평자와 관객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도 이 영화의 아름다움에 즉각적으로 사로잡혔고, 특히 첫 장면을 무척 매혹적으로 기억한다. 선천적 청각장애로 귀가 들리지 않는 복싱선수 케이코를 다루는 이 영화는 그녀가 일기장에 무언가를 적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내용은 아직 알 수 없고 그녀가 들을 수 없는 볼펜 소리와 얼음을 씹는 소리가 관객에게 전달될 뿐이다. 16mm 필름의 질감 위에 정밀한 거리감으로 포착된 케이코의 옆모습은 이 영화의 특별한 자질을 순식간에 설득시켜버린다. 아름다운 도입부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기에 이 영화에서 글자를 쓰는 몸짓은 무척 특별하게 다뤄진다. 카메라는 잡다한 대화나 심각한 갈등을 포착하는 대신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케이코의 침묵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가끔 그녀가 공책에 무언가를 적는 순간을 기록한다. 얼마 동안의 시간을 지나 공책에 무언가 적는 케이코의 습관이 기억에서 희미해질 즈음, 우연히 그 기록이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진다. 갑작스럽게 입원한 체육관 코치의 병문안을 온 케이코는 병실에 들른 코치 아내의 요청에 공책을 건네준다. 케이코가 그린 그림과 매일 같이 실천한 자기명령의 기록들이 타인의 목소리를 타고 영화에 도착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한 장의 종이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타인의 목소리를 매개로 스크린의 표면에 도착하기까지를 기다리는 영화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도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한 막연한 기다림이 있다. 두 편의 영화가 오늘날의 광폭한 시스템과 질서에 대항해 복고적 취향을 되살리는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미야케 쇼는 영화가 간직한 고전주의적 믿음(두 연출자는 필름 촬영을 고집해 이 영화들을 완성한 이들이기도 하다)이 오늘날의 환경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 자문하는 긴밀한 긴장과 불화를 도입한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복잡한 문제로 향하지 않는다. 두 영화는 무척 단순하다. 에드워드 양이 < 하나 그리고 둘 >의 제작 의도의 핵심으로 ‘극도의 단순성’을 말하던 것처럼, 장 뤽 고다르가 < 언어와의 작별 >에 관해 직접 작성한 개요에서 영화를 “단순한 왈츠”에 빗댄 것처럼 영화는 고독하고 아름다우며 무엇보다도 단순한 문제다. 두 편의 영화는 그 단순함의 원리를 한 장의 종이에 담아 보여준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영화 이미지의 존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완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 사랑의 고고학 >(2022)에서 주인공 영실(옥자연)은 고고학을 공부하고 30대에도 여전히 현장에서 흙을 털어내고 고르며 유물을 찾아내는 연구원을 하고 있다. 지도교수를 비롯해 같이 공부한 사람들이 이제 아카데미로 들어와 일을 찾으라고 해도 영실은 시간을 직접 만질 수 있는 현장이 좋다. 유적 안에 있는 옛 건물과 주거지가 변경되었음을 알려주는 지표인 유구선(遺構線)을 직접 붓으로 하나하나 흙을 털어내며 만지는 것은 시간의 과거와 접촉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영실이 자기의 삶 자체를 멀리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지층처럼 중첩된 과거, 현재, 미래가 발굴된 유적 현장처럼 그 시간들과 시간들 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는 마음들의 유구선을 끈질기고 집요하게 털어내고 고른다. 그것이 무엇이고, 언제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마음으로 변해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해갈지 지켜보면서 말이다. 때로는 그러한 고고학적 실천이 영실 스스로를 상처 내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영실은 모두가, 심지어 함께 사랑을 확인하고 미래를 약속했던 연인이 떠나고 그 남자가 야기한 폭력으로 폐허만 남은 후에도 그 감정의 결과, 약속의 의미와, 폭력의 메커니즘의 유물을 섬세하게 손끝으로 감각하며 끝끝내 자신의 삶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시간을 응시하는 자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뒤늦음’의 시간이나 ‘후회’라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고학 현장에서 ‘이후의 시간’은 뒤늦지 않고 언제나 적당한 때이기 때문이다. 이완민 감독의 첫 번째 장편 < 누에치던 방 >도 두 번째 작품처럼 시간과 마음의 지층들을 보살핀다. <사랑의 고고학>이 40대에 다다른 여성이 30대의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발굴하는 데 집중하는 영화라면, <누에치던 방>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만큼 큰 상처가 각인된 청소년기의 시간의 방에 갇혀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힘든 이들이 서로를 지켜봐주고 증언하고 그 지층의 실들을 발굴하는 영화다. 그렇게 교차적으로 목격된 시간들은 사회를 만든다. 독립된 인간이란 사회에 참여하면서 사는 인간이다. 이 영화는 30대, 40대가 된 성인들이 서로의 청소년기를 목격하고 상대에게서 우연히 자신의 흔적을 찾아내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10년 째 고시공부를 하다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실패한 미희(이상희)는 남자친구와도 헤어진다. 고등학교 때부터 오로지 공부를 목적으로 친구 관계도 모두 끊어내고 고립되어 살아온 미희는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미희는 고치에서 나오지 못한 애벌레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하철에서 볼펜과 메모지를 나눠주며 자기한테 하고 싶은 말을 그게 뭐든지 적어달라고 호소하는 고등학생 유영(김새벽)을 만난다. 유영 역시 이 사회 속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이 있지만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는 데 서툴다. 유영을 쫓아간 미희는 아파트 문을 두드리고 성숙(홍승이)을 만나게 된다. 미희는 충동적으로 한 번도 본적 없는 성숙에게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단짝친구라고 한다. 성숙은 그런 미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느끼면서도 집안으로 들여 다독여준다. 이 영화에서 성숙은 유일하게 사회에 참여하는 이다. 성숙은 미희에게서 자신과 자신의 진짜 어린 시절 단짝친구인 유영의 흔적을 읽어낸다. 미희는 부모의 만족을 위해 평생을 자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단절해온 상처를 갖고 있고, 성숙과 성숙의 남자친구 익주(임형국)는 단짝친구 유영을 잃은 상처를 안고 산다. 성숙과 익주는 유영이 죽은 이유를 알 수 없다. 유영은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말을 하고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유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성숙은 이제 겨우 고치에서 탈출해 사회로 나오려고 하는 미희에게서 그런 유영의 흔적을 처음부터 본다. 그리고 진짜 단짝 친구였던 것처럼 관계를 맺는다. <누에치던 방>은 30대인 성인도 뒤늦게 고치에서 나올 수 있다고 다독여진다. 그럴 때 아무 말 없이, 이유도 묻지 않고 친구로 받아들여주는 성숙 같은 주변인이 있다면 실패하고, 늦었더라도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연극배우인 성숙은 거리에서 어떠한 인위적인 무대장치나 소품도 없이 돈키호테를 연극하는 실험적인 공연을 한다. 관객도 지나가는 거리의 행인들이다. 그럼에도 성숙이 칼을 들고 풍차를 향해 달리는 연기를 하자 사람은 말이 되고, 지저분하고 무미건조한 회색도시의 풍경은 초원이 된다. 성숙은 사회에 참여하는 동시에 자기 주변의 사회를 바꾸는 사람이다. 미희는 과거에 자신이 모질게 굴어 단절했던 고등학교 친구와 대학교 선배를 찾아가 시간과 관계를 회복해 보려 한다. 그러나 선배와의 만남은 다소 허무하고 고등학교 친구는 만나주지 않는다. 결국 자살까지 시도하려던 미희는 수술을 하게 됐으니 보호자가 되어줄 수 있느냐는 성숙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자살을 포기한다. 늘 보호와 관심을 요청하던 미희는 돌봄의 요청을 받는 자가 된다. 독립적으로 사회 속에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성숙은 사실 미희만큼은 아니지만 유영이라는 상처와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미희는 그런 성숙을 알아봐준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유영을 알지 못했던 미희는 유령처럼 다른 시간대에 출현한 유영을 알아보지만, 성인이 된 성숙과 익주는 유영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한다. 아마도 미희가 만난 유영은 진짜 유영이기 보다는 유영과 같은 상처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등학생일 수도 있다. 그리고 미희가 그녀에게서 유영의 흔적을 읽어낸 것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있는 이들이 교차하면서 서로의 이야기의 흔적을 찾아주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서사 속에서 그래도 미희와 성숙은 살아남아 미희의 고등학교 친구 근경을 찾아간다. 그러나 근경은 미희에게 ‘그만 스토킹을 하라’며 화를 낸다. 근경은 ‘이제 와서 무엇을 함께 할 수 있겠냐?’며 반문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얽인 실타래처럼 혼재되어 살아가는 미희, 성숙과 달리 근경은 이미 오롯이 현재의 시간을 산다. 근경은 미희에게서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없다. 그리고 영화는 그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미희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르게 흘러가고 그 시간이 언제나 맞아떨어질 수 있으리란 염원은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낙관을 말하기보다는 성숙이란 존재가 고대유물처럼 얼마나 희귀한 존재인지를 역설한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미인은 아니었다. 남성처럼 호방하고 활달했지만 달필에다 의외로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박남옥 (朴南玉) 감독에게서 받은 인상이다. 내가 박 감독을 처음 뵌 것은 1981년 4월 20일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유현목 감독의 소개로 서울 서대문 화양극장 뒤쪽에 있는 한 경양식집에서였다. 나는 그때 <일간 스포츠>의 청탁을 받고 기획 연재물 ‘인물영화사’에 대한 자료를 정리 중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박 감독에 대해 쓰고 싶었으나 관련 자료가 빈약해 일차 집필 대상에는 빼놓은 상태였다. 그랬는데 뜻밖에 미국에 살고 있던 그가 잠시 귀국했던 것이다. 만나고 헤어진 지 5일쯤 지났을까 그가 편지를 보내왔다. 엷은 미농지 넉 장에 볼펜으로 쓴 달필의 편지에는 추가 내용과 함께 간곡한 부탁이 들어 있었다. 비록 그의 표현대로 ‘일제(日帝) 교육 덕에 철자법’이 틀리긴 했지만 주요한 부분에는 삼각표시(△)를 하는 등 인상과는 달리 매우 꼼꼼한 성품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그가 광복 전 세운 투포환 한국 신기록 수립 연도를 재확인하면서 광복 후는 백옥자지만 광복 전은 박남옥 이라고 기재하거나, 집필에 참고가 될 만한 자신의 과거사 게재 잡지<신여원>를 알려 주었다. 심지어 데뷔작 < 미망인 >의 스틸까지 지정하고, 이혼한 남편(방송연출가 이보라 )에 대한 얘기는 되도록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런가 하면 ‘리어카 이동차’를 탄 사진은 흥행 가치가 없으니 내지 마세요 하거나, 제7회(1960년) 동경 아시아영화제 때 일본배우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가 그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스냅 사진에 대해서는 “멋은 있어도 좀 건방질까?” 이렇게 타진하는 식이었다. 1955년은 6.25전쟁 복구와 함께 영화행정 업무가 국방부에서 문교부로 이관되고 이규환 감독의 < 춘향전 >이 흥행에 크게 성공해 국산영화가 기업의 기틀을 마련한 해였다. 그 뿐만 아니라 무성영화 시대부터 활약해온 배우 이금룡이 별세하고 그를 기리는 최초의 민간 영화상인 금룡상(錦龍賞)이 제정돼 시상되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이 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이 탄생했다. 그의 처녀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이보라 원작 각본 < 미망인 >은 6.25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 것이다. 박남옥 감독은 1923년 2월 24일 경북 경산군에서 섬유업을 하는 박씨 집안의 10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해 초등학교 때 이미 도대회에 선발될만큼 운동감각이 뛰어났다. 그래선지 경북여고 재학 중일때 단거리 달리기와 높이뛰기 선수로 뽑혀 경기에 나가 입상했고, 1939년 제2회부터 41년까지 투포환 선수로 조선신궁봉찬체육대회에 참가해 3년 연속 우승, 한국최고기록을 보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 반면 미술과 문학에도 남다른 재주를 보여주었다. 3학년 무렵 그는 최인규 감독의 < 집없는 천사 >(1941)를 보고 꽃 파는 소녀 역을 맡은 김신재 에게 반하면서 영화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장차 화가가 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희망과는 달리 집안의 압력에 굴복해 미술이 아닌 가정과에 진학하게 된다. 광복 전인 1943년이었다. 정작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화여전(梨花女專)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오히려 헌책방을 뒤지거나 영화를 보는 일에 더 열을 올렸다. 그래서 기숙사감의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이 무렵 그는 성장기 여학생들의 감성을 다룬 <제복의 처녀>(레온티에 사간, 1931)와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베를린올림픽 다큐멘터리 < 민족의 제전 >(1936)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특히 그가 이 영화를 각별히 좋아하게 된 이유는 두 편 다 여자가 연출했다는 점이었다. 박 감독은 결혼을 강요하는 부모에게 맞서 가정과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44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구 일일신문의 기자로 입사했다. 그는 여기서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2년도 안 돼 다시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인 영화의 길에 들어선다. 첫발을 내디딘 곳이 조선영화사(사장 이재명 ) 광희동 촬영소였다. 그는 거기서 뉴스 편집 일을 거들며 최인규 감독의 < 자유만세 >, 이규환 감독의 < 똘똘이의 모험 >과 < 민족의 새벽 >(이상, 1946)의 편집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후 최은희 를 데뷔시킨 신경균 감독의 < 새로운 맹세 >(1946)의 스크립터 일을 맡게 된다. 50년 초여름 박남옥 은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고향으로 선을 보러 갔다가 6.25전쟁을 겪는다. 그는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형모 감독을 따라 국방부 촬영대의 일원으로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영천작전에 참여했다. 그가 방송극작가 조남사 의 소개로 방송극 연출가인 이보라 (李保羅)와 백년해로를 기약한 것은 1954년 서른세 살 때인 부산에서였다. 9.28수복 후 관훈동 종로학원 자리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첫딸 경주를 낳았다. 그가 언니 돈까지 끌어들여 제작한 < 미망인 >은 낳은 지 두 달도 안 된 딸을 들쳐업고 찍은 영화였다. 20여명의 스태프에게 밥을 해먹이고 리어카 이동차에 올라 앉아 고무신 차림으로 레디고를 외치는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중앙극장에서 개봉된 영화는 4일만에 간판을 내리는 참패로 끝났다. 게다가 결혼생활마저 순탄치 못했다. 심한 성격 차이로 남편과도 3년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1956년이었다. 영화 실패와 파경으로 인생에 회의를 느낀 박 감독은 <시네마 팬>이라는 월간 영화잡지를 창간해 스크린 대신 활자로 승부를 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마저 쉽지 않았다. 제3자에게 판권을 넘기고 57년 둘째 형부 김상문(金相文)이 운영하는 동아출판사에 들어갔다. 78년 퇴사할 때까지 21년 동안 관리과장으로 근무했다. 2년 뒤 그는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드라마센터에서 연극을 공부하다가 UCLA 디자인과를 나온 딸이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박남옥 감독은 소주 2~3병은 눈 깜짝할 새에 마시는 주량과 ‘골초’라는 말을 들을 만큼 대단한 애연가였다. 또한 웬만한 권투 중계 프로는 놓치지 않았던 복싱 팬이기도 했다. 나는 박 감독과 만나기 전에 그의 남편이었던 이보라 선생을 먼저 알았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 사이 문인들이 즐겨 찾던 명동의 ‘갈채다방’과 기독교방송국이 있던 종로 2가의 ‘시온다방’ 시절이었다. 그는 스포츠형 머리에 미소 머금은 모습으로 나타나 주태익 , 조남사 등 주로 방송극작가들과 자주 어울리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