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부양할 수 있습니까?
- 감독
- 장호경
- 제작년도
- 2013
자르고 붙이기(cut and paste)는 예술 분야에서 전통적인 제작 방식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오늘날 사회, 문화, 경제 전 분야에서 나타나는 우리 삶의 주요 양식이기도 하다. 영화의 몽타주, 예술의 콜라주, 대중문화의 리믹스는 모두 자르고 붙이기의 전략을 따라 하나의 대상을 본래의 맥락으로부터 떨어뜨리고 그것을 새로운 자리에 위치시켜 의미의 전복을 꾀한다. 한편, 자르고 붙이기는 동시대의 삶의 양식이기도 하다. 가속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공간은 잘게 쪼개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의 신체 또한 하나의 사물처럼 조각난다. 예를 들어, 노동 현장은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파트타임 노동자로 채워지고, 주거 공간은 대부분 성냥갑처럼 만들어진 구조물을 켜켜이 쌓아 올려 완성된다. 만약 우리 삶이 자르고 붙이기를 하나의 양식으로 채택하여 따르고 있다면, 그런 삶은 분명 누더기처럼 기운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그런 불완전한 것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김효준 감독의 < 자르고 붙이기 >는 경제적으로 파산의 상태에 이른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 이 작품의 소재는 1990년대 후반의 IMF 시기와 2000년대 후반의 금융위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빚의 굴레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할 때 자주 쓰이던 신용불량자, 카드빚, 고시원과 같은 것들이다. 정호는 수산 시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는 고시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정호와 그의 어머니는 카드빚을 두고 심한 갈등을 빚는다. 어머니는 아들 몰래 신용카드를 발급받고 그것으로 빚을 갚으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호는 빛 한 줄기 새어 들어오지 않지만 모든 소리는 새어 나가는 고시원 방에서 어머니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낸다. 정호와 어머니의 갈등은 우발적인 사고에 의한 비극으로 이어진다. 정호는 어머니가 숨기고 있던 카드를 빼앗아 그것을 가위로 자르려고 하고, 어머니는 그런 정호를 말리다가 손가락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신용카드를 놓고 분열된 모자의 관계는 두 동강이 난 신용카드와 상처 입은 어머니의 손가락을 통해서 형상화된다. 대다수의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이 스스로 비극을 초래하는 것처럼, 주인공 정호의 우발적인 행동이 그의 비극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자르기’에 해당하는 부분과 ‘붙이기’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구분된다. 신용카드를 자르다가 어머니의 손가락을 다치게 한 정호의 이야기가 있다면 그런 정호의 행동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정호의 어머니가 손가락을 다쳐 응급실에서 간단한 봉합 수술을 받는 이야기와 어머니의 치료비를 내기 위해 자신이 가위로 잘랐던 신용카드를 접착용 셀로판테이프로 붙이는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대구를 이룬다. 잘린 사물이 다시 붙고, 잘린 신체가 다시 붙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전반부의 위기는 일시적으로 해소된다. 흥미로운 것은 ‘붙이기’에 해당하는 이 영화 후반부의 내용이 갈등과 위기의 완벽한 해소가 아닌 비극의 심화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손가락은 수술을 끝낸 것이지 치료가 끝난 것이 아니며, 셀로판테이프로 붙인 신용카드는 정호가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용카드라는 소재를 중심에 놓고 보자면, 정호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채무자의 신세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부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감행했던 행동이 그를 다시 부채의 늪으로 빠뜨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르고 붙이기>는 빚이 또 다른 빚을 낳고, 비극이 또 다른 비극을 낳는 아이러니를 통해서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호의 행동, 즉 그가 무언가를 자르고 붙이기를 행할 때 그의 손은 두려움에 떨고 있음에 주목하자. 그의 손은 가위를 들고 신용카드를 자를 때 또는 셀로판테이프로 잘린 카드를 다시 붙일 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린다. 물론 각각의 상황과 의미는 사뭇 다르다. 신용카드를 자를 때 정호는 분노, 짜증, 흥분 속에서 반대로 신용카드를 붙일 때 정호는 불안, 초조, 긴장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 정호의 신체적 떨림은 한편으로는 해체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겪는 고통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체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고통으로 볼 여지가 있다. 정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정호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큰 빚을 남기고 떠난 것으로 보인다. 정호는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빚과 그의 부재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인 동시에 어머니, 아내, 딸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이다. 정호가 겪고 있는 이 이중의 고통은 고시원 고유의 독특한 건축적 공간 구성에 따라서 시각적으로 형상화된다. 이 영화의 주요 배경으로 쓰인 고시원을 하나의 소우주로 본다면, 그것은 전체를 작은 부분들로 자르고 이어붙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건축적 공간에서 정호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로 대물림되는 가족의 해체를 겪으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받는 것이다. 영화는 정호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거나 반대로 그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는다. 정호가 어머니의 손을 다치게 만든 그날은 하필 그의 딸의 생일이었다. 어머니를 걱정하면서 딸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그 기묘한 상황은 앞으로 정호가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자신의 가족을 위해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를 되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정호의 미래에 대해서 그 어떤 판단도 그리고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정호의 삶이 누군가의 무차별한 가위질로 난도질당하여 찢김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서 이제 정호에게 과거를 박차고 일어서야 할 시간이 도래했다는 하나의 신호를 준다. 열린 결말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호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면서 연신 헛구역질을 한다. 만약 정호의 헛구역질이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는 구토의 전조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를 떨쳐 낼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의 제스처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적 파산이 초래한 찢김의 고통을 다룬 이 작품은 어딘가에서 비슷한 경험을 할지도 모를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극약처방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9월의 < 박서방 >( 강대진 , 1960), 10월의 < 마부 >(강대진, 1961)에 이어 11월에도 또 한 편의 ‘ 김승호 영화’를 소개한다. 김승호는 < 로맨스 빠빠 >( 신상옥 , 1960), < 서울의 지붕 밑 >( 이형표 , 1961), < 삼등과장 >( 이봉래 , 1961), < 월급쟁이 >(이봉래, 1962) 등 60년대 초에 대중의 사랑을 받은 대표작들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그 영향력이 다했다고는 할 수 없을 소시민 가장의 초상을 그려냈다. 그가 연기한 아버지들은 한 집안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가부장의 권위는 바람 앞의 등불 신세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가 담당하는 경제 활동의 토대가 흔들리는가 하면, 자식 세대는 새로운 가치관을 내세우며 불화를 일으킨다. 대체로 사람만 좋을 뿐 기민함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 김승호는 이런 변화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나 김승호 영화에서 이런 시대의 변화와 세대 갈등이 치명적인 지경에 이르는 경우는 드물다. 아버지의 곤경은 곧잘 웃음기 어린 해프닝으로 마무리되며, 가장 절망적인 경우라도 아랫세대에서 구원자가 등장한다. 구원자의 역할을 맡는 이는 주로 장남이나 맏사위 등 아랫세대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남성인데, 그는 가장의 자리를 물려받음으로써 아버지의 곤경을 해소하며 분열될 것처럼 보였던 가족은 다시 하나로 뭉친다. 이러한 봉합은 주로 인기 라디오 드라마를 바탕으로 스타들을 내세운 상업 영화로서 피할 수 없었던 보수성에서 기인하기도 할 테고, 한국전쟁 이후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을 거치며 끝없이 질서가 뒤바뀌는 과정에서 낡은 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한편 그 과정이 폭력적인 뒤엎기가 아니라 성실하고 화목한 승계의 형태를 취하기를 열망했던 대중의 절충적 무의식이 발현한 사례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 해바라기 가족 >( 박성복 , 1961)은 다소 색다른 빛을 띤다. 우선 김승호가 연기한 정진구는 소시민이 아니라 잘 나가는 기업의 회장이다. 영화 말미에는 그가 경영하는 회사가 브라운 상사와 8천만 원 규모의 계약을 진행 중이라는 대사가 등장하는데, 이는 요즘 화폐 가치로 따지면 약 30억 원에 해당한다. 거기서 추측할 수 있는 부유함에 걸맞게 그의 가족은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을까 의심할 정도로 울창한 숲에” 둘러싸였으며 도로에 면한 대문에서 집이 보이지 않고 정원에서는 공작새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살고 있다. 정진구의 사업에는 어떤 문제도 없으며, 부가 위협받는 일도 없다. 소시민이 아닌 상류층의 대부호인 그는 사회 및 노동 환경의 변화에 아무런 위기도 느끼지 않는다. 영화는 정진구의 집에 새 입주 가정교사로 여대생 미원이 찾아오며 시작된다. 미원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 집안 전체에 감도는 비극적인 분위기”를 느낀다. 비극적인 분위기의 원천은 다름 아닌 정진구의 가족들이다. 첫째 아들 창식은 6.25에 참전했다가 다리를 다친 뒤 술과 염세 철학에 빠진 채 방에서 두문불출 중. 첫째 딸 영애는 전후의 자유주의적 향락에 몰두하는 아프레 걸. 둘째 아들 정식은 신경이 날카로운 권투선수. 셋째 아들 인식은 학업보다 트럼펫을 좋아하는 고등학교 졸업반. 그리고 둘째 딸인 윤애와 윤애의 어머니까지. 정진구가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는 가운데 이 여섯 가족은 매일 같이 서로를 비방하거나 무시하며 살아간다. 이 가정불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선 가난이 야기한 조급함일 리는 없다. 그렇다고 전통적 가치관과 현대적 가치관을 둘러싼 세대 간의 불화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영애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금년에 졸업을 하면 도미 유학을 할 예정인데 봉건적인 가정의 인습 때문에 아까운 재능을 썩힐지도 모르는 숨은 천재”라는 농담을 던지기는 하지만, 사실 부모 세대가 자녀들의 삶을 좌우하면서 삶의 방식을 강요하거나 자식들의 남다른 가치관 앞에 쩔쩔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족 구성원들 간의 이해관계나 성격 차이가 가정불화를 낳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언어적, 물리적 폭력은 매번 특별한 명분이나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몸에 익은 생활 습관처럼 보이며, 한두 장면 앞에 다투었던 이들이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화를 나누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결국 남는 것은 정진구, 더 정확히는 그의 엽색 행각뿐이다. 그는 창식과 영애를 낳은 첫째 부인을 평양에 버려두고 왔다. 중식을 낳은 둘째 부인은 기생이었는데 정진구의 비서와 눈이 맞아 도망갔다. 인식을 낳은 셋째 부인은 가정부였고 살인죄로 복역 중이다. 넷째 부인은 윤애의 어머니는 창식, 영애와 같은 연배인 스물아홉에 불과하다. 더구나 이 넷째 부인이 집안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별장에 휴양하러 가겠다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 정진구는 요즘 또 낙원동에 새 애인을 두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복잡다단한 가족 구성의 결과 창식은 6.25 당시 평양에서 아버지가 버린 어머니를 찾으려다 다리를 다친 뒤 방에 틀어박히고, 중식과 인식은 서로의 어머니를 들먹이며 서로 신경을 긁고, 영애는 고작 다섯 살 연상인 넷째 부인을 비웃는다. 결국 가족들의 다툼은 자신의 잘못을 책임지지 않은 채로 부재하는 정진구를 향한 분노가 변형된 결과인 셈이다. 김승호는 이런 인물을 평소의 김승호처럼 연기한다. 그는 가족들의 비난에 인상을 쓰거나 큰소리를 내는 법 없이 늘 조곤조곤하게 말한다. 그렇잖아도 이제 가정에 충실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함께 잘 해보자고.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며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없다. 이토록 무책임하고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위선적으로까지 보이는 김승호를 본 적이 있던가? 영화는 그런 그를 꿈속에서나마 기어이 지옥으로 끌고 가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전 부인들과 대면하도록 하는데, 거기에는 이자에게 말뿐인 속죄와 봉합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결기마저 느껴진다. 결국 정진구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는 새로운 관객들이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언급을 삼가겠지만, 대중적인 홈드라마로 나아가기 위한 각종 타협적인 장치에도 불구하고 그 결기가 완전히 꺾이는 일은 없으며 오히려 안정적인 서사를 훼손해서라도 불편함을 남기고야 말겠다는 서슬이 남아 있다는 점만은 말해두기로 한다. 가부장의 지위는 만장일치로 복권되거나 승계되지 않으며, 가족에 불완전하나마 화합의 가능성을 가져오는 것은 전적으로 다음 세대의 의지 덕분이다. 때로는 끌어안고 함께 나아갈 수 없는 가족도 있는 법이다. 그것이 돈 많고 사람만 좋아 보일 뿐 다음 세대에게 원죄와도 같은 고통을 남긴 채로 자신의 죄과를 전혀 책임지지 않는 가부장이라면 특히 그렇다. >> 해바라기 가족 VOD 보러가기 <<
영화 초반부 가족 구성원들은 도시적 삶 속에서 누릴법한 로맨틱한 순간을 선보인다. 막내딸은 버스에서 남학생과 눈이 마주치고, 여배우와 연애를 하는 큰아들은 멜로 영화를 찍고 있으며, 첫째 딸은 동물원 데이트를 즐긴다. 이러한 낭만의 중심에는 가장 ‘로맨스 빠빠’가 있다. 궁핍한 일상 속에서도 아름다움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양, 그가 매일 출근길에 잊지 않고 챙기는 것은 꽃다발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세상에 없을 듯한 이상적 가족이다. 홈드라마 < 로맨스 빠빠 >( 신상옥 , 1960)는 일반적으로 1960년대 한국사회가 요청한 서민 가족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돼왔다. 로맨틱한 가장과 개성 강한 자식 세대의 조화, 실직으로 인한 위기를 쾌활히 극복해나가는 어질고 고운 이야기는 폭넓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작품은 오프닝에서부터 가족 구성원의 간명한 캐리커쳐를 제시한다. 탈세속적 로맨티스트 아버지( 김승호 ), 현실주의자 주부 어머니( 주증녀 ) 그리고 2남 3녀의 자식들로 구성된 서울 거주 가족이 모델이다. 매사에 반항적이고 도전적인 막내( 신성일 ), 서울깍쟁이 여고생 넷째( 엄앵란 ), 외모에 관심이 많은 여대생 셋째( 도금봉 ), 대학 자퇴 후 영화계에 투신한 자유주의자 둘째( 남궁원 ), 결혼적령기의 현모양처형 첫째( 최은희 )는 당대 청년층의 보편적 범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막내는 4.19를 선도한 신세대를 대변하고 있다. 여기에 과학자 맏사위로 김진규 가 측은한 도둑으로 주선태 가 등장하니 작품 자체가 1960년대를 이끌 배우들의 온상으로 보일 정도다. 당시 신필름 소속 신예 신성일은 이 작품을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하였다. 등장인물을 통해 이성·지성·감성의 분배, 문화적 육체적 건전성의 조화, 공동체와 가족 윤리까지 고려된 인상이며 좀도둑까지 의리와 인정을 따지는 형국이니 참으로 다사롭고 호혜로운 소우주다. 김희창의 동명 인기 라디오 드라마를 각색하였으니 자연스레 영화의 전개는 에피소드식이다. 드라마틱한 갈등과 불화보다 소소한 상황 속 유머와 페이소스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감독 신상옥이 다양한 영화형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특히 영화 중반에 가족 모두가 안방에 모여 시나리오를 창작하는 장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 신파 멜로, 사극 등 다양한 형식이 가족의 상상력에 동원되며 이는 실상 신상옥이 이전과 이후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전개해간 작품들의 다양성을 이룬다. 신상옥은 이 작품을 전후로 해서 < 동심초 >(1959)나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와 같은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로맨스 빠빠>는 각 캐릭터가 지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심성의 성좌를 선보이는데, 그 우아한 조화로움의 경지가 신상옥 영화의 형식적·감성적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여러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를 유려하게 연결 짓는 것은 김승호가 맡은 로맨스 빠빠 캐릭터 탓이 크다. 김승호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적 아버지의 전형적 표상이었다. 그가 담당한 한국적 아버지의 전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 돈 >(1958), < 박서방 >(1960), < 마부 >(1961)에서처럼 봉건적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하층민 가부장의 역할이 하나라면, 속물적 근대화의 조류를 반영한 < 인생차압 >(1958), < 삼등과장 >(1961), < 로맨스 그레이 >(1963) 등에서 최종적으로는 영악한 시대에 패배하고 마는 서글픈 샐러리맨의 모습이 다른 하나다. 보험회사 만년 계장으로 겨우 가족을 부양하는 <로맨스 빠빠>는 아마도 두 번째 경향과 비슷해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선뜻 영화 <로맨스 빠빠>에 ‘한국적’(근대화의 균열과 가부장주의를 동반한다는 뉘앙스에서)이라든가 ‘현실적’(4.19전후의 시대정신의 반영이라는 뉘앙스에서)이라는 레테르를 붙이는 데 주저하게 되는 건 왜일까. 오히려 <로맨스 빠빠>는 세계시민적 교양과 이상적 추동으로 가득해 보이지 않는가. 그 일차적인 이유는 김승호가 열연한 ‘로맨스 빠빠’ 캐릭터가 한국의 전형적 가부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꽃다발 든 샐러리맨이자 책을 즐겨 읽으며 자식들과의 일상적 대화에도 무심치 않은 다정한 중년이다. 영화 속 빛나는 장면들은 로맨스 빠빠의 낭만적 몰입과 상상을 통해 등장하곤 하는데, 가령 이러한 장면이 있다. 동네에 기생집이 들어섰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로맨스 빠빠는 아내가 말로 일러주는 약도를 따라 골목골목을 상상으로 누빈다. 이는 기생에 대한 세속적인 욕망으로 발동된 상상적 모험이기보다, 이 마을 어느 골목엔가 있다는 어여쁜 기생아기씨라는 아름다움에 일반에 대한 상상적 지향인 셈이다. 또 이러한 장면도 있다. 아내와 사랑싸움 끝에 자식들이 부르는 합창곡을 받아 눈을 지그시 감고 부르는 세레나데 ‘기쁜 우리 젊은 날’이나 실직된 날 술집에서 부르는 ‘켄터키 옛집’과 같은 노래의 장면들 말이다. 서민 가족을 서술하는데 관습적으로 동반되는, ‘먹고살기 힘들었지만 인정만은 넘쳐나던 그때 그 시절’이라는 정서는 늘 공동체의 과거 기억과 맞닿아있다. <로맨스 빠빠>가 전달하는 가족은 서민적이고 온정 가득하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 도래하지 않은 이상적 가족이자 미래의 상이다. 1960년 당시 자동차와 피아노가 집집마다 다 있다는 둘째 딸의 투정도 투정이거니와, 장성한 자식 전부가 남녀차별 없이 대학교육 이상의 문화적 수혜를 누리고 있으며 가족 구성원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일반적이지 않다. 다시금 온 가족인 둘러앉은 시나리오 상상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각자의 입장에 따라 소환된 상상적 이야기들은 사실상 이러한 교양에 기반을 두고 있다. 둘째의 시나리오 버전은 <춘희>나 <안나 카레니나> 등에서 보암직했던 치정 서사를 전제로 정서적 모더니즘을 선보인다. 둘째의 이야기가 삼강오륜에서 벗어날 것이라며 경쟁에 나선 아버지는 초로의 남자와 젊은 여성과의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절대적 진리와 아름다움의 추구를 바탕에 두고 있다. 어머니 버전은 어떠한가. 그녀는 값싼 연애물을 비판하며 <춘향전>과 같은 한국 고전에 나타난 정서와 윤리를 강조한다. 한편 실직당한 날 밤 바에서 술을 마시던 로맨스 빠빠는 맥주병 뚜껑을 머리에 뒤집어 얹고 왕관을 쓴 양 “오늘부터 난 자유의 왕자야”라며 외치는데 대사의 어조가 사뭇 셰익스피어답다. <로맨스 빠빠>는 1960년대 초 요청되었던 문화와 교양의 심상적 분배를 서민가족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위트 있고 관용적이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영화 전반을 휩싼다. 형식적으로는 다양한 장르를 경유하는 한편 정서적으로 서양과 동양의 고전을 바탕에 둔 문화적 국제주의에 기반을 둔다. 그런 점에서 <로맨스 빠빠>는 비슷한 시기 제작된 서민적 홈드라마인 <삼등과장>이나 < 서울의 지붕 밑 >보다 한국적 현실에 덜 긴박되어 있으며 세태풍자적 요소도 적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가피하게 영화 속에는 당대적 터치가 가미되었는데 투쟁과 반항을 고유한 개성으로 삼던 막내가 아버지 실직 후 기성세대와의 투쟁을 포기하고 협력을 택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저돌적 아들을 포함한 전 가족의 자력갱생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을 가부장의 복권과 명랑한 근대화의 지향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왕좌에서 물러나 권력을 잃은 아버지가 비로소 진정한 가족의 중심이 된다는 아이러니야말로 <로맨스 빠빠>가 영민하게 시대에 응답하는 한편 능청스레 시대를 넘어서는 지점일 것이기 때문이다. >> 로맨스빠빠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