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로봇
- 감독
- 팀 하퍼, 팀 칼링스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지미 하이버트, 마이크 헤일리, 엠마 챔버
(사진: “ Häxan ”,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반드시, 라고 단언하고 싶은데, 자신을 시네필이라고 자처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일시적으로 이상한 영화를 찾아보느라고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는 재빨리 빠져나오고 다른 누군가는 여기에 머문다. 그 영화들이 ‘불법적인’ 대상이 아니라면 (이를테면 스너프 필름, 아동성애 영화, 기타 등등) 각자의 취향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이 영화들을 ‘이상한 영화’의 수호성인 아모스 보겔은 ‘전복적인 예술영화(subversive art film)’라고 불렀다. 아모스 보겔을 이야기할 자리는 1974년까지 기다려주길 바란다. 여기서 질문은 영화사의 순간들에서 ‘이상한 영화’라고 부르는 영화가 언제 나타났느냐는 것이다. 물론 방점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다른 계보를 열거하게 될 것이다. 다른 예술들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사회적 위반, 법적 금지의 경계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했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선을 넘고 싶어 했다. 누군가는 한계를 부수길 원했고, 다른 누군가는 돈을 원했다. 누군가는 예술적인 실험을 하고 싶어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거기서 쾌락을 향유했다. 여러 영화 제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여기서 시작해보겠다고 결심했다. 세계영화사의 순간들은 그렇게 가끔 하나의 선처럼 느껴지는 앞과 뒤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옆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내가 ‘이상한 영화’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다가 가장 멀리서 마주친 영화는 벤야민 크리스텐센의 스웨덴 영화 < 헥산 >(1922)이다. “Häxan”은 번역하면 ‘마녀’라는 뜻이다.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19세기인 1879년에 태어났다. 처음에는 배우가 되기를 원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18년부터 ‘흑마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서점을 뒤지던 벤야민은 독일 베를린 서점에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 사본을 구하게 되었다. 이 책은 1486년 독일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하인리히 크라메르가 쓴 마녀 처단에 관한 책이다. 주술을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마녀로 규정된 여자의 마법의 악을 ‘끝내기 위해서’ 자백을 끌어내는 고문 기술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에 유럽에서는 마녀로 내몰린 여자들이 산채로 화형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하인리히 크라메르는 마녀의 존재를 신학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주장하고, 더 나아가 마녀사냥을 제도화하는 데 기여하고, 심지어 이 책은 마녀재판의 법전이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소설에서 사용된 장면들, 마녀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어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들이 여기 실려 있다. 교회 내부에서도 이 책은 논쟁이 되었으며, 오히려 그래서 많은 독자를 얻게 되었다. 1519년에 야콥 스프렝게르가 이 책에 새로운 저자로 나서서 마치 개정 증보판처럼 추가해서 1533년에 출간하였다. 손에 손을 거쳐 이 책은 마녀를 자백시키는 안내서가 되었고, 잔인한 고문 기술자들은 상상으로 쓰인 이 책의 내용을 감옥에서 불행한 여자들에게 실행하였다. 『마녀의 망치』는 일시적으로 판금 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왕실 궁정에서 공공연하게 읽히는 금서가 되었으며, 16세기 이후에 마녀재판에서 더 잔인한 기술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마녀의 망치』 표지와 <헥산> 포스터 (사진: “ Häxan ”, IMDb) 벤야민 크리스텐센이 구한 사본 『마녀의 망치』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여러 개의 판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본이 15세기라는 것을 셈에 포함해주길 바란다. 1부에서는 먼저 마녀의 존재와 악행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2부에서는 마녀들이 저지른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범죄와 악마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3부에서 마녀재판의 실제 절차와 고문을 통한 자백 유도 방법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마녀의 망치』에 만족하지 않고 벤야민은 1919년부터 거의 2년 동안 마녀사냥과 재판에 관한 상세한 규정들, 사례, 실제로 실행하는 집행과정을 담은 삽화들, 여기에 더해 각종 문건을 모았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벤야민은 1920년까지 발표된 마녀들에 관한 소설과 희곡도 모았다. 그런 다음 자료들을 바탕으로 영화제작을 결심하였다. 벤야민이 준비한 것은 단지 마녀에 관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준비한 <헥산>은 유럽 중세로부터 400년에 걸친 마녀사냥과 재판에 관한 백과사전이었다. 벤야민은 제작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구한 도판들을 그 앞에서 전시하다시피 했고,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재판기록과 집행을 낭송하기도 했다. 이 기괴하지만, 분명히 야심적인 프로젝트에 스웨덴 필름 인더스트리가 관심을 보였다. 벤야민과 촬영 감독 요한 안케르스트예르네는 덴마크에 오직 <헥산> 촬영을 위한 영화 스튜디오를 사들였다. 그런 다음 야외는 중세를 재연하였고, 실내는 모두 밀폐시킨 다음 어두운 그림자와 빛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해가 떨어진 다음에만 촬영을 시작해서 새벽이 오면 멈추었다.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헥산>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중세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제단화를 스크린 위에 펼쳐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가장 비싼 무성영화가 되었다. <헥산>은 1921년 2월에 촬영을 시작해서 그해 10월까지 이어졌다. 빛과 그림자 간 대조가 두드러지는 장면 / 우주를 둘러싼 천사 합창단의 모습 (사진: “Häxan( 1 , 2 )”, IMDb) 영화 <헥산>은 7개의 연대기로 나누어져서 진행된다. 첫 번째 시작은 마치 학술 발표를 위한 도판 설명처럼 이어진다.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주변에 공기와 불이 둘러싸고 별들이 주변을 떠돌면서 천사 합창단이 보인다. 그런 다음 악마와 마녀의 조각상, 목판화, 삽화를 차례로 소개한다. 이 화면자료들이 펼쳐지면 IMAX 스크린으로 벽화처럼 보고 싶을 것이다. 사탄이 나타나서 부부가 잠든 침대에서 아내를 유혹하고, 질식시키고, 살해하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랑의 묘약을 구하는 여인, 성에 눈뜨는 여인, 그 여인이 몰래 먹이는 묘약에 흥분하는 승정(僧正), 게걸스러운 폭식, 들린 자들(the possessed)이 사탄의 북소리에 맞춰 한밤중에 불을 피우고 춤을 추는 축제,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이 장면들을 종종 멜리에스 영화에서 본 특수효과를 이용해서 펼쳐 보인다. 하지만 이 장면들이 우스꽝스럽기는커녕 오싹해지는 것은 만들고 있는 쪽에서 지금 이걸 진심으로 믿고 있구나, 라는 설득을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민담과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들처럼 보였지만 여기에 교회가 개입하면서 고문이 등장한다.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그 과정의 세부를 묘사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여기서 이 영화가 그런 이야기들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졌단 생각을 해야 한다. 게다가 신성모독 장면을 재연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그래서 <헥산>을 보고 있으면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라는 장면들과 마주치게 된다. (상) 마녀와 악마에 관한 삽화 / (하) 사탄의 북소리에 맞춰 춤추는 들린 자들(the possessed) (사진: “Häxan( 1 , 2 )", IMDb) 벤야민 크리스텐센이 1921년에 이 영화를 만들면서 프로이트의 저술을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아직 살아있었고, 『쾌락원칙을 넘어서』를 발표한 직후이다. <헥산>의 마지막 연대기는 동시대에 이른다.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여성은 몽유병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녀는 몇 가지 과정을 거쳐서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그 당시 정신병원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셀 푸코의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고문 장면뿐만 아니라 성상 모독, 마녀에 관한 찬양, 중세 교회에 대한 적나라한 재판 장면과 함께 여성의 누드, 신체 훼손, 시체 손상에 이르는 장면들이 등장하면서 개봉 당시 스웨덴과 덴마크의 검열은 통과했지만, 독일과 프랑스, 특히 미국에서는 검열에서 문제가 되어 개봉을 위해 재편집이 불가피했고 상당 부분이 삭제되어 국가별로 여러 판본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러 판본이 만들어졌다. (내가 보지 못했지만) 가장 흥미로운 판본은 1968년 메트로 픽쳐스 코퍼레이션이 <헥산; 옛날 옛적부터의 마녀들(Häxan; Witchcrafts through the ages)>이다. 이 판본에서는 『네이키드 런치』의 윌리엄 버로스가 영어 나레이션을 한다(고 한다). 이 무렵 윌리엄 버로스는 마약중독 상태에서 장 주네를 둘러싼 친구들과 친교를 맺던 시기였다.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작 이 판본의 복원 소식은 들리지 않고 1976년부터 1922년 판본을 원본에 가깝게 몇 차례에 걸쳐 복원하고 있다. 물론 원본을 복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윌리엄 버로스의 판본이 궁금하다. 아마 언젠가는 될 것이다. 나는 기다릴 수 있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1980년대 전성기를 맞이했던 장르를 꼽는다면 ‘종교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멸종된 건 아니다. 최근 < 일사각오 >(권혁만, 2016) 같은 영화가 소박한 흥행을 거두었고, 김수환 추기경(< 바보야 >(2011)), 법정 스님(< 법정 스님의 의자 >(2011)), 옥한흠 목사(< 제자, 옥한흠 >(2014) 등 종교인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들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울지마, 톤즈 >(2010)나 < 소명 >(2009)처럼 오지의 성자들에 대한 작품도 있다. 다른 건 소속된 리그다. 최근 종교 관련 작품들이 다양성 영화의 범주에 속한다면, 1980년대의 종교 영화는 메인 스트림 안에 있었다. 이 영화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당시로선 큰 흥행인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했으며, 사극일 경우 거대 예산이 들어간 대작이었다. 특정 종교의 역사, 인물, 교리 등을 테마로 삼는 종교 영화는 1980년대 상업영화의 한 축이었으며, 비록 그 종교의 신도들을 중심으로 하지만 강한 대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 가톨릭, 불교는 물론이고 증산도를 다룬 < 화평의 길 >( 강대진 , 1984), 무속을 소재로 한 < 피막 >( 이두용 , 1981) < 무녀의 밤 >( 변장호 , 1982) < 불의 딸 >( 임권택 , 1983) < 태 >( 하명중 , 1986) < 업 >(이두용, 1988) 등이 이어졌고, 수련을 통한 초능력을 다룬 < 단 >( 김행수 , 1986)이나 사이비 종교에 대한 < 백백교 >( 최영철 , 1993) 등도 있었다. 1980년대 이전에도 기독교와 가톨릭을 다룬 종교 영화들은 있었다. 그 영화들은 사극, 전쟁 영화, 반공 영화 등에 걸쳐 실존적 철학과 이념적 갈등과 역사적 사실 등을 다루었다. 유현목 감독의 < 순교자 >(1965) 최하원 감독의 < 새남터의 북소리 >(1972) 이성구 감독의 < 악마의 제자들 >(1974)과 <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 >(1973) 당대 종교 영화 트렌드의 중심은 기독교였다. 조짐은 1970년대 말부터 있었고 1980년대 초반까지 주요작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기독교 영화의 붐이 일기 시작했던 걸까? 이것은 당시 기독교의 부흥과 깊은 관계가 있다.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5일 동안 열렸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 대회엔 전국 각지의 크리스천이 300만 명 이상 모였다. 이후 1974년엔 김준곤 목사의 엑스플로 대회가 있었고, 1977년엔 민족 복음화 성회, 1980년엔 세계 복음화 성회, 1984년엔 선교 100주년 대성회 그리고 88 세계 복음화 대성회 등이 이어졌다. 이 시기 뉴스에서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운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접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1980년대 중반에 오면 ‘1,000만 기독교인’이라는 자체 집계가 발표된다. 이른바 ‘대부흥의 시대’였다. 자고 나면 교회가 생겨나던 시절, 기독교 영화에 대한 잠재적 수요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이때 < 사랑의 원자탄 >(강대진, 1977)이 포문을 열었고 뒤를 이은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임원식 , 1981)는 서울 관객 20만 명 이상을 동원한 흥행작이었다. 다음 해 < 죽으면 살리라 >(강대진, 1982) < 하늘 가는 밝은 길 >( 김성호 , 1982)이 나왔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신앙을 실천했던 손양원 주기철 안이숙 등이 주인공이었던 이 영화들은 한참 교세를 확장하던 시기 기독교인들에겐 일종의 교재였다. 실화 영화로서 이 작품들이 지닌 이분법적이고 감정적이며 극적인 감수성은 절절한 간증이 되어 신도들의 가슴을 쳤다. 가톨릭도 마찬가지였다. 최하원 감독은 < 초대 받은 사람들 >(1981)과 < 초대 받은 성웅들 >(1984)를 내놓는다. ‘천주교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초대 받은 사람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약 15만 5,000명의 서울 관객을 모은 흥행작. <초대 받은 성웅들>은 ‘천주교 조선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며 서울 대교구의 지원으로 제작되었다. 최인현 감독의 < 소명 >(1984)도 200주년 기념작. 이 작품들은 이승훈 김대건 이벽 등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올 시기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그린다. 특히 1984년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며 가톨릭의 열기가 뜨거웠던 해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까지 만들어진 주요 종교 영화들의 중심 테마는 순교와 박해였다. 이 영화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겪었던 참혹한 역사를 재현하기 위해 하드고어에 가까운 표현을 하기도 했다. <사랑의 원자탄>은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해방 후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다. 그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들였다. (상단 오른쪽)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 거부로 결국 옥사한 그의 이야기는 <하늘 가는 밝은 길>과 <일사각오>로도 영화화되었다. (하단) 최하원 감독의 <초대 받은 사람들>과 <초대 받은 성웅들>. 가톨릭이 조선에 들어오던 시기 겪었던 박해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처럼 1980년대 초 기독교와 가톨릭이 이끈 종교 영화의 열풍은 종교적 이벤트와 신도의 양적 성장을 토대로, 억압 받았던 수난의 역사를 환기시키는 영화들의 만남이 빚어낸 결과였다. 이 영화들을 통해 기독교와 가톨릭은, 신분제 사회와 식민지 체제에서 평등 사상과 민족 정신을 주장하고 지켰던 종교로서 일종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 흥미로운 건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사례다. 원래는 1977년에 제작되어 개봉 예정이었지만, 유신 정권은 이 영화에서 불온한(?) 기운을 감지했다. 일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신사 참배에 저항하는 주기철 목사(신영균)의 모습을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세력으로 여겼던 모양. 그래서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던 영화는 198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고, 큰 흥행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종교 영화들이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 전진했던 걸까? 그렇지 않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의 한국영화는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 시기 충무로는 산업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당시 한국 사회에서 떠오르던 종교 이슈를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큰 흥행은 자극제 역할을 했고(이 영화는 속편이 기획되기도 했다), 무산되긴 했지만 <정의가 나를 부를 때> <빛을 마셔라> <이천석 목사> 등도 제작될 예정이었다. 기독 영화인들의 모임도 큰 역할을 했다. 1970년대에 모이기 시작한 그들은 1976년 ‘새롭게 하소서’라는 공연으로 연예인 선교의 단초를 마련했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는 개런티 없이 참여하기도 했다. 신영균 고은아 를 비롯 최민수 의 어머니인 강효실 , < 예수 천당 >( 홍의봉 , 1991)의 이영후 , 그리고 임동진 문오장 구봉서 곽규석 윤복희 (가수) 송도영 (성우) 등이 대표적 인물. 한편 종교적 테마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감독들도 등장했는데 복음주의적 입장의 강대진 감독은 <사랑의 원자탄>과 <죽으면 살리라>를(그런데 1984년에는 증산도에 대한 <화평의 길>을 연출하기도 했다), 실존주의적 입장의 유현목 감독은 < 사람의 아들 >(1981)과 < 상한 갈대 >(1984)를, 선교적 입장의 홍의봉 감독은 < 휴거 >(1990) < 천국의 비밀 >(1990) < 예수 천당 >을 내놓았다. 여기서 1980년대 종교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이장호 감독과 이동철(본명 이철용) 작가다. 그들은 한국 종교 영화에 본격적으로 ‘민중’의 개념을 가져왔다. 기독교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찬송가였다. 이 영화들의 OST는 대부분 찬송가 멜로디의 변주였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를 거부했고,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다 해방을 맞이해 극적으로 살아난 안이숙의 이야기인 <죽으면 살리라>. 가수인 윤복희가 주인공을 맡아, 특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들려준다. 이 시기 기독교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는 ‘회개’였다. <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에서 최자실 목사는 빈민촌에서 교회를 세우고, 희망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킨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무당( 김을동 )이 회개하는 대목이다. 이동철 원작의 < 꼬방동네 사람들 >은 빈민촌의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그 중엔 고물 장수 목사가 있다. 그는 영화의 결말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다. < 과부춤 >은 천민 자본주의 시대의 기독교를 이야기한다. 부흥회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교회의 모습이 풍자된다. 그 시작은 < 낮은 데로 임하소서 >(1982)였다. 안요한 목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청준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삶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주인공이 신의 부름을 받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종교적 체험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한 인물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한국 종교 영화가 담지 못했던 풍경을 보여준다. 그것은 도시 빈민의 모습이다. 안요한(이영호)은 시력을 잃은 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판자촌에 교회를 세우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한다. 이러한 모습은 이동철 작가 원작인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인)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에도 등장한다. 영화에는 리어카를 끌며 고물 장사를 하는 목사( 송재호 ) 캐릭터가 있는데, 그는 ‘꼬방동네’(빈민촌) 사람들에게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다. 당시 한국 기독교는 대형화와 함께 중산층화를 겪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소외 당한 자들에 대한 시선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민중 교회가 등장했는데, 이런 흐름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한 매체가 바로 영화였다. 이런 시각은 창녀촌을 배경으로 한 < 밤을 기다리는 해바라기 >( 엄종선 , 1982) 같은 영화에서 간접적으로, 의도하지 않게 드러나기도 했고, 김진홍 목사의 빈민 선교 이야기인 < 새벽을 깨우리로다 >( 이기원 , 1990) 같은 영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김수형 , 1982)은 한국 대형 교회의 상징인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최자실 목사(송도영)의 일대기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이장호 감독, 이동철 원작의 <과부춤>(1984)은 본격적인 종교 영화는 아니지만, 당대 한국 기독교를 적나라하게 풍자한 수작이다. 광적인 부흥회, 돈에 눈먼 목사, 교회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 신도 등 <과부춤>은 ‘천만 기독교인’ 시대의 이면을 들춘다. 이 영화는 단순한 기독교 비판에 그치지 않고, 종교 없인 살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멘털리티를 보여주며, 그 이면엔 ‘가난’이라는 사회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 세상에 대한 당대 기독교 영화의 관심은 불교 영화와도 일맥 상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 만다라 >를 시작으로 1980년대 불교 영화는 끊임없이 속세와 종교적 깨달음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중광 스님의 이야기인 < 허튼 소리 >(김수용, 1986)를 비롯해 < 아제 아제 바라아제 >(임권택, 1989) < 우담바라 >( 김양득 , 1989)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정지영 , 1991) 그리고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배용균 , 1989)까지 이 시기 불교 영화엔 사바 세계에 대한 미련과 번민이 있다. 종종 멜로드라마 장르의 관습에 갇히기도 하지만(유난히 비구니 캐릭터가 많았던 건 그런 이유일까?), 관념적 화두에 머물지 않고 세상과의 관계를 중시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이후 임 감독은 <비구니>를 만들려 했지만, 촬영 도중 중단되어 결국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법난 이후 불교계와 정권은 갈등을 빚었고, 그 와중에 조계종은 이 영화의 제작을 반대하여 결국 중단 사태까지 간 것. 이후 감독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비구니>의 한을 풀었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한국을 넘어, 세계 불교 영화의 대표작이다. 이 영화를 전후로 충무로에 잠깐 불교 영화의 붐이 일었다. 실존주의자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 이문열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이 시기 종교 영화의 클리셰 중 하나는 초월적인 기적의 순간을 시각화하는 것이었다. <초대 받은 사람들>에서 정혜(원미경)의 가슴에 십자가 빛이 새겨진다. 1980년대 종교계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군사 정권의 군홧발 아래서, 개신교 지도자들은 전두환에게 달려가 조찬 기도회를 열어주었고, 불교계는 10.27법난(1980년)을 겪으며 초토화되었다. 가톨릭은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 되었다. 기복 신앙의 전통은 계속 이어졌고, ‘종교 과잉’과 ‘사이비’의 시대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이 카오스 속에서 ‘영적 상품’으로 기획된 종교 영화들은 전반기엔 기독교 영화가, 하반기엔 불교 영화가 중심을 이루며 1980년대를 장식했다. 하지만 1990년대 기획 영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 영화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기업 자본에게 ‘종교’는 매력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이 부활한 건 2010년 전후 즈음. 몇 편의 다큐멘터리가 다시 신앙과 선교와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후 주기철 목사에 대한 <일사각오>를 비롯 < 신이 보낸 사람 >( 김진무 , 2014) < 로마서 8:37 >( 신연식 , 2017) < 산상수훈 >(유영의, 2017) 등의 극영화가 등장하고 있다.
존 포드의 ‘영예의 시기’(1939~1941)에 태어난 영화 중에 < 젊은 날의 링컨 > < 역마차 > < 분노의 포도 >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는 이 연재의 초기에 다뤄졌다. 남은 세 편의 영화 중에서 < 롱 보이지 홈 >과 < 타바코 로드 >를 이제 만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모호크족의 북소리 >(1939)는 별도로 다루지 않을 생각이다. 이 영화에서는 아직 좋은 점을 찾지 못했다.) <롱 보이지 홈>(1940)은 촬영은 훌륭하지만 캐릭터나 이야기에서 포드적인 복합성이 부족한 영화, <타바코 로드>(1941)는 장점을 찾기 힘든 총체적인 실패작이라는 것이 존 포드 연구자들 사이에서의 일반적인 평가다. 물론 극소수의 지지자도 있다. 나로선 두 영화가 걸작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여기엔 포드의 영화 이력의 중요한 계기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먼저 <롱 보이지 홈>을 만나보자. 이 영화에서 먼저 떠올려야 할 이름은 그렉 톨랜드Gregg Toland(1904~1948)이다.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44세의 나이에 영면한 전설의 촬영감독 그렉 톨랜드는 존 포드와는 두 영화(< 분노의 포도 > < 롱 보이지 홈 >)에서 함께 작업했고, <롱 보이지 홈> 다음에 오슨 웰스의 < 시민 케인 >(1941)을 찍었다. 천재였지만 영화의 기술적인 면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던 25세의 청년 오슨 웰스에게 촬영에 관한 모든 것을 그렉 톨랜드가 개인교습을 통해 가르쳤고, <시민 케인>의 성취가 웰즈의 것인 만큼 톨랜드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웰스는 <시민 케인>의 엔딩 크레딧의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과 톨랜드의 이름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에 대한 경의를 표현했다. <시민 케인> 촬영장의 오슨 웰스와 그렉 톨랜드 그런데 이미 할리우드의 거목으로 군림하고 있던 존 포드와의 작업은 어땠을까. 이에 대한 자료나 증언이 별로 없어 정확한 사정을 알기는 힘들다. 다만 존 웨인은 < 롱 보이지 홈 >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른 영화들의 경우) 촬영감독이 최대한의 효과를 위해 구도를 잡는 일은 대개 존 포드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 영화를 찍을 때는 반대로 촬영감독 톨랜드가 존 포드를 돕는 쪽이었다. <롱 보이지 홈>은 아마도 가장 아름답게 촬영된 영화일 것이다.” 이 말이 맞다면, 적어도 화면 구성에선 그렉 톨랜드가 주도적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존 웨인의 말대로 < 롱 보이지 홈 >의 화면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런데 여기엔 서사와 영상의 미묘한 불협화음이 있다. < 분노의 포도 >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이 불협화음이 포드와 톨랜드의 현실의 불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을 근거는 없지만, 당대 최고의 감독과 당대 최고의 촬영감독이 함께 빚어낸 영화가 모종의 불협화음을 낳는다는 것은 얼마간 흥미로운 일이다. 어떤 면에.서는 존 포드와 그렉 톨랜드는 최상의 조합으로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존 포드가 무성영화 시절부터 전경, 중경, 후경을 함께 담는 심도화면에 몰두해왔고, 무르나우에 감화된 뒤로 종종 표현주의적 조명과 화면 구성에 심취했음을 알고 있다.(< 네 아들 > 편 참조) 딥포커스의 창시자로 알려졌으며,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표현주의적 영상의 대가인 그렉 톨랜드는 포드의 이상적 동반자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표현주의적 영상에 종종 이끌리긴 했지만 포드는 그 세대의 다른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사실주의자였다. 적어도 포드의 유성영화에서 카메라는 초월적이거나 자기 과시적인 시각 기계가 아니었다. 카메라의 시선이 인간의 시선과 다른 차원의 것으로 인지되거나 카메라의 존재가 관객에게 의식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라이징 오브 더 문 > 3부의 사각촬영은 드문 예외다.) 하지만 젊고 야심적인 톨랜드는 카메라의 비인칭적 시선과 기계적 역량에 몰두함으로써 종종 카메라의 권능을 과시하며 일상적 지각양식에 충격을 가한다. 심도화면을 찍는 방식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같은 해 포드가 아서 밀러를 기용해 찍은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의 한 장면(#1)과 톨랜드가 찍은 < 시민 케인 >의 한 장면(#2)을 비교해보자 #1 #2 포드의 심도화면에는 전경의 사물, 중경의 인물, 후경의 또 다른 인물이 극히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이것이 심도화면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으며, 화면의 다양한 결과 섬세한 아름다움을 놓치기에 십상이다. 반면 딥포커스 기법을 과시하는 톨랜드의 심도화면에는 전경의 인물은 클로즈업으로 후경의 인물은 익스트림 롱숏으로 대비되어 있어, 누구나 이 구도의 작위성을 의식하고 인물뿐만 아니라 카메라의 시각적 수사학 자체를 감지하게 된다. 이 쇼트는 두 인물을 따로 찍어서 합성한 것인데, 톨랜드는 다른 몇 장면에서도 딥포커스 효과를 위해 합성을 시도했다. 앙드레 바쟁은 < 시민 케인 >의 “바로크적 요소의 과도함”을 지적하면서도 그것의 딥포커스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시각적 공간의 전체를 동일한 선명도로 포착”함으로써 “지각 가능한 연속성을 회복시켰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이 찬사는 오히려 존 포드나 장 르누아르에게 어울릴 것이다. 오슨 웰스는 딥포커스를 즐겨 사용한 이유를 묻자 “인간의 눈이 보는 세상은 딥포커스 화면에 보다 가깝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는데, 웰스 역시 톨랜드의 딥포커스가 지닌 수사학적인 면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렉 톨랜드는 과장된 딥포커스 뿐만 아니라 사실적인 심도화면에도 뛰어났으며, 윌리엄 와일러와의 작업(< 폭풍의 언덕 > < 작은 여우들 > <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에서 특히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와일러의 < 데드 엔드 >(1937)에서 이미 톨랜드는 < 시민 케인 >의 수사학적 딥포커스를 시도하고 있다. 우리로선 톨랜드의 오래된 야심이 또 다른 천재 야심가 오슨 웰스를 만나 만개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 롱 보이지 홈 >으로 돌아오자. 유진 오닐의 네 편의 희곡을 더들리 니콜스가 각색한 이 영화는 2차대전 시 영국 화물선 선원들의 생활을 담고 있으며, 중심인물이 따로 없는 앙상블 드라마이다. 선상이 무대의 거의 전부이며, 나머지 공간도 항구로 제한되어 있다. 선원들은 배라는 폐쇄공간에의 감금을 선택한 존재, 바다에 자신을 유폐한 자들이다. 그들은 서사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육지의 기억으로부터 바다와 배로 도피한 것이다. 우울한 현자와도 같은 선원 당키맨은 이렇게 말한다. “기억을 가장 잘 다루는 방법은 기억을 잊는 거야. 남자가 바다로 나설 때는 육지에 관한 건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돼. 육지는 당신을 더 이상 원하지 않거든. 내게도 나쁜 기억이 있지. 그건 전부 육지에서 온 거야. 나는 육지를 버렸고, 육지도 나를 버렸어.” 집으로 가는 머나먼 항해. 이 제목은 반어적이다. 올슨을 제외하면 선원 누구도 집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배를 떠난다면 그건 귀가가 아니라 죽음이다. 폭풍우로 부상당해 죽거나(양크), 독일군의 습격으로 죽거나(스미스, 드리스콜). 그러지 않더라도 그들은 소명도 전망도 없이 조금씩 죽어갈 뿐이다. 포드의 서부극을 ‘약속의 땅을 찾아 황야를 가로지르는 운동의 영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웨건 마스터 > 편 참조), 죽음을 향해 바다를 떠도는 자들의 이야기인 이 영화는 서부극의 염세적 번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 포드가 유진 오닐과 가까운 친구라 해도 이처럼 염세적인 희곡에 끌린 이유는 불확실하다. 배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극적인 사건도 없고 운동감을 살릴 여지도 제한된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더구나 대사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 포드로서는 촬영에 거의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 운명론과 폐소공포증의 공기를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 그렉 톨랜드라는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은 아마도 이 프로젝트의 최상의 동반자였을 것이다. < 롱 보이지 홈 >의 첫 시퀀스는 우리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다. 막이 열리면 밤의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섬 남자들의 노래와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섬 여인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나무에 기대 유혹하듯 몸을 비튼다.(#3) 그리고 기항하지 않은 채 연안에 정박 중인 배의 거대한 실루엣이 위협적으로 등장한다.(#4) 갑판의 선원들은 노랫소리를 향해 불안과 망설임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서 있다.(#5, #6) 지금이 전시임을 알려주는 라디오방송 외엔 대사 없이 5분간 지속되며, 귀기와 외설과 불안과 망집이 교차하는 이 시퀀스는 포드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다. #3 #4 #5 #6 선원들은 섬에 닿지도 바다로 가지도 못한 채 그사이에 멈춰 있다. 한쪽에는 초대인지 위협인지 불분명한 북소리와 노랫소리, 누군가를 유혹하려는지 아니면 무엇엔가 이미 취해 있는지 알 수 없는 여인들의 에로틱한 몸놀림이 있다. 반대쪽에는 라디오방송이 암시하는 전쟁 그리고 바다가 내재한 상시적인 재난의 위협이 있다. 말하자면 지금 선원들은 신화적 유혹과 역사적 사건 사이에 놓여 있다. 물론 어느 쪽이나 위험하다. 선원들은 그 경계에서 초조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다. 경계란 실은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거나 정박할 수 없는 곳이며 그들은 이제 곧 하나씩 사라질 것이다. < 롱 보이지 홈 >이 도피를 위해 바다를 택했으나 에로스의 유혹도 역사의 위협도 피하지 못한 사내들의 이야기라면, 이보다 더 멋진 오프닝 시퀀스를 상상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 성취의 반 이상은 그렉 톨랜드의 것으로 돌려져야 할 것이다. 전경의 피사체를 극대화한 특유의 딥포커스, 실루엣 효과를 과시하는 빛과 어둠의 능란한 대조, 현란한 앵글 사용은 < 시민 케인 >에서의 만개를 예고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대로 이 영화에서 톨랜드의 촬영과 포드의 서사에는 미묘한 불협화음이 있다고 나는 느낀다. 불협화음의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다.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이 오프닝 시퀀스는 과도하게 멋지다. 이후에 이어질 본편보다 5분 동안의 오프닝이 더 크고 화려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건 본편이 빈약하다기보다 오프닝과 본편이 이질적이라는 느낌에 가깝다. 오프닝에서 예기된 모호하고도 매혹적인 대립항들의 긴장이 본편에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오프닝에는 신화적이고 몽환적인 기운이 가득하지만, 본편은 대부분 사실적인 사건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톨랜드의 시각적 수사학이 포드의 배우들의 연기 방식에 맞지 않는다는 점인 것 같다. < 시민 케인 >은 연출과 촬영뿐만 아니라 50년의 세월을 연기한 배우 오슨 웰스의 연기력으로도 칭송받았다. 하지만 웰스의 연기는, 케인이라는 캐릭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시적이고 연극적인 제스처로 가득하다. 톨랜드의 시각적으로 과장된 프레임이 웰스의 자기 과시적 몸짓을 고양시킨다. 하지만 포드의 배우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포드는 할리우드 고전기 감독 중에서도 양식적 연기, 연극적 연기를 가장 멀리한 사람이며, 배우가 지닌 고유의 존재감을 가장 존중한 사람이다. 또한 그의 영웅들은 앞서 여러 영화에서 보았듯이, 과시하기는커녕 망설이듯 프레임에 진입한다. 앞서 예로 든 한 장면(#2)에서 웰스의 일그러진 얼굴은 딥포커스 화면의 전경을 가득 채울 때 그는 무언으로 자신의 분노와 인내를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 롱 보이지 홈 >에서 존 웨인의 얼굴은 어떤가?(#7) #7 이 장면 외에도 여러 쇼트에서 웨인은 프레임의 전경을 채우지만, 그의 얼굴은 텅 비어있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가 연기한 올슨은 이 앙상블 드라마에서도 가장 존재감이 약한 인물이다. < 롱 보이지 홈 >에는 시각적으로는 강렬하지만 공허한 쇼트들이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 다음은 다른 사례다. #8 #9 #10 인물(스미스)이 프레임의 수직선을 질주하다 소실점 밖으로 사라진다. 이런 부류의 심도화면이 드문 것은 아니지만 톨랜드는 달리는 인물이 점이 될 때까지 찍으면서 화면의 깊이를 과장한다. 문제는 바로 다음 쇼트에서 인물이 쉽게 붙잡힌다는 것이다. 공간의 아득한 깊이와 소실의 운동이 다음 쇼트에서 간단히 부정될 때, 이런 시각적 수사학이 장식적으로 보이지 않기란 힘들다. 몇 가지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 롱 보이지 홈 >을 좋아한다. 사적인 10베스트에 넣기는 망설여지지만 이 영화의 소란과 활력과 어둠을 사랑한다. 하지만 포드의 유성영화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시각적 수사학의 과잉이 마음에 걸렸다. 존 웨인의 진술이 맞다면 그 과잉은 < 시민 케인 >과 < 작은 여우들 >을 비슷한 시기에 찍으면서 정점에 이른 그렉 톨랜드의 의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물론 톨랜드 역시 이 시기를 지나면서 수사학적 과장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그는 누가 뭐래도 영화사에서 가장 뛰어난 촬영감독이었으며, 나는 그가 촬영한 영화 중에서 윌리엄 와일러의 <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947)를 가장 좋아한다.) 존 포드는 표현주의적 구도와 조명에 심취했지만, 그 한계도 이 영화를 만들면서 느꼈을 것으로 나는 짐작한다. 포드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더 고도의 균형을 향해 더 나아가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