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왼발
- 감독
- 이두용
- 제작년도
- 1974
- 출연
- 한용철, 권영문, 김문주, 배수천, 김영인, 황인철, 최재호, 김왕국, 심상현, 조춘, 주상호, 박동룡, 황태수, 김추련, 김기범, 최성관, 태일, 권일수, 한명환, 남성국, 김동호, 이경우, 정형진, 박희진, 황춘수, 박승운, 심상훈, 김민정, 오영화, 박종설
1. 카트린느 드뇌브와 ‘태권도’ 1974년 한국의 한 신문기사는 ‘프랑스 여배우’ 카트린트 드뇌브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남성 중심의 액션영화가 하도 판을 쳐서 태권도를 하지 못하는 우리 같은 여배우는 발 붙일 곳이 없어요.” 카트린느 드뇌브의 이 한탄은 ‘이소룡 붐’이라는 해외영화계의 기현상을 언급하는 기사가 인용해오고 있는 발언이다. 이 언급을 곧이곧대로 믿어보자면 이소룡 영화 혹은 그와 같은 류의 영화들은 ‘태권도를 하는’ 남성 배우들의 영화이다. 그런데 과연 1974년의 시점에 카트린느 드뇌브는 태권도라는 말을 알고 있었을까? 그녀가 이소룡 식의 액션영화를 ‘태권도 영화’라고 인식했는지는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적어도 어느 시기 한국 영화시장 내에서 이 명칭은 꽤나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것 같다. 1973년 3월 쇼브라더스 소속의 정창화가 감독한 영화 <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이 홍콩영화 최초로 미국 박스오피스에 올랐을 때(이 시점은 이소룡 영화가 미국 시장을 강타하기 직전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성공한 ‘태권도 영화’, 한홍합작영화로 한국에서 개봉하였다. 같은 해 출범한 정부 조직 한국영화진흥공사는 한국영화의 해외시장개척을 위한 중장기 전략으로 한국산 태권도 영화를 적극 장려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이소룡의 죽음 직후 < 정무문 >이 한국 시장에 도착했다. 이 영화는 당시 표현에 따르면 ‘이상과열’이라고 할만한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이소룡의 영화 중 가장 노골적인 반일 텍스트인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저 적의 익숙함은 한국 관객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며, 또 1960년대 후반 무협영화 붐부터 시작된 한국영화와 홍콩영화의 긴밀한 연결이라는 흐름 안에서 보자면 거의 절반쯤 자국영화로 보이게 할만큼 익숙한 것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스승의 복수를 완수한 이소룡이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경찰들을 향해 뛰어오르는 프리즈 프레임을 한번 상기해보라. 요절한 스타가 정지된 화면 내에서 영원히 도약하는 모습을 목격한 당대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어떤 정서적 감응을 불러일으켰을지 상상해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무문>을 시작으로 1973년과 74년 이소룡의 네 편의 영화, < 맹룡과강 >, < 당산대형 >, < 용쟁호투 >가 모두 개봉하며 이 열기를 지속시켜나갔다. 전세계적인 이소룡 붐과 접속한 자국 관객의 열광은 곧 “홍콩 제작의 얼치기 태권도 영화가 세계를 휩쓴 데 자극받은......참다운 태권도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당위와 겹쳐진 시장의 요구로 이어졌다. 그리고 불현 새로운 스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소룡-브루스 리가 그러한 것처럼 미국식 이름을 붙이고 나타난 이들은 한결같이 미국에서 온 태권도 유단자임이 강조되었다. 2. 아마도 ‘태권도 영화’라고 할만한 것의 절정은 1974년이 될 것이다. 이해 이두용은 재미교포 출신의 신인배우 챠리 셀(한용철)을 기용하여 무려 6편의 태권도 영화를 만들었다. < 용호대련 >, < 죽음의 다리 >, < 돌아온 외다리 >, < 분노의 왼발 >, < 속 돌아온 외다리 >, < 배신자 >(이두용에 따르면 이 영화는 앞의 영화들의 ‘재편집’으로 완성되었다)에 이르기까지 이 놀라운 다작은 유행 장르를 자국화하고자 하는 한국 영화산업의 탄력적 대응의 실례라 할만하다. 일단 이 영화들은 1960년대의 인기 장르인 만주물의 서사를 고스란히 끌어온다. 배경은 식민지 시대의 만주 혹은 대륙, 적은 일본군이거나 일본군과 결탁한 야쿠자. 여기에 몇몇 제목들이 이미 노골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바 장철의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獨臂刀>가 불러일으킨 신체적 핸디캡의 영웅이라는 표상과 이 표상이 내포하는 상실, 극복, 귀환이라는 구조가 가미된다. 발차기의 명수인 주인공은 적들의 농간으로 한쪽 다리를 잃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극복하고, 돌아와서 적들을 물리친다. 어쨌건 주인공은 단독으로 혹은 독립군과 힘을 합쳐 악독한 일본군 또는 일본 야쿠자를 물리친다. 그렇다면 이 영화들은 만주물의 재출현인가? 만주물은 1960년대라는 국민국가 만들기의 시간에 이를 형성해낼 강력한 표상자원으로서 한국영화가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식민지 시기 만주라는 실제의 시공간, 동시에 1960년대의 시점에서 가상적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는 이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항일독립투쟁의 이 액션활극은 포스트콜로니얼 분단국가가 상상해낼 수 있었던 가장 유력한 국가창생기일 것이다. 아직 남과 북은 분단되기 이전이며, 하나의 ‘민족’은 미래에 반드시 당도할 독립국가를 위해 싸운다. 그리하여 이 독립국가-대한민국은 저 전쟁에서 죽어간 수많은 ‘애국선열’들에 의해 여기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 만주 웨스턴이라는 형태로 전화되어간 만주물은 이 전화의 마지막, 이만희의 < 쇠사슬을 끊어라 >(1971)에 이르러 완전히 끝장나버렸다. 만주물의 초창기 비전이 국가 만들기와 관련있는 것이라면 국가 바깥의 인간들, 국가에 무심한 인간들이라는 한국영화에서 거의 볼 수 없는 희유한 순간을 만들어낸 <쇠사슬을 끊어라>는 말 그대로 장르에 대한 탈구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이 이야기는 1960년대적인 내셔널 시네마적 열정이 어떻게 사라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두용의 태권도 영화가 만주물 서사를 새삼스럽게 반복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서사들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실제로 이 영화들은 서사에 공을 들이고 있지 않다. 공간은 극히 단조롭고 서사를 믿을만하게 만들어줄 캐릭터의 구축이랄 것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이 영화들이 졸속 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들은 오로지 하나의 볼거리, 하나의 스펙터클, 하나의 동작에 집중한다. 챠리 셀의 발차기. 길고 곧게 뻗은 다리가 화면을 횡으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가로지른다. 종종 웃통을 벗는 남자는 기름을 발라 반짝반짝 빛나는 근육질의 몸을 과시하며 괴성을 지르면서 전광석화처럼 날아올라 발차기로 상대를 제압한다. 벗은 몸의 발차기. 이 형상은 이중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그것은 자국 관객들을 위해서 태권도라는 지역적 귀속을 충족시켜주는 기표로 이해되는 한편 이제 곧 형성될 아시안 마샬아츠 필름의 카테고리 안에서 싸우는, 맨몸의, 아시안 남성의 기표로서 기입될 것이다. 3. 챠리 셀에 이어 미국에서 온 또 한 명의 스타는 바비 김(김웅경)이다. 당시의 신문보도에 따르면 ‘이소룡과 함께 태권도 보급에 힘써 온’ 바비 김은 이소룡 사망 후 “미국 쪽에서 그를 이소룡의 후계자로 내세우려 들자 기왕 태권도 영화에 출연할 바에야 한국영화에서 활약할 생각으로 귀국하였다.” 챠리 셀의 인기에 대적하기 위해서 바비 김은 변별될 필요가 있었다. 그 역시 발차기가 특기이지만, 콧수염과 가죽점퍼를 트레이드마크로 강한 아메리칸 남성성을 번안해오고 있는 바비 김의 영화는 이두용의 태권도 영화보다 현대적 의장을 선호하였다. 찰스 브론슨을 노골적으로 모방하고 있는 이 ‘터프한’ 남자는 사악한 일본인과 맞서 싸우거나(< 사대독자 > < 흑룡표 >) 홍콩과 동남아의 주요 도시들을 배경으로 국제적으로 암약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를 분쇄하는데(< 국제경찰 >), 알고 보면 이 적들은 서로 결탁해 있곤 한다(< 죽음의 승부 >). 이 영화들이 설정하고 있는 적은 지극히 자국적으로 보이나(일본인과 공산주의자) 실상 현대적 의장 속에서 적의 고전적 표식은 사라지기 일쑤다. 이를테면 식민지 시대 홋카이도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 귀문의 왼발잽이 >(박우상, 1977)를 보자. 다케지로와 센노스케라는 대립하는 두 일본인 집단과 이들에게 착취당하는 조선인 광부들. 어느날 이 마을에 정체불명의 사나이 바비 김이 나타나 우여곡절 끝에 고통받는 광부들을 구해낸다. <귀문의 왼발잽이>가 지극히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영화가 시대적 배경을 믿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줄 그 어떤 장치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 설정과 아무 상관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탄광의 소유주인 다케지로는 수트 차림의 성공한 중년 사업가의 모습이다. 가죽 재킷에 헬멧을 쓰고 일당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몰고 나타나는 센노스케는 폭주족에 가깝다. 영화의 실제 배경은 강원도 남부의 탄광도시 태백이다. 이 이미지들 속에서 <귀문의 왼발잽이>는 탄광 노동자를 착취하고 괴롭히는 악덕 자본가와 폭력배, 이에 맞서 노동자를 구하는 히어로의 이야기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것은 마치 1970년대 후반의 탄광도시 태백의 지역성만큼이나 당대적이고 구체적이며 로컬한 정치적 의제를 상기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착취당하는 노동자를 구하는 히어로라는 오래되고 광범위하며 글로벌한 소망과 맞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4. 이소룡의 열풍이 불러일으킨 이국적 이름의 행렬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챠리 셀과 바비 김에 이어 엇비슷한 이름을 가진 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나왔다. Tang Lung, Bruce Li(何宗道), Bruce Le(呂小龍), Bruce Leung(梁小龍) Dragon Lee (혹은 Bruce Lei, 巨龍) 기타등등. 이 이름들 중 누군가는 한국인이고 누군가는 이미 한국인이 아닌데, 사실 이 영화들에 있어서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한국과 홍콩, 대만, 필리핀, 타이 등지의 영세 영화업자들이 얼기설기 엮어 만들어낸 이 영화들은 이제 국가적 귀속이라는 문제로부터 더 없이 자유로워진 채 국경을 넘어 ‘아시안 마샬아츠 필름’의 한 부류로 통칭될 터이니. ps. 현재 영상자료원에 필름이 남아있지 않은 <귀문의 왼발잽이>는 ‘불타는 주먹(les poings enflammes)’이라는 프랑스어 더빙 버전으로 찾아볼 수 있다. 당신은 유창하게 불어를 구사하는 바비 김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귀문의 왼발잽이>를 이런 상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런 영화들이 어떠한 유통경로를 거쳐갔는지를 증거한다.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
한국 장르 영화의 계보에서 이두용 감독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는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했고, 그 모든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주었다. ‘액션’이 주종목이었지만, 경력 초기의 멜로드라마도 당대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최후의 증인>(1980) 같은 미스터리나 <귀화산장>(1980) 같은 호러 스릴러에서도 그의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병태의 감격시대>(1975)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만들기도 했고, <경찰관>(1978), <장남>(1984) 같은 리얼한 톤의 드라마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시대극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궁중 사극인 <내시>(1986)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같은 엄격한 형식미와 <뽕>(1985) 같은 서민 희극을 오가며 수작을 뽑아냈다. <초분>(1977), <물도리 동>(1979), <피막>(1980) 등에선 샤머니즘이라는 테마를 다루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인 <아리랑>(2003)은 흑백 무성영화였다. 한국영화사에서 이두용 감독처럼 넓은 스펙트럼을 지녔던 감독은 흔치 않다. 물론 이러한 다재다능함을 긍정적으로만 볼 순 없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는 생존을 위해 영화산업이 요구하는 ‘제품’을 끊임없이 찍어내야 했던 감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그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1970~80년대는 한국영화의 거대한 모순기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하강기를 맞이했다. 1973년에 제정된 ‘유신영화법’은 국책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진흥공사’를 설립시켰다. 외화 수입이 제한된 상황에서, 영화 산업은 흥행성이 보장된 외화 쿼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허가제에 의해 살아남은 몇몇 영화사들은 쿼터 확보를 위해 한국영화를 만들었고 ‘방화’라는 이름으로 비하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시스템에 철저히 적응해 기능공이 되는 것이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도대체 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일관성이 없는” 필모그래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흥행 감독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데뷔 초기 합동영화사의 전속 감독이 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반복되는 장르 영화 속에서 서서히 장인이 되었다. 다행히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고 1970년대 말부터 서서히 작가의 영역으로 옮겨 갔다. 이것은 특유의 기질 때문이었다. 이두용 감독의 인생과 영화 경력을 살펴보면, 그에겐 때론 무모하게 보일 정도의 개척자 정신이 있었다.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그는 멈추는 순간 뒤처진다는 걸 깨달았다. 기본적으로는 산업의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이두용 감독은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갔다. 당대의 트렌드였던 신파 멜로로 시작한 그의 경력은 태권도를 기반으로 한 발차기 액션 영화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후 그는 액션 연출력을 발판으로, 다른 영화인들은 모두 충무로라는 우물 안 개구리던 시절에 <아메리칸 방문객>(1976)으로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시도한다. <피막>으로 베니스영화제에,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에 초청 받았으며, 한국 영화감독으로는 최초로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작업한 <침묵의 암살자>(1988)를 내놓았다. 1980년대엔 자신의 제작사를 차렸고 이후 영화 수입과 극장 경영까지 겸했다. 비록 무산되었지만 1980년대엔 충무로 감독으로서 TV 영화를 연출하려 시도했고, <아리랑>을 들고 북한에 건너가 남북 합작 프로젝트를 논의하기도 했다. 흥행성과 작품성, 창작 활동과 비즈니스, 장르 영화와 작가 영화…. 그의 좌충우돌 영화 인생은 언제나 양 극단 사이에서 진동했다. <최후의 증인> 같은 영화는 검열에 의해 사지절단 되었고, IMF로 극장 사업을 접어야 했으며, 제작자의 외화 쿼터를 위해 봉사하듯 영화를 찍기도 했지만,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었다. 우리가 이두용의 영화 인생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이 부분, 즉 장르 영화 장인으로서 지녔던 생명력이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만의 주제 의식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국의 영화제에 의해 먼저 발견된 후 한국의 평단에 의해 평가되었다. ** 이두용 감독은 1941년(호적엔1942년)에 서울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였고, 아버지는 간장 공장 기술자였다. 학창 시절엔 친구들과 극장에 몰려다니던 활극 영화광이었고, 미술에 뛰어난 소질을 지닌 학생이었다. 영화에 대한 꿈을 점점 키워나가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우연하게 충무로의 일원이 된다. 당시 미술 선생이 영화 포스터 그리는 일을 했는데, 심부름으로 동성영화사의 만리동 스튜디오에 갔다가 처음으로 영화 현장을 접한 것. 이후 그는 이강천 감독 연출부에서 스크립터 일을 하며 영화계에 발을 내딛었고, 1950년대 말에 몇 편의 영화를 거치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짧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스물두 살의 나이에 감독을 꿈꾼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을 설득해 거의 집 한 채 값의 거금을 받아 <여승>이라는 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연출했던 것. 하지만 극장 배급을 책임지기로 한 흥행사가 돈을 가지고 도망가면서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금전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했지만 교훈은 있었다. 제대로 영화를 배운 후 감독이 되어야겠다는 깨달음이었다. 제대 후 이두용 감독은 세 명의 감독 연출부에서 일하며 많은 걸 배웠다. 전홍직 감독은 어떻게 해야 영화가 흥행하는지 잘 알고 있는 ‘기획자’였다. 일본 유학파인 김수동 감독은 콘티의 정확성과 압축해서 명료하게 표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정소영 감독은 배우의 감정을 끌어내는 데 탁월했다. 무려 7편의 영화를 함께 한 정소영 감독은 이두용 감독의 데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정 감독은 <미워도 다시 한 번>(1968)으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며 신파 멜로드라마의 트렌드를 만들어냈는데, 이두용 감독의 첫 작품 <잃어버린 면사포>(1970)도 그 계열이었던 것. 기획자 방규식은 정소영 감독의 제작부장이었고, 시나리오 작가 김수현도 정소영 사단의 일원이었다. 이 영화로 시작해 <작은 새>(1974)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멜로는 당대의 트렌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이었다. 가부장제에서 신음하는 여성의 비극적 운명을 강조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성애를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대신 여성의 상황을 더욱 가혹하게 몰고, 그 기저에 ‘가난’이라는 경제적 계급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테마는 <초분> 이후 일련의 샤머니즘 영화와 사극으로 이어지며 변형된다. 여성의 비극을 개인사의 차원이 아닌, 역사와 사회에 의해 구조화된 모순의 결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두용 감독의 전성기는 액션 장르와 함께 찾아온다. 변화의 원인은 신파 멜로에 대한 염증이었고, 좀 더 영화적인 기능을 살리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액션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는 외국 시장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는데, 이것도 액션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되었다. 영세한 제작 환경을 극복하고 외국 관객들에게 관심을 끌 만한 영화는 액션 밖엔 없었다. 박노식이 출연하는 <날벼락>(1971), 호러와 무협이 결합된 <야오귀>(1971), 범죄 액션 <체포령>(1972), 전쟁 액션<홍의장군>(1973) 등이 있었지만, 진짜 시작은 <용호대련>(1974)이었다. 그는 대규모 오디션을 통해 액션 배우를 꿈꾸는 전국의 유단자들을 끌어 모았고, 재미 교포인 ‘챠리 셸’ 한용철을 주인공으로 발차기를 중심으로 하는 태권도 액션 영화를 발명했다. 1974년 한 해에만 <용호대련>,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분노의 왼발>, <돌아온 외다리(속)>, 그리고 <배신자>까지 한용철 주연의 액션 영화 6편이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들은 당대의 신드롬이었다. 하지만 한용철은 이두용 감독과 결별했고, 이후 이두용 감독은 강대희와 <무장해제>(1975)를, LA의 태권도 사범인 정준(준 청)과 <아메리카 방문객>(1976)을 찍는다. <비밀객(속)>(1976)부터 <해결사>(1981)까지는 신우철과 안태섭이 액션을 맡았고, <돌아이>(1985)는 당대 최고의 아이돌 가수였던 전영록을 카메라 앞에 세워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흥미로운 건 이두용 액션이 지닌 사회적 의미였다. 유신 헌법 이후 갈수록 엄혹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호쾌한 발차기가 작렬하는 그의 액션은 대중에게 정서적 탈출구였고, 오승욱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뭔가에 억눌린 모든 것을 폭발시키는 파워풀한 액션”이었다. 배우들이 “으악!” 소리와 함께 나뒹군다고 ‘으악새 영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두용 표 액션’의 힘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무장해제>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실제 왕궁에서 촬영되었으며, <해결사>는 세트 없이 도심 한가운데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액션을 보여준다. <돌아이>는 카 체이스 같은 현대적 액션을 시도했다. *** 액션은 이두용 감독을 대표하는 장르지만 그는 종종 회의를 느끼곤 했다. 액션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시선은 멸시에 가까웠다. 이때 우연히 제안 받은 <초분>(1977)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커다란 분기점이 된다. 무속적인 소재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이 시작되었으며, 이 영화들을 통해 ‘억압 받는 인간’이라는 테마가 드러났다. 그리고 사극에선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저항하는 자들을 통해 그 테마는 더욱 명확해진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가 대표적이며, 특히 이 영화의 정제된 스타일은 이두용 감독의 미장센이 정점에 올랐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세계무대에 알려진 것도 <초분> 이후 영화들 덕분이다. <피막>은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부문 특별상에 수상하는 I.S.D.A.P 상을 수상했고,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 받는다. 서구 비평가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한국영화는 바로 이두용의 작품들이었으며, 혹자는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 영화와 비교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의 시선엔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했지만, 이전까지 국내의 그 어떤 평론가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두용 감독의 텍스트는 서구를 경유해 비로소 자국의 평단을 자극했다. <경찰관> 같은 리얼한 톤의 서민 드라마나 가족이라는 테마를 진지하게 접근한 <장남>, 실화를 바탕으로 인권 문제를 제기한 <청송으로 가는 길>(1990), 그리고 노부부의 삶을 다룬<애>(1999) 등 장르적 요소를 제거하고 정직하게 드라마로 승부할 때도 이두용 감독의 연출력은 빛난다. 특히 <장남>은 가족을 다룬 한국영화의 계보에 아직도 최고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두용 감독의 가장 위대한 영화적 유산은 <최후의 증인>일 것이다. 당대 충무로의 최대 역량이 결집되었던 이 영화는 누군가의 밀고로 혹독한 검열을 거쳐야 했고, 제작자와 감독은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영화는 한 시간 가까이 잘려나간 상태에서 상영되었고, 개봉 날 극장에 들어갔던 이두용 감독은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이후 한 세대 가까이 잊혀져있던 이 영화는 2006년 감독판으로 복원되면서 지금의 관객들과 다시 만났다. 전설이 현실이 되어 눈 앞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두용 감독은 2002년에 만든 60번째 영화 <아리랑>를 마지막으로 현업에서 물러났다. 대사 없이 초당 18프레임의 동작으로 진행되며 변사의 설명이 곁들여진 흑백 영화다. 이후 오랜 기간 동안 품어 왔던 <월광무> 프로젝트를, 남북 합작 방식으로 완성하기 위해 추진했지만 상황은 쉽지 않았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에 대해서는 애증이랄까…. 영화 때문에 겪은 갖가지 일들에 대해 후회는 안 하지만, 이젠 뭔가 내 직업에 대한 어떤 결과를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영화고, 내 존재의 이유를 영화를 통해서 드러내야 한다는 것. 영화를 통해 삶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 영화로 내 삶의 큰 매듭을 짓고 싶다.” 부디 노장의 작은 소망이 이뤄지길 기원한다. [사진1] 조감독 시절의 이두용 감독. <속 미워도 다시 한 번>(1969) 현장이다. 오른쪽부터 주연을 맡은 신영균, 정소영 감독, 이두용 감독이다. 이두용 감독은 정소영 감독 연출부로 7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사진2] 1970년 <잃어버린 면사포>로 데뷔한 이두용 감독은 한 동안 신파 멜로드라마를 만든다. <댁의 아빠도 이렇읍니까>(1971)는 두 번째 영화로 전작의 흥행세를 이었다. 배우 문희, 황정순과 스태프들 그리고 이두용 감독(맨 왼쪽)이 함께 했다. [사진3] 1974년 한 해 동안 이두용 감독은 <용호대련>을 시작으로 여섯 편의 태권도 영화를 내놓았고, 그 모든 영화에서 발차기의 주인공은 ‘차리 셸’ 한영철이었다. 사진은 <돌아온 외다리>(1974)의 한 장면. [사진4] 이두용 감독의 작품 세계는1977년 <초분>부터 변화한다. 이전까지 액션을 중심으로 한 장르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 영화부터 그는 미스터리 서사를 토대로 한 드라마의 세계로 접어들며 샤머니즘과 ‘한’의 테마를 다룬다. [사진5] 당대의 액션 스타 장동휘는 액션 전문 감독 이두용이 자신을 기용하지 않는 데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이두용 감독은 <경찰관>(19789)과 <선배>(1979)를 통해 장동휘의 진짜 매력을 드러냈다. [사진6] 이두용 감독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최후의 증인>(1980). 하지만 개봉 당시 이 영화는 검열에 의해 사지절단 되었고, 2003년이 되어서야 감독판으로 대중과 늦은 재회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2016년 4K로 디지털 복원되었다. [사진7] <피막>(1980)은 한국영화가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받은 이 영화는 감독 부문 특별상인 I.S.D.A.P를 수상했다. [사진8] <피막>(1980) 현장의 이두용 감독과 주연을 맡은 유지인. <생사의 고백>(1978)으로 이두용 감독과 인연을 맺은 유지인은 이 영화에서 강렬한 복수의 주인공이 된다. [사진9] <해결사>(1981)는 세트를 벗어나 리얼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도시 액션이다. 신우철과 황정리가 주인공을 맡았다. 숨겨진 걸작 중 하나이며, <돌아이>(1985)를 예견하게 하는 작품이다. [사진10]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는 최초로 칸영화제에 초청받은 한국영화였다.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되었고, 외국 평단의 큰 관심을 받았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장면이다. 통역 옆의 왼쪽이 이두용 감독이다. [사진11]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로 하와이영화제를 찾았을 때 해외 영화인들과 함께 한 이두용 감독. 왼쪽부터 홍콩의 임호 감독,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 중국의 장이모우와 첸카이거 감독,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 그리고 이두용 감독. [사진12] <낮과 밤>(1984)은 말 그대로 5대양6대주를 누비는 영화였고, 해외 로케이션에 강한 이두용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였다. 아프리카 현장에서 마사이족과 함께 촬영하는 모습. [사진13]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장남>(1984)은 이두용 감독의 자전적 영화이자, 한국 가족 영화의 걸작 중 한 편이다. 형제로 나오는 신성일, 김희라와 함께 현장에서 리허설을 하는 모습. [사진14] 1970년대 ‘발차기’에서 시작한 이두용 감독의 액션 연대기는 1980년대 이르러 <돌아이>(1985)에 도착한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카 액션과 패션 감각을 선보였던 영화로, 전영록은 이두용 감독의 새로운 액션 히어로가 된다. [사진15] <뽕>(1985)에서 ‘안협네’ 역을 맡은 이미숙. 나도향의 단편을 각색한 윤삼육의 시나리오는 여러 제작사를 돌아다니다가 이두용 감독을 만났고,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져 큰 흥행을 기록했다. 아직도 꾸준히 언급되는 ‘컬트’ 영화다. [사진16] 자신의 제작사 ‘두성영화’를 차린 이두용 감독은 창립 작품으로 <내시>(1986)를 만든다. 그의 최고 흥행작으로, 궁중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반란을 그린다. 당국의 정치적 해석으로 심의가 나지 않아 개봉에 애를 먹기도 했다. [사진17] 한국영화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할리우드에 초청 받아 연출한 <침묵의 암살자>(1988) 현장. 미국에선 <Silent Assassins>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교포 배우인 정준(준 청)과 필립 리가 출연한다. [사진18] 밑바닥 삶을 사는 인간을 향한 리얼한 시선. 걸레 스님 중광을 캐스팅 한<청송으로 가는 길>(1990)은 이두용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독특한 지점이다. 모스크바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사진19] IMF 시기, 두성영화의 마지막 작품으로 만든<애>(1999). 남궁원과 이경희가 노부부로 등장한다. <장남>에 이은 또 하나의 가족 영화로, 제대로 된 개봉을 거치지 못하고 묻혀 버린 수작이다. [사진20] 2002년에 만든 <아리랑> 현장의 이두용 감독. 나운규 시절의 영화 미학, 즉 흑백과 무성의 스타일로 만들었다. 노장의 녹슬지 않은 솜씨가 돋보인다. 이두용 감독의 60번째 영화다. * 이 글은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과 부산영화제가 공동 제작한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도서 『장르의 해결사 : 이두용』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이두용 감독의 액션영화는 박력이 넘친다. 마치 실전을 방불케 하는 직선의 파괴력이라고나 할까. 카메라를 향해 무섭게 달려드는 주먹과 무질서하게 착지하며 쓰러지는 남자들의 동물적인 움직임, 그렇게 한국액션영화는 간결하고 절제된 움직임의 일본 찬바라 영화나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듯한 화려한 움직임의 홍콩 무협영화의 그것과 비교해 뭐라 딱 규정할 수는 없지만 짧고 굵은 단발마의 비명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누군가의 얘기처럼 한국액션영화의 원조이자 거장 정창화 감독이 홍콩으로 건너가지 않고, 이두용 감독을 비롯한 여러 명장들이 문예영화나 여타의 다른 장르영화로 눈 돌리지 않고 매진할 수 있었다면 분명 한국영화사는 새로 쓰여 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이두용 감독이 이후 < 해결사 >(1981)를 거쳐 < 돌아이 >(1985) 시리즈와 < 흑설 >(1990)을 통해 마무리 짓기까지 그가 만든 일련의 액션영화들을 거칠게 ‘태권영화’라 칭할 수 있다면, 그가 1970년대 초반 차리 셸(한용철)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만든 당시 액션영화들은 거의 보석과도 같다. 작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굴, 복원, 그리고 초기영화로의 초대’라는 기획전을 통해 그 실체를 확인하기까지 < 돌아온 외다리 >(1974)는 이라는 괴상한 제목의 해외 출시 DVD를 통해 감상한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기획전을 통해 <돌아온 외다리>를 대형화면으로 감상하는 그 기분은 한국영화를 마치 홍콩영화인 양 역수입하여 봤던 과거의 굴욕을 씻는 쾌감이었다. 이두용 과 차리 셸이 함께 한 이 시기 일제시대 배경 태권 액션영화는 6편 정도인데 믿기 힘들지만 차례대로 < 용호대련 >(3월 개봉), < 죽엄의 다리 >(4월 개봉), <돌아온 외다리>(7월 개봉), < 분노의 왼발 >(9월 개봉), < 속 돌아온 외다리 >(10월 초 개봉), < 배신자 >(10월 말 개봉) 등 모두가 1974년 영화들이었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속도로 액션영화를 만들던 그 와중에서도 가장 놀라움을 안겨준 작품이 바로 <돌아온 외다리>였다. 30년대 중국 하얼빈, 발차기의 달인 용철( 한용철 )은 사랑하는 여인의 간청으로 암흑의 세계를 떠나려 한다. 보스인 왕해림은 결혼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황금을 싣고 가는 마차를 털어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마차의 주인은 바로 향숙의 오빠였다. 이후 그는 향숙의 곁을 떠나 폐인처럼 생활한다. 한편, 야마모토( 배수천 )는 향숙을 차지하고 왕해림까지 제거하기 위해 용철을 노린다. 고수 김승( 권영문 )을 이용해 용철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지만, 김승은 사실 야마모토에게 접근하기 위해 정체를 숨긴 독립군이었다. 이두용 감독의 이 시기 6편의 태권영화는 모두 이른바 ‘항일 만주 웨스턴’의 공식을 따르고 있는데, < 돌아온 외다리 >가 남다른 것은 수수께끼의 고수 김승을 자유롭게 배치한 시나리오 구성상의 반전과 그 액션 연출의 퀄리티 때문이다. 이전 한국액션영화의 이른바 ‘다찌마리’ 액션신과 비교해 전문 무술인력들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 강도와 난이도가 다르다. ‘발차기로 상대의 싸다구를 때리는’ 차리 셸의 스피드를 비롯 거의 무술지도까지 도맡은 권영문 , 거의 단역으로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황정리와 정진화에 이르기까지, 합에 있어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홍콩무술영화의 그것과 비교해도 말 그대로 제대로 된 ‘그림’을 보여준다.(권영문과 황정리 는 이후 홍콩으로 건너 가 남다른 실력을 뽐낸 ‘용병’들이었다) 앞서 두 편의 작품을 함께 하며 호흡을 맞췄던 그들의 ‘합’이 화려하게 만개한 느낌이다. 특히 저벅저벅 울리는 구두 소리에 긴장하는 매복한 적들과의 일전, 철길과 철교를 사이에 두고 한용철 이 야마모토 졸개들을 ‘싹쓸이’하는 액션신은 실내외를 넘나드는 로케이션의 해방감과 더불어 특유의 박력으로 넘친다. 극단적인 다대일 대결을 즐겼던 이두용 감독은 조그만 공간에 빈틈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밀어 넣고 발차기의 쾌감을 만끽했다. 아마도 홍콩무술인력들이 봤다면 ‘무수한 흑협들의 경연장’이라고 불렀을 실내 세트의 대결은 거의 표현주의 영화를 보는듯하며 정서적인 사각 앵글의 사용, 다리의 진행 방향에 따라 움직이는 핸드 헬드 카메라 등 그 화려한 기법들이 그야말로 중독성이 있다. 그렇게 유난히 강조된 발차기의 타격음과 나동그라지는 둔탁한 소리는 한국액션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선 굵은 인장과도 같다. 그렇게 한국장르영화 혹은 액션영화의 명맥이 어느 순간 뚝 끊겼다가 < 장군의 아들 >(1990)로 느닷없이 회생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딘가 부당하다. 아마도 현재 정두홍 무술감독의 서울액션스쿨이 지배하는 한국형 액션연출의 지독한 에너지의 연원을 찾아가자면, 아마도 이두용 감독의 태권영화들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