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똥
- 감독
- 최금학, 부지영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이용규, 고효정, 박재현, 백승관, 고은기, 홍창넉, 김지현, 변형규, 부지영, 정금지, 박재한, 여미정, 한기업, 서동인, 송재용
한 소녀가 돌연 사라졌다. 경찰을 비롯하여 실종된 소녀의 엄마( 서영화 ), 학교 교사, 학생들 모두 실종된 소녀와 늦게까지 있었던 영희( 전여빈 )을 의심한다. 심지어 당시 영희와 함께 있었던 한솔( 고원희 ) 또한 영희가 소녀의 죽음을 부추겼다는 증언으로 영희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김의석 감독의 < 죄 많은 소녀 >(2017)는 ‘증명’의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사라진 소녀 경민( 전소니 )이 투신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경민의 죽음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자신은 경민의 선택에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증명하려 들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경민이 투신하기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주변 사람들이 경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을 영희에게만 묻는 탓에, 영희는 경민의 죽음을 슬퍼할 틈새도 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 죄 많은 소녀 >의 영어 제목은 <After My Death>다. 직역하면 ‘나의 죽음 이후’로 번역되는 영화는 중의적 해석을 내포한다. <죄 많은 소녀>는 강물에 투신한 경민의 죽음 이후의 이야기다.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죄 많은 소녀가 된 영희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영화의 출발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말을 하지 못하는 영희가 학생들 앞에서 수화로 인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살 시도를 벌인 영희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시퀀스 초입에서 반복 재생된 이 장면은 오프닝과 달리 자막이 곁들어져, 수화를 모르는 교사와 학생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영희가 돌아온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완벽한 죽음을 완성하기 위한 귀환’. 영희를 포함한 극 중 인물들은 모두 경민의 죽음에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다. 워킹맘인 경민의 엄마는 바쁘다는 이유로 딸에게 소홀히 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다. 영희는 자신을 좋아한다는 경민의 고백에 죽음으로 너의 사랑을 증명해보라는 무심한 한마디를 건넸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영희와 경민 사이를 질투한 한솔은 경민을 두고 영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보라고 조롱한 바 있다. 경민의 투신 이전에 이미 4명의 학생의 자살을 경험한 학교는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행여나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봐 지레 겁이 난 학생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희생양을 만드는데 몰두한다. 이들 중에 경민의 죽음을 특별히 부추긴 사람은 없다. 동시에 경민과 관련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방조자다. 동시에 그들은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는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경민의 투신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특정 인물을 지목해 단죄하고자 한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죄인으로 지목한 사람을 공격하고 손가락질하는 행위 또한 내가 경민의 죽음에 얼마나 아파하고 괴로워하는지에 대한 ‘증명’이다.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치는 토끼몰이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토끼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죽음’ 이다. 그들을 위해 죽여주거나 아니면 자신이 먼저 죽던가. 경민이 실종된 다음 날, 자신의 생리통을 믿지 않는 보건 교사에게 질 밑에 묻힌 피를 보여주며 생리 중임을 증명했던 영희는 경민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해를 택한다. 영희의 자살시도는 영희에게 쏠렸던 의심을 일시적으로 분산시켰지만, 완전히 해소시키지는 못한다. 더 이상 영희를 경민의 죽음을 부추긴 죄인으로 몰고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또 다른 타깃을 찾는다.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진 죄인에게 영희에게 씌웠던 죄를 뒤집어씌우고자 한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김의석 감독은 몇몇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 죄 많은 소녀 >를 통해) 모두가 패배하는 과정을 담고 싶었다.”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죄 많은 소녀>의 인물들이 취하는 행동은 크게 두 가지이다. 경민의 자살을 부추기지 않았고, 그 아이의 죽음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학을 하거나 자신은 경민의 죽음 혹은 영희의 자살 시도와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희생양을 만들어 위기를 모면하고자 한다. 스스로 세상을 등진 사람의 선택을 남은 자들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은 어느 누구의 특정한 잘못도 아니요, 이유가 있다면 모두가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나약한 인간들은 다른 이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려 든다.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까지 홀로 괴로워했던 누군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기 전에, 서로를 향한 의심과 질책만 남은 세상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다. 애도와 믿음이 사라진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죄인이 된 소녀는 죽음 아니면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던 세상을 향한 슬픈 복수를 감행한다. 그 이전에 또 다른 소녀는 자신이 혼자 외롭게 끙끙 앓다가 강물에 뛰어들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진 두 소녀 중 누가 죄 많은 소녀일까. 신뢰와 믿음을 잃어버린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사람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 < 죄 많은 소녀 >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나약한 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춘몽>(유현목, 1965)은 한국영화사 최초로 감독이 ‘음화제작혐의’로 기소되며 ‘음화(淫畫)’ 논란을 촉발시킨 영화다. <춘몽> 사건은 외설 음란에 대한 판례를 남겼고, 식민지시기 이후 검열에서 줄곧 ‘공안’에 가려져 있던 ‘풍속’ 문제가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은 서구에서 시작된 섹스 혁명과 성 담론이 한국에도 유입된 시기였다. 불황에 직면해 있던 한국영화계에서는 이러한 물결과 조응하며 ‘섹스영화’ 2) 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한 경향은 세계적 조류와는 반대로 나날이 강고해지던 한국의 검열과 부딪히며 음란 외설 논란이 일어난다. 이때 <춘몽>의 판례는 음란 외설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내시>(신상옥, 1969), <벽 속의 여자>(박종호, 1969)와 같은 영화에도 적용되었다. 이후 그러한 기준은 박정희 정권기 내내 한국영화를 통어하며 수많은 ‘불허’와 ‘가위질’의 근거가 된다. ‘음화 반포’가 아닌 ‘음화 제조’ 1966년 1월4일에 유현목 감독은 ‘음화 제조’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다. 그 이유는 “1965년 5월 <춘몽>을 제작할 때 신인배우 박수정(25) 양을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뒷모습을 촬영” 3) 했기 때문이었다. 두 달 후 유현목 감독은 유죄를 선고받게 되는데, 당시 신문에 공개된 판결 요지는 다음과 같다. ◇ 판결요지 음화제조 서양문화침투로 性의 개방풍조가 과거보다 높아 전통적 성 풍속 감정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나 유방 또는 신체 전부 내지 일부를 함부로 노출시키는 풍속 감정은 우리 사회의 전통에는 아직 찾아볼 수 없고 이러한 노출이 일반화되지도 않아 정상적인 대중에게 혐오 수치의 감정을 주고 선량한 사회의 성적 도의 관념을 파괴하는 한계를 넘어섰으므로 성적 도의와 사회 일반의 이익을 위해 이 점 한계를 그어야 한다. 따라서 지난 65년 5월 일본영화 <白日夢>을 번역한 <春夢> 제작 시 피고인이 여배우 박수정(25) 양으로 하여금 완전 나체를 명령하고 변태 성욕자에게 쫓겨 나체로 6초 동안 20피트나 쫓겨가는 장면을 필름에 담은 것은 음화를 제조한 것으로 인정한다. 4) 명분은 신체 노출의 풍속이나 전통이 아직 우리 사회에 없으므로 ‘정상적인 대중’에게 혐오 수치의 감정을 주기 때문에 음화 제조라는 것이었는데, 그 근거는 최종적으로 표출된 화면이 아니라 제작 과정으로부터 제시되고 있다. 즉 감독이 여배우에게 나체가 될 것을 명령하고 그것을 6초 동안 찍었다는 사실[음화 제조] 자체가 그 장면이 공개[음화 반포]되지 않았더라도 문제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논리상으로는 억지나 궤변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논리 아닌 논리로 <춘몽>은 기소되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 사건의 경위와 그것이 일어난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용공(容共)에서 음화(淫畫)로 외설이나 음란을 규제하는 ‘풍속’ 차원의 검열은 식민지시기부터 있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식민지시기 규정에서도 ‘공안풍속(公安風俗)’으로 묶어서 명시하고 있듯이, 5) 풍속 검열의 범주는 외설이나 음란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한국영화사 최초의 음화제조 유죄 판결’에 해당하는 <춘몽> 사건에서 영화 <춘몽>이 음화냐 아니냐의 여부가 사건 촉발의 핵심이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65년, <7인의 여포로>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이 용공 혐의로 기소되자 유 감독은 이만희 감독을 옹호했고, 그러한 태도와 발언 때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면서 <춘몽>까지 음화로 기소되었던 것이다. 1965년 7월13일 상오 검찰은 유현목 감독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 구속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발표한다. 그 이유는 유 감독이 1965년 3월23일 한국본부 주체로 서울에서 열린 제21회 세계문화자유회의 문화 세미나에서 발표한 「은막의 자유」라는 글이 반공법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 6) 「은막의 자유」는 앞서 반공법으로 기소된 <7인의 여포로>를 언급하며 영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었다. 사실 유현목 감독은 월남한 개신교도로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이 발표문도 반공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7) 그러나 이때의 검열은 그러한 진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따져 보면 <7인의 여포로>를 용공 영화로 몬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당시 정권은 1963년 합법적 집권에 성공한 이후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반대 여론이 비등하는 가운데 영화판 길들이기에 나섰고, 평소 비판적인 발언에 거침이 없었던 이만희 감독이 마침 본보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현목 감독이 <7인의 여포로> 사건에 반기를 들고 8) 국제적인 포럼에서까지 이 사건을 언급하자 정권은 그의 글 중 일부를 트집 잡으며 또 하나의 본보기를 삼았던 셈이다. 당시 기사에 의하면 문제가 된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한국의 작가는 국가적 현실 때문에 주체로서의 권리가 타의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다. 아무리 한국적인 현실이 미묘하다 해도 몇 가지의 조문이나 법관복(法官服) 몇 벌의 위력만으로는 작가의 내면생활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다정다감한 작가에게 오늘의 정부는 국시에 위배된다는 명목으로 걸핏하면 무서운 눈초리를 보이거나 고랑쇠를 채우곤 한다. 9)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빌미가 된 것은 “국시에 위배된다는 명목으로” 작가들을 부당하게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시는 곧 반공(反共)이었고 ‘(영화예술에서) 반공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당시 정권의 관점에 의하면 국시[반공]에 반(反)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용공(容共)이었다. 이에 1964년 말에서 1965년까지 한국영화계는 용공 논란에 휘말리게 된다. 그것은 ‘반공이 국시’라는 말이 얼마나 단순하고 포괄적이며 무자비한 권력이 될 수 있는가를 한국영화계가 인지하는 과정이었고, 모든 것에 최우선하는 검열의 원칙을 영화인들에게 깊이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다. 10) 그러나 이러한 궤변이 법정에서 관철되기 어려워지자 그 불똥은 엉뚱하게도 형식실험에 치중한 영화인 <춘몽>으로 튀어 유현목 감독은 ‘음화제조혐의’로 기소되기에 이른 것이다. 요컨대 <춘몽> 사건은 검열 당국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용공 시비가 음란과 외설로 옮겨가며 식민지시기 이후 지속되었던 검열 기준에서 성적 표현의 문제가 대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림 1] 한국영화사에서 예술vs외설 논란을 일으킨 <춘몽>의 포스터. “희열과 번뇌의 신음에 젖은 쇽킹한 장면의 연속! 가면을 벗겨본 인간애욕!”, “완전이색의 예술명작”이라는 선전 문구가 눈에 띈다. 포스터 자체가 ‘외설’과 ‘예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하여 흥미롭다. [그림 2]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는 <춘몽>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일본 영화 <백일몽>(테츠지 다케치, 1964)을 리메이크했다는 것 때문에 처음에는 표절 문제가 불거졌으나, 나중에 음란 문제로 비화되었다 . <춘몽>이 음화(淫畫)가 되기까지 <춘몽>의 검열 서류를 통해 이 영화가 우여곡절을 거쳐 개봉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한국영화사에서 최초의 음화 사건이 발생하는 상황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춘몽>의 제작사인 세기상사는 1965년 1월29일에 제작신고서를 공보부에 접수하는데, 4월22일에 제작신고가 반려된다. 그 이유는 <춘몽>이 일본영화 <백일몽>의 표절이고, 그 내용이 비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대 참고에서는 ‘비속하다’는 것을 “그 표현방법이 선정적”이라고 바꾸어 말하고 있다. [그림 3]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반려」, 공보국 영화과, 1965.4.22. 그러자 제작사는 2월25일에, 저작자의 승인을 받은 ‘공연권 취득증명서’를 첨부하여 제작신고서를 다시 제출한다. 이때 제작사는 공보부장관 앞으로 「극영화 <춘몽> 제작에 대한 건의서」도 제출한다. 그것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부분은 작품의 제작의도를 설명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14개 항목에 걸친 자진 개작 부분을 상세히 밝히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앞부분은 <춘몽>이 이미지를 위주로 한 전위적인 영화이자 예술지상을 모토로 하는 유현목 감독의 실험작이라는 것이었고, 뒷부분은 건의서에서 개작하겠다고 한 14개 장면은 물론이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상영허가 심사 기준에 저촉될 우려가 있을 경우에는 계속적으로 주의하여 촬영하겠으니 부디 제작을 허가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림 4] 세기상사 대표 우기동, 「극영화 <춘몽> 제작에 대한 건의서」, 1965.4.24. 이 제작신고는 3개의 선정적인 장면을 삭제하거나 개작하라는 시정사항과 함께 5월13일에 수리 통보된다. [그림 5]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수리통보」, 공보국 영화과, 1965.5.13. 그리고 5월24일 상영허가신청이 접수되어 5월26일에 필름 검열이 실시된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에서 재심을 요청하면서, <춘몽>은 상영이 허가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그 경위를 기록한 공보부 서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6] 「邦畫 <春夢> 上映許可經緯」, 공보부 영화과, 1965.6.28. (원본) 1965년 5월26일 중앙정보부의 요청에 의해 재심이 실시되고 5월31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보류가 요청되어 영화분과위원회에서 심의가 다시 이루어지는데, 6월5일 다시 중앙정보부가 외설 부분에 대해 관계기관과 협의하라고 공보부에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6월5일 중앙정보부 보안과에서 중앙정보부장 명의로 공보부장관 앞으로 보낸 「영화재심의견통보」에 의하면 “당부에서 영화 <춘몽>에 대한 재심 결과 그 내용이 자학적 변태성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한 것이며 형법 제243 및 244조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 함이 가할 것으로 사료됩니다.”라고 적혀있다. [그림 7] 「영화재심의견통보」, 중앙정보부 보안과, 1965.6.5. 이후부터 6월21일까지의 과정은 서류로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공보부, 검찰, 그리고 제작사 사이에 일종의 조율과 타협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6월21일에 공보부 영화과는 중앙정보부장 앞으로 “세기상사 주식회사 제작품 <춘몽>에 대한 재심 의견에 관하여 본 작품이 외설이라 관과되는 부분은 영화법 시행규칙 제5조 규정에 의거 대폭 삭제하고 상영허가 조치할 것을 통보합니다.”라는 전언을 보낸다. [그림 8] 「국산극영화 <춘몽> 재심 의견 처리」, 공보부 영화과, 1965.6.21. 그 결과 6월30일자로 상영허가가 통보된다. [그림 9] 「국산영화 <춘몽> 상영허가」, 공보부 영화과, 1965.6.28. 이 서류에서 흥미로운 것은 공보부에서 서류 및 필름을 실사하고 요약한 <춘몽>의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춘몽>을 ‘이색적 전위영화’로 기록하고 있다. 서류에 적힌 바를 옮겨보자면 <춘몽>은 “善男善女가 齒科에서 治療中 서로 알게 되자 各各 冥○○과 痲醉로서 意識을 잃게 되며 이에 따라 이들의 思惟作用으로서 時空을 超越한 人間性情이 極限相으로서의 幸과 不幸을 醫師를 介入시킨 三角關係로서 ○○하다가 結局 性으로서의 慾情的行爲에 破綻을 結末하고 無限한 悔恨에 울부짖을 무렵 意識을 恢復하여 意情을 풀어가는 異色的 前衛映畫”라는 것이다. 나름대로 줄거리 요약이기는 한데 문장이 어법에 맞지 않아 문맥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마지막 문장을 통해 <춘몽>이 검열관들에 의해 ‘이색적 전위영화’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상영허가 서류에는 ‘제한사항’으로 필름에서 다음과 같은 6개 처를 삭제하는 조건이 붙어 있다. [그림 10] 「국산영화 <춘몽> 상영허가」, 공보부 영화과, 1965.6.28. (제한사항 나와 있는 두 번째 페이지) 위 제한사항에 적혀있는 원색적인 어구들과 영화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요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색적 전위영화’라는 결론적 명시는 너무 불균질해서 코믹하거나 그로테스크하게까지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 내지 불균질에는 1980년대 전반기까지도 외설에 관한 검열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원리 아닌 원리가 들어있다. 검열관들은 이 영화가 제작사에서 주장하는 대로 전위적 실험영화임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사실 검열관의 그러한 인정이 실제 가위질을 하는 단계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제한사항을 통해 드러난다. 제한사항은 어차피 여성 신체의 일정한 부분은 노출할 수 없고, 폭행이나 기타 범법 장면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규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선별되기 때문이다. 전위영화라는 정체성 속에서의 그 장면들의 기능이나 역할 등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그것을 고려할 수 있는 검열관도 없다. 검열관들은 시행규칙, 나아가 그것을 하달하는 행정적 검열권력의 시선과 요구를 의식하며 검열을 수행한다. 그 시선이 여성의 젖가슴 노출은 텍스트의 구조나 맥락에 상관없이 외설이라고 명령하고 있다면 일선의 수행자인 검열관은 설사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음란으로 바라보며 삭제할 수밖에 없다. 이는 영화 제작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검열에서 외설로 규정되면 어차피 찍은 필름을 잘라내야 했기 때문에 애초에 그러한 장면을 찍지 않는 것이 가장 손해를 덜 보는 길이다. 그러려면 검열권력이 요구하는 기준에 따라 자진 검열이 사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때 자진 검열의 주체는 이미 검열권력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있다. 검열권력의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의식하여 그가 원하는 대로 일정한 부분만을 응시하고 잘라내는 것 자체가 도착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검열권력의 도착적 상상력이 또한 작용한다. 여성의 젖가슴을 음란한 것으로만 바라보는 관점,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는 페티시즘, 그래서 감시라는 명분으로 그것만을 엿보는 관음증(觀淫症)이 언제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검열의 도착적 상상력 <춘몽>은 위와 같은 상영허가를 받고 1965년 7월3일 개봉한다. 그런데 개봉한 지 6개월이 지난 1966년 1월에 새삼스럽게 ‘음화제조’ 혐의로 감독이 기소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이 외설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보여준 권력의 억지 내지 궤변, 즉 그것이 텍스트에 등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뒷모습을 촬영했기 때문에 음화제조라는 판결은 검열권력의 도착적 상상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다. 검열권력은 언제나 텍스트를 보지 않고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본다. 검열권력이 상상하는 세계에서 그것은 외설, 즉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 보인 것인데, 언제나 보여서는 안 되는 것만을 찾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든지 상상된 외설의 세계로 편입될 수 있다. 검열권력은 외설의 세계를 상상하기 때문에 외설을 더욱 철저히 금지하는 것이며 무엇으로든 외설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요컨대 유현목 감독에 대한 음화제조 판결은 권력이 오버(over)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언제나 일정한 부분 너머[over]를 음란한 것으로만 상상하는 권력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원리 아닌 원리는 박정희 정권기 내내 한국영화를 지배한 것은 물론이고, 1980년대 신군분 정권에까지 답습되어 한국영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1. 이 글은 박유희, 「검열이라는 포르노그래피」,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역사 속 검열제도』, 한국영상자료원, 2016.12, 159-168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2. ‘섹스영화’란 1960년대 말에 한국 신문에 등장하기 시작한 용어로, 처음에는 ‘불륜영화’를 대체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대 이후 사라졌던 ‘에로(티시즘)’라는 말이 영화와 합성되어 ‘에로(티시즘) 영화’로 재등장하면서 ‘섹스영화’와 ‘에로영화’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후 1980년대까지 두 용어에서는 ‘팔기 위해 벗기는’ 저질 상업영화의 뉘앙스가 점차 강해진다. 3.《경향신문》, 1966.01.04.7면. 4. “영화 <춘몽>에 음화 판결”, 《동아일보》, 1967.03.15.3면. 5. 활동사진필름규칙 제5조에 의하면 “검열관청의 검열을 거친 필름으로서 공안 풍속 또는 보건 상 지장 있다고 인정할 때는 그의 영사를 제한 또는 금지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6. “영화감독 유현목 씨 입건”, 《경향신문》, 1965.7.13.3면;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은막의 자유」 등 말썽”, 《동아일보》, 1965.07.14.3면. 7. 유현목 감독이 “반공의 국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박유희, 「문예영화와 검열: 유현목 영화의 정체성 구성과정에 대한 일고찰」, 『영상예술연구』 17호, 영상예술학회, 2010, 201-203쪽 참조. 8. “이만희 감독 관대처분을”, 《경향신문》, 1965.02.08.5면. 9. “영화감독 유현목 씨 입건”, 《경향신문》, 1965.07.13.3면. 10. 박유희, 「문예영화와 검열: 유현목 영화의 정체성 구성과정에 대한 일고찰」, 『영상예술연구』 17호, 영상예술학회, 2010, 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