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줘
- 감독
- 김소정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박서연, 김소정, 김현희, 최정화, 김재록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중 (사진: “ jinu montage ”, 유튜브) 본 원고는 필자의 개인적 견해에 기반해 작성됐으며, 기관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함을 안내드립니다. * 이 글은 2024년 12월에서 2025년 12월까지의 한 무명 영화평론가의 도전기다. 다 쓰고 보니 비평에 관한 고차원적인 통찰은 없는 것 같다. 그걸 논하려면 실력적으로 좀 더 여물어야 한다. 그전에 평론가로서 생존해야만 했다. 이 글은 그 과정에서 만난 영화들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걸어온 길은 나를 다른 관점으로 좋게 보아온 이들의 눈을 통해서 [1] 만들어졌다.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Intro 바퀴가 되던가 바퀴에 깔리던가 난 다른 차선에 세우고 깜빡이 켜놔 - 이센스, <쉬게> “보안정책에 의해 차단 되었습니다.” 2026년 상반기에 잠시 일하는 곳에서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기로 한 영화를 예매 취소하려고 로그인하니 떡하니 보였던 문구다. 차단, 배제, 초대받지 못함 등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차단은 상당히 신선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갑자기 일을 하게 돼서, 평소에 가던 평일 오후 2시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주로 하는 언론배급 시사회는 당분간 못 가게 됐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영상자료원이나 서울아트시네마에 가기가 아직은 엄두가 나질 않는다. 퇴근 후 노트북으로 영화를 파편적으로 보거나 주말을 이용해 밀린 숙제처럼 영화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그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니라고 여긴다. 내가 취소하려고 했던 영화는 로베르 브레송의 < 아마도 악마가 >(1977)였다. 손에 넣으려고 하면 언제나 그랬듯이 도망간다. 영화와 잠시 멀어졌지만, 근무지에서 사람들을 대하며 오히려 영화적인 순간을 최근 체험했다.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꼭 그러면 만난다. 하나는 친했던 옛 친구를 오랜만에 마주쳤다.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신세라 친구와 담배 하나를 같이 필 수 없었다. 아쉽게 손 인사만 하고 그를 떠나보냈다. 잠시 마주친 그 순간이 어쩌면 그 친구와의 마지막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다른 하나는 답답해서 사무실을 나와 찬 공기를 마시는데 두 명의 영화배우가 지나갔다. 작년 《씨네21》 ‘프런트 라인’에 합류해 처음 쓴 비평이 두 배우가 나온 영화였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잘 움직였던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도로에 멈춰 선다. 그는 차 안에서 담배 하나를 피며 생각을 고쳐먹는다. 지금이 나에게 그런 시기 같다. 하는 일이 끝날 무렵, 시네필들이 안 좋아하지만 나는 애정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 오디세이 >(2026)가 아마도 용산 아이맥스관에서 시사회를 열 것이다. 놀란이 매달리는 ‘귀환’이라는 화두처럼 나는 다시 영화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사회 인원수 제한에 컷 당하지 않고 무사히 입성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비평, 안녕하십니까? 글쎄 전혀 안녕하지 못하다. KMDb의 “비평, 안녕하십니까” 코너에 나는 언제 써보나? 영자원에 자주 가는 건 소용없다. 이들의 눈에 띄려면 어디서 놀아야 할까? 쟨 뭔데 50주년 리스트를 썼지? 왜 난… 이런저런 불만 섞인 질문들이 쏟아졌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점점 마음이 꼬여갔다. 늘 위기인 비평과 < 기생충 >(봉준호, 2019)으로 정점을 찍고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직격탄을 맞은 후 급격하게 추락 중인 한국영화보다 내가 더 걱정이었다. 그곳에 기생하는 존재라 숙주가 위기일 때 가장 먼저 떠날(능동) 혹은 떨어져 나갈(수동) 이들은 누구일까? 래퍼 이센스의 <A-G-E>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와중에 버는 놈들이 타짜지.” 그런 타짜들이 부럽다. 나도 타짜가 되어 전국을 누비며 한몫 챙기는 영화평론가를 꿈꿨지만, 지금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다. 타짜가 되기엔 애매한 재능 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악마의 저주일까? 이런 상황에서 영화와 비평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내겐 사치다. 위기라고 상정하고 파국이 된 그곳을 사유하는 것은 어찌 보면 안전거리가 확보된 이들에게 허락된 고상한 일은 아닌지 생각도 해본다. 그러기엔 내 눈앞에 놓인 현실이 비루하기 짝이 없다. 간단하게 말해서 일이 없는데 누가 누굴 걱정하겠는가. 영화 시장이라는 곳에서 나는 스스로를 내보이곤 있지만 매칭이 잘 이뤄지지 않는 매력적이지 않은 매물인 것이다. 비평가 자체가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다. 대(大) 인플루언서 시대에선 더욱이 말이다. 등단 이후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는데)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대했던 것이 오산이다. 요즘은 등단 없이 혹은 등단 제도에 콧방귀를 뀌며 등장한 평론가들이 오히려 내가 원했던 그 자리에 더 빨리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를 써준 분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완성형 시네필로 등단한 케이스가 아니다 보니, 지금도 나를 쓴다는 것은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그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선 시네필-평론가들이 학창 시절부터 영화에 쏟아부었던 시간만큼 나 역시 영화에 투자해야 한다. 적게 잡아도 10~15년. 하지만 세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잡지는 싸움의 장소라기보다는 매칭 애플리케이션이 되었다. 크림처럼 실패한 비평가이자, 실패한 산문가는 오늘날에 잡지에서 그렇게 환대받는 작가는 아닐 것이다. 크림은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엄숙한 비평 스타일에서 탈피, 구어적이고 생생한 언어로 비평을 썼지만, 그의 지위는 어중간한 평론가로 머물며, 독자에게 호응받지 못했다.” 강덕구 평론가가 한예종 웹진에 기고한 “ 잡지의 전성기에 관한 영원한 수다 ”란 글의 한 부분이다.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실패한 평론가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의 눈에는 신기한 행보로 비칠 수도 있다. 근데 그 누군가는 어디에 있을까? 아예 안 되진 않는다. 뭔가 되기는 한다. 그게 저주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내가 원하는 타이밍이 아닌 뒤늦게, A를 바라면 B나 C를. 확실한 건 직행 티켓은 없다는 것! 우회를 거듭하며 돌고 돌아 영화라는 왕국에 잠시 머물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감질나게 맛만 보고 말이다. 2024년이 시작하고 《씨네21》에서 주는 리뷰만 쓰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나이는 차고 ‘젊은’ 시네필-평론가들이 새롭게 씬을 장악하는 상황에서 나는 시작도 안 한 것 같은데 끝난 느낌을 받았다. 리부트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뭔가를 도모할 동료도 없었다. 그저 혼자서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것만이 내게 남은 선택지였다. 또다시 등단을 시도해야만 했고, 단편이 아닌 장편을 만들어야만 했다. 도착 지점은 다름 아닌 영화제. 여태 안 불러줬는데 내년이라고 다를까… 이런 허무함이 나를 뒤엎을 무렵, 안 불러주면 ‘내가 직접 간다’라는 밑도 끝도 없는 오기가 작동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뭐라도 만들어서 도전해 보고 그러고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그래야 후회가 덜 남을 것 같았다.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영화제에서 일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그 정도야 나도 안다. 그 천운이 내게 안 떨어지는 걸 어떡하겠나. 뭔 수를 써서라도 그 근처라도 가는 수밖에. 내가 찾은 틈새는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전. 부산영평 출신 평론가들이 부산국제영화제 크리틱b상 심사위원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이 우회로. 물론 그해 공모전 주제였던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좋아해서 쓴 것은 맞지만 앞서 설명한 저 욕망이 없었다면 글은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2025년. 김칫국을 드럼통째로 마시고 있었는데 연락은 없었다. 갑자기 《씨네21》의 김성훈 기자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왔다. -이번에 부산 내려가시죠? -안 불러줘서 못 가요. -(다 함께) 하하하 30주년 기념으로 씨네21상이 신설되면서 심사위원으로 선정됐다는 반가운 섭외 전화였다. 왜 뽑혔는지 나름 예상은 했지만, 핵심은 작년에 부산영평에서 등단했다는 것. 글을 안 썼으면 열리지 않았을 문이다. 우회에 우회. 그렇게 부산에 내려가서 12편의 영화를 보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1. <아코디언 도어>: 월경(越境)의 이미지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전’ 부문의 한국독립영화 12편 중 씨네21상은 손경수 감독의 < 아코디언 도어 >(2025)에게 돌아갔다. 위에서 하이라이트한 부분은 모두 이 영화의 대사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우선 영화를 다시 볼 수 있게 스크리너를 친히 내준 손경수 감독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영화제 심사 때 쓴 “CINEMA”라 적힌 노트를 다시 꺼내 봤다. 그때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영화를 다시 보며 발견했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아코디언 도어>에 왜 끌렸을까를 생각해 봤다. 작가(Writer’s Block) 한예종 전문사에 입학하면서부터 글 쓰는 캐릭터에 나도 모르는 새 빠졌던 것 같다. 이창동 감독의 < 버닝 >(2018)의 종수를 시작으로 이지은 감독의 < 비밀의 언덕 >(2022)의 명은이, 그 누구도 기회를 주지 않을 때 GV 모더레이터 데뷔를 시켜준 천재 김홍기 감독의 < 익스트림 페스티벌 >(2022)의 래오, 홍상수 감독의 <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2025)의 시인 동화 그리고 <아코디언 도어>의 지수까지. 영화평론가가 다양한 활동을 한다지만 기본이 되는 것이 결국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와 비평이 내 삶에서 멀어지려고 할 때, 작가의 형상이 아른거리는 영화를 마주하면 더 눈길이 갔다. 캐릭터들의 고민이 그 시기의 나의 고민과 공명한 것도 한몫한다. 초기엔 뭘 써야 할지(<버닝>), 얼마나 솔직해야 하는지(<비밀의 언덕>)를 고민했다. 그러다 최근엔 좀 더 현실적인 고민에 접어들었다. 글을 안 쓰고 있는 나의 게으름(<익스트림 페스티벌>)과 나이는 먹어가는데 평론가로서 자리를 못 잡고 있는 현실(<그 자연>)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초라한 상황과 상반되게 영화제는 너무나 화려했다. 그곳에서 본 <아코디언 도어>의 한 문장이 내 가슴을 후벼팠는지 노트에 많이 적혀있었다. “어차피 평범해질 운명이었다.” <아코디언 도어>에 대한 작품 비평은 이 영화의 개봉을 고대하며 뒤로 미루고 싶다. 대신에 이 영화의 전환점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수직의 움직임을 말하고 싶다. 타임라인 상 가운데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영화는 하늘 높이 풍선을 띄운다. 소제목에도 썼듯이 <아코디언 도어>는 경계를 넘는 이미지로 넘실대는 영화다. 크게는 지구와 우주,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도달하는 이 영화는 그 사이에 낀 ‘재능’이란 녀석을 주목한다. 물에서 뭍으로 사진: " 아코디언 도어 ", 부산국제영화제 /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과학 괴짜 종윤이가 우주 풍선을 쏘아 올린다. 성층권 33km까지 도달한 풍선, 그곳에서 내려다본 지구. 한계에 다다랐을 때 풍선은 터지고 지구로 추락한다. 지구에선 지수( 문우진 )가 강 아래로 추락하고 있다. 물에 빠진 건 이때뿐인데 <아코디언 도어>가 그리는 세계는 마치 수면 아래의 세계 같다. 영화 내내 간간이 들리는 파도 소리와 귀가 먹먹한 사운드 효과는 물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영화를 다시 감상하며 지수가 마치 물고기처럼 느껴졌다.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상태 역시 물과 관련됐다. 예를 들면 무언가에 심취(心醉)한, 몰입(沒入)한, 사랑에 빠진(fall in) 등등. 이는 모두 물과 관련된 혹은 연상되는 표현들이다. 그러한 물의 세계와 작별을 고하고 뭍으로 넘어온 지수는 대전환을 맞이한다.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유튜브에서 보고 적어둔 글귀가 있다.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오는 것은 인간이 산소통 없이 달에 간 정도의 놀라운 기적.” 물에서 건져진 이후로 지수는 키가 자라고 털이 나기 시작한다. 일종의 진화라고도 볼 수 있는 육체적 성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능만 믿고 까불었던 지수는 새롭게 다가오는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다. 모종의 사건이 벌어지고 지수는 빵을 만드는 마이스터고에 진학한다. 글 쓰는 것과는 상관없는 곳에서 지수는 무탈하게 지낸다. 그리고 글을 조심스럽게 다시 쓰기 시작한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거리감이었다. 매몰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글의 내용이 내레이션으로 나오고 여러 장면이 몽타주된다. 몇몇 장면에서 감독 본인이 지수의 어른 역으로 등장한다. 그가 출연한 사실 또한 영화를 다시 보며 엔딩크레딧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나오는 그의 뒷모습에서 자신의 첫 장편영화를 만들기까지의 부침(浮沈)의 시간이 느껴졌다. <아코디언 도어>는 감독 자신을 영화에 각인시킨 에세이적인 면모를 지닌 흥미로운 픽션이다. 영화제에서 볼 때는 몰랐지만 해가 바뀌고 지수와 엇비슷한 상황에 놓여 영화와 잠시 멀어진 상태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니 묘했다. <아코디언 도어>는 내게 미래의 한 조각을 미리 보여준 셈이었다. 물 안에서 지수가 봤던 익사한 남자는 최악의 경우 나의 자화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시 아찔했다. 내시현상(內視現象) - 내 눈에만 보이는 벌레 사진: " 아코디언 도어 ", 부산국제영화제 /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재능이란 기생충을 CG로 선보이는 방식보다 지수의 시점 숏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놀라웠다. 영화제 때는 발견조차 못했던 장면이다. 그 장면은 지수가 잠에서 깰 때 등장한다. 무언가가 내 눈에만 보이는 내시현상, 의학 용어로 비문증(飛蚊症)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기생충이 지수의 신체 내부에 있는 실체인지 아니면 환영인지는 알 수 없다. 둘 중 어느 쪽으로도 환원시키고 싶지 않다. 그 두 개의 영역이 중첩된 숏이라 말하고 싶다. 기생충이 지수의 눈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낼 때의 조건이 흥미롭다. 무매개적인 조건이 아니라 빛과 커튼이 필요하다. 잠에서 깬 지수가 빛을 머금은 커튼을 바라볼 때 기생충의 모습이 잠시 등장한다. 영화의 영사 원리가 떠오르기도 한 장면이다. 하지만 스크린을 통해서 다 같이 볼 수 있는 영화와 달리 기생충은 지수 눈에만 보인다. 기생충이 몸에서 빠져나간 이후에 지수의 시점 숏이 같은 조건에서 다시 등장한다. 더 이상 지수에게 기생충이 떠다니는 불투명한 필터는 없다. 맨눈이 된다는 것의 두려움. 지수는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아물지 않은 어떤 상처가 이제 눈에 들어오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에도 지수의 시점 숏이 나온다. 이 영화의 엔딩은 여전히 내게 미궁으로 남아있다. 지수의 흐느낌, 멈춰버린 그의 몸, 시끄러운 기계음. 밀폐된 공간 속에서 시청각적으로 구성된 이 감각적인 엔딩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장에 비평의 언어로 재단하고 싶지 않다. 그저 내가 몽타주하고 싶은 것은 현재 지수의 멈춘 뒷모습과 그가 다시 쓰기 시작한 글에서 표현했던 미래의 자신의 뒷모습이다. <아코디언 도어>는 두 뒷모습 사이의 간극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2.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수인(囚人)의 이미지 두 뒷모습은 현실과 픽션의 간극처럼도 보인다. 현실은 잠시 멈춰있지만, 미래에는 좀 더 자유로워지길 바라며 써 내려간 희망의 픽션. 나 역시 현실의 고민을 픽션에 투영해 바라본 적이 있다. 그 영화는 기사 한 줄 없이 주목도 못 받았지만 그래도 영화제에 흔적은 남긴 지옥의 영화 <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2025)이다. 이것은 희망의 픽션은 아니다. 무언가를 내려놓지를 못하는 나를 산 정상에 올려다 놓고 장대비를 맞게 한다. 절벽 끝으로 몰아붙이는 느낌으로 말이다. 계속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하산할 것인지. 질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가 영화의 끝에서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내리는 비라는 사건은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것과의 우발적인 마주침” [2] 이다. 원래 엔딩은 “CINEMA”라 적힌 노트를 봉수대에 넣고 태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왠지 뻔해 보였다. 찬물을 끼얹고 싶었다. 그래서 빗소리를 붙여봤다. 썩 마음에 들었다. 기껏 노력해서 무언가를 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는 느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제에 가기 위해 200자 원고지 50매 이상을 썼다. 이번엔 장편 분량의 에세이 영화를 만들었다. 어떤 평론가가 이럴까 싶지만, 방법이 그것뿐이니 어쩔 수 없었다. 감독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없다. 평론가로서 나를 알리기 위해 만들었을 뿐이다. 그게 과연 통했을까? 프랑수아 트뤼포의 명언이라고 잘못 알려진 ‘시네필 3법칙’을 등단한 이후에 몸소 실천했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보고, 영화 비평을 쓰고, 직접 영화를 만들기.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영화와 좀 더 멀어진 것 같다.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중 (사진: “ jinu montage ”, 유튜브) 부산 무사이극장에서 당연히 만들면서도 알았고, 실제도 다 만들고 나서는 더욱 더 난감했다. 이걸 받아 줄 만한 영화제가 있을까? 어느 영화제에 붙여놔도 안 어울렸지만 그냥 일단 다 출품해 봤다. 그래도 받아 줄 만한 곳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였다. 당연히 떨어졌다. 그것에 낙담한 적은 없다. 떨어질 만한 영화기 때문이다. 서울독립영화제 빼곤 남은 카드가 없었다.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떨어진 것 같았다. 때마침 부산의 김영광 평론가가 운영하는 1인 시네클럽 ‘시네마 언노운’에서 상영작 공모가 시작했고, 인스타그램에서 홍보 게시물을 보자마자 바로 보냈다. 그렇게 다시 부산에 가게 됐다. 부산국제영화제 일정이 끝나고 바로 다음 주 화요일인 9월 30일에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이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하게 된 것이다. 부산 무사이극장에서 진행된 상영회에서 김영광 평론가는 3시간에 육박하는 GV를 진행했다. 그는 ‘뉴웨이브’가 올 것 같냐고 물었다. 그것은 초청된 모든 감독에게 물어본 공통 질문이었다. 그때는 이걸 왜 물어보나 싶었다. 최근에서야 알았다. 그는 3월 7일에 열리는 ‘뉴웨이브 전초전’이란 대규모 행사를 그때 이미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당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당분간 뉴웨이브는 안 올 것 같다. 지금은 기획자를 원하는 것 같다. 저런 거(<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만들지 말고, 영화를 틀어야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시네마토그래프의 ‘이윤영’ 씨가 지금 스타다. 비평계에선 ‘김병규’ 평론가가 스타고 그 이후엔 없다. 등단하고 나서야 안 것이지만 이미 학창 시절부터 시네필이고 파워블로거고 그 집단을 끌고 들어왔다는 점, 다시 말해 인터넷 인간들을 우군으로 끌고 왔기에 리더다. 밑도 끝도 없이 온 나의 경우는 지지기반이 아예 없는 거고… 지역 기반이 있거나 혹은 업계 사람들을 많이 알아서 일을 따가고 잘 나가도, 그처럼 아이콘은 될 수가 없다. 래퍼 더 콰이엇의 명언이 이곳에도 적용된다. “스타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고 사람들과 시대가 원해서 나타나는 것에 더 가깝다. 근데 스타가 안 나온다는 것은 그걸 안 원한다는 거예요. 이 시대가… 근데 때가 되면 나타날 겁니다.” 비평이라면 그것을 소비하는 블로그, 커뮤니티, SNS 사용자를 끌고 와야 하는 것인데, 다음은 어떤 매체일까? 비평을 담을 수 있는 마지노선이 블로그가 아니었을까. 혼자서는 버겁다. 잘난 사람들도 뭉치는 판이다. 아이돌 그룹처럼 모여서 팀으로 활동한다. 소리그림, 키니마 등등. 현장에선 얼추 비슷하게 말했던 것 같고 상영 이후에 정리한 말들이다. 평론가의 역할이 좀 더 확대되고 있었다. 나 역시 상영 기획을 해야 하나, 영화를 수입/배급해야 하나 별별 생각이 들었다. 평론가의 다음 단계가 있다면 그것은 감독이 아니라 프로그래머나 수입/배급업자가 아닐까? 활황인 관객 프로그래머와 시네클럽들. 프로그래밍의 외주화. 영화제와 영화관은 이들과 손을 잡고 ‘멋(hip)’을 뽐내고 있는 중이다. 이를 통해 기획, 상영, 비평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융합형 인재가 양성되고 있었다. 새로운 종의 출현인 것이다. (새로운 것은 아닐 수 있다. 잠복기를 거쳐 다시 부상한지도 모르겠다. [3] ) 나는 단종된 이전 모델의 길을 걷고 있는 퇴화하는 평론가의 종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러한 압력은 상당한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어떤 영화를 어떻게 쓸 건지보다는 어떻게 상영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생존에 유리해졌다. 글도 잘 못 쓰는데 시장에선 그런 사람들을 더 반기니 말이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선 이러한 시류를 반영이라도 하듯 ‘클럽 시네마’란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소리그림과 키니마가 그 첫번째 주인공으로 참여해 시네토크를 했다. 여태 이 글을 읽었거나 혹은 영화제를 간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나는 해당 영화제에 영화로도, 평론가로도 초대받아 일해 본 적이 아쉽게도 없다. 작가로서의 평론가만 지나치게 고수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점검하게 됐다. 과감하게 집어던지고 건너편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비평은 일종의 패시브 스킬이 된 것은 아닐까?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나는 그 스킬을 익히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렇게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은 영화를 보러온 동지들(김영광, 강원우 평론가, 마산영화구락부의 김준희)과 화명역 근처에서 새벽까지 소주 먹고 대단원의 마무리가 되는 줄 알았다. 마지막 남은 한 발이 먹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공식 발표 하루 전날 서울독립영화제 사무국에서 전화가 왔다. 페스티벌 초이스 장편 쇼케이스 부문에 선정됐다는 전화였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시네마테크KOFA 기획전 “영화로 영화쓰기” 중 섹션 “오진우 단편선”(상영작 중략) 그전에 7월 15일에 “오진우 단편선”이란 제목으로 그간 만든 영상들을 틀 기회가 있었다. 다른 평론가들이 상영 기획으로 저변을 확대하며 예비 프로그래머로 성장할 때, 나는 영상을 만들어왔다. “ 영화로 영화쓰기 ”라는 프로그램 안에서 내 영상들이 가장 이질적이었다. 다른 상영작들과 어울릴 수 없는, 그래서 단독으로 꾸려졌을 것이다. 특색이 있다지만 일종의 갈라파고스. 나도 다른 창작자들과 교류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도마 위의 생선이 되겠다는 것이다. 평론가와 프로그래머는 칼을 들고 도마 위의 영화라는 생선을 바라본다. 일종의 게이트 키퍼로서 영화를 선별한다. 나도 그렇게 남의 영화를 바라보고 싶었는데 스스로 생선이 되었다. 비평의 세계에서 영화 창작의 세계로. <아코디언 도어>의 지수처럼 나 또한 물고기 같았다. 지수는 변화한 환경에 적응했다. 나는 이것이 진화인지 아니면 퇴화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후자에 마음이 쏠린다. 애초에 내가 평론가로서 잘 풀렸다면 영화까지 만들었을까? 아닐 것 같다.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타입의 영화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계속해서 비평의 끈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비평을 놓아버리고 건너편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미련하게…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KMDb에 이렇게 글을 쓰기 전에 웹진 아카이뷰에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또한 우회. 그 글 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비디오 에세이와 에세이 영화는 내게 고치지 못한 습관 혹은 만성적인 질환처럼 남게 됐다. 이 증상으로서의 시네마 를 발견해 준 담당 프로그래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린다. 향후 미래에 다시 누군가가 이 분야를 디깅했을 때 재발견되어 한국 영화비평사의 B-Side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까지, 설령 그날이 안 와도 영화로 가는 길을 계속 걷는 수밖에 없다.” “오진우 단편선”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나를 최초로 발견한 은인 황민진 프로그래머님의 제안 덕분에 성사된 일이다. 좀 더 강단 있고 잘나가고 예술적인 평론가였다면 행사의 흥행을 위해서 고사를 했을 텐데, 아쉽게도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보통 일이 들어오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다. “네, 가능합니다.” 황민진 프로그래머가 쓴 노트를 살펴보자.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비디오 에세이,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뮤직비디오를 아우르는 오진우 감독/평론가의 작업은 단일한 규정으로는 묶이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동시에 저 모든 걸 안 하고 있기도 하다. 정확히는 못한다. 저 장르로 나아가 아예 감독이 돼서 뭘 만들 줄을 모른다. 자본화되지 않는 기술력인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감독을 꿈꾼 것도 아니고, 영화과 출신도 아니고, 제작 워크숍을 경험한 적도 없다. 평론가로서 다급해져서 만든 성과일 뿐이다. 내 영상은 그간 본 것들의 총합이다. 다양한 것들을 가져와서 믹스하는 것이다. 황민진 프로그래머가 분석한 나의 작업의 특성은 유운성 평론가가 정의한 ‘에세이 영화’의 형식과 공명한다. 유운성 평론가는 에세이 영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에세이란 고전적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부정하는 대안적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포괄하고 자신의 특수한 사례들로 만드는 보편적 형식이다.” [4] 에세이에 관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실제로 에세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와닿는 정의가 바로 저 문장이다. < 영상자료원 가는 길 >(2022)과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이 저 정의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다. “오진우 단편선”을 본 몇 안 되는 관객 중 유운성 평론가님이 계셨고 유일무이하게 리뷰를 남겨주셨다. 글의 일부분을 옮겨 보자면 다음과 같다. (상) <영상자료원 가는 길> / (하) <Hong Sang-soo: Gravity and Grace> 사진: “ jinu montage ”, 유튜브 / “ MUBI ”, 유튜브 “(…) 최근작인 <홍상수: 중력과 은총>(2025)은 비평적 몽상의 발걸음이 홍상수 영화를 일렁이게 하는 은밀한 저류와 짜릿하게 만나면서 그것을 드러내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다만, 이전 작업들에서 두드러졌던 ‘캐릭터로서의 비평가’는 여기서 훨씬 은근한 형상으로, 수줍은 자취로만 감지된다.” 바로 직전 작업인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에서 ‘캐릭터로서의 비평가’를 전면에 내세워서 반작용이 있었던 걸까? 하긴 이 영화에서도 내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이 영화 또한 직접 보러 와주신 유운성 평론가님은 다음 작품에서는 본인이 직접 출연해 보라고 조언해 주셨다. 나는 숨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라지고 싶었던 것일까. 어디로부터?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영상자료원 가는 길>과 마찬가지로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도 영화제 맛을 본 작품이다. 여기에 <Hong Sang-soo: Gravity and Grace>라는 비디오 에세이는 해외 영화제에서 상영 후 MUBI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됐다. 나름 괄목할 만한 성과임에도 불구하고 아시다시피 기사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은 부산을 찍고 서울에 입성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 내가 원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서울독립영화제의 자랑인 ‘독립영화 매칭 프로젝트: 넥스트링크’란 프로그램이 있다. 보통의 영화들은 개봉이 목표다. 서독제의 넥스트링크는 배급사와의 미팅을 주선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2025년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상영작 중 배급사 미정인 작품이 이 프로그램의 자격 조건이다.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이 조건을 갖췄으나 (양심적으로) 개봉이나 배급사를 둘 정도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이 영화가 내가 바라는 다음 스텝을 위한 땔감이 되길 희망했다. 마침 그런 장면이 이미 영화 안에 있기도 했다. 이 영화를 통해 얻은 것은 감독의 자리. 내가 바라고 원했던 자리는 평론가의 자리인 모더레이터가 앉은 저 자리. 장편 분량의 영화를 만들고 고작 바라는 게 그것이냐고 묻는다면, 당장은 그렇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하지만 여기서 일단 마무리가 됐다. 이 영화를 통해서 영화제 측에 나를 처음으로 알렸다. 그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나를 말이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영화만 틀고 끝날 수도 있다. 개막식 때로 시간을 돌려보자. 개막작 < 무관한 당신들에게 >(2025)를 기획한 문주화 평론가님을 보면서 깨달았다. “아! 일은 저렇게 보는 거다.” 지난 1년간 내가 걸었던 길이 구태(舊態)라고 느껴졌다. 그녀는 최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발탁됐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나는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관객석으로 그리고 엉뚱한 사무실로 점점 영화와 멀어졌다. Outro 이것이 나의 지난 1년 간의 이야기다. 손경수 감독이 쓴 <아코디언 도어>의 연출 의도가 떠오른다. “잘해서가 아니라 좋아해서 계속할 수 있다는 단순한 답은 계절처럼 한 템포 늦게 찾아왔다.” 비록 잘한 적도 없지만 좋아해서 계속할 수 있다는 단순한 답은 아직 내게 도착하지 않았다. 올해는 어떻게 될까? 그 사이 계절은 겨울에서 봄이 됐다. 영화에 대한 사랑보단 돈… 거짓말이라도 돈 말고 영화를 사랑한다고 외쳤어야 했다. 모든 것이 내가 자초한 일이기에 별다른 변명도 할 수 없다. 많은 분의 도움으로 영상자료원 로그인 차단은 해제되었다. 차단 해제 이후 영상자료원에서 처음 본 영화는 오구리 코헤이의 < 진흙강 >(1981)이었다.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명작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끝으로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진흙강>은 인물들 간의 거리감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우동집 아들 노부오는 창문을 통해 강 건너편에 정박한 배 한 척을 본다. 그것은 그에게 신기한 매혹의 세계였고, 잔혹한 진실의 세계였다. 비가 퍼붓는 날 다리 위에서 노부오는 배에 사는 키이치를 만나 친구가 된다. 배에는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하나는 남매의 방으로,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방으로. 배는 벽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됐지만,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세계였다. 들어도 못 들은 척 고통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남매는 살아간다. 두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식사 장면이다. 키이치와 그의 누이 긴코는 우동집에 초대를 받아 밥 한 끼를 맛있게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때 긴코가 즐겁게 노는 동생을 쳐다보는 장면이 있다.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잠시 누린 이 행복이 내 것 같지 않은 느낌. 다른 하나는 마지막 장면이다. 진실을 목격한 노부오는 남매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다음 날 배가 떠나기 시작한다. 노부오는 강을 따라 배를 뒤쫓기 시작한다. 그는 연신 친구 키이치를 불러보지만, 배는 무심하게 아무 말 없이 떠난다. <진흙강> 중 / 사진: <진흙강> 중 (“ Doro no kawa ”, IMDb) * 지난 여름과 겨울에 제 영화를 보러 와주신 관객분들, 감독님들, 평론가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영화제 이후 자신의 영화를 내어준 < 관찰자의 일지 >(2025)의 임정환 감독님과 < 겨울날들 >(2025)의 최승우 감독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글을 쓰지 않고, 영화를 만들지 않았으면 볼 수 없었던 길이기에 그저 꿈만 같다. “영원히 꿈을 꾸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 이제 꿈에서 깰 시간. *** [1] 배우 권해효의 멘트를 문장에 맞게 변형해서 사용했다.( 링크 ) [2] 질 들뢰즈,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313쪽. [3] 한국영상자료원의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세대가 다른 시네필들이 만났다. 비슷한 연장선상에서 읽히는 “영화서클”은 지금 활황인 시네클럽의 부상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전 세대의 시네클럽은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추적하는 고고학적인 방식의 프로그램 같다. [4] 유운성 평론가는 장 뤽 고다르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 인디아 >(1959)에 대해 남긴 짧은 글로부터 ‘에세이’라는 형식을 다음과 같이 도출한다.(유운성, 『유령과 파수꾼들』, 미디어버스, 2018, 310쪽.) [5] <관찰자의 일지>에 나오는 대사다. 영문 자막이 흥미롭다. “… Dreams can’t last forever … is the theme.” 비평, 안녕하십니까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오진우(영화평론가) l 2020년 《씨네21》 영화평론상으로 데뷔했다. 이후 2021년 한국독립영화협회, 2024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전에서도 수상한 바 있다. 에세이 영화 <영상자료원 가는 길>(2022),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2025)과 비디오 에세이 <Hong Sang-soo: Gravity and Grace>(2025)를 만들었다.
< 지옥만세 >는 십대 소녀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의 로드무비다. 학교폭력 피해자인 둘은 사는 게 지옥 같다. 가족도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 힘들다고 토로해봤자 약해빠졌다거나 너보다 더 힘든 동생을 배려하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결국 학교 폭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 둘은 지옥 같은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몇 번이나 자살에 실패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을 받고, 선우도 나미의 뒤를 따르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자살기도 중 나미는 따돌림을 주도했던 채린(정이주)이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복수를 위해 선우와 함께 서울로 향한다. 학교폭력, 자살기도, 납치와 그루밍, 사이비 종교집단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는 반전처럼 경쾌하고 엉뚱하며 발랄한 톤을 갖고 있다. 초성만 쓰면서 가볍게 주고받는 문자, 싸이키델릭한 록 스타일의 음악, 뮤직 비디오 같은 회상 몽타주씬들은 그러한 톤을 뒷받침한다. 그렇다고 앞의 나열된 소재를 표피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나미와 선우의 예상을 엇나가는 반응과 엉뚱한 선택들은 십대 소녀들이 자신의 고통의 기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관되게 해결책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제시한다. 지옥 같은 현실이 압도해 올 때 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은 왜 자신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언제 어떻게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서로가 있고, 그렇기에 두 소녀는 지옥에 살면서도 생동감이 넘칠 수 있다. 자살에 성공할 방법을 역동적으로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들을 이해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둘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들이 처한 파국의 풍경은 자살 장소로 대변된다. 나미와 선우가 사는 곳은 온천 관광지로 유명했던 수안보이다. 한때 인산인해를 이루던 관광지는 그 영광을 잃어 점차 쇠락했다. 이제 이곳은 문 닫은 대중목욕탕들로 가득하다. 더 이상 사람들이 찾지 않는 버려진 대중목욕탕은 자살하기에 좋은 장소다. 엄마에게 들켜 자살에 실패하곤 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으로 진짜 자살에 성공하기 직전까지 간다. 하지만 자꾸 자살 도구를 트집 잡고 왕따 주동자인 채린의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미의 태도는 그가 정말로 죽기를 원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죽을 만큼 괴로워하고 있으며,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무력감에 놓여 있을 뿐이다. 선우에게 유서를 건네며 “그냥 아무 우체통에다 넣어줘. 운명처럼 어디든 닿겠지”라고 말하는 나미 대사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이고 낙관적이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 종로에 도착한 나미와 선우는 어이없을 정도의 우연으로 채린과 마주친다. 무작정 종로를 헤매자던 나미의 전략이 성공에 이르게 된다. 잘나가던 채린의 아버지 사업은 부도가 났고 엄마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낙원’이라 불리는 해외의 종교 집단 거주지로 떠나버렸다. 홀로 남은 채린은 엄마를 따라가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나미와 선우는 채린의 얼굴에 ‘기스’를 내어 살아있는 지옥을 맞보게 해주기로 결심하지만 채린은 이미 가해자가 아닌 회개자의 얼굴로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채린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있다며 나미와 선우에게 용서를 빈다. 나미는 채린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선우는 채린이 여전히 종교 집단에서 함께 살며 낙원을 가기 위해 경쟁하는 아이들 안에서 ‘여왕벌’ 노릇을 하며 따돌림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따돌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겉으로는 다정다감해 보이는 명호(박성훈)다. 명호는 사이비 종교 교주인 목사가 교도소에 수감된 뒤 조직을 이끌어 가고 있다. ‘낙원’으로 가려면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피해자에게 받는 용서’의 점수가 가장 높기 때문에 채린은 이 점수를 받기 위해 나미와 선우에게 자신을 용서해 구원해달라고 애걸한다. 영화는 어떤 존재와 사건이든 하나의 얼굴만 갖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채린은 학교 폭력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며 종교집단의 납치폭력과 그루밍을 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나미는 가해자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채린과의 관계에 있어선 피해자이지만 가해자 무리에 속해 선우를 향한 괴롭힘에 동조하고 외면해왔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선우는 피해자이고 다른 피해자를 잘 알아차리며 보호하려는 태도를 취하지만 나미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미 엄마 식당에 대한 악플을 올렸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나미와 선우는 피해자이지만 마냥 착하거나 약한 자들은 아니다. 취약한 상황에서 이상한 신념에 빠진 이들과 달리 나미와 선우는 그들의 친절함에 고마워하면서도 경계심을 놓지 않는다. 둘은 채린을 향한 복수의 여정에서 자신들뿐만 아니라 채린을 구해 나올 정도로 용기 있는 이들이다. 또한 나미는 선우와의 관계에서 회개했다는 채린에게 더 동일시하며 그의 위선을 알아채지 못해 선우에게 상처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할 정도로 자신을 성찰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때서야 영화는 회상 장면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피해자와 가해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여준다. 영화의 오프닝은 ‘황구라’라고 불리는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또래 무리들이 촬영한 것 같은 친밀한 카메라를 시뮬레이션 한다. 하지만 생일을 맞은 아이와 함께 즐겁게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던 장면은 곧 지옥으로 변한다. 이 영상이 사실은 학교폭력 피해자를 괴롭히는 영상 푸티지라는 것이 밝혀진다. 피해자인 아이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얼굴에 케이크를 맞고 괴로워하는 뒷모습만을 비춘다. 한 아이가 쓰러진 아이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지만 곧 무리의 부름에 그를 버리고 가버린다. 선우가 채린에게 연민을 보이고 공감하는 나미에게 실망할 때 나미의 회상 속에서 이 오프닝 장면이 다시 반복된다. 이번에는 피해자 아이와 동정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배신하고 가버린 아이의 얼굴이 모두 정확히 보인다. 피해자는 선우이고 버리고 가버린 아이는 나미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그 얼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더불어 나미는 자신이 선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외면했음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피해자든 가해자든 다양하고 복잡한 얼굴을 갖고 있다고 해서 한 얼굴이 다른 얼굴로 상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한다. 채린이 피해자의 얼굴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갖고 있는 가해자의 얼굴이 사라지거나 면죄 받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채린이 가길 바라는 낙원은 이미 지옥이 된지 오래일 것이다. 명호가 돌보고 이끄는 아이들 공동체도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를 돌보는 따뜻한 분위기에 선행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낙원행 티켓을 타기 위한 생존게임에 불과하다. 명호는 친절하고 관대한 젊은 종교 지도자처럼 보이지만 그 스스로 사기공모 범죄자이며 사기 피해자이다. 지옥과 낙원은 동전의 양면이다. 나미와 선우의 여행은 어쩌면 고립된 이상향으로서의 낙원은 부재하고 도처에 지옥의 면모가 있기에 지옥탈출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선 지옥 역시 낙원의 일면이 잠재해 있을 수 있다. 고통을 알아봐 준 서로가 있다면 조금은 지옥을 견딜 수도 있을지 모른다. 친절해 보였던 어른들의 광기와 납치폭력에서 탈출하고 명호의 자살을 실제로 목격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꽂혀 있던 ‘낙원’ 엽서는 꽤 직접적인 은유가 된다. 현실은 바뀌지 않은 채 여지없이 돌아오자마자 괴롭힘을 당한다. 이번에는 서로가 있고 더 이상 죽고 싶어 하지 않으며, 가해자들을 무서워하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는 차이가 있다. 극복, 해방, 낙원 이런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방과 낙원은 곧 지옥이 될 것이기에. 죽지 않기 위해선 지옥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가볍게 인정하며 “오키 오키”라고 답할 수 있는 태도, 적어도 죽지 말고 “지옥을 견뎌내는” 마음이 필요하다. 자기들만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서로의 집으로 향하는 엔딩씬에서 나미는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 가는 선우를 응시한다. 망원렌즈 촬영으로 거리와 초점이 왜곡된 쇼트에서 얼마 안가 선우의 뒷모습은 포커스가 나가 흐릿해지다 못해 빛 속으로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나미는 선우의 생존을 확인이라도 해보듯 다급하게 부른다. 가해자들이 별칭으로 부르던 ‘황구라’가 아닌 ‘선우’라고 분명하게 부른다. 포커스가 나가 있기 때문에 선우가 나미의 부름을 들었는지, 그가 되돌아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선우는 그의 부름에 응답하며 되돌아온다. 드디어 초점이 맞춰져 선명하게 마주하게 된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에 나미는 웃으며 “웰컴 백 투 더 헬, X발”이라 말한다. 다시 각자의 집으로 가는 나미와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이 교차한다. 오늘은 그의 이름을 불러 지옥을 살아내고 있음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할리우드의 열여섯 살 소녀들에게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2012년 <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을 시작으로 3편의 시리즈를 성공시키며 승승장구한 <헝거게임> 시리즈의 여전사 캣니스(제니퍼 로렌스)는 어린 여동생의 이름이 호명되자 동생을 대신해 독재국가 ‘판엠’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생존 전쟁 ‘헝거게임’에 참여한다. 군중 속에서 용기 있게 나선 캣니스의 나이가 그때 고작 열여섯 살이었다. 캣니스의 파급력은 제니퍼 로렌스의 인기와 맞물려 급속도로 퍼졌다. 영화 속 전사는 현실에서도 유효했다. 제니퍼 로렌스는 인터뷰에서 “그래, 나 살쪘다. 그렇다고 화면에 잘나오려고 살을 빼지는 않을 거다. 애들이 캣니스처럼 돼야지 하고 밥 안 먹고 생활하는 그런 꼴은 보기 싫다”며 쇼비지니스계의 허상을 똑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똘아이’로 인기를 독식했다. 이렇게 매력덩어리니 안 넘어가고 배길 수 없다. 열여섯 살의 캣니스는 SF 판타지물의 이른바 기준점이 됐다. 디즈니에서 십 대들을 틴에이지 멜로드라마에 활용하느라 열 올리는 동안 패러다임은 바뀌었다. 무장한 전사는 소녀들의 몫이 되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시작된 영 어덜트 소설은 그리하여 초등학생 대신 체력적으로 파워를 가지고, 정신적으로 고뇌를 막 시작한 사춘기의 소녀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캣니스로 각광받은 < 다이버전트 >(2014)의 트리스(쉐일린 우드)도 그렇게 탄생했다. ‘핏줄보다 분파’가 중요한 통제된 사회 모든 구성원이 열여섯 살이 되면 평생 살아가게 될 테스트를 치르게 되는데, 트리스는 그 중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아 금기시되는, 즉 ‘다이버전트’의 운명을 쥐고 태어난 존재다. 시스템의 제어로 통제할 수 없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이단아의 나이는, 역시 사춘기를 통과하는 열여섯 살이다.(이 영화의 헤로인 쉐일린 우드는 청춘 멜로 < 안녕, 헤이즐 >(2014)에서도 암 투병 중인 환자이자 민감한 사춘기 연기로 호응을 얻기도 했다.) < 뷰티풀 크리처스 >(2013)의 소녀 리나 역시 강한 힘으로 세상을 끝낼 수도 시작 할 수도 있는 능력자다. 이 엄청난 파워는 열여섯 살 생일이 되면 그 능력이 발휘되는데, 그녀는 선과 악 중 한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소설, 영화, 그리고 각종 머천다이징까지 더해 소비력이 증가한 십 대 팬들을 겨냥한 할리우드의 전략은 알겠다. 하지만 이 거대한 지구의 운명을 이대로 열여섯 살, 순수하고 순진하며 철모르는 소녀들에게 모두 맡겨도 되는지, 좀 불안하기는 하다만. 하여간 <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 > 역시 <헝거게임>에서 출발한 이 열 여섯살 소녀가 바라본 아포칼립스의 시대다. < 라스트 킹 >(2006)을 연출한 케빈 맥도널드의 연출로 원작은 3권의 성장 소설로 영 어덜트 소설계에 파란을 일으킨 멕 로소프의 작품. 미국에 있는 소녀 데이지(시얼샤 로넌)가 영국의 시골 마을에 있는 사촌 집에 놀러왔다 겪게 되는 세계 핵전쟁의 살벌한 풍경을 그린다. 제작진은 애초 <헝거게임> 시리즈를 의도했다고 한다. < 한나 >(2011)로 어린 나이부터 액션에 재능을 보인 그 시얼샤 로넌이 제니퍼 로렌스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굳건하게 믿었으며 그 전략에 꼭 맞게 원작의 열다섯 살 데이지를 영화에서는 열여섯 살로 수정했다. 더불어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사촌 에디(조지 멕케이)의 나이도 맞춤형으로 원작의 열 여덟 살이 아닌 열여섯 살 동갑이 된다. 핵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으로 떠나는 대신 사랑하는 에디와 함께 남기로 한 데이지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열일곱 살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어. 너와 함께 여기 남고 싶어.”라고. 놀랍게도 <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 >의 장르를 결정해 줄 핵전쟁은 열여섯 살 소녀의 머릿속 오만가지 혼란 중 단 하나의 요소가 된다. 그 나이 때는 세계정세나 핵전쟁 말고도 고민할 것도 너무 많고, 그리고 사랑도 처음 시작할 나이라 복잡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딸이 영국 사촌 집에 가든 말든, 잘 도착했는지조차 전화 한번 하지 않는 무심한 아버지를 ‘피해’ 온 소녀는 자기 밖의 세상에 우호적이지 않다. 원래 이름대신, 아예 사촌들에게 “데이지라고 불러줘”라며 자신이 원하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모든 이들에게 까칠하고, 말은 아끼는 데이지가 유일하게 소통하는 것은 세상과 그녀를 단절시켜줄 헤드폰 속 록음악과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환청뿐이다. 뱅 헤어와 진한 마스카라, 요즘 스트리트 패션의 일부인 일부러 구멍 낸 스타킹 차림을 한 미국 십 대, 데이지가 화면에 등장할 때는 쾅쾅 울리는 ‘Do It With a Rockstar''같은 음악과 ‘하루에 8잔 이상의 물을 마셔라’ ‘죽었으면 좋겠어’ ‘인생의 목표를 찾아라’같은 온갖 정체성이 뒤범벅된 사운드가 혼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브루클린 거리나 클럽에서 맞닥뜨릴 것 같은 이 불량한 십 대가 도착한 곳이 바로, 제인 오스틴 소설 속에서나 볼법한 영국의 목가적 전원이라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짜 시작이다. 창밖은 초록이 우거지고,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서 살포시 들어오는 이런 환경에서 블랙 마스카라를 짙게, 더 짙게, 가능한 한 더 두껍게 그리고 있는 데이지의 모습은 그래서 초장부터 상당히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삐딱한 데이지는 어떻게 마스카라를 지우고 영국 목가의 풍경과 어우러지게 되었나로 상당 부분 이 영화의 정체성이 확보된다. 열여섯 살 데이지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게 된 사건이 있는데, 바로 사촌 에디의 존재였다. 매를 다룰 줄 아는 에디는 소 떼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데이지를 위해 동물과 교감을 시도하고 그들을 물러나게 해주는 능력을 발휘한다. 에디가 울타리에 걸려 손에 피가 난 데이지의 피를 빨아주는 순간, 데이지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에디는 결정적으로 데이지를 향해 “모든 규칙을 다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 내 머릿속의 소음들”이라며, 그녀가 가진 혼란을 읽어 낸다. 그런데 진짜의 혼란은 데이지의 첫사랑과 함께 시작된 핵전쟁에 있었다. 조그만 소녀 파이퍼가 여름날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진을 보며 “눈이 와”하고 소리치는 이 서정적인 장면이, 핵전쟁 발발을 알려주는 신호다. 세상에 이런 전쟁의 시작 장면이라니 좀 반칙이다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첫사랑의 충만함을 알게 된 데이지는 결국 미국 시민의 보호받을 권리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에드먼드와 남는 걸 택한다. 그들이 처음으로 섹스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동안, 중요한 건 완벽하게 어른의 존재가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데이지의 아버지는 무관심했고, 영국에 있는 데이지의 이모이자 에디의 엄마는 데이지의 도착 이후 ‘평화협정’ 건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며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더니, 결국 스위스 바젤 출장 건으로 떠나 완벽하게 아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후 영화 속 잠깐 등장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최악이다. 군인들은 데이지와 사촌들을 남자와 여자로 나눠 격리시켜 결국 이들을 헤어지게 만들며, 데이지가 피난의 과정에서 만나는 남자 어른들은 여성들을 겁탈하고 폭행하는 악인으로 묘사된다. 전쟁의 시작과 진행 상황은 TV와 라디오로만 전달되는 정보일 뿐, 원인이나 주체 역시 불분명하다. 에디와 떨어져 파이퍼와 끌려간 데이지는 이제 부역에 동원되며, 방사선에 오염된 물을 마시기 위해 정제약을 타 먹는 생활을 하다가, 죽음의 공포를 피해 에드먼드와 헤어지기 전에 한 ‘다시 집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린 파이퍼를 데리고 탈출을 시도한다. 파이퍼를 독려하며 쉬지 않고 걷고 또 걷고, 파이퍼를 해하려는 어른들을 제압하고, 여우가 시체의 사지를 뜯어먹는 시쳇더미에서 사촌을 찾으려 발버둥 치는 소녀의 모습은, 이미 열여섯 살 순진한 소녀에게서 한발 벗어나 있다. 데이지가 겪는 대재앙, 종말의 참상은 < 투모로우 >(2004) 같은 블록버스터에서 묘사하는 종말의 풍경과 조금 다르다. 소녀에게는 이 종말을 끝낼 파워가 아닌, 안전한 곳으로 묵묵히 달려나갈 의지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분위기는 오히려 종말의 세상, 식량이 바닥난 잿빛 풍경 속에서 필사적으로 남쪽을 향해 가던 아버지(비고 모르텐슨)과 어린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의 탈주에 더 가까워 보인다. 데이지는 결국 전쟁 전, 자신을 소모하게 만들었던 마음속의 혼란을 접고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다. <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 >를 보면서 과연 많은 사람들이 핵전쟁을 묘사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데이지의 첫사랑, 그리고 성장담에 접목된 이야기를 과연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핵전쟁을 묘사한 후반부에 앞서 영화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서정적 정서와 표현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더불어 시얼샤 로넌의 활약을 보는 건 이 영화에서 빠뜨릴 수 없는 매력 요소다. 그녀가 이 영화로 제니퍼 로렌스의 영역을 이어받으리라는 제작진의 기대는 너무 과했다 싶지만 CIA 첩보원 아버지에 의해 16살 살인무기 소녀로 길러진 한나(< 한나 >)를 통해 봤던 가능성은 여전히 놓지 않고 싶다. 벌써 몇 년 지난 이야기를 꺼내자면 그녀가 <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의 헤로인 ‘레이’역에 탈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난다. J.J. 에이브럼스가 그 역을 시얼샤 로넌에게 맡겼더라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