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마인드
- 감독
- 탐 맥그라스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브래드 피트, 윌 패럴, 조나 힐, 티나 페이, 데이비드 크로스, 아라미스 나이트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나는 두가지 특별한 사적 감흥을 느낀다. 하나는 화면이 젖어 있다는 것이다. 비가 오거나 안개에 잠겨 있지 않아도 그레이의 화면은 멜랑콜리아의 습기라고 할만한 기묘한 물질감이 감싸고 있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점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다른 하나는 친구 혹은 연인과의 투 숏에서도 심지어 가족의 회합 장면에서도 그레이의 인물은 절대적 고립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감정은 표현되는 게 아니라, 보는 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신체에 스며들고 번져가며 전염되는 것 같다. 그레이의 최고작으로 여겨지는 < 투 러버스 >(2008)보다 이 점을 잘 느끼게 하는 영화는 없다. 주인공 레너드(호아킨 피닉스)는 그가 사랑하는,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여인 미셸(기네스 펠트로)과 있을 때에도, 그를 사랑하는 가족과 있을 때에도 철저히 고립된 존재이며 외로움의 심연에 가라앉은 인물로 감지된다. 가장 뛰어난 장면은 마지막 시퀀스에 있다. 미셸이 떠난 뒤 레너드는 다시 자살을 시도하려다 포기하고 가족과 그를 아끼는 따뜻한 여인 산드라(비네사 쇼)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셸에게 주려던 반지를 그녀에게 끼워준다. “우는 거예요?”(산드라), “행복해서 그래요.”(레너드). 가족들, 유태인 친척들이 작은 파티를 벌이고 있는 따뜻한 집에서 두 남녀는 키스하고 포옹한다. 놀라운 점은 외관상 가장 포근하고 평온한, 그리고 남녀의 결합으로 마무리된 이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레너드의 속수무책의 고립을 사무치게 체감한다. 그레이의 영화에서 우울과 외로움은 이야기의 주제이기 이전에, 매 숏에 담긴 물질적 표정 혹은 운명적 공기와 같은 것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 느낌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고, 적시할 수 있는 한 숏 내부의 특정 요소들의 효과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 및 앵글, 인물의 표정과 동작과 말, 음악과 사운드, 숏의 길이와 편집의 리듬 등이 이야기와 결합된 복합적 효과일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남다른 점은 그가 두드러진 스타일을 구사하지 않을 뿐더러, 특정한 사건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연출의 영역에 속한 갖가지 요소들의 유기적 조합을 통해 유례를 찾기 힘든 높은 밀도와 강한 전염성을 지닌 감정의 강도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레이의 영화를 말할 때야말로 감정 대신 정동(情動)이란 단어를 쓰고 싶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레이는 동세대의 어떤 감독보다 고전적인 작가라 할 수 있으며, 그가 영화적 스승으로 거론하는 인물에 속하진 않지만, 니콜라스 레이의 진정한 후예라고 나는 생각한다. < 애드 아스트라 >(2019)는 공간이 우주로 확대되어도 화면에는 농축된 감정의 밀도가 압도하는 매우 제임스 그레이적인 영화이다. 어쩌면 우주의 텅빈 그리고 무한대의 시공간이야말로 그레이의 인물이 벗어날 수 없는 고립과 외로움의 물질적 거처로 가장 적합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것이 그레이가 SF로 눈길을 돌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애드 아스트라>의 우주는 모험의 사건과 미래의 변화에 열린 확장적 공간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절대적 고립을 재확인하는 내성적이고 수축적인 공간이다. 우주비행사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는 지적 생명체를 찾아 해왕성으로 떠난 뒤 16년째 소식이 끊긴 아버지이며 우주탐험의 전설 클리포드 맥브라이드(토미 리 존스)를 찾아 떠난다. 스토리라인은 머나먼 정글에서 광기의 왕국을 건설한 미친 유사 아버지를 수색하는 병사의 이야기 < 지옥의 묵시록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9)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모티브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다 그를 찾아나서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서 빌려왔다. 텔레마코스는 누구인가. 이타카의 왕이자 전쟁영웅 오디세우스가 전쟁 원정으로 왕국을 20년간 비운 동안, 난봉꾼 왕자와 귀족들이 그의 재산과 왕위를 빼앗기 위해 어머니를 희롱하고 결혼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귀환으로 자신의 땅에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리다, 아버지의 행적을 쫓아 목숨을 건 여행에 나선 아들. 그런데 제임스 그레이는 이 인물의 어떤 점에 영감을 얻었을까. 결말을 떠올리면 <애드 아스트라>는 오이디푸스의 살부(殺父) 의식에 가까운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살부와 근친상간은 법의 위반과 욕망의 실현이라는 차원에 놓여 있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는 사실상 법의 충실한 집행자다. 그의 목숨과 여러 사람의 생명이 걸린 그의 해왕성 행은 아버지의 우주선 이상으로부터 비롯된 지구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그리고 상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고 로이가 상부의 명령이나 미션의 대의에 완전히 동일화하는 건 아니다. 로이는 아버지의 우주선 리마의 파괴 임무를 맡은 우주선 세피우스에 무단으로 탑승하고, 그를 제압하려는 세피우스 승무원들을 미필적 고의로 모두 죽인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이 흔히 그렇듯 우리는 로이의 욕망을 정확히 알기 힘들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맥박수가 80을 넘지 않는 냉담한 사람이다. 그의 행동으로 추론하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다. 평생 복종해온 명령, 특히 이번엔 부당하기는 커녕 지구의 안녕이 걸려있는 중대한 명령을 거부한 것도 세피우스의 제거 작전이 성공하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것을 그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 항상 두려웠다.”고 독백한다. 마침내 조우한 아버지도 “난 아내에게도 너에게도 관심이 없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매정하게 말한다. 다시 물어보자. 로이는 왜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만나려 하는가. 이 질문은 이 영화를 본 관객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적어도 대사를 통해서는 이 질문에 정확히 답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레이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모르는 것처럼 말한다. 그레이는 그 무지를 존중한다. 아버지 클리포드는 말한다. “나는 지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우리는 과학이 부인하는 지적 생명체를 찾아내야 돼. 이건 신의 소리야. 난 이 여정을 멈출 수 없어.” 그의 친구인 동료 우주비행사 프루이트 대령(도널드 서덜랜드)은 로이에게 말한다. “오랜 우주 비행으로 내가 깨달은 바는, 탐험 비행이 때론 탈출 수단이 될 수도 있다네.” 지적 생명체에 대한 종교적 믿음, 지구에 대한 혐오, 탈출의 은밀한 욕망. 우리는 어느 말을 믿어야 할까. 내 생각에 가장 신뢰할만한 말은 영화의 결말부에 있는 로이의 독백이다. “아버지는 없는 것만 찾았고 눈 앞에 있는 소중한 건 보지 못했다”.” 그러느라 동료를 죽이고 지구를 위험에 빠트린 미친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로이 자신은 어떠한가. 그 역시 우주 비행에 미쳐서 아내를 떠나보낸 남자 아닌가. 로이와 클리포드는 아들과 아버지이기 이전에 완전히 동질적인 인간이며, 둘은 말하자면 쌍생아다. 로이의 혹독한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그리운 아버지를 만나려는 가족애의 여정이 아니며 아버지의 율법을 살해해 자신의 욕망의 법을 세우려는 아들의 모험도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기자신을 대면하려는 여정이다. 지구 혹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을 혐오하고 피안을 향해 탈출하려는 자신의 욕망, 그 욕망의 잔혹함과의 대면이다. 그 대면을 위해 로이 역시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아버지와 대면하고서야 로이가 아버지와 똑 같은 과정을 거쳐 그 대면에 성공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지적 생명체나 인류의 진보 같은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의 정확한 동형의 여정이다. 이제 선택은 두가지다. 집으로 돌아오느냐, 아니면 더 멀리 떠나느냐. 아버지 클리포드는 후자를, 아들 로이는 전자를 택한다. 로이에게 아버지는 주인 기표도 율법의 표상도 아니다. 요컨대, 로이는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안티오이디푸스도 아니다. 호메로스의 텔레마코스는 하염없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가 기다리는 건 아버지이자 왕인 오디세우스이지만, 그것은 권력의 복원이나 주인의 귀환에의 기대가 아니다. 이탈리아 심리학자 마시모 레칼라티의 말을 빌리면,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에 대해 오이디푸스의 절연과 달리 상속의 관계를 맺는다.(<버려진 아들의 심리학>, 윤병언 옮김, 책세상) 하지만 상속은 과거의 권력이나 재화, 혹은 영광스런 기억의 선사가 아니다. 레칼라티의 논지를 요약하면 정당한 상속은 아버지의 증언을 참조함으로써 이뤄지는 말의 계율과 욕망의 재설정이다. 그렇다면 상속은 완료가 불가능한, 반복되는 실패를 경유할 수밖는 끝없는 여정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속자는 고아다.” 또한 그러므로 상속이란 “아버지의 구조적 부재라는 열린 틈새를 메우는 일이 아니라, 항상 그것을 통과하는 일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텔레마코스의 이야기에서 상속의 약속 없는 상속자의 여정이라는 모티브를 본 것 같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찾아 세상을 헤맸지만 오디세우스를 만난 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고향에서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는 여정의 끝에 아버지를 만났지만 그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 불멸에의 꿈을 포기하고 돌아온 오디세우스와 달리, 자신의 욕망을 조금도 조정할 줄 모르는 눈먼 광인일 뿐이다. 텔레마코스는 이제 상속의 과정을 본격화할 것이다. 하지만 로이가 이른 곳은 아버지의 삶, 그 복제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모두 눈 먼 광인의 소동으로 드러나는 황량한 공허이다. 그는 홀로 지구에 돌아온다. “삶에 의욕을 느껴요. 내 주변 상황에도 주의를 더 기울이게 됐죠. 이젠 소중한 것에만 집중하며 살 겁니다.” 이어지는 결말의 언어들은 계몽적이고 달콤하나 <애드 아스트라>의 우주를 가득 채운 우울증의 공기는 무관하다. 우리는 이 평온한 결말의 언어와 비슷한 것을 그레이의 전작에서도 만났다. < 위 오운 더 나잇 >(2007)에서도 만났다. 경찰학교 졸업식장에 앉은 경찰 형제(마크 왈버그, 호아킨 피닉스)가 나누는 마지막 대화. “사랑한다, 동생아.” “나도 사랑해, 형”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투 러버스>의 마지막 대화. “우는 거예요?“ ”행복해서 그래요.“ 이 장면들이 뼈저린 것은, 인물들 특히 호아킨 피닉스가 분한 남자에게 이 말이, 이 말의 실현불가성에 대한 필사적인 부인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이 거짓말이 역설적으로 그의 가장 절박한 진실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가족(때로 유태인 공동체)은 주인공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내면적 강박처럼 등장한다. 이 점에서 그레이의 서사는 주인공이 이 강박을 정당한 상속으로 전환하려는 모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결말에서 만나는 것은 결말의 언어가 숨기고 있는, 하지만 관객 누구라도 느끼는 있는 상속의 실패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 역시 임무수행에는 성공했지만 상속에 실패한, 하지만 그 실패를 필사적으로 부인하려는 텔레마코스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은 여전히 출구 없는 멜랑콜리아의 안개 속을 떠돌고 있다.
헐리웃 미투 캠페인 지지를 위해 글든글로브 시상식에 블랙드레스를 입고 참석한 배우들 선한 자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 - 니체(『선악을 넘어서』) 차이콥스키 내 노트북의 바탕 화면은 대중적으로 비호감인 남자 배우의 사진이다. 내가 이 배우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간적으로 알 리가 있겠는가. 다만 그의 연기와 극 중 캐릭터를 좋아하고, 그가 쓴 글과 인터뷰를 인상 깊게 읽었을 뿐이다(나는 그가 독특한 사람이라고 짐작한다.). ‘바탕 화면 배우’ 말고 좋아하는 배우 두 명이 있는데, 그 두 사람 역시 마초 발언으로 논란이 많다. 여자 배우? 많은 여성 배우들은 위에 언급한 남자 배우들의 나이까지 ‘버티지’ 못한다. 나는 노트북을 켤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정말,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었다. “페미니스트가 000을 좋아해?” 혹은 아예, “네가 컴맹이라 다운로드가 잘못되었나보다, 내가 바꿔줄게”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는 (아직은) 성폭행범도 아닌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우성 배우를 매우 좋아하지만, 모든 남자 배우가 그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긴, 이 역시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한국 사회는 난민 인권을 논하는 배우를 더 싫어할까, ‘문란한’ 배우를 더 싫어할까, 병역을 기피한 배우를 더 싫어할까. 모두 뇌관이다. 내 심정은 복잡하다. 일단, 내가 페미니스트인가? 라는 자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이 세상에는 내가 동일시하고 싶지 않은 다양한 페미니스트가 존재한다. 그들의 입장을 존중하지만, 그들이 페미니스트라면 나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환경주의, 페미니즘은 모두 내가 추구하는 수많은 정체성 중의 ‘하나’일 뿐, 나는 특별한 정국(政局)을 제외하면, “ ~ 주의자”라고 자칭하지 않는다. “ ~ 주의자”는 선언한다고 획득되는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 ~ 주의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감과 자기 검열을 잘 알고 있다. 어려운 일상의 연속이다. 예술가로서의 재능과 인간의 품성 사이의 간극에 관심이 많은, 나 같은 관객들은 고민한다. “작품은 좋은데, 그 감독 인간성은 00이라며?”, “난 그 배우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패스야. 배우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지”, “네가(나) 어떻게 그런 소설가를 좋아할 수 있니”... 흔한 논쟁거리다. 이것은 ‘타인의 취향’도 ‘정치적 올바름’도 ‘똘레랑스’도 ‘작가와 작품의 분리 논리’로도, 해결할 수 없는 제3의 정치학을 필요로 하는 이슈다. 위에 적은 내용에 비해 덜 논쟁적인 문제도 있다. 단지, 무지와 통념으로 인한 혐오로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다. 어떤 클래식 애호가(?)가 내게 물었다.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면서요?”, “그런데요?”, “저는 그다음부터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이 께름칙해요”, “그러세요? 그럼 듣지 마세요”. 나는 차이콥스키와 바흐 없이 살 수 없다.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서 그의 음악을 못 듣겠다면, 그 사람만 손해다. 아니, 음미할 자질조차 없는 거다(참, 세상에 별의별 사람 다 있다). 오스카 와일드, 트루먼 카포티, 안데르센, 소크라테스! < 주노Juno >(제이슨 라이트맨, 2007)와 < 인셉션Inception >(크리스토퍼 놀란, 20010)의 엘렌 페이지, 조디 포스터...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가 동성애자라서 ‘꺼려진다면’ 볼 책도 영화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이슈를 문제 삼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뭔데?” 이 말은 사이먼 페그가 나오는 영화의 실제 대사이기도 하다. 그가 뉴욕의 연예 잡지 기자로 성공하기 위해 애쓰다 실패한 이야기인 < 하우 투 루즈 프렌즈How to lose friends & alienate people >(로버트 B. 웨이드, 2008)에 나오는 말이다. 시드니 영(사이먼 페그 扮)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좌충우돌하다가, 뉴욕의 문화계의 거물을 찾아가 한심한 협박을 한다. “(기자인 나한테 뭔가 이득을 주지 않으면) 동성애자 배우, 모델, 감독, 작가들을 모두 아우팅 시킬 거다”. 상대방은 웃으며 말한다. “이 바닥에서는 거의 동성애자 아니면 유대인이야. 매장당할 사람은 당신이야” 가해자보다 더 나쁜 예술 분야뿐 아니라 정치인, 학자, 페미니스트 등 수많은 위인 중에서 인간성과 그의 업적이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인간성은 수많은 요소로 이루어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아내를 학대했는지(톨스토이), 남의 업적을 가로챘는지(아인슈타인), 성차별을 일삼았는지(레닌), 자기만 지식인이라고 생각했는지(푸코, 보부아르), 비열한 연애로 상대에게 고통을 주었는지, 권모술수를 부렸는지, 표리부동했는지, 부동산 투기를 일삼았는지... 아니, 거의 대부분의 ‘위대한 서양인’들은 제국주의자들이다. 성폭력범은 너무 흔해서 이 논의에서 제외한다. 그런데, 맷 데이먼. 누가 그를 싫어할까. 그는 왠지 미국인도 제국주의자도, 심지어 ‘남성’도 아닐 것 같은 이미지다. 미투 이전까지, 맷 데이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2016년, 영화 < 제이슨 본Jason Bourne >(폴 그린그래스)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았던 그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자신이 맡은 캐릭터 해석과 영화 철학, 정치적 소신을 밝혔다. 설명이 필요 없는 배우다. 18살에 커리어를 시작해 구스 반 산트,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리들리 스콧 등 거장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알려졌다시피 글쓰기에도 능하다. ‘바람둥이’, 왕자병’ 스타일도 아니다. 특히, 그는 물 부족 국가의 여성들을 돕기 위한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www.water.org).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순전히 작품 자체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을 하니, 그의 영화를 다 봤다. 나는 제이슨 본 시리즈에 대해 ‘지구화 시대 국민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2편인 < 본 슈프리머시The bourne supremacy >(폴 그린그래서, 2004)에 대해서는 「목숨 걸고 사과하기」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상하게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 >(안소니 밍겔라, 1999)마저 순수해 보인다. 알랭 들롱의 ‘리플리’(< 태양은 가득히Purple noon >(르네 클레밍, 1960)에서 주인공)와 다르다. 그의 인간성은 모든 캐릭터를 맷 데이먼으로 환원하여, 선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연기를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그가 최근 할리우드의 미투 운동 과정에서 연일 ‘말실수’를 했다. 아니면, ‘본색’일까. 그의 발언을 보자. “엉덩이를 토닥이는 것과 강간, 아동 성추행은 다르다.”, “영화 제작자까지 인종 다양성을 보장할 필요는 없다.”, “성 정체성은 편견을 줄 수 있으니 드러내지 않는 게 낫다”, “성추행을 안 하는 사람이 더 많다.”... 결국 일련의 발언으로, 여성들만을 주인공으로 한 < 오션스 8Ocean's 8 >(게리 로스, 2018)에 카메오로 출연했으나, 2만 명이 넘는 여성들의 거센 항의로 편집 당했다. ‘평균 시민의 교양 미달’이라는 측면에서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나는 저런 수위의 발언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게 큰 충격은 그가 (쿠엔틴 타란티노, 벤 애플렉 등과 함께) 지난 20년 동안 하비 와인스타인과 친분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즉 와인스타인의 셀 수도 없는 성폭행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사실이다. 귀네스 팰트로의 전 남자친구 브래드 피트만이, 와인스타인에게 항의했다고 알려졌다. 더 심각한 문제, 아니 더 혐오스러운 데이먼의 범죄 행위는 그가 와인스타인의 성폭력을 보도하려던 전직 뉴욕타임스 기자를 회유했고, 옹호 논리까지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맷 데이먼 자신은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이용해 와인스타인 같은 인물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성폭력 직접 가해보다 ‘더 질 나쁜’ 행위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마치 살인보다 살인 교사가 더 나쁘고 비리 재벌보다 재벌의 돈을 받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언론사, 회계사, 변호사가 더 역겨운 것처럼 보이는 심리처럼 말이다. 지주보다 마름이 더 ‘추잡’하다고 할까. 이런 나의 생각 역시, 스타의 이미지에 포섭된 미디어 시대 우중의 모습이고, 진짜 가해자인 와인스타인은 아예 제쳐 둔 잘못된 판단일 것이다. 불신, 문화적 억압이라는 또 다른 피해 배우는 힘든 직업이다. 지금도 활동 중인 노년의 배우가 있는데, 그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지지하는 TV 연설원이었다. 그가 노태우 후보를 지지한다면서 한 첫 마디는 (내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요, 왠지 그 양반(노태우)이 좋습디다...”였다. 사실, 나는 그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그 느낌이 아직도 몸에 남아있다. 배우의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 노태우와 광주 학살 그리고 한국 사회의 군사주의와 군부에 대한 ‘공부’를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 이후 그 배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 배우나 작가가 모든 면에서 결점이 없을 수 없다. 마피아부터 파시스트까지, 그리고 그들을 스폰서로 둔 사례까지... 문제는 간단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좋아했던 배우의 영화를 더 이상 볼 ‘비위’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성폭력은 특별한 범죄다. 난 맷 데이먼을 잃었다. 이제 그가 출연한 작품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일과 비슷하다. 몇 년 전 세계적인 석학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우연히 나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안내 업무를 맡은 친구로부터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나는 그녀의 책을 읽지 않는다. <인 더 컷>의 마크 러팔로와 맥 라이언 ‘개념 매력남’인 줄 알았던 맷 데이먼에게 놀라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마크 러팔로도 의심이 간다. 게다가 그는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다. 사실이 아니면 어떡하지? ‘더 나쁜 X’이면어떡하지? 사는 게 힘들 때마다 나는, < 인 더 컷In the cut> (제인 캠피온, 2003)의 러팔로 같은 남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환상과 < 유 캔 카운트 온 미You can count on me >(케네스 로너건, 2000)에서 러팔로의 빵구 난 러닝셔츠를 생각하면서 웃곤 한다. 나는 점점 <인 더 컷>의 맥 라이언처럼 편집증 환자가 되어갈 판이다. 차라리 스파이크 리처럼 대놓고 마초인 남자가 나을까.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영화의 캐릭터)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미투 이후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어졌다. 예술가의 인성과 작품 수준의 관계는 끝없는 논쟁거리지만, 나는 이에 대한 나름의 입장이 있다. 좋은 인간과 좋은 예술가는 모순되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예술은 사회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선(善)의 기준은 대단히 넓고, 다면적이고, 맥락적이며, 인간은 일관되고 합리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다. 선악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나쁜 사람의 작품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의 작품에는 반드시 나쁜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다. 혹은 위대한 작품에 대한 기준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은 변한다. 그러므로 생각보다 이 문제는 논쟁거리가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나 어린이를 학대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얘기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이런 사람의 작품은 논쟁을 넘어 논쟁의 가치조차 없다. 혹은 스티븐 스필버그를 보라. 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조금이라도 올바르지 않은 태도를 가진 배우, 감독, 스태프 하고는 일하지 않는다(해고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스필버그에 대해 토를 달지 않고, 억울하다고 울고불고 하는 가해자는 없다. 그런데 왜 사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해서만 논쟁이 분분할까. 이 자체가 젠더 폭력에 대해 관대하다는 얘기다. 성폭력은 그 어떤 잘못보다 엄격히 다루어져야 한다.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를 주지 않는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남성들의 반발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 남성 사회는 스스로, 혹은 (피해) 여성 집단에 두 번째 기회를 줄 기회를, 주지 않는다. 부정하고 은폐하고, 가해자는 여전히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두 번째 기회가 웬 말인가. 맷 데이먼. 다시는 그의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아서 속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평범한 씨네필의 영화 사랑을 망친 그에게 분노한다. 내가 신뢰하는 어느 영화평론가는 이런 경험을 말한 적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 >(2004) 월드 프리미어 참석한 그는 서구 기자들에게 ‘치여’ 제대로 입장도 못하고 곤란한 처지에 있었는데, 관람권을 미리 확보가 ‘기득권 평론가’가 영화가 상영되자마자 코를 골며 잤다는 것이다. 극장 밖에는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고레에다의 영화를 보면서 코를 골고 잔단 말인가, 그것도 다른 이들의 관람 기회를 박탈해가면서) 솔직히 살의를 느꼈다.”. 내가 맷 데이먼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렇다.
나는 인간이며, 그것만으로도 비참하기에 충분하다 - 메난드로스 말할 곳을 찾다 인간이기에 그것만으로도 비참하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말이다. 기원전부터 인생이 이랬으니, 우리는 안심해도 될지 모른다. 현대는? 미국의 ‘흑인’ 사회학자, 시카고학파의 프랭클린 프래지어(Franklin Frazier)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문화 속에서) 살 만한 동기를 찾든지 죽든지.” 일단, 태어났다면 힘들다. 기본적으로 본인의 생로병사가 있고, 사랑하는 이들의 생로병사를 겪어내야 한다. 게다가 불평등, 부조리, 악의 승리, 차별, 미세 먼지, 양진호 같은 사람들……. 이제는 오래된 뉴스가 되었지만 브래드 피트가 제니퍼 애니스턴과 헤어지고 안젤리나 졸리와 ‘시끄러운’ 연애 중일 때였다. 그즈음 유명 잡지(<배니티 페어>라고 기억한다)가 애니스턴을 표지 모델로 실었다. 커버스토리의 제목은 “제가 외롭냐고요? 그래요! (Am I lonely? Yes!)” 그래, 나 당신들 생각처럼 외롭다, 그래서 어쩔래? 그런 말투 같았고, 나는 대중 매체가 잔인하다고 느꼈다. 누구나 슬퍼할 상황에다, 유명 여배우만이 겪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누구에게 고민을 말했을까? 인생에는, 배타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회로부터 혹은 구체적인 누군가에게 따돌림당하고 망신스러운 기분, 어딘가에 하소연하기에도 자존심 상하는 인간관계, 견뎌야만 하는 시간이 있는 법이다. 실연, 상실, 시련……. 이러한 상황이 아주 심할 때는 영화도 책도 음악도 잡히지 않는다. 오로지 이불 속이 우주다. 우울과는 다른 고립감(powerless)이 나를 휘감는다. 누구라도 손을 내밀어주었으면……. 내가 먼저 전화하기는 엄두가 안 나고 스팸 전화라도 왔으면 싶다. 남들 퇴근 시간 즈음에야 직장 생활을 하는 지인에게 “오늘 만날 수 있어(요)?”, 혹은 심야에 “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 이렇게 전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충분한 경청과 공감, 위로, 대안 제시까지 가능한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단언컨대, 세상에 이런 친구는 없다. 상담자도 없다. 있더라도 찾기 힘들다. 비용과 시간이 들고, 비밀 유지 걱정 등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아, SNS가 있다. 트위터를 공개하지 않고 일기장으로 삼는 이들도 있다. 좋은 기능이다. 나는 간혹 내 메일 주소로 일기를 보낸다. 실은, 그냥 끄적거리다 만다. 커서는 깜박이며 재촉하지만, 왠지 모니터 앞에서는 구체적으로 쓰기가 쉽지 않다. 페이스북에서 맺을 수 있는 친구가 최대 5천 명이라고 알고 있다. 온라인에서 5천 명을 ‘달성한’ 이들도 있지만, 지구상에서 진짜 친구가 5천 명인 사람은 없다. 인생에서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셋만 있어도 성공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한 명도 힘들다고 본다. 이야기를 들어줄 가장 좋은 대상 간혹 자신을 나의 “독자”라고 소개하는, 모르는 사람의 편지를 받는다. 내게 E메일을 하는 사람들의 글은 대개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 제가 힘든 상황입니다. 어디 말할 곳이 없어서 선생님께 씁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그들은 쓰고 나는 읽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그들의 사연을 잊는다. 편지가 오고 가거나 ‘현실에서’ 만나는 일은 없다. 나, 아니 나의 아이디는 익명의 수신처일 뿐이다. 타인에게 말하는 행위는 자기 마음의 가시를 돌보는 일과 비슷하다. 어떤 종류의 침묵은 마음속의 가시와 같아서 같이 살 수 없다. 가시가 움직일 때마다 몸을 찌른다. 말하기(speech)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 억압하는 문화에서는 자살률이 높다. ‘표현의 자유’가 표현의 폭력이 된 시대지만, 여전히 말하기는 중요하다. 주디스 버틀러는 우리 시대의 문제, 혐오 발화(ex/citable speech)를 일종의 주인 없는 퍼포먼스라고 본다. 혐오 발화는 말하기(citing)를 초과하고, 남용하고, 선을 넘어선(ex/citable) 상황이다. 말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할 때는 말의 초과는커녕, 하고 싶은 말의 용량에 미치지 못한다. 혐오 발화는 그렇지 않다. 넘친다. 차별주의자들은 그 상황을 즐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흔히 듣는 말이다. 고전 < 피고인 (The accused )>(조나단 카프란, 1988)은 지금 봐도 ‘교과서’다. 작품 자체로도,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방식과 시각에 있어서도. 조디 포스터. 조디 포스터. 조디 포스터와 페미니즘…… ‘나의 영웅 조디’(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그때는 몰랐다. 나는 20대 초반, 더러운 동시 상영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심지어 쥐가 돌아다녔다). 극장 간판은 선정적이었다. 시간 때우는 ‘싸구려 영화’인 줄 알았다. 조디 포스터가 ‘밑바닥 인생’을 사는 윤간(gang rape) 피해 여성으로, < 탑 건(Top gun) >(토니 스콧, 1986)의 캘리 맥길리스가 그를 돕는 변호사로 나온다. 작품 속 ‘조디’는 가난한 여성의 전형이다. 일찍 가출하여 거리를 전전한다. 술, 마약, 섹스, 길거리의 폭력을 감수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그녀는, 성폭력 피해 여성이 겪는 고통과 편견을 고스란히 뒤집어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젠더, 성폭력 이런 이슈들이 아니라 그녀의 외로움과 통화 장면이었다. 그녀 자신도 당하고서야 깨달은 이 상황. 자신도 정리가 안 되고 이해할 수 없고 분노로 미칠 것 같다. 누가 지금 자기 처지를 알아줄 것인가. 영화에서 주인공이 엄마나 지인, 가족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짧은 대화를 나누거나 울먹거리며 바로 끊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마음 둘 곳 없는 ‘우리의 조디’도 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방에서 오래전에 떠나온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의 삶도 고달플 것이다. 미국 대륙 내 시간 차, 그리고 갑작스런 딸의 전화에 엄마는 “웬일이니”, “잘 지내니”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조디는 눈물을 훔치며, “아니, 별일 아냐, 엄마 사랑해.” 정도의 대화를 나누고 끊는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기력도 없고, 말해봤자 엄마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두 모녀를 합친 몸만큼 상처도 두 배로 커질 것이다. 이럴 때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거나 그냥 아는 정도의 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무심한 사람, 무심한 관계가 낫다. 어차피 인생에 해결은 없으므로. 그저 들어주며,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내 걱정을 하지 않을 사람. 내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사람. 내 말을 잊어버릴 사람. 내가 가장 원하는 경청자는 내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다. 정리하면, 듣는 이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공감과 수용이 가능한 적극적 청자(active listener), 더 나아가 치유(talking cure)가 가능한 소위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대가가 따르고 찾기가 어렵다. ‘전문가’들과 비슷한 범주에서 안전한 사람들이 있다. 이해력과 인간애가 깊은 친구나 멘토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매번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민망하고,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빚을 진 느낌을 떨치기 힘들다. 아는 사이라면 여전히 비밀도 걱정되고, 완전하게 안전한 관계란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 기도는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그것이다. 기도가 그것이다. “주님은 내 안에.” “부처님은 온 천지에.” 벽에게 말하자 내 안의 무엇인가를 - 주로 괴로움 - 꺼내 놓으면, 짐이 덜어지고 상황도 객관화되고 안정이 된다. 쓰기도 마찬가지다. 고민, 고통, 외로움, 스트레스 같은 일일수록, 말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부정적’ 감정이 나쁜 것이 아니다. 괴로움은 삶의 조건이다. 문제는 그것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할 상황이고, 언제나 고민은 누구에게 말할까이다. 소통의 소중함이라느니, 대화를 통한 해법, 털어놓으라……. 나는 이런 말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어쨌든 아예 모르는 이에게 그리고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에게 말할 때가 상호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반응이 없는 것이 좋다. 나는 이 ‘반응 없음’이 훨씬 관계를 좋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자주 경험한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두 사람의 딸’이지만, 엄마와는 ‘여성으로서’ 관계였고 아빠는 그냥 ‘아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나와 겹치는 젠더 문제에다 개인적으로 극히 예민하신 분이고, 아빠는 그 반대다. 그래서 나는 아빠에게 전화하는 것이 편했다. 아빠는 내가 아무리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도 “그러냐.” 한 마디뿐이셨다. 그러고 나서 오로지 당신 일상, 당신 주장만 하셨다. 나는 아빠의 무반응과 철저한 이기주의가 좋았다. 아빠랑 통화하면, 내가 ‘문제’가 아니라 아빠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 위로받았다. 가족? 절친? 파트너? 그들은 나를 잘 아는 사람인가? 의외로, 대부분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벽창호’니 ‘벽하고 이야기하는 게 낫다’고 말하지만, 정말 벽에게 말하는 것은 효과가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축복이다. 말이 통하면 나중에 상대방에게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라는 공치사나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넌, 아직도...? 지겹다”는 핀잔을 들을 가능성이 많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는 ‘걱정거리’인 인간이 된다. 나는 매일 고민이 있을 뿐이지,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란 말이다! 조디 포스터가 <피고인>에서 엄마에게 전화할 때의 심정.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의 곤경에서 고립되어 있을 때, 타인과 연결 자체만으로 상황이 ‘정리된다’. 전화를 끊고, 세수를 하고, 마음을 다잡아본다. 화양연화 왕가위의 < 화양연화(花樣年華) >(왕가위, 2000). 쓸 자신이 없다. 포기. 다만 <피고인>과 <화양연화>는 무관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방식과 상대는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생의 고통, 고독, 고립, 말할 수 없음, 어쩔 수 없음……. 내 생각에 <화양연화>의 주제는, 인생의 본질인, ‘어쩔 수 없음’이다. 두 사람, 어쩌겠는가. <피고인>에서 조디 포스터는 타인과 다름없는 엄마에게, <화양연화>에서 양조위는 벽에 대고 말한다. 민폐도 없고, 누구에게도 부담 주지 않으면서 말하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앙코르와트에서. ‘들어 달라’가 아니라 ‘나는 말했다’가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국가 안보’ 문제여서 말하지 못하는 코미디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말하자면 복잡한” 이야기(미국 영화 대사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 하나가 “complicate”다), 말하면 안 되는 나의 불법 행위……. 진실에 목을 매는 상대방이 알면 안 되는 진실이 얼마나 많은가. 이때는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상대가 가장 좋다. 아는 사람보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낫다. 타인을 찾기보다 나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다. 사족이지만, 두 작품의 공통점이 또 있다. 모든 영화 감상은 자의적이고, 보는 이의 상황에 따라 감동도 크게 다르다. 둘 다 외롭고 아플 때 보면, 더 많이 보이는 영화다. 작품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더욱 좋다’. 난 동일시했다. <피고인>, <화양연화>를 보고 나는 머리가 흔들리도록 울었다. 인생에는 ‘안 되는 일’이 천지다. (어떤 말은) 말해서 무엇하리. 지금 나는 말할 사람을 찾기 전에 숨을 고르고 글을 쓰거나 청소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