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짓 존스의 일기 : 열정과 애정
- 감독
- 비반 키드론
- 제작년도
- 2004
- 출연
- 르네 젤위거, 휴 그랜트, 콜린 퍼스
타인의 사랑을 비웃지 마라, < 가장 보통의 연애 >( 김한결 , 2019) 2010년대 한국 영화는 많은 자본이 투입된 시대극이나 범죄 영화 등의 상업 영화에 치중하면서 코미디나 멜로드라마 같은 소소한 재미를 주는 장르는 점점 힘을 잃었다. 특히 TV에서 흔히 즐기는 로맨틱 코미디를 스크린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돌이켜 보면 200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를 필두로 젊은 여성의 일과 사랑을 주제로 한 칙릿 영화 열풍이 불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인턴>(2015) 같은 여성 서사 영화들이 호응을 얻은 상황에서 국내에선 과거와 달리 보다 현실적인 연애에 기반한 로맨스 영화들이 기획되었다. 톡톡 튀는 대사와 입심이 재미를 주는 스크루볼 코미디처럼 수다가 늘어났지만, 세련되고 지적이라기 보다는 남녀의 반복되는 다툼, 질투, 이별 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 러브픽션 >(2011)은 사랑하는 그녀의 겨털(취향!)과 과거사를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충고했고, < 연애의 온도 >(2013)는 서로를 아프게 상처내는 연인이 이성을 잃고 치고받도록 내버려두었다. 이 영화들은 "다신 안 그럴게!", "나, 사랑하긴 해?" 같은 대사로 가득 차 있었다. 즉 누구나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여러 번 내뱉은 말이다. 물론 이런 일상적인 대사는 관객과 쉽게 교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헤어지자!"라는 대사와 생채기가 난무한 가운데 남성의 이기심과 욕망이 느닷없이 심판대에 올랐다는 데 있다. < 봄날은 간다 >(2001), < 클래식 >(2003) 같은 2000년대 영화들이 순둥이 남성의 순애보에 방점을 찍은 것을 떠올린다면 분명 급격한 변화였다. 이제 진흙탕 로맨틱 코미디는 남성 캐릭터의 감추고 싶은 민낯(무책임감과 찌질함)이 모조리 드러나는 무대가 된 것이다. 남성용 면죄부는 소멸하고 그들의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멜로드라마 < 건축학 개론 >(2012)이 첫사랑의 판타지를 극대화하고 남성의 욕망에 충실히 부합(심지어 과거의 첫사랑 여인을 현실에 소환해 사랑 고백을 들으며 판타지를 완성)했던 것과 다른 노선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남녀가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다시 만나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가장 보통의 연애>(2019) 역시 흔하디 흔한 로맨틱 코미디다. 새로운 회사의 출근 첫날, 직장까지 찾아온 남친과 헤어지려고 싸우는 선영( 공효진 )과 파혼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매일 술을 찾는 재훈( 김래원 )의 직장 연애담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쉽게 요약하면 "같이 한잔 할래?"로 시작해 취중진담, 두주불사, 설왕설래로 발전한다. 그들이 안내하는 술자리에서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술 권장 영화지만 다소 성급하게 저평가받는 것과 달리 의외로 급진적인 면모가 있다. 사랑과 성공에 대한 판타지나 위로를 내세우는 대신 상처뿐인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기 때문이다. 2010년대 한국 영화는 잊힌 과거를 다시 복기하는 문제작을 많이 내놓았지만, '지금, 여기'라고 칭할 수 있는 현재의 문제를 담으려는 기획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 82년생 김지영 >(2019)이라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업 영화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접근한다면 보통의 연애 속에서 ‘가장 보통의 현실’을 찾을 수 있다. 이 영화가 담아낸 직장 에피소드(뒷담화 문화)나 남녀 사랑법은 현실의 지표일 수밖에 없다. 세간의 부당한 평가와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선영을 통해 남성 중심적인 한국 사회의 단면이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은 피해 등을 부수적으로 고발한다. "남자랑 여자랑 같냐?"라는 말하는 재훈에게 "같지!"라고 외치는 선영의 말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 코미디로 가볍게 풀어냈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일상 속에 얼마나 스며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들이 스산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여전히 주목하게 만드는 것은 남성 캐릭터다. 재훈은 <러브픽션>의 주월( 하정우 )과 <연애의 온도>의 동희( 이민기 )가 보여준 찌질함과 무모함에 비해 한 단계 성숙한 인물이다. 선영과 재훈, 두 사람은 또래지만 사랑의 가치를 믿는 재훈이 사랑의 환상을 믿지 않는 선영에 비해 훨씬 보수적으로 비춰진다. 언뜻 마초(속칭 '꼰대')처럼 보이지만, 재훈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포장 없이 밝히는 솔직함을 지녔다. 강하면서도 나약한 모습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남자. 그의 이상과 욕망은 현실에서 무참히 배반당하지만 그렇게 무너지면서 스스로 자신의 환상에서 벗어난다. 엔딩에서 선영과의 재회는 로맨틱 코미디의 예정된 컨벤션이지만, 그는 섣불리 사랑이라는 단어를 동원하기 보다는 "보고 싶었어"라고 고백하는 그녀의 입술을 읽어낸다. 이 순간 술자리에서의 게임이 ‘사랑의 게임’으로 이어지고 연장된다. 모든 게임은 동등한 파트너가 필요한 법이고, 그 룰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연애의 시작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이제야 남성은 자신의 거울인 여성을 통해 욕망과 대면한 것일까?). 시시껄렁한 농담과 반복되는 투정, 술에 의존하는 밀당이 자유롭게 성행하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다. 무모하게 사랑을 갈망하고 실험하는 스크린의 연애 생태계는 우리의 현실과 일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놀랍게도 우리가 감추고, 잊고 싶어하는 기억과 추억들을 다시 살려내고 있다. 그 남자, 그 여자가 일으키는 사건사고가 그리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나, 자신의 사랑을 돌이켜보게 만드는 ‘로맨틱 정글’로의 초대는 아찔하지만 언제든지 환영이다.(*)
할리우드 기획물의 변화하는 한 축을 가늠하고 싶다면 배우 ‘멜리사’들의 행보를 관찰해 봐도 좋겠다. 먼저 멜리사 맥카시. < 내 여자 친구의 결혼식 >(2011)에서 친구 들러리로 활약할 때만 해도 플러스 사이즈 배우가 가진 익숙한 코믹이 적중한 정도라 생각했다. < 스파이 >(2015)에서 마치 본처럼 종횡무진 하는 CIA 요원이 되어 액션을 구가할 때는 그 위력이 점점 실감됐다. 급기야 < 고스트버스터즈 >(2016)에서 여성 헌터로 활약하는 모습에 이르면 이제 이 배우가 가지 못할 길은 어디일까 싶다. 맥카시를 보고 있노라면 플러스 사이즈라고 사이드로 밀려나는 법이 없다. 오히려 때로 귀엽고, 때로 도발적이며, 때로 과격한 맥카시 본연의 코드를 전면에 내세운 기획이 끊이질 않는다. 관객의 반응이 있는 이상, 배우의 영역은 지금보다 더 넓어질 게 확실하다. 멜리사 버글랜드는 그런 의미에서 앞선 멜리사의 전철을 밟는 호주 출신의 배우인데, < 렉시의 행복 레시피 >로 들어가자면, 먼저 버글랜드를 좀 알아가는 것도 좋겠다. 버글랜드는 2011년도부터 방영되어 인기를 얻고 있는 미드 <위너스&루저스>에서 플러스 사이즈의 귀여운 캐릭터 ‘제니 그로스’로 사랑받기 시작했다. 제니처럼 실제로도 플러스 사이즈인 그녀는 “스칼렛 요한슨처럼도, 샤를리즈 테론처럼도 생기지 않았지만, 작품을 통해 이상하고 웃긴 내 모습을 오히려 사랑스럽고 귀엽게 봐주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더 이상 그녀가 배우 활동을 하며 날씬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 업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걸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버글랜드의 인기를 감지한 할리우드 에이전시 ‘언타이틀드 엔터테인먼트’가 발 빠르게 계약을 맺었는데, 이곳은 마돈나, 애쉬튼 커쳐, 힐러리 스웽크, 다니엘 데이 루이스, 나오미 왓츠, 자레드 레토, 페넬로페 크루즈 등이 소속된 전도유망한 곳이기도 하다. < 렉시의 행복 레시피 >는 앞서 말한 버글랜드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코드들을 적극 활용해 만든 로맨틱 코미디다. 이 영화는 캐나다 버전의 < 브리짓 존스의 일기 >라는 수식이 잘 어울린다. B&B를 운영하는 서른 살 렉시 아이비는 성격도 꽤 괜찮고, 요리도 수준급인데 연애가 잘 풀리지 않아 고민 중이다. 여동생 결혼 준비로 집안은 분주하고, 투숙객인 커플은 밤새 섹스를 하느라 삐걱거리는 탓에 외로운 렉시의 밤잠을 설치게 한다. 맞춘 결혼식 드레스는 작아서 수선을 해야 할 판이고, 결혼식에 같이 갈 파트너가 없어서 엄마한테 닦달을 당하는 것도 괴롭다. “백마 탄 왕자님은 그만 좀 기다려”라는 친구의 충고에 “자전거 탄 왕자님이야”라고 정정할 정도로 그녀의 이상형은 자전거 탄 훈남.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자전거를 타고 온 미남자가 도착해 며칠 묵어갈 방을 구한다. 렉시가 사는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담으러 이곳에 온 자유로운 영혼의 사진작가 애드리안(조나단 소우사)이다. 물론 < 브리짓 존스의 일기 > 속 ‘마크 다아시’같은 완벽하고 친절한 남자가 나타난 판에, 그녀의 속을 사사건건 긁는 ‘다니엘 클레버’가 없으면 심심할 거다. 이 경우에는 물새는 B&B의 지붕을 고쳐주러 온 친구의 친구인 남자 조스(아론 폴, < 브레이킹 배드 >의 그 아론 폴이다)가 얄미운 클레버다. 오랜만에 완벽한 이상형을 두고 핑크빛 멜로를 꿈꾸는 렉시에게 더러운 신발을 신고 마룻바닥을 저벅저벅 밟아 다니고, 땀내 나는 데다 능글맞은 조스는 지붕만 수리만 끝내면 사라져 줘야 할 눈엣가시다. 하지만 영화는 조스가 ‘처한’ 위치를 완벽하게 활용하는데, 연일 계속되는 지붕 수리 도중, 본의 아니게 조스가 렉시의 실수들을 유독 많이 보게 되고, 그녀의 귀여움에 눈을 뜨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령 렉시가 혼자 흥에 겨워 막춤을 추는 것 같은 장면들이나, 애드리안과 겪는 온갖 민망한 순간들을 모두 지켜보는 순간들. 한창 판타지에 빠져든 렉시의 연애가 엉망진창 산산조각이 나는 사건이 전개되는데, 결혼을 앞둔 동생과 푹 빠져버린 애드리안이 눈이 맞았다는 청천벽력이 그 시작이라고 할까. 블루베리 케?이나 크림 뷜레 같이 렉시가 만든 수준급의 요리들이 사건의 사이사이를 연결하는 윤활유가 되지만 이 영화에 ‘음식=힐링’이라는 공식을 적용하긴 힘들다. 그러니 트렌디한 음식 영화 같은 제목 대신, 이 영화의 원제인 ‘상대적인 행복’이란 뜻을 가진 ‘Relative Happiness’를 끄집어 내보는 게 더 어울리지 싶다. 마치 이영자 와 신동엽 , 컬트멤버들이 나란히 앉아 일반인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토크쇼 <안녕하세요>에나 나올법한 사연처럼, 고상한 엄마, 우아한 언니, 아름다운 동생에게 주눅 들어 살았던 렉시는 모든 게 무너지는 순간, 자신이 이상적으로 바라보던 그 ‘아름다운’ 관계들이 그리 완벽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 렉시의 행복 레시피 >는 전작 <비트 다운>(2012)을 비롯해 코믹 영화를 꾸준히 만들고 있는 여성감독 딘느 폴리의 영화로 뭐 그리 별스럽지도 않거니와 다소 뻔해 보이기까지 한 소소한 로맨틱 코미디지만, 앞서 말한 버글랜드의 능청맞고 귀여운 면모가 주는 재미가 크다. 극의 초반, 동생 결혼식용 피로연 드레스 생각에 그래도 살을 좀 빼볼까 TV를 보며 요가를 따라 하던 렉시가, 금새 포기하고 TV를 끄고 먹을 걸 먹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시작은 플러스 사이즈의 미운 오리로 하되 끝은 각고의 노력으로 체중감량을 해 백조가 되는 판타지는 이 영화에는 없다. 렉시가 날씬한 집안 누구와도 다르게 혼자 플러스 사이즈인 것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도 애초 없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렉시의 몸무게는 그대로 유지되며, 그러니 렉시는 가장 코믹한 순간에도, 가장 로맨틱한 순간에도 ‘그녀인 채’로 승부를 볼 뿐이다. 뭣보다 < 브리짓 존스의 일기 >의 르네 젤위거가 브리짓을 연기하기 위해 엄청나게 체중을 불렸다가, 연이어 < 시카고 >(2002)를 찍기 위해 트레이너의 훈련 아래 혹독하게 체중감량을 해야 했던 그 고통을 <렉시의 행복 레시피>의 주연배우는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건 2001년에 시작된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시리즈를 거듭해 <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 >(2016)로 나오기까지 지난 십 수년간 일어난 이 업계의 괄목할 만한 변화다. 그녀가 맥카시와 견주어 얼마나 성장할지 모르겠지만, 트레이드마크인 빨간 머리와 예쁜 프린트가 가미된 귀여운 스타일의 패션을 소화하는 렉시처럼, 버글랜드 역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배우로 영역을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