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치
- 감독
- 빌 레이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크리스 쿠퍼, 라이언 필러피, 로라 리니, 데니스 헤이스버트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간단한 개념 정의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영화의 시각적 요소는 인물, 장소, 풍경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극영화는 어떤 장소에서 벌어지는 어떤 인물(들)의 어떤 사건을 담는다. 공간적 개념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장소는 사건에 연루되는 반면 풍경은 사건에 연루되지 않는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모뉴먼트 밸리(의 암석봉들)는 사건에 연루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장소가 아니라 풍경이다. 오늘의 영화에도 지배적인 고전영화의 규칙은 모든 시청각적 요소가 서사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풍경은 언어화된 서사의 내적 요소로 포착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대한 영화들은 종종 인물, 장소, 풍경의 지위를 은밀히 혹은 공공연히 교란한다. 존 포드가 “내 영화의 진정한 스타는 대지(land)”라고 할 때, 그는 의도된 교란을 염두에 두고 있다. 전 회에서 나는 풍경과 사건을 동시에 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예컨대, < 역마차 >라는 한 편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링고 키드 일행이 겪는 사건을 보면서 동시에 모뉴먼트 밸리를 볼 수 있는가. 관람 습관과 능력이라는 개인차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원론적인 대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학자 마틴 르페브르(Martin Lefevre)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는 서사 모드와 풍경 모드 양자를 정확히 같은 시간에 작동시키면서 영화의 한 대목을 보는 건 불가능하다.”(‘Between setting and Landscape in the Cinema’, 「Landscape and Film」) 회화에서도, 이 문제의 양상은 어느 정도 비슷하다. 예컨대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면서도 우리는 모나리자의 얼굴과 그녀의 등 뒤에 있는 풍경을 역시 동시에 볼 수 없다. 그녀의 모호한 표정에 주목할 때 이것은 인물화가 되며, 그녀의 등 뒤에 펼쳐진 미묘하게 어긋난 지평선의 풍경에 주목할 때 이것은 풍경화가 된다. 우리가 하나의 그림을 그려져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기대와 습관에 따라 보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곰브리치는 정신적 반응기제(mental set)라는 인지심리학의 용어를 원용했다(「예술과 환영」). 정신적 반응기제는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행사하여, 다른 것보다는 바로 이것을 보거나 듣도록 예비시키는 마음의 자세나 기대를 뜻한다. 우리는 이 기제 없이는 그림을 볼 수 없지만, 그것이 한번 확립되고 나면 일종의 경직성을 갖고 있어서 한 번에 복수의 기제를 작동시킬 수 없다. 곰브리치가 예시하는 유명한 토끼-오리 그림(아래)에서 우리는 이 그림을 토끼로 볼 수도 있고 오리로 볼 수도 있지만 토끼와 오리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 토끼-오리 그림 이 논의를 영화에 고스란히 적용시킬 수 있을까.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유비(類比)에는 무언가 빠져 있다. 우리는 토끼-오리 그림에서 토끼와 오리를 동시에 볼 수는 없지만 번갈아 볼 수는 있다. 그림은 멈춰서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나지라’를 볼 때 우리는 인물 모드와 풍경 모드를 동시에는 아니라도 번갈아 작동시킬 수 있다. 하지만 영화 관람에서 그럴 수 있는가. 영화는 흐른다. 실험영화가 아닌 극영화에서 우리의 관람 습관은 사건의 진행을 따라가는 것이다. 모던 시네마가 그러하듯 사건을 중단시키고 풍경을 따로 비추지 않는 한, 영화가 어떤 풍경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여주고 있을 때 우리는 사건과 풍경을 동시에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림 관람에서와는 달리 번갈아 바라볼 수도 없다. 하스미 시게히코도 언젠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이야기는 바로 잊어버리지만, 몇몇 장면들은 오래 기억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위대한 비평가 역시 서사 모드와 풍경 모드를 동시에 작동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림에서 번갈아 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고 할 수 있는 영화의 반복 관람이란 문제를 떠올릴 수 있다. 반복 관람을 통해 한 편의 영화를 한 번은 사건 중심적으로 또 다른 한번은 풍경 중심적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반복 관람은 사운드와 음악, 인물의 표정과 몸짓, 색체와 구도 등에 각기 집중함으로써 이보다 훨씬 더 많은 하위 관람 전략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영화에 담긴 여러 요소를 분리시켜 매번 다른 관람 초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본 다수의 관객이 서로 다른 관람 초점을 가질 때에도 이런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어떤 영화를 함께 보고 나온 일행들 사이에서 “영상미가 뛰어나다” “인물 묘사가 훌륭하다” “이야기가 짜임새가 있다”라는 식으로 각기 다른 반응이 나타나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다. 세심한 반복-분리 관람이 또다른 영화체험을 낳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화가이자 영화평론가인 마니 파버(Manny Farber, 1917~2008)가 강의시간에 영화를 상영하면서 화면 대부분을 가려놓고 학생들이 한쪽 귀퉁이만 보게 한 것도 이런 반복-분리 관람을 통한 예기치 않은 발견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극단적인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분리가 아닌 복합화의 측면이다. 사운드(음악, 음향, 대사)를 제외하더라도, 우리는 한 프레임에 담긴 모든 시각적 요소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동시에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초점화한 한 가지 요소를 제외한 다른 요소들이 우리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뜻할까?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도, 그 안에서 목격되는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해나가는 관람 습관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종종 이야기를 ‘듣는다’ 혹은 ‘읽는다’의 방식에 가까워진다. 반복 관람을 통해, 혹은 자신만의 관람 초점을 가짐으로써, 혹은 디지털 기술을 동원해 영화를 멈춰 세움으로써, 보이는 것들을 분리해서 애써 보려 하지 않는다면 풍경은 사라지는 걸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가정한다. 한 편의 영화에서 우리의 눈앞에 스쳐지나간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세밀하게 보지 못한다 해도 복합적으로 감각한다. 우리의 의식과 기억이 그것들을 모두 길어 올리지 못하지만 그것이 복합적 감각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반복 관람은 일종의 재복합화 체험이다. 반복 관람할 때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분리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감각과 새로 결합해 전체가 다시 체험된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물리적 첨가가 아니라 화학적 재결합이다. 사실은 회화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앞서 모나리자 그림과 토끼-오리 그림은 정신적 반응기제의 동일한 적용 사례로 예시되었지만 두 그림은 다르다. 토끼-오리 그림에서는 분명히 토끼와 오리가 분리되어 지각된다. 하지만 모나리자 그림에서도 그러한가. 이 그림에서 어떻게도 해석되지 않는 여인의 기묘한 표정과 지평선이 미묘하게 어긋난 풍경은 독립적으로 지각되는 게 아니라 의미화할 수 없는 모종의 주술적 친연성 아래 드러나지 않는가. < 역마차 >라는 영화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모뉴먼트1과 2는 의미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의미화되지 않기 때문에 그 기괴한 형상이 잔상으로 남는다. 지난 회에 모뉴먼트1과 2의 암석봉이 실제 이야기와는 맞지 않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스틸 장면을 통해 설명했지만, 실은 나도 <역마차>를 너댓번 볼 때까지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나 역시 사건과 풍경을 동시에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이야기가 모뉴먼트 밸리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느낌은 후반부의 모뉴먼트1과 2를 또다른 형상의 암석봉이 대체했다 해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뉴먼트 밸리의 강렬한 잔상은 그것의 기괴한 형상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모뉴먼트 밸리는 서사 외부에 있지만, 모나리자의 신비한 표정과 어긋난 지평선과의 관계가 그러하듯, 모종의 다른 층위에서 서사와 내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내통의 층위와 경로를 해명할 수는 없지만 징후를 말할 수는 있다. 그 징후는 광기, 도취, 유머, 음악과 같은 잉여적 디테일로 드러난다. < 역마차 > 뿐만 아니라 존 포드 영화의 서사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이 잉여적 디테일들의 놀라운 활력이다. 다소 과장한다면, < 역마차 >의 승객들은 조금씩 미쳐 있다. 닥 분은 의사 노릇을 하는 한 장면을 제외하면 항상 만취해 있고, 위스키 판매상 헤이콕은 공포감으로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링고 키드는 정의로운 무법자처럼 보이지만, 아파치와 싸우느라 모두의 총알이 소진된 위기 상황에서도 사적 복수를 위해 총알 3발을 남겨둔다. 만삭의 몸으로 남편을 만나러 동부의 버지니아에서 서부 끝가지 온 정숙한 장교 부인 루시 맬로리는 도박사에게 수차례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 맬로리 부인을 보호하는 신사 노릇을 자임한 도박사 핫필드는 가장 광적인 인물이다. 그가 악명이 높으며 며칠 전 누군가의 등에 총을 쏘아 죽였다는 사실은 초반에 제시되지만, 아파치의 습격 장면에서 광적인 본성을 드러낸다. #1 #2 #3 아파치에게 총을 쏘는 핫필드의 표정은 살인의 기쁨으로 가득하다(#1). 그러다 총알이 한발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2), 자신이 정성을 다해 보호하던 맬로리 부인에게 총을 겨눈다(#3). 아파치에게 ‘더럽혀지기 전에’ 자기 손으로 죽이려는 것이다. < 수색자 >의 이산 에드워즈를 연상케 하는 남부연합군 출신의 이 사내는 살인광의 피를 지닌 광적인 인종주의자다. < 역마차 >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아파치 출신 여인이 멕시코계 카우보이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장면이다(#4). 지금 안에서는 맬로리 부인이 출산 중이며, 부드럽고 감미로운 여인의 노래가 그 주위를 감싸고 있다. 그런데 사실 여인은 노래를 부르면서 카우보이들에게 아파치의 임박한 습격을 몰래 알려주고 있는 중이다. 아이가 무사히 태어난 뒤, 황야의 코요테 장면이 삽입되고(#5), 댈러스에게 링고 키드가 청혼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이어진다(#6). 출산, 청혼과 같은 의례의 사건들과 아파치의 임박한 습격이라는 절대적 위협 한가운데서 울려 퍼지는 여인의 노래는 기적처럼 아름답고 불길하다. #4 #5 #6 모뉴먼트 밸리의 기괴한 형상과 인물들의 잠재되거나 표출되는 광기, 그리고 아름답고 불길한 노래 사이에 논리적 연관이 있을 리는 없지만, 원시적 정념 혹은 전(前)의식적 율동이라고 부를만한 힘이 관류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요소들은 언어화된 서사로 포착되지 않는 주술적 이미지로 보는 이에게 육박해오며, 서사는 이 이미지들과 긴장하거나 그들과의 대결과정에서 부차화한다. 모뉴먼트 밸리의 풍경은 서사 밖에 있지만 서사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 역마차 >는 B급 서부극이 유행하던 1930년대의 마지막 연도에 등장해 고전적 서부극 서사를 완성했다는 칭송을 받아왔다. 그 칭송이 틀린 건 아니라 해도, 이 영화의 진정한 위대성은 안정되고 균제된 고전적 서사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고요한 수면 밑에서 벌어지는 논리와 마술, 질서와 광란, 고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 언어와 이미지가 벌이는 결투 혹은 격렬한 이중주의 매혹에 있다. 그리고 그 결투 혹은 이중주는 존 포드의 다른 서부극 혹은 다른 영화에서도 어떤 층위에서든 벌어진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존 포드 영화에서 모뉴먼트 밸리는 보이지 않더라도 그 곳에 서 있으며, 강물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 곳에 흐르고 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세심한 관객이라면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계속)
우리가 여행하려는 존 포드의 세계는 넓고 깊다. 잘 알려진 곳도 있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곳도 있다. 물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경도 있다. 잘 알려진 곳들을 표준적인 코스, 덜 알려진 곳들을 마니아 코스, 거의 알려지지 곳들을 나만의 코스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안내자로서 표준적인 코스를 제시하는 것을 가능하면 삼가려 한다. 표준적인 것은 이미 검증을 거쳤으므로 실패할 위험은 없지만 다소 따분해질 수 있다. 우리의 여행은 샛길과 뒷골목의 여행이 되면 좋겠다. 빠져나갈 길을 못 찾아 헤매기도 하고, 결국 시간 낭비로 판명될 우회로를 하염없이 걷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이편이 좋을 것이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우리가 영화에 사로잡히는 순간은 종종 표준적인 지식, 공인된 영화사적 상식 밖에서 일어난다. 본격적인 탐방에 앞서, 두 가지 예비적 가설을 말하려 한다. 예비적 가설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것이 확증된 진실의 테제가 아니며, 수정과 반박에 열려 있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여행이 끝날 무렵 이 가설이 오류로 판명될 수도 있다. 하지만 완전한 무지 상태에서의 여행은 불가능하다. 어떤 여행자도 최소한의 기대조차 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가설은 표준적 가이드북을 일단 가방 맨 밑바닥에 쑤셔 넣은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지침, 혹은 기대의 지평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가설은 다음과 같다. 1. 존 포드는 ‘고전적’ 감독이 아니다 입문자는 물론이고 영화사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에게도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먼저, 시네필이나 영화전공자들에게는 불필요한 말이겠지만, 고전영화라는 표현이 불러일으키기 쉬운 혼동을 짚고 가는 게 좋겠다. 영화사에서 고전(classic)은 정전(canon)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이 영화는 영화사의 고전이 될 것이다”라는 간혹 접하게 되는 문장에서의 고전이라는 단어는 문학사에서의 용법을 빌려온 것으로 사실상 정전을 뜻한다. 하지만 영화사에서 고전이라는 단어는 대개 정전이 아니라, 음악사 혹은 미술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의 사조를 지칭한다. 여기서 우리의 용법도 거의 예외 없이 ‘고전’은 ‘고전적’으로 바꿔 써도 좋을, 특정 사조의 수식어에 한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사에서 고전은 어떤 사조인가. 고전영화는 고전 할리우드영화, 혹은 고전 서사영화와 동의어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고전영화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할리우드를 지배했던 영화전통”으로 “주류 서구영화에서도 그 전통을 찾을 수 있다.”(「영화사전」, 수잔 헤이워드, 한나래). 1917년에 시작해 1966년까지 이어지는 할리우드 감독으로서의 존 포드의 영화 이력은 이 시기의 거의 전부를 포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전영화의 문법을 확립한 거인들 중 하나다. 그런데 왜 존 포드가 고전적 감독이 아니라는 말인가. 여기엔 서로 연관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고전영화와 모던영화의 이분법이 초래하기에 십상인 오해 때문이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말하면 고전영화는 기승전결의 완결적 서사구조를 갖춘 영화, 모던영화는 그 완결성에 저항하는 열린 구조의 영화다. 문제는 이 이분법이 종종 일종의 시대구분론까지 은연중에 강제한다는 점이다. 즉 영화의 탄생부터 1920년대까지를 초기영화(혹은 원시적 영화) 시대,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를 고전영화 시대, 1960년대 이후(논자에 따라서는 2차 대전 이후, 혹은 오슨 웰즈와 로베르토 로셀리니 이후)를 모던영화 시대로 구분하는 흔한 도식이 전형적인 사례다. <셜록 주니어> <선라이즈> <분노> <사이코> 이런 도식이 정당화되려면, 초기영화와 고전영화와 모던영화에 대한 정교한 정의와 각 시대의 방대한 영화들에 대한 실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성공하기 힘든 시도이다. 모던 혹은 모더니즘과 모더니티에 대한 악명 높은 개념적 혼란을 피할 수 없고, 아방가르드를 제외한다 해도 너무도 많은 예외들을 외면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초기영화’이자 당대의 주류영화인 < 셜록 주니어 >(버스터 키튼, 1924)가 어떻게 그 놀라운 액자구조를 통해 ‘모던 이후’를 선취했는가. < 선라이즈 >(무르나우, 1925)는 이미 모던영화의 데드타임을 깊이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 로베르 브레송은 고전영화와 모던영화 어느 편에 속하는가. 프리츠 랑의 < 분노 Fury >(1936), 혹은 프랭크 카프라의 < 멋진 인생 It’s a Wonderful World >(1946)은 과연 완결된 서사인가. < 리오 브라보 >(하워드 혹스, 1959)에서 황혼녘에 울려 퍼지는 그토록 아득한 노랫소리를 서사적 기능에 한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 사이코 >(알프레드 히치콕, 1960)에서 마리온의 눈앞에 등장한 불길한 저택의 이미지는 그녀의 죄의식이 반영된 서사적 요소인가, 아니면 서사적 기능을 뛰어넘는 모던한 자율적 이미지인가. 텍스 에이버리의 ‘포스트모던’한 유희정신으로 가득한 애니메이션은 또 어떤가. 우리는 여기서 복잡한 이론과 역사의 문제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 다만 앞서 말한 시대구분의 도식이 한 위대한 감독의 영화세계를 여행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두고 싶다. 물론 이건 나만의 견해는 아니다. 자크 오몽은 「영화와 모더니티」에서 “어떻게 고전/모던과 같은 조잡한 기준으로 영화사 40년을 서술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화난 듯이 썼다(이 책에는 오몽조차 모던이 시대적 개념인지 미학적 방침인지 혼동하는 듯한 대목들이 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시대구분 도식의 고착화에 기여한 들뢰즈의 「시네마」에 대한 날카로운 논평이 담긴 ‘하나의 이미지에서 또 다른 이미지로? - 들뢰즈와 영화시대들’(「영화 우화」, 자크 랑시에르)를 읽어봐도 좋겠다. 요컨대 영화사는, 굳이 그 개념을 써야 한다면, 고전과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착종된 역사다. 카메라라는 기계장치와 편집을 포함한 후반 작업에서의 창의적 테크닉이 빚어내는 놀랍게 다양한 표현능력의 원심력과 시장논리에 지배되는 시스템의 구심력이 매번 특별한 조합을 빚어내는 기이한 분야가 영화사다. 다른 예술 장르에서라면 소수의 예외들을 제외하고 성립하는 진화론적 시대구분은 영화사에선 이 때문에 대개 실패한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과잉의 매체’이며(「영화이론의 개념들」, 더들리 앤드루), 끝내 정돈되지 않는 이 과잉성에 언제나 모던한 요소가 잠재해 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따라서 한편의 영화를 두고 고전 혹은 모던의 소속을 정하는 건 대개 무의미한 노력이 된다. 물론 어느 시대이건 지배적 양식이 있다. 영화사의 양식들은 영화의 과잉성을 다루는 방식과 관계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이 장의 표제어인 ‘고전’ 즉 ‘클래식 할리우드’라는 양식이다. 영화의 과잉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최소화한 이 양식은 분명히 할리우드에서 정립되었고, 지금도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양식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고전’이라는 단어는 엄격히 사조 혹은 양식의 의미로만 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 혼란에 빠진다. 고전은 모던과 같은 층위가 아니라, 표현주의, 시적 리얼리즘, 네오리얼리즘 등과 같은 층위에 놓인 단어다. <젊은 날의 링컨>(1939) <변호인>(2013) 고전이라는 양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관해선 데이비드 보드웰의 중요한 저서(「The Classical Hollywood Cinema : Film Style and Production to 1960」, 1985)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책의 도움 없이도 그 대강의 내용을 우리의 관람체험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질서-무질서-질서의 회복이라는 플롯, 인물 중심의 이야기, 서사의 완결성, 보이지 않는(이음매 없는) 편집, 서사에 봉사하는 스타일 등등. 이런 의미에서라면, 최근 1천만 관객이 본 < 변호인 >은 어떤 고전영화들 못지않게 ‘고전적’이다. 고전영화는 사실상 주류영화와 거의 동의어이다. 존 포드는 어떠한가. 그는 고전적 양식의 수립에 기여한 감독이지만 그 양식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고전적 정전들을 빚어냈지만 표현주의자이기도 했고, 모더니스트이기도 했다. < 변호인 >과 많은 공통점을 지닌 < 젊은 날의 링컨 >(1939)을 비교하면 후자가 놀라울 정도로 모던하다(이 문제에 대해선 나중에 별도의 장에서 상세히 말하고 싶다). 75년 전 고전기의 한가운데서 태어난 고전적 거장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모던영화이고, 21세기의 한국영화가 고전영화라면, 이 단어들의 효용성은 초라한 것이다. 요컨대 고전영화라는 개념은, 모던 혹은 포스트모던과 마찬가지로 영화 세상에서 지배적 양식을 설명하는 데 일정한 효용성이 없지 않지만, 시대 구분의 표제어로 등장하거나, 한 감독 때론 한 작품의 학파를 규정하는 용어가 되는 순간 너무 헐거워지거나 부정확해지기 십상이다. 대안적 이론이나 개념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여행과 감상을 도와주기는커녕 방해하기 십상인 어설픈 개념들과 선입견을 버리자는 것이다. 존 포드가 고전적 감독인가 모던한 감독인가, 같은 질문 자체를 폐기하자는 것이다. 곰브리치는 “사람을 속물근성에 젖게 만드는 어정쩡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보다는 미술에 관해 전혀 모르는 것이 훨씬 낫다”(「서양미술사」)고 했는데, 여기서 미술을 영화로 바꿔도 이 말은 유효할 것이다. <역마차>(1939) 2. 존 포드는 서부극 감독이 아니다. 이 명제는 단순하지만 논쟁적인 면도 포함하고 있다. 단순한 면부터 먼저 말해보자. 존 포드는 43편의 무성 서부극을 만들었고, < 3인의 악당 3 Bad Men >(1926)의 흥행 실패로 13년 동안 서부극을 만들지 않았다. < 역마차 >(1939)로 소위 A급 서부극을 부활시킨 이후 포드는 15편 정도의 서부극을 만들었다. 이 수치는 그가 토키시절에 만든 극영화 편수의 4분의 1 정도다. 물론 거기엔 고전적 서부극의 완성이라 일컬어지는 <역마차> 외에도 서부극 최고의 걸작으로 칭송되는 < 수색자 >(1956), 서부극에 대한 위대한 만사로 간주되는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 등이 포함되어 있다. 「사이트 앤 사운드」 (2012. 12)의 설문조사에서도 서부극 톱 10 목록에 4편의 존 포드 영화가 올라있다.(<수색자>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 웨건 마스터 >) 그런데도 존 포드를 서부극 감독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억지가 아닌가. 나도 다소 억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이 명제를 꺼내 든 것은, 우선 그가 서부극만 만든 게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물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중요한 건 아니지만, 4번의 감독상을 비롯해 그가 받은 6번의 아카데미상도 모두 비서부극에 주어졌다.) 그런데도 이 강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존 포드 세계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경이 비서부극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존 포드의 최고작 5편을 뽑으라면 < 도망자 >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 라이징 오브 더 문 > < 젊은 날의 링컨 > < 수색자 >이다. (물론 이 명단은 수시로 변할 수 있다) <수색자> 외엔 비서부극이다. 그렇다면 존 포드를 서부극의 감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게 과장인 건 분명하지만, 억지만은 아니지 않을까. 맞다. 나는 지금 여행가이드라는 직분을 핑계 삼아 사적인 편견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가이드를 만난 게 불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새로운 코스를 발견하는 도전적인 여행의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로선 당연하게도 후자라고 생각해주시기를 바란다. 내가 편견을 주장함으로써 기대하는 것은 동의가 아니라 환기이며, 그것이 질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정당화의 핑계를 하나 더 대자면, 나와 내 동료들의 경험에 비춰볼 때, 편견과 편애는 영화 세상에서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종종 생산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나는 영화 개론서들을 싫어하는데, 그 책의 저자들이 나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 해도, 그것으로 익힌 어설픈 표준적 지식들이 내가 편견과 편애를 가질 기회를 종종 박탈하기 때문이다. 필름누아르의 걸작을 보며, “저 장면이 독일 표현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명암대조법이군”이라는 말을 중얼거리게 된다면 그 영화에 결코 다가갈 수 없다. 이 명제의 논쟁적인 면은 서부극의 장르적 지위와 관련이 있다. 최근의 장르연구들은 영화사 초기의 멜로드라마를 모든 할리우드 장르의 기본양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미국 저널리즘과 학계에서 사용되는 멜로드라마의 개념은 우리의 개념과는 달리 “열정과 부정과 범죄와 보복에 관한, 유혈과 폭력이 난무하는 드라마”(「영화 장르」, 배리 랭포드)로, 19세기 통속연극을 스크린에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이 논지에 따르면 서부극도 멜로드라마에 뿌리를 둔 하나의 장르이다. 이와는 별개로 거의 모든 장르연구가들이 동의하는 서부극의 장르적 성격은 ‘황야와 문명의 대립 및 상호모순적 의존’이라는 모티프에 의존하며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서부극에 대한 이 견해와 정설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견해는 전문학자들처럼 방대한 실증적 사례가 뒷받침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직관적인 것이다. 다른 글(「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서문)에서 그 견해를 밝힌 바 있으므로 요지만 말하자면 이렇다. 서부극에서 황야로 표현되는 풍경은 문명의 대립항이 아니라, 문명 내부의 갈등이 벌어지는 장소이면서 그것을 초과하는 시간이자 큰 형식이다. 서부극의 주인공들은 황야와 싸우는 게 아니라 황야라는 장소 혹은 풍경의 시간 내부에서 또 다른 문명 혹은 문화와 싸우는 것이다. 미국학자들이 황야를 문명과 같은 층위의 대립항으로 놓은 것은, 건국 초기의 서부 개척이라는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을 과도하게 도식화해 적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서부극이 왜 서부 개척의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외국 관객과 영화인들에게도 그렇게 큰 호소력을 가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서부극처럼 미국의 삶이 상상계 구조에 너무도 촘촘히 짜여져 있는 장르가 상이한 시기에 다른 내셔널 시네마 몇몇에 의해 성공적으로 흡수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영화 장르」) 서부극에는 세 가지 시간대가 교착하며 상호작용하고 있다. 인물들의 시간, 역사적 시간, 그리고 풍경의 시간이다. 풍경의 시간이 결국 다른 두 시간을 압도한다. 서부극의 진정 위대한 전통은 미국학자들이 역사적 경험을 재현했다고 간주하는 서부-황야-풍경이라는 장소와 시간의 영화적 발명이다. 멜로드라마는 연극의 무대장치를 계승했지만, 서부극은 영화적 풍경을 발명했다. 이런 의미에서 서부극은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또 하나의 원형적 장르이며, 이후의 영화들은 이 세 시간대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이 논의는 이후 존 포드의 개별 작품을 말할 때, 다시 거론할 생각이다. 정리하자. 이렇게 서부극을 이해한다면, 이 장의 명제는 뒤집혀야 한다. 존 포드야말로 진정한 서부극 감독이다. 어떤 서부극 감독도 그처럼 풍경의 시간을 서사적으로 또한 시각적으로 풍성하게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드는 “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대지(land)”라고 말했다. 이 말은 왜 그의 비서부극조차 그토록 서부극적인지를 이해하게 해주는 열쇠다. 그런 면에서 존 포드를 관습적인 의미에서의 서부극 감독이라고 부르기보다 차라리 ‘대지의 감독’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장의 명제를 과도한 역설로 표현한 것은, 이 말에 이르기 위해서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