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북
- 감독
- 폴 버호벤
- 제작년도
- 2006
- 출연
- 캐리스 밴 허슨, 돔 호프먼, 할리나 레인, 세바스티안 코치, 크리스찬 버켈
연설을 듣는 청중이나 지켜야 할 조국은 여자다. 열정적인 연설은 대중을 오르가슴에 이르게 한다. 정치란 창녀와 같아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 그녀가 너의 머리를 물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철학은 인간 해방의 머리이며 프롤레타리아는 그 심장이다.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리바이어던Leviathan』과 < 작전명 발키리Valkyrie > 브라이언 싱어가 서른 살에 < 유주얼 서스펙트The usual suspects )>(1995) 를 들고나왔을 때 할리우드는 들썩거렸다. 지금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지만 23년 전 이 영화의 파장은 대단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무슨 ‘석학’이 출현한 것 같았다. 이후 브라이언 싱어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유주얼 서스펙트> 케빈 스페이시 그때 주인공인 케빈 스페이시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나는 며칠 동안 세상의 모든 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버릇이 생길 정도였다(영화의 작은 소품이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하다니!). 이후 케빈 스페이시가 나온 < 쉬핑 뉴스Shipping news >(2001) 같은 ‘힐링’ 영화를 많이 보았는데도 여전히 그는 내게 <유주얼 서스펙트> 속 모습으로 남았다.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그는 다른 영화에서 한 코믹한 연기조차 누군가의 뒤통수를 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최근 미투 가해자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수많은 상을 탄 베테랑 연기자이다. 젊은 나이에 그런 영화를 만든 브라이언 싱어의 <작전명 발키리>(2008)역시 야심작이다. 톰 크루즈는 말할 것도 없고 < 블랙북Black book >(2006)의 캐리스 밴 허슨, 한국 영화 < 택시운전사 >(2017)의 토마스 크레취만도 반갑고, 케네스 브래너는 언제나처럼 멋지다. 브라이언 싱어 캐리스 밴 허슨 토마스 크레취만 케네스 브래너 2차 대전 말기, 조국을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독일 장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톰 크루즈 분)은 히틀러 정권의 전쟁에 신물이 났다.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나치 정권을 비판하다가 아프리카 튀니지 전선으로 좌천된 그는 영국군의 폭격으로 왼쪽 눈, 오른손, 왼쪽 손가락 둘을 잃은 뒤 독일로 돌아온다. 그리고 1943년, 이미 여러 번 히틀러 암살 작전을 시도했던 일군의 장교들과 함께 ‘발키리 작전’을 역이용해 히틀러와 그의 측근을 제거하려 한다. ‘역모’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극적인 정치적 배경에 브라이언 싱어의 재능이 더해져, 두 시간 내내 관객의 심장을 ‘관할한다’. 하지만 영화 <작전명 발키리>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 텍스트는 근대 국가를 설명하는 데 매우 적절한 교재이다. <작전명 발키리>는 토머스 홉스(1588~1679)의 『리바이어던』과 연동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리바이어던』과 <작전명 발키리>는 상호 충실한 해제이다. 메타포로 국가를 만들다 고전의 정의 중의 하나로 “널리 회자되지만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책”이라는 말이 있다. 『리바이어던』도 대표적인 예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이들이 생각보다 않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 책이 인용되는 것만큼 사람들에게 읽혔다면, 절대 몸 이야기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언급하는 이들은 대개 ‘딴소리’를 한다. 조금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비서구 국가 혹은 한국의 (남성) 지식인들 중에서 헤겔, 마키아벨리, 칸트, 홉스, 루소 등을 맥락 없이 ‘들먹이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솔직히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해한 방식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수염 난 백인 남성’의 지적 권위가 (유학을 다녀온) 비서구 남성 ‘엘리트’에게 ‘내부 통치용’(“그들의 사상을 나만 안다.”)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리바이어던』의 경우, 사람들은 괴물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한다. 이 책의 분량은 생각보다 짧다. 가장 놀라운 점은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거의 단 한 줄도 빼놓지 않고 몸의 은유(body metaphor)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위대한 업적’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국가를 실체(entity)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는 관계와 제도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의 몸처럼 주권, 영토, 인구의 총체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국가 내 모든 영토는 평등하지 않다. 모든 국민도 평등하지 않다. 어디가 국가인가? 서울? 전라도 완도? 경상도 언양? 누가 국민인가? 여성? 장애인?…… 영토나 인구 개념은 상정된 것이지 실제가 아니다. 다만, 특정 지역이 국가로 대표될 뿐이다. 어떨 때는 서울이, 어떨 때는 독도가, 어떨 때는 한라산이……. 주권은 어떠한가. 나는 식량 주권, 검역 주권에는 찬성하지만, 군사 주권에는 회의적이다. ‘국가의 영혼’이라는 주권은 하나가 아니다. 19세기 말 중국은 서구에 의해 완전히 약탈당했지만(영화 <북경의 55일>(1963)을 보라) 공식적으로는 주권을 빼앗기지 않았다. 관타나모? 지금 그곳은 미국의 군사 기지이지만, 쿠바의 영토다. 『리바이어던』의 역사적 의미는 근대 국가의 개념적 기틀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인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은 민족이 상상의 산물이라서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쇄술-표준어의 발달 따위가 국가를 탄생시킨 물적 토대라는 주장이다. 국가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다. 홉스 역시 유물론자였다. 그는 가부장제를 자연적인 산물로 보지 않고 사회적 구성물로 여겼다. ‘없는 실체’를 ‘존재’로 만들려면 반드시 은유가 필요하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것처럼, 몸에 대한 은유는 인류의 오랜 인식 방법이었다. 그리고 몸은 사회적 해석을 반영한다. 그래서 머리(정신)와 몸(수족)의 위계라든지, 여성에 대한 비하가 없다면 불가능한 수사가 많다. 서구 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정체(政體, body politic)’는 공동체로서 조직을 유기체(하나의 몸)로서 조직으로 인지하는 데 결정적인 인식을 제공해 왔다. 사회 조직이 인간의 몸으로 비유되는 유기체일 때, 조직은 (지배-피지배) 관계/제도’가 아니라 실체로 간주된다. 권력은 도처에 있지만(is) 누군가가 가진(have) 것처럼 소유 관념으로 인식되어야, 통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오랜 역사 동안 인간은 만물의 척도였다. 몸은 모든 상징체계의 기본 도식을 제공해 왔고 서구 사상에서 정치 조직은 언제나 신체에 비유되어 왔다. 몸의 부분에 대한 의미 체계는 사회 규범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사회 조직에서 개인의 위치를 표현하는 ‘우두머리’, ‘수족’, ‘오른팔’ 같은 표현은 신체 기관이 위계화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리바이어던』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자연 중에서도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창작품이 ‘인간’인데 인체를 모방함으로써 창작품은 한결 더 고급품이 될 수 있다. 정치 공동체, 즉 ‘국가’는 바로 이런 솜씨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국가의 주권은 몸 전체에 생명과 동작을 주는 인공적 ‘혼’이며, 각부 장관이나 행정부·사법부의 관리는 인공적 ‘관절’이다. 보상이나 처벌은 ‘신경’…… 고문관(顧問官)들은 ‘기억’에 해당하며, 형법과 법은 ‘인공 이성’이며 ‘의지’이다. 조화는 건강이요, 반란은 병환이며 내란은 죽음이다. 끝으로 이 정치 공동체를 만드는 합의나 동의는 우주를 창조할 때 신이 말씀하신 “이제 사람을 창조하자.”라는 명령과 같다고 하겠다. 이처럼 『리바이어던』은 전편에 걸쳐 국가를 ‘건강한 비장애인 인간’의 신체에 비유한다. “화폐는 국가의 혈액”, “식민지는 국가가 출산한 자녀”(제8장), “주권자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회충처럼 신체를 괴롭히는 자”, “피정복민은 종기”, “안일함은 기면증”, “폭동은 폐병”, “국가를 개혁하려고 불복종하는 사람들은 국가를 파괴하는 것, 이것은 마치 노쇠한 아버지의 회춘을 갈망하여 아버지의 몸을 절단하여 이상한 약초와 함께 끓였으나, 아버지를 젊은 사람으로 만들어내지 못한 펠레우스(Peleus)의 어리석은 딸들과 같은 것이다.”(제13장) 이처럼 국가를 유기체인 인체에 비유하면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인체를 절단하는 행위와 다름없게 된다. 모든 국가의 외부는 무정부 상태라는 전쟁 중에 있으므로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외부의 적을 생각할 때,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과 같은 힘의 공백을 노출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으며 국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보존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정상 국가는 장애인의 몸으로 표상되어야 한다 국가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행정부는 국가보훈처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국가주의에도 도달하지 못한 사회다. 한국 사회는 특히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존경이 없는 기회주의자들의 나라다. 여기서 내가 반민특위 사건을 들먹이며 흥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윤리적이지 않다. 윤리적인 국가는 보훈(報勳)에 충실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은 공동체 유지와 후세대 교육을 위해 필수적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정상 국가는 건강한 비장애인 남성의 몸으로 재현되지만, 실제 정상 국가는 외적과 투쟁을 거쳐 쟁취한 공동체이므로 부상당한 몸이 정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이용사(傷痍勇士)’나 장애인의 몸이 정상 국가를 상징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국가는 거의 없다. <작전명 발키리>의 주제는 반역이 탄로 날 듯한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제시된다. 관객의 심장은 쿵쾅거린다. 그때 슈타우펜베르크 역의 톰 크루즈는 자신의 신체를 ‘전시’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다. 한마디로 “당신들, 나처럼 조국을 위해 눈과 팔을 잃었나? 감히 내 앞에서 할 말이 있는가?” 체포 직전의 그는 자신의 훼손된 몸으로 히틀러 측을 압도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감동받았다. 나는 이런 상황이 가능한 사회를 꿈꾼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에서는 전쟁 없는 상태를 ‘현상 유지(the status quo)’라고 표현하는데, 부정적/비정상적인 의미로 쓰인다. 국가는 계속 전쟁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정체(政體, body politic)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묘사된 비장애인의 몸이 아니라 부상당한 장애인의 몸이어야 한다. 지난번 이 지면에서 다룬 영화 < 설국열차 >(2013)에서 언급한 리더의 조건 중에, 다친 몸이 아닌 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내용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이 영화를 통해 독일은 또 한 번 뿌듯(?)했을지 모른다. 독일과 일본은 2차 대전의 전후 책임 문제를 두고 극단적 비교 대상이 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이 글에서 다룰 사안도 아니다). 독일도 ‘군 위안부’나 전시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가해/피해 사안 모두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톰 크루즈의 아내 역으로 나오는 네덜란드 배우 카리서 판 하우턴이 열연을 펼친 폴 버호벤 감독의 <블랙북>은 2차 대전 후 연합군 국가들이 ‘적국의 남자와 섹스한 자국 여성’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보여준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존재는 독일의 자부심이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나치 정권은 대중의 협력 없이 불가능했고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 심리』를 통해 해석을 시도했지만, 어쨌든 히틀러에게 직접적으로 저항한 독일인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상기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사과하는 일본인,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벌인 만행에 문제 제기를 멈추지 않는 한국인, 나치에 항거한 독일인……. 자국의 범죄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인류가 국민이기 전에 인간인 이유다. 물론 최근 한국 사회의 일부 좌파와 페미니스트가 ‘난민 반대’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2016년은 내게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기억될 한해다. 현실 세계에서건 극장에서건, 그동안 발화되지 않았든 혹은 쉽게 간과되었던 여성의 목소리들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울림으로 다가왔고 이러한 흐름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의 나에게도 큰 감흥을 주었던 것 같다. 2016년 한해 사사롭게 마음에 품었던 영화 중 많은 작품이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주거나 여성의 서사에 보다 주목한 작품들이라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 엘르 >와 < 아쿠아리우스 > < 아가씨 >와 < 줄리에타 >가 그런 작품들이다. 다시 한번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호흡을 맞춘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호연이 인상적이라는 점에서 < 퍼스널 쇼퍼 >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지만 이 영화와 <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 >, 그리고 < 곡성 >은 불균질한 요소들의 충돌과 결합으로부터 생성된 미스터리한 기운이 더 매혹적으로 다가왔던 작품이었다. < 패터슨 >은 영화의 리듬감이, <룸>은 스토리텔링이 인상적이었던 영화였고 드라마 < 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 >은 아이디어와 무슨 일이 곧 일어날 것만 같은(그러나 쉽게 일어나지 않는) 불길한 무드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사사롭게 고백하자면, 리스트를 꼽기 전에 < 비밀은 없다 >를 보았다면 나는 주저 없이 <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 대신 이 영화를 선택했을 것이다. 손예진의 폭발적인 연기가 인상적인 이 작품은 ’한국 여자’에 덧씌워진 이미지를 사정없이 깨부수는 동시에, 한국 여성 캐릭터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멋진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지면에서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묶인 영화들 중 가장 과격한 영화라고 할 만하다. 2016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중 최고의 논쟁작이었던 < 엘르 >다. 이 작품은 네덜란드 감독 폴 버호벤이 할리우드에서 자국으로 돌아가 만든 < 블랙북 > 이후 10여 년 만에 연출한 장편영화로도 화제를 모았다. 영화 < 베티 블루 37.2 >(1986)의 동명 원작을 집필한 프랑스 작가 필립 지앙의 소설 「오...」(2012)를 영화화한 <엘르>는 폴 버호벤이 원래 미국에서 촬영하려 했던 작품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투자자이든 배우이든 이 영화에 참여하는 데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버호벤은 유럽으로 눈길을 돌려 원작의 무대이기도 한 프랑스에서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엘르>를 보면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더욱 분명해진다. 불륜, 강간, 관음, 사도마조히즘, 폭력. 온갖 종류의 금기에 노골적으로 현미경을 들이대는 이 영화는 미국인들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모험심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여주인공이 괴한에게 광폭하게 강간당하는 첫 장면부터, 시나리오를 덮어버린 이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 엘르 >는 미쉘(이자벨 위페르)의 비명으로 포문을 연다. 그녀는 복면을 쓰고 집으로 침입한 괴한에게 성폭행을 당한다(사건은 암전된 화면 속에서 진행되고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괴한은 유유히 사건 현장을 떠나고, 남겨진 미쉘은 잠시 몸을 추스르더니 의연한 얼굴로 입었던 옷을 쓰레기통에 넣고 깨진 접시를 치운다. 그리고 목욕을 하며 다리 사이에서 흐르는 피가 섞인 거품을 바라본다. 이 충격적인 오프닝 시퀀스는 하나의 질문을 제기한다. 누가, 왜 그녀에게 그런 짓을 했는가? 아직도 미쉘의 곁을 맴도는 전남편, 미쉘과 불륜 관계에 있는 친구의 남편, 미쉘에게 자꾸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는 옆집 남자, 게임 회사 대표인 미쉘에게 사사건건 불만을 털어놓는 부하 직원. 모두가 조금씩 의심스럽다. 미쉘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주요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는 <엘르>의 초반부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식을 띤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누가 범인일지 짐작해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범인의 정체를 추리하는 건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엘르>의 핵심은 ’그 여자’라는 제목의 의미처럼, 미쉘이라는 인물의 욕망과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쉘의 삶은 곳곳이 지뢰밭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 국민이 다 아는 연쇄살인범이고, 어머니는 철이 없다. 전 남편은 제 앞가림을 못 하고 어리숙한 아들은 여자친구가 낳은 다른 남자의 아이에게 집착한다. 불륜 관계에 있는 친구의 남편은 직장에서건 밖에서건 발정 난 동물처럼 추근대고 회사의 남자 직원 중 누군가는 미쉘이 게임 캐릭터에게 강간당하는 영상을 단체 메일로 뿌린다. 어쩌면 삶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는 다양한 시련들 사이로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걸어나가는 미쉘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 엘르 >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이유다. 무엇보다 미쉘은 선택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을 내리는 사람이다. 그녀에게 사회가 부여한 역할은 온갖 괴물이 출몰하는 1인칭 게임 속 주인공이지만, 그 역할을 거부하고 스스로 게임의 콘솔을 잡은 플레이어가 되길 욕망하는 느낌이랄까(그런 점에서 시나리오 에이전시의 대표였던 원작 소설 속 미쉘의 역할이 게임 회사 대표로 바뀌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일례로 이 영화에서 미쉘이 가장 먼저 내리는 선택은 경찰에 성폭행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다. 기겁하는 친구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경찰하고 엮이기 싫어. 이 얼간이 때문에. (‘연쇄살인범의 딸’이라는 오명 때문에) 내 인생을 재건하려고 정말 힘들게 싸웠어.” 그리고 덧붙인다. “미친놈은 잡아야지. 미친놈 해결하는 건 내 전공이야.” 그렇게 미쉘은 시스템보다 손도끼와 스프레이의 힘을 더 신뢰하는 여자다. 그 선택이 때로는 비윤리적이고 상식과 동떨어져있다 해도, 중요한 건 그녀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신이길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임을 깨부수고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 믿는 폴 버호벤의 고약한 취향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다. 성모상을 옮기는 옆집 남자를 창문으로 엿보며 자위를 하고, 성폭행범이 밝혀진 뒤에도 그와 은밀한 게임을 벌이며 사도마조히즘적인 욕망을 펼쳐 보이는 이 여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금기시되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펼쳐 보이며 관객을 난감한 상황으로 밀어 넣는 폴 버호벤의 장기는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미쉘로 분한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그녀의 근작 가운데서도 최고다. “이처럼 변태성을 탐험하는 작업을 하려면, 기쁨과 창의성을 가지고 (감독과) 저 멀리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하다. 세상에서 이런 악보에 장단을 맞출 수 있는 배우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처럼, 이자벨 위페르는 스릴러와 블랙코미디를 오가며, 냉철한 커리어우먼과 비밀스러운 욕망을 지닌 여성을 넘나들며 폴 버호벤의 변화무쌍한 장단에 기꺼이 ‘놀아’난다. 비틀린 욕망을 지녔다는 점에서 < 엘르 >의 미쉘은 역시 그녀가 주연을 맡았던 < 피아니스트 >의 에리카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도 있는데, 하네케의 영화가 에리카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면 버호벤의 <엘르>는 욕망의 주체로서의 미쉘에 보다 초점을 맞추는 느낌이다. 한편 < 엘르 >는 게임의 규칙을 아는 이들만이 헤아릴 수 있는 은밀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영화다. 미쉘과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빠르게 습득한 뒤, 그녀가 매 순간마다 각기 다른 인물들과 나누는 시선의 교환을 좇는 재미가 이 영화엔 있다. 특히 모든 등장인물들이 미쉘의 초대로 한자리에 모이는 크리스마스 파티 장면이 압권이다. 이 부르주아들은 점잖게 차려입고 샴페인 잔을 부딪히지만,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들의 정체가 불륜남, 얼뜨기, (아마도) 강간범-정체가 밝혀지기 전이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우스꽝스러운 난장의 한복판에서 오직 미쉘만이 고고하다. 파티의 기저에 은밀하게 흐르는 욕망과 비밀스럽게 구축된 관계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그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각자에게 은밀한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미쉘의 장단에 놀아난다. 이토록 야심만만하게 게임의 완전한 지배자가 되려 하는, 지배자가 되기 위해 때로는 괴물이 되기도 서슴지 않는 여성 캐릭터를 또 언제 만나볼 수 있을까. 폴 버호벤의 다음 영화는 < 블랙북 >과 <엘르>만큼이나 간극이 길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