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련의 섬
- 감독
- 정창화
- 제작년도
- 1958
- 출연
- 최명수, 김삼화, 김석훈, 김승호, 장훈, 한은진, 김정옥, 김혜정, 주선태, 서월영, 추석양, 박순봉, 임양, 정애란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2006년까지 170편의 한국영화를 촬영한 베테랑 촬영감독으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땡볕>(하명중, 1984), <깊고 푸른 밤>(배창호, 1985),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1999) 등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했다. 특히 그는 1980년대 주목받던 신진 감독들의 데뷔작에 단골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당시 그는 신인감독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제작자들의 신뢰를 얻을 만큼 빠르고 노련한 촬영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50년대 중반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의 조명부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장화홍련전>에는 조명감독인 함완섭의 조수로 참여했는데 이때 임권택 감독은 이 작품의 제작부 막내 스태프로 소품을 맡고 있었다. (사진1) 1956년 4월 15일 <장화홍련전>의 촬영장 사진을 보면 가운데 한복을 입고 여장을 한 인물이 임권택 감독이다. 테스트 촬영을 위해 장난처럼 여장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오른쪽이 서병수 조명감독, 왼쪽이 정광석 촬영감독이다. 후에 임권택 감독과는 <왕과 상노>(1965)에서 감독과 촬영자로 다시 만났지만 촬영감독으로서의 자의식과 자존심은 임권택 감독에게 뷰파인더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둘은 작품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중간에 결별한 뒤 단 한 작품도 함께 하지 않았다. 정광석은 일본 유학파 출신 김영순 촬영감독의 권유로 촬영부 조수로 옮겨간다. (사진2) 1959년 <부부>(곽건, 1960)의 촬영 현장이다. 카메라를 잡은 이가 김영순 촬영감독이고 왼쪽에서 장갑을 끼고 렌즈의 포커스링을 만지는 이가 당시 촬영 제1조수 정광석이다. 삼각대 옆에는 여성 스크립터가 앉아서 기록을 위해 초시계를 잡고 있다. 당시 제1조수는 노출과 포커스를 책임졌고 흑백필름용 현상통을 가지고 다니며 촬영현장에서 테스트현상을 해야 했다. 2조수는 트래킹 쇼트 촬영에서 이동차 밀기, 제3조수는 촬영기자재 운반을 맡았다. 그나마 카메라 같은 고가장비는 제2조수가 운반했다고 한다. 이후 <비련의 섬>(정창화, 1958),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1960) 등의 작품에서 김영순, 이성휘를 비롯한 여러 촬영감독의 조수로 14편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1962년 정광석은 이봉래 감독의 권유로 <새댁>을 통해 촬영감독으로 데뷔한다. <새댁>은 김영수 작가의 KBS 인기 라디오 연속극을 영화화한 것이다. 당시 신문에는 <새댁>의 원작료를 30만원으로 밝히고 있는데, 정광석은 이때 촬영감독을 포함한 촬영부 전원의 인건비로 8만원을, 즉 천자 분량의 필름 세통 값과 비슷한 비용을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3년 12월 14일자 기사를 보면 당시 영화제작비 평균 중 총 촬영료는 20~30만원으로 여기에는 촬영기자재비용 12만원이 포함되어 있다 하니 그의 기억과 대체로 일치하는 금액이다. 이 조차도 주로 어음으로 받아 몇 달을 수입없이 기다리거나 급할 때는 많은 수수료를 떼고서라도 현금화시켜야 했기에 당시 많은 스태프들은 늘 빚을 지고 사는 형편이었다. (사진3) <새댁>(이봉래, 1962)은 흑백 시네마스코프 작품으로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리플렉스 카메라에, 공보부에서 비공식으로 빌린 250미리 줌렌즈를 장착해서 촬영했다. 당시 초점길이가 긴 줌렌즈는 신필름과 정부 홍보영화를 제작했던 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 밖에 없었기에 충무로 촬영감독들은 공보부에서 몰래 빌려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촬영 데뷔작인 <새댁>은 “물에 올라온 고기처럼 화면마다 생동이 퍼덕거리지만 시종 재미있다.”는 경향신문의 영화평처럼 3대의 대가족이 벌이는 에피소드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새댁>은 종로의 세운상가 3~5층에 위치했던 아세아극장의 개관작으로 1962년 12월 23일 개봉했다. 1965년에 그는 <성난 독수리>(김기, 1965)를 촬영한다. 이호영 공군 대령의 수기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가 대성공을 거둔 후에 만들어진 공군 전투영화이다. <빨간 마후라>는 비행장면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전투기 동체에 부착시켜 촬영했으나 제작비와 지원규모가 그에 못 미쳤던 <성난 독수리>는 정광석 촬영감독이 전투기 뒷좌석에 탑승해 비행장면을 모두 촬영했다. (사진4) <성난 독수리>(김기, 1965) 포스터 (사진5) <성난 독수리>(김기, 1965)는 원작자인 이호영 대령의 도움을 받아 대구 비행장에서 촬영되었는데, 실제 한국전쟁 때 사용한 전투기 T33이 이용되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은 전투복에 헬멧을 착용한 뒤 아리플렉스 ⅡC카메라에 필름이 담긴 200자 매거진 세 개를 여분으로 가지고 T33 뒷좌석에 탑승해, 핸드 헬드로만 항공촬영 전 분량을 촬영했다. 이 촬영으로 정광석 촬영감독은 25시간이 넘는 비행기록을 갖게 된다. 촬영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감독과 함께 화면의 비율을 결정해야 한다. 1968년에 개봉한 <황혼의 부르스>(장일호)는 정광석 촬영감독의 주장으로 스탠다드 화면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황혼의 부르스>는 일본을 배경으로 몰락한 일본귀족과 북한 간첩, 남한의 비밀요원이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여인을 둘러싸고 벌이는 첩보 액션영화이다. 1960년대 영화계는 TV와의 경쟁을 와이드 스크린으로 극복하고자 가로의 비율이 넓은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탠다드 사이즈로 이 영화를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화려한 컬러의 색감을 보여주고 다양한 렌즈를 이용한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아나모픽 렌즈를 마스터 렌즈에 덧대어 구현했는데, 1960년대 후반 노후된 아나모픽 렌즈는 화면의 색감이나 선명도를 보장할 수 없었고 아나모픽 렌즈의 왜곡 때문에 사용 가능한 마스터렌즈의 구경이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파독광부 출신으로 독일에서 아리플렉스ⅡC 카메라를 구입해 온 신영필름 김태우 사장이 마침 정광석 촬영감독의 조수로 들어왔던 시기라 최신 카메라로 선명하고 깨끗한 화면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도 또한 더 해졌을 것이다. (사진6) 의사로 위장한 가네야마(오지명)기 여자주인공 시즈코(윤정희)를 도와 몰락한 일본 귀족인 가다키리 남작(박암)의 저택에서 도망치려는 장면이다. 망원렌즈로 인물들을 촬영해 전경의 배경을 흐리는 방식으로 인물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물론 윤정희의 심리적인 불안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다. (사진7) 이 영화에서 박암은 몰락한 일본 귀족임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 내내 제대로 여미지 않은 유카타를 입고 있다. (사진8) 호텔 객실에서 윤정희는 원하지 않는 청혼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받고 있다. 윤정희는 이유를 모른 채 남자들에게 결혼을 강요당하고 살인사건에 연류 되고 협박받는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부친이 막대한 재산을 딸의 남편에게 주기로 했기 때문인데, 물론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도 모르고 있다. 오로지 ‘황혼의 블루스’라는 노래가 들리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뿐이다. 컬러영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60년대 후반의 컬러 작품에는 화려한 색감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언제나 세 가지 색으로 구성된 꽃꽂이가 탁자 위에 놓여있다. 이 작품에도 회사, 병원 등의 책상과 탁자 위에는 어김없이 삼색 꽃꽂이가 놓여있다. (사진9) 말끔한 양복에 뿔테 안경을 쓴 신사 오지명은 안경을 벗는 순간 북한간첩이 되어 윤정희 가족을 북송선에 태우려 한다. 심지어 오지명의 날카로운 두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보여줘 긴장감을 갖게 했다. (사진10, 11, 12, 13) 이 작품은 액션영화이다. 오지명의 정체가 드러나자 북한간첩단과 몰락한 일본 귀족의 하수인들이 총격을 벌이고 남한에서 온 공작원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결투장면이 등장한다. 한 간첩단이 윤정희를 찾으러 온 귀족의 하수인들에게 총질을 해대는 장면은 피격당하는 인물들의 화려한 리액션이 다소 단순한 동선을 무마해준다. 심지어 오른쪽 인물은 총에 맞아 엎어져 있다가 다시 총을 맞고는 일어나 휘청거리는 연기를 보여준다. 발포할 때마다 총구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는 90년대 <투캅스>(강우석, 1993)까지 등장한다.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액션장면 중 장동휘의 공격에 오지명이 360도 회전하며 쓰러지는 장면은 설정 상 어두운 실내에서 촬영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1968년부터 정광석은 매년 10편 내외의 작품을 촬영했다. 현재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작품수인데 그는 두 가지의 이유에서 다작 촬영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첫째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따라가기. 신성일, 김지미, 남정임 등 당시 인기 있는 주연들의 작품을 촬영하면 두, 세 작품을 동시에 가케모치 즉 겹치기 촬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제작자 또한 그런 겹치기 일정을 고려해서 주요 스태프를 고용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후시녹음으로 진행했기에 촬영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후시 녹음이 미완의 영화를 어떻게 완성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성우 고은정, 오승환의 구술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70년대에도 이러한 다작의 흐름을 이어갔다. 1971년에 개봉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액션영화이다. 물론 영화는 전편 다 국내에서 촬영되었다. (사진14)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애국지사와 갱 그리고 밀정이 처음 만나는 황량한 만주의 술집은 워커힐 호텔이 보이는 한강 상류의 모래밭 위에 세운 오픈세트이다. (사진15) 주인공들이 스키를 타고 일본군을 유인하는 만주의 눈밭은 강원도 횡계에서 촬영했다. 아찔하게 따라오는 일본군 스키부대원들을 찍기 위해 사각으로 기울기를 조정해서 촬영했다. (사진16) 위 장면을 찍기 위해 바닥에 바짝 붙인 카메라를 틀어 앙각으로 촬영하고 있다. 바닥에 누워 카메라를 잡고 있는 이가 정광석 촬영감독이고 그 바로 뒤에서 사진 밖 피사체를 응시하고 있는 이가 이만희 감독이다. 이만희 감독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 또한 영화에 대한 감각이 아주 뛰어났다고 평가한다. “앞뒤가 이러니까 이런 사이즈로 간다. 이게 아니라 한번 쭉 시켜본 다음에 그냥 나눠서 가니까.” (사진17) 장동휘가 촬영 중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로 구르게 되자 이만희 감독은 즉흥적으로 커트를 나눠 촬영해 사고로 NG가 난 장면을 살렸다고 한다. 콘티나 모니터 없이 즉석에서 머릿속으로 편집이 가능한 감독이었던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라면 기세가 등등한 배우들도 어려운 액션장면을 군말 없이 직접 연기했다. 물론 배우들도 인물을 줌렌즈로 당겨 찍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배우 황해가 한 겨울에 한강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장동휘가 오토바이에서 넘어지는 정도의 위험은 그리 과한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과거 그가 촬영조수로 참여한 <햇빛 쏟아지는 벌판>에서는 정창화 감독이 총격장면에서 실탄을 사용했고 이만희 감독 또한 대단한 사격실력으로 때로 배우 근처까지 직접 총을 쏘며 촬영을 진행 했다는 무용담 같은 증언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리얼한 장면에 대한 욕심과 부족한 안전장치로 인해 배우와 스태프들이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아찔한 시기였다. 그가 촬영한 전쟁영화인 <전우가 남긴 한마디>(이원세, 1979)에서도 군용보트를 타고 도강하는 장면에서 강 밑에 묻어놓은 TNT폭탄 위로 배우 장혁이 탄 보트가 지나가며 폭파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다행이 아무도 다치지 않아 며칠 쉬다 촬영을 재개했다고 한다. 정광석은 1960,70년대를 거치며 전광석화처럼 빠른 시간에 탁월하게 촬영을 끝낼 수 있는 노련한 촬영감독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다보니 1980, 90년대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에서 그의 이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곽지균 감독의 데뷔작 <겨울나그네>(1986), 박종원 감독의 <구로아리랑>(1989), 이현승 감독의 <그대안의 블루>(1992), 김성수 감독의 <런 어웨이>(1995),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1998)등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감독들의 데뷔작에는 늘 그의 이름이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의 선두주자였던 배창호 감독과의 콤비로 유명한데 배창호 감독과는 <꼬방동네 사람들>(1982)부터 시작해 모두 8편의 작품에서 함께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판자촌의 모습을 리얼하게 담아 호평을 받았는데, 그는 성공적인 헌팅이 빛을 발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꼬방동네는 고척동 그러니까 당시 영등포에서 시흥으로 가는 길의 좌측 둑 너머 외딴 고지대에 있던 판자촌이다. 벌판 쪽에 우뚝 솟은 철탑, 저수지 같은 분위기를 내는 뚝방 등 그 동네 전부가 이 작품에 적절하게 맞아 떨어져 세트 없이 영화 전편을 그 곳에서 촬영했다. 스태프들은 인근 여관에 숙소를 잡고 2개월간 머물며, 동네 주먹들의 방해가 있으면 술값을 줘가며 밤낮으로 촬영했다. (사진18) 주석(안성기)이 검은 장갑(김보연)을 따라가며 꼬방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유려하게 훑는 장면은 스테디캠 처럼 느껴지지만 정광석 촬영감독이 광각렌즈를 사용해 핸드헬드로 촬영한 장면이다. (사진19, 20) 꼬방동네에서 열린 환갑잔치에서 공옥진 여사가 춤을 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 또한 사진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이 핸드헬드로 촬영했음에도 유려하고 안정적이다. 사진20번에 카메라를 든 이가 정광석이고 사진의 왼쪽 끝 안경을 쓴 이가 배창호 감독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배창호 감독과 한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적도의 꽃>(배창호, 1983)이다. 아파트에 혼자 살며 이웃들을 망원렌즈로 훔쳐보는 미스터M(안성기)은 맞은편 아파트에 이사 온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해 그녀를 스토킹 한다. 미스터M이 아파트를 훔쳐보는 도입부는 히치콕의 <이창>(1954)처럼 촬영되었다. (사진21,22,23,24) 미스터M(안성기)의 시점쇼트로 표현하기 위해 팬으로 앞 동 아파트 두어 가구를 훔쳐 보다 아래에 이사 오는 오선영(장미희)에게 시선이 닿는 흐름으로 이어지는데, 현장에서는 이 모두를 한 컷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세트에서 촬영된 <이창>과 달리 <적도의 꽃>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여러 가구의 협조를 구하며 어렵게 촬영이 이루어졌다. 미스터M은 타락한 오선영을 구원하고자 그녀를 강으로 끌고 가 물에 빠트린다. 비정한 내용만큼이나 촬영 환경 역시 좋지 않았다. 구파발 근교의 일영에서 촬영이 이뤄졌는데 장마철에 물이 불어 있는 강에서 빗줄기가 잘 보이도록 역광으로 조명을 쳐야했다. 결국 조명 설치를 위해 10키로 조명기를 매고 강을 건너던 조명조수가 물에 휩쓸려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희생 속에서 만들어진 장면이자 작품이었다. <고래사냥>(배창호, 1984)은 2,3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3년 11월에 촬영이 시작되었다. 삼영필름 명의로 제작자 황기성이 대명 제작한 작품이다. 병태 역할에 적합한 배우가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안성기가 김수철을 단성사 2층 다방으로 불렀다. 황기성 대표, 최인호 작가, 배창호 감독, 정광석 촬영감독 모두 그 자리에서 김수철을 병태로 캐스팅했다. 로드무비인 이 작품은 서울역 앞 사창가에서 시작해 과거의 창경원을 거쳐 대관령 너머 임계, 강릉 변두리 시장 등지에서 촬영되었다. 영하 20도 날씨에 염소차에서 내려 걷는 곳이 임계 읍내였고 춘자(이미숙)가 어머니에게 줄 안경을 훔치고 민우(안성기)가 이를 구출하는 곳은 강릉 변두리 시장이었다. (사진25,26) <고래사냥>의 강릉 변두리 시장 장면은 엑스트라 하나 없이 시장 사람들 그대로 촬영했다. 사진25의 오른쪽 하단 동그라미 친 부분에 안성기와 이미숙이 있다. (사진27,28) 춘자(이미숙)가 안경을 훔쳐 소동이 벌어지는 장면도 시장에서 엑스트라 없이 자연스럽게 촬영되었다. 주인공들이 포주일당에게 쫓겨 석탄차에 기어 올라가 기차를 타고 도망가는 장면은 카메라 한 대로 촬영이 이뤄졌다. 석탄차를 대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유를 두고 여러 커트로 나눠서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진29) <고래사냥>에서 석탄차를 타고 도주하는 시퀀스는 한 대의 카메라로 줌렌즈를 이용해 원경에서 접사까지 한 커트로 촬영을 끝내고 편집과정에서 여러 커트로 나눠서 사용했다. 물론 석탄차 위에서 안성기가 “잘 있거라 나는 간다.”포주들을 놀리는 장면도 접사에서 원경까지 한 커트로 촬영해 나눠서 사용했다. 과거 충무로 촬영감독이 갖춰야할 덕목 중 하나는 제작자의 입장에 서서 효율 좋게 촬영해 예산을 줄여주는 것이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의미 있는 장면으로 꼽는 것이 <땡볕>(하명중, 1984)의 한 컷이다.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한 <땡볕>(하명중, 1984)은 일제강점기의 민족수난사를 다루고 있다. 무기력한 남성과 수탈당하는 여성의 신체가 수난의 알레고리로 영화 전편을 메우는데, 주인공 춘호가 죽어가는 순이를 지게에 지고 물길을 거슬러 가는 장면은 인물들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배치되어 잔인한 운명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은 임계의 산중턱에서 오후 4시쯤 촬영을 끝내고 철수 하는 중에 정광석 촬영감독이 우연히 바라본 풍경에 영감을 받아, 하명중 감독에게 제안하여 만들어 낸 장면이었다. 이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23회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다음해도 연이어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이다. 미서부에서 단시일 안에 올로케로 촬영했고 흥행에서도 성공한 작품이다. 모든 화면이 감각적이고 할리우드 작품 같다는 평을 받았는데 배창호 감독 또한 미국 수준의 기술력만 받쳐준다면 할리우드 만큼의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작품이라 말했을 정도로 촬영기술과 감각을 강조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제작비와 물량을 들이지는 않았다. 열다섯 명의 인원이 필름 4만 5천자로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년, 데스밸리, 자브리스키 포인트, 산타모니카, 말리부에서 로케하며 40일 만에 촬영과 현상을 모두 끝내고 귀국한 작품이었다. 한때 배창호 감독의 전매특허였던 현기증 나는 360도 트래킹 쇼트도 할리우드에서 완성된다. (사진30) 호빈(안성기)과 제인(장미희)의 말리부 해변 키스씬을 360도 트래킹 쇼트로 촬영하기 위해 준비하는 현장이다. “그때만 해도 원형이동차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어요. 제일기공사라고 청계천에서 반원형 그니까 160도, 180도 돌아가는 이동차를 쓰는 경우가 있었고. 360도가 꼭 필요하다고 감독이 생각하고 찍으려하면 다 핸드헬드로 찍는 수밖에 없었다고. 정밀하게 원형이동차로 돌아가는 차가 없었어요. 근데 막상 미국 가서 기재를 다 렌트해서 썼거든. 카메라를 BL2를 썼고 거기서 원형이동차 360도 돌아가는 걸 갖다 찍을 때 아주 정밀하게 제작이 돼 있더라고. <깊고 푸른 밤> 보면은 서울에 와이프한테 영주권을 땄다고 전화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이동을 갖다가 360도 두 번은 돌아갔을 거야. 마구 빙빙빙. 업 되는 감정으로 전화하는 상태거든, 안성기가. 그거를 원형으로 돌아주니까, 찍는 나부터도 감정이 올라가더라고. 그리고 말리부 해변가에서 둘이 키스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360도 원형으로 쓴 게, 저렇게 원형이 되는 구나하는 걸 처음 느꼈을 거야, 아마.” 1990년 작품인 <꿈>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겨울에 촬영이 이뤄졌다. 낙산사 대웅전 촬영을 위해 강릉에서 양양으로 가는 길에 폭설에 갇혀 눈으로 허기를 채우며 20시간이나 걸려 촬영장소로 갔다. 폭설예보가 있었지만 스케쥴 미룰 경우 추가 경비가 발생하기 때문에 촬영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인내와 순발력이 필요했다. 강릉과 낙산사 사이 삼팔선 경계가 있는 곳에 마치 해금강을 떠올릴 것 같은 해변에 조신의 판자집을 오픈세트로 만들었다. 2, 3일 동안 눈이 오기를 기다린 뒤 동트기 직전 약 한 시간 십분 사이에 여덟 컷을 찍어야 했다. (사진31) 조신(안성기)을 찾아온 모례아손(정보석)에게 조신이 용서를 비는 장면으로 동 트기 직전, 순발력있게 촬영한 장면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처음으로 전 편을 동시녹음으로 촬영한 작품은 <베를린 리포트>(박광수, 1991)이다. 신철이 기획을 했고 오정완이 제작부로 파리 촬영에 동참했다. 사실 촬영진이 모두 파리에 도착한 뒤에도 시나리오는 완성되지 않아 파리 현지에서 스태프들은 열흘 넘게 박광수 감독이 시나리오를 탈고하도록 초조하게 기다렸다. 촬영현장에 미리 가 시나리오를 토대로 최적의 동선을 파악하는게 몸에 배어있는 정광석 촬영감독과는 작업방식이 잘 맞지 않았다. 스테디캠 장면은 독일 현지의 스테디캠 오퍼레이터를 고용해 촬영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은 <구로 아리랑>(1989) 이후 박종원 감독과의 두 번째 작품이다. 대동흥업의 도동환 대표가 제작했고 대부분 강원도 정선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영화의 절반을 정선의 국민학교에서 찍었는데 오픈세트로 진행된 엄석대(홍경인)의 아지트는 미술팀을 정선으로 데려오는 비용을 절감하고자 스태프들이 공간을 채워 만들었다. 기차가 달려오는 교각의 철로에서 오래 버티기 내기를 하는 인물들을 촬영하는 장면은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기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박진감 있게 잡기 위해서는 광각렌즈로 촬영해야만 했다. 누워있는 인물들의 시선에서 찍기 위해 교각으로 들어가 달려오는 기차를 핸드헬드로 촬영하는데 광각렌즈 특성상 피사체와의 거리감이 길어 보이니 기차가 바로 앞으로 올 때까지 버티며 촬영해야 했다. 그래서 달리는 기차에 옷깃을 스치는 긴박한 상황도 겪었다. (사진32,33,34)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오래 버티는 내기를 하고 있는 엄석대(홍경인). 사진32와 33이 광각렌즈로 촬영한 커트이다. 1973년 정창화 감독의 <흑야괴객>촬영 현장에서 자동차 추격 장면을 가까이에서 촬영하다 질주하는 자동차에 부딪힌 삼각대에 머리를 맞고 결국 현장에서 숨을 거두고 만 최호진 촬영감독을 떠올릴 만하다. 1993년에 촬영한 <투캅스>(강우석, 1993)는 1990년대 코메디 영화의 부흥을 알린 신호탄이 된 작품이다. 제작은 이화예술필름이 시작해 어음으로 계약금을 받았으나 중간에 이화예술의 임상돈 사장이 제작을 포기한다. 그러다보니 제작경험이 있고 지방장사들과 안면이 있던 강우석 감독이 직접 제작을 진두지휘 하게 된다. 강우석 감독이 발행한 새로운 어음으로 계약을 진행하며 제작이 시작되었다. 이 작품의 촬영에 있어서 인상적인 장면은 악당과 투캅스가 싸우는 영화의 마지막 총격전이다. 몹씬이라 많은 엑스트라와 자동차, 경찰까지 동원되었고 TNT를 묻고 총기를 테스트 하는 등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장면이었다. 강우석 감독이 워낙 일을 빨리 하다 보니 하루에 120커트를 촬영하는 불가능한 일정으로 계획은 세웠으나 다음날로 촬영은 이어졌고 마침 폐공장인 촬영장소에 눈이 쌓이게 된다. 개봉날짜가 잡혀있고 촬영을 미루면 비용이 발생하고 어쩔 수 없이 모든 스태프가 눈을 쓸고 흙으로 묻어 촬영을 재개시켜 이틀간 총격씬 120커트의 촬영을 마쳤다. “왜 군에서는 무엇이든지 안 되는 게 없다고 하더니 영화인들도 마찬가지라고. 안 되는 게 없어들.” (사진35,36) 강형사(박중훈)와 조형사(안성기)가 악당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장면 중 일부로 눈이 쌓인 현장을 스태프들이 모두 치우고 촬영한 장면이다. 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촬영감독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열악한 기자재와 제작환경 속에서도 저비용으로 순발력 있게 다양한 장르의 영화 한편을 촬영해내는 능력을 길렀다. 1980, 90년대에는 새롭게 대두하는 젊은 감독들이 믿고 작품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2000년대에는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생소했던 DP시스템을 시도한 원로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촬영담은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가 촬영한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사진37) 정광석 촬영감독이 아리플렉스 필름카메라를 잡고 있다.
.... 요란한 총성과 함께 출동하는 사이도 카와 기마헌병대들이 심야의 장안 거리를 뒤흔든다. 1920년대, 사이도 총독의 폭살미수사건으로 투옥된 강우규 의사를 구출하기 위하여 이성우 선생 지도하에 조직된 학생 독립단이 서대문 형무소를 폭파한 독립밀사에서 취재한 민족수난사의 한 페이지. 조국에 발붙일 길 없이 만주로 망명하는 학생 일단들의 처절한 레지스탕스가 액션 푸레이로 전개된다. 핍박받은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러브 로맨스를 겻들여 엮은 활극이지만, 전편을 관통하는 민족애와 저항의지들이 쓰라린 회상을 되살린다. 이야기는 서울을 탈출한 학생단들이 산줄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기까지, 이들을 쫓는 이리떼와도 같은 일본 헌병대들과 그들의 주구(走狗)들과의 산악혈전이 이 영화를 피로 물들인다. 리얼한 박력감을 주는 총격전과 설상(雪上)에서 전개되는 스키전이 색다른 취향. 중간에서 템포가 처지고 설명조의 컷트 구성은 미숙하지만 신인 임권택 감독은 소지를 보인다. 이러한 액션 드라마에는 특히 시간 계산과 숨 쉬는 요령이 필요. 오락도 겸하여 청소년들의 역사교재로 해롭지 않다. 동아일보, 1962년 2월 5일자. (이 글에서 현재의 표기법과 다른 것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 나는 임권택 의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가 막 개봉했을 때 한국을 느껴보고 싶다. 박정희가 일으킨 5월 16일 쿠데타가 막 성공한 이듬해. 그해 1월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고, 그 해 3월에는 윤보선씨가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증권 파동이 일어나고 그해 6월 화폐단위가 ‘환’에서 (지금의) ‘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로 통과시킨 다음 박정희 씨가 대통령 출마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런 다음 이듬해 10월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대통령직에 당선하였다) 임권택은 여러 차례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때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그해 1월 20일에 처음으로 영화법이 발효되었다. 한국영화사에 차례로 걸작이 도착하였다. 1960년에 김기영 의 < 하녀 >가, 그리고 그 이듬해 유현목 의 < 오발탄 >이 만들어졌다. 두 편의 거의 결정적인 영화. 두 편 사이에 놓여있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불안정한 긴장. 한국영화 속에서 비로소 시작된 형식의 기호들. 같은 해 이만희 가 < 주마등 >으로 데뷔하였다. 그때 한국영화의 중심에는 제국이라고 불러야 할 신필름이 있었고 신상옥 은 한국영화의 황제였다. 그는 이미 예술적으로 절정에 올랐으며 (< 꿈 >(1955년), < 어느 여대생의 고백 >(1958년), < 지옥화 >(1958년),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년)) 대중적으로도 성공하였다. (< 로맨스 빠빠 >(1960년), < 상록수 >(1961년)). 그리고 그해 < 연산군 >을 찍었다. 이 영화는 한국 사극영화의 거대한 모델이 되었다. 나는 조금만 더 1962년의 한국영화들을 호명하고 싶다. 그해 한국영화의 풍경. 신상옥 의 < 열녀문 >은 그가 끝내 거기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미조구치 겐지와 같은 예술적 비전을 지녔음을 보여주었다. 여인들의 숨결과도 같은 카메라의 선. 사건과 동선의 넘쳐나는 힘으로 가득 찬 건축 안의 구조들. 그때 집은 풍경과 뒤섞여버린다. 그 안에서 무엇보다도 비극. 그리고 다시 비극. 박상호 는 < 산색시 >를 만들었다. 한국영화사가 종종 잊어버린 이름들. 조긍하 의 < 아까시아 꽃잎 필 때 >. 최훈 의 < 양귀비 >. 누군가는 이 영화를 좋아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본 다음 무언가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유현목 의 < 아낌없이 주련다 >. 그런 다음 이만희 의 < 다이알 112를 돌려라 >. 지금 막 시작한 임권택으로부터 아주 가까이에 있었던 이름. 충무로에서 마주쳤을 때마다 아마도 느꼈을 감정들, 그리고 인상. 나는 인터뷰를 하면서 여러 차례 그 이름을 들었다. 임권택 이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찍고 있었을 때 이만희는 같은 영화사인 한흥영화사에서 <다이알 112를 돌려라>를 찍고 있었다. 같은 사무실. 같은 영화사. 우연의 일치.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만희가 힛치콕에게 끌리는 동안 임권택은 그 이름을 몸서리치게 싫어했다. 특히 < 싸이코 >. 그 대신 존 포드와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를 보면서 그 언젠가 할리우드 영화의 수준에 이르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이만희가 안토니오니의 영화에서 배우는 동안 임권택은 펠리니에게 이끌렸다. 아직 한국영화는 세계영화사의 시간 바깥에 놓여있었다. 부산에 피난 가서 보았던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의 경험을 가진 세대를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해방과 함께 한반도에 도착한 다음 한국전쟁을 거쳐 나머지 절반을 문화적으로 점령한 미국이라는 낯선 나라와 만나서 비로소 보게 된 1950년대 할리우드의 마지막 고전영화들로부터의 배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누벨바그 영화들은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다만 < 네 멋대로 해라 >가 개봉하고 그 영화는 그 어떤 한국영화 감독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 히로시마 내 사랑 >을 보지 못했다. 브레송의 <저항>은 개봉했지만 베르히만을 보지 못했다. 안토니오니의 <정사>는 개봉했지만 펠리니의 < 달콤한 인생 >은 보지 못했다. 그해 임권택 자신이 유일하게 스승이라고 부른 정창화 는 사극 < 칠공주 >를 연출하였다. 임권택은 그의 아래서 1956년 < 장화홍련전 > 제작부 일을 한 다음 이듬해 < 풍운의 궁전 >에서 소품부를 거쳐 58년 < 비련의 섬 >으로 연출부가 되었다. 그런 다음 1960년 < 햇빛 쏟아지는 벌판 >에서 조감독이 되었다. 그 후 네 편의 영화를 더 조감독을 한 다음 < 장희빈 >을 끝으로 데뷔작을 만들었다. 그는 정창화 이외의 다른 감독 아래서 연출부를 해본 적이 없다. 임권택 의 시작. 가장 첫 번째 영화. 말하자면 임권택이라는 좌표의 원점.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는 한흥영화사의 여덟 번째 영화이다. 한흥영화사는 액션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이 영화사에서 정창화가 영화를 만드는 동안 조감독 임권택을 눈 여겨 본 다음 그에게 데뷔작을 맡겼다. 말하자면 주어진 선택. 임권택은 “아마도 연출부 생활을 꽤 똘똘하게 하고 자신이 만든 예고편이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회를 주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이 시기의 한국영화는 대부분 흑백촬영의 시네마스코프였으며, <두만강아 잘 있거라>도 역시 그러하다. 시나리오와 촬영, 그리고 배우 모두 영화사가 결정하였다. “내가 데뷔 감독이니까 경험 많은 촬영이랑 스타 배우들을 붙여준 거지요. 주연인 김석훈 씨는 정창화 감독 연출부할 때부터 잘 알던 배우였구요” 종종 임권택은 자신이 영화를 연출하는 모든 방법을 정창화에게서 배웠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가 연출부를 하는 동안 정창화는 전쟁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영화를 아무리 여러 번 만들어도 자기가 만들어보지 않은 장르의 현장에서는 낯선 이방인이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임권택의 첫 영화이자 동시에 그가 경험한 첫 번째 전쟁영화이다. 물론 이 말은 다소 조심스럽게 꺼내들어야 한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라기보다는 액션활극이며, 그 중에서도 말과 총격전이 이어지는 웨스턴에 가까운 형식을 지니고 있다. 구태여 이름을 붙이자면 독립군 액션활극. 이 범주에 속한 영화들이 1960년대 말 이탈리아 스파게티 웨스턴과 만나면서 ‘만주 웨스턴’으로 잡종 장르가 되었지만 1962년은 셀지오 레오네가 이 장르의 첫 번째 영화인 < 황야의 무법자 >를 만들기 전의 일이다. 나는 아직 이 영화들을 서부극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임권택 자신도 이 영화가 서부극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 황야의 독수리 >를 설명할 때 임권택은 그 영화를 ‘사실상 서부극’이라고 불렀다) 혹은 독립군들이 만주에 도착하기 전에 이들은 아직 서부극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장르의 공간으로서의 만주. 불가능한 장르의 장소로서의 만주.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반드시 그 곳에 가겠다고 결심하는 대목에서 그냥 끝난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그들은 아직 역사 바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말하자면 아직도 살아있는 신체적 기억으로서의 역사 안의 멜랑꼴리. 해방이라는 단절. 그런 다음 한국전쟁이라는 한반도 전체의 경험. 그러나 1962년은 1945년으로부터 고작 17년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시간이다. 이때 나는 독립군이라는 역사 속의 ‘실재하는’ 인물들이 한국전쟁 이후 근대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1962년의 남한 대중들에게 어떤 ‘상상적’ 이미지로 남았을까, 를 상상해본다. 두 개의 상상 사이의 거리.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뉴멘트 벨리의 카우보이가 아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 잃어버린 조국. 대의명분이라는 비전. 그들은 누구보다도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때 1962년의 관객들은 만주에 가기 위해서 반드시 북한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불구가 되어버린 국토. 헤어진 사람들. 헤어진 시간, 저 너머. 고향이라는 호명. 그러나 지금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정교하게 설명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2시간 17분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프린트는 1시간 38분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사 속에서 사라진 39분. 물론 이 슬픔은 이 영화만의 비극은 아니다. 시나리오가 남아있긴 하지만 영화와 비교해보는 것은 오히려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나는 이 시나리오 대부분을 고쳐가면서 찍었어요. 그때는 모두들 그렇게 만들었어요. 급하게 시나리오가 나왔고, 그런 다음 감독과 어떤 의논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영화를 찍고 있을 때 작가는 이미 다른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거예요. 던져 놓으면 알아서 찍어야 하는 거지요. 그때부터 나는 시나리오를 고쳐가면서 찍는 습관이 생긴 거예요”) 나는 슬픈 마음을 안고 단지 이 영화를 느껴본 다음 남은 프린트만으로 이 영화의 기분을 막연하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영우와 경애 민사장과 경애 첫 영화를 보았을 때 나의 첫 인상. 내가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처음 보았을 때 난처해진 것은 단지 ‘사라진 39분’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일부는 아마도 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장황하고도 끝없는 사건으로 이어지고 있으면서 연속적으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 기구 절창한 이야기를 금방 요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름들을 잘 기억하실 것. 그런 다음 이야기의 선을 유심히 바라보아야 한다. 그 줄을 놓칠 때 이 영화의 질서들과 규칙들이 갑자기 흩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중으로 나눈 다음 다시 거기서 몇 개의 가닥으로 나뉘어 나간 사건들의 연쇄 망. 이야기는 두 개의 선을 따라간다. 하나는 영우의 선이다. 그는 독립군이었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홀어머니를 둔 학생이다. 그에게는 경애라는 애인이 있다. 경애는 일본군에게 독립군을 밀고하는 민사장이라는 삼촌과 살고 있다. 경애는 영우의 아이를 임신한 지 2개월이다. 그는 지금 서대문 형무소를 습격한 다음 독립군에게 합류하기 위해 떠나야 한다. 창환과 연화 연화와 현구 영우와 창환 다른 하나는 창환의 선이다. 창환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멀리 떠나있지만 서대문 형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돌아온다. 창환에게는 연화라는 아내와 아이가 있다. 연화에게는 현구라는 동생이 있는데, 그도 역시 독립군 활동을 하고 있다. 연화는 요정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녀에게 일본군 대장인 와까노가 한눈에 보고 반해서 치근덕거리기 시작한다. 영우와 창환이 같은 독립군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금방 이 두 개의 선이 하나로 모이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일단 하나로 모은 다음 이들이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두만강에서 합류하기 위해서 다시 둘로 나뉘어서 두 개의 선으로 황해도 구월산을 지나 두만강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이야기는 거기서 둘로 뻗어나가는 대신 다시 경애와 연화의 선으로 분리되어 나온다. 영우의 선으로부터 빠져나온 다음 바깥으로 이어진 선. 경애가 영우에게 빌려온 책 속에 있었던 사진을 훔쳐서 밀고한 민사장 때문에 동료와 어머니가 체포되자 영우는 경애가 배신했다고 오해하고 이별의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를 받은 경애는 민사장의 돈을 훔쳐서 영우를 찾아 나선다. 다음, 창환의 선으로부터 이어진 선. 연화는 일본군 헌병대장 와까노로부터 정보를 얻으려하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자 동생 현구와 남편 창환을 찾아서 아이와 함께 길을 나선다. 네 개의 선. 그러나 이들 선 사이의 관계를 다시 복잡하게 뒤섞는 것은 와까노의 앞잡이 노릇을 민사장이 하고 있고, 민사장은 경애를 뒤쫓으면 독립군들의 활동 본거지를 알 수 있다는 생각에 따라나설 때이다. 마치 수직으로 이어진 선을 수평으로 연결하는 것처럼 그들 사이를 가로지는 선. 그러나 이 선들은 거미줄처럼 서로 예민하게 묶여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거미줄이 그런 것처럼 무언가 하나가 그 줄을 건드리면 중심에 있는 거미에게 전달되어 신속하고 재빠르게 쇼트의 시스템 전체가 활동을 시작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이들 선 사이는 종종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나의 선이 활동하는 동안 우리는 다른 선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다. 거미는 어디에 있는가? 이 많은 인물들을 어떻게 일제히 작동시킬 수 있을까. 이 사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공명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임권택 은 이야기 안에서 방법을 찾는 대신 인물들이 속한 상황을 잘게 부순 다음 그들 사이를 교차 평행편집으로 연결해나가기 시작했다.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는 영화 전체가 마치 유일하게 거대한 교차 평행 편집이 활동하는 기계처럼 보일 정도이다. 종종 이것이 반복적으로 연결되고 둘 사이의 평행이 시간적으로 반드시 일치하지도 않지만 이 모든 선들이 하나의 장소, 두만강으로 수렴되기 시작할 때 이 씬들 사이에 놓여있는 칸막이는 점점 좁혀져오기 시작한다. 물론 시네마스코프는 쇼트를 교차하기에 유리한 프레임이 아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쇼트 대신 씬이 교차 평행편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들 사이의 교차는 서로 직접적인 대신 서로 다른 단위의 집합들이 오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우는 경애와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창환은 연화와 씬 안에서 만날 때에만 그들 사이의 감정을 교환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멀리 있는 동안 그들 자신을 전달할 어떤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평행편집은 항상 이 모든 씬이 이야기 전체의 부분 집합이며, 나머지를 상실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교차는 교집합이 아니다. 이때 잃어버린 상실을 찾아서 ‘그 모든 것을 다 가지지 못한’ 이야기가 항상 이미 선택되어진 인물들 사이로 옮겨 다닌다. 씬 사이에 이루어진 칸막이. 교차 평행편집은 언제나 이야기 안에서 분배의 계산법에 따른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서 임권택의 연출은 이 계산법에 있다. 그는 어떻게 계산을 하는가. 그 계산은 제대로 작동하는가. 그 안에서 분배는 올바로 되어있는가. 이때 시간은 이야기 속의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단서이다. 이때 이들이 그러는 동안 저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보충하고, 다른 하나가 또 다른 하나로 뻗어나간다. 그런 다음 재빨리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하나는 마치 그 사이에 그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종종 이 계산은 지나치게 단순할 때도 있고, 때로는 셈을 망설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영우가 산에서 길을 잃은 다음 산골지기 노인과 그 딸에게 보살핌을 받으면서 그 딸이 영우에게 이끌리기 시작할 때. 말하자면 거기서 뻗어나간 또 다른 선. 이때 원래의 이야기를 다시 작동시키기 위해서 이 씬 안으로 경애가 뛰어 들어오는 것은 이 얼마나 기계적인가. 도식적인 설명. 두만강에 가기 위해서 다시 교차 평행편집을 작동시켜야만 한다. 여기서 멈추면 반대편 창환의 씬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시간의 간접적 이미지에서 자기 영화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설명이 임권택의 영화가 오로지 구성의 리듬 안에 자리한 교환 장치만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이 영화의 가장 부자연스러운 장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어쩌면 모든 영화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성립시키는 순간영화는 아름다워진다. 힛치콕의 < 새 >에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새의 시선들.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둥지의 성>에서 안개 속을 걸어오는 숲.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본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던 1962년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두만강을 앞에 둔 눈 내린 계곡에서의 총격전 스펙터클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용인 스키장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가 아직 녹음실에 있을 때 기사에 따르면 “5백여 스키여를 동원했고, 5만 여발의 뇌관을 소비하는 등, 폭발사고로 엑스트라들의 치료비만도 1백만 환이 넘었다는 화제의 영화가 15일 촬영을 끝내고 목하 녹음중인 바”(조선일보 1962년 1월 18일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의 장면을 보면 5백 명에 이르는 스키 부대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른 기사에서는 치료비가 2백만 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런 문제를 따져 물을 생각이 없다. 그러나 이 장면을 분석하는 것은 (다른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차라리 더욱 더) 현재의 프린트로는 불가능하다. 이 시퀀스 전체에 이르는 대부분의 프린트가 손상되었으며, 일부 디지털 복원된 장면들은 현재 스틸 사진으로 대신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완전히 사라진 장면들이 있으며, 우리들이 지금 볼 수 있는 장면은 전체의 구성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이 장면은 아름답다. 내가 이 씬을 처음 보았을 때 그냥 그게 첫 인상이었다. 갑자기 영화는 이제까지의 이야기로부터 빠져나온 것처럼 완전히 다른 환경의 장소 속으로 들어간다. 영우와 창환, 경애, 연화, 심지어 민 사장조차 종종 그들은 숲에서 길을 잃기도 하였다. 미로에 가까운 이야기의 선. 넘나들 수 없는 칸막이들로 갇힌 것만 같은 가로막길. 끈질기게 일본군 헌병대의 추적이 이어지고 그들은 하나씩 죽어갔다. 연화의 동생이 총상 당할 때 문득 떠오르는 질문. 결국 이렇게 모두들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선이 끊어져버린 것만 같은 중단. 무엇보다도 어둠과 그림자, 실내 공간 속에서 계속해서 이어지던 거의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교차 평행편집. 그런데 마치 이야기의 침점처럼 두만강으로 모이자 이제 교환 장치의 작동은 멈추었다. 그런 다음 산은 눈부실 정도로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다. 흑백화면이 주는 전체를 차지하는 하얀 색과 부분적인 검은 색. 우리는 이 장면이 시작하기 전 눈 오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미 산과 강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다. 아니, 차라리 여기를 눈이라는 대지로 이루어진 땅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래서 마치 이 씬을 보는 순간 어떤 공간 이동이 벌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물론 이 장면이 말이 안 된다고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심지어 임권택 자신조차 이 장면을 부정한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이 장면을 눈 위에서 벌어지는 스키 부대의 액션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마지막 설원에서의 전투장면에는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다. 이 영화에 등장했던 그 모든 인물들이 모두 죽기 위해서 마치 이 장면으로 모여든 것만 같은 인상을 줄 정도이다. 악인도, 선인도, 우리 편도, 저들도, 아니, 이들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살아남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전멸의 테마.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리고 당신은 임권택 의 영화에서 이 전멸의 테마를 반복해서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에서의 이 장면은 두 번의 전투로 나누어져 있다. 독립군들은 일본군에게 쫓기면서 전투를 하지만 이들이 위기에 빠진 순간 산 저편에서 어디선가 갑자기 스키부대가 나타나 이들을 물리친다. 산 전경을 보여주는 롱 쇼트. 프레임을 가득 메우는 스키 부대. 아래서 위로 올라오는 일본군 헌병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스키 부대. 두 개의 힘의 충돌. 이 힘의 운동 방향은 이미 이 전투의 승패를 가늠 짓는다. 이들은 승리의 만세를 부른다. 그들이 얻은 승리. 하지만 잠깐 동안의 기쁨에 찬 만세. 뒤 이어 어디선가 나타난 더 많은 일본군 헌병대가 이들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한다. 두 번의 반복적인 어디선가. 그러나 반대의 방향, 더 많은 숫자의 군인들. 거의 화면 아래를 모두 채우다시피 한 숫자. 승리의 화면은 갑자기 여기서 균형을 잃고 이 승리를 불길하게 만든다. 영화의 약속. 여기에는 어떤 중재의 가능성도 없으며, 반전의 기회도 없을 것이다. 이때 이 전투는 가망 없는 전멸로 이끌린다. 이제 남은 건 필사적인 총격전뿐이다. 일단 먼저 준 다음 다시 뺏어가는 승리. 이들은 여기서 서로 죽이고 죽어간다. 우리들을 이끌었던 하나의 선 영우도 총에 맞아 죽는다. 그때 하나의 선은 거기서 끝날 것이다. 그 대신 거기서 이어지는 경애의 선이 희미하게 남는다. 가까스로 여기에 도착한 연화도 총에 맞아 죽는다, 이제 창환의 선이 하나 남았을 뿐이다. 그때 여기까지 가까스로 온 연화(와 창환)의 어린 아들의 선이 그들 사이를 겨우 이어간다. 물론 그들을 여기까지 쫓아온 일본 헌병대 대장 와까노도 죽는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조차 우리는 무언가 해결되었다는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넓은 설원의 계곡을 가득 메우는 것은 시체들뿐이다. 너무 많이 죽어서 이제는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이때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이들의 전멸에 어울리는 이미지이다. 이 절망적인 액션의 스펙터클에 대해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인간들의 피 흘리는 전투에 대해서 그저 무심한 자연의 하얀 눈이다. 그리고 흑백화면 위로 펼쳐진 더 하얀 색으로 화창한 하늘. 우리가 거기서 보는 것은 이야기의 결론이 아니다. 여기에는 독립군의 승리도 없고, 일본 헌병대의 야만에 대한 분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 모든 이야기의 선이 일제히 중단되어버렸다는 망연자실한 순간의 장면을 마주할 뿐이다. 여기서 임권택은 자기가 이제까지 이끌고 온 이야기 전체를 무효로 만들다시피 하고 있다. 말하자면 중단. 이제 살아남은 사람은 네 명 뿐이다. 창환과 경애, 그리고 창환의 어린 아들. 그런 다음 독립군 중의 그 누군가. 나는 현재 남아있는 프린트만으로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영화중의 그 어떤 선을 타고서 여기에 온 인물이 아니다. 시체들이 펼쳐진 스펙터클의 풍경. 이 풍경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표면만을 건드리고 싶다. 임권택은 거기 죽어 넘어진 시체들 속에서 그런데 왜 눈 쌓인 이 계곡의 오후는 이렇게 아름답지, 라고 내게 묻는 것만 같다. 그 풍경의 오류는 오로지 역사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뿐이다. 하얀 바탕 위의 검은 점. 수 없는 검은 점. 나는 이 스펙터클의 풍경을 볼 때마다 자꾸만 기하학적인 도면을 보는 것만 같은 인상을 받는다. 물론 임권택 이 의식하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거기서 본 것은 말레비치의 하얀 바탕 위의 검은 점이다. 그때 이제까지 그가 만든 영화들이 돌아서서 이 장면을 본 다음 물어보는 것만 같다. 혹시 그 검은 점들은 당신이 멀리서 바라보는 역사 안의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하기도 싫은) 실재 속에 남겨진 블랙홀들은 아닌가요. 그 검은 점들은 계속해서 돌아오고 또 돌아올 것이다. 임권택은 지금 막 첫 번째 영화를 만들었다. 그 해 1962년. (계속) 1962년 99분 흑백 2.35 감독 임권택 제작 한흥영화사 각본 유한철 각색 정진우 촬영 최호진 음악 박춘석 미술 원제래 편집 김희수 김석훈 영우 황해 창환 문정숙 연화 엄앵란 경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