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K]한국가곡_비목
- 제작년도
- 2010
영화배우 김석훈 . 요즘 젊은이들이라면 흔히 TV드라마 <홍길동>에 출연, 스타덤에 오른젊은 탤런트 김석훈을 얘기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이들 둘은 아주 다른 남남이다. 이를테면 동명이인. 탤런트 김석훈 은 20대이지만 원로배우 김석훈은 70대이다. 본명 김영현. 호적나이 78세(24년 생)로 되어있으나 본인말로는 잘못된 것으로 74세라는 것. 청주사범 출신으로 서울지방 법원서기로 근무하다가 촬영기사출신인 유재원 감독의 < 잊을 수 없는 사람들 >(1957)로 데뷔했다. 박 암 과 요즘은 활동을 안 하는 하연남 과 함께 주연한 작품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하연남 과 결혼한 신혼남편이었으나 6.25로 우여곡절을 겪다가 하연남이 박 암 과 재 결혼한 후 다시 나타나 박 암을 살해하는 비극적 내용이다. 유재원 감독의 유려한 화면과 빠른 템포, 거기에 적당한 신파조가 물려 대 히트했다. 이제까지의 출연작은 주연이 2백 30여 편. 여기에 조연을 포함하면 2백 50편 정도 된다. 묘하게도 부드러운 이미지의 그가 히트시킨 영화를 보면 거의가 액션이다. 특히 정창화 감독과 김묵 감독 작품이 대부분이다. 58년 금고수리공으로 홍콩에 갔다가 악당들에게 몰려 온갖 고생 끝에 탈출하는 < 망향 >(1958, 정창화) 전창근 감독, 이용민 촬영의 < 수정탑 >(1958). 신상옥 감독의 < 춘희 >(1959) < 지상에서 맺지 못할 사랑 >(1960) < 대지여 말해다오 >(1962, 정창화 ) < 슬픔은 없다 >(1962, 김묵) < 대평원 >(1963, 정창화) < 싸우는 사람들 >(62, 김묵) 등 부지기수이다. 특히, 최관두 씨 제작에 정창화 감독, 김지미 , 황해 와 함께 주연했던 < 햇빛 쏟아지는 벌판 >(1960)은 대 히트했다. 이 여세를 몰아 역시 최관두 씨 제작에 임권택 감독이 데뷔한 < 두만강아 잘 있거라 >(1962)에서 톱스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김씨는 당시 < 햇빛 쏟아지는 벌판 >이나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와 같은 전쟁영화에서는 총격전 장면을 진짜 총으로 실탄을 쏴 죽음을 놓고 영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흔히 경찰사격 특등사수들이 M1소총을 들고 나와 동료들이 있는 부근의 바위나 건물벽 또는 땅에다가 직접 쏴 댔어요. 연기는커녕 혼비백산했었지요." 김석훈 씨는 그러면서도 '잊혀져 가는 것은 아름답지 않느냐' 반문했다. 당시 콤비였던 여배우는 최은희 , 엄앵란 , 김지미 . 남자는 형제처럼 지낸 황해 , 박노식 , 장동휘 를 꼽는다. 그렇다고 김석훈이 액션영화만 한 것은 아니다. < 고개를 넘으며 >( 이용민 ), < 내 사랑 그대에게 >( 하한수 ) < 동심초 >(1958, 신상옥 ) < 사랑의 십자가 >(1959) < 슬픔은 없다 >(1961, 김묵 ) <어디로 갈까>(1960) < 내 마음의 노래 >(1960) 등 멜로도 수두룩하다. 대표작이라면 장일호 감독, 신영균 과 공연한 < 일지매 >다이내믹한 템포와 유려한 화면에 비록 흑백영화라도 높이 평가받았다. 기억하고 싶은 영화는 < 자매의 화원 >(1959, 신상옥) < 독립협회와 청년이승만 >(1959, 신상옥)에서의 서재필 역. < 슬픈 목가 >(1959, 김기영 ) < 로멘스빠빠 >(1960, 신상옥)에서의 선생역할 등. 김석훈 하면 지금도 행적을 잘 알 수 없을 정도로 혼자 떠돌며 식도락을 즐기는 '나홀로'파이다. 전성기 때였으니 어땠으랴, 이 퇴계 영화가 있다면 딱 어울릴만한 지성미와 어진 이미지가 주무기였다. 그러면서도 남성적 마스크를 지녔으니 금상첨화였지 않을까. 흔한 악극단 연극배우 출신도 아니면서 연기에 뛰어 들어 「기린아」취급을 받았다. 데뷔영화 <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에 그가 뽑힌 것은 행운중의 행운. 당시 유재원 감독은 신인모집을 해서 다른 사람을 당선시켰는데 우연히 길에서 그를 보고 대뜸 주연으로 픽업, 화제가 됐었다. 그때 받은 개런티는 엄청나서 5∼6년 동안 돈걱정 없이 실컷 썼다고 자랑한다. 김석훈 하면 당시 육체파로 유명했던 김의향 과의 러브스토리가 유명하다. 김씨의 부리부리하고 깔끔한 남성미에 불타는 듯한 마스크와 육감적인 몸매의 김의향은 명콤비였다. 이들 둘은 결국 결혼, 숱한 부러움 속에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2∼3년 두고 후배인 이택권, 강숙희 콤비와 비슷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영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두 커플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각각 서로 헤어졌지만 당시 영화계에서는 대단한 인물들로 평가받았다. 김석훈 하면 유명한 미식가에 멋쟁이. 당시 명동 사보이 호텔 일식 집에서 회를 먹는 단골이었으며 주량도 정종1병이 다반사였다. 언제나 혼자 다니던 그는 청진동 칠복이네 집에서도 저녁이면 술잔을 혼자 놓고 상념에 젖은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당시 자가용은 50년대 말의 윌리스 지프. 60년대와 70년대는 영국산 모리스 세단을 모는 몇 안 되는 멋쟁이였다. 명동에서 식사하고 커피를 마신 후 모리스를 타고 촬영장으로 떠나던 그의 모습은 당연히 '명동신사'그것이었다. 제 17회 대종상에서 < 이순신 >으로 특별상을 받은 게 그의 유일한 수상경력. '옛것은 아름답다'는 말이 있듯이 김석훈도 80년대 들어 뜸하다가 93년 < 비오는 날의 수채화2 >이후 화면에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70년대 영화를 보면 월남전을 로케 했던 이만희 감독의 < 얼룩무늬 사나이 >(1970) < 요화배정자 > < 삼일천하김옥균 >(1972, 신상옥 ) < 이 생명 다하도록 >(1972, 신상옥) < 불꽃 >(1975, 유현목 ) < 짝 >(1976) < 비목 >(1977, 고영남 ) < 세종대왕 >(1978, 최인현 ) < 팔만대장경 >(1978) < 장마 >(1978, 유현목) 등. 80년대 들어서는 < 사람의 아들 >(1980, 유현목) <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 >(1982, 정지영 ) 등이 손꼽을만하다. 김석훈 은 흔히 프랑스 배우 쟝가방의 눈매와 타이론 파워의 몸을 지닌 한국배우로 당시에 평가했었다. 또는 한국의 캐리그랜트라고 불리기도 했다. 해맑은 눈매, 꽉 다문 입매무새, 날렵한 몸맵시, 지성미등이 합쳐져서 그랬으리라. 결국 잰틀맨 뉘앙스가 오늘까지 그를 살게끔 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화려하게 시대를 풍미했던 그도 요즘은 조용히 은둔한다. 지긋한 연세 때문인가. 그는 김포공항 넘어 방화동 인근에서 2남1녀를 두고 산다. 부인은 김연식 씨. 큰아들은 컴퓨터 전문가, 둘째 아들은 요즘 한창 영화계에서 뛰는 젊은이, 외동딸은 막 태어난 탤런트이다. 얼마전이다. 그는 후덥한 분위기지만 약속시간이나 매너는 칼같이 지키는 사람., 필자가 교통사정으로 20분 늦었더니 10분 기다리다가 훌쩍 가버려 이틀 후에 다시 만나는 일이 있었다. 만나는 날도 아니나 다를까 회색빛 베레모, 검정코트를 목까지 잠그고 벨트를 꽉 맨 채 떡벌어진 매무새가 여전히 당당해 보였다. 우연히 나도 검정 베레모를 쓰고나와 커피 숍에서 숱한 이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자리를 이동해 간 곳은 광화문 뒷골목, 일본식 목로주점. 이 날 마신 술은 각각 정종대포5잔과 메추리구이와 닭꼬치구이 각각4개. '옛날 젊은 시절 같은 분위기'라며 반가워하던 그는 결국 옆 음식점에서 2차로 소주 2병을 비우고 '내일 지방에 가야한다'며 일어났다. 맥주로 입가심은 절대 사절. '도수가 약한술은 절대 안 마신다'는 신조를 밝혔다. "김형, 요즘 영화는 너무 따분해. 템포는 빠르고 애기꺼리도 있는 것 같은데, 너무 가볍다는 느낌이 들어."... 역시 세월이 가도 노배우는 아직까지 우리영화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고 있었다. 김량삼 (영화감독) / 2002년 <프로필> 본 명 : 김영현 출 생 : 1929년 6월 8일, 경기도 이천 학 력 : 청주사범대학교 졸업 데 뷔 : 1957년 유재원 감독 <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수상경력 : 대종상(17회) 특별상 등 다수 주요작품 : < 춘희 >, < 햇빛 쏟아지는 벌판 >, < 지평선 >, < 의적 일지매 >, < 두만강아 잘 있거라 >, < 열풍 > 등 200여 편
배우 전양자 는 영화와 TV드라마, 연극 무대를 두루 누비며 40년 가까이 왕성한 활동을 펼친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다. 스타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해온 친근한 얼굴이다. 요즘도 안방드라마에서 자주 대하는 그가 악극무대에도 선다니 나이를 무색케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중년 팬들은 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 때 그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한국적인 여인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인형처럼 깜찍한 외모로 풋풋함을 뿜어내던 전양자 의 발랄한 연기는 상쾌한 청량제였다. 전통적인 여인상에서 현대적인 여성상으로 분위기를 일신한 신세대 배우군에서 전양자의 역할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전양자 는 스스로 ''조연배우''라고 말한다. 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나 70년대 TV브라운관에서 주역을 맡아 인기를 모을 때도 없지 않았지만 ''조연''을 자처하는 것은 겸손이기 보다는 생리에 맞기 때문이라고 본다. ''조연''이라는 표현 속에는 그의 연기 패턴과 연기자로서의 길이 응축되어 있다. 반짝하는 스타보다는 달빛처럼 은은히 빛을 발하는 생명력이 긴 연기자이기를 소망한 것이다. 1966년 이강천 감독의 < 계룡산 >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전양자 는 그동안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중 대부분은 60년대와 70년대에 집중되어 있을 뿐 아니라 겹치기로 출연한 작품도 적지 않다. 기록에 남아 있는 출연작을 일별해 보면 기억에 남아 있는 영화도 있지만 생소한 제목들도 부지기수다. 66년작으로 < 계룡산 >, < 종점 >을 꼽을 수 있고, 67년의 < 가슴아프게 >, < 돌지 않는 풍차 >, < 빙우 >, < 타인들 > 68년 < 엄마의 일기 >, <여고동창생>, 69년의 < 눈나리는 밤 >, < 어느 지붕 밑에서 >, < 마인 >, < 애수의 언덕 >, < 사랑은 가고 세월만 남아 > 등 60년대 후반에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70년대에도 < 당신을 알고나서 >, < 칠인의 숙녀 >, < 황금부르스 >(70), < 나를 버리시나이까 >, < 아마도 빗물이겠지 >, < 장군의 딸들 >(71), < 밀녀 >(72), < 혈육애 >(76), < 아무도 모를꺼야 >(77), < 비목 >,< 이 한몸 다바쳐 >(78), < 우요일 >(79) 등 연기 활동이 활발했다. 전양자 의 출연 작품을 보면 영화사의 이정표가 될 만한 ''문제작''은 거의 없다. 유현목 감독의 < 오발탄 >, 김수용 감독의 < 갯마을 >, 이만희 감독의 < 만추 >, 이장호 감독의 < 별들의 고향 >, 김호선 감독의 < 겨울여자 > 등에 그의 이름이 들어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배우 전양자의 존재나 평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그를 제대로 평하기보다는 폄하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출연작에서 보듯 전양자 는 주로 청춘영화나 멜로영화, 통속적인 시대극에 치중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성을 제시하는 특이한 스크린에서 빠지게 된다는 것으로 보아 아무리 연기를 잘했다지만 그렇게 뛰어난 연기자라기보다는 무난한 연기자로 알려진 것 같다''고 평하는 것은 전양자의 위상을 과소평가하는 단견이며 주관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연약한 조연급에서 맴돌기만 했다''는 것인데, 이런 평가가 과연 그 시대의 상황이나 영화환경을 고려하고, 그의 작품 전반을 파악한 후 나왔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우선 전양자 의 연기는 60년대와 70년대로 나눠 볼 필요가 있다. 그가 맹활약한 60년대 후반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지만 70년대는 침체의 늪에 빠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별다른 볼거리가 없었던 60년대에 청춘영화나 멜로영화는 대중의 애환을 달래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TV의 대두에 밀려 영화제작 전반이 위축된 70년대 상황에서는 이렇다할 ''문제작''이 나올 여건이 되지 못했다. 예술성이나 흥행면에서 평가할 만한 작품이 1년에 몇 편밖에 나오지 않은 한국영화 풍토에서 ''문제작''에 출연했는가를 기준으로 연기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보다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자신이 맡은 역할을 얼만큼 충실히 소화하고 전체적인 앙상블에 기여했나를 포괄적으로 살피는 것이 정도다. 이런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전양자 의 역할은 ''조연''의 비중이 컸으며, 조역을 충실히 함으로써 영화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고 연기의 앙상블을 높인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조역이 잘받쳐주어야 주역이 빛이 나고 영화보는 재미가 쏠쏠해진다. 전양자야말로 자기의 분수를 알고 조역을 소화해 낸 ''만능 조연''이며, 영화의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해온 ''전문 배우''가 아닐 수 없다. 전양자 가 60년대에 출연한 영화들을 지금 다시 보면 촌스러운 대목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애정을 가지고 학구적인 자세로 감상한다면 요즘의 기획영화, 짜깁기 영화와는 다른 제작열정과 연기의 앙상블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함께 전양자라는 배우가 60~70년대 한국영화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를 살피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우선 전양자 는 배우의 세대교체에 일익을 했음을 평가할 만하다. 60년대 최은희 , 김지미 , 엄앵란 의 아성에 남정임 , 문희 , 윤정희 트로이카가 도전해 전성기를 누릴 때 등장한 전양자는 데뷔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청춘영화 계열에 합류했다. 청춘스타들이 누비던 젊은 영화에서 그의 역할은 깜찍발랄한 여대생이었다. 당시 ''여대생''은 선망의 대상이었는데다 아담한 체구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귀여운 외모는 스크린에 풋풋함을 불어넣었고 팬들은 이런 그의 모습에 신선감을 느꼈다. 그중 인상에 남는 영화로 68년 이형표 감독이 연출한 <여고동창생>을 꼽을 수 있다. 전양자는 윤정희, 문희, 김창숙 등과 공연해 왈달하고 명랑한 여대생 역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조연은 주연보다 연기폭이 넓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아무나 해낼 수 없다. 주연은 유명세로 한몫하지만 조연은 약방의 감초처럼 적재적소에서 제 빛깔을 내고 주역을 받쳐주어야 하는 이중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양자 의 진가가 발휘된다. 엄앵란 , 남정임 을 잇는 청춘배우에서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개성있는 역할을 소화해낸 것이다. < 눈나리는 밤 >에서는 가련한 여인 조미령 의 딸로, 김효천 감독의 69년작 < 팔도사나이 >에서는 일제에 맞서는 의로운 건달 장동휘 의 여동생 역으로 다양한 변신을 해왔다. 전양자 를 ''연약한 조연''이라던가 ''무난한 배우''라는 점도 재조명되어야 할 과제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는 60년대 겹치기 상황에서 주어진 역할 소화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연기력을 발휘할 기회나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 것이다. 81년 마침내 연기로 승부할 기회를 얻었다. 조세희 의 원작 소설을 이원세 감독이 영화화한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에서 난쟁이 아내 역으로 혼신의 연기를 해낸 것이다. 전양자의 연기는 이 영화를 통해 원숙함을 드러냈다고 할 만하다. 영화에서 신세대 배우로 활약했던 전양자 의 연기는 72~73년 안방의 인기를 독점한 MBC 일일연속극 <새엄마>에서 활짝 핀다. 새엄마가 겪은 일상의 애환을 생활연기로 풀어낸데다 안정감 있는 분위기와 중후한 목소리로 정숙한 여인의 이미지를 구축했다는 평을 얻었다. 드라마 <새엄마>에서는 타이틀 롤이지만 그는 혼자 우뚝 솟기보다는 공연 배우들과의 자연스런 연기 조화로 이웃집 아줌마 같은 푸근함을 자아냈다. 전양자 가 40년 가까이 배우 활동을 해온 장수 비결은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가 나지 않는 연기의 배합과 조화다. 대다수 배우들은 인기를 노려 오버액션을 하거나 튀려고 애쓴다. 그러다보면 일시적인 효과는 거둘지 몰라도 연기자로의 수명은 단축될 수가 있다, 한 작품의 캐릭터가 너무 강하면 다음 작품에서 이미지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전양자는 밖으로 흐트러뜨리는 연기보다는 내적으로 다지는 심도 있는 연기로 인기를 관리해 온 뚝심 있는 배우다, 연이어 여러 드라마에 출연하면서도 시청자가 식상하지 않는 배우로 남는 것은 자신을 숨기고 역할에 충실하는 노력과 끊임없는 창의력으로 변신을 거듭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어느 드라마에서 단역에 가까운 노역을 한 적이 있는데, 분장이 어찌나 추하던지 그 맵시 고운 전양자라고는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또 하나는 건강함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대인관계의 유연성이다, 그에게는 세월이 비켜가는 듯 건강미와 의욕이 넘친다. 사람들끼리 부딪히는 연예계에서도 그의 처신은 둥글고 부드럽다. 여기에 연극무대에서 다진 화술과 단단한 기초가 배우 전양자 의 내일을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왕년의 TV연속극 <아씨>의 악극무대에 서는 것도 식지 않는 열정 때문이리라. 우리는 그간 주역만 조명했지 조역에는 너무 무관심했다. 그 결과 자료조차 변변히 없다. 조역을 재조명하는 이번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가. 그것이 한국영화에 큰 기폭제가 되기를 기대하며 전양자 형의 건투를 빈다. 정중헌 (조선일보 논설위원) / 2003년 <프로필> 1942년 2월 20일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졸업 1966년 이강천 감독의 < 계룡산 >으로 영화 데뷔 <주요 경력> 극단 광장 <학마을>, <수전노>, <무녀도> 등 연극 출연 TV 드라마 <새엄마>, <자매들>, <남자의 계절> 등 다수 <수상 경력> 인기상, 연기상, 연극영화상 등 수상 <주요 작품> 백발백중 , 종점 , 비목 , 낙도의 무지개 , 여고동창생, 빙우 ,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등 다수
훤칠한 키, 잘생긴 외모, 고교시절 배구선수였었다는 그는 운동은 한낮 여기에 불과했을 뿐, 당시 그가 내심 희구했었던 것은 아마도 연극 연출가나 영화감독도 아닌 연극 배우나 영화 배우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한때 충무로 일원에서 몇몇 영화감독들이나 스탭들을 지목해 운운할 때 '응! 아무개 그 사람 본래 영화배우 지망생이었어.' 라고 심심찮게 객담의 화두에 올려 이러쿵저러쿵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 고영남 감독이 아닌 진석모(고영남 감독의 본명) 고교졸업생은 뜻한 바 있어 고향 충청북도 충주군 수안보에서 무성영화 변사의 구성진 나레이션처럼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부푼 마음으로 상경했던 것이었다. 당시 신상옥 , 유현목 , 김기영 등으로 이어지는 기라성 같은 대 선배 감독 군, 다음세대들이 서라벌 예술대학에 입학하여 각기 전문학과를 수학했던 것처럼 고영남 감독 역시 상기 학교 연극 영화과에 등록했단다. 그는 이 학교에서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전환기를 마련해준 연극계의 원로 이광래 교수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필자도 종종 뵌 적이 있는 그분을 바싹 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졌음에도 항상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던 예술가연한 학자였음이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풍부한 젊음의 감성과 번뜩이는 예지로 이광래 교수로부터 희곡론, 연출론 등을 깨우친 고영남 감독은 당시 요즈음 대학로와 같은 연극의 메카 명동에 입성하게 되고, 그곳에서 선배들의 후원으로 입단하기 어려웠던 권위 있는 연극단체 '신협'에 비교적 쉽게 이름을 올린다. 그러나 그가 연극에 깊이 천착하기도 전에 예기치 않은 또 다른 전기가 찾아온다 어느 날 명동과 인접했었던 영화의 메카, 충무로에서 제작부로 일하던 선배가 불쑥 찾아와 다음작품을 기다리며 잠시 쉬고 있던 그에게 함께 영화작업을 해보지 않겠냐고 종용해 온 것이다. 그는 호기심에 기꺼이 응했다. 그때 제작되고 있던 영화는 외국의 저명한 소설을 번안한 멜로드라마 ' 육체의 길 ' 이었다. 당시 충무로에서 흥행감독으로 명성을 떨치던, 조긍하 감독의 야심적이었는데 장안은 물론 전국의 최루파 관객을 울음바다로 몰아 넣었던 이 작품의 라스트 시퀀스 촬영분은 눈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인공이었던 명우, 김승호 가 방황과 질곡의 세월을 보내고 걸인이 되어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그런데 촬영팀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함박눈은 끝내 내려주지 않았다. 촬영팀은 하는 수없이 눈을 만들어 뿌리고 덮을 수밖에 없었다. 전 스탭들이 모두 동원돼 이 작업에 동참했다. 일정한 포지션이 없었던 고영남 도 친구와 함께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고 어두워지자, 스탭들은 모두 식당과 술집으로 흩어졌고, 고영남만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외모와는 달리 충청도 시골출신답게 성실한 모습으로 홀로 작업하고 있던 그의 모습은 곧 조긍하감독의 눈에 띄게 되고, 즉시 즉시 연출부로 발탁되는 행운을 잡는다. 그렇게 제작 완료된 ' 육체의 길 '은 대히트를 하게 되고, 비록 연출부 신출내기로 입문했지만 고영남 의 어깨는 으쓱해졌다. 그 후 그는 권영순 감독에게서 이광수 선생의 '흙' 토지의 작가 박경리 씨의 '표류도' 등 문예작품의 조감독으로 수련을 거듭한다. 그리고 당시, 편집작업을 돕고 있던 김기덕 감독을 만나게 되고, 그의 데뷔작 ' 오인의 해병 ' 출세작 ' 맨발의 청춘 '등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며, 감독수업의 야심을 쌓아 간다. 그 즈음 영화계 배급구조와 흥행판권은 각 지방 업자에 의해 장악되었고 영화제작은 이들의 제작자본에 의존해 제작되던 시기였다. 이 무렵, 고영남 감독은 현 서울극장 대표이며 전국 극장연합회 회장인 곽정환 씨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당시 ' 주유천하 '라는 영화로 흥행에 성공한 곽사장은 현재의 위치와 성공을 예고라도 하듯 놀라운 추진력으로 충무로를 종횡무진했다. 고영남 감독은 곧 그의 눈에 뜨였고, 곽사장은 그에게 파격적인 너무나도 파격적인 임무를 맡긴다. 그에게 대뜸 영화 ' 잃어버린 태양 '을 연출 의뢰한 것이다. 고영남 감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온 정열을 쏟아 자신의 데뷔작을 연출했다. ' 잃어버린 태양 '은 결국 크게 히트했고, 이에 고무된 곽사장과 고영남 감독은 즉시 요즈음 조폭 영화처럼 유행했던 액션 멜로 ' 명동 44번지 '를 제작 연출했고 이 영화는 그해 흥행 1위를 쉽게 탈환해버린다. 이를 계기로 곽사장과 고영남감독은 당시 한국일보 현상공모 장편소설 당선작 ' 잃은 자와 찾은자 ' 강제구 소령의 전기영화 ' 소령, 강제구 ' 등 잇달아 히트작을 양산해낸다. 이때부터 충무로에서 그의 인기와 주가는 초고속 수직 상승했고 이러한 돌발현상은 그에게 미래의 부푼 희망과 감당할 수 없는 질곡을 예고하고 있었다. 충무로 전역 모든 제작자들은 고영남 감독을 연호 했고, 그에게 다투어 메가폰과 거액의 개런티를 맡기었으며, 그는 마치 급류에 휩쓸리듯 겉잡을 수없이 거품인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함몰 되어갔던 것이다. 그가 연출한 108편이라는 엄청난 편수는 대부분 이 시기에 작업한 것이다. 그의 술회에 의하면 그것은 연출이 아니라 작업개념이었다는 것이었다. 영화제작자이기 전에 장사꾼이었던 그들의 무절제한 욕심과 고영남 감독의 자신에 대한 통제능력부재가 그를 그렇게 몰아 세웠던 것이다. 그는 소용돌이에 밀려 지칠 대로 지친 채 1970년대 중반이라는 하구, 어느 둔치에 난파선처럼 표류한다. 그리고 쓰여진 그곳에서 멀리 구비쳐 오는 탁류의 범람을 응시하며 전신을 질타해오는 자괴감에 눈을 지긋이 감는다. 그로부터 2년 동안 고영남 감독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실의와 방황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통음한다. 마치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처럼,,,,,, 그는 다시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긴 오수에 빠져든다. 그때 그의 지친 어깨를 두들기는 손이 있었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영혼이었다. 그의 대표작 ' 설국 ' 고영남 감독,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황폐한 그의 가슴에 ''이즈''의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그는 짧은 영탄과 함께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눈을 들어 고향산야를 돌아보았다. 거기, 멀리 산자락에서 마치 하얀 베일과 같은 소나기가 겹겹이 몰려오고 있었다. 황순원 의 ' 소나기 ' 한국 단편 문학의 백미인 이 작품과 필자와의 만남은 그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전기였다. 고영남 감독과 필자는 나란히 유년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거기엔 개울물과 징검다리와 쪽빛하늘, 갈밭, 들판을 나르는 학과 뚝길이 있었고, 멀리서 소나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과 소년이,,,,,, 이 두 작품을 연출한 것을 계기로 고영남 감독은 긴 슬럼프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활기찬 다른 모습으로 다시 도약한다. 이후 그는 ' 꽃신 ', ' 빙점 ', ' 외인들 ', ' 영원한 관계 ', ' 코리아 커넥션 '등 종전과는 다른 장르를 섭렵한다. 그러나 그에게 나름대로 새로운 의미와 보람을 준 작품은 역시 '소나기'였다. 당시 흥행에선 실패했지만, 최초로 베니스영화제 출품에 시도되었고, TV에서도 해마다 방영이 되어, 오히려 안방극장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해에도 EBS방영 이후 네티즌 사이에 '소나기를 사랑하는 모임'이 생겨날 정도였다. 또한 한국 문학 해외 소개차원으로 아리랑TV로 해외에 방영되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지금 노년의 뜰에 서서 아직도 주체할 수 없는 작품에 대한 의욕과 향수에 가슴 설레고 있다. 마치 개울가에서 조약돌을 주무르며 소녀를 기다리는 작품 속의 소년처럼,,,,,, 아마도 그것은 그의 자연 친화적인 영상에 대한 영원한 노스탤지어 일 것이다.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 / 2003년 <프로필> 1935년 2월 22일 충북 수안보 출생 1964년 < 잃어버린 태양 >으로 데뷔 <주요 경력> 1980 한국영화인협회 부이사장 1988 영화진흥위원회 자문위원 1993 아트시네마 대표 이사 1995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위원 2001 아시아디지털대학 연극영화과 교수 <작품 연보> 1964 잃어버린 태양 / 명동44번지 1965 마지막 정열 / 이세상 끝까지 1966 잃은자와 찾은자 / 소령 강재구 1967 탈선 / 바람 1968 안개낀 초원 / 빙우 1969 결사대작전 / 태양은 늙지 않는다 1970 위험한 관계 / 훼리호를 타라 1971 탈출 / 서북청년단 1972 꽃신 / 비목 1973 독수리전선 / 공수특공대작전 1974 청춘의 문 / 사랑의 나그네 1975 죽어서 말하는 여인 1977 설국 / 십대의 영광 1978 소나기 1979 수제자 1980 빙점81 1981 외인들 / 여자의 방 1982 광염소나타 1983 위험한 향기 1984 영원한 관계 1985 생머리 19살 1986 내가 마지막 본 흥남 1987 밤이 무너질 때 1988 미리마리 우리 두리 1989 제2의 성 1990 매춘2 1991 코리언 커넥션 1992 나의 아내를 슬프게 하는 것들 1993 그림일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