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감독
- 빅터 플레밍
- 제작년도
- 1939
- 출연
- 해티 멕다니엘, 해리 데이븐포트, 레오나 로버츠, 클락 게이블, 비비안 리, 레슬리 하워드, 올리비아 드 해빌랜드, 토마스 미첼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 것도 몰라요 괜히 겁이 나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난 정말 몰라요 들어보긴 했어요 가슴이 떨려 오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난 지금 어려요 열아홉 살인걸요 화장도 할 줄 몰라요 사랑이랑 처음이어요 웬일인지 몰라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떨어져 얘기해요 얼굴이 뜨거워져요 엄마가 화낼 거에요 하지만 듣고 싶네요 사랑이란 그 말이 싫지만은 않네요 - <나는 열아홉살이에요>: 윤시내 노래, 이장희 작곡: < 별들의 고향 >(이장호, 1974)의 주제가 한국영화의 여성상은 참으로 많은 부침을 겪었다. 감히 시대에 앞선 욕망을 추구하는 여자는 처참히 몰락해야 했으며 *주1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7-80년대의 도시에서 순진무구하나 배운 것 없는 소녀는 기필코 사창가로 전락했다. 90년대 이후, 새로운 서사로 한국전쟁을 그려낸 수작들에는 발달장애가 있는 여성들이 단골로 등장한다. 머리에 꽃을 달고 마을을 내달리는 그녀들은 동화 같은 공동체에 폭력이 소개되는 순간, 가장 먼저 죽어야 하는 탄광의 카나리아들이다. *주2 이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여성상은 단연코, 몰락하여 사창가로 들어가는 여성들이다. < 영자의 전성시대 >(김호선, 1975), <별들의 고향>을 필두로 가히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7-80년대의 “호스티스 멜로” 영화들. 한국만큼 순수한 여성의 추락 서사에 집착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비비안 리를 주인공으로 한 < 애수 >(Waterloo Bridge, 마빈 르로이, 1940)가 한국에서만 유독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한국에서 <애수>는 < 벤허 >(윌리엄 와일러, 1959)나 < 아라비아의 로렌스 >(데이빗 린, 1962)만큼이나 “주말의 명화”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러나 정작 영어권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은 한국영화를 연구하는 사람들 외에는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파란 눈의 동료교수들은 유독 한국에서만 주목받은 이 영화가 도대체 어떤 내용이냐고 내게 묻는다. <별들의 고향> 중 거울 앞에서 기도하는 경아 20세기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죄목은 대개 둘 중 하나다. 너무 많이 알거나, 혹은 너무 모르거나. 아는 여성은 많이 아는 죄로 응징을 당하고, 모르는 여성은 배운 것 없는 무식의 죄로 몰락한다. <별들의 고향>에서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엄마가 화낼 거예요”라고 노래하는 천진난만한 경아( 안인숙 )의 죄는 아무것도 모름, 즉 순진함이다. 너무 순진해서 신마저도 그녀를 버린다. 여관으로 끌려가 반 강제적 성관계를 하기 전, 필요한 것은 콘돔과 녹음기, 변호사였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경아는 거울 앞에 서서 기도하는 것으로 이 모두를 대신한다. “저를 행복하게 해 주소서, (이 남자가) 저를 버리지 않게 해주소서”라고 화장실에서 기도한 그녀의 간절함은 어디에도 가 닿지 않았다. 당연하다.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 자신의 잘못이다. 세상은 그 사실을 경아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스스로에게 타락한 여자라는 굴레를 씌우고 죄의식과 수치심의 선악과를 베어 문 여자의 추락은 끝이 없고, 그런 그녀를 놓아두고 세상은 세상의 질서대로 묵묵히 발전해 나갈 뿐이다. < 가여운 것들 >(요르고스 란티모스, 2023)을 보는 내내 윤시내가 청순하고 앳된 목소리로 데뷔 전 부른 <별들의 고향>의 주제가가 내 머릿속에 울려 퍼진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메리 셸리적인 *주3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죽은 모체의 몸에 모체의 태내에 있던 태아의 두뇌를 장착한 벨라(엠마 스톤)는, 두뇌는 아기이나 몸은 성인 여성이다. 경아의 후예로 21세기의 한국에 등장한 베이글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얼굴은 해맑은 어린이이되 몸은 글래머인 성인 여성 -- 베이비와 글래머를 합성한, 어원부터 심상치 않은 포스트휴먼 냄새를 물씬 풍기는 여성상. 걷는 것조차 서툴던 벨라는 외부의 자극에 명민하게 반응하며 구강기-항문기-성기기를 꼭꼭 다지며 (두뇌만) 알차게 성장하여 끝없는 성욕을 가진,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름다운 여성이 된다. 여기까지는 이성애자 남성의 편의대로 주물(鑄物) 할 수 있는 완벽한 대상으로 보인다. <가여운 것들> 포스터 하지만, 그녀에게는 기억과 트라우마가 없다는 반전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맞지만, 그런 무지로 인해 일어나는 각종 사고와 사건들은 그저 재미있는 삶의 경험일 뿐, 벨라에게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주입하지 않는다. 수치심과 죄의식에 태생적 면역을 가지고 있는 벨라의 모습은 유아성욕의 묘사에서 첨예하게 드러난다. 마치 곤충의 다리를 하나씩 절단하며 관찰하는 어린아이의 천진한 호기심처럼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벨라의 성욕은, 최은미의 단편소설 「라라네」(2015, 『목련정전』, 문학과 지성사)에 등장하는 긴머리의 소녀 라라를 닮았다. 최은미의 소설 속 라라는 애정결핍으로 끊임없이 자위행위를 하고, 그의 엄마는 저주에 가까운 말로 겨우 유치원생에 불과한 라라에게 수치심과 죄의식을 주입한다. 그러나 벨라에게는 그렇게 할 엄마도 없다. 그녀를 저지하는 것은 “벨라 백스터”라는 의학적 프로젝트의 성장을 기록하기 위해 고용되었지만 후에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약혼자가 되는 맥스(라미 유세프) 뿐이다. 그는 단호하고 진지하게, 남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것은 예의바르지 못한(not polite) 행동이라고 훈육한다. 벨라에게 사회 속에서의 예의라는 개념은 이렇게 처음 뿌리를 내린다. 자신이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억압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 예의라는 개념으로 배운 셈이다. 이후 벨라의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단죄하지 않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의 극한을 보여준다. 집과 실험실 밖의 세상을 보여주겠다는 뻔한 거짓말로 자신을 유혹하는 던컨(마크 러팔로)의 속마음을 알면서도 벨라는 그의 리스본 여행 제안을 받아들인다. 지능발달로만 보면 엄연히 어린 아이인 그녀와 “성난 점핑(furious jumping)”이라고 명명되는 섹스를 질펀하게 즐기는 이 관계는 그러나 착취로 귀결되지 않는다. 한계치를 벗어나는 그녀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것은 던컨 쪽이며, 무료해진 벨라는 휴식을 취하는 그를 혼자 놓아두고 표표히 외출을 감행한다. 식음료의 냄새와 맛, 도시의 강렬한 비주얼과 소음 등, 오감을 자극하는 세계를 하나씩 맛보며 벨라의 두뇌는 유아기와 소년기의 모든 징후를 짧은 시간 안에 축약적으로 드러내며 성장한다. 바야흐로 청년기를 맞은 그녀의 두뇌는 어느 순간, 성욕을 지식에 대한 욕구로 환원시킨다. 책 읽는 것을 “성난 점핑”보다 좋아하게 된 그녀에게 던컨은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녀의 지식에 대한 갈망은 이미 발사된 로케트처럼 궤도를 착실히 따르며 더 큰 우주로 나갈 뿐이다. 유람선에서 만나 벨라의 짧은 생에 처음으로 친구가 되어 주는 정갈한 매너의 청년 해리(제러드 카마이클)는 그런 그녀의 호기심에 촉매제 역할을 한다. 해리의 손에 이끌려 배에서 내려 난생처음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본 그녀는 연민이라는 감정에 휩싸여 역시 난생처음으로 번민을 맛본다. 유람선의 카지노에서 번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녀의 행위는 세상을 근원적으로 바꿀 수 없는 낭만적이고 어리석은 행위일지언정,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벨라의 철없는 자선행위는 던컨과 그녀를 파산으로 내몰고 둘은 호화 유람선에서 내쫓기고 만다. 어찌어찌 파리에 도달한 두 사람은 자산도 생산수단도 없이 살아남아야 한다. 자본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해야 하는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벨라의 “선택”은 유일한 생산수단인 자신의 몸을 이용하는 것이다. 선택이란 참으로 희한한 단어이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발돋움하는 젊은 여성에게 선택이란 단어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유학을 가거나, 가업을 잇거나, 직장을 갖거나 하는, 동등한 비중의 장단점을 가진 옵션들 중 개인이 자신의 가치관에 맞추어 고르는 것이다. 거리에서 굶어 죽는 것과 매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선택이 아니다. 어떤 자살은 타살이듯, 이미 더러워진 몸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춘밖에 없다는 가스라이팅을 당한 젊은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놓아버리는 결과인 매춘 행위를 “선택”이라고 명명할 수는 없다. 이렇게 사용된 선택이란 단어는 고장 난 시스템에 면죄부를 주고 개인에게는 가장 큰 폭력이 된다. 인권이 부재한 경제개발이라는 한국사회의 고장 난 시스템 안에서, 경아에게도 영자에게도 매춘은 결코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으며 암묵적 합의에 의해 일어나고 방관되는 사회적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벨라는 이 사회적 폭력마저도 스스로 선택한 삶의 실험으로 만들어버린다. 자발적 성매매라는 위험천만하고 논쟁적인 설정은 관객들의 반감을 사기도 하고, 그녀의 실험적 태도를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정사씬이 필요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는 삶의 권태와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발적 성매매자가 되는 벨드쥬르, 세브린느 *주4 처럼 자신의 삶에 대한 멈출 수 없는 벨라의 실존적 갈증이 있다. 이처럼 벨라의 실험은 극한으로 치달으며, 삶은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성노동자 뚜와넷(수지 벰바)의 이끌림으로 사회주의를 접하며 자신의 고민들을 단순한 낭만적 연민 이상의 의식(意識)으로 쌓아나가는 것이다. 휴일을 이용해 사회주의 전당대회에 나가는 그녀들 앞에 런던으로 돌아간 줄 믿었던 던컨이 다시 나타난다. 벨라에게 청혼을 거부당한 던컨이 창녀라고 소리 지르자 뚜와넷은 자신들은 “자립적인 생산수단을 가진 자”라고 친절히 정정해준다. 사실 이 모든 모험의 연대기와 별도로, 벨라는 이미 맥스와 약혼한 사이며 그 사실에 나름 놀랍도록 충실하다. 이미 알고 있는 던컨과의 관계는 물론, 매춘 경험에 대해 담담하고 정직하게 약혼자에게 이야기 하는 벨라를 맥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세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관용을 가진 벨라가 동등한 관용으로 보답 받는 셈이다. 두 사람의 결혼식 장면은 영화의 다른 장면들에 비해 덜 선정적이지만, 주체적 선택권을 가진 여성이라는 벨라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름다운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아버지 갓윈(윌렘 데포)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간 벨라는, 던컨이 데리고 온 처음 보는 남자에게 결혼을 저지당한다. 자신의 육체에 다른 사람(어머니)의 두뇌가 들어있을 때 함께 살던, 일종의 전남편, 알피(크리스토퍼 애봇)다. 솟구치는 호기심 반, 모호한 책임감 반으로, 벨라는 아버지와 약혼자의 만류를 무릅쓰고 알피를 따라간다. <별들의 고향>에서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잃고 상품성을 잃어버린 경아의 존재는 두 남자 사이에서 물건처럼 떠넘겨 지지만(버거우니 당신이 대신 좀 맡아주시오), 벨라는 자신을 추종하는 남성들 사이를 스스로 선택하며 자유롭게 횡단하는 것이다. 더 이상 매춘조차 할 수 없는 경아가 수면제를 먹고 눈밭에서 동사한다는 설정으로, 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의 완전한 파괴로 마감되는 근현대 여성잔혹사 <별들의 고향>과 달리, <가여운 것들>에서 파괴되는 것은 벨라를 착취하려 했던 남성들뿐이다. 희대의 카사노바 던컨은 그녀를 성적으로 착취하려 했지만 그녀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 파괴되고, 할례수술을 통해 벨라를 자신의 자손을 생산하는 자궁으로 축소하려 했던 알피는 염소의 두뇌를 갖게 된다. 인류의 역사 속 너무나 오랫동안 여성상의 두 축을 이루었던 창녀와 어머니라는 전형성은 이렇게 산산조각 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잘못”이라는 가스라이팅에서 살아남은 벨라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즐기고, 도전하고, 성취한다. 세상의 부조리와 자신을 착취하려는 주변인물들을 가뿐히 넘어서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그녀의 비밀은 무엇일까? 죄의식과 수치심이 없는 그녀에게는 맥스에게 교육받은 “예의”와, 해리를 통해 깨닫게 된 세상의 불행에 대한 “연민”이 있다. 맥스는 예의 바른 사람이지만 경계를 넘어선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이 부족하고, 해리는 세계의 모순을 설명하는 일관되고 세련된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세상을 두려워하는 소년”일 뿐이다. 반면 벨라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무모하고 무조건적인 관용을 지닌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과학실험의 대상으로 자신을 탄생시킨 아버지를 용서하게 만들고,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으로 그녀를 성장시킨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지만, 자아와 타자를 아우르는 자유에 이르는 길은 어쩌면 벨라처럼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연민이라는 두 대의 등대를 따라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느긋한 오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칵테일을 마시며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해부학 공부를 하는 벨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의 노래를 다시 부른다면 이런 가사가 나올 것이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 것도 몰라요 괜히 신이 나네요 그런 말 더 해 주세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더 배우고 싶어요 심장이 세게 뛰네요 그런 말 더 해 주세요 난 지금 어려요 열아홉 살인걸요 화장은 필요 없어요 이 모든 게 처음이예요 웬일인지 몰라요 가까이 와 주세요 더 만지며 얘기해요 온몸이 뜨거워져요 엄마는 죽고 없어요 뭐든지 알고 싶어요 사랑이란 그 말도 가끔은 재미지네요 <별들의 고향> 중 경아와 <가여운 것들> 중 벨라 다시 경아의 세상으로 돌아가보자. 벨라가 경아처럼 대한민국의 70년대를 살아갔다면 어떨까? 일찌감치 데이트 살해를 당해 세상에서 사라지는 위험만 넘어설 수 있다면 경계가 없는 꿈을 꾸는 큰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 아니다. 정신병동에 감금되거나 감옥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경우의 수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는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잘못이라고 끝없이 세뇌했을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벨라를 산산이 부수어 뜨리는 것으로 응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벨라의 존재는 그레이의 소설과 란티모스의 영화 속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터무니없는 꿈이고 동화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이미지는, 언어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현상(現象 phenomonon)일 뿐이다. 벨라의 말처럼,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하기 전까지 지구는 평평했고, 전기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상은 어두웠다. “그것이 다다르기 전까지 세상은 그 이전의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녀의 언어는 도발이 아닌 혁명이다. 주1. < 하녀 >(김기영, 1960), < 자유부인 >(한형모, 1956)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주2. < 그 섬에 가고싶다 >(박광수, 1993), < 웰컴 투 동막골 >(박광현, 2005)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주3. 최초의 SF작가로 인정받는 영국의 여성 작가. <가여운 것들>은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여성주의적 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프랑켄슈타인』의 설정과 제재는 물론, 작가인 메리 셸리의 삶의 궤적까지도 <가여운 것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메리 셸리의 결혼 전 성(姓)은 메리 갓윈 Godwin이다. 갓윈은 영화 속에서 벨라 아버지의 이름(first name)으로 차용 되고, 벨라는 그를 갓(God)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실제로 당대의 진보적 정치사상가였던 메리의 아버지 윌리암 갓윈은 일찌감치 어머니를 여읜 딸에게 당시 여성으로 받기 힘든 양질의 교육을 선사했다. 교육을 위해 딸을 급진주의 사상가 친구 집에 보내기도 하는데, 그 친구의 성(姓)이 영화 속 벨라의 성(姓)인 백스터(Baxter)이다. 메리는 백스터의 집에서 그의 네 딸들과 자매처럼 지내며 작가로서의 감수성을 발전시킨다. 메리 갓윈은 이후 아버지의 사상을 추종하는 유부남 퍼시 셸리와 사랑에 빠진다. 벨라처럼 도주하여 퍼시와의 유럽여행을 감행하는 메리 갓윈은 퍼시의 아내가 죽은 후 그와 결혼하여 마침내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메리 셸리가 된다.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던 메리 셸리의 삶을 영화 속에서 찾아내는 것도 <가여운 것들>을 보는 큰 재미다. 주4. < 벨드쥬르(세브린느) >(Belle de Jour, 루이스 부뉴엘, 1967). 사랑하는 의사남편과 유복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세브린느는 완벽해 보이는 삶에도 불구하고 공허감을 이기지 못한다.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고급 요정에서 남편의 근무시간인 낮에만 성매매를 하는 세브린느에게 마담은 벨드쥬르라는 애칭을 부여한다. 조세프 케셀의 동명 소설(Belle de Jour)을 원작으로 한, 논쟁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여성 주인공의 시선으로 이어지는 몽환적 서사와 부뉴엘 감독 특유의 아이러니와 검은 유머가 가득한 역작이다. 김진아 (UCLA 영화과 교수, 감독) l < 그 집앞 >(2003), < 두번째 사랑 >(2007), < 파이널 레시피 >(2013) 등 다섯 편의 장편영화와, 미군위안부3부작 < 동두천 >(2017), < 소요산 >(2021), < 아메리칸 타운 >(2023) 등을 연출. 미국 UCLA대학 교수로 시각예술의 재현 윤리, 초국가적 영화론을 가르치고 연구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흔히 ‘망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말 전설적인 망작이 되어 오래도록 ‘제일 망한 영화’ 리스트에 오르내리는 방법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컬트로 재정의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시에는 망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그 ‘망했다’라고 평가되는 지점이 후대에는 묘한 매력이 되어 이를 즐기는 팬들에게 숭앙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할리우드 영화 역사에서 < 인천(오! 인천) >(테렌스 영, 1981, 이하 <오! 인천>)은 전자에 해당하는 영화이다. 천문학적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개봉 이후 비평계와 대중 양쪽 모두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했고, 제3회 골든 라즈베리상 최악의 작품상을 수상하며 그 명성에 정점을 찍었다(최악의 작품상 외에도 최악의 남우주연상, 최악의 감독상, 최악의 각본상 등 4관왕에 올라 모름지기 당해 연도 최악의 영화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고 이 글을 통해 섣불리 <오! 인천>을 컬트로서 재평가하려 하거나, 혹은 그럼에도 영화팬들에게 감히 시간을 들여 한 번 즈음 볼 만하다고 추천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피할 수 있는 것은 그냥 피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는 오직 <오! 인천>을 둘러싼 외부적인 기록들, 그리고 여기에 참여했던 한국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영화로 기록된 이 작품이 한국영화계에 몰고 온 변화와 그것이 이후 한국영화들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도 역대급의 제작 규모 처음 <오! 인천>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는 1978년 3월 신문기사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남궁원 , 윤미라 *주 1 등 20여 명의 배우가 출연하고, 미국의 원웨이프로덕션과 일본의 동보영화사가 제작에 참여하며 각본은 <그린베레>(존 웨인, 레이 켈로그, 1968), < 프렌치 커넥션 >(윌리엄 프리드킨, 1971)의 원작자인 로빈 무어와 폴 사베지가, 감독은 < 서부로 가는 길 >(앤드류 V. 맥라글렌, 1967), <철인들>(앤드류 V. 맥라글렌, 1969)과 같은 서부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앤드류 V. 맥라글렌이 담당하기로 했다. 그렇게 5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는 영화는 그러나, 5월이 한참 지나도록 촬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7월이 되자 이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왔다. 기술협조를 하기로 한 일본의 동보영화사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든가, 시나리오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는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촬영 개시를 지연시킨 가장 큰 문제는 시나리오였다. 당시 각색을 담당했던 로빈 무어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 대해 “2시간 안에 담아내기에 너무 방대한 이야기였다. … 등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결국 다른 작가들이 투입되었다”라고 이야기했다. *주2 결국 1978년 5월에 촬영에 들어간다던 영화는 무려 1년을 더 기다려 1979년 5월, 새로 영입한 감독이 한국을 방문하며 다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교체된 감독이 무려 테렌스 영이었다. 테렌스 영은 국내에서 ‘007 시리즈’로 명성이 나 있는 감독이었다. 한국에서는 1965년에 < 007 제2탄 - 위기일발 >(테렌스 영, 1963)이 007 시리즈 가운데 가장 먼저 개봉했다. 실제 007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이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트렌드에 민감한 수입업자들은 서둘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 007 살인번호 >(테렌스 영, 1962)를 수입해 개봉했을 정도였다. 테렌스 영이 감독한 마지막 007 시리즈 < 007 썬더볼작전 >(테렌스 영, 1965)이 국내에 개봉하고도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테렌스 영은 여전히 국내에 다수의 팬을 거느리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영화 촬영을 위해 방한한 테렌스 영 감독이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6.25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 한국이 공산당에 침략당했다는 것을 세계 모든 나라에 알리게 될 것(《경향신문》 1979.5.5)”이라는 발언을 한 이후, 북한에서 《로동신문》의 논평을 통해 이 영화가 “악랄하게 중상모독, 헐뜯는 반동 내용(《경향신문》 1979.5.16)”이라고 비난하며 제작 중지를 요구해왔다. ‘테렌스 영’이라는 스타 감독의 참여에 더해 친한(親韓)적인 그의 발언,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이르기까지 확실하게 화제성을 확보하면서 <오! 인천>에 대한 기대는 더욱 높아졌다. 뒤이어 해외 출연진도 속속 명단이 발표됨과 동시에 배우들이 한국에 도착했다. 물론 제일 관심을 끄는 것은 과연 누가 ‘맥아더 장군’의 역할을 맡을 것이냐였다. 놀랍게도 그 역은 영국의 영화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돌아갔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 햄릿 >(로렌스 올리비에, 1948), < 헨리 5세 >(로렌스 올리비에, 1944), < 리차드 3세 >(로렌스 올리비에, 1955) 등 셰익스피어 작품을 기반으로 한 영화의 주연을 맡아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배우이고, 1947년에는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기사 작위를 수여받기도 했으며(국내 신문기사에서도 로렌스 올리비에를 지칭할 때는 꼭 올리비에 ‘경’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빅터 플레밍, 1939)와 < 애수 >(마빈 르로이, 1940),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엘리아 카잔, 1951) 등의 작품으로 국내 많은 팬을 가지고 있었던 비비안 리의 연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그가 ‘맥아더 장군’의 이미지에 잘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로렌스 올리비에’가 그 역을 맡는다는 것 자체로 이 영화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자, 미국에서 공수해온 장비와 동원된 스태프, 엑스트라의 스케일이 또 한 번 한국 측 스태프들과 언론, 촬영현장을 구경하러 온 시민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당시 촬영 현장의 분위기와 이 영화의 규모는 이를 상세히 설명한 신문 기사와 구술에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6.25 당시 피난민들의 행렬을 재현한 촬영 현장(《동아일보》 1979.9.5) 테렌스 영 감독을 비롯해서 로런스 올리비에 경, 재클린 비세트, 벤 가자라 등 세계 정상의 배우들이 우리나라에 몰려와 촬영 중인 영화 <오! 인천>은 스태프 캐스트 못잖게 엄청난 물량 작전으로 계속 화제를 뿌리고 있다. … 현역미군 등 5백명의 엑스트러와 탱크 4대, 장갑차 2대 등이 출연한 서울탈환 장면은 당시 서울 거리와 가장 비슷한 인천 신포동에서 2시간 가량 진행됐다. … 지난 6월 28일 촬영을 시작한 영화 <오! 인천>은 용인 민속촌을 비롯하여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강원도 횡성비행장, 경북 왜관, 인천, 서울 등을 돌며 제작됐다. 이중 6.25 당시 낙동강 철교 폭파를 재현한 촬영에는 피난민 차림의 엑스트러 1천 3백명, F86 등 전투기와 탱크들이 동원돼 13일 동안 6대의 카메라에 담았다. *주3 인천에서도 폐기된 수인간(水仁間) 미니열차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고 영흥도에 3천만원을 들여 등대를 세우기도 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모습은 인천 제2부두에서 촬영됐는데, 군함 12척과 상선 10여척이 동원돼 장관을 이뤘다고. … 이 영화는 당초 1천8백만 달러(90억원)의 제작비가 계상되었으나 제작기간의 지연 등으로 이미 3천5백만 달러(1백75억원)가 투입됐단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물량이 동원된 이 작품에는 6명의 주연급 배우(남궁원 포함)와 테렌스 영 감독이 쓸 캠핑카 8대, 토일렛카, 링컨 컨티넨털 승용차, 지프 2대가 미국에서 운반됐다. 캠핑카는 침대와 화장실, 식당과 에어컨 장치가 돼 있어 촬영현장에서 주연 배우들이 쓸 수 있도록 했다. 또 높이 10m까지 올라가는 크레인 카도 제작자인 이탈리아인 기사가 직접 가져와 운전하기도. 이밖에 진행을 위해 1백30대의 차량이 국내에서 동원되고 영화에 등장할 40년대식 승용차 6대,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에 쓰던 차와 동형의 크라이슬러, 그리고 탱크, 장갑차, 소제(蘇製) 무기 등이 미국에서 옮겨져왔다. 칠순의 로런스 올리비에 경을 비롯해서 재클린 비세트, 벤 가자라, 데이비드 젠슨(TV영화 <도망자> 주연), 리처드 라운트리,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 등 세계적인 배우를 포함, 한국인 1백명, 미국인 50명, 영국인 30명, 이탈리아인 30명, 일본인 30명 등 스태프가 참가한 이 영화는 인적 구성에서도 국제적인 성격을 짙게 띠고 있다. - “<오! 인천> 로케 한창, 엄청난 물량작전 한국동란 재현(《경향신문》 1979.9.14.) ” 그때 내가 <오! 인천>을 보고, 카메라가 아홉 대가 다 뭐냐하면, 다 파나비전 카메라예요. 아리플렉스가 아니라. 미국에서 원 파나비전 카메라, 제일 좋은 카메라예요! ( 구중모 , 2015, 212쪽) *주4 그때 하얏트 호텔 2층 일체를 썼죠. 그때 뭐 복사하는 데도 있었고, 뭐 신기하게 여겼죠. … 우선, 이 장비가, 장비가 많아, 양이.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없는 현대적인 장비. 특히 낮에 라이트를 킨다는 게, 이건 못 보던 거거든. ( 김호길 , 2016, 116쪽) *주5 그때 150대의 차가, 그러니까 자동차 배차하는 거 있잖아요? 배차요원을 홍콩에서 데려왔어요. 현장에서 차 관리하는 애가 스무 명. 또 뭐 관리하는, 여하튼 식당이 있잖아요? 식당이 두 팀. 얼마나 웃기냐면요,하얏트 호텔에서부터 문산까지 온다고 생각하면, 시내는 500미터, 긴 거리는 1키로마다 깃발을 꽂아놔요. 잊어먹을까봐. 한 팀이라도 늦게 나오면 안되잖아요. … 엄청난 돈이에요. 은행 차가 쫓아, 현장에서 줘. 은행 차가 다녔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럼 스태프들한테 시간 당 현찰로 줘버려요, 엄청난 돈을. ( 박광남 , 2023, 112~113쪽) *주6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서 촬영된 다리 폭파 장면의 촬영 현장 (박광남 기증 자료) 중앙청 앞에서 진행된 서울 탈환 장면 촬영 현장 (박광남 기증 자료) 통일교, 그리고 영화에 쏟아진 혹평들 특히, 당시 <오! 인천>에 참여했던 국내 스태프들은 구술에서 공통적으로 외국에서 온 스태프들이 하얏트 호텔의 한 층을 통째로 빌려 사용했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서울 하얏트 호텔은 이 영화가 촬영되기 1년 전인 1978년 7월에 개장한 5성급의 미국 체인 브랜드 호텔이었다. 평소 한국영화 촬영을 다닐 때 “5천원짜리 여관방에서 댓 명이 한 방을 쓰는” *주7 환경에 익숙해져 있던 충무로 스태프들에게 최신식 시설이 갖춰진 호텔을 촬영 기지로 쓴다는 것은 꽤나 인상 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촬영을 끝낸 촬영팀에게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촬영팀의 출국을 앞두고, 하얏트 호텔의 숙박비 22,327,000원을 지불하지 못해 촬영 기자재 등의 유체동산에 대한 가압류 처분이 내려졌다. 당시 물가를 생각했을 때, 2천여만 원이라는 금액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지만 몇 백억의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에서, 외국인 출연자들의 주급을 매주 헬리콥터로 실어나르고, 스태프들의 일당 지급에 은행차까지 동원해가며 그때 그때 현찰로 지급하는 등 제작비를 쓰는 데에 아낌이 없던 영화 제작사가 호텔 숙박비를 내지 못해 가압류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자금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며칠 뒤 제작사와 호텔 측이 합의에 도달하며 가압류 기간이 연기되었다는 짧은 기사로 이 사건은 정리가 되었고, 촬영팀도 무사히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 인천>를 둘러싼 구설들은 끊이지 않았다. 먼저 한국 체류 당시 테렌스 영의 손목시계와 필름 1,345피트(당시 시가로 350만원 상당)를 도난맞은 사실이 뒤늦게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그러나 끝내 범인도 잃어버린 물건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1980년에 이미 모든 촬영을 다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개봉과 관련하여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다가, 1981년 2월에는 이성구 감독이 재편집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런 소문이 돌고 있는 와중에 5월에는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미국의 상류층 인사들을 모아놓고 <오! 인천>의 비공개 시사회를 개최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런데 시사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케네디센터 주위에서 통일교에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며, 영화에 대한 가타부타 평가는 없이 모든 관심이 ‘통일교’에만 쏠려버렸다. 비슷한 시기 국내에서도 <오! 인천>을 둘러싼 아주 미스터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81년 8월 4일 용산구 원효로에 살던, 일명 ‘원효로 보살’로도 알려진 70대 노파가 그녀의 양녀⋅가정부와 함께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평소 유명 정치인들의 점을 봐주거나 복을 빌어주며 고위층과 인맥을 형성한 바 있고, 이를 통해 큰 부를 쌓았던 윤 노파가 살해당한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윤 노파의 <오! 인천>에 대한 투자 여부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주8 이렇게 <오! 인천>에 대한 관심은 작품 자체에 대한 흥미보다는 자꾸 그 주변부로 옮겨가고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 관심이 이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개봉해서 흥행만 잘 된다면 이까짓 구설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대중에 영화가 공개된 것은 프랑스 칸에서였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제작사 측은 칸국제영화제에서 “25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영화 제목이 새겨진 키트 등을 나눠주고 16일 시사회가 끝난 후 호화파티를 열었는데 구매희망자가 나타나지 않았다(《조선일보》 1982.5.19)”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신문 기사는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외면당한 원인을 통일교와 연관 짓고 있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영화의 완성도 문제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영화는 해외 영화시장에서 전혀 판매되지 않았고, 1982년 9월 17일 미국 내 상영만이 힘겹게 성사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혹평 일색이었다. 급기야 통일교 측에서는 영화제작팀 이름으로 《뉴욕타임즈》,《워싱턴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LA타임즈》, 《뉴스 월드 인 뉴욕》, 《워싱턴타임즈》 등 6개 일간지 전면광고를 통해 “미국 기자와 평론가들이 <인천> 영화 자체의 가치는 평가하지 않고 이 영화의 특별후원자로서 문선명 목사의 이름만 강조하고 있는 데 대해 서글픔을 느낀다”라며 “영화 <인천>의 예술적 가치를 객관적 입장에서 냉정히 평가해줄 것을 미국 국민들에게 촉구(《동아일보》 1982.10.5)”했다. 그러나 영화 <오! 인천>의 흥행 실패를 통일교와의 연관성에서만 찾는 것은 오히려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럼 처음 제작 때부터 그토록 큰 대중적 관심을 끌어모았던 <오! 인천>은 왜 한국에서 상영되지 못했던 것일까? <벤허>보다 (제작비가) 더 많이 들었다고 그랬어, 그 작품이, <오! 인천>. 근데 한국에서 상영 못한 거는 뭐냐 하면 너무 북한을 우상화 시켰다는 거야, 영화를. 그래서 안된 거예요. (구중모, 2015, 216쪽) 영화가 안 되는 이유는 … 정치적인 거예요, 그게. 국방부에서 3일 공연을 했어요, 국방부에서만. 그래 그 시대에 그거야, 이북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공연 못하게 한 거예요. 그거 잘했으면 문선명이 자기 일대기를 하겠다고 그랬다고. … 다 영화제작사에서 잘못한 거야. 일개 장교가 비행기 타고, 한국에 들어올 때 이승만 대통령 등때기 탕탕치고 하는데, 그렇게 푸대접을 하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은 사실 아니거든. 한국의 국익이 상하지. 그래서 나라에서 공연 못하게 했는데. 미국에서도 안 됐어. 전혀 안 됐어요. 한 일주일 하고 문 닫았어. (박광남, 2023, 154쪽) <오! 인천> 제작 당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던 박광남은 이 영화가 국방부 내에서 시사회가 이루어진 이후, 한국에서의 영화 상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만약 그의 기억이 맞다면 이 영화를 본 국방부 관계자들은 북한에 대한 미화는 둘째 치고, 일부 장면에서는 적군보다 더 나빠 보이는 데다가 *주9 전쟁 장면 내내 인민군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민중들보다도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한국군의 모습을 더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영화 속에 드러난 한국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나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고증 실패를 모두 눈 감아 준다고 하더라도 앞서 이야기했던 구설들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쌓인 영화를 국내에서 상영하겠다고 나서는 업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무려 4,6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 대작 영화는 조용히 사라졌다(IMDb 기준, 이 영화를 통해 벌어들인 총수익은 520만 달러에 불과하다. 이중 오프닝 수익이 230만 달러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여기서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같은 해 1천만 달러를 들여 제작한 영화 < 이티 >(스티븐 스필버그, 1982)는 미국 내에서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8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한국영화계에 <오! 인천>이 남긴 것들 하나의 작품으로서 <오! 인천>이 가진 수명은 여기에서 끝이 났지만, 한국영화계에서 이 영화는 또 다른 방향으로 계속해서 그 영향력을 이어갔다. 먼저 당시 <오! 인천>에 참여하면서 충무로 스태프들은 소품⋅의상⋅특수효과 등에 쓰일 재료들을 한 곳에 모아놓을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오! 인천> 촬영 이후 생긴 촬영 소품과 재료들을 같이 관리할 곳이 필요했다. 그때 <오! 인천>에서 재료를 내가 많이 받았거든. 그걸 그냥 활용했으니까. …<오! 인천>이란 영화, 그거 끝나고 인저 삼우회를 결성해가지고, 의상⋅효과⋅소품 해가지고 뚝섬에 큰 창고 건물을 직접 얻어 가지고 그걸 나눠서 썼는데, 1980년도에 큰 화재가 나면서… (김호길, 2016, 103쪽) 그때 어디냐면 뚝섬. 거기 우리 불났어. (웃음) 완전히 탔어. 의상도 완전히 타버리고. 의상하고 우리하고 창고를 하나로 같이 있었거든. 그때 <오! 인천>에 갖다 놓은 물건도 있었구나. 거기 사다리 같은 거, 그 좋은 것들이 몽창 다 탔어. 무기도 몽창 타고. 화약은 거기 안 뒀거든. (박광남, 2023, 127쪽) 구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창고에 화재가 발생해 많은 촬영 소품과 의상, 효과 재료들이 소실되기는 했지만, 당시 충무로 인력들이 <오! 인천>에 참여하며 배웠던 것들이 함께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이후 한국의 전쟁영화,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나 규모가 큰 영화를 촬영할 때 자신이 배웠던 것들을 최대한 살려 활약했다. 이게 촌길에 철조망이 깔려 있으니까 우체부가 자전거 끌고는 못 가는 거야. *주10 “책임지겠습니다. 지나가세요.” 그랬지. 그게 뭐냐 하면은 가짜 철조망이거든. 제가 만든 거예요. 그게 79년도 <오! 인천>이라는 영화 때문에, 거기서 그걸 배운 거야. 이렇게 해서 만드는구나. … <프로페셔날>인가? 전쟁터 나오는 장면에서 라스트가 막 가다가 철조망에 걸려 죽는 게 있어요. ‘야, 저거 되게 아팠겄다. 이렇게 어떻게 했을까’ 했는데, 바로 그런 거야. 그래 인제 79년도 <오! 인천> 영화를 하면서 배운 게 많았고. (김호길, 2016, 133~134쪽) 상륙작전 하는데, 카메라 아홉 대가 필요한 거예요. 거기서 그런데, 헌팅을 가서 어떻게 했냐면, 봐요. 거기서 뭘 배웠냐? 카메라 아홉 대를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거를 하루종일 하는 거야. A카메라 이렇게 부감대로 놓고, B카메라 하나, 둘 막 바꿔놓는데, 한국사람 같으면 그걸 연출을 못해. … 한국에서 만약에 이걸 동시녹음을 하게 되면 한 달은 더 찍어야 돼. 그런데 하루에 딱 끝나는 거야, 그날에. 예행하고 정식촬영할 땐 하루에 다 끝나더라고. 또 중요한 게 뭐냐, 폭탄이 터지는데 걔들은 각도를 다 살려놔요, 터지는 각도. 한국 특수효과들은 그걸 다 배우는 거예요, 거기서. 그러면 거기서 폭탄이 터지는 순간에 여기 카메라가 안 보일 거 아니냐고, 응? *주11 고런 머리를 다 써놨어요. 그러니 아홉 대라는 게 말이 쉽지 이걸 연출자가 계산을 할 정도면. (구중모, 2015, 212~213쪽) < 용가리 > 할 때 몸에 폭탄을 터트려야 하는데, 실제 화약이 안 좋아서 막 불이 붙기도 하고 그랬어요. *주12 <오! 인천> 할 때 보니까 미국사람이 완벽하게 하는 거, 미국사람들이 와서 터득을 했어요. 터득하면서 저는 저 나름대로 그거를 다시 응용을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많이 습득을 했죠. … <오! 인천>이란 영화, 외국사람 특수작업 같이 했기 때문에 많이 배웠고, 저희도 많이 응용했고. 저 나름대로도 그 사람들 기술 플러스 우리 기술을 어느 정도 포함시켜서 더 좋게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보기도 하거든요. ( 이문걸 , 2006, 40쪽) 그러나 이들의 구술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들이 약 20여 년(구술 시기에 따라 길게는 40년)이 흐른 뒤에도 <오! 인천> 촬영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에야 많은 한국의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그 안에서 함께 작업을 하거나 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1979년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오늘날 블록버스터 급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스케일의 영화에 참여하며, 할리우드의 기술과 시스템을 직접 경험했다는 것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그들만의 경력이다. 그리고 이때 참여한 스태프들이 모두 <오! 인천> 이후 더 많은 한국영화 촬영현장에 불려 다니며 1980~1990년대 내내 활동했다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저희가 <오! 인천>에서 영화발전에, 특수효과에 많이 발전시켰다고 자부합니다.(12쪽) … 한국영화계가 <오! 인천>이라는 거를 하기 위해서 차량이라든가 기동력이라든지 이런 거를 많이 배웠어요. 어떻게 보면 영화는 상영되지 못해도, 영화 개념적으로 많이, 영화 바뀐 것이, 제작자 바뀐 것이 <오! 인천>이지 않았나.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문걸, 2006, 21쪽) ※ 인용 구술 (인용된 페이지는 각 구술 뒤에 표기) 심혜경, 『2006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이문걸 편[특수효과⋅소품⋅미술]』, 한국영상자료원, 2006. 배수경, 『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김정란⋅이남기⋅구중모 』, 한국영상자료원, 2015. 이정아, 『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호길 』, 한국영상자료원, 2016. 남기웅,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박광남』, 한국영상자료원, 2023. *** 주1. 윤미라는 후에 출연을 거부했다. 그리고 윤미라가 연기하기로 했던 배역은 리디아 레이(Lydia Lei)에게 돌아갔다. 이 영화에 참여했던 배우 남궁원의 구술에 따르면 당시 한국 측 출연 배우들은 직접 테렌스 영을 만나 오디션 비슷한 것을 봤는데, 이때 배역에 맞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까다로운 조건들을 제시했다고 한다. 주2. “<Inchon> Trivia”, IMDb, < https://www.imdb.com/title/tt0084132/trivia/?ref_=tt_trv_trv >. 주3. 신문 기사에서 상술한 장면은 경북 왜관에서 촬영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때 해당 장면은 1950년 6월 28일에 있었던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을 다룬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술자들 역시 기억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 장면을 ‘한강 다리 폭파’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촬영기사로 참여했던 구중모의 구술에서는 테렌스 영이 원래 이 장면 촬영을 위해 실제 제3한강교를 폭파시키고 싶어했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 있는 다리를 폭파시킨 뒤 촬영했다고 말했다. (배수경,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 2권 김정란 이남기 구중모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5, 215~216쪽.) 주4. 구술자 구중모 는 <빨간 마스크의 여인>(김인수, 1971)을 통해 데뷔하여 <티켓>(임권택, 1986), <결혼이야기>(김의석, 1992) 등의 영화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하였으며, 1986년에는 <씨받이>(임권택)로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15년 <합작영화> 주제사를 통해 <오! 인천>에서 한국 측 촬영팀으로 참여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주5. 구술자 김호길 은 1960년대 연출부로 영화계 입문하여, 1968년 임권택 감독의 <몽녀>를 시작으로 한국영화에서 소품 담당 스태프로 일했다. <오! 인천>에서도 소품 스태프로 참여했다. 주6. 구술자 박광남 은 1950년대 후반 영화계에 입문, 1960년대 본격적으로 특수효과 스태프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80년대부터는 CF, TV드라마, 연극,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특수효과 전문가로 활약했다. <오! 인천>에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다. 주7. 이정하,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호길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6, 73쪽. 주8. 사건의 내용이 다소 복잡한데, 당시 재판을 받던 피의자가 경찰에 의한 강압적인 수사와 고문이 있었으며, 자신의 자백은 모두 이 고문으로 인한 것이었다며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피의자의 결백에 대한 근거로 피해자의 사망시각이 중요한 쟁점이 되었는데,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찰이 주장하는 사망시각에 피해자가 <오! 인천>의 한국 제작총괄이었던 박경도와 원웨이프로덕션의 대표 이시이 미츠하리를 만났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피의자 측에서는 윤 노파가 <오! 인천> 제작에 20억의 거액을 투자했고, 이를 통해 한국 측 상영권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원웨이프로덕션 측에서 증인으로 나왔던 박경도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부정하며, 그들이 윤 노파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단지 ‘영화가 검열을 무사히 통과하고, 흥행이 될 수 있도록 불공을 부탁드리고자’ 했으나, 약속한 날 윤 노파는 나오지 않아 만나지 못한 채 이시이 씨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주9.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인도교 폭파 장면이다. 미군 장교의 부인이 자신의 차량 안에 한국인 어린이와 소녀들을 가득 태우고 다리를 빠져나가는 도중, 미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다리를 폭파시킨다. 끊어진 다리 끝에 걸린 차량 안에서 모두 무사히 구출되기는 하지만, 이것도 주위 피난민과 미군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주10. 영화 <뽕>(이두용, 1985)을 촬영할 당시 뽕밭에 친 철조망을 보고 마침 촬영장 쪽을 지나가던 우체부가 자전거를 멈추고 섰다는 의미이다. 주11. 어떤 각도에서 폭탄이 터져도 9대의 카메라 중 어느 카메라에도 다른 카메라가 잡히지 않도록 구도를 잘 맞춰놓았다는 의미이다. 주12.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촬영 당시 사람의 몸에 작은 화약을 넣고 터트려 총에 맞는 듯한 효과를 내야 했는데, 그 기술이 부족해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대괴수 용가리> 촬영 때는 일본의 특수효과 기술자들을 초대해 함께 작업을 했었는데, 본문과 이어지는 구술에서 일본 특수효과 기술자들도 ‘미니어쳐’ 전문가들이라 당시에는 작은 화약을 활용한 특효 기술을 잘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구술자 이문걸 은 박광남과 함께 <오! 인천>에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다.
1961년 5월 당시 [국제영화]는 손미희자 , 전계현 , 남미리 , 문혜란 , 엄앵란 , 나애심 , 이빈화 등의 당대의 여배우들의 그래머 채점표에서 이빈화를 단연 선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의상을 새로 맞출 때는 언제나 같은 상점을 이용하는지,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맡기는지, 누구를 사귀기 좋아하는지, 입었던 옷을 새 옷이나 유행하는 의상으로 바꾸어 입었을 때 기분이 어떤지, 향수나 의상의 색깔 등에 대한 질문으로 채워지고 있는 이 설문지는 당시 이 여배우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답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50년대를 지나 60년대에 접어들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여배우를 바라보던 하나의 시선을 상기시킨다.BB(브리짓드 바르도), MM(마릴린 먼로), CC(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등의 이름을 붙이던 시대에 매력적인 여배우로서 미에 대한 관심도를 테스트해보는 이 설문지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여 자기자신을 잘 적응시키는 것과 함께 자기를 감추거나 죽이지 않는 자신감과 자주성을 잃지 않는 사교성의 요구와 풍부한 감정의 소유자인가를 강조함으로써 이전까지의 전통적 여성상과는 분명히 선을 긋는 새로운 여성상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당신처럼 키 큰 여자들이 많은가요?' 1961년 일본에서 그곳에 촬영온 이브 몽땅이 던진 질문에 한국에서는 키가 커서 언제나 곤란을 느낀다고 털어놓을 만큼 이빈화는 당시 한국 여배우치고는 상대적으로 큰 키에다, 신체 사이즈를 자신 있게 밝힐만큼 균형잡힌 체형을 갖추고 있어, 때로는 지나 롤로브리지다에, 때로는 소피아 로렌에 비유되기도 했다. ''B.B. 붐의 시대'', 즉 신체사이즈로 배우를 설명하는 ''육체의 시대''에 이제 모두들 여배우의 몸에 주목하면서 신체 사이즈에 따라 그들을 분류했다. 수영복을 입은 여배우들이 등장하는 해수욕장 장면이 자주 나와 관객의 눈길을 끈 것도 이 즈음부터였다. 1934년 서울 돈암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이숙한(李淑翰)으로 알려져 있는(국제영화 58년 4월) 이빈화 는 여학교 시절부터 무용과 음악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으며 국악원 고전무용연구소에 적을 두기로 한다. 이 곳에서 받은 3년간의 수련은 그녀에게 우아하고 세련된 멋스러움을 갖추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까지도 선사했다. 1952년 부산 피난 시절, 이빈화는 윤봉춘 감독의 징병을 설득하는 < 성불사 >에서 승무를 추는 여주인공 역을 맡으면서 스크린에 데뷔한다. 그녀가 우아하게 춤을 추는 모습은 ''갑분이는 팔자 좋아''하는 노래에 맞춰 동네 처녀들과 춤을 추는 오영진 원작의 < 맹진사댁 경사 >( 이용민 감독,196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보다 가문과 체면을 중시하는 얼치기 양반들을 풍자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버리자니 대감댁이요, 주자니 무남독녀''라서 혼인날 자기 대신 입분이를 절뚝발이로 소문난 판사댁 자제에게 보내고 나중에 진실을 알고 발을 동동 구르는 갑분이역을 맡았다. 따라서 당시 잡지의 글들은 동양무용 서양무용에 조예가 깊은 이빈화와, < 양산도 >로 데뷔한 김삼화 를 호적수로서 ''다같이 무용계에서 진출한 스타일 좋은 내일의 스타요, 앞길이 양양한 젊은이''로서 소개한다. ''1950년도 한국영화계에서 얻은 가장 보람된 일 중의 하나가 신인 이빈화 양의 등장''이라고 소개되던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일련의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1956년작 < 청춘쌍곡선 >에서 요염한 자태와 실감나는 연기로 영화와 다시 인연을 맺은 이빈화는 과식으로 병이 난 부자 양훈 과 가난한 학교교원으로 그와 정반대의 병으로 괴로움에 처해있는 황해 가 한 의사의 권고를 듣고 2주일간 서로 집을 바꾸게 되는 이 희극에서 양훈의 여동생으로 출연하여 황해와 짝을 이룬다. 이 영화에서 성적으로 자유롭고 분방한 부자의 딸을 연기하여 호평을 받은 그녀는 뒤이어 한 감독의 작품 < 마인 >(1957)에서도 무리 없이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빈화의 출세작은 박계주 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전편에 박애주의와 낭만주의 그리고 이국적인 풍광이 특징적이던 < 순애보 >(1957)이다. 스타메이커로도 유명한 한형모 감독은 이 영화에서 아직 조연급에 지나지 않던 이빈화를 여주인공역에 기용함으로써, 스타로서 그녀의 입지를 굳힌다. 현대적인 감각과 균형잡힌 체구를 가진 이빈화에게 ''멜로드라마 시대''가 눈독을 들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근대적 가족을 상상하는 형식으로서 멜로드라마에서 그녀에게 맡겨지는 역할이란 전통보다는 현대를, 수동적이기 보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사랑을 기다리기 보다는 쟁취하는 역할이 맡겨지곤 했다. < 순애보 >에서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사랑에 적극적이다가 결국 살해당하고마는 에어걸(당시는 스튜어디스를 이렇게 불렀나 보다.) 인순(김의향)과 달리 이제는 눈이 멀고 누명까지 쓴 화가 애인을 기다리는 제목 그대로 순애보(殉愛普)적 사랑을 보여주는 명희역의 이빈화 는 오히려 예외적인 셈이다. 따라서 기다림과 통절의 미학을 보여주는 멜로드라마에서 그녀의 자리는 조연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광수 원작의 < 흙 >(1960)에서 기생 백선희역으로 등장하여 현대적인 역할을 기대했던 관객들을 다소 실망시켰던 이빈화는 이후 비비안 리가 나온 < 애수 >를 연상시키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멜로드라마인 <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1959)를 비롯하여, < 사랑의 역사 >(1960)에서는 과부인 은선( 최은희 )의 다방업을 하는 친구로, 연속방송극을 각색한 < 다시는 놓지 않으련다 >에서는 종합병원의 여의사로 등장하였다. 충청도 조그만 산골의 산지기 딸( 이경희 )과 그 산주의 아들( 박노식 ) 사이의 애정을 다룬 < 꽃피는 시절 >(1959)에서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녀역을 맡은 이빈화 는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다. 그녀는 이 삼각관계에서 계층적으로 자기 보다 못하지만 자신의 남자를 사로잡고 있는 연적 이경희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가 하면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낸다. 아담하다기 보다는 큰 키에 현대적이고 세련된 그래머의 몸매를 가진 그녀에게 부여되는 역할이란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수동적인 이경희의 전통적인 여성상과 대조되는 적극적이고 사랑을 쟁취하는 역할이 적역이었을 것이다. 여교사인 문현주( 조미령 )의 말썽꾸러기 학생중 한 사람인 상호( 안성기 )의 누나로 나오는 < 어느 여교사의 수기 > 역시 이빈화는 부모 없이 자라는 상호의 빠걸인 누나로서 정부가 오는 밤이면 번번이 동생 상호를 쫒아내고 다음날 동생이 책보를 찾으러 왔을 때도 내려진 커튼 틈으로 책보와 아침밥값을 내주고 창문을 닫아버리는 연기를 매정하게 해내었다. 상호 주변의 차가운 환경을 보여주기 위한 이빈화의 이 계산된 연기는 분명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균형이 잡히고 요염한 육체미에 예리한 혹은 앙칼진 내면적인 정신의 자세가 포함되어 있었던 이빈화 만큼 근대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떠맡은 영화의 고유한 기능안에서 마음껏 헤엄칠 수 있는 배우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녀는 한마디로 자신의 멋을 알고 또 그 멋을 세련되게 보여줄 수 있는 배우였기 때문이다. 화려한 생활과 서울-동경-홍콩 등지의 국제적인 무대를 통해서 그녀의 자태를 빛냈으며 선천적인 재질, 용모가 장기간의 연기생활을 통해서 비교적 꾸준히 인정을 받는 행운도 누렸다. <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1959)이라는 일련의 홍콩 스타일 합작영화에서는 ''홍콩 마카오를 무대로 이국적 향취를 풍기면서 삼각 러브스토리를 전개하면서 적당히 액션 맛도 가미하여 대중 취향의 쇼우''로 만들어 놓았고 친구 사이인 박노식 과 독고성 이 각각 암흑가와 경찰을 대표하여 등장한 < 현금은 내 것이다 >에서는 박노식을 사랑하여 그를 구하는 거칠지만 순정파인 바의 마담으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69년까지 연기활동을 한 이빈화 연기의 만개(滿開)는 < 안개 >(1967)인 듯 하다. 비록 화면에 등장하는 시간은 길지 않지만 그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60년대 한국 모더니즘영화로서 <안개>는 기준( 신성일 )의 시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의 고향인 무진으로의 공간의 이동이자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무진으로의 여행은 떠나고싶지만 떠날 수 없는 서울에 대한 기준의 자기 합리화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에서 기준의 서울 생활은 아내로 표상되며 그것은 그의 권태롭지만 풍요로운 현재와 미래를 받치고 있는 물질적 기반이다. 이빈화는 이 영화에서 바로 그 아내이며 기준에게 무진으로 내려가거나 올라오라고 지시하는 인물이자 기준을 통제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김수용 감독은 ''세련되고 돈이 많아 보이고 연상으로 위엄이 있어보여야 하는'' 기준의 아내역으로 이빈화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감상에 빠지는 것이 내 휴식의 비법''(국제영화 63년 4/5월)이라고 밝혔던 이빈화 . 괄괄하지만 품위 있으며 세련된 팔방미인인 이빈화의 화려함은 어쩌면 언젠가 그녀가 수필에 쓴 것 처럼 너무도 소박한 꿈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꼭 따뜻한 인정속에서 살고싶다. 야박스런 감정에서 자신을 괴롭히고싶지는 않다. 이것이 아마 스크린에서 사라질 때까지의 생활신조인지 모른다. ' 후리후리한 키에 스마트한 양장을 하고 유행을 몰고와서는 어느 날 은막에서 사라져간 이빈화에 대한 대중들의 끊임없는 관심은 당시의 그녀가 얼마나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남성들은 물론 동성인 여성들에게까지 질투와 선망을 느끼게 했던 이빈화를 관객들은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다. 변재란 (순천향대교수) / 2002년 <프로필> 본 명 : 이숙한 출 생 : 1934년 2월 3일 서울 데 뷔 : 1952년 윤봉춘 감독 < 성불사 > 주요 작품 : < 성불사 >, < 청춘 쌍곡선 >, < 순애보 >, < 마인 >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