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어라 사랑하는 조국이여
- 감독
- 다렐 루츠
- 제작년도
- 1995
- 출연
- 제임스 얼 존스, 리차드 해리스, C. 잭 로빈슨, 찰스 S. 듀튼, 이안 로버츠
1971년 말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영화정책의 급변 196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영화검열 체제는 매우 복잡한 변화를 겪었다. 이 변화는 주로 시나리오 단계에서의 검열(외화의 경우 수입 허가 단계)에 집중되었다. 이중검열 혹은 삼중검열의 혼란을 낳은 60년대 후반 시나리오 검열은 1970년에 이르러 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적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변화와 혼란의 시발은 1971년 12월 갑작스럽게 선포된 국가비상사태였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12월 6일, ‘중공’의 유엔 가입으로 안보가 더 불안해졌고, ‘북괴’의 도발이 날로 격화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 정부의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조속히 만전의 안보 태세를 확립한다, 2. 안보상 취약점이 될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으며 또 불안요인을 배제한다, 3.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 논의를 삼가야 한다” 등 6개항 조치를 발표했다. 그리고 12월 11일 문화공보부는 국가비상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영화 분야에 다음과 같은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1. 협동단결을 강조하고 성실, 근면, 검소한 생활자세를 바탕으로 하는 국민상을 그린 내용의 영화제작을 권장한다. 2. 건전한 국민정서로 순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의 영화, 민족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내용의 영화를 정선, 수입하도록 한다. 3. 국내영화제작의 질적 향상을 위해 72년도 제작편수를 1백50편으로 한정하고 안보관계 영화를 연 30편 이상 제작하여 매월 최소한 2편 이상 상영토록 의무화한다. 72년도 외화수입을 50편으로 한정하되 안보관계 영화를 15편 정도 수입하도록 한다. 4. 음란, 선정적인 묘사 등 퇴폐성향이 있는 내용,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내용, 사치와 낭비 등 소비성향을 조장할 우려가 있는 내용은 배격한다. 1) 국가비상사태 선포 내용을 담은 일간지 기사(『동아일보』, 1971년 12월 6일) 이러한 “국가비상사태에 따른 영화시책”은 안보 위기 상황을 맞아 그간 “섹스 퇴폐풍조 눈물 한숨 패배의식 등을 철저히 규제” 2) 함으로써 한국영화를 수정하겠다는 정책당국의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이 체제 이후 1972년 신년부터 검열이 강화되었는데, 이를 단순히 강화되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간 진행되었던 시나리오의 검열은 신청된 시나리오를 심사하여 무수정, 개작, 부분 개작, 반려 등의 단계에 따라 절차가 진행된 반면, 새로운 체제에서는 신청된 시나리오를 심사하여 제작될 수 있는(외화의 경우 수입할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검열의 수준을 벗어나는 조치다. 왜냐하면 기존 우리가 생각하는 검열은 주어진 작품에 대한 수정과 (예외적으로) 반려를 포함하는 것이지, 제작할 작품을 선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는 어느 면에서는 최고 수준의 검열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에 따라 시나리오 단계의 검열 과정은 60년대 후반에 이어 다시 이중화된다. 이에 당시 문공부 장관 윤주영은 “저질영화 제작과 무분별한 외국영화 수입을 막고, 국가 안보 우선의 영화제작 장려책으로” 제도를 바꾸었다고 밝혔다. 3) 문제는 시나리오 심사에서 통과한다 하더라도 제작쿼터를 부여받는 것은 별개라는 것이었다. 즉 문공부는 예륜에서 사전심의한 작품에 대해 20인의 “쿼터” 심의위원을 두어 재심사 과정을 거친 후 국산영화 제작권을 부여했다. 그 결과 1972년의 한 글에 따르면 320여 편의 시나리오 가운데 1백 50편이 제작쿼터를 부여받았고, 최종적으로는 29편만이 영화화되었다고 언급된다. 4) 물론 이는 감독들의 대담 가운데 나온 발언이라 수치가 정확한지 확인할 수 없고, 1972년의 한국영화제작편수가 29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후술하겠지만 영화진흥공사 자료집의 통계는 이 해 제작된 편수가 122편이라 밝힌다). 1971년으로부터 넘어온 제작쿼터가 상당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5) 아마도 1972년에 부여된 제작쿼터의 상당량은 다시 1973년으로 이월되기도 했을 것이다. 제작쿼터가 부여되었음에도 제작이 부진했던 이유에 대해 앞의 잡지기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해당 연도인 72년도 배정 코타분의 제작 진척이 극히 부진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영화계의 전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당해연도의 「코타」가 과년도 「코타」에 비해 제작완성율이 뒤떨어진다는 상례에 비유하기에 앞서 최근의 영화산업이 사양의 문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세계적인 조류의 축소판으로 풀이할 수밖에 없겠다. 또한 예로는 「선각본 심사제」라는 큰 변화가 처음으로 실시됨에 따라 제작에서 다소 주춤했던 제작자들의 태도도 영향의 일부로 볼 수 있겠다. 6) 1970년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산업의 부진이 급격히 진행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관객수의 경우 1969년까지는 1.71억명에서 1.73억명으로 소폭이나마 증가하였으나, 1971년 처음으로 1.46억명으로 2천만명이 줄었고, 1972년에는 1.18억명으로 거의 3천만명이 줄어들게 된다. 제작편수는 1969년 229편을 정점으로 1971년 202편으로 줄었다가 1972년 122편으로 급감하였다. 말하자면 1970년 시작된 불황은 1972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된다. 그리고 그 원인 중 하나가 어쩌면 1971년 국가비상사태 선언 이후 강경해진 영화정책 변화일 수 있을 것이다. 유신과 4차 개정 영화법 이러한 상황에서 1972년 10월 말 다시 유신이 선포되었다. 유신과 함께 1972년 검열체제는 더욱 강화된다. 특히 유신 체제 하 예륜은 새로운 18개의 심의기준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기존의 검열사항 외 “1.10월유신 조치를 왜곡, 비방하거나 유인비어 날조를 유발할 우려가 있는 내용, 2.총력안보에 역행하거나 국토 통일을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 3.남북적십자 회담을 비방하거나 이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 등 사항이 눈에 띈다. 7) 1973년 2월에는 영화법이 개정, 4차 영화법이 공포되었다. 4차 개정 영화법은 70년 3차 개정영화법이 시행했던 제작과 수입의 분리 정책을 이전으로 되돌려 제작사만이 외화수입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한국영화 제작사의 독점적 권리를 보장했다. 또한 제작사 등록제를 허가제로 강화하여 마찬가지로 제작사를 독점화했다. 표면적으로 이는 60년대 내내 추진되었던 영화정책의 중점 방향인 메이저 기업화 정책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메이저 기업화 정책이 이미 파탄의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고 정부의 권위주의가 강화되는 시점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소수의 제작-수입사를 통해 영화콘텐츠 전반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로 짐작된다. 이와 함께 기존의 영화진흥조합은 영화진흥공사로 개편되었다. 광의의 검열 행정체제와 관련하여 사단법인 한국영화배급협회의 창립을 별도로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배급협회는 1973년 5월 11일 창립총회를 통해 발족했다. 지방배급사(흥행사)의 부당한 간섭과 영화 수입의 누출을 막고 전국적으로 일원화된 배급체제를 구축하고자 설립된 배급협회의 초대 이사장은 김태수, 상임이사는 안재홍이었고, 이사진으로는 제작(수입)사 쪽 2명, 공연자 쪽 2명, 영화진흥공사 1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영화배급협회는 중간배급업자(지방흥행사)를 배제함으로써 중간 유출되는 수입을 줄이고, 제작자와 상영자라는 직접 이해당사자간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8) 이에 따라 문화공보부는 “①모든 영화는 영화배급협회 이외의 경로를 통하여 배급하지 못한다. ②영화의 배급에 관하여 임의로 계약하여 이를 위장해서는 안된다. ③모든 공연장은 배급협회를 통하지 아니한 여하한 극영화도 상영해서는 안된다. ④ 영화배급신청서는 제작신고 및 수입추천 시에 영화배급협회에 제출해야 한다” 9) 등 배급협회에 관한 행정방침을 시달하여, 모든 영화의 배급은 배급협회를 거치도록 강제했다. 1973년 6월 21일 진행된 영화배급협회 현판식 사진(김태수 배급협회 이사장(좌), 문공부 이치순 예술국장(우) 출처: 『영화』, 1973년 8월호) 이와 함께 매년 영화정책의 구체안을 포함한 영화시책이 1973년 이후 1989년까지 매년 발표되었는데, 4차 개정 영화법이 공포된 1973년 영화시책은 영화검열의 내용과 체제에 있어서 강화된 안을 담고 있다. 10) 우선 우수영화 제작방침에서 “10월유신을 구현하는 내용,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애족의 국민성을 고무 진작시킬 수 있는 내용, 의욕과 신념에 찬 진취적인 국민정신을 배양할 수 있는 내용, 새마을 운동에 적극 참여케 하는 내용, 협동·단결을 강조하고 슬기롭고 의지에 찬 인간상록수를 소재로 한 내용” 등 유신 이후의 변화된 상황을 담았고, 우수외화의 기준으로 “유신이념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영화, 민족주체성과 애국, 애족정신을 북돋아줄 수 있는 영화, 새마을운동의 가치관을 설득시킬 수 있는 영화” 등 유사한 기조의 15개 항이 제시되었다. 이와 함께 검열에 있어서의 주안점 역시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거나 국민총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의 지양, 음란 선동적인 묘사 등 퇴폐성향이 짙은 내용의 지양” 등 6개 항이 별도로 제시되었다. 한편 전년 크게 문제가 되었던 시나리오의 심의는 “예륜 심의를 거쳐 다시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된 심의회에서 심의 결정하던 것을 예륜 심의를 강화하여 당부가 직접 결정”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1972년의 번거로웠던 시나리오 검열의 단계, 그리고 이로 인한 제작 부진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개선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도의 변경이 반드시 소위 이중검열의 폐단을 개선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문공부 담당자의 직접 결정은 양면의 날과 같아서, 강화의 기조에서는 매우 엄격하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제작권은 1972년 제작편수의 급감을 의식한 탓인지 전년 150편에서 130편으로 줄었다. 요컨대 1971년 말 선포된 “국가비상사태선언” 이후 진행된 영화정책은 4차개정영화법까지 권위주의 강화를 향해 치달았다. 단순히 영화검열만의 문제는 아니다. 60년대 영화산업정책의 폐단이 4차개정영화법을 거치며 반복강화되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바로 이 시기에 영화산업의 불황이 시작되었다. 산업적 불황과 정권의 권력유지 욕망의 산물로서의 영화정책이 악순환의 고리를 이루며 1990년대 초까지 한국영화산업의 장기불황이 진행된다. 각주 1) "안보 우선 주체의식 고취, 대중연예에 새 기풍, 문공부서 쇄신책 마련, 영화검열 기준강화, 제작편수를 연 1백50편으로 한정", <매일경제신문> 1971년 12월 11일 2) "줄지을 「안보영화」, 국민총화 담긴 외화 우선 수입, 사회불안·섹스 등 다룬 작품 철저 규제, 방화도 새 가치관 따라서 개작", <동아일보>, 1972년 1월 12일 3) "「선심사」 「후 수입쿼터배정」, 윤문공 안보 우선의 영화정책 마련", <조선일보>, 1972년 4월 14일 4) “신춘좌담: 바람직한 새해 영화풍토는”, 『코리아시네마』, 1973년 1월호, 46-47쪽 5) 당시 한 잡지의 다른 기사에 따르면 1972년 11월 14일 현재 시점에서 1971년 이월쿼터 73편 중 63편이 검열을 끝냈고, 72년도의 경우 93편이 제작신고 된 가운데 29편이 검열을 필했다. “72년도 국산영화 개황, 「건전」 「우수」로 경향 바꿔져”, 영화진흥조합, 『코리아시네마』, 1972년 12월호, 39쪽 6) 앞의 기사, 39쪽 7) “뉴스토픽, 「문화유신」을 다짐, 연예계 인사 간담회에서, 예륜 18항의 새 심의기준 발표”, 영화진흥조합, 『코리아시네마』, 1972년 12월호, 57쪽 8) “배급협회 발족: 영화계 숙원인 배급 일원화 위해”, 영화진흥공사, 『영화』, 1973년 7월호, 73쪽 9) “[알아둡시다] 영화배급에 관한 행정지침을 시달”, 영화진흥공사, 『영화』, 1973년 8월호, 67쪽 10) 이하 영화시책 내용은 “영화시책”, 영화진흥공사 편, 『한국영화자료편람』, 1977, 225-227쪽 참고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늑대-여자들 어떤 영화로 리뷰를 쓸까 고민하며 올해 뽑은 나의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를 한참 노려보다 특정 형상이 떠올랐다. 그건 세대도, 국적도, 상황도 다른 ‘늑대-여자’의 형상이었다. 무정부주의적 에코 페미니스트인 노년의 늑대-여자, 수의대 신입생 통과의례로 날고기를 먹은 후 낯설지만 강력한 자신의 힘을 지각하게 된 식인 늑대-여자, 돌연변이 유전자 실험으로 태어나 초능력을 지닌 십 대의 늑대-여자. < 스푸어 >(아크네츠카 홀란드, 2017)의 두셰이코, < 로우 >(줄리아 듀콜뉴, 2016)의 쥐스틴, < 로건 >(제임스 맨골드, 2017)의 로라가 바로 그들이다(늑대가 아닌 다른 동물로 더 확장해 논의하면 <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일디코 엔예디, 2017)의 주인공으로, 소 도축장 품질검사관이자 사슴이 된 마리어까지 포함할 수 있겠지만 지면의 한계 상 제외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종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이접, 혼종, 합종하며 인간성,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제 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인간성에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인간은 이 상태로 존재해도 되는가?’이다. 그러나 두셰이코, 쥐스틴, 로라는 인간성을 질문하기 위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깊게 파고 들어가며 또다시 인간 중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방식을 비껴간다. 오히려 폭력적인 악당으로서의 인간은 캐리커처화되고 종을 횡단해 동물성을 탐험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동물성이 아니라 동물이 되어 감각하는 동물성이다. 인간은 그 스스로도 동물의 일부면서 특히 자신 내부의 야만성, 폭력성, 자기중심적 욕구충족, 비성찰성, 폐쇄성, 생존을 위한 이기심과 무한경쟁 등을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묘사하기 위해 ‘동물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왔다. 그러면서 인간을 동물에서 분리해 예외적 특권을 가진 존재로 가정한다. 이러한 위치선점은 인간의 지구 지배를 정당화하고 여타의 동물을 타자화한다. 그러나 < 스푸어 > < 로우 > < 로건 >의 늑대-여자들은 늑대와 혼종하며 동물성을 다르게 감각한다. 그녀들은 절대적 공감, 기존의 기표에 포섭되지 않는 소수자의 욕망, 경계와 고정관념을 흐리며 배치를 다르게 만드는 공동체, 자율과 야성성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소수자를 지지하는 연대를 특징으로 한다. 늑대-여자들은 아웃사이더이며 순응적이지 않고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고립되지 않고 불가능할 것 같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때문에 ‘짐승 같은 야만성’을 강조하는 남성들의 영화가 늘 떼로 몰려다녀도 결국은 반복적으로 ‘고독한 늑대’로 결론 맺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늑대-여자들이 주인공인 이 세 영화에서 기성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남성과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에 반격하는, 그래서 살인과 식인도 서슴지 않는 동물성은 소수자의 욕망이다. 두셰이코Duszejko “블랙코미디 요소를 지닌 무정부주의적인 페미니스트의 범죄 이야기”라고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이 스스로 정의내린 이 영화는 리벤지 스릴러, 미스터리, 액션,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어 때때로 영화가 덜컹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덜컹거림, 그 이종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의 혼종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이고 미학이며 즐거움이다. 그 혼종성은 이 영화의 포스터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늑대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한쪽 눈은 인간의 눈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재미를 위해 잔인하게 동물을 사냥하고, 제도, 법, 종교가 그 폭력을 승인하는 사회(법은 계절별로 사냥 가능한 동물을 지정하고, 종교는 사냥꾼을 축복한다)에 두셰이코는 늑대가 되어 복수를 감행한다. 사냥꾼들은 단지 동물만 죽이지 않는다. 여성과 아이 등 사회의 소수자들에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고 폭력을 가한다. 즉 사냥은 인간의 동물성이 아니라 권력과 위계의 문제다. 서사적으로 보면 이 복수는 사계절에 걸쳐 일어난다. 대부분의 리벤지 스릴러는 최종 보스를 만나는 장면에서 가장 스펙터클하게 액션을 감행하며 억압되어 있던 분노를 터트리는 식으로 진행되지만, 이 영화는 반대다. 복수는 천천히 이뤄진다. 이러한 서사는 동물과 여성에게 가해왔던 폭력이 그만큼 길고, 오래, 일상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속되어왔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폭력은 한 명의 남성 악당이 아니라 남성 중심 네트워크가 조직적이고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형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에서 동물을 보여주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동물은 단순히 풍경이 되지 않는다. 총성이 울릴 때 동물들이 도망치는 인서트에서 흔들리는 카메라는 사냥하는 쪽의 액션이나 스릴이 아니라 도망치는 쪽의 위급함과 다급함을 재현하며, 살인현장에 나타난 늑대와 사슴들은 그들의 시점 쇼트를 갖는다. 그것은 쇼트와 역쇼트의 형식에서 비가시적이었던 시점이다. 동물의 시점 쇼트는 늑대가 되어 복수를 감행했던 두셰이코와 마찬가지로 관객들로 하여금 종을 가로질러 사슴이나 늑대가 되게 하고 그들의 정념을 감각하게 한다. 쥐스틴Justine < 로우 >는 장르적으로 < 캐리 >나 < 진저스냅 > 같은 공포영화의 전통에 닿아 있다. 이 공포영화들은 10대 중후반 소녀의 섹슈얼리티를 위험하고 비규범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그 은유로 주인공 여성이 초능력이나 이질적인 정체성을 지각하게 한다. <로우>는 이 서브 장르를 차용하면서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혐오하는 클리셰를 반복하지 않고 가장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정치학으로 향한다. 부모, 언니가 모두 수의사이고 엄격한 채식주의자이자 모범생으로 자랐던 쥐스틴은 수의대 신입생 통과의례로 강제로 토끼의 생간을 먹게 된다. 그녀가 경험한 수의학과는 동물을 존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위계가 심한 남성 중심적인 문화로 가득한 곳이다. 여자들은 성적 희롱의 대상이 되고, 게이인 남성은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 와중에 이상한 허기 속에 쥐스틴은 날고기를 먹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충족감을 느낀다. 영화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사이의 경계와 금기를 거부하고 비체적인 피부 발진, 머리카락, 날고기, 물어뜯기, 오줌 싸기, 토하기 등을 보여주며, 여성의 몸에 대해 질문한다. 날씬한 몸을 위한 식이통제, 가랑이 털을 밀어버리는 비키니 왁싱(자매의 비키니 왁싱 장면은 공포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이다!)은 무엇을 위한 고통인가. 이것은 정말 인간적인가. 자신의 식인 욕망이 모계로부터 왔다는 것을 안 쥐스틴은 윤리적 선택에 직면한다. 엄마처럼 엄격한 채식주의자로 살 것인가, 언니처럼 자신의 욕망을 풀어놓고 사회의 심판을 받을 것인가. 그러나 부계 혈통의 < 늑대아이 >와는 달리 이 선택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쥐스틴은 여성으로서 어떠한 곳에 맞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감정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식인 정체성뿐만 아니라 여성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두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윤리적 선택도 가능하다. 쥐스틴과 같은 젊은 여성이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할 때 느끼게 되는 일상적 폭력, 불쾌함, 분노는 잔인한 유머와 함께 클로즈업과 롱테이크, 촬영 속도를 변화시키며 흐르는 듯한 움직임과 거리를 둔 으스스한 금욕적 설정 쇼트를 오가는 카메라를 통해 우아하게 구현된다. 로라Laura 전통적인 남성 장르로 여겨졌던 서부극과 슈퍼 영웅 액션의 혼종인 < 로건 >은 고독한 ‘늑대-남자’의 죽음이자 새로운 종(트렌시젠) ‘늑대-여자’의 시작을 그린다. 이 영화에서 로라를 비롯해 실험실에서 태어난 뮤턴트 아이들은 위의 두 영화에 등장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우리에 갇혔다. 이제 늙고 병든 울버린보다 힘이 센 로라는 포스트페미니즘 시대에 걸 파워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아빠 딸 Daddy’s Girl‘이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유지할 수 없는 남성들은 딸들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힘을 여전히 확인하는 방식은 그 딸의 힘이 엄마가 아닌 자신에게서 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건>이 흥미로운 슈퍼 영웅 액션 영화인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로라는 울버린이 포기하고 프로페서 엑스가 망쳐버린 뮤턴트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다. 여전히 ‘고독한 늑대’로 서부극의 남성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울버린과 달리, 그의 죽음 후 로라는 다른 뮤턴트 아이들을 이끌고 함께 떠난다. 모가장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두셰이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법을 고민하는 쥐스틴, 억압받는 이들의 공동체를 재건하는 로라, 늑대-여자들은 홀로 떠나지 않는다. 모계를 강조하고 부계와의 단절을 말하는 이 영화들은 사실 세 세대의 페미니즘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60대 여성인 두셰이코의 페미니즘은 급진적 변화를 원했던, 즉 혁명적 비전을 가졌던 이들의 것이다. 그녀들은 기성 시스템을 말 그대로 꺼버리고 무정부주의적 혁명을 원한다. 세계는 다시 변화할 것이고 새로운 사이클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기다린다. 그래서 < 스푸어 >에서 모든 버려지고 배제된 존재들이 모여 있는 환상적인 공동체는 사적인 소망성취라기보다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다. 쥐스틴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몸이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서 얼마나 억압되고 비인간적으로 통제되고 있는지를 비판하는 2세대 페미니즘의 전통에 있다. 가부장제, 규범성으로부터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해방시키는 것은 여성들에게 엄청난 힘을 돌려줄 것이다. 로라는 여성 또한 강한 힘을 갖고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보는 포스트페미니즘의 걸파워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거침이 없으며 타고난 재능과 힘을 주저하지 않고 발휘한다. 이 세 세대의 페미니즘은 연대기적이지 않다. 이 다양한 페미니즘은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 속에서 함께 공존한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동물 종을 가로지르며 그동안의 인간성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왔는지를 비판한다. 또한 부계의 전통하에 있던 장르들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모계화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폭력과 살인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소수자의 욕망을 위해 사용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존 휘트니는 모션 그래픽의 아버지로 기술되는 경우가 많다. 휘트니는 1955년부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UPA(United Productions of America)에서 일했다. 여기서 그래픽 디자이너인 솔 배스(Saul Bass)를 만났고, 둘이 함께 영화의 타이틀 시퀀스와 광고의 특수효과를 제작해서 유명세를 얻었다. 이때 제작했던 대표적인 타이틀 시퀀스가 히치콕의 < 현기증 >(1958)(사진1)이다. 이 시퀀스는 지금도 모션 그래픽 교재들에서 모범 사례로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기 때문에, 휘트니를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오해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휘트니가 1960년에 설립했던 회사의 이름이 모션 그래픽이었기 때문에, 그를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설명하는 것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휘트니의 이름 앞에 굳이 무엇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붙여야 한다면, 컴퓨터를 이용한 생성예술 혹은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의 아버지라고 붙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휘트니를 컴퓨터를 통해 소리와 빛을 연결하는 구조를 생성하고자 했던 작가로 설명하고자 한다. [사진1]<현기증(1958)>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4CZfSc6nJ8U'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휘트니는 1980년에 「디지털 하모니: 음악과 시각예술의 상보성에 관하여 Digital Harmony: on the Complementarity of Music and Visual Art」를 펴낸 바 있다. 이 책의 제목과 부제는 휘트니의 관심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데, 자전적 배경, 음악과 영화에 대한 사유들, 비디오디스크와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이해, 작업 방식들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휘트니는 1917년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태어났는데, 자신이 살았던 동네는 예술로 먹고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다고 회고하였다. 휘트니는 퍼모나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학교에 실망하고, 21살이었던 1938년에 네 살 아래 동생인 제임스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찾겠다는 희망을 품고 유럽으로 떠났다(이 글에서 휘트니는 존 휘트니를 지시하고, 제임스 휘트니는 제임스로, 둘을 함께 언급할 때에는 휘트니 형제로 표기한다). 그 희망은 비록 1년간의 유럽 체류로 끝이 났지만, 휘트니 작업의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휘트니는 로테르담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의 작업의 단초가 되고, 경력을 관통하는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를 보았다. 흰색으로 도장된 비행기 날개의 곡선, 철판의 모서리들, 철판을 연결하는 못의 기하학적 형상들과 떨림들 그리고 이 요소들이 비행에 따라 그려내는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이다. 휘트니는 이 부분들을 촬영해서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 생각은 단지 발상으로만 남았지만, 휘트니가 영화라는 매체에 설정한 질문과 과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휘트니에게 비행기의 날개와 그 부속들은 역동적인 구조와 부분들의 운동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한 대상이었다. 휘트니는 원래 음악을 하고 싶어 했는데, 음악에 비해서 세계는 너무나도 정적이라고 생각했다. 휘트니가 설정한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에게 세계는 베토벤의 음악과 비교했을 때 따분할 정도로 정적이다. 빛은 소리보다 빠른데도 불구하고, 소리를 재료로 하는 음악은 역동적이지만 빛을 재료로 하는 영화는 음악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무겁다. 그 이유는 영화가 카메라로 정적인 세계를 찍기 때문이고, 세계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카메라가 움직임이 큰 대상들을 클로즈업으로 찍거나 카메라를 빠르게 움직이고 편집의 호흡을 짧게 가져가서 역동적이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이 음악보다 가벼울 수는 없다. 또한 사람들은 집요하게 카메라로 촬영된 이미지에서 무엇이 어디서 찍힌 것인가를 찾으려고 애쓰며, 그것들을 분별해낼 수 없다면 사진적 이미지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즉 휘트니에게 영화의 기본적 문제는 음악만큼 추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휘트니가 영화에 설정한 과제와 목표는 ‘유동적인 건축 liquid architecture’이라는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다. 유동적 건축은 변화와 구조를 동시에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쾨테가 “음악은 유동적인 건축이고, 건축은 응고된 음악이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휘트니는 유럽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유동적인 건축이라는 개념을 접했고, 유동적이라는 말을 시공간 상에서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휘트니는 20세기에 이르러 시각예술이 마침내 자신의 참된 구성요소들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표면, 색채, 형태, 선, 질감과 같은 요소들은 시각예술의 알파벳이었고, 이 요소들을 발견함으로써 시각예술은 음악의 유동적 구조를 획득할 수 있었다. 반면에 휘트니에게 영화는 늘 현실의 어떤 장소에 속박되어 있는 매체였기 때문에, 영화가 유동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현실에 속하지 않는 어딘가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휘트니가 영화라는 매체에 요구했던 것은 음악에 준하는 역동성과 추상성을 갖추는 것이었고, 스스로에게 설정한 과제는 카메라로 매개되지 않으면서 빛을 구조화하여 음악에 상응하게 하는 것이었다. 빛과 소리의 구조적 상보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오래되었기 때문에, 휘트니의 생각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는 판단 역시 새로울 것은 없었다. 휘트니에 앞서 만 레이, 한스 리히터, 비킹 이겔링, 발터 루트만과 같은 작가들이 카메라 없이 빛을 매개하여 음악에 상응하는 구조를 만드는 방법을 탐구했었기 때문이다. 또한 카메라가 현실의 대상을 찍는다는 이유 때문에, 영화가 음악과 같이 유동적이 되기 위해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는 결론이 곧바로 내려질 수도 없다. 이를테면 이 연재에서도 다루어질 구조영화 작가들을 생각해보면, 굳이 음악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카메라를 버리지 않더라도 영화의 구조를 유동적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휘트니에게 고유하고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 계기는 쇤베르크의 음렬주의로부터 비롯된다. 휘트니의 유럽 체류는 1939년 파리에서 막을 내리는데, 이때 르네 라이보비츠(Rene Leibowitz)를 만나서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을 배웠다. 이 기법을 구성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한 음렬(tone row)은 반음계의 12음을 특정한 순서로 배열한 것이다. (2) 한 음렬 내에서 어떤 음도 반복되지 않는다. (3) 기본(Prime, P), 반행(Inversion, I), 역행(Retrograde, R), 역행-반행(Retrograde-Inversion, RI)을 각 음정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적용한다(P, I, R, RI를 각각 사분면에 표시한다고 할 때, 기본 P를 1사분면에 놓으면 기본과 좌우대칭을 이루는 역행은 2사분면에, 좌우/상하대칭을 이루는 역행-반행은 3사분면에, 상하대칭을 이루는 반행은 4사분면에 위치시킬 수 있다). (4) 음렬은 반음계에서 네 가지 변형 중 어떤 것으로부터도 시작할 수 있다. 이 원칙들을 적용해서 음렬을 구성하면 [그림1]과 같은 기본적인 구성이 가능하다. [그림1]12음기법을 이용한 음렬 구성의 예시 12음으로 이루어진 한 음렬에 대한 기본, 역행, 반행, 역행-반행을 행렬로 표시하면 [그림2]와 같다. 행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화살표는 기본을 지시하고 행에서 왼쪽으로 가는 화살표는 기본에 대해 역행을 하고 같은 도수만큼 이동(transposition)한 것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열에서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는 기본에 대한 반행에 같은 도수만큼의 이동을 지시하고, 위로 향하는 화살표는 그 역행에 도수이동을 나타낸다. 이렇게 하면, 기본 12, 역행 12, 반행 12, 역행-반행 12 음렬로 총 48개의 음렬을 얻을 수 있다.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은 제2빈악파의 작곡가들인 베베른이나 베르크 등에게 계승되어 음렬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림2]음렬의 행렬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의 핵심은 음악을 순수한 데이터와 문법으로 전환시켰다는 데 있다. 위에서 서술한 원칙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초기에 유한한 수의 원소를 갖는 집합과 이 원소들을 매핑하는 함수를 정의하고 나면, 나머지 절차들은 자동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즉 음악에서 유사 오토마타가 가능해진다(초기 상태와 상태 전이에 대한 정의는 있지만, 결과를 판단하고 종료하는 절차에 대한 규칙이 없다). 쇤베르크는 1926년에 12음기법을 처음 적용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에 착수하고 나서, “소리의 생산과 소리들의 관계의 정확성을 보장하고, 소리들을 초보적이고 믿을 수 없으며 무심한 음악가들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모든 악기의 장점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쇤베르크의 목표는 음악가의 일시적인 감정이나 직관으로부터 음악을 해방시키고, 음악을 생성하는 문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음악을 하나의 예술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형식언어로 전환하겠다는 의지이다. 음악이 형식언어가 될 수 있다면, 컴퓨터라는 추상기계에 의해 연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쇤베르크가 휘트니에게 미친 영향은 역동적 구조라는 측면에서 음악과 영화에 접근했던 휘트니를 생성적 구조라는 방향으로 틀게 했다는 데 있다. 또한 데이터와 문법으로 소리를 생성할 수 있다면, 빛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발상을 가능하게 했다. 요약하면 휘트니가 유럽 체류 기간에 스스로에게 설정했던 과제는 카메라를 통하지 않고 빛을 매개하여 소리에 상응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이 과제는 쇤베르크의 음렬주의를 통해서 빛과 소리가 생성되는 구조를 발견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이 모든 생각들이 유럽에서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 뿌리는 유럽 체류 기간에 내리고 있으며 도래할 매체인 컴퓨터를 향하고 있었다. 1939년 유럽에서 돌아온 휘트니 형제는 1936년부터 파라마운트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던 오스카 피싱거의 작품들을 보게 되었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휘트니 형제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패서디나에 있던 그들의 스튜디오에서 8mm 작품들을 만들었다. 이때 완성한 작품들은 <원본 주제에 대한 24개의 변주곡>이라는 제목으로 묶여졌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쇤베르크의 이론을 적용한 작품들이었다(공교롭게도 쇤베르크는 1934년부터 남가좌주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은 아래에 삽입한 제임스의 <원에 대한 변주곡>(1942)이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TnU88XWYjE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1]제임스 휘트니의 <원에 대한 변주곡>(1942) 휘트니 형제는 ‘변주곡’ 시리즈를 만들면서 피싱거의 방식(카드보드지를 기하학적인 형태로 잘라내서 움직이는 방식)을 차용했지만, 피싱거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소리를 삽입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각적인 요소들이 자동적으로 소리를 생성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고, [사진2]와 같은 장치를 고안했다. 사진에서 보이는 진자를 흔들면, 필름의 사운드트랙 부분에 사인파를 그려서 소리의 패턴이 새겨질 수 있도록 만든 장치였다. 이 장치를 이용해서 만든 작품이 <필름 습작 No. 1-5>(1943-44)[영상2]이다. 휘트니 형제는 사운드트랙 위에 그림을 그려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자신들이 고안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그러한 방식을 먼저 실험했던 작가 역시 오스카 피싱거였다. 오스카 피싱거는 [사진3]과 같이 그래픽 패턴을 그려내서 소리를 생성하는 실험을 1932년에 수행했던 바가 있고, 이 결과가 <장식 사운드 Ornament Sound>이다(이 작품은 비주얼 뮤직 센터(Center for Visual Music)에서 복원되었고 비메오(Vimeo)에서 유료로 스트리밍하고 있다 https://vimeo.com/ondemand/26951 ). [사진2]진자를 이용한 소리 생성 장치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kuZbgM8yxtY'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2]휘트니 형제의 <필름 습작 No.1> [사진3]오스카 피싱거의 <장식 사운드>의 그래픽 패턴들 제임스는 <필름 습작> 시리즈를 완성한 직후 뉴욕으로 가서 힐다 르베이(필자가 쓴 마리 멘켄의 < 노트북 > 리뷰에도 등장하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초대 디렉터, 이름이 다소 길어서 힐라 르베이, 바로네스 르베이 등으로도 불렸다)를 만나서 작품을 구매해줄 수 있는지와 새로운 작품을 위한 기금을 줄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르베이는 <필름 습작> 시리즈뿐만 아니라 <원본 주제에 대한 24개의 변주곡> 역시 구매했고 1944년과 1945년 초에 상영하였다. 이 상영회에는 토니 스미스, 존 케이지, 테네시 윌리엄스, 마르셀 뒤샹 등이 참석했었다. 그런데 성격이 괴팍하기로 유명했던 르베이는 휘트니 형제의 작품을 보다가 영사실로 뛰어가서 작품 상영을 중단시켰다. 다행히 이 상영회에 잭슨 폴록 역시 참석해 있었고, 폴록이 개입해서 상영회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후에 이 작품들은 구겐하임에서 정기적으로 상영되었다. 또한 휘트니 형제는 1949년 브뤼셀 영화제에서 <필름 습작>으로 1등상을 수상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휘트니는 록히드사에서 초고속 미사일 사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M5 대공포 디렉터(Antiaircraft Gun Director)라는 대공방어 미사일 유도 시스템을 접하게 되었다. 이 장비는 원래 영국에서 개발했던 것으로 록히드사가 개조해서 사용 중이었는데, 무게가 850파운드에 11,000개가 넘는 부품으로 구성된 아날로그 컴퓨터였다. 휘트니에게 M5는 미사일 유도 시스템이 아니라, 카메라 없이 빛을 매개하고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그의 목표에 부합하는 장치였다. 전쟁이 끝나고 휘트니는 불용품으로 경매에 나온 M5를 구입하고, 추가로 중고 부품들을 모아서 M5를 그래픽 생성 장치로 개조하였다. 휘트니가 만든 장치는 요즘으로 치면 모션 콘트롤 카메라에 해당한다. 휘트니에게 유명세를 안겨 주였던 영화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들은 그가 개발한 장비로 만들어졌다. 휘트니는 영화 타이틀과 광고 특수효과 작업으로 얻은 수익금으로 1960년에 모션 그래픽이라는 회사를 설립해서 상업적인 작업들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그가 개발한 장치로 만든 첫 작품 <카탈로그>[영상3]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에는 휘트니가 고안한 슬릿-스캔(slit-scan) 방식이 적용되었는데, 이 방식은 요즘에도 미디어 아트 작품들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휘트니가 개발한 장치로 작업하는 방식은 <컴퓨터: 인간의 지배에 도전하다>[영상4]라는 다큐멘터리의 일부에서 볼 수가 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TbV7loKp69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3]휘트니의 <카탈로그(1961)>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5eMSPtm6u5Y'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4]휘트니의 아날로그 컴퓨터 작업 방식 휘트니는 아날로그 컴퓨터로 한 작업들로 평가를 받아서 1966년에 IBM 아티스트 레지던스에 초청되었고 1969년까지 후원을 받았다. 여기서 GRAF(Graphic Additions to FORTRAN)의 개발자인 잭 시트론과 만나 협업할 수 있게 되었다. 시트론은 IBM 모델 360 컴퓨터와 2250 그래픽 디스플레이 콘솔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그래픽 콘솔은 다소 복잡한 방식으로 작동되었는데, 4000 * 4000개의 점을 실시간으로 표시할 수 있었다. 휘트니는 GRAF를 배웠고, 이 언어를 사용하여 1966년에 < 순열 >[영상5]을 만들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kdYxJ85RSd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5]휘트니의 <순열>(1966) < 순열 >은 휘트니가 디지털 컴퓨터로 만든 첫 작품이었다. <순열>은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매 프레임이 총 281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왜 281개의 점이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짐작건대 소수들 중에서 시스템이 처리하기 용이한 수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순열>은 총 281개의 점의 초기 위칫값과 일련의 명령어를 이용하여, 프레임별로 점들의 위치를 변화시키면서 만들어졌다. 그 명령어들의 일부를 글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스크린의 중앙에서부터 시작하라. 계산한 거리만큼 오른쪽으로 이동해라. 계산한 각도만큼 원주를 따라 왼쪽으로 회전하라. 거기서부터 외곽 방향으로 새로운 반지름을 계산하고, 원주를 따라 새로운 각도만큼 회전하라. 그 위치에 하나의 점을 찍고, 나머지 280개의 점에 대해서도 동일한 절차를 반복하라. < 순열 >의 시각적 패턴은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알고리즘으로 짜여있다. 반지름과 각도를 매개변수로 하는 일대일 대응 함수들이 전부이다(휘트니는 「디지털 하모니」에서 반지름 변수를 RT로, 각도 변수를 DT로 표시하면서 이 두 변수가 달라짐에 따라 어떤 패턴이 생성되고, 이에 대응하는 음계는 무엇인지 상세하게 설명해놓았다. 다소 분량이 많은 관계로 이 글에 옮기기가 어려운데, 관심 있는 분들은 56-59페이지와 70-71페이지에 삽입된 그림만 참조해 봐도 좋을 것 같다). 휘트니가 <순열>에서 수행했던 작업 방식은 <스크리닝 룸>(하버드 대학의 인류학과 교수이자 대학 내 필름 연구 센터를 설립했던 로버트 가드너가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진행했던 프로그램으로, 휘트니가 첫 번째 출연자였고 이외에도 미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가들이 출연했었다. 이 중에서 20여 편은 DVD로 발매되어 판매 중이다)이라는 TV 프로그램[영상6]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BaW4DTKNflA'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6]<스크리닝 룸>에 출현한 휘트니의 인터뷰 휘트니가 < 순열 >에서 사용했던 작업 방식은 디지털 컴퓨터에서 포트란(FORTRAN)과 같은 형식언어를 사용했을 때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는 절차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휘트니에게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쇤베르크의 12음기법에 대응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휘트니의 작품들에서 원형의 패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가 특별히 반지름과 각도라는 두 변수를 통해서 생성되는 패턴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변수를 사용했을 때 만들어지는 패턴들(대표적으로 장미꽃잎과 같은 패턴)들은 사전에 계획되었던 것이 아니라, 두 변수들의 비율을 변경해가면서 생성되었던 것이다. 휘트니는 반지름과 각도의 비율을 변경했을 때 특정한 패턴이 생성되었다가 점이 분산되어 임의로 흩어진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긴장과 이완의 반복으로 이해했다. 그가 유동적 건축이라는 개념을 이해했던 방식대로 <순열>을 만들었던 것이다. 쇤베르크의 이론에 받은 영향을 고려하면 휘트니가 말하는 하모니가 어색해 보이지만, 이때 하모니는 화성이 아니라 가로 대 세로, 반지름 대 각도 등의 비율에 따라 긴장이 생성되고 해체된다는 것을 뜻한다. 휘트니가 < 순열 >에서 디지털 컴퓨터를 처음 사용했다고 해서, 카메라와 필름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 카메라와 필름은 촬영장치가 아니라 하드 디스크를 대신하는 저장장치였다. 휘트니는 아날로그 컴퓨터를 사용했던 <카탈로그>부터 컴퓨터를 시각적 패턴을 생성하는 데 사용했고, 녹화와 후반작업은 필름으로 했다. 컴퓨터로 시각적 패턴을 생성하고 난 다음에 한 프레임씩 흑백 필름으로 촬영하고, 색깔은 옵티컬 프린터를 이용해서 입혔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당시의 컴퓨터 시스템의 저장과 그래픽 능력이 빈약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휘트니가 비로써 카메라와 필름을 내던진 것은 <아라베스크>(1975)를 만들면서부터였다. <순열>에서 사용된 음악은 순다람 발라찬더(Sundaram Balachander)가 연주한 남인도 음악이었다. 휘트니 형제가 피싱거의 작품을 기성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음악의 사용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선택 역시 당대 컴퓨터의 연산 능력으로 하나의 코드로 그림과 소리를 동시에 생성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만약 휘트니가 동시대와 같은 컴퓨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면 그가 설정했던 과제들을 고려해볼 때, 실시간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에 가까운 작업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 순열 >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색채에 있다.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한다는 과제에 비추어본다면, 색채 역시 일련의 규칙들을 따랐어야 했다. 그러나 특정한 규칙을 발견할 수 없고 임의로 선택된 것처럼 보인다. [영상4]에서 카메라가 위에 고정되어 있고 회전하는 이미지 디스크 아래에 휘트니가 컬러 필터를 삽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색채만큼은 작가의 선택과 회전하는 디스크의 속도가 조합되어 반쯤은 의도적이고 반쯤은 우연히 결정되도록 남겨두었다. 색채에서 어떤 규칙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라베스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 점들의 위치를 계산하는데 있어서는 엄밀한 규칙을 적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색채와 관련해서는 작가의 결정도 아니고 완전히 우연도 아닌 둘 사이의 애매한 중립을 선택했던 것일까? 앞서 설명했듯이 휘트니가 사용할 수 있었던 컴퓨터의 그래픽 시스템으로는 색채를 실시간으로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색채를 실시간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은 필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필름은 현상과 프린팅 과정에서 색을 균일하게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당시의 휘트니에게 색채는 계산 불가능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한계가 휘트니가 비디오라는 매체의 미래를 낙관했던 이유이다. 비디오에서는 실시간 피드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휘트니는 색채를 온전히 계산 가능한 영역으로 옮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휘트니는 색채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다소 복잡한 심경을 밝혔다. 화가에게 색채는 일반적으로 물감, 손, 눈이라는 세 요소간의 직접적인 일대일 상호작용으로서 직관적으로 경험된다. 이토록 친밀한 스스로 직접 하는 상호작용은 이성보다도 창의적인 마음을 요구하며, 컬러 필름으로 작업하는데 필요하다. 컬러 필름의 현상 과정을 화가처럼 통제하고자 했던 나의 노력들은 종종 좌절되고 말았다. 현상실과 프린팅 단계들에서 걸리는 시간은 순간적인 직관과 실제적인 색채 효과 사이를 단절시켰다. 휘트니는 색채에 관해서 만큼은 화가의 직관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휘트니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휘트니와 동시대에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을 했던 스탠 반더빅, 벤 라포스키, 메리 엘렌 뷰트에게도 규칙에 온전히 주도권을 넘기지 않고 마지막까지 창조의 신비성이라 불릴만한 영역을 고집하는 태도가 발견된다. 그래서 동시대에 독일에서 컴퓨터 예술을 개척했던 프리더 나케는 “미국/캐나다의 접근 방식은 이론이 없다. 그냥 즐기고 네 작업을 하고 창조적이 되며 뭔가 흥미로운 것을 하라는 식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캐롤린 케인(Caroly L. Kane)은 「색상 알고리즘: 코드 이후의 색채 합성, 컴퓨터 아트와 미학 Chromatic Algorithms: Synthetic Color, Computer Art and Aesthetics after Code」에서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독일 방식과 신비주의적이고 주관적인 미국 방식을 비교하였다. 이 책에서 케인은 미국 방식을 주체와 저자성(authority)이라는 낭만적인 관념을 유지하려는 태도로 해석하고 있다. 케인의 해석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만 개인적으로 좀 더 흥미로운 해석은 자벳 패터슨(Zabet Patterson)의 「대포 제어기로부터 만다라까지: 존과 제임스 휘트니의 사이버네틱 영화 From the Gun Controller to the Mandala: The Cybernetic Cinema of John and James Whitney」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논문에서 패터슨은 휘트니가 개발한 M5 대공 방어 미사일 유도 장치가 영화 제작에 사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패터슨은 영화라는 매체와 미사일 유도 장치가 인간의 시각과 신체를 구조화하는 방식의 차이를 강조하였다. 영화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기반한 매체이다. 반면에 미사일 유도 장치는 목표물을 쫓는다는 점에서 전투기에 부착된 반구형 포탑과 같은 계열의 장치이다. 영화와 반구형 포탑 장치 모두 객관성과 투명성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카메라 옵스큐라에 기반한 영화는 성찰적이고, 관객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게 한다. 반면에 반구형 포탑 장치는 시야에 들어온 목표에 신체가 즉각적으로 개입하고 반응하도록 훈련하여 시스템 회로의 일부가 되게 만든다. 패터슨은 휘트니의 < 순열 >을 분석하면서, 관객이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흐르고 변화하는 패턴들을 기억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의 순수한 지각한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고 보았다. <순열>은 사용자의 시선을 목표물에 고정시키고 신체가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반구형 포탑 계열의 장치로 만들어졌지만, 휘트니가 순수한 추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관객이 사이버네틱 시스템의 일부로 종속되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타당하다면 휘트니가 색채에 대해서 주저했던 이유도 M5와 영화라는 이질적인 시각체계가 교차할 수 있는 비결정적인 영역을 남겨두려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글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패터슨의 논의를 좀 더 전개시켜보면 요즘에 유행하는 VR영화가 논리적으로 가능한 개념인지와 이질적인 시각체계를 결합하기 위해서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따져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휘트니는 「디지털 하모니」에서 1960, 70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두 가지 흐름-영화에서는 언더그라운드, 미술과 음악에서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에 불만을 표했다. 휘트니는 1960년대에 한때 뉴욕에서 20세기 초반 유럽 예술의 기준을 가장 젊은 예술인 영화에 이식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전위를 자처하는 영화작가들이 그 노력들을 한 번도 제대로 평가한 적이 없었다고 보았다. 그 노력들 대신에 들어선 작가들과 관객들은 스스로를 언더그라운드로 격하시키며, 성행위나 개척하는 것을 언더그라운드라고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휘트니는 1960년대 당시에 우연과 주역에 열광했던 지식인 부류의 태도에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우연과 주역에 대한 관심을 마치 우연이라는 신비에 의지하면 시나 음악이 저절로 완성될 것처럼 간주하는 태도라고 비난하였다. 휘트니는 1970년대 초반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유행했던 것도 우연에 대한 열광이 연장된 것이라고 보았다. 컴퓨터가 난수를 발생시키는 최상의 장치였기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하면 우연이라는 원칙을 따르는 예술 창작이 가능하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휘트니는 뉴욕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이 당시 컴퓨터 기술이 가장 앞섰던 캘리포니아로 몰려왔지만 이내 곧 물러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당시의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밑바탕부터 스스로 만들어가거나 이미 완성된 기술을 활용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는데, 이 두 가지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휘트니는 그가 활발하게 작업했던 당대에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 양쪽에서 모두 환대를 받았지만 동시에 배제되기도 했다. 그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영화 쪽에서 휘트니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작가 정도로 치부되고, 미술 쪽에서 컴퓨터 예술을 논의할 때 막스 벤제의 정보미학과 프리더 나케와 같은 독일 작가들 위주로만 다루어왔다.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미술, 음악에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은 이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휘트니는 양쪽 모두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암묵적인 가정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 가정은 생성 문법에 의존하고 있다. 휘트니는 촘스키가 두 가지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새로운 문법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가의 여부이고, 두 번째는 음악과 예술이 당연히 언어인가의 여부이다. 휘트니는 이 두 질문에 응대함으로써 새로운 문법과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 모두의 과제라고 보았다. 지난 20여 년 간 국내에서 전개되어왔던 디지털 영화와 미디어 아트에 관한 논의들을 돌아보면,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분리되어 별다른 교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40년여 전에 휘트니가 설정했던 과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탐구해야 할 영역으로 남아있다. ※ 이 글에서 언급된 영화들과 휘트니 형제에 관한 사실과 일부 견해들은 다음의 책과 논문들을 참고하였다. Carolyn L. Kane, Chromatic Algorithms: Synthetic Color, Computer Art and Aesthetics after Cod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4. Paul J. Karlstrom(ed.), On the Edge of America: California Modernist Art, 1900-195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John Whitney, Digital Harmony: On the Complementarity of Music and Visual Art, Kingsport Press, 1980. Zabet Patterson, “From the Gun Controller to the Mandala: The Cybernetic Cinema of John and James Whitney,” Grey Room 36, Summer 2009, pp. 3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