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사람들
- 감독
- 유재원
- 제작년도
- 1957
- 출연
- 하연남, 김석훈, 추석양, 박암, 정성숙, 강계식, 노재신, 석금성, 복혜숙, 주선태, 박순봉, 백송, 이인권, 권명숙, 석귀녀
2019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중 상영 전 작품 소개 왜 대구에서 영화글을 쓰나요? 그 소박하면서도 긴 여정 2025년 가을, 대구·경북에서 지난 10여 년간 나온 100여 편의 영화를 소개하는 책을 한 권 출간했다. 그저 몇 년 동안 꾸준히 기록해 온 글 모음일 뿐인데, 이런 유형의 작업은 최초라는 소릴 여기저기에서 듣는 중이다. ‘지역’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쓰고 활동한다는 소개를 하면, 대개 접하는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게 마련이다. 1) ‘얼마나 수고(혹은 고생) 많으냐’, 2) ‘거기에서 어떻게 (제대로) 활동하느냐’다. 둘의 온도는 차이가 크지만, 배경은 거의 다르지 않다. ‘지역’에서 영화를 논하기 어렵다는 전제다. 영화 평론집을 내고 ‘작가’란 어색한 호칭을 종종 듣지만, 평론가를 지망한 적은 딱히 없었다. 영화와 무관한 일을 하며 받는 업무 스트레스를 풀고자 영화제에 종종 다니던 게 조금 유별난 점이란 정도? 그러다 조금씩 지역의 독립·예술영화 극장과 소규모 상영회에도 간간이 다니게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쑥 상영회를 열어보겠다는 꿈이 생겼다. 그렇게 모든 재앙(?)이 출발한다. 상영회를 열며 소소한 영욕을 쌓아간다. 관련 활동을 이어가니 주변에서 알아차리게 된다. 영화를 매개로 한 교육이나 사업 기획이 생업에 침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공사 구분이 허물어지자 화근은 종잡을 수 없이 커진다. 마침내 영화제를 열어보자는 제안이 나오고, 실무를 떠맡게 된다. 그렇게 2010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가 시작된다. 영화제 자원활동가도 한 번 하지 않고 졸지에 영화제를 책임지게 된 셈이다. 이후 10년간 좌충우돌 행각이 이어졌다. 저서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소 뒷걸음질 치다 쥐잡기? 어쩌면 필연을 가장한 우연 영화제 관객으로 다녔을 뿐, 실무는 관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작품을 발굴하고, 상영작을 수급한 다음 행사를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 온갖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관객의 다양한 수요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건 물론, 정산과 평가까지 마쳐야 행사 하나가 끝난다. 온갖 사건 사고를 겪으며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 무엇보다 영화를 선별하는 안목이 얼기설기 형성되어갔다. 작지만 내실 있는 영화제를 꾸린다는 건, 실무적으로 경험이 축적되는 것과 함께, 무엇보다 자신만의 선구안이 형성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해당 영화제가 지향하는 가치, 공유하고 싶은 주제가 (영화제가 상정하는) 관객과 접점을 형성하기 위해선, 개별 ‘취향’과는 구별되는 ‘지향’이 필수다. 영화제를 통해 프로그래머의 가치와 덕목을 어렴풋이 깨우쳐 나갔다. (좌) 2019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중 단편2 섹션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우) 2018년 전태일 노동영화제 중 < 사수 >(김설해, 정종민, 조영은, 2018)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며칠에 불과한 영화제 동안 소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뻔하다. 여건의 한계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작품이 잔뜩 쌓이게 마련이다. 추가 상영을 향한 갈증은 별도의 상영회로, 사전 제작 지원으로 자연스럽게 향한다. 물론 새로운 도전이니 풀어야 할 과제가 수북하다. 용케 고비를 넘기며 소박한 성과를 이룰 때마다 욕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지역 영화제는 서울과 비교해 너무도 취약한 다양한 영화와, 이를 매개로 한 프로그램에 목마른 지역 관객에게 부족하게나마 극장의 대체재로 기능한다. 그 특성을 깨닫는 순간, 무형의 책임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우리 지역에 반드시 그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하는 작품은 무엇일까? 턱없이 부족한 자원과 기회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최적화 모델을 찾기 위한 계산과 순수한 열망이 끝없이 충돌하며 개인의 욕망과 지역 영화문화의 공공성이 외줄타기를 거듭했다. 맨땅에 헤딩하기로 얻는 찰나의 행복, 일상의 갈증 지속 가능한 영화제를 내실 있게 꾸리고, 여력 닿는 한 온갖 명목으로 공동체 상영회를 기획하고, 영화제 프로그래머란 직함으로 여기저기 영화를 소개하는 자리에 나가거나 글을 기고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순서다. 이름을 걸고 적합한 작품을 추천해 기대 효과를 충족해야 한다. 다양한 수요가 예상치 못하게 불쑥 제기되더라도 늘 열과 성을 다해 의뢰에 응대할 때만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 어느새 업계 관계자(!)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에 걸맞은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은 점점 늘었다. 물론 대부분은 누가 강요한 게 아니다. 그래도 하면 좋을 듯하거나 필요할 일이란 생각에 자발적으로 벌인 일이다. 그러니 잘 안 풀려도 하소연하거나 누굴 원망할 수 없다. 그러나 못내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찰나의 보람과 일상의 고민이 쌓여만 갔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19가 터졌다. 영화제나 상영회를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설상가상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오랜 입원 기간 동안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외출도 면회도 통제된 가운데, 다행히 와이파이는 잘 터졌다. 노트북을 켜고 영화를 본다. 하지만 허전함은 여전했다. 영화를 소개하고 나누는 재미가 없었던 탓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게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한 글쓰기를 시작했다. 영화제 일을 하면서 조금씩 글을 쓰긴 했지만, 대개 작품 소개를 위한 한정된 분량과 용도에 그쳤다. 긴 글을 쓸 여력도 없고, 쓴다고 해도 게재할 지면이 지역엔 딱히 없었던 탓이다. 영화를 소개하는 건 글보다는 상영 기획으로, 혹은 종종 들어오는 방송 프로그램으로 수행해 왔다. 외부 조건의 극단적 변화로 그 경로가 변경되어야 할 상황이 닥치자, 자연스레 영화글 쓰기로 중심이 이동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그냥 쓰고 싶은 작품에 관한 글쓰기가 아닌, 보다 선택과 집중에 의한 작업을 구상하게 된다. 일단 다양한 영화를 소개해야 하는데, 마침 코로나19로 인해 얼어붙은 극장가엔 역설적으로 저예산-다양성-독립-예술영화 소개가 상대적으로 늘어나던 참이다. 재개봉 붐도 일었다. 다양한 영화가 어려움을 뚫고 극장에 걸리는데, 정작 이런 영화들의 정보를 접하긴 무척 어렵다. 자연히 (재)개봉 독립·예술영화 작품 소개 글을 기고하게 된다. 지역에서 영화 잡상인이 존재할 이유 다음으로 상영 활동을 수행하며 알게 된 지역 영화인과 그들의 작업을 알리고 싶었다. 역시 주기적으로 리뷰를 작성한다. 영화 애호가가 아닌 평범한 이들에게 일상과 영화가 연결되는 접점을 만들고자 예전부터 틈틈이 작성하던 교육 목적 기고도 꾸준히 잇는다. 어느새 해야 할 몫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불어났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정체성에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인정받기 위해 십여 년 넘게 분투해 왔건만, 정작 본업은 지지부진한데 부업이 활발해진 격이라 그렇다. 그렇게 어쩌다 시작한 정기적 집필 작업은 크게 세 경로로 집중되어갔다. 가변적인 글쓰기 실험으로 인스타그램에 영화 단평을 별도로 올렸다. 단평은 정식 기고의 초벌 스케치 역할과 더불어, 지면 게시용으론 애매한 분량이나 비중의 작품도 공개적으로 소개하는 우회로로 상정했다. 그저 많이 보고 능력껏 쓰는 것에서 출발해, 일정한 방향과 목적의식을 갖고 작품을 소개하는 공적 경로를 좌표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조건반사처럼 끊임없이 지금도 글을 작성하는 중이다. 그 과정이 반복되며 일종의 축적을 낳는다. 기존의 오프라인 상영을 통해 형성해 온 독립·예술영화계 네트워크를 다른 각도로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필자가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리뷰 피드(< 밸브를 잠근다 >, < 입문반 >) 그런 실용성 말고 이런 글쓰기 활동이 지역 영화 (창작 및 관람) 환경에 어떤 순기능을 수행하고 있을까?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한, 혹은 남들이 상대적으로 덜 다루는 희소성에 주목한 데 불과할까? 해당 질문은 지금도 수시로 머릿속을 맴돈다. 혹시 이 고민에 답을 얻기 위해 지역 영화 관련 활동을 계속하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그러나 조금씩 몇 년간 꾸준히 수행하던 지역 영화 글쓰기의 쓸모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독립영화에서 ‘지역 영화’는 꾸준히 호명과 소환을 거듭해 왔다. 주요 영화제에서 여러 이름으로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주로 포진한 영화학과 중심)에 대비되는 로컬 작품 위주 부문을 신설하고, 지역별 독립영화제에서도 해당 분야 비중이 대폭 늘어났다. 영상 제작 환경의 긍정적인 변화와 교육/지원기관의 증가로 지역에서 제작되는 영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 안에 무수한 다양성과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유력 영화제에서 호명되고 수상하지 않는 한, 절대다수의 지역 영화는 소리 소문 없이 잊히기 일쑤다. 물론 이는 수도권 지역에도 적용되지만, 바늘귀의 크기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역 영화생태계’란 수식어가 종종 등장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심도 있는 논의는 찾기 힘들다. 대개 개별 지역마다 (변화된 창작 환경에 따라 대폭 증가한) 창작자는 꼭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소수나마 복합상영관에 걸리는 상업영화에 만족하지 못하는 관객층, 그들에 의지하며 능력껏 다양한 작품과 기획을 선보이려는 상영 공간 및 집단이 존재한다. 지역 영화제/독립·예술영화관/(근래 확산되는) 상영회 개최그룹 등이다. 이들을 묶어 흔히 생태계로 호칭한다. 지역 영화 창작자와 독립·예술영화 관객이 별개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 작은 영화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싹틀 법하다. 그러나 가야 할 길에는 난제가 숱하다. 우선 관객 입장에선 반드시 지역 영화를 관람할 이유랄 게 없다. 세상에 봐야 할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 정보도 찾기 힘든 낯선 영화까지 챙겨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다 보니 지역에서 만든 영화가 평가받는 거의 유일한 기준은 (외부의 알려진) 영화제 진출과 수상 경력으로 제한된다. 자기 동네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돌고 돌아 역수입이 되어야 비로소 인식 대상이 되는 것이다. 지역 영화의 매력이자 개성이라면, 다양한 고유의 소재와 배경, 지역 사회와 문화에 주목한 특유의 색깔일 텐데 정작 그나마 소개될 기회를 얻는 경로는 그 특색과 동떨어지기 쉬운 셈이다. 이런 오류를 보완하는 데 지역 사회 내에 공존하며, 영화생태계 일부로 소속감을 지닌 평론/평론가의 존재는 필수적인 윤활유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2023년 반짝다큐페스티벌 중 섹션4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작은 변화의 가능성과 함께 엄습하는 숙제들 지역에서 왕성히 활동하는 인터넷 대안언론 《뉴스민》에 제안해 ‘무비053’이란 이름의 칼럼을 열었다. 2주마다 꼬박꼬박 대구(경북) 지역 작가와 배경의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2022년 3월부터 기고를 개시한 해당 칼럼이 훗날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의 산파가 된 셈이다. 몇 년 전부터 틈틈이 비정기 기고는 진행했지만, 본격적인 지역 영화글을 집필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글쓴이에게 일어난 변화는 작지 않다. 지역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쓴다는 건 단순히 글쓰기로만 끝나지 않는 일이다. 일단 영화를 찾아봐야만 한다. 대부분 지역에서 제작되는 작품이 단편이다 보니 오프라인 상영을 찾아다녀야 한다. 그나마 대구는 근래 비교적 활발하게 작품 창작이 일어나고 있기에 작품 숫자는 적지 않은 편이나, 지역별 편차에 따라 애초 작품 수급 자체가 힘든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일상적인 상영 공간이 부재하니 한 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볼 기약이 없다. 그런 상황이라면 창작자에게 별도 연락을 취해 과정을 밟아야만 한다. 그런 수소문을 통해 멀찍이 거리를 두던 지역의 영화인들과 대면하고 교섭(?)을 치르게 된다. 해당 과정을 반복하며 정보를 취합하고 평론 글을 게재하면 창작자의 반응을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거의 경험할 기회가 적다 보니 글쓴이가 기대하던 교류를 얻기란 지극히 드물다. 그저 자신의 작업에 누군가 반응을 남겼다는 사실 자체로 기뻐하거나, 혹은 오탈자 지적이나 창작 의도에 부합하는 글을 암묵적으로 바란다는 확인이 대다수 반응을 이룬다. 이럴 땐 맥이 빠지지만, 결국엔 양측 모두 훈련과 적응이 필요한 사안이긴 하다.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 관련 대화형 행사 (좌) 2025년 부산다큐필름페스티벌 중 토크 포럼 / (우) 2025년 안동중앙아트시네마 내 북콘서트 안면을 트고 인사하게 되면 새롭고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는데, ‘팔이 안으로 굽지 않느냐는’ 의심이다. 이는 여전히 저울에 올라오는 쟁점이기도 하다. 작품에 대한 상세 정보 취득이 수월해지는 만큼, 그에 비례해 중심 잡기라는 난제가 동시에 닥친다. 지역 영화를 둘러싼 일종의 ‘온정주의’에 관한 입장은 극명하게 나뉜다. 누군가는 당연한 일이라며 여러 제약을 극복해 완성된 지역 작품을 ‘동료’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게 틀린 게 아니라 말하지만, 누군가는 그러한 근접성이 공정한 비평과 동떨어진 것이라 비판한다. 정답은 늘 그 중간 어딘가에서 형성된다. 글을 쓸 때마다 성배를 찾는 불가능한 모험을 거듭해야 한다는 뜻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송고했다고 바로 끝나지 않는다. 해당 작품이 웬만큼 외부에서 소개되지 않았다면, 대부분은 필자의 글이 유일한 ‘공식’ 평론으로 남는 경우가 태반이다. 즉, 해당 작품 관련 검색 가능한 ‘정전’이 되는 셈이다. 이는 아주 살짝 보람인 동시에 큰 부담으로 자리한다. 작품이 온당하게 평가받고 소개될 수 있도록, 일종의 A/S 과정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다. 작품이 추가로 상영 기회를 얻게 지원하는 임무도 부여된다. 영화의 의미와 가치, 효용을 글을 쓰면서 포착한 데 기반해 가능한 선에서 추천하고 제안하는 과정이 글을 쓰는 동시에 부가된다. 지역별 영화생태계에서 비평의 자리를 찾기 위해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일부 작가의 작업을 일종의 ‘작가론’으로 작성하는 경로에 진입한다. 단편 위주로 작업하는 지역 창작자에겐 쉽게 접하기 힘든 기회인 도시에, 평론 관점에서도 창작자의 출발점부터 연속적으로 작업을 관찰하고 포착할 수 있는 드문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 계기를 통해 드물게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창작자를 지켜보는 건 ‘발견’의 기쁨이 되곤 한다. 여기까지 언급하면 한국 독립영화의 ‘블루 오션’으로 간주할 만하지만, 실제로 지역 영화 글쓰기는 외롭고 험난한 길이다. 우선 공개 지면이 거의 부재하다. 물론 서울 등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평론 영역에서도 지면 축소는 공통된 화두겠지만, 지역은 몇 곱절 더 심각하다. 일단 영화 평론을 전문적으로 실어주는 매체 자체가 드물다. 일간지나 공중파 방송 역시 전문 코너가 부재한 데다, 온라인 미디어 또한 전문 지면을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글쓴이 역시 라디오 프로그램에 간헐적으로 출연하는 것 외엔 안정적인 미디어 지면을 확보하는 데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사실상 자기가 글을 올릴 지면을 새로 만들어야만 가능한 셈이다. (좌) 2019년 대구MBC 프로그램 <문화극장 조조할인> 중 코너 ‘작은 영화관’ 녹화 현장 (우) 2023년 KBS2 라디오 프로그램 <음악과 음악 사이> 중 코너 ‘이 영화 어때요’ 생방송 현장 물론 없던 지면을 창조하다시피 하니, 중앙 미디어에 비교하면 노력과 봉사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지면을 유지하는 것도 감사한 일인 경우가 허다한 탓이다. ‘박리다매’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고료를 받고 평론을 싣는다는 기준을 설득하는 자체부터 쉽지 않다. ‘무료’로는 원고를 싣지 않는다는 원칙을 꺼내며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글을 쓸 수도 없다. 하지만 제대로 쓰고 싶은 만큼 전문성을 추구하는 데에도 한계가 뚜렷하다. 해당 매체 독자층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좀 더 핵심적인 화두가 있는데, 애초 지역을 기반으로 영화 평론을 수행하는 동업자 겸 경쟁자 집단이 부재한 데 기인하는 문제다. 원래 고민하던 목적의식, 지역 영화에 대한 다양한 비평을 통한 ‘기대 효과’가 온전히 구현될 수 없다는 구조적 한계는 대구·경북은 물론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통된 난제다. 동료를 만들고 싶어도 찾기란 쉽지 않다. 아무래도 협업이 당연한 영화 창작 과정이나 상영 활동과 달리, 기본적으로 개인 작업인 특성 때문이다. 아울러 관심사와 여타 조건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공동 작업은 더욱 고난도로 변한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일단 지역에서 전문화된 글쓰기를 상시 과제로 삼는 필자 찾기가 1차 관문, 지역 영화에 관심을 가진 이가 희소한 게 2차 관문, 조건 다 맞아도 일감이 없는 지역에서 해당 활동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게 3차 관문이다. 그야말로 ‘좁은 문’이다. 그룹을 구성해 ‘선의의 경쟁’을 일상에서 수행하지 않는다면 지역에 절실한 다양한 결의 비평 문화 조성은 암초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태계 순환 과정에서 창작 집단에 자극을 주고 긴장을 유지하려면 넘어야 할 벽이기도 하다. (좌) 2022년 안동중앙아트시네마 내 영화비평 강좌 ‘영화 보기의 미학’ 프로그램 소개 (우) 2022년 인디플러스 포항 내 강의 ‘독립영화의 감상과 비평’ 지역 영화 예산 복원을 넘어서 지속 가능한 생태계 형성까지 2023년, 몇 년간 조금씩 조성해 왔던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역 영화 창작 및 영화문화 관련 예산이 전액 삭감된 후, 현재까지 관련 예산은 복원되지 못한 상태다. 자연스럽게 지역 영화 관련 지원 및 정책 초점은 해당 사안으로 귀결되는 실정이다. 물론 (개별 지역이 아닌 전체) 총액 12억이란 별것 아니게 보이는 지원 예산을 참 알뜰하게 써가며 여러 항목에 골고루 종잣돈이 되온 게 증명되기에, 본 예산은 복구를 넘어 대폭 확대되더라도 전혀 낭비가 아니다. 문제는 몇 년째 이 문제로 지역 영화에 대한 모든 담론이 환원된다는 점이다. 일단 ‘지역 영화(창작과 문화)’ 정책 수립의 초점과 방향이 확립되어야 한다. 현재 정부의 영화정책은 여전히 20세기에 형성된 ‘수출산업’에 방점이 찍혀 있다. 한국 독립·예술영화는 그런 시각 아래 철저하게 상업영화의 ‘(산업)예비군’으로만 사고해 온 게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언젠가부터 독립영화와 창작자마저 마치 국가대표팀 선발하듯 국내외 주요 영화제 진출과 수상 중심으로 서열화되는 실정이다. 그런 일방적 기준에 의한다면, 지역 영화는 2군도 아닌 3군 이하로 취급될 뿐이다. 당연히 관심을 호소해봐야 헛수고일 따름이다. 이런 난맥상을 돌파하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수다. ‘산업’ 중심주의를 돌파하지 않으면 결국엔 지역 영화는 유령처럼 떠돌 뿐, 실체를 갖출 수 없다. 지역의 인재는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서울로 향하면 되고, 지역의 관객은 복합상영관 객석을 채우는 머릿수로만 족할 뿐인데 지역 영화에 유의미한 관심이 향할 리 없다. 기껏 기존 예산이 복구된다 해도 그저 시혜적인 상징에 불과할 테다. 지역 영화(창작과 문화)를 진흥하려면 우선 서울을 제외한 지역 공통 현황과 함께 차별화된 지역별 특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영화문화 측면을 뛰어넘어 한국사회 고질병인 ‘서울 공화국’ 문제와 직결된다. 즉 지역 균형발전, 지방분권 쟁점과 같은 궤로 놓고 접근해야 할 사안이다. 그렇게 발상을 전환한다면, 독립·예술영화 접근 기회의 균등은 곧 비수도권 주민들의 문화복지 권리 일부가 된다. 물론 그저 최신 상업영화 대작 관람 기회를 넘어, 다양한 영화문화 접근권으로 향해야 유의미할 것이다. 지역 영화에 관한 글쓰기는 그저 개별 창작물에 관한 평론으로 그치지 않는다. 해당 작품이 꼭 영화제를 거쳐 인정받지 않더라도 지역 내에서 충분한 함의와 가치를 갖는다면 이를 포착해 소개하는 기능을 통해 지역 영화문화 형성의 일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글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상영 활동 등 2차, 3차 소개 기회를 넓히는 파급력을 상정하며 글을 쓰게 된다는 의미이다. 얼핏 피곤하거나 과도한 확장으로 받아들여질 주장이다. 그러나 지역 영화를 평론한다는 건 글쓰기로만 국한하기에 애초에 불가능한 과제다. 일종의 능동적 ‘수용’ 활동이자 순환계 내에서 끝없는 운동을 거듭하되 ‘미토콘드리아’처럼 일정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지역화’한 영화 평론은 예산과 지원 대책에만 갇히지 않는 지역 영화문화 형성의 일부로 역할을 얻는다. 물론 ‘가지 않은 길’이기에 정답은 누구도 모른다. 다만 기존 독립·예술영화 비평 모델과 비교하면 보다 사회학적 접근, 현장 참여에 주목하는 형태를 지니리라 예상해 본다. 일단 떠나지 않고 지역 사회 쟁점과 배경을 숙지한 상태로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고 발굴해 접속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개인을 넘어 집단으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분법을 넘어 공생하는 영화생태계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지역 영화 글쓰기는 고유의 형상과 임무를 찾게 될 테다. 지금은 일단 씨를 뿌리며 경작에 나설 시간이다. 2019년 대구MBC 프로그램 <문화극장 조조할인> 중 코너 ‘작은 영화관’ 녹화 현장 * 사진 전체: 필자 본인 제공 김상목(스크리닝 메이커) l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제와 상영회 기획부터 매체 기고, 라디오, 텔레비전, 교육 강연 등 들어오는 일 마다하지 않고 즐겁게 지역에서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며 활동 중. 저서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 공저 『이것은 카메라입니다』(2022) 집필.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1. 2013년, 영화진흥위원회가 홍릉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30여 년간 운영해오던 필름 현상 업무를 종료했다. 이를 끝으로 국내의 모든 필름 현상소가 문을 닫게 되었고, 사실상 한국의 상업적 필름 관련 산업 대부분도 정리되었다. 이제 무비 필름을 현상하고 프린팅 하려면 해외로 보내야만, 무질서하게 흩어진 필름의 은입자를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필름이라는 매체의 물성을 점점 더 멀리 밀어내고, 디지털 이미지의 매끈하고 평평한 표면만을 우리의 시각 경험 중심에 남겼다. 미디어의 발전은 흔히 필름에서 비디오, 그리고 디지털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궤적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비디오와 디지털을 먼저 접한 뒤 필름을 경험한 내 입장에서, 적어도 필름은 과거의 매체가 아니라 디지털 이후 새롭게 등장한 ‘뉴미디어’였다. 그러나 내가 필름이라는 매체를 알게 되었을 때, 이 ‘뉴미디어’는 이미 영화산업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있었다. 사물의 가치가 경제적 효용성과 합리성을 통해 판단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름은 디지털 매체의 편리성과 효율성에 밀려 점차 추방되었던 것이다. 나조차도 효용의 관점에서 퇴보한 기술로 여겨졌던 이 사물을 직접 다뤄 보기 전까지는 필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흔히 필름은 그저 과거의 감성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소비되거나, 디지털과 이분화된 대립 속에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지금의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이 사라진 매체를 추억할 기억도, 향수에 젖을 과거도 없다. 이들은 단순히 필름과 디지털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두 매체가 발생시키는 관계 를 통해 필름을 이해하고, 다룬다. 오히려 이런 관계가 미디어가 하는 일을 더 잘 알 수 있게 하며, 선형적 시간성에 대한 기성의 인식을 갱신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과 마주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투명한 감각>(2022) 독일 하메른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의 뒷이야기를 다룬 <투명한 감각>(2022)은 이와 같은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필름 애호가들의 실천을 사라진 친구를 기억해 내기 위한 세 사람의 분투로 알레고리화한다. 카메라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남겨진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간다. 다리를 저는 아이,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아이. 이 세 아이는 피리 소리를 쫓아 사라져 버린 친구들이 남기고 간 사물들을 매개로 그들을 기억해 낸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조각을 덧대고 연결해가면서 서사를 작동시키고자 하는데, 이들이 재연해 낸 서사는 사라진 친구들의 시간을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지금 공동의 증언을 통해 새로이 구성되는 것이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 시대에 여전히 필름으로 작업하는 이들의 창작하는 방식에 관한 은유로, 이들은 더 이상 산업적으로 생산되지 않는 장비와 장치를 3D 프린트를 이용해 직접 생산하고, 그것들을 온라인 공간에 올려 자신과 같은 애호가들과 공유한다. 3D 모델링으로 새롭게 고안되어 공유되는 16mm 현상장비 3D 모델링 영사기 부품 중 필름 롤러 (사진: Thingiverse ) <투명한 감각>이 공동의 실천을 통해 과거의 매체를 ‘지금, 여기’로 불러냈다면, <베르팅커>(2022)의 경우 상상력을 통해 실존하는 별자리와 가상의 신화를 연결하여 매체를 ‘지금 여기’로 소환한다. <베르팅커>(2022) <베르팅커>는 실제 존재하는 별자리 ‘파리자리’에 착안해, 별자리가 된 사물의 삶을 은유한 작업이다. 1603년, 독일의 천구 지도 제작자인 요한 바이어(Johann Bayer)가 만든 천체 지도 ‘우라노메트리아(Uranometria)’에는 51개의 별자리가 표기돼 있는데, 그중 하나가 파리자리이다. 이 작품은 ‘파리자리’에 대한 가상의 설화를 만들어 필름의 의미에 대해 질문한다. <베르팅커>는 과거에 사물과 장소를 실로 묶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내는 정령에 대한 이야기로, 존재한 적 없는 ‘베르팅커’라는 대상을 상실된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세계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디지털로 이미지를 촬영하고, 3D로 이미지를 생성한 뒤 이를 필름에 프린팅하고, 필름 위에 잉크로 직접 드로잉하는 과정을 통해 제작되었다. 디지털 작업을 통해 추상화된 이미지는 필름의 물질적 표면 위에 드러나며, 그 후 잉크라는 물질 자체가 필름 표면 위에 새겨지는 화학적 과정을 거친다. 이처럼 디지털과 아날로그 기기 사이를 반복적으로 오가며 제작된 <베르팅커>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익숙하지 않은 시각적 경험을 제안한다. 2. 디지털 시대에 우리의 경험은 더욱 개별화된 가운데 선택의 폭은 더 넓어졌다. 영화 역시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제작 과정에서도 물리적·시간적 제약으로부터 한층 더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이렇게 확장된 선택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알고리즘이라는 체계는 우리의 선택의 폭을 익숙하고 비슷한 관심사 안에 가두고 있으며, 디지털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 역시 정해진 프로그램과 에셋(Asset)의 사용에 의존하여, 역설적으로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George Walton Lucas Jr.)는 디지털 기술이 전례 없는 창작의 자유와 효율성으로 모두가 영화를 제작, 배포할 수 있는 민주적 시대를 열 것이라 예견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대로 디지털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환상적인 세계가 과연 우리의 경험을 민주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확장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패터슨>(2016) 영화 < 패터슨 >(짐 자무쉬, 2016)의 주인공 패터슨은 버스 기사이자 시인이다. 그의 시는 버스 안에서 만나는 무작위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패터슨이 좋아하는 시인이자 소아과 의사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시 또한, 진료 현장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탄생했다. 영화 속 래퍼가 읊조리는 윌리엄스의 시구 “관념이 아닌 사물로(No ideas but in things)”는 이러한 ‘직접적 접촉(immediate contact) *주1 ’이 창작의 본질임을 상기시킨다. 이렇듯 ‘직접적 접촉’은 단순히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과정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사람이나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확장해가는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는 접촉을 통해 개별화된 ‘나’ 라는 존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경험이었다. 이 접촉의 중요성은 비단 창작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데,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관람이라는 행위를 통해 예상치 못한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낯선 이야기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것. 영화는 그런 낯선 접촉을 통해 우리의 시야를 확장한다. 반면 최근 디지털화된 우리의 경험은 점차 통제 가능하고 선택된 것들로 제한되며, 예측 불가능한 접촉에 대한 면역력을 잃어 가는듯하다. 이런 디지털 시대에, 필름 작업은 창작에서의 접촉과 제약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필름 장비를 구하기 위해서는 온라인 중고 거래 플랫폼을 통해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접촉해야만 하는데, 이 과정에서 때로는 퇴역한 군인의 삶, 때로는 사라져 버린 극장의 은퇴한 영사 기사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필름이라는 물질적 저장 매체는 단순 도구를 넘어, 창작자와 물리적 환경, 그리고 그 환경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일종의 연결 고리로 작용한다. 작업을 하며 만나게 된 사람들 (좌) 카메라 관련 장비수리 진영사 / (우) 서울아트시네마 전 영사 기사님의 작업실 또한, 필름의 물리적 특성은 창작에 있어 물리적 제약을 제시한다.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은 필름의 길이에 의해 제한되며, 이미지를 보기 위해 복잡한 현상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온도와 습도, 스크래치 등 물리적 조건에 민감한 필름은, 디지털 기술에서 간과되는 물질성과의 상호작용을 다시 일깨우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확실성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경험이다. 작업 중 만나게 되는 이러한 예상 밖 사람들과 물리적·시간적 제약은 상상력을 요청했고, 예상치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알지 못했던 세계와 연결될 수 있었다. 상상력은 현실적 제약과 접촉을 토대로 성장하며, 디지털 세계의 무한한 자유만으로는 물질적이고 유한한 우리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루프>(2024), 설치 전경, 아마도예술공간 (사진: 조준용) 최근의 작업 <루프>(2024)는 이렇듯 디지털 장치들의 물질적 조건이 신비화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디지털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환상적 세계는 디지털 매체가 지닌 물질성을 얇은 표면 안으로 숨기고 이음새를 보이지 않게 만듦으로써 마치 그것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특징은 디지털 이미지가 무한히 확장 가능하고, 물리적 한계에 구애받지 않는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신비화의 전략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단편만을 경험하게 한다는 비판 아래, 최근 이미지 지지체들의 얇아진 세계를 열어젖혀 이미지 기기의 기능 중 하나인 반복 재생의 기능을 루프라는 시스템으로 가시화했다. 보다 가볍고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디지털 미디어의 시간에서, 인간의 몸을 비롯해 유한할 수밖에 없는 물질세계와 마주해 보려는 의도로 진행한 작업이다. <루프>(2024), 설치 전경, 아마도예술공간 (사진: 조준용) 디지털을 경유한 필름의 이미지들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세계를 더욱 잘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필름 이미징 작업은 단순히 과거 매체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롭게 주어진 선택지를 활용해 지금의 선택지들을 재평가하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필름은 우리에게 ‘관념이 아닌 사물’로서, 일상 속에서 우리가 가진 제약과 타인의 이야기로부터 예상치 못한 응답을 이끌어내는 활동이 아닐까? 디지털 시대에 불편하고 현실적인 제약에 끊임없이 응답해야 하는 접촉과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궤도를 이탈하게 되는 필름 작업은 포스트-시네마 시대에 영화가 가진 힘을 재조명하며, 다양한 존재와 현실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시하는 상상력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 주1. 윌리엄스는 시는 도서관 같은 고독한 공간에서 벼려진 시인의 독특한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거의 무시되어온 사물이나 환경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면서 그것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쓰여져야 한다고 믿었다. (진은영, 김경희, 「영화 <패터슨>에 나타난 시와 예술의 공공성」, 『문학치료연구』 50호, 한국문학치료학회, 2019, 181쪽.) 윌리엄스가 다루는 대상은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그 주위의 시간과 공간은 이상하게 왜곡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오로지 평범함을 통해서 평범함을 벗어나([the] banal to escape the banal)(SE 236)고자 하였으며, 오로지 상상력을 통한 사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인해 사소한 일상 속에 감추어진 광대한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류기택,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적 상상력과 상대성 이론」. 『영어영문학연구』 41호(1), 32쪽.) 한우리(미술작가) l 물질이 만들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포털>(2024), <루프>(2024), <베르팅커>(2022) 등 작업.
< 모어 >는 무용수, 드랙퀸 예술가, 뮤지컬 배우, 에세이스트로 활동 중인 모지민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다큐멘터리이다. 영화의 제목 ‘모어’는 모지민의 예명으로 ‘more(조금 더)’와 ‘毛漁(털 난 물고기)’를 함의한다. ‘more’는 화려하고 과잉된 드랙퀸 미학을 지시할 수도 있지만, 트랜스젠더인 그를 향한 사회의 잔인한 편견에 의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꿈과 욕망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육지에서도 물에서도 이질적인 ‘털 난 물고기’처럼 관습적으로 주어진 자리를 넘어서 그 이상의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선 비규범적 존재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은 ‘털 난 물고기’에게 ‘털’이 살아가는 데 무슨 소용이냐고 존재 이유를 따져 물으며 괴롭히지만, 모지민은 오히려 그 털의 움직임과 방향, 그리고 길이와 색을 다양하게 만들며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실천해오고 있다. 영화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발레의 길에서 이탈한, 그럼에도 예술가로서 살아남은 모지민의 삶을 예찬한다. 발레 전공으로 예고를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발레리노가 아닌 발레리나가 되고 싶던 모지민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그 길에서 이탈한다. 여성성을 버리라고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무용계에서 모지민은 예술가로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발레리나라는 최선의 선택지가 있었지만 세상은 그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드랙퀸 공연은 그 대체제였다. 그래서 드랙퀸 공연은 그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그가 발레리나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비극, 그럼에도 춤과 공연이라는 예술적이고 신체적인 표현에 대한 갈망을 채워준 환희의 무대, 그리고 클럽에 놀러 온 관중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엔터테이너로서 감정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노고. 그에게 드랙퀸 공연은 복합적인 대상이다. 영화 <모어>는 드랙퀸으로서의 모지민에 대한 매혹을 숨기지 않는다. 클럽에서 드랙퀸 공연을 하고, 뮤지컬 오디션을 보고, 애인에 대한 애정과 소소한 갈등을 드러내고, 농촌지역에 사는 부모님을 방문하는 등 모지민의 일상이 스케치 되는 가운데 화려한 쇼가 계속된다. ‘쇼는 계속 된다’는 뮤지컬 장르의 정언명령에 의해서 말이다. 서울과 뉴욕 같은 대도시 한복판에서, 부모님의 살고 계시는 고향의 논밭 사이에서, 아버지가 운전하는 경운기 위에서, 황량한 항구에서, 눈 내리는 산 속에서 그는 화려한 분장과 의상을 더한 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드랙퀸은 기본적으로 과잉의 미학이다. 여성성의 인위적 과장은 기존 사회에서 규범화된 여성성이 원래 얼마나 과장되고 인위적인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정해진 자리와 규범을 초과하는 일탈의 쾌락을 공유하고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전시한다. 드랙퀸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무언가를 ‘더(more)’ 덧붙이는 방식으로 모지민을 보여준다. <모어>는 미국의 드랙 리얼리티 경연쇼 <루폴의 드랙 레이스>(2009~현재)나 드랙 문화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포즈>(2018~2021)에 나올 법한 프로페셔널하고 미학적인 드랙 공연을 삽입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과장되고 장식적인 아름다운 드랙쇼 만큼이나 집중할 것은 덧붙이기보다는 덜어냄을 통해 만들어내는 공연과 마음들이다. 영화는 자주 삽입되는 야외 공간에서의 드랙쇼 외에 실내의 어두운 무대에서 나체로 춤을 추는 모지민의 공연을 길게 보여준다. 이 공연에서 모지민은 어떤 분장이나 의상도 없이 춤을 춘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모지민이 큰 갈등과 어려움 없이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지냈다고 과거를 기억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어른들은 알 수 없거나 눈치 채도 크게 의미두지 않았던 따돌림과 폭력이 있었다. 나체로 춤을 추는 한 장면에서 모지민의 뒤로 중학교 시절 친구로 은유되는 댄서가 어둠 속에서 등장해 그의 목을 조른다. 그는 강렬한 분장을 하고 있다. 어른들이 아름답게 추억하는 이면에는 어린 모지민의 혼란, 고통, 분노, 좌절이 공존했다. 영화는 그가 감당했어야 할 어두운 이면이 무엇이었는지 깊고 상세하기 묘사하기 보다는 춤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사실 비수술 트랜스젠더로서 자신의 나체를 보여주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모지민은 자신의 신체가 표현하는 주체이자 오브제이기도한 예술가로서 자신과 세계와의 복잡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표현과 장식을 덜어내고 어두운 이면을 보여줄 것을 선택한다. 더함과 덜어냄, 넘침과 모자람, 화려함과 단순함 모두 모지민이기 때문이다. 장난스럽고 인위적이고 과장된 독백의 내레이션과 대화하듯 자연스러운 내레이션이 교차해 나오지만 둘 모두 모지민의 목소리인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카메라는 분명 뮤지컬적인 드랙의 화려한 스펙터클에 매혹되어있고 그것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동기임을 숨기지 않는다. 동시에 모지민이라는 예술가가 표현하고 싶은 어둡고 미니멀한 춤과 침잠되어 있던 마음을 표현할 자유로운 무대를 펼쳐주기도 한다. 극단의 표현들은 대립적이지 않고 서로를 밀고 당긴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하는 스크린과 다 보여줄 수 없는 스크린 밖 현실이 그 경계를 끊임없이 이동시킨다. 감독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모지민은 예술가 대 예술가로서 끊임없이 협상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큐멘터리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극영화보다 얇고 투과성도 높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거나, 완성된 다큐멘터리가 단순히 현실을 변화시키는 식의 일방향으로만 힘이 흐르지는 않는다. <모어>는 영화와 현실, 보고 싶은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 보여줄 만한 것과 끝끝내 보여주지 못한 것 사이의 얇은 경계막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파열되고 움직이고 있는 현장을 포착해 낸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