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팟][복학생의비애]1. 기대와 현실
- 제작년도
- 2011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책에는 저자의 후기가 없다. 책을 끝낸 단상만 있을 뿐이다. 그곳에는 이 책이 박사논문을 보완한 것이라는 정보와, 기억과 망각에 대한 상념과, 고마운 이들에게 전하는 문장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책에 싣지 않은 후기, 모두 떠난 뒤에 도착하려고 일부러 늦게 출발한 이의 기록이 될 것이다. 박사논문을 쓰면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먼저 드는 질문은 왜 사람들은 누아르에 대한 인상이 다들 제각각일까 하는 것이었다.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읽어 보면 한국의 대표적인 누아르 영화로 박훈정 감독의 < 신세계 >(2012)를 꼽는 이들이 많다. 몇몇 이들은 김성수 감독의 < 아수라 >(2016)를 언급하기도 한다. 혹은 이해영 감독의 < 독전 >(2018)이나 변성현 감독의 <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2017)을 거론하기도 한다. 대부분 범죄자의 세계를 다룬 영화들이다. 많은 이들이 누아르는 어두운 세계를 어둡게 묘사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두운 세계는 무엇이고 어두운 묘사는 무엇인가? 나의 논문은 이 질문에서 시작하였다. 두 번째 질문은 누아르 문헌들을 읽으면서 생겨났다. 여러 연구자가 글을 시작하면서 누아르 영화는 장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누아르 영화는 분위기나 스타일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왜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일까?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었다. 논문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첫 번째 질문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질문은 글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책에서 적었듯이 한국 누아르는 시대와 지역을 가로지르며 합치되고 분기되는 혼종성의 산물이다. 시대의 경로에 지역의 특수성이 결합한다. 할리우드 고전 누아르에서 한국 누아르에 이르는 길에는 시대와 지역의 여러 흔적이 흩어져 있다. 누아르 장르가 혼종성의 산물이고 장르 역시 혼종성의 산물이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다. 고전 누아르도 어느 날 불쑥 솟아난 지대가 아니다.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과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와 미국의 하드보일드 소설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 담론도 가세했다. 기원에 대한 추적은 기원을 해체한다. 기원이나 종점도 없이, 이상이나 목적도 없이, 그렇게 휩쓸리고 뒤섞이며 흘러온 결과가 지금의 한국 누아르 영화이다. 나는 책에서 이 과정을 추적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명확한 지도가 아니라 흔적들의 성좌였다. 그렇다면 연구자들이 누아르는 왜 장르가 아니라고 했는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어렴풋이 드러난다. 결국 나는 연구자들이 누아르 글을 시작하면서 짧게 언급한 한두 문장을 오랜 시간에 걸쳐 추적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 작업이 허망하지는 않다. 연구자는 앞선 연구자들이 남긴 가벼운 문장에 의문을 품고 긴 주석을 남겨 놓기도 한다. 『누아르의 타자들』은 연세대학교에 박사논문으로 제출한 「한국 누아르 영화의 위상과 표상」(2022)을 편집한 책이다. 일련의 과정은 영화의 편집 공정과 유사했다. 어쩌면 논문을 쓰고 책으로 펴내는 과정 전체가 나에겐 영화를 제작하는 공정을 상기시킨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서는 프로듀서의 역할을 했지만, 책을 만드는 공정에서는 영화감독의 입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감독들과 오래 일하면서도 몰랐던 그들의 내면을 훔쳐본 셈이다. 책을 출간하면서 논문의 앞부분을 크게 줄였다. 논문에는 장르 이론과 필름 누아르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구성도 바꿨다, 장과 절로 나뉜 논문을 책에서는 장만으로 엮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박찬욱 영화에 관한 비평 글을 실었다. 영화로 치면 마지막 편집본을 수정해 극장 개봉을 한 것이다. 편집본의 앞부분을 덜어내고 전체 구성을 손보고 보충 촬영을 실행한 셈이다. 나는 책에서 누아르의 계보와 계열을 정리했다. 고전 누아르에 영향을 끼친 사조에서 시작해서 고전 누아르, 네오 누아르, 홍콩 누아르를 거쳐 글로벌 누아르에 이르는 여정과 이 지류들이 한국 누아르로 편입되는 흐름을 추적했다. 여기까지가 한국 누아르의 위상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나머지는 한국 누아르 영화들에 대한 비평이다. 앞부분이 한국 누아르의 계보에 해당한다면 뒷부분은 한국 누아르 영화의 계열이다. 책을 쓰면서 나는 두 가지 목표를 가정했다. 하나는 누아르라는 울창한 숲을 조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뻗어 있는 나무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누아르의 검붉은 숲길을 함께 걷길 바랐다. <말타의 매>(존 휴스턴, 1941)와 <첩혈쌍웅>(오우삼, 1989) 중 (사진: " The Maltese Falcon ", " Dip huet seung hung ", IMDb) 한국 누아르 영화는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한국 누아르 영화가 세계 관객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감각 때문일 것이다. 단지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장면들로만은 설명되지 않는 이 극단의 감각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 나는 필름 누아르의 장르 특성과 한국 현대사의 지난 상흔을 탐색했다. 필름 누아르는 이름 그대로 ‘검은 영화’이다. 그렇다면 ‘검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책에서 이 단어의 문화적 의미를 탐색했다. ‘검다’라는 것은 폭력과 섹스의 기표이다. 검은 것은 따라서 두렵고 매혹적이다. 검게 내려앉은 도시에서 낯선 남녀가 만나는 것은 두렵고도 매혹적인 일이다. 누아르가 그리는 세계가 이런 풍경이다. 빗물이 고이고 네온이 비치는 거리에서 낯선 남녀가 만난다. 유혹과 살인의 예감이 얼굴을 스친다. 누아르는 명암대비가 선명한 키아로스쿠로 조명으로 이 공간을 채색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는 할리우드의 누아르이다. 여기에 낭만과 비애와 비정이 교차하는 홍콩 누아르가 접속한다. 누아르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이다. 한국 누아르 영화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일 뿐 아니라 후각적이기까지 하다. 한국 누아르에는 피 냄새가 난다. 피의 비린 내음이 관객의 감각을 적신다. 그래엄 그린(Graham Greene)은 누아르 영화를 ‘피의 멜로드라마(Blood Melodrama)’라고 칭했는데 이는 한국 누아르 영화에 적절한 표현이다. 나는 누아르의 계보를 그리기 위해 고전 누아르, 네오 누아르, 글로벌 누아르를 탐색했다. 이 과정이 한국 누아르에 이르는 궤적의 수평선이라면 홍콩 누아르와 일본 누아르는 수직선이다. 이 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한국 누아르가 있다. 이 지도는 평면도가 아니다. 여러 굴곡이 있는 입체적인 도형이다. 구릉은 솟았다 꺼지고 길은 사라졌다 나타난다. 책에도 적었듯이 한국 누아르에 영향을 준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오우삼 의 < 영웅본색 >(1986)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 펄프 픽션 >(1994)이다. <영웅본색>은 홍콩 누아르를 세계에 알린 영화이고 <펄프 픽션>은 글로벌 누아르를 견인한 영화이다. 할리우드의 필름 누아르는 1950년대 이후 주춤하다가 1970년대 과도기를 거쳐 1980년대 초에 네오 누아르로 부활했다. 1992년은 필름 누아르의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이 해에 < 원초적 본능 >(폴 버호벤, 1992)과 < 저수지의 개들 >(쿠엔틴 타란티노, 1992)이 개봉했다. <원초적 본능>은 네오 누아르의 정점을 찍은 영화이고 <저수지의 개들>은 네오 누아르에서 글로벌 누아르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던 영화이다. 1992년은 또한 한국 누아르의 시작을 알린 < 걸어서 하늘까지 >(장현수, 1992)가 개봉한 해이기도 하다. 한국 누아르의 연대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시기는 2000년 전후와 2010년 이후이다. 2000년을 전후해 < 해피엔드 >(정지우, 1999), < 텔미썸딩 >(장윤현, 1999), <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2002)이 개봉했고, 2010년 이후에 < 황해 >(나홍진, 2010), < 악마를 보았다 >(김지운, 2010), <아수라>(김성수, 2016)가 나왔다. 2000년 전후는 한국 누아르가 성숙한 시기이고 2010년 이후는 한국 누아르가 숙성한 시기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 누아르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시기가 2000년 전후라면 2010년 이후는 한국 누아르가 독한 향기를 내뿜던 시기였다. 그 향기는 비린 피 내음이기도 했다. <악마를 보았다> 중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미 조짐은 보였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간을 씹어 먹고 아킬레스건을 자른다. <황해>는 칼로 쑤시고 도끼로 찍는다. 피와 살점이 사방에 튄다. <악마를 보았다>에선 신체를 절단하고 인육을 먹는다. <아수라>는 집단 학살로 끝난다. 한국 누아르는 왜 이렇게 잔혹한 것일까?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한국 현대사의 사건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주시한 역사의 현장은 1997년의 IMF 외환위기와 2014년의 세월호 참사였다.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이었고,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폭로한 사건이었다. 한국 누아르 영화는 한국인들이 조우한 집단 외상의 표현이다. 집단 외상이 유혈과 학살의 드라마로 펼쳐진다. 가학과 자학의 피의 멜로드라마가 전개된다. 시대의 외상이 한국 누아르를 검붉게 물들였다. 한국 누아르의 집단적 자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한국 누아르에 대한 영화 비평인 동시에 한국 사회에 대한 문화 비평이다. 책의 저자가 자신의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쩐지 민망하다. 그래서 일부러 책에 저자 후기를 넣지 않았다. 저자는 숨어 있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일부러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한 이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터이니 쑥스러운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강봉래(영화문화비평가) l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 전공으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임상수 감독의 < 눈물 >(2000)과 허진호 감독의 < 외출 >(2005) 프로듀서를 했고, 허진호 감독의 < 행복 >(2007)을 제작했다. 저서로 『누아르의 타자들』(2025)이 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가 간직한 이미지의 존엄에 관해 벨라 타르는 영화감독을 은퇴하면서 설립한 영화학교 ‘필름팩토리’의 취지문에서 이미지의 존엄성(dignity)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가 자신의 영화를 말할 때도 이따금 사용하던 단어다. 영화 작업은 존엄을 보존하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다. 벨라 타르는 연출자다운 확신의 언어로 말하지만, 존엄의 이미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확한 논리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영화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그의 믿음엔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이 있다. 하지만 존엄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존엄의 이미지는 어떻게 스크린에 정착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영화가 세계의 가려진 진리를 밝히는 안내서가 되길 바라지만 그런 믿음은 언제나 불투명한 결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사적인 인상이지만, 많은 이들에게 경험의 빈칸처럼 남겨진 코로나19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그 불투명한 자국은 더욱 짙게 남겨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시기에 존엄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절실한 필요성을 가질 것이다. 지극히 사소하고 범용한 사물이지만, 올해 지켜본 두 편의 영화에 나온 두 장의 종이가 마음에 남는다. 하나는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거장의 영화에 등장하고, 다른 하나는 팬데믹 시기에 촬영된 영화에 나온다. 모든 사회적 활동의 절차가 온라인과 디지털로 정립된 시기에 종이를 다루는 영화의 감각은 무척 희박하거나 시대착오적이라 말하기 쉽다. 두 편의 영화는 그처럼 미약하기 짝이 없는 종이의 물질성과 그 위로 글씨를 쓰는 손짓을 잊기 힘든 동작으로 새겨둔다. 두 장의 종이가 존엄을 증명하는 이미지의 사례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그 이미지들을 떠올리면 존엄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입에서 내뱉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들다. 한 장의 종이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 사랑은 낙엽을 타고 >에 나온다. 앞서 벨라 타르를 말하며 거론한 단어들(공장, 인간, 존엄)에 더없이 적합한, 일찍이 타르 또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카우리스마키의 신작이다. 슈퍼마켓 계약직으로 일하는 안사와 건설노동자인 훌라파는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의 사정으로 일자리에서 해고된다. 계약직과 일용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익숙한 광경이다. 그들은 노동의 권리를 잃어버린다. 물품을 다루고 건설 도구를 쥐던 손, 유통기한이 지난 샌드위치를 가져가고 술병을 들던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안사가 일하던 식당이 문을 닫자 갈 곳이 없어진 두 사람은 밤의 극장으로 향한다. 영화를 보고 나온 안사는 종이에 연락처를 적어 훌라파에게 건넨다. 안사가 떠나고 훌라파가 담배를 피우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다 그만 연락처가 적힌 종이가 바람에 날려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종이를 잃어버린 훌라파는 아무런 단서도 없이 극장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안사를 기다린다. 극장 문 앞에 두 사람이 있었고, 한 사람이 사라진다. 다른 한 사람이 기다리다 마저 사라지면 그가 피운 담배가 바닥에 남는다. 단순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이 막연한 기다림이 말로 설명되지 않는 깊은 비애감을 불러온다. 극장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려 본 사람이라면 연인을 기다리며 피우고 버려진 담배에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카우리스마키의 화면은 평면적이고 정적이다. 공간이 침묵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물들조차 몸을 움직이고 동작을 구사하는 것에 서투르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그의 화면은 몇 개의 단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름이 떠다니는 천국과도 같은, 하지만 카우리스마키가 다루는 인물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하늘(< 어둠은 걷히고 >의 원제는 ‘지나가는 구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인물들이 머무는 지상의 벽과 바닥이 있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공간을 극도로 단순화하는 절차에 속한다. 이러한 절차는 카우리스마키가 밝힌 촬영의 과정에 깃들어 있다. 그가 밝힌 화면의 단순화 과정은 이런 식이다. 하나의 벽이 있고, 벽 앞에 두 사람이 머무른다. 그 위로 미약한 빛과 깊은 어둠을 드리우고, 한 사람을 사라지게 한다. 그러면 남은 한 사람과 벽과 공간에 드리운 빛과 어둠이 있다. 남은 한 사람을 마저 사라지게 하면 벽과 빛과 어둠이 남는다. 벽을 제거하면 빛과 어둠이 남겨지고 마지막으로 빛을 제거하면 어둠이 남는다. 카우리스마키는 그 과정에 영화가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안사와 훌라파는 극장 문 앞의 벽에 선다. 그들 뒤에는 (두 사람이 함께 보고 나온 영화인) 짐 자무쉬의 < 데드 돈 다이 >와 데이비드 린의 <밀회>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안사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남기고 떠나면 훌라파가 남는다. 훌라파가 자리에서 벗어나면 벽과 빛과 어둠이 담긴다. 극장은 카우리스마키가 제시한 영화의 원리를 전하는 연인들의 장소다. < 그들 각자의 영화관 >에 수록된 카우리스마키의 짧은 단편 <주조공장>은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쉬는 시간을 묘사한다. 그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공장 안에 있는 영화관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카메라에 담아낸 뤼미에르의 단편영화를 본다. 건조하고 무뚝뚝하지만 친밀한 감정을 공유하는 관객들의 장소. 돈이 없는 채로 갈 곳을 잃은 안사와 훌라파가 일시적인 도피와 무뚝뚝한 사랑을 이루는, 상실된 만남을 기다리고 다시 재회하는 장소도 영화관이다. 과거 없는 남자가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그들은 기억 없는 극장에서 다른 시간으로 들어서고, 다른 현실의 경로를 택한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애틋하게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인간적 존엄과 기억의 흔적을 흰 종이나 천에 담아낸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 과거 없는 남자 >의 첫 장면에서 기차에 도착한 남자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집어 든 종이, 그리고 기억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그의 몸에 둘린 흰 붕대. 그것들을 바라보는 카우리스마키의 시선은 인물의 시선이 위치한 곳보다 더 낮은 곳을 향한다. 안사가 떨어뜨린 종이와 훌라파가 피운 담배는 모두 바닥에 남는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듯이 지상에 당도하는 시간을 담아낸 영화다. 영화 초반부, 안사가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들른 인터넷 카페가 30분에 10유로를 받는 규칙을 설정해두듯, 어느새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도 시간은 자본의 논리에 붙잡혀 있다. 카우리스마키가 전제하는 영화적 실천의 방법은 그 시간의 질서에 격렬히 저항하기보다는 다른 속도의 시간을 동반하는 데 있다. 극장 앞에서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는 상대방과 다시 만날 때까지 서 있는 믿음과 기다림의 시간이 그러할 것이다. 극장 불이 꺼지고 훌라파가 화면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그가 기다린 시간이 영화에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카우리스마키의 카메라에 포착된 이들은 세계의 질서를 벗어나 높은 곳으로 향하는 이상적 천사들이 아니라 지상의 중력에 속한 평범한 노동자이자 관객들이며 연인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그들은 어딘가로 떠난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엔딩에서 인물들은 배를 타고 바깥으로 떠나거나, 지상에 남아 삶을 이어간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결말은 조금 다른 인상을 남긴다. 안사와 훌라파는 어디론가 떠나간다. 하지만 그들은 바닥에 닿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한 마리의 개가 있다. 안사는 개의 이름으로 ‘채플린’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지만, 그들은 채플린의 떠돌이처럼 세계의 바깥을 배회하다 어느새 돌아오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곳에 있을 것이다. 그들 사이의 한 마리 개는 탈출을 모색하는 대신 이곳에 남아 삶을 지속하도록 이끄는 조건이다. 그렇게 두 사람과 한 마리 개의 뒷모습을 담아낸 마지막 장면이 이어진다. 존엄은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지상에서 대응하는 자들의 뒷모습에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종이에 대해 짧게 말하고 싶다. 미야케 쇼의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에서 주인공이 작성하는 공책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한 영화는 아닐 것이다. 다른 평자와 관객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도 이 영화의 아름다움에 즉각적으로 사로잡혔고, 특히 첫 장면을 무척 매혹적으로 기억한다. 선천적 청각장애로 귀가 들리지 않는 복싱선수 케이코를 다루는 이 영화는 그녀가 일기장에 무언가를 적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내용은 아직 알 수 없고 그녀가 들을 수 없는 볼펜 소리와 얼음을 씹는 소리가 관객에게 전달될 뿐이다. 16mm 필름의 질감 위에 정밀한 거리감으로 포착된 케이코의 옆모습은 이 영화의 특별한 자질을 순식간에 설득시켜버린다. 아름다운 도입부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기에 이 영화에서 글자를 쓰는 몸짓은 무척 특별하게 다뤄진다. 카메라는 잡다한 대화나 심각한 갈등을 포착하는 대신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케이코의 침묵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가끔 그녀가 공책에 무언가를 적는 순간을 기록한다. 얼마 동안의 시간을 지나 공책에 무언가 적는 케이코의 습관이 기억에서 희미해질 즈음, 우연히 그 기록이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진다. 갑작스럽게 입원한 체육관 코치의 병문안을 온 케이코는 병실에 들른 코치 아내의 요청에 공책을 건네준다. 케이코가 그린 그림과 매일 같이 실천한 자기명령의 기록들이 타인의 목소리를 타고 영화에 도착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한 장의 종이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타인의 목소리를 매개로 스크린의 표면에 도착하기까지를 기다리는 영화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도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한 막연한 기다림이 있다. 두 편의 영화가 오늘날의 광폭한 시스템과 질서에 대항해 복고적 취향을 되살리는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미야케 쇼는 영화가 간직한 고전주의적 믿음(두 연출자는 필름 촬영을 고집해 이 영화들을 완성한 이들이기도 하다)이 오늘날의 환경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 자문하는 긴밀한 긴장과 불화를 도입한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복잡한 문제로 향하지 않는다. 두 영화는 무척 단순하다. 에드워드 양이 < 하나 그리고 둘 >의 제작 의도의 핵심으로 ‘극도의 단순성’을 말하던 것처럼, 장 뤽 고다르가 < 언어와의 작별 >에 관해 직접 작성한 개요에서 영화를 “단순한 왈츠”에 빗댄 것처럼 영화는 고독하고 아름다우며 무엇보다도 단순한 문제다. 두 편의 영화는 그 단순함의 원리를 한 장의 종이에 담아 보여준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영화 이미지의 존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무해한 풍경과 친절한 예의 한낮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길가 한편의 나무 그늘 아래 귀가 잘 안 들리는 할머니가 농작물을 작은 소쿠리에 담아 팔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길목에서 할머니는 맹목적일 정도로 성실하게 자리를 지킨다. 매일 늦은 오후 퇴근해 자전거를 타고 동생이 있는 집에 돌아가는 계란장수 청년은 말도 없이 비닐봉투에 계란 다섯 개를 담아 할머니에게 주고 떠난다. 눈이 부시도록 쨍한 연두 빛 논밭을 가르며 달려가는 자전거 위로 분홍과 연보라가 섞인 노을이 하늘에 스며든다. 홍의정 감독의 첫 장편영화 < 소리도 없이 >는 인스타그램의 여행 포스팅에 등장할 법한 무해하고 환상적인 풍경을 오프닝의 시체 처리 장면 바로 다음에 붙인다. 시골 장터의 평범한 계란 장수처럼 보였던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은 조직 폭력배들에게 고문과 살인을 위한 장소를 제공하고 깔끔하게 시체처리까지 해주는 사업장을 운영 중이다. 이들의 일은 공유오피스 대여사업처럼 일상적이고 체계화되어 있다. 꼼꼼하게 우비, 고무장갑, 위생모자를 착용하던 창복은 자신이 입은 노란색 우비가 태인이 어린 시절 입던 것이라며 회상에 젖기까지 한다. 때리는 사람의 신장에 맞춰 사람을 매달고, 피가 묻지 않게 겉옷을 보관해주고, 바닥에 넓게 비닐을 깔아주는 작업과정은 전문적이고 분업화되어있다. 이들은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업계의 프로다. 하지만 창복과 태인은 왜 그 사람이 납치되어 살해당하는지 절대 묻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잠시 그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고 안타까워할 수는 있어도 거기까지이다. 곧 살해당할 그는 조립라인 위의 처리해야할 일거리에 불과하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은 그들의 몫이 아니다. 폭력과 살인의 끄트머리에서 포장과 폐기를 담당하는 창복과 태인은 스스로를 악인이라 생각지 않는다. 특히 창복은 죄를 사해줄 것이라 믿는 다종다양한 종교에 기대 죄책감을 가볍게 털어 버리고, 근면성실과 겸손을 강조하며 지루한 충고를 쏟아내고, 소소한 배려와 선행을 베풀며 자신을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이라 믿는다. 창복은 ‘다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기복신앙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다. 태인은 불만이 있어 보이지만 창복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는다. 태인은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누구도 그의 의견을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마지막 ‘판단’을 내린 후 생각을 멈춰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는 더 이상 소통하기를 거부한다. 창복과 태인은 가능한 다른 이들의 삶에 얽히지 않으며 그들의 세계를 최대한 축소하고 경량화한다. 그들의 삶에 타인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류하고 돈 벌며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친절과 예의이다. 이 영화에서는 언뜻 악인과 선인의 경계가 모호해 보인다. 드러난 행위만 보면 모두가 성실하게 자기 일 잘 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예의바른 태도가 도덕과 윤리를 대치한다. 그들은 꼬박꼬박 ‘선생님’ ‘실장님’ ‘부장님’이라 부르며 서로를 높이는 호칭을 붙이고 존대를 한다. 일이 끝나면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말도 잊지 않는다. 조직 폭력배 실장은 태인이 말을 안(못) 한다고 하자 입을 크게 벌리고 천천히 말하며 입술을 읽게 하는 ‘배려’를 베푼다. 유괴 아동을 인계한 범죄자들은 아이들이 잠시라도 편하게 머물도록 알록달록한 가구와 장난감이 있는 놀이방을 갖춰둔다. 하지만 이 모든 친절과 예의범절, 상대방을 배려하는 ‘선한’ 행위에 실제로 타인의 의향과 행위의 맥락은 빠져있다. 그들이 공들여 제공하는 태도와 형식은 자기 목적과 이익을 위한 것이다. <소리도 없이>는 오프닝에서 상세한 시체처리 과정과 목가적인 농촌풍경을 붙여, 형식과 내용의 뒤틀어짐, 순간적인 기분과 지속적인 정동의 불일치, 사건의 맥락과 단발적 행동의 모순이 팽배한 동시대성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창복의 ‘노란색 우비’ 대사는 둘이 오래 함께 일한 사이좋은 직장 선후배나 유사 부자관계인 것처럼 들리지만, 곱씹어보면 창복이 태인을 어릴 때부터 착취해왔다는 사실을 가늠해볼 수 있다. 혹은 창복이 태인을 납치한 걸 수도 있다. 창복과 태인의 관계에서 태인은 분명 피해자다. 토끼의 기지와 별주부의 어리숙함 홍의정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 때 <별주부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별주부전>에서 별주부는 용왕의 병 치료에 쓸 약으로 토끼의 간을 구하기 위해 뭍으로 올라온다. 별주부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며 수궁으로 토끼를 유인하지만, 토끼는 육지에 간을 두고 왔다는 기지를 발휘해 목숨을 구한다. <소리도 없이>에서 태인은 별주부이고 유괴 아동 초희(문승아)가 토끼다. 납치된 초희는 토끼 가면까지 쓰고 있다. 창복과 태인은 유괴조차 자기들의 의지로 행하지 않는다. 영화는 ‘의도치 않게’, ‘엉겁결에’를 강조한다. 수동성의 강조는 가해자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현실에서 ‘어쩔 수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다, 피치 못했다’는 모두 가해자들의 반복되는 전형적인 대사가 아닌가? 처음에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진행되는 사건 속에서 선택의 계기는 늘 존재했다. 분명 피해가 발생했고 돈을 받아내기 위한 인질이 된 초희는 그 피해자이다. 그런데 가해자가 분명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질적인 세계의 초희가 태인의 삶의 반경에 들어오게 되면서 태인은 처음으로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피해자인 초희가 역으로 자신과 동생을 도와주는 행동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초희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창복과 태인의 기분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난장판인 집안을 치우고 태인의 동생 문주를 씻기고 식사예절을 가르친다. 방치되어있던 문주는 교육을 잘 받은 중산층 가족의 초희를 만나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태인조차도 이러한 초희에게 마음을 연다. 마음의 동요는 타인을 인지하게 하고 그것은 생각과 판단을 요청한다. 별주부 역시 창복과 태인처럼 자기 의지보다는 용왕에 대한 충심과 자기 관직의 수호를 위해 움직인다. 이 우화에서 토끼는 낯선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상황을 판단한다. 뭍에서도 토끼는 약자이기 때문에 늘 포식자들의 눈치를 보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기위해선 머리가 좋아야 한다. 용왕이 간을 원할 때 발휘한 기지는 갑자기 생겨난 능력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들만 귀하게 여기는 집안에서 차별을 받으며 자랐을 초희는 부모의 맘에 들기 위해 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속내를 숨기며 살아왔을 것이다. 태인의 집에서 초희가 한 행동은 토끼의 기지와 유사하다. 그렇다고 태인과 문주, 부모를 향한 초희의 마음이 완전히 가짜인 것은 아니다. 그들 사이의 감정의 교류는 순간적으로 진짜일 수 있다. 태인이 초희를 장기밀매업자에게 보냈지만 마음을 바꿔 구한 것, 초희가 무서울까봐 화장실 밖에서 손뼉을 쳐준 것, 유괴와 몸값 요구에 참여했지만 가족들에게 돌려보낸 것도 진짜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별적 선행이 애초의 가해를 뒤집을 순 없다. 반복해 말하지만 태인은 유괴범이고 가해자이며, 초희는 유괴된 아동이며 피해자이다. 영화는 이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태인을 약자이자 피해자로 만드는 창복을 제거한다. 태인의 선택을 대리하는 창복이 사라지면서 태인은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게 된다. 그 순간에 태인은 조직폭력배 실장이 죽으면서 남기고 간 양복을 입는다. 양복은 좁디좁은 자신의 세계 밖의 다른 삶을 상징한다. 그러나 선악을 판단하고 도덕과 가치를 사유하는 주체적 삶은 그리 쉽지 않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태인은 자신의 선택으로 가장 선한 일을 했다고 판단한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유괴범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홍의정 감독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피해 생존자이자 머리를 잘 쓰는 주체적인 토끼보다는 어리숙하고 용왕의 말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별주부에 감정이입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별주부는 용왕만큼은 아니지만 토끼를 납치한 가해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초희는 가해자를 정확하게 지목하고 호명한다. 태인은 그 지명이 힘에 겨운 듯 도망치며 동경했던 ‘사유하는 주체’의 양복을 벗어 던진다. 도덕이 사라진 시대의 알레고리 발터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낭만주의 예술에서 상징에 비해 폄하 당하던 수사인 알레고리를 재개념화하고 조명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상징은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순간적으로 총체성을 이루며 명징하고 스스로 완결성을 갖는 아름다운 기호이다. 반면 알레고리는 우연적이고 무정형적이며 여러 시간적 계기 속에서 다의적으로 해석되고 역사적 번역과 파편적 몽타주의 작동을 요구한다. 알레고리에서 의미는 은폐되어있음으로 해서 소통의 (불)가능성과 다의성이라는 의미작용 그 자체를 노출시킨다. <소리도 없이>는 <별주부전>처럼 피해와 가해, 즉 도덕의 알레고리이다. 벤야민이 재개념화한 알레고리처럼 현대 사회에서 피해와 개해의 문제는 명징하지 않으며 복잡하다.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이라는 통일된 정형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위치도 다중적이고 뒤집어질 수 있다. 피해자는 주체적이고 똑똑할 수 있다. 가해자는 소소한 선행을 베풀고 예의바르거나 어리숙할 수 있다. 또한 한 사건에서 가해자인 이가 다른 사건에서는 피해자일 수 있다. 게다가 현대의 소비주의 사회에서 가치와 형식은 쉽게 뒤집어진다. 무해한 아름다운 풍경, 선행, 예의 이런 것들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모두가 고객이고 모든 행위가 ‘손해 보지 않으려는’ 거래일뿐인 시대에 단순히 서비스의 형식일 뿐이다. ‘착한 가격’, ‘착한 소비’처럼 말이다. 역으로 사람은 손쉽게 상품이 된다. 유괴범과 장기밀매업자들의 대화에서 아이들은 고객 만족을 위해 품질을 유지해야 하는 거래 품목일 뿐이다. 도덕이 사라진 시대, 피해자와 가해자의 정형화된 모습도 부재하고 그 위치성도 복합적인 시대에, 알레고리의 서사는 그 불일치와 혼란을 드러낸다. 그러나 알레고리가 각 사건에 분명히 존재하는 피해와 가해 사실을 지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알레고리는 피해와 가해가 발생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양상이 기대한 바와 다르다며 혼란스러워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고전 서사 <별주부전>이 토끼의 ‘간계’와 별주부의 ‘충심과 어리숙함’을 강조하며 순간적으로 감정이입을 뒤집지만 납치 사건에서 피해자는 토끼요 가해자는 별주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피해와 가해의 서사와 캐릭터는 복잡하고 기대를 벗어나 혼란스럽게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피해자와 가해자 혹은 피해와 가해 사실을 규정하고 밝혀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양복의 무게 태인은 양복을 입으면서 처음으로 생각하는 주체가 된다. 그의 삶에서 이 계기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 그는 사유와 판단의 주체로서 가해자임을 받아들인 것인가, 아니면 사유 없는 행동을 수행하며 테이프에 녹음된 기도소리에 기대어 살아갈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즉석 사진의 인화과정처럼 검은 무지 화면 이후 서서히 드러나는 ‘소리도 없이’라는 제목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영화는 태인처럼 뒤늦게 자신을 호명한다. 자신도 알지 못하게, 의도치 않게 ‘괴물’이 된 태인은 사유를 통해 대면한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이 영화의 처음 제목은 ‘소리도 없이 괴물이 된다’였다). 타이틀씬 이후 영화는 창복, 태인, 초희, 문주가 따뜻한 햇살 아래 즉석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멜랑콜리한 이 사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희가 부모에게 보낼 사진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었던 사진과 비교해 무엇이 더 진실인가. 둘 다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저 순간의 넷은 즐거웠지만 그렇다고 초희가 유괴된 아동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이미지는 상징처럼 순간적이다. 순간을 포착한 스냅 사진 이미지는 알레고리 속에서 총체화를 방해하는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의미작용이 가능해진다. 말하기를 멈췄던 태인은 그 스스로가 소통불가능성 시대 의미작용의 알레고리였다. 사유를 시작하고 가해자가 스스로 가해자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소통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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