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컨트리
- 감독
- 윌리엄 와일러
- 제작년도
- 1958
- 출연
- 그레고리 펙, 진 시몬스, 캐럴 베이커, 찰톤 헤스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생물학, 북극의 얼음, 동물의 살점, 알프스의 풍광, 채식주의, 생과 사, 언데드. 당신은 메리 셸리의 소설이 이런 맛깔나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에, 이 작품에 대한 생태비평이 수백 편쯤 제출되었으리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티모시 모턴은 2016년 “『프랑켄슈타인』과 생태비평”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지난 20년간 발표된 약 2천 5백여 편에 달하는 관련 비평에서 생태학을 명시적으로 다루는 작업은 1%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주변적이라고 평가한다. 최근 ‘인류세’ 담론이 대중화되면서 이런 판도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이 위대한 고전에 대한 생태적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다. 어쩌면 가장 흥미로운 생태비평은 지면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구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 프랑켄슈타인 >(2025)을 떠올리고 있다. 2025년 겨울,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최신작에서 델 토로는 셸리의 원작에 내재되어 있는 생태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끌어내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여기서 생태적 관점이란 단순히 기후재난이나 생태위기 등의 문제를 다룬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문명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非)생명적인 것 사이에 그어져 있는 허구적 경계를 질문하고 폭로함으로써 문명적인 것의 폭력성을 성찰한다는 의미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잃고 한낮 물질로 ‘전락’한 시체의 생기 없는 신체 조각들로부터 ‘피조물’을 창조했다. 누더기처럼 짜깁기한 피조물의 몸은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체현하는데, 사실 그 자체가 생명에 대한 사실이다.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명확한 경계란 것은 없다. 예컨대 바이러스는 동물의 생을 가능하게 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바이러스는 생명인가 비생명인가? 모턴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모든 생명체는 이미 “좀비”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빅터가 피조물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피조물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드러내는 임계점, 즉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쾌한 골짜기 역시 인간과 비인간, 정신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근대적 사유가 빚어낸 허상이다. 이런 이분법적 세계관이야말로 인간이 ‘자연’, 즉 ‘대상’으로 규정한 것들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가능하게 한다. 모턴은 불쾌한 골짜기가 확장되면 비로소 ‘유령적 평원(spectral plain)’이 열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생태적으로 각성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 주제는 델 토로보다는 셸리가 더 잘 다루고 있다. 피조물에 대한 빅터의 혐오를 매우 세밀하게, 기이한 열정을 담아,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델 토로는 피조물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재창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를 숭배하게 만든다. 피조물의 피부는 유약을 바른 것처럼 반짝이고, 봉합선은 괴물성이 드러나는 벌어진 틈새라기보다는 공들여 세공한 예술작품 같다. 그는 선하고 서글픈 눈매를 한 패셔니스타다. 델 토로의 피조물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고귀한 타자로서 우리에게 불쾌함의 작은 조각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화려한 미장센에 접붙여진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지만, 생태비평의 관점에선 가장 큰 약점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생태비평의 관심을 견지하고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피조물은 단지 소외된 타자가 아니라, 인간이 인식과 통제의 대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끝내 실패한 어떤 생태적 실재에 대한 의인화로 읽히기도 한다. 이는 델 토로의 작품 목록 안에서 견지되어 온 파시즘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논해질 수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중 사진: “ The Shape of Water ”, “ Guillermo del Toro’s Pinocchio ”, IMDb (© 2017 Twentieth Century Fox Film Corporation / © 2022 Netflix, Inc.) 델 토로는 < 악마의 등뼈 >(2001)와 < 판의 미로 >(2006) 등의 인상적인 초기작에서부터 전쟁이 세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특히 아이들의 생을 어떻게 박탈하는지 강변해 왔다. < 셰이프 오브 워터 >(2017)와 <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2022)에서는 이 문제의식이 생태적인 것으로까지 확장된다. ‘물고기 인간’은 다른 어떤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말살당하고 있는 아마존의 생태적 타자성에 대한 은유로서 등장했고, ‘피노키오’는 숲의 정령의 생기를 나눠 받은 ‘기물(器物)’로서 인간의 얇고 가벼운 시간을 넘어 심원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였다. 이제 <프랑켄슈타인>에 이르면, 세계에 대한 이해를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세계에 대한 정복으로 이해했던 북반구 근대주의자들의 탐욕과 광기가 어떻게 전쟁 및 자연에 대한 식민화와 분리 불가능하게 연루되어 있는지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이 관심사는 엘리자베스 캐릭터를 통해서 다루어진다. 그는 강인하고 우아한 사마귀처럼 스크린을 활보하면서, 원작과 이 작품이 가장 극적으로 달라지는 부분을 담당한다. 셸리는 엘리자베스를 빅터의 고귀한 사촌이자 지고지순한 연인으로 묘사했다. 델 토로는 엘리자베스에게서 순정을 지우고 일종의 매개자(medium)로서의 자질을 더했다. 이성과 과학, 정복의 언어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자연’과 만날 수 없는 빅터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세상의 “가장 작은 것들,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존재들”의 다채로운 모양과 빛깔에 감응하는 자다. 그가 곤충학에 조예가 깊은 이유다. 피조물은 근대적 지식의 격자 속에서 탄생했으나, 그 격자로는 충분히 포착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의 스케일을 초과하는 생태성을 그 뿌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근대적 이성과 비인간적 감응 사이에서 진동하는 자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피조물의 동선을 따라 펼쳐지는 ‘유령적 평원’의 유일한 목격자다. <프랑켄슈타인> 중 엘리자베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엘리자베스는 확신에 찬 반전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생과 사를 정복하겠다는 꿈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것인지, 그것이 어떻게 세계를 파괴하는 전쟁과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고 있다. 빅터와의 첫 식사 자리에서 전쟁과 빅터의 야망을 비교하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이상을 품었을 때” 벌어지는 비극이며, “그 비극을 부추긴 자”들은 죽음 앞에서 “모르는 척한다”라고 분노하는 이유다. 델 토로의 피조물은 피노키오의 또 다른 판본이다. 인간(혹은 아버지)의 목적을 위해 조립되었지만, 그 총합은 인간의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만 델 토로는 언제나 이 ‘기물’들에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선한 마음을 부여한다. 델 토로의 아름다운 판타지 월드의 또 하나의 한계는 어쩌면 이런 선량한 마음일 지도 모른다. 자연이란 그렇게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제임스 러브록의 경고처럼 ‘가이아’는 자신의 시스템을 망치는 존재를 오작동으로 인식하는 냉정한 피드백 루프임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손희정(문화평론가) l 미디어 그룹 '프로젝트38' 멤버.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2024) 집필.
일단 < 클로즈 유어 아이즈 >(빅토르 에리세, 2023)를 골랐다. 이 영화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 룸 넥스트 도어 >(2024) 사이에서 몇 초 망설였는데 그래도 빅토르 에리세의 신작을 넣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에리세의 영화를 내 리스트에 넣을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올까. 어떤 때는 이 정도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스페인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파블로 베르헤르의 < 로봇 드림 >(2023)인데, 아직 쌍둥이 빌딩이 건재했던 1980년대 뉴욕을 기가 막히게 재현한 애니메이션이다. 거기에 절절한 로봇과 개가 주인공인 멜로드라마를 넣어서. 오로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만 가능한 마법이다.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오시야마 키요타카의 < 룩백 >(2024)이다. 창작과 창작자에 대해 깊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짧지만 강렬하고 아름다운 예술가 영화다. 예술가 영화도 두 편이 더 있다. 하나는 위에 언급한 <클로즈 유어 아이즈>. 다른 하나는 모나 아샤쉐의 < 리틀 걸 블루 >(2023)로, 감독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여러분이 프랑스어권 유성애자 여성작가의 피학적인 오토 픽션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무언가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를 멀리하시기 바란다. 하지만 그런다면 여러분은 마리옹 코티아르가 펼친 최고의 명연 하나를 놓치게 된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냐고? 그렇긴 한데 그와 상관없이 감독은 코티아르에게 자기 어머니 역을 시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해가 간다. 모녀 이야기는 <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조지 밀러, 2024)의 도입부를 여는 중요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꼭 필요한 무언가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2015)가 그랬던 것처럼 끝내주게 재미있는 액션물이고, 이 영화의 실망스러운 흥행성적은 관객들이 뭘 모를 때가 많다는 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알려준다. 하긴 관객들은 개봉 당시 존 카펜터의 < 괴물 >(1982)도 대충 넘겼다. 그냥 그렇다고. 로즈 글래스의 < 러브 라이즈 블리딩 >(2023)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는 필름 누아르로, 몸과 섹스와 퀴어성에 대해 정말 신나고 뻔뻔스러운 장면들을 엮어대는 오락물이다. 아, 그리고 재미 이야기가 계속 나와서 하는 말인데, 션 베이커의 < 아노라 >(2024)와 모함마드 라술로프의 < 신성한 나무의 씨앗 >(2024)이 주는 재미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성노동자가 연결된 계급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룬 인디 영화와 마흐사 아미니 시위를 다룬 사회파 이란 영화가 이렇게 갑자기 대중적으로 (심지어 거의 고전 할리우드스럽게) 재미있어지면 관객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움과는 별도로 재미있는 영화들이 주는 즐거움을 주제의 무게나 구질구질함을 두려워하며 버릴 필요는 없다. 한국영화를 두 편 골랐다. 더 고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사방에 종말론적 예언이 나팔처럼 울려퍼지고 있었지만 올해 한국영화를 보는 경험은 여러모로 즐거웠다. 그런 경험을 제공해준 영화가 주류영화가 아니었을 뿐이다. 올해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퀴어, 특히 여성 퀴어 영화들의 공습으로, 어떤 때는 네 편의 영화가 동시에 극장에 걸려 다들 어리둥절해 하기도 했다. 당사자성 넘치는 사실주의극인 <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부터 올해 가장 뻔뻔스러운 길티 플레저인 < 히든 페이스 >(김대우, 2024)까지 다양하기도 했다. 세상이 바뀌는 걸 느낄 수 있는데, 그 때문에 드라마 < 정년이 >(2024)의 비겁함이 더 짜증난다. 오정민 의 < 장손 >(2023)은 거의 임권택 과 이두용 의 직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이다. 이러면 당연히 올드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텐데, 아니다. 이 영화도 ‘재미있다.’ 거의 1세기에 가까운 한반도의 역사를 가족사에 녹여낸 재주, 대한민국 가부장제에 대한 냉정한 고찰만큼이나 신기한 건 이런 주제로 신선한 재미를 끌어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열 편 중 아홉 편은 호오도를 떠나 대중적으로 매우 재미있다. 마지막으로 고른 영화가 남궁선 의 < 힘을 낼 시간 >(2024)이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이유로 내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열다섯 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케이팝 아이돌에 대한 영화라는 것이다. 수없이 이야기하는 거 같은데,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면 전보를 쳐라’라는 옛 할리우드의 격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놓고 뻔뻔스럽게 교훈과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재미있고 훌륭한 영화들은 많다. 전보로 전달한 텍스트의 다발과, 주제에 공감하는 작가와 감독, 배우들이 결합한 결과물의 차이는 엄청나다. 당연히 ’공익영화’는 비하 단어가 될 수 없다. 다른 모든 영화가 그렇듯 좋은 공익영화와 나쁜 공익영화 그리고 그 사이에 걸쳐진 광대한 스펙트럼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힘을 낼 시간>은 여러모로 일단 효율적인 공익영화다.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러닝타임 안에서, 선정적인 실제 사건의 구체적인 재현 없이 한국 연예계의 문제점들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정리해서 보여주는 영화가 얼마나 되는가. 이것만 해도 엄청난 성취인데, <힘을 낼 시간>은 이 모든 정보와 메시지를 다 담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매력적이다. 공익영화로서의 기능은 영화의 매력에 어떤 핸디캡도 되지 않는다.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이 영화의 다음 성취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지금까지 케이팝이라는 장르에 봉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상물을 만들려는 시도는 많았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초창기의 시도는 김기영 (동명이인이다)의 < 진실게임 >(2000)이다. 아마 더 이전 작품도 있을 거고 사실 여기서 정확한 경계선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 그래도 20년은 더 됐다. 하지만 성공작이 뭐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다들 주저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들은 < 내일부터 우리는 >(윤성호, 2017), < 아이돌 권한대행 >(윤성호, 박현진, 2017), <탑 매니지먼트>(2022)로 이어지는 윤성호 의 시리즈들이다. 만드는 사람들의 아이돌 문화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개성적인 유머 속에서 조화를 이룬 작품들인데 이 작품들이 아이돌 스토리텔링의 주류가 된 적은 없다. 아쉽게도. 나머지는 대부분 성공보다는 실패로 기억된다. 그 중 가장 처참한 실패는 아무래도 드라마 <청춘시대 2>(2017)였던 거 같은데. 일단 이 시리즈는 왜 아이돌 이야기를 왜 굳이 거기서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건 여러모로 최악의 오타쿠적 선택이었다. <힘을 낼 시간>은 소위 ’망돌‘이라는 소재를 공유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면에서 <청춘시대 2>와 반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장점이다. 일단 영화는 왜 이 영화가 ‘망돌들’의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한 아주 명쾌하고 당연한 이유를 갖고 있다. 주인공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세 주인공 중 망돌은 ‘파이브 갓 차일드‘라는 남자 아이돌 그룹 멤버였던 태희( 현우석 )뿐이다. 여자 아이돌 그룹 ‘러브앤리즈’의 멤버 수민( 최성은 )과 사랑(하서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제법 히트한 노래도 한 편 이상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래보다는 이 팀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더 먼저 떠올리고 제대로 정산을 못 받고 은퇴한 건 태희와 다를 게 없다. 하여간 이 셋은 전재산 98만원을 챙겨들고 제주도 여행을 오는데, 그만 첫날에 한 명이 사고를 내 돈 대부분을 날려버린다. 이 정도면 너무 어이가 없어 슬슬 웃음이 나오는 가학적인 블랙 코미디를 기대해 볼 만도 한 상황이다. 이 영화의 감독이 얼마 전에 < 십개월의 미래 >(2020)를 만든 남궁선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보다 평화롭고 진지한 길을 간다. 세 사람은 귤 따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고 자기들을 알아보는 케이팝 팬도 만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힐링’이라는 단어를 빼고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따분하게 들린다면 미안하지만, <힘을 낼 시간>은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치유의 과정에 대한 영화이고 여기에 진지하다. 이 영화에서 치유라는 단어는 결코 가볍게 쓰이지 않는다. <힘을 낼 시간>의 가장 큰 장점은 ‘좋은 의미로’ 머글스럽다는 것이다. 이 영화엔 다른 케이팝 아이돌 관련 작품들에서 쉽게 발견되는 징그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케이팝 아이돌의 친숙한 이미지를 따르고 그걸 페티시적으로 활용하는 대신 부당한 노동 조건 속에서 시달리다 버려진 젊은 노동자들을 그린다. 이 영화가 정공 공익영화로 기능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게 쓰면 무지 재미없게 들리는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은 대부분 대중적 재미가 풍부한 작품이다. 그건 일단 이 진지함의 정공법이 드라마에서 제대로 작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영화엔 더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오타쿠적인 선택 대부분을 피해가고 있고 일부러 아이돌 캐스팅도 하지 않은 영화인데도 여전히 아이돌스러운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대 장면 하나 나오지 않고 ‘가상의 아이돌 그룹 만들기 게임’에 집착하지 않으며 골수팬을 등장시키지 않는데도 영화는 부서진 홀로그램 조각처럼 케이팝 그룹을 이루는 수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노력한 팬이라면 러브앤리즈 팬픽을 쓰는 게 가능할 정도다. 영화의 의도는 전혀 아니겠지만. <힘을 낼 시간>은 최선 또는 최악의 타이밍에 개봉한다.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정치 상황이 모든 이슈를 잡아먹었으니 개봉하는 영화에겐 타격이 크다. 하지만 뉴진스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사람들이 아이돌의 노동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바로 그 정치적 상황 속에서 수많은 아이돌 팬들이 응원봉을 국회 앞에서 휘두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 이 영화에 맞는 시기가 있을까. 듀나(영화평론가) l SF 작가이고 영화 컬럼니스트다. 영화 관련 저서로는 『가능한 꿈의 공간들』(2015),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2),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2019),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2020) 등이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흔히 ‘망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말 전설적인 망작이 되어 오래도록 ‘제일 망한 영화’ 리스트에 오르내리는 방법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컬트로 재정의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시에는 망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그 ‘망했다’라고 평가되는 지점이 후대에는 묘한 매력이 되어 이를 즐기는 팬들에게 숭앙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할리우드 영화 역사에서 < 인천(오! 인천) >(테렌스 영, 1981, 이하 <오! 인천>)은 전자에 해당하는 영화이다. 천문학적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개봉 이후 비평계와 대중 양쪽 모두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했고, 제3회 골든 라즈베리상 최악의 작품상을 수상하며 그 명성에 정점을 찍었다(최악의 작품상 외에도 최악의 남우주연상, 최악의 감독상, 최악의 각본상 등 4관왕에 올라 모름지기 당해 연도 최악의 영화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고 이 글을 통해 섣불리 <오! 인천>을 컬트로서 재평가하려 하거나, 혹은 그럼에도 영화팬들에게 감히 시간을 들여 한 번 즈음 볼 만하다고 추천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피할 수 있는 것은 그냥 피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는 오직 <오! 인천>을 둘러싼 외부적인 기록들, 그리고 여기에 참여했던 한국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영화로 기록된 이 작품이 한국영화계에 몰고 온 변화와 그것이 이후 한국영화들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도 역대급의 제작 규모 처음 <오! 인천>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는 1978년 3월 신문기사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남궁원 , 윤미라 *주 1 등 20여 명의 배우가 출연하고, 미국의 원웨이프로덕션과 일본의 동보영화사가 제작에 참여하며 각본은 <그린베레>(존 웨인, 레이 켈로그, 1968), < 프렌치 커넥션 >(윌리엄 프리드킨, 1971)의 원작자인 로빈 무어와 폴 사베지가, 감독은 < 서부로 가는 길 >(앤드류 V. 맥라글렌, 1967), <철인들>(앤드류 V. 맥라글렌, 1969)과 같은 서부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앤드류 V. 맥라글렌이 담당하기로 했다. 그렇게 5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는 영화는 그러나, 5월이 한참 지나도록 촬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7월이 되자 이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왔다. 기술협조를 하기로 한 일본의 동보영화사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든가, 시나리오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는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촬영 개시를 지연시킨 가장 큰 문제는 시나리오였다. 당시 각색을 담당했던 로빈 무어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 대해 “2시간 안에 담아내기에 너무 방대한 이야기였다. … 등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결국 다른 작가들이 투입되었다”라고 이야기했다. *주2 결국 1978년 5월에 촬영에 들어간다던 영화는 무려 1년을 더 기다려 1979년 5월, 새로 영입한 감독이 한국을 방문하며 다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교체된 감독이 무려 테렌스 영이었다. 테렌스 영은 국내에서 ‘007 시리즈’로 명성이 나 있는 감독이었다. 한국에서는 1965년에 < 007 제2탄 - 위기일발 >(테렌스 영, 1963)이 007 시리즈 가운데 가장 먼저 개봉했다. 실제 007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이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트렌드에 민감한 수입업자들은 서둘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 007 살인번호 >(테렌스 영, 1962)를 수입해 개봉했을 정도였다. 테렌스 영이 감독한 마지막 007 시리즈 < 007 썬더볼작전 >(테렌스 영, 1965)이 국내에 개봉하고도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테렌스 영은 여전히 국내에 다수의 팬을 거느리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영화 촬영을 위해 방한한 테렌스 영 감독이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6.25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 한국이 공산당에 침략당했다는 것을 세계 모든 나라에 알리게 될 것(《경향신문》 1979.5.5)”이라는 발언을 한 이후, 북한에서 《로동신문》의 논평을 통해 이 영화가 “악랄하게 중상모독, 헐뜯는 반동 내용(《경향신문》 1979.5.16)”이라고 비난하며 제작 중지를 요구해왔다. ‘테렌스 영’이라는 스타 감독의 참여에 더해 친한(親韓)적인 그의 발언,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이르기까지 확실하게 화제성을 확보하면서 <오! 인천>에 대한 기대는 더욱 높아졌다. 뒤이어 해외 출연진도 속속 명단이 발표됨과 동시에 배우들이 한국에 도착했다. 물론 제일 관심을 끄는 것은 과연 누가 ‘맥아더 장군’의 역할을 맡을 것이냐였다. 놀랍게도 그 역은 영국의 영화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돌아갔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 햄릿 >(로렌스 올리비에, 1948), < 헨리 5세 >(로렌스 올리비에, 1944), < 리차드 3세 >(로렌스 올리비에, 1955) 등 셰익스피어 작품을 기반으로 한 영화의 주연을 맡아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배우이고, 1947년에는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기사 작위를 수여받기도 했으며(국내 신문기사에서도 로렌스 올리비에를 지칭할 때는 꼭 올리비에 ‘경’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빅터 플레밍, 1939)와 < 애수 >(마빈 르로이, 1940),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엘리아 카잔, 1951) 등의 작품으로 국내 많은 팬을 가지고 있었던 비비안 리의 연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그가 ‘맥아더 장군’의 이미지에 잘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로렌스 올리비에’가 그 역을 맡는다는 것 자체로 이 영화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자, 미국에서 공수해온 장비와 동원된 스태프, 엑스트라의 스케일이 또 한 번 한국 측 스태프들과 언론, 촬영현장을 구경하러 온 시민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당시 촬영 현장의 분위기와 이 영화의 규모는 이를 상세히 설명한 신문 기사와 구술에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6.25 당시 피난민들의 행렬을 재현한 촬영 현장(《동아일보》 1979.9.5) 테렌스 영 감독을 비롯해서 로런스 올리비에 경, 재클린 비세트, 벤 가자라 등 세계 정상의 배우들이 우리나라에 몰려와 촬영 중인 영화 <오! 인천>은 스태프 캐스트 못잖게 엄청난 물량 작전으로 계속 화제를 뿌리고 있다. … 현역미군 등 5백명의 엑스트러와 탱크 4대, 장갑차 2대 등이 출연한 서울탈환 장면은 당시 서울 거리와 가장 비슷한 인천 신포동에서 2시간 가량 진행됐다. … 지난 6월 28일 촬영을 시작한 영화 <오! 인천>은 용인 민속촌을 비롯하여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강원도 횡성비행장, 경북 왜관, 인천, 서울 등을 돌며 제작됐다. 이중 6.25 당시 낙동강 철교 폭파를 재현한 촬영에는 피난민 차림의 엑스트러 1천 3백명, F86 등 전투기와 탱크들이 동원돼 13일 동안 6대의 카메라에 담았다. *주3 인천에서도 폐기된 수인간(水仁間) 미니열차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고 영흥도에 3천만원을 들여 등대를 세우기도 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모습은 인천 제2부두에서 촬영됐는데, 군함 12척과 상선 10여척이 동원돼 장관을 이뤘다고. … 이 영화는 당초 1천8백만 달러(90억원)의 제작비가 계상되었으나 제작기간의 지연 등으로 이미 3천5백만 달러(1백75억원)가 투입됐단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물량이 동원된 이 작품에는 6명의 주연급 배우(남궁원 포함)와 테렌스 영 감독이 쓸 캠핑카 8대, 토일렛카, 링컨 컨티넨털 승용차, 지프 2대가 미국에서 운반됐다. 캠핑카는 침대와 화장실, 식당과 에어컨 장치가 돼 있어 촬영현장에서 주연 배우들이 쓸 수 있도록 했다. 또 높이 10m까지 올라가는 크레인 카도 제작자인 이탈리아인 기사가 직접 가져와 운전하기도. 이밖에 진행을 위해 1백30대의 차량이 국내에서 동원되고 영화에 등장할 40년대식 승용차 6대,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에 쓰던 차와 동형의 크라이슬러, 그리고 탱크, 장갑차, 소제(蘇製) 무기 등이 미국에서 옮겨져왔다. 칠순의 로런스 올리비에 경을 비롯해서 재클린 비세트, 벤 가자라, 데이비드 젠슨(TV영화 <도망자> 주연), 리처드 라운트리,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 등 세계적인 배우를 포함, 한국인 1백명, 미국인 50명, 영국인 30명, 이탈리아인 30명, 일본인 30명 등 스태프가 참가한 이 영화는 인적 구성에서도 국제적인 성격을 짙게 띠고 있다. - “<오! 인천> 로케 한창, 엄청난 물량작전 한국동란 재현(《경향신문》 1979.9.14.) ” 그때 내가 <오! 인천>을 보고, 카메라가 아홉 대가 다 뭐냐하면, 다 파나비전 카메라예요. 아리플렉스가 아니라. 미국에서 원 파나비전 카메라, 제일 좋은 카메라예요! ( 구중모 , 2015, 212쪽) *주4 그때 하얏트 호텔 2층 일체를 썼죠. 그때 뭐 복사하는 데도 있었고, 뭐 신기하게 여겼죠. … 우선, 이 장비가, 장비가 많아, 양이.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없는 현대적인 장비. 특히 낮에 라이트를 킨다는 게, 이건 못 보던 거거든. ( 김호길 , 2016, 116쪽) *주5 그때 150대의 차가, 그러니까 자동차 배차하는 거 있잖아요? 배차요원을 홍콩에서 데려왔어요. 현장에서 차 관리하는 애가 스무 명. 또 뭐 관리하는, 여하튼 식당이 있잖아요? 식당이 두 팀. 얼마나 웃기냐면요,하얏트 호텔에서부터 문산까지 온다고 생각하면, 시내는 500미터, 긴 거리는 1키로마다 깃발을 꽂아놔요. 잊어먹을까봐. 한 팀이라도 늦게 나오면 안되잖아요. … 엄청난 돈이에요. 은행 차가 쫓아, 현장에서 줘. 은행 차가 다녔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럼 스태프들한테 시간 당 현찰로 줘버려요, 엄청난 돈을. ( 박광남 , 2023, 112~113쪽) *주6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서 촬영된 다리 폭파 장면의 촬영 현장 (박광남 기증 자료) 중앙청 앞에서 진행된 서울 탈환 장면 촬영 현장 (박광남 기증 자료) 통일교, 그리고 영화에 쏟아진 혹평들 특히, 당시 <오! 인천>에 참여했던 국내 스태프들은 구술에서 공통적으로 외국에서 온 스태프들이 하얏트 호텔의 한 층을 통째로 빌려 사용했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서울 하얏트 호텔은 이 영화가 촬영되기 1년 전인 1978년 7월에 개장한 5성급의 미국 체인 브랜드 호텔이었다. 평소 한국영화 촬영을 다닐 때 “5천원짜리 여관방에서 댓 명이 한 방을 쓰는” *주7 환경에 익숙해져 있던 충무로 스태프들에게 최신식 시설이 갖춰진 호텔을 촬영 기지로 쓴다는 것은 꽤나 인상 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촬영을 끝낸 촬영팀에게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촬영팀의 출국을 앞두고, 하얏트 호텔의 숙박비 22,327,000원을 지불하지 못해 촬영 기자재 등의 유체동산에 대한 가압류 처분이 내려졌다. 당시 물가를 생각했을 때, 2천여만 원이라는 금액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지만 몇 백억의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에서, 외국인 출연자들의 주급을 매주 헬리콥터로 실어나르고, 스태프들의 일당 지급에 은행차까지 동원해가며 그때 그때 현찰로 지급하는 등 제작비를 쓰는 데에 아낌이 없던 영화 제작사가 호텔 숙박비를 내지 못해 가압류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자금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며칠 뒤 제작사와 호텔 측이 합의에 도달하며 가압류 기간이 연기되었다는 짧은 기사로 이 사건은 정리가 되었고, 촬영팀도 무사히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 인천>를 둘러싼 구설들은 끊이지 않았다. 먼저 한국 체류 당시 테렌스 영의 손목시계와 필름 1,345피트(당시 시가로 350만원 상당)를 도난맞은 사실이 뒤늦게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그러나 끝내 범인도 잃어버린 물건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1980년에 이미 모든 촬영을 다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개봉과 관련하여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다가, 1981년 2월에는 이성구 감독이 재편집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런 소문이 돌고 있는 와중에 5월에는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미국의 상류층 인사들을 모아놓고 <오! 인천>의 비공개 시사회를 개최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런데 시사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케네디센터 주위에서 통일교에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며, 영화에 대한 가타부타 평가는 없이 모든 관심이 ‘통일교’에만 쏠려버렸다. 비슷한 시기 국내에서도 <오! 인천>을 둘러싼 아주 미스터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81년 8월 4일 용산구 원효로에 살던, 일명 ‘원효로 보살’로도 알려진 70대 노파가 그녀의 양녀⋅가정부와 함께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평소 유명 정치인들의 점을 봐주거나 복을 빌어주며 고위층과 인맥을 형성한 바 있고, 이를 통해 큰 부를 쌓았던 윤 노파가 살해당한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윤 노파의 <오! 인천>에 대한 투자 여부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주8 이렇게 <오! 인천>에 대한 관심은 작품 자체에 대한 흥미보다는 자꾸 그 주변부로 옮겨가고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 관심이 이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개봉해서 흥행만 잘 된다면 이까짓 구설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대중에 영화가 공개된 것은 프랑스 칸에서였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제작사 측은 칸국제영화제에서 “25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영화 제목이 새겨진 키트 등을 나눠주고 16일 시사회가 끝난 후 호화파티를 열었는데 구매희망자가 나타나지 않았다(《조선일보》 1982.5.19)”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신문 기사는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외면당한 원인을 통일교와 연관 짓고 있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영화의 완성도 문제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영화는 해외 영화시장에서 전혀 판매되지 않았고, 1982년 9월 17일 미국 내 상영만이 힘겹게 성사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혹평 일색이었다. 급기야 통일교 측에서는 영화제작팀 이름으로 《뉴욕타임즈》,《워싱턴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LA타임즈》, 《뉴스 월드 인 뉴욕》, 《워싱턴타임즈》 등 6개 일간지 전면광고를 통해 “미국 기자와 평론가들이 <인천> 영화 자체의 가치는 평가하지 않고 이 영화의 특별후원자로서 문선명 목사의 이름만 강조하고 있는 데 대해 서글픔을 느낀다”라며 “영화 <인천>의 예술적 가치를 객관적 입장에서 냉정히 평가해줄 것을 미국 국민들에게 촉구(《동아일보》 1982.10.5)”했다. 그러나 영화 <오! 인천>의 흥행 실패를 통일교와의 연관성에서만 찾는 것은 오히려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럼 처음 제작 때부터 그토록 큰 대중적 관심을 끌어모았던 <오! 인천>은 왜 한국에서 상영되지 못했던 것일까? <벤허>보다 (제작비가) 더 많이 들었다고 그랬어, 그 작품이, <오! 인천>. 근데 한국에서 상영 못한 거는 뭐냐 하면 너무 북한을 우상화 시켰다는 거야, 영화를. 그래서 안된 거예요. (구중모, 2015, 216쪽) 영화가 안 되는 이유는 … 정치적인 거예요, 그게. 국방부에서 3일 공연을 했어요, 국방부에서만. 그래 그 시대에 그거야, 이북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공연 못하게 한 거예요. 그거 잘했으면 문선명이 자기 일대기를 하겠다고 그랬다고. … 다 영화제작사에서 잘못한 거야. 일개 장교가 비행기 타고, 한국에 들어올 때 이승만 대통령 등때기 탕탕치고 하는데, 그렇게 푸대접을 하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은 사실 아니거든. 한국의 국익이 상하지. 그래서 나라에서 공연 못하게 했는데. 미국에서도 안 됐어. 전혀 안 됐어요. 한 일주일 하고 문 닫았어. (박광남, 2023, 154쪽) <오! 인천> 제작 당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던 박광남은 이 영화가 국방부 내에서 시사회가 이루어진 이후, 한국에서의 영화 상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만약 그의 기억이 맞다면 이 영화를 본 국방부 관계자들은 북한에 대한 미화는 둘째 치고, 일부 장면에서는 적군보다 더 나빠 보이는 데다가 *주9 전쟁 장면 내내 인민군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민중들보다도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한국군의 모습을 더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영화 속에 드러난 한국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나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고증 실패를 모두 눈 감아 준다고 하더라도 앞서 이야기했던 구설들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쌓인 영화를 국내에서 상영하겠다고 나서는 업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무려 4,6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 대작 영화는 조용히 사라졌다(IMDb 기준, 이 영화를 통해 벌어들인 총수익은 520만 달러에 불과하다. 이중 오프닝 수익이 230만 달러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여기서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같은 해 1천만 달러를 들여 제작한 영화 < 이티 >(스티븐 스필버그, 1982)는 미국 내에서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8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한국영화계에 <오! 인천>이 남긴 것들 하나의 작품으로서 <오! 인천>이 가진 수명은 여기에서 끝이 났지만, 한국영화계에서 이 영화는 또 다른 방향으로 계속해서 그 영향력을 이어갔다. 먼저 당시 <오! 인천>에 참여하면서 충무로 스태프들은 소품⋅의상⋅특수효과 등에 쓰일 재료들을 한 곳에 모아놓을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오! 인천> 촬영 이후 생긴 촬영 소품과 재료들을 같이 관리할 곳이 필요했다. 그때 <오! 인천>에서 재료를 내가 많이 받았거든. 그걸 그냥 활용했으니까. …<오! 인천>이란 영화, 그거 끝나고 인저 삼우회를 결성해가지고, 의상⋅효과⋅소품 해가지고 뚝섬에 큰 창고 건물을 직접 얻어 가지고 그걸 나눠서 썼는데, 1980년도에 큰 화재가 나면서… (김호길, 2016, 103쪽) 그때 어디냐면 뚝섬. 거기 우리 불났어. (웃음) 완전히 탔어. 의상도 완전히 타버리고. 의상하고 우리하고 창고를 하나로 같이 있었거든. 그때 <오! 인천>에 갖다 놓은 물건도 있었구나. 거기 사다리 같은 거, 그 좋은 것들이 몽창 다 탔어. 무기도 몽창 타고. 화약은 거기 안 뒀거든. (박광남, 2023, 127쪽) 구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창고에 화재가 발생해 많은 촬영 소품과 의상, 효과 재료들이 소실되기는 했지만, 당시 충무로 인력들이 <오! 인천>에 참여하며 배웠던 것들이 함께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이후 한국의 전쟁영화,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나 규모가 큰 영화를 촬영할 때 자신이 배웠던 것들을 최대한 살려 활약했다. 이게 촌길에 철조망이 깔려 있으니까 우체부가 자전거 끌고는 못 가는 거야. *주10 “책임지겠습니다. 지나가세요.” 그랬지. 그게 뭐냐 하면은 가짜 철조망이거든. 제가 만든 거예요. 그게 79년도 <오! 인천>이라는 영화 때문에, 거기서 그걸 배운 거야. 이렇게 해서 만드는구나. … <프로페셔날>인가? 전쟁터 나오는 장면에서 라스트가 막 가다가 철조망에 걸려 죽는 게 있어요. ‘야, 저거 되게 아팠겄다. 이렇게 어떻게 했을까’ 했는데, 바로 그런 거야. 그래 인제 79년도 <오! 인천> 영화를 하면서 배운 게 많았고. (김호길, 2016, 133~134쪽) 상륙작전 하는데, 카메라 아홉 대가 필요한 거예요. 거기서 그런데, 헌팅을 가서 어떻게 했냐면, 봐요. 거기서 뭘 배웠냐? 카메라 아홉 대를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거를 하루종일 하는 거야. A카메라 이렇게 부감대로 놓고, B카메라 하나, 둘 막 바꿔놓는데, 한국사람 같으면 그걸 연출을 못해. … 한국에서 만약에 이걸 동시녹음을 하게 되면 한 달은 더 찍어야 돼. 그런데 하루에 딱 끝나는 거야, 그날에. 예행하고 정식촬영할 땐 하루에 다 끝나더라고. 또 중요한 게 뭐냐, 폭탄이 터지는데 걔들은 각도를 다 살려놔요, 터지는 각도. 한국 특수효과들은 그걸 다 배우는 거예요, 거기서. 그러면 거기서 폭탄이 터지는 순간에 여기 카메라가 안 보일 거 아니냐고, 응? *주11 고런 머리를 다 써놨어요. 그러니 아홉 대라는 게 말이 쉽지 이걸 연출자가 계산을 할 정도면. (구중모, 2015, 212~213쪽) < 용가리 > 할 때 몸에 폭탄을 터트려야 하는데, 실제 화약이 안 좋아서 막 불이 붙기도 하고 그랬어요. *주12 <오! 인천> 할 때 보니까 미국사람이 완벽하게 하는 거, 미국사람들이 와서 터득을 했어요. 터득하면서 저는 저 나름대로 그거를 다시 응용을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많이 습득을 했죠. … <오! 인천>이란 영화, 외국사람 특수작업 같이 했기 때문에 많이 배웠고, 저희도 많이 응용했고. 저 나름대로도 그 사람들 기술 플러스 우리 기술을 어느 정도 포함시켜서 더 좋게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보기도 하거든요. ( 이문걸 , 2006, 40쪽) 그러나 이들의 구술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들이 약 20여 년(구술 시기에 따라 길게는 40년)이 흐른 뒤에도 <오! 인천> 촬영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에야 많은 한국의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그 안에서 함께 작업을 하거나 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1979년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오늘날 블록버스터 급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스케일의 영화에 참여하며, 할리우드의 기술과 시스템을 직접 경험했다는 것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그들만의 경력이다. 그리고 이때 참여한 스태프들이 모두 <오! 인천> 이후 더 많은 한국영화 촬영현장에 불려 다니며 1980~1990년대 내내 활동했다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저희가 <오! 인천>에서 영화발전에, 특수효과에 많이 발전시켰다고 자부합니다.(12쪽) … 한국영화계가 <오! 인천>이라는 거를 하기 위해서 차량이라든가 기동력이라든지 이런 거를 많이 배웠어요. 어떻게 보면 영화는 상영되지 못해도, 영화 개념적으로 많이, 영화 바뀐 것이, 제작자 바뀐 것이 <오! 인천>이지 않았나.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문걸, 2006, 21쪽) ※ 인용 구술 (인용된 페이지는 각 구술 뒤에 표기) 심혜경, 『2006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이문걸 편[특수효과⋅소품⋅미술]』, 한국영상자료원, 2006. 배수경, 『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김정란⋅이남기⋅구중모 』, 한국영상자료원, 2015. 이정아, 『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호길 』, 한국영상자료원, 2016. 남기웅,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박광남』, 한국영상자료원, 2023. *** 주1. 윤미라는 후에 출연을 거부했다. 그리고 윤미라가 연기하기로 했던 배역은 리디아 레이(Lydia Lei)에게 돌아갔다. 이 영화에 참여했던 배우 남궁원의 구술에 따르면 당시 한국 측 출연 배우들은 직접 테렌스 영을 만나 오디션 비슷한 것을 봤는데, 이때 배역에 맞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까다로운 조건들을 제시했다고 한다. 주2. “<Inchon> Trivia”, IMDb, < https://www.imdb.com/title/tt0084132/trivia/?ref_=tt_trv_trv >. 주3. 신문 기사에서 상술한 장면은 경북 왜관에서 촬영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때 해당 장면은 1950년 6월 28일에 있었던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을 다룬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술자들 역시 기억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 장면을 ‘한강 다리 폭파’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촬영기사로 참여했던 구중모의 구술에서는 테렌스 영이 원래 이 장면 촬영을 위해 실제 제3한강교를 폭파시키고 싶어했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 있는 다리를 폭파시킨 뒤 촬영했다고 말했다. (배수경,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 2권 김정란 이남기 구중모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5, 215~216쪽.) 주4. 구술자 구중모 는 <빨간 마스크의 여인>(김인수, 1971)을 통해 데뷔하여 <티켓>(임권택, 1986), <결혼이야기>(김의석, 1992) 등의 영화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하였으며, 1986년에는 <씨받이>(임권택)로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15년 <합작영화> 주제사를 통해 <오! 인천>에서 한국 측 촬영팀으로 참여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주5. 구술자 김호길 은 1960년대 연출부로 영화계 입문하여, 1968년 임권택 감독의 <몽녀>를 시작으로 한국영화에서 소품 담당 스태프로 일했다. <오! 인천>에서도 소품 스태프로 참여했다. 주6. 구술자 박광남 은 1950년대 후반 영화계에 입문, 1960년대 본격적으로 특수효과 스태프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80년대부터는 CF, TV드라마, 연극,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특수효과 전문가로 활약했다. <오! 인천>에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다. 주7. 이정하,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호길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6, 73쪽. 주8. 사건의 내용이 다소 복잡한데, 당시 재판을 받던 피의자가 경찰에 의한 강압적인 수사와 고문이 있었으며, 자신의 자백은 모두 이 고문으로 인한 것이었다며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피의자의 결백에 대한 근거로 피해자의 사망시각이 중요한 쟁점이 되었는데,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찰이 주장하는 사망시각에 피해자가 <오! 인천>의 한국 제작총괄이었던 박경도와 원웨이프로덕션의 대표 이시이 미츠하리를 만났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피의자 측에서는 윤 노파가 <오! 인천> 제작에 20억의 거액을 투자했고, 이를 통해 한국 측 상영권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원웨이프로덕션 측에서 증인으로 나왔던 박경도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부정하며, 그들이 윤 노파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단지 ‘영화가 검열을 무사히 통과하고, 흥행이 될 수 있도록 불공을 부탁드리고자’ 했으나, 약속한 날 윤 노파는 나오지 않아 만나지 못한 채 이시이 씨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주9.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인도교 폭파 장면이다. 미군 장교의 부인이 자신의 차량 안에 한국인 어린이와 소녀들을 가득 태우고 다리를 빠져나가는 도중, 미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다리를 폭파시킨다. 끊어진 다리 끝에 걸린 차량 안에서 모두 무사히 구출되기는 하지만, 이것도 주위 피난민과 미군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주10. 영화 <뽕>(이두용, 1985)을 촬영할 당시 뽕밭에 친 철조망을 보고 마침 촬영장 쪽을 지나가던 우체부가 자전거를 멈추고 섰다는 의미이다. 주11. 어떤 각도에서 폭탄이 터져도 9대의 카메라 중 어느 카메라에도 다른 카메라가 잡히지 않도록 구도를 잘 맞춰놓았다는 의미이다. 주12.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촬영 당시 사람의 몸에 작은 화약을 넣고 터트려 총에 맞는 듯한 효과를 내야 했는데, 그 기술이 부족해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대괴수 용가리> 촬영 때는 일본의 특수효과 기술자들을 초대해 함께 작업을 했었는데, 본문과 이어지는 구술에서 일본 특수효과 기술자들도 ‘미니어쳐’ 전문가들이라 당시에는 작은 화약을 활용한 특효 기술을 잘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구술자 이문걸 은 박광남과 함께 <오! 인천>에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