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
- 감독
- 정성종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박용제
2014년은 그 어느 때 보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승승장구했던 정말 신나는 한 해였다. 세계 4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라 손꼽히는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한국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정유미 감독의 < 연애놀이 >가 대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날아들기가 무섭게 바로 뒤이어 프랑스에서 열린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도 한국 애니메이션이 단편 부문 대상을 거머쥐었다는 잇따른 낭보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안시를 사로잡은 주인공은 바로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계에 혜성 같이 등장한 정다희 감독이었다. 애니메이션이 시간을 다루는 매체인 동시에 움직이는 이미지라는 점에 매료된 그녀는 한국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고, 2012년 파리 아르데코 애니메이션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졸업작품 < 나무의 시간 >(2012)으로 2013 인디애니페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무서운 신예로 떠올랐다. < 의자 위의 남자 >는 어느 한 남자의 존재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작가 자신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화두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거울 속 한 남자가 의자 위에 앉아있다. 그곳에 얼마나 오래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조차 버거워 보인다. 남자의 머릿속 의식의 흐름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 차 있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남자가 있는 방안의 공간을 타고 넘어 어느 새 우주 공간까지 확장되어 뻗어 나간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과연 실제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내 관념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면, 과연 나는 실존하는 것일까?’ 남자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존재론에 대한 철학적 회의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시작과 끝이 모호한 순환의 고리 위에서 계속 돌아간다. 그림 속 남자는 분명 작가에 의해 창조된 형상이지만, 작가 역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는 아닐까 하는 성찰로까지 확장시켜 나가는 설정이 독특하고 재미있다. 존재에 대한 질문들이 경계가 모호한 관념의 세계까지 다다랐다고 생각할 즈음, 남자의 시간과 공간은 되돌아 감기를 시도하며 파편화된 생각의 흐름을 재배열하여 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공식 데뷔작 < 나무의 시간 >(2012)이 나무들의 다양한 삶에서 영감을 받아 노인과 나무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삶을 관조한 작품이라면, < 의자 위의 남자 >(2014)는 남자와 화자(작가)간 관계를 통해 존재에 대한 내적 성찰의 흐름을 무한대로 제시하고 있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그녀의 신작 < 빈방 >(2016) 역시 주된 테마는 전작들과 연결성상에 있는 작품이지만 이번에는 방이라는 공간 안에 있는 벽, 문, 창문을 비롯한 다양한 재료들을 사람의 기억과 흔적의 알레고리로 치환시켜 이를 통해 존재에 대한 내면의 이미지를 변주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작품에서는 좀처럼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마치 여러 해를 묵혀 오랫동안 숙성시킨 장맛처럼 담담하지만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깊이와 풍미를 담아내고 있다. 그런 그녀의 이야기와 함께 유려하고 정제된 드로잉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그녀가 펼치고 싶은 상상력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유영하며 보는 관객의 마음 한 구석을 교묘하게 자극하면서 작품 속으로 동참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