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빌리지센터
- 제작년도
- 2010
<무소주>(2024)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차이밍량은 2012년부터 <행자(行者)> 연작을 찍기 시작했다. 장소만 달려졌을 뿐 내용은 모두 동일하다. 리캉성이 붉은색 가사를 입고 약간 고개를 숙인 다음 한 손은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어 불가의 공(空)을 표시하고 다른 한 손은 내린 채 펼친 다음, 혹은 마찬가지로 원을 만들어서, 천천히 걷는다. 맥락과 배경,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설을 달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 보는 건 그게 전부이다. 차이밍량은 2013년 < 떠돌이 개 >를 찍은 다음 더 이상 극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언젠가부터 점점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극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들이 희박해져 갔다. 그는 < 안녕, 용문객잔 >(2003)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이미 모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행자> 연작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시작되었다. 2011년 타이베이 국립극장에서 300석 규모의 무대에서의 공연을 제안받았다. 세 명의 배우를 무대에 불러 각자의 모노드라마를 올릴 계획이었다. 세 명은 양구이메이, 루이징, 그리고 리캉성이었다. 리캉성에게는 일인삼역을 부탁했는데, 리캉성 본인과, 차이밍량의 아버지, 그리고 현장(玄奘)법사였다. 현장법사는 당나라 시대의 승려이다. 불교 교리를 연구하려고 했지만, 그때 중국에는 불교 경전이 없었다. 그래서 경전을 구하기 위해 천축국(지금의 인도)으로 길을 떠났다. 627년의 일이다. 둔황을 거쳐 천축국에서 불경을 얻은 다음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645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그 여정을 명나라 시대에 신괴소설(神怪小說)로 쓴 오승은 작가의 『서유기』이다. 삼장법사와 세 명의 제자,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는 온갖 요괴와 난관을 헤쳐 나가는 모험극. 하지만 무대에서 리캉성은 무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사각형으로 된 무대 끝 선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차이밍량은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무대에서 한 번 공연한 다음에 사라져 버리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걸 기록하고 싶어졌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옮기겠다. <행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모래>(2018)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하지만 무대에서 이미 한 것을 카메라 앞에서 반복하지 않았다. 차이밍량은 리캉성에게 붉은 가사(袈裟)를 입히고 길거리로 데려 나갔다. <무색>(2012)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행자>는 2012년 타이베이의 야시장(夜市場)에서 걸었다. 아주 느리게 걸었다. 이 해에 세 편의 <행자>를 더 찍었다. 처음에는 상영시간이 짧았지만, 점점 더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 번째 <행자> 연작인 <모래>(2018)에서 처음으로 1시간 상영시간을 넘어섰다. 아무 사건도 없고, 아무 이야기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대사도 없다. 리캉성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언제나처럼 붉은 가사를 입고 한 손으로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고 다른 손을 내린 채 맨발로 몹시 천천히, 아주 느리게, 마치 멈춘 것 같은 속도로 걷는다. 하지만 길거리로 나가자 구체적인 문제와 만나야만 했다. 기후의 가혹한 조건. 환경이 요구하는 한계. 한여름 뜨거운 햇빛으로 달궈지다시피 한 말레이시아 쿠칭의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걸었고(다섯 번째 <행자>인 <물 위 걷기>) 추운 한겨울 밤에도 도쿄의 길거리도 맨발로 걸었다(여섯 번째 <행자>인 < 무무면(無無眠, No No Sleep) >). 그래서 차이밍량은 모든 테이크를 단 한 번만 찍었고, 리캉성은 같은 장소에서 두 번 걷지 않았다. <행자>는 정신적인 여정이지만 육체적인 기록이다. < 곳 >(2022), < 무소주 >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열 번째 <행자>인 < 무소주(無所住, Abiding Nowhere) >(2024)에서 리캉성은 미국 워싱턴 DC를 걷는다. 아홉 번째 <행자>인 <곳(何處, Where)>(2022)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농 홍앙시가 등장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각자의 일을 각자 한다. 부사(副詞)로서의 각자(各自). 서로 따로따로. 어떤 일? 리캉성은 쉬지 않고 걷고, 아농은 외출하고 돌아와서 면을 끓인 다음 먹는다. 그 둘은 무슨 사이일까. 전주에서 만난 차이밍량은 내게 비밀을 알려주었다.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차이밍량 <행자> 전작 회고전을 했고, 차이밍량은 전주에 방문했다. 이때 긴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언지무(言之無)―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나는 이를 추구한다”, 《필로》 38호, 2024 May_June.) “<행자> 연작 일부분은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 예를 들면 내가 어릴 적에 읽은 『서유기』에 나오는 요괴 같은 개념들을 몰래 넣기도 합니다. 당신에게 알려줄 수는 있지만, 관객들에게 내 생각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한 건 <행자> 연작을 찍을 때는 어떤 방법을 통해 표현할지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파리에서 찍은 <곳> 속의 아농은 거미 요괴를 닮았습니다. 그가 리캉성, 그러니까 행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요괴를 닮았습니다.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차이밍량은 거기까지만 비밀을 알려주었다. <무소주>에서 아농이 요괴인지 그렇다면 어떤 요괴인지, 거기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무소주>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무소주>의 마지막 장면에서 석양이 저물어가는 물가를 리캉성이 걷는다. 그때 해가 저물어가면서 물 위로 반사광이 피어오른다. 구태여 비유를 빌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바세계(娑婆世界)를 건너서 극락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때 노래가 흐른다. ‘了悟心性究竟之上師祈請文’. 문자 그대로 옮기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스승들의 기도’이다. 이 노래가 들릴 때 리캉성은 마치 긴 여정을 마치는 것만 같다. 차이밍량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이 열 번째 <행자>가 연작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추신 _ 전주영화제에서 차이밍량에게 열한 번째 <행자>를 제안했고, 차이밍량은 다음 <행자>를 전주에서 찍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이것이 새로운 <행자> 연작의 첫 번째 영화가 될지, 아니면 열한 번째 <행자>일지, 그도 아니면 번외편이 될지, 또는 에필로그가 될지, 아무것도 정해진 바 없다고 했다. 나는 두근거리면서 기다리는 중이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코넬의 영화는 홈 무비의 본질이다. 그의 영화는 우리 삶 매일의 어디에나 있는 가까운 것들을 다룬다. 큰 것이 아닌 작은 것들 말이다. 전쟁도 아니고, 격정적인 감정도 아니고, 극적인 상황이나 충돌도 아니다. 그의 이미지는 훨씬 단순하다...조셉 코넬의 박스들, 콜라주, 그리고 홈 무비는 우리 시대의 보이지 않는 성당이다. 즉, 오늘날 여전히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최고의 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그것을 쳐다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조나스 메카스, 「조셉 코넬의 보이지 않는 성당The Invisible Cathedrals of Joseph Cornell」 (『빌리지 보이스The Village Voice』) 고물상이나 중고물품 판매점에서 발견한, 한때는 아름답고 귀중했던 이미지와 사물을 수집하고 박스 안에 넣어 만든 아상블라주 작업이 조셉 코넬을 대표한다면, 그가 만든 (28편에 이르는) 일련의 영화 작업은 그다지 가치 있게 평가되지 못했다. 물론 코넬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고 말이다. 그나마 최초의 영화 < 로즈 호바트 >(1936) 등 193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영화 제작 활동 전기의 작업들이 파운드 푸티지와 원본의 변형이라는 기법의 예시로서 잘 알려진 반면, 1950년대 후반의 시적인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대부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는 코넬이 래리 조던, 루디 부르크하트나 스탠 브래키지와 같은 이들과 함께 협업하여 뉴욕의 이곳저곳을 직접 촬영하고 편집한 것으로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 것들인데, < 요정의 빛 >(1957)은 그 중 하나이며 스위스 태생의 영화감독 루디 부르크하트와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후기의 영화는 대부분 명확한 서사나 중심된 사건이 없으며, 단지 도시의 아주 미시적인 단면들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일상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장소는 그의 영화를 통해 의문과 상상력으로 가득 찬 곳으로 비틀린다. 1903년에 태어나 1972년에 죽기까지, 코넬은 생애 거의 전부를 뉴욕 플러싱(Flushing)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어머니, 그리고 뇌성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한 남동생 로버트와 함께 살았다. 플러싱은 맨해튼의 삶과는 그다지 관련 없었으며, 그보다는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이 사는 퀸즈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산책자처럼 도시를 걸어 다녔고 버려진 필름을 주웠다. 그리고 자판기 식당, 도서관, 서점, 공원, 중고품 판매점에 규칙적으로 드나들었다. 그에게 도시라는 공간은 일상적인 곳이자 매우 중요한 곳이었고, 언제나 도시의 세세한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50년대 영화는 대부분 이와 같은 생활 반경에 있는 뉴욕의 곳곳, 이를테면 3번가의 고가철도(< Gnir Rednow >, 1955-1960), 플러싱 공동묘지(< Angel >, 1955), 유니온스퀘어 공원(< The Aviary >, 1954-55), 리틀 이털리의 골목(< A Legend for Fountains >, 1957-65) 등을 담고 있다. <요정의 빛> 스틸컷 < 요정의 빛 >은 맨해튼 한복판에 위치한 브라이언트 공원과 그 안에 있는 뉴욕 공립도서관이 배경이다. 약 7분 정도 길이의 이 영화는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한 소녀가 부서진 양산을 들고 공원으로 달려가면서 시작한다. 그는 화가인 친구 이본 토마스의 딸 그웬 토마스로, 당시 12세의 발레를 배우는 학생이었다. 화면 속의 그웬은 분수 주변에 모인 새들을 춤추듯 좇거나 날아다니는 것을 바라본다. 이후 카메라는 계속해서 공원의 여기저기에 앉아있거나 날아다니는 새들을 천천히 이동하며 보여준다. 녹색이 우거진 공원의 나무 사이로 새들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한낮의 밝은 빛이 그 광경을 담은 화면을 무척이나 아름답게 만든다. 이윽고 카메라는 공원 밖의 길거리를 비추며 지나가는 차들과 사람, 공원에 한가로이 앉아 있는 인물들을 차례로 담는다. 개를 산책시키는 할머니,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 분수대에 앉아 있는 젊은 남성들. 쓰레기를 수거하는 청소부 등 무척이나 소박한 일상적 풍경들이 시선을 옮기며 이어진다. 별다른 서사도, 눈에 띌만한 시각적인 실험도 이 영화에서는 감지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무척 아름답고 정적인 < 요정의 빛 >을 몇 번이고 돌려보다 보면, 어느 순간 매우 기묘한 기분이 든다. 화면에 담긴 사물과 장소의 풍경은 매우 구체적인 것임에도 아주 멀리 아득하게 잡히지 않는 간격을 두고 놓여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위해 앞서 말한 등장인물, 그웬 토마스에서 시작해보자. 그의 존재가 특징적인 이유는 영상 전체를 통틀어 새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와 함께 화면에 잡힌 숏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여타의 사물과 등장인물이 일상적인 실제 세계에 속한 반면 그웬은 저 홀로 영화를 위해 연출된 요소, 즉 제목에서 추측컨대 ‘요정’이라는 허구적 인물로 등장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화는 두 종류의 세계를 하나의 공간 안에 공존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달리 말하면 브라이언트 공원은 그웬 토마스가 연기하는 요정이 사는 가상의 공간임과 동시에 무척이나 일상적인 삶이 지속되는 현실의 세계로, 이 두 세계가 한데 포개지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차이가 없는 두 세계는 그웬이 등장하는 숏과 그렇지 않은 숏의 교차를 통해 구분된다. 그리고 그웬은 요정을 표상하는 것을 넘어 기묘한 거리감을 생성하는 기능적인 것으로 역할 한다. <요정의 빛> 스틸컷 화면에서 그웬이 사라졌을 때, 그 화면은 그웬을 외화면에 방기하기보다는 시선의 주체 그 자체로 전환시킨다. 이를 암시하는 부분은 영상의 후반에 등장한다. 카메라는 화면의 왼쪽 밖을 응시하고 있는 그웬의 얼굴을 몇 초 정도 클로즈업하여 보여주고, 그다음 장면으로 공원을 서성이는 하늘색 치마를 입은 또 다른 소녀를 보여준다. 그 소녀는 화면의 왼쪽에서 등장해 두리번거리다가 오른쪽으로 나가고, 곧이어 오른쪽을 응시하는 그웬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화면은 그저 새들이 걸어 다니는 공원에서 무언가를 이리저리 쳐다보는 소녀의 모습을 찍는 것이다. 즉 요정으로 분한 그웬을 매개변수로 두고, 카메라의 시선과 숏의 배치를 활용함으로써 일상적인 도시 공간은 친밀하고 익숙하면서도 매우 낯선 기묘한 감각을 생성하는 상태에 놓인다. 아담 시트니는 「조셉 코넬의 영화적 시선 The Cinematic Gaze of Joseph Cornell」이라는 1980년의 글에서, < 요정의 빛 >의 아름다운 어린 소녀를 통해 코넬이 보여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의 상호작용”은 매우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의 영화들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실과 같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실제로 화면에 육화되어 등장하는 요정의 형상에 관객의 이목이 집중되지만, 카메라로 공원의 풍경을 비추면서 그의 존재는 그 장소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것으로 나아가게 되며, 우리의 시선을 인도한 이후 사라진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러한 그의 ‘사라짐’을 암시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청소부가 지나쳐가는 쓰레기통에 꽂혀 있는 부서진 양산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로 갔는지, 실제인지 허구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가 매개한 세계가 우리에게 어떻게 남겨졌느냐일 것이다. 이 장면 이후 카메라는 물방울이 떨어져 일렁이는 분수의 물웅덩이를 클로즈업하여 보여주고 끝이 난다. 시트니는 이러한 코넬의 영화가 “그가 경험한 장소의 영혼에 대해 기도하는 행위”라고 표현한다. 모든 영화에서 양산을 든 요정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코넬의 영화는 영적인 존재가 사라진 그곳에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세계의 이미지를 태연히 위치시킨다. <천사>(1957) 스틸컷 같은 해 11월, 마찬가지로 부르크하트와 함께 만든 3분여 길이의 <천사Angel>는 < 요정의 빛 >과 공유하는 요소가 많다. 17개의 짧은 숏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분수를 내려다보며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천사 조각상이다. 다소 낮은 위치에서 올려다보며 하늘을 배경으로 정면에서 조각상을 찍은 숏에서 시작하여, 바로 그다음 숏은 비스듬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후 분수대와 그 주변 풍경을 클로즈업하여 찍은 숏들과 조각상을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는 숏들이 교차되다가, 마지막에는 조각상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며 하늘을 비중 있게 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천사는 바라봄의 대상이 되었다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로 바뀌고, 클로즈업 되어 파편화된 분수대의 풍경은 그 시선과 숏의 교차 속에서 매개되는 실제라는 점에서 <요정의 빛>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요정의 빛>에 비하자면 시선과 숏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장소에 대한 감각적 경험의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은 한편으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 요정의 빛 >은 코넬의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소리가 없다. “이상적인 세계의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무성영화의 중요한 잠재적 가능성”이 유성영화에는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였던 그는 언제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세계를 초월해야 하는 필요에 대해 역설했다. 코넬의 영화를 당대의 오디오비주얼 미디어 문화와 병치시키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 마이클 피고트(Michael Pigott)의 최근 연구서 『Joseph Cornell Versus Cinema』(Bloomsbury, 2013)의 핵심적인 주장은, 코넬의 영화는 보고/보여주는 대상(특히 몸)을 통해 우리를 일상적인 세계와 꿈의 세계에 동시에 위치시키며, 이로써 우리가 우리의 실제 세계를 바라보고 지각하고 사용하는 방식을 변형시키게 되는 잠재적 효과를 지닌다는 것이다. 특히 1950년대 중반 이후의 후기 작업은 도시 공간, 그리고 이와 관계된 몸에 대한 대안적 인식의 방식을 제공함으로써 당대를 지배하는 일반적(경제적) 세계의 시간을 교란시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즉 피고트는 도시 공간 안에서 실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상적인 시간을 제안하는 것으로서 코넬의 영화를 이해한다. 오래되고 낡은, 일상적인 세계의 사물을 수집해 박스 조각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카메라에 일상적인 세계의 지속들을 담았다. 이는 실제 세계의 푸티지를 콜라주하여 또 다른 실재성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전반적인 그의 예술적 실천과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스 조각을 비롯한 여타의 입체 작업들과는 달리 그의 영화는 콜라주로 창조된 실재적 세계의 감각적 주체로서 관객을 더욱 명확하고 강렬하게 요청한다. 결국 이러한 논의에 따라 코넬의 영화를 이해했을 때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은, 과연 영화가 실제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게끔 만드느냐, 혹은 변형시키느냐일 것이다.
일흔을 바라보던 존 포드는 존 웨인과 함께 영화사상 가장 정교한 실내 서부극이라 부를만한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를 찍은 뒤, 웨인을 < 말없는 사나이 >의 이니스프리를 닮은 또 다른 샹그릴라로 데리고 간다. 그곳은 ‘할레아칼로아’(Haleakaloa)라는 허구의 지명이 주어진 폴리네시아의 한 섬이다. 실제 촬영 장소는 하와이의 카우아이이며, 할레아칼로아는 하와이어로 ‘웃음과 사랑의 집’이라고 한다. 이니스프리보다 이상향에 더 가까운 이 아름다운 섬에서 존 웨인이 분한 ‘건즈(Guns) 도노반’은 한 때 전쟁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몇 척의 배를 거느리고 ‘도노반의 산호초’라는 술집을 운영하며 풍요와 게으름을 만끽한다. 서부극 만들기를 직업적 책무로 여기던 전후의 포드가 이 외딴 섬에서의 촬영을 일종의 휴식으로 여겼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 도노반의 산호초 >는 정말로 휴식과도 같은 영화다. 사건에의 무관심이 많은 포드 영화들의 숨겨진 태도라고 해도, 또한 후기로 갈수록 그 태도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해도, <도노반의 산호초>보다 더 무관심할 수는 없다. 제거해야 할 악은 물론 공동체나 개인을 위기로 몰아넣는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거구의 폭력적인 사내가 이 ‘웃음과 사랑의 집’에서 할 일은 말 그대로 우스꽝스러운 소동과 사랑 외엔 없다. 계급과 성향이 다른 남녀의 결합이 주된 테마라는 점에서 이 영화를 포드의 드문 스크루볼 코미디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 말없는 사나이 >에서처럼 사랑의 성취를 위해 주인공이 애써야 할 일도 없다. 사소한 결핍과 결함들이 무기력과 지루함을 방지하는 유쾌한 오점이 되는 세상, 어떤 긴급한 행동도 요청되지 않는, 그러니 행동 대신 활동만 난무하는 세상. 포드 영화는 결국 이런 곳을 향해 긴 항해를 해왔을 것이다. 서부극 외엔 포드 영화의 상업적 잠재력을 미심쩍어하던 메이저 스튜디오가 이런 한가한 세계를 좋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1962년 7월, 포드가 이 영화의 촬영을 위해 하와이에 도착한 직후 파라마운트는 투자 보류 결정을 내린다. 포드는 철수하지 않고 자신이 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파라마운트는 배급만 맡고 ‘존 포드 프로덕션’이 제작 크레디트에 오른다. 누구의 간섭도 없는 한가롭고 아름다운 섬에서, 완성된 시나리오도 없이 촬영을 시작한 포드는 매일 밤 다음날 촬영 분량을 구상하는, 즉흥 연출에 가까운 작업을 시도했다. 고령의 포드가 ‘액션’을 외치고 나서야 아직 대사가 완성되지 않았음을 깨닫는 날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제작 환경은 이 영화의 느슨함, 불균질성 그리고 활력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개봉 직후 앤드루 새리스가 「빌리지 보이스」(1963. 8. 1.)에 기고한 평은 “<풀밭 위의 오찬>이 장 르누아르의 <폭풍우>이듯, < 도노반의 산호초 >는 존 포드의 <풀밭 위의 오찬>이다.”라는 흥미로운 문장으로 시작된다. 포드의 <도노반의 산호초>와 르누아르의 <풀밭 위의 오찬>이라는 영화,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폭풍우>라는 희곡은 공히 “노예술가의 평정심과 지혜의 궁극적 정수”라는 것이다. 새리스는 이 작품들에서 “(창작자의) 활달한 사적 비전이 유동하며 캐릭터들의 윤곽을 지워간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노예술가의 작품을 ‘평정심과 지혜’의 산물로 보는 건 너무 상투적인 단정이 아닐까. 오히려 만년의 포드라면, 실은 만년의 르누아르도 마찬가지이지만,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에서 아도르노의 논의를 빌려 베토벤의 후기작을 두고 말했던 “달관, 체념, 이해, 화해, 포용, 조화, 종합이 아닌 파국, 파열, 흠집, 모순”의 궤적, 그러니까 “죽음 앞에서 또 한 번의 혁명이며 창조적 몸부림”의 표현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지는 않다. 돌이켜보면, 전부는 아니라 해도, 젊은 날의 포드 영화를 포함해 많은 포드 영화가 “파국, 파열, 흠집, 모순”의 표현이 아니었는가. 우리는 이미 < 굽이도는 증기선 >이나 < 젊은 날의 링컨 > 같은 포드의 1930년대 작품에서조차 소란과 난장의 디오니소스적 활력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또한 ‘영예의 시기’에 난데없이 튀어나온 낮도깨비 같은 영화 < 타바코 로드 >에서 속수무책의 파국과 파열의 소요를 만나지 않았는가. 포드의 마지막 작품이 더없이 엄격하고 운명론적인 <일곱 여인>이라는 사실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포드 세계의 여행자인 우리로선 아직은 어떤 부류의 단계론이나 양식화도 보류하고, 개별 작품을 하나의 독립된 전체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이다. #1 #2 #3 #4 #5 < 도노반의 산호초 >의 첫 장면도 < 말없는 사나이 >만큼이나 사랑스럽다. 배우 리 마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분한 ‘보츠(Boats) 길훌리’가 섬에 도착하는 첫 시퀀스를 좋아하지 않기 힘들 것이다. 할레아칼로아 연안을 지나는 해군 함정에서 갑판 청소를 하던 길훌리(중년이며 전쟁영웅인데도 여전히 사역을 하는 사병이다)는 선장이 섬에 정박하지 않을 거라고 낄낄거리며 심술궂게 말하자 같이 낄낄거리다 선장을 막대 걸레로 내려친 다음 경례까지 하고 바다로 뛰어든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멀리서 헤엄치며 일으키는 물보라만으로 섬사람들은 그가 길훌리임을 알아보고, 모두 항구에 몰려나와 춤추며 환영 퍼포먼스를 벌인다. 곧이어 도노반이 도착하고 예정된 주먹다짐을 시작한다.(#1~#5 ) 같은 날에 태어나 22년째 자신들의 생일만 되면 주먹다짐을 벌이는 전통을 이어온 전쟁 동료인 두 사내의 대결은 섬 최고의 이벤트이지만, < 말없는 사나이 >에서 폭발 직전까지 압축된 갈등의 유일한 해결책이자 대단원이었던 두 사내의 대결과는 다르게, 아무런 서사적 기능이 없는 그저 구경거리일 뿐이다. 마을의 정신적 지도자인 윌리엄 데드햄 박사가 치고받고 있던 두 사람을 꾸짖자 대결은 영화 초반에 끝나버린다. 그토록 인상적으로 등장한 리 마빈의 역할도 이후엔, 그의 팬이라면 섭섭한 일이지만, 코믹한 조연의 역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리 마빈은 촬영장에 매일 술에 취해 나타났기 때문에, 포드가 그의 역할을 축소시켰을 가능성도 크다). 두 사내의 대결은 싱겁게 끝났지만, 이 섬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곧 보스톤의 부유한 상속녀 아멜리아가 길훌리에 이어 섬에 도착한다. 그녀의 임무는 이곳의 유일한 의사이며 원주민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진,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 윌리엄 데드햄 박사를 만나 유산 양도 동의를 받아내는 것이다. 여기엔 가족을 버리고 떠도는 미지의 아버지와 독립적인 여인으로 성장한 딸의 갈등과 화해라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오래된 테마가 있다. 또한 도시적이고 세련된 여성 아멜리아와 전근대적이고 마초적인 남성 건즈 도노반의 대립과 결합이라는 스크루볼 코미디적인 테마도 있다. 이 부녀(아멜리아-데드햄 박사)와 남녀(아멜리아-도노반)의 대립적 관계는 개인주의적이고 문명화된 동부와 공동체적이고 야성적인 서부의 갈등이라는 서부극 테마의 변주다. 무엇보다 이곳은 원주민, 일본인 하인과 중국인 상인과 노동자, 프랑스인 지사와 목사 및 간호사, 미국인 유지와 의사,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이 뒤섞인 인종 전시장이다. 인종주의는 특히 아멜리아와 배다른 혼혈 동생과의 대면이 낳을 수 있는 또 다른 테마다. 하지만 포드는 이 테마들을 다루는 데 많은 숏을 할애하진 않는다. 데드햄 박사는 모든 면에서 존경받을만한 인물이니 부녀의 화해에는 별다른 장치가 필요하지 않고, 도노반과 아멜리아는 처음부터 매력적인 남녀로 설정되어 있어 이들의 결합도 시간문제다. 인종주의는 뒤에 말하겠지만 서사의 주제가 아니라 퍼포먼스의 주제로 다뤄진다. < 도노반의 산호초 >의 포드에게, 테마처럼 보이는 것들은 제재들이다. 서사적으로 탐구될 주제의식이 아니라 일종의 상황 혹은 조건에 가깝다. 유사 테마를 던져놓고 포드는 그 상황 아래 놓인 인물들과 유희한다. <도노반의 산호초>는 더도 덜도 아닌 영화적 놀이다. 그런데 놀고 있는 건 인물이 아니라 포드 자신이다. 우리를 매혹시키는 건 그 유희의 물리적 운동감과 활력이다. 아멜리아의 도착과 그에 이어지는 시퀀스들에서 보는 이를 사로잡는 것도 이런 것이다. #6 #7 #8 #9 #10 #11 아멜리아를 해안으로 무사히 안내하기 위해 도노반이 카누로 마중을 나오지만, 두 남녀는 모두 물에 빠진다. 그러자 원주민으로 보이는 선원들이 줄이어 바다로 뛰어든다. 그녀가 지갑이 바다 속에 빠졌다고 말하자 도노반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그도 곧바로 뛰어든다. 깔끔한 안내는 실패하고 두 남녀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다. 이 시퀀스의 마지막은 바닷가에서 도노반의 손에 끌려가던 아멜리아의 엉덩방아와 작은 물보라다.(#6~#11) #12 #13 # 14 #15 #16 아멜리아를 태운 지프는 출발하자마자 엔진 폭발음을 내며 달린다. 폭발음은 데드햄 박사 집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날 밤 폭풍우와 천둥 번개가 몰아친다. 문소리에 깨어 1층에 내려간 아멜리아는 집에 들어온 아이와 뒤따라온 도노반, 그리고 들이닥치는 비바람을 만난다. 아이를 비바람 부는 밤에 데리고 다닌다고 아멜리아가 도노반을 비난하자 도노반이 문을 박차고 나가고, 다시 거센 비바람이 실내로 몰아치며, 문을 닫던 아멜리아는 엉덩방아를 찧는다.(#12~16) 물보라, 엔진 폭발음, 폭풍우. 이 셋의 의미론적인 연관은 없다. 이들은 이야기와는 이질적인 영역의 잉여들이다. 굳이 찾자면 공통점이 없지 않은데, 그것은 낯선 여인과 접촉한 이 섬의 물리적 반응이라는 것이다. 아멜리아의 바닷물과의 접촉, 자동차와 접촉, 대기와의 접촉에 대한 반응이 각각 물보라, 엔진 폭발음, 폭풍우인 셈이다. 주민들은 환대하고 있지만 원시의 섬 할레아칼로아는 지금 대도시에서 온 방문자에게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 없이도 이 장면들은 우리를 사로잡는데, 물보라가 다른 물보라를 불러내고, 엔진 폭발음이 물보라의 시각적 소란을 이어받으며, 폭풍우와 천둥 번개가 물보라와 폭발음에 대답하는 역동적 연쇄의 박력 때문이다. 아멜리아의 도착에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들에서 활동하는 건 어떤 서사적 기능도 없이 역동하는 이 잉여들이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연쇄적 소란이 화면에 무의미의 활력과 리듬감을 빚어내는 것이다. 섬의 고장 난 소품들도 잉여들의 소란에 가세한다. 작동하지 않는 축음기, 6년째 고장인 슬롯머신은 소음을 뱉어낼 뿐이며, 뚫린 교회 지붕의 구멍으로 비가 쏟아져 예배자들을 적신다. 서사는 진전을 잊고 소음들이 제멋대로 떠들며 소란을 합주한다. 이곳은 그런 잉여들과 소음들의 축제다. #17 #18 #19 #20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축제가 우리를 홀린다 해도, 이런 영화적 놀이가 과연 칭송받고 존중받아 마땅한가. 왜 우리는 이야기를 잊고 활개 치는 잉여의 숏들에 종종 매혹되는가. 잉여의 숏으로 충분하다면 이야기는 왜 필요한가. 가능한 대답 하나는 이야기의 구속이야말로 잉여의 숏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 안에 있으면서 이야기와 긴장하고 있지 않다면 잉여라고 불릴 이유도 없다. 위대한 숏이 심미적인 구도의 이미지이거나 이야기에 충실히 봉사하는 이미지가 아님은 물론이지만, 이야기로부터 독립적인 자기 완결적 이미지도 아닌, 이야기와 교섭하고 긴장하며 이야기를 넘어서려는 하나의 운동이다. 위대한 숏은 아무리 유희적으로 비치더라도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이라는 역설의 구현이다. < 도노반의 산호초 >가 유독 유희적으로 보인다면, 포드가 어떤 영화에서보다 이야기를 느슨하고 허술하게 만들어 곳곳의 틈새들을 잉여들의 놀이터로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술집에서의 난투극처럼 쓸데없는 장면도 드물 것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도노반의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게 된 길훌리는 술 마시러 온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하사관 셋을 경멸 투로 ‘수병(limey)’이라 부르며 내쫓으려 한다. 싸움이 붙으려는 찰나에 도노반이 뜯어말린다. “우린 전우였잖아”라는 도노반의 말에 수긍하고 웃으며 화해의 악수까지 나눈 뒤 ‘수병’은 뒤따라온 사병에게 “넌 저 양키 두 놈과 한패 먹어. 이제 3대3이지?”라며 사병의 얼굴을 갈긴다. 갑자기 싸움판이 벌어지자마자 길훌리는 수병이 아니라 도노반을 때려눕힌다. 몰려온 수병들까지 가세하지만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알 수 없는 난장판이 벌어진다. 그 와중에도 도노반은 길훌리가 일어설 때마다 때려눕힌다. 클라이맥스는 그다음이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길훌리가 난데없이 슬롯머신에 동전을 넣자, 6년째 고장이던 기계가 동전을 폭포수처럼 뱉어낸다. (#17 ~ #20) 이치에 닿지 않고 어리석으며 유치하고 폭력적인 본능의 퍼포먼스가 벌어진 뒤 갑자기 축복이 쏟아진다. 슬롯머신의 동전 세례는 말 그대로 하늘의 축복이다. 이 돈으로 비로소 교회의 지붕을 고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섬에선 그리고 < 도노반의 산호초 >에선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진지한 이야기가 다룰만한 심각한 문제란 존재하지 않고, 선의의 인간들은 게으른 시간을 누리며, 바다와 하늘과 사물들은 이유 없이 삐걱거리며 소음을 연주하고, 작은 구원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온다. 고장 난 사물, 심술궂은 대기의 변덕스러운 작동, 하지만 난데없이 되찾아지는 균형과 해결되는 갈등. <도노반의 산호초>가 장 르누아르의 <풀밭 위의 오찬>과 공유하는 게 있다면 인간의 서사를 오작동시키는 정령의 서사라는 점이다. 이건 존 포드의 전적으로 새로운 이야기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포드의 많은 서부극들은 이미 인간의 서사를 왜소하게 만드는 초월적 풍경의 서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21 또 다른 시퀀스 하나를 빠트리고 갈 수는 없다. 지붕이 수리되지 않은 교회에서 섬 주민들이 모여 성탄 미사를 시작한다. 프랑스인 지사가 내레이션을 시작하고 아이들과 몇몇 어른들이 이에 맞춰 기발한 퍼포먼스를 벌인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가 탄생한 다윗의 도시를 베들레헴이라 불렀다. 저 하늘의 별을 보라. 그때 동방에서 세 현자가 찾아왔다. 세 왕들은 선물을 들고 아기 예수 앞에 무릎 꿇고 경배했노라. 그중 한 명은...” 이때 섬의 원주민 경찰서장이 열대과일을 잔뜩 들고 등장한다. “폴리네시아 왕이었고...”(#21 ) #22 내레이션은 이렇게 이어진다. “중국의 황제도 왔으며...”. 이번에 지사의 비서이자 책사인 중국인 미스터 유가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등장한다. (#22 ) #23 “또 한 명은...” 이어지는 내레이션을 읽던 지사가 잠시 멈칫한다. “...또 한 명은 미국의 왕이었다.” 어이없게도 풀잎 면류관을 쓴 길훌리가 고장 난 축음기를 들고 등장한다. (#23) #24 이 순간 폭우가 쏟아진다. 모두 예상한 듯 우산을 꺼내 들지만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과 ‘미국의 왕’ 길훌리는 물세례를 받는다.(#24 ) 이것이 이 영화에서 인종주의를 다루는 포드의 방식이다. 서사의 기술이 아니라 액자화된 퍼포먼스로 인종 간의 화해를 노래하기. 포드는 이야기꾼이 아니다. 그는 서사의 정교한 장치를 채택하지 않는다. 허구로서의 서사적 해결을 설득하는 대신 그는 인종주의를 다룬 하위 서사를 과장되고 날조된 퍼포먼스로 제시한다. 과장과 날조를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이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에 영화에서 이야기의 지위, 인간의 서사를 다루는 포드의 중요한 태도가 담겨 있다. 그는 여전히 대지의 감독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