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점'81(전후 완결편)
- 감독
- 고영남
- 제작년도
- 1981
- 출연
- 남궁원, 김영애, 원미경, 이영하, 정한용, 한진희, 박원숙, 선우용녀, 진유영, 오미연, 신종섭, 이혜숙, 윤유선, 이영수
김수용 감독은 1965년에 아동영화 < 저 하늘에도 슬픔이 >로 그해 방화 흥행 1위를 기록하고,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곧 이어 개봉한 < 갯마을 >은 평단의 호평과 함께 흥행도 성공하고, 서울시문화상을 비롯하여 여러 영화상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 전까지 코미디와 멜로를 주로 만들던 김수용은 1965년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계속해서 시도하게 된다. 일명 ‘문예영화’의 시대는 김수용과 함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당시 문예영화는 예술성이 높고 격조가 있다고 인식된 데에다 소설이나 연극으로 인지도가 높아 관객에게 호소하기가 좋은 장점이 있었다. 김수용이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준 1967년은 문예영화의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문예영화는 전체 한국영화 제작편수의 20%에 달했고, 대중에게 예술영화로 유통되었던 문예영화가 대중성도 있다는 것을 <갯마을>로 확인한 김수용은 1967년 한 해에만 10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1966년부터 우수영화를 선정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외화 쿼터를 지급하는 제도가 문예영화의 붐을 이끈 측면이 있지만, 당시 문예영화 현상에는 수익성이라는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 한해 10편이라는 한국영화 사상 신화적 기록의 시작은 1967년 1월에 개봉한 < 만선 >이다. 그런데 한해 10편이 그저 그런 작품들의 나열이 아니라는 점이 김수용 신화에서 더욱 놀라운 점이다. < 산불 >, < 빙점 >, < 안개 >, < 까치소리 >로 이어지는 스토리의 완결성에 중점을 둔 김수용 문예영화가 한 해에 만들어졌다. 김수용 영화세계에게 1965년이 전환과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1967년은 방향설정과 완숙기라고 볼 수 있다. <만선>과 <안개>는 그런 점에서 김수용 영화세계의 두 방향타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바로 농어촌 리얼리즘과 도시 모더니즘, 두 개의 방향이다. <만선>은 천승세 작가가 1964년에 발표한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자연과 대결하는 한 어민 가족의 굳건한 의지와 비극적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자연주의 연극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만선>은 어부 곰치가 장남과 막내아들에 이어 딸마저 자살해버리면서 세 자녀를 한꺼번에 잃고, 아내까지 정신이상이 되어가는 것을 마주하고 바다로 사라져 버리는 참담한 가족 비극을 각색하면서 엔딩을 바뀌었다. 영화에서는 딸 슬슬이( 남정임 분)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포문을 열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 목소리는 일련의 사건 이후 바다를 떠나지 않고 일상으로 되돌아간 심경을 전한다. 이로 인해 숙명과 도전, 집착과 벗어남이라는 큰 주제적 갈등 요소가 모호하게 정의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여러 형태의 대립 요소들을 가지고 인간사회의 상징적 축소판으로서 섬마을을 묘사한다. 박정희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끝나고 민정 2기가 시작되는 시점이 1967년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영화 내부로 가지고 와서 살펴보면, 젊음과 방황이 있는 청춘영화 유행이 서서히 저물고 다시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에 빠진 신파적 감성으로 무장한 멜로드라마들이 60년대 중후반부터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국근대화라는 떠들썩한 국가적 이벤트에서 밀려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과거로 회귀하는 보다 보수적인 양태를 취했다. 다시 말하면, 계층상승의 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박탈감이 대중문화에서 연민과 우울의 형태로 표현되는 신파적 감수성의 전면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영화는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아무리 고생해봤자 평생 빚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곰치( 김승호 분)가 다시 바다로 나갔다가 아들 도삼( 남궁원 분)을 잃어버리고, 연쇄적으로 비극을 맞이하는 곰치 가족 구성원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다.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 변기종 분)는 과거의 빚을 이유로 몫을 나눠주지 않는다. 곰치의 딸 슬슬이는 어부를 천직으로 알고 성실히 살아가는 연철( 신영균 분)과 사랑하는 사이인데, 여기에 뭍으로 나가 큰돈을 벌어 온 범쇠( 박노식 분)가 끼어든다.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곰치 아내 구포댁( 주증녀 분)은 늘 육지로 나가길 간청했지만 남편의 고집 때문에 물러섰다. 그녀는 장남이 사망하자 아직 갓난아기인 막내아들을 배에 띄워 뭍으로 보내려고 하고, 곰치는 아기를 구하려다가 바다에 빠지고 만다. 아버지와 두 형제,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어머니마저 미쳐버린 상황에서 어촌마을을 지키는 자는 슬슬이뿐이다. 하지만 가난한 어촌마을에서 이런 비극을 마주하는 이는 슬슬이만이 아닐 것이다. 이겨낼 수 없는 좌절의 연속에서도 인물들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이 있을까. 어머니의 품처럼 다시 고요해진 바다를 칭송하는 슬슬이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가득하다. 아들들이 사라진 어촌마을에 남은 어머니와 딸, 그리고 인간이 자연에 맞설 수 없음을 경고하는 무당의 모습이 프레임에 채워지는데, 일상으로 다시 복귀한 이들의 광경은 숭고함을 전하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인간과 자연의 대결, 빈부간의 갈등, 숙명을 받아들이려는 자와 이겨내려는 자의 갈등 등 묵직한 갈등들이 극단적인 사건들과 함께 펼쳐지다가 서둘러 평화로운 엔딩으로 향하는 것은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지지만, 당대의 박탈감과 절망감을 생각하자면 이해가 된다. 바다의 생명력을 자양분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 말고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사랑이 가득한 어머니에서 두 아들을 잃고 미쳐버린 여인을 연기한 주증녀는 이 영화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그리고 김수용의 또 다른 걸작인 <산불>로 청룡상 여우주연상을 한 해에 수상했다. 영화는 바다를 벗어날 수도,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던 이들의 서글픈 기록이다. 그리고 이들의 고단한 순간의 풍경은 조국 근대화라는 절체절명의 대의 아래 숨죽이고 있어야 했던 수많은 민초들에게 보내는 연민의 그림이다. >> 만선 고화질 VOD 보러가기 <<
유신에서 신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1970~80년대에 대해 ‘한국영화 암흑기’라는 레이블을 붙이는 건 정설처럼 보인다. 사실이었다. 영화는 TV에 밀리고 있었고, ‘반공’과 ‘새마을 운동’을 내세운 국책 영화에 얽매인 영화계는 점점 뒤틀려 갔으며, 사전 심의와 사후 검열 속에서 크리에이티브는 서서히 증발했다. 산업적 토대의 붕괴, 불합리한 제도, 미학적 고갈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이 시대는 몇몇 감독들의 개인기로 돌파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시스템이 붕괴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무분별한 트렌드 추종이다. 1980년대는 그 정점이었다. 멜로드라마와 문예 영화와 스타 시스템을 토대로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무너졌고 1980년대에 난장판이 되었다. 멜로는 여전히 만들어졌지만 예전 같은 힘을 잃었다(진부한 신파의 클리셰에 빠져 있었다). 그 개념은 조금 모호하지만 ‘양질’의 문학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던 ‘문예 영화’는 더 이상 영화화할 만한 소스를 구할 수 없었다(대신 1970년대부터 최인호나 조해일 같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다). 과거의 스타들은 일거에 물러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만한 스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안성기 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시대였다). 1. 한수산 원작의 <거리의 악사>(정지영, 1987) 2. 이문열 원작의 <레테의 연가>(장길수, 1987) 3. 김홍신 원작의 <인간 시장>(김효천, 1983) 4.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 가장 심각한 건 ‘소스 부족’이었다. 1960년대엔 근대 단편 소설들이 ‘문예 영화’라는 이름으로 애용되었다(여기엔 ‘우수 영화’에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지는 현실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라디오 연속극도 각광 받았고, 때론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는 서서히 재료가 떨어졌고 1980년대에 오면 바닥을 드러낸다. 새로운 광산이 채굴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나타난다. 심하게 말하면, ‘돈 될 만한’ 건 뭐든지 끌어다 썼던 1980년대였다. 여전히 ‘문학’은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년대 최인호와 조해일에 이어 1980년대엔 한수산 이외수 이문열 박범신 등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영화계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1980년대엔 훨씬 더 대중적인 콘셉트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시장』 시리즈의 김홍신은 대표적이었으며 김성종 유홍종 백시종 김병총 등의 작가들도 가세했다. ‘시대정신’이었던 에로티시즘도 영향을 미쳤다. 외설 시비에 휩싸였던 염재만의 소설 『반노』가 대표적. <빨간 앵두> (박호태, 1982)도 최희숙의 소설이 원작이며, <매춘> (유진선, 1988)은 『매춘: 전국 사창가와 창녀 실태』라는 사회학 서적에서 온 것이었다. 전통의 부활도 있었다.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문예 영화의 흐름은 에로티시즘을 통해 재등장했고 나도향과 김유정이 소환되었다. 일본 소설도 영화화되었다.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은 큰 흥행을 거두었고 호즈미 타카노부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미례, 1984), 하시다 스카코의 <오싱>(이상언, 1985), 나쓰키 시즈코의 <W의 비극>(김수형, 1985형) 그리고 이쿠시마 지로의 <한쪽 날개의 천사>(이성민, 1987) 등이 이어졌다. 1960년대 한국영화가, 당시 문화 교류가 없던 일본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가져가 음성적으로 번안해 영화화했다면 그 원천을 밝혔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모습이다. 미즈키 교코 원작의 만화 『캔디 캔디』도 영화화되었다. 1.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최재성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다. 2. <신의 아들>은 최민수의 데뷔작이다. 3. 강철수 원작의 <팔불출> 4. 한희작 원작의 <한희작의 러브러브>. 가장 강력한 소스는 만화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장호, 1986)이 장안을 뒤흔들기 전, 1980년대 초부터 꾸준한 시도가 있었다. 그 시작은 길창덕 화백의 <순악질 여사>(김수형, 1980)였다. 이야기보다는 ‘순악질 여사’라는 캐릭터를 가져온 면이 강하며, 장미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후 1980년대에 약 20편가량의 만화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스포츠 신문 연재나 만화 가게나 당시 쏟아지던 만화 주간지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터에 흥행성이 꽤 괜찮았다. 이현세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이 시기 만화 원작 영화의 주요 인물은 강철수였다. <팔불출>(고응호, 1980)의 원작자였던 그는 이후 영화 쪽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랑의 낙서>(심재석, 1988)엔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고, 1989년엔 <발바리의 추억>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 <가루지기>(1988)의 고우영 감독도 만화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잠시 업종 전환을 한 케이스인데, 1980년대의 만화는 충무로에 원작뿐만 아니라 인력도 공급한 셈이다. 그리고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다. 당시 프로야구 열풍과 이현세의 만화에 대한 컬트적 반응을 힘입은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 ‘공포’가 들어가선 안 된다는 당시의 심의 규율 때문에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개명해야 했는데, 이것이 액땜이 되었는지 서울에서 약 28만 7,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한다. ‘까치’ 오혜성 역을 맡았던 최재성은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으며, 동네 전파사마다 정수라가 부른 주제가 ‘난 너에게’(“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흘러나왔다. 프로야구의 인기, 이장호 감독의 흥행력 등 이 영화의 성공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핵심은 이야기였다. 당대 한국영화와 비교해볼 때 이 영화가 지닌 극적 요소는 두 배 정도는 셌다. 강한 승부욕, 목숨을 건 순애보. 팽팽한 긴장 관계, 뼈를 깎는 극기 정신…. 떡볶이로 치면 고추장이 아닌 캡사이신 맛이었고, 그 강렬함에 젊은 관객들은 반응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련의 스포츠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현세의 『지옥의 링』,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등 복싱 소재 만화들이 영화화되었다. 1980년대 ‘복싱’은 여전히 있기 있는 스포츠였고, 여기에 혹독한 트레이닝과 청춘의 고독과 비극적 로맨스가 결합되었다. 안타까운 건 원작을 따라가지 못했던 인기였는데 완성도가 문제였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역시 ‘에로티시즘’이며 스포츠 신문 연재를 통해 성인 만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한희작과 배금택은 주역이다. <서울 손자병법>(김현명, 1986)이 한희작의 원작이 지닌 지명도에 기대 제목 정도만 가져 왔다면, <한희작의 러브러브>(윤석태 김정진, 1991)은 아예 제목에 작가의 이름을 드러낸다. 당대의 섹시 아이콘인 강리나는 만화 캐릭터를 별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데, 이후 배금택 원작의 <변금련>(엄종선, 1991)에서도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화 원작 영화의 흐름은 1990년대엔 뜸해진다. 이현세가 직접 연출을 맡은 <아마겟돈>(1996)이나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1996)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 쪽에서 성과를 냈고, 이현세의 『카론의 새벽』을 옮긴 <테러리스트>(김영빈, 1995)와 허영만 원작의 <비트>(김성수, 1997)가 흥행했지만 1980년대만큼의 양적 성과를 내지 못한다. 다시 그 붐이 일게 된 건 2000년 이후. 여기엔 웹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1. <멋대로 해라>의 혜은이와 김동현. 그들은 이후 부부가 된다. 2. <너무 합니다>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김수희. 3. 박남정 주연의 <새앙쥐 상륙 작전> 4. <담다디>의 이상은과 민규.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아이돌 출신 연기자들의 활약이 돋보이긴 하지만, 가요계와 영화계의 크로스오버 현상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전 1960년대부터 주제가는 영화 흥행의 중요한 요소였고,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슈퍼스타들이 은막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는 남달랐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만, 이 시기엔 당대의 히트곡 제목을 그대로 딴 영화들이 쏟아졌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출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영화 내용도 노래 가사와 대부분 무관했다. 오로지 노래 제목의 인지도를 이용한 경우들인데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비련’, 와일드 캣츠의 ‘마음 약해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윤시내의 ‘난 모르겠네’와 ‘열애’, 이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김현준과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선희의 ‘J에게’, 최성수의 ‘풀잎 사랑’ 등 수많은 히트곡들이 그 제목을 충무로에 빌려주었다. 물론 가수가 직접 영화에 출연한 경우들도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던 전영록이나 송골매, 김형용 같은 청춘 영화의 스타들은 대표적인 경우. 이외에도 <나를 보러 와요>(이유섭, 1980)의 방미, <슬픈 계절에 만나요>(박남수, 1981)의 백영규, <잊혀진 계절>(이형, 1984)의 이용, <담다디>(김응천, 1989)의 이상은, <울고 싶어라>(배해성, 1989)의 이남이, <앗싸! 호랑나비>(원정수, 1989)의 김흥국 등은 노래의 주인공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들이었다. <너무 합니다>(남석훈, 1984)은 김수희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녀는 원작자이자 주연 배우로 참여한다. 노래와 상관없이, 가수 자체의 인기로 영화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낌없이 바쳤는데>(박호태, 1980)의 심수봉, <멋대로 해라>(김정현, 1980)의 혜은이(1970년대부터 배우 활동),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1)의 조용필,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강대선, 1982)의 이은하, <흑녀>(강대선, 1982)의 인순이, <졸업 여행>(오성환, 1985)의 김범룡, <새앙쥐 상륙 작전>(김정진, 1989)의 박남정 등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진 못 했지만, 당시 이 영화들은 그 화제성으로 이슈가 되었다. 당시 가요계와 영화계의 끈끈한 관계는, 가요 쪽의 붐에서 기인했다. 트로트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가요는 1980년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아이돌 문화를 형성했다. 이 시기 침체기를 지나던 영화계는 가요계의 호황을 이용하려는 수많은 기획을 시도했고, 그 결과 수많은 ‘가요적 영화’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영화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흐름은 한국영화가 자생력을 서서히 지니기 시작하는 1990년대가 되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충무로가 수혈받았던 또 하나의 원천이 있었다면 바로 TV의 코미디언과 개그맨이었다. 이전에도 영화와 방송을 겸하는 수많은 희극인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이주일로 이어졌다. 특히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조용히 살고 싶다>(김수형, 1980)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등의 ‘유행어 영화’는 작은 트렌드를 이뤄 <웬일이니>(김종성, 1983) <난 이렇게 산다우>(남기남, 1985) 등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대중문화의 인기를 영화로 끌어오려는 기획이었다. 새로운 경향은 개그맨들의 진출이었다. ‘아동용 SF 액션’에 대한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 1980년대의 수많은 개그맨은 SF 프랜차이즈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아이들 영화를 벗어나 성인용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이외에도 서세원 주병진 김명덕 김형곤 김병조 등 당대의 인기 개그맨들은 대부분 영화계와 만났으며 전유성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디오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의 이주일. 2. <회장님, 우리 회장님>(엄종선, 1988)은 개그 프로그램을 영화화했다. 3. 주병진과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가슴 깊게 화끈하게>(김수형, 1981) 4. 리메이크 영화인 <미워도 다시 한번 1980 - 1부>(변장호, 1980). 1980년대는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강렬한 생존 욕구로 인해 숱한 하이브리드 현상이 일어났던, 용광로 같은 시기였다. 대중 문학계든 가요계든 만화계든 희극계든, 노래 제목이든 유행어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접목시켰으며 그 중엔 적잖은 성공도 있었고 대부분의 실패가 잇따랐다. 수많은 속편 영화들이 있었고 리메이크도 적잖았으며 애교(?) 섞인 표절도 종종 있었다. 아무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했던 시절이었다. 새삼 던져보는 질문. 1980년대는 과연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나?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면을 살짝 엿보면 이 시대만큼 역동적이었던 시대도 드물다. 장르적으로 매우 다양했고, 영화 이외의 분야와 끊임없이 접점을 만들어갔다(그런 점에서 2000년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분투. 1980년대는 천박한 상업주의와 여기에 저항하는 힘, 과거의 관습을 지속하려는 의지와 돌연변이 같은 존재들이 뒤엉켜 기묘한 연대기를 써 가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이토록 미로처럼 뒤얽힌 상황 때문일 것이다.
이형표 의 1964년 작 < 명동에 밤이 오면 >은 당대 그 어떤 영화에 비견해도 손색없을 만큼 세련된 솜씨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주인공인 윤마담( 최은희 )과 그 주변의 입체적인 캐릭터, 안정된 카메라로 포착된 세련된 이미지, 그리고 신파 멜로드라마가 대세이던 시절 담백하면서도 사려 깊은 극 전개와 정교하게 배치된 장면들은 당대 영화들이 반복하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내며 독특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명동 밤거리 빠(bar)의 화려하고 현란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낸 품격 있는 세트나 윤 마담과 빠걸들이 숨 가쁘게 선보이는 멋진 의상은 작품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높일 뿐 아니라 상당한 시각적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여기에 최은희, 최지희 , 강효실 등 당대 최고의 미녀 배우들과 김승호 , 이예춘 , 주선태 , 남궁원 등 초호화 캐스팅까지, 이쯤 되면 1964년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힐 만도 하지만 사실 이 영화가 주는 즐거움 이후에 찾아오는 건 적지 않은 씁쓸함이다. 그건 이 영화가 나루세 미키오의 걸작 <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1960)의 완벽한 표절작이기 때문이다. 표절의 핵심에 있는 것이 ‘정도’의 문제라면, < 명동에 밤이 오면 >은 표절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훌쩍 뛰어넘어 아예 필사본마냥 원본을 복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장면들의 순서나 대사, 인물의 동선까지 나루세의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어 짝퉁이라는 비아냥에도 대꾸할 말이 없을 정도다. 잘 봐줘야 ‘그나마 잘 베꼈다’는 칭찬 정도. 모르고 좋아했다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실망은 거의 배신감에 가깝다. 사실 이런 당혹감은 1960년대 한국영화 흥행작들이 상당히 자주 제공하는 비극이다. 60년대를 대표하는 청춘영화인 김기덕 의 < 맨발의 청춘 >(1964) 역시 일본 태양족 영화를 대표하는 나카히라 코우의 < 진흙투성이의 순정 >(1963) 시나리오를 그대로 베낀 영화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심지어 1964년 어느 일간지 기사에서 그해 개봉한 한국영화 136편 가운데 무려 55편의 청춘영화가 일본원작의 표절 혐의를 받고 있다며 개탄했을 정도로 일본원작의 표절은 거의 당대 영화계의 골칫거리이자 관행이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원작의 노골적인 베끼기는 영화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였지만, 최근의 연구가 알려주듯 1960년대의 일본문화 열풍은 영화, 음악, 문학에서 TV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한국문화를 강타했다. 한일국교 정상화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거웠던 당시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떠올린다면 이 소위 ‘일풍’은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영화의 경우 일본영화가 전면 개봉금지 되었기 때문에 국내 시장에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상황은 표절에 좋은 토양을 제공했으며, 특히 성공이 확인된 원작이 흥행을 보증해준다는 점은 당시 영화제작자들에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하지만 일본원작의 표절영화들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한 것은 비단 일본원작 그 자체가 가진 영화적 완성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산까지 전파가 미쳤던 일본 TV나 「빙점」과 같은 일본 번역문학의 돌풍 등 한국문화 전반에 퍼져있던 일풍은 단순한 ‘일본스러움’을 넘어 서구/근대적 생활양식과 문화적 감수성을 경험할 수 있는 대중적인 채널이었다. 권보드래와 천정환이 적시하듯 일본/일풍은 “국경을 넘는 문화적 현대성의 매개”로 기능했던 셈이다. 기실 이 문화적 현대성은 1960년대 한국영화를 사로잡았던 지배적인 담론을 구성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영화제작을 경험했거나 미 공보원, 국방부정훈국 경험 등을 바탕으로 5, 60년대 한국영화의 선봉장에 섰던 신상옥 , 한형모 , 김기영 , 이용민 , 이형표 등 일군의 감독들은 고전 할리우드 양식에서 아방가르드 영화까지 다양한 양식들을 동시적으로 흡수하고자 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일종의 엘리트주의적인 이 열망은 고전 할리우드 양식과 장르 영화의 추구에서 모더니스트적 자의식까지, ‘신필름’같은 스튜디오 시스템와 확립에서 ‘시네 포엠’같은 아방가르드 영화집단(대표이사에는 유현목 , 제작간사에는 이형표의 이름이 올라있다)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상이한 움직임들을 가져왔다. 이런 역동적인 움직임들의 동시성 그 핵심에 문화적 현대성이 있었고 이는 1960년대 한국영화들이 보여주는 어떤 흔적들을 관찰하는 중요한 담론적 맥락을 제공한다. 원작의 시나리오를 그대로 옮겨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군더더기 없는 장면연출이나 단순한 선과 악으로 구분되지 않는 다채로운 캐릭터 앙상블 등 < 명동에 밤이 오면 >이 보여주는 ‘웰메이드’ 영화의 면모는 상당 부분 나루세의 공이다. 신상옥과 신필름에 일대 전기를 마련해 준 한국 최초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 < 성춘향 >(1961)의 화면을 유려하게 요리했던 이형표 의 장기는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실내 장면 구석구석에서 빛을 발한다. 당대 관객들에게 젊음과 유행, 욕망과 쾌락의 상징과도 같았던 명동. 밤거리를 밝게 비추는 네온사인이 어지럽게 화면을 메우는 오프닝 시퀀스는 극장과 상점이 즐비한 그 화려한 거리를 지나 활력 넘치는 수다와 몸짓으로 가득한 빠로 이어진다. 대부분 실내 좁은 세트에서 촬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감과 앙각을 오가는 다양한 카메라 각도, 트랙쇼트와 클로즈업의 리드미컬한 흐름,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윤마담을 역동적으로 포착하는 사각화면(oblique shot)같은 세련된 카메라는 빠라는 제한된 공간을 역동적으로 구성한다(충분히 추측 가능한 이유로, 사실 영화는 계단의 이미지를 피한다). 당대를 대표한 테크니션이자 할리우드를 경유하여 현대성에 사로잡힌 엘리트로서의 이형표의 역량을 제대로 엿볼 수 있는 구석이다. 나루세의 원작이 드리우고 있는 그늘이 < 명동에 밤이 오면 >의 감상이나 독해를 상당히 방해하고 있지만, 이형표 의 판본은 원작의 처연함과는 어딘가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다. 가부장제와 고단한 삶의 무게를 이겨내며 꿋꿋이 살아나가는 나루세의 여자들이 일종의 자연주의적인 비애의 정념을 갖고 있다면, 이형표의 여자들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어떤 낙관적인 기대와 자신감으로 시사한다. 이는 (< 서울의 지붕 밑 >같은 코미디 영화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형표의 영화력을 관통하는 어떤 나이브한 낙관주의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 정치, 경제, 문화를 지배하고 있던 서구적 현대성에 대한 한국사회의 집단적 태도나 감정과도 연관을 맺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중심에 서 있는 존재가 윤 마담을 비롯한 빠걸들이다. 영화의 가장 매혹적인 이미지는 단연 소파와 즐비한 서양 술병 등 세밀하게 디자인된 세트다. 그리고 이 상품 자본주의의 스펙터클 안에는 첨단 유행의 양복으로 한껏 치장한 채 부유하는 빠걸들이 있다. 그녀들은 가부장 질서의 규율에서 벗어나 왕성한 사회활동과 소비력이라는 근대의 자유를 만끽하는, 당대 최고의 매혹이자 골칫거리이기도 했던 이른바 ‘아프레걸’의 최전방이다. 특히 자동차까지 마련하고 새 옷을 사제끼는 소라( 강효실 )나 “남자는 필요없어. 돈이 최고야”를 연신 외치는 금자( 최지희 )는 단지 서구 근대성의 문화적 흔적들을 신체에 각인한 존재로서의 모던 걸을 넘어 적극적인 사회진출과 경제활동을 추구하는 생산자로서의 여성존재를 부각시킨다. 돈으로 낭만을 구매하는 사장님들과 돈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여성노동자들 사이에서 부유하는 건 바로 윤마담의 존재다. 돌싱녀인 윤마담은 비록 천대받는 마담이지만 나름 기업가로서의 직업윤리를 고수하는 동시에, 여전히 바람직한 남성을 탐색하며 평범한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갈망한다. 전근대적 질서와 현대적 변화 사이에서 길항하는 윤마담은 유행 1번지 명동에서 펼쳐지는 60년대 현대성의 황홀한 만화경 안에서 근대의 딜레마에 협상하는 일종의 균형추이자, 결국 또다시 좌절된 욕망과 체념, 낙관과 희망이 짬뽕된 곤경 만을 떠안은 채 상이한 질서들을 잇고 사라지는 매개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서구적 미인의 대명사였던 최은희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수렴하는 이미지다. 여성, 신체, 노동, 문화에 대한 당대의 감수성을 체화한 윤 마담과 그 동료들의 모습은 70년대 한국영화의 ‘어둠의 딸’ 호스티스와 사뭇 달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꼴을 가진 바로 그 자신의 암울한 근미래를 예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