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뿌리의 여자
- 감독
- 김기영
거창한 의미 부여할 것 없다. <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 >(요시하라 타츠야, 2025, 이하 ‘체인소맨: 레제편’)은 소년만화 저변에 깔린 결핍을 건드리는 고자극 드라마다. 원작 만화의 저변에 깔린 온몸 비틀기 삐딱선과 달리 이번 극장판은 떡밥을 뿌리고 정직하게 회수하는 모범생의 면모를 선보인다고 해도 좋겠다. 다만 강렬하고 직관적인 이미지 자극을 곁들여서. 스핀오프처럼 다소 결이 다른 스페셜 이벤트 같은 에피소드였기에 가능했던 잠깐의 일탈, 쉼표, 한여름밤의 꿈 같은 에피소드였다. 마찬가지로 고자극의 작화와 눈알이 시려울 정도로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곁들여서. 요란하고 화려한, 사상 최대의 연애 싸움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재밌지만, 시간의 풍화를 뛰어넘는 명작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표와 분기로 작용할 만한 깊이를 보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취향 저격의 안전하고, 검증되고, 무난한 작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므로 이 범상한 애니메이션은 매우 사사로워질 자격을 획득했다. 너도 재밌고, 나도 재밌었다는 취향의 확인. 그리하여 의미를 찾아 헤매기보다는 즐거움의 안도감을 안기는 고백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향한 애니메이션, 순애의 재발견 2025년은 애니메이션의 강세가 확연한 한 해였다. 넓게 보면 영화산업의 (쇠퇴와는 결이 다른) 구조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단 한국 시장만의 흐름이 아니지만 한국 시장에서 더 도드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 주토피아 2 >(자레드 부시, 바이런 하워드, 2025)가 2025년 전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건 기존의 관성을 비춰볼 때 당연하다. 가족 관객을 타겟으로 한 검증된 IP의 속편이, 완성도와 무관하게 더 큰 흥행을 거두는 건 늘 반복되는 공식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체인소맨: 레제편>을 향한 호감과 열기는 단순히 수치적인 흥행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흥행 면에선 <귀멸의 칼날> 등 재패니메이션과 같은 흐름으로 묶을 수도 있겠지만 작화를 통해 쾌감을 준다는 면을 제외하곤, <체인소맨>은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체인소맨>이 이번 극장판 레제편에서 맑게 길어 올린 부분은 한동안 일본 만화에 번졌던 유행 같은 감각, 이른바 순애의 연장선에 있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단순한 소년만화의 극장판 확장이 아니다. 차라리 폭력의 세계에 던져진 두 괴물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나누는, 가장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의 변주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 세계는 언제나 젖어 있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 그리고 끊임없이 내리는 비의 눅눅함이 화면 너머로 전해진다. 덴지라는 인물은 태생적으로 결핍의 덩어리다. 그에게 욕망은 거창한 세계 구원이나 정의 구현이 아니라, 잼 바른 식빵이나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이성을 향한 원초적인 호기심 같은 것들에 머물러 있다. TV 시리즈가 덴지의 그 동물적인 감각과 혼돈을 거친 선으로 그려냈다면, 이번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혼돈 속에 싹튼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의 심도를 깊게 가져간다. <체인소맨: 레제편> 중 / 사진: IMDb , ⓒ 2025 M/CSMP ⓒTF/S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가진 특권 중 하나는 현실의 물리학을 무시하는 과장된 움직임, 흔히 데포르메라고 불리는 의도된 작화 붕괴다. 하지만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과장됨 속에 기묘한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MAPPA의 제작진은 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 특히 레제의 얼굴에 스치는 홍조나 덴지의 당황한 눈동자 등 감정의 떨림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액션 시퀀스에서의 속도감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격의 무게감이 관객의 뼈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태풍의 악마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이나, 덴지와 레제가 공중에서 얽히며 싸우는 클라이맥스는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역동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미묘한 리얼리티의 근간에는 원작자의 시점이 투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TV 오프닝에서부터 고백하고 있듯 후지모토 타즈키 작가의 실천에는 영화, 달리 표현하면 카메라의 위치과 프레임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체인소맨: 레제편> 역시, 아니 더욱 노골적인 방식으로 거의 모든 컷의 근간에 실사 영화에 대한 향수가 묻어 있다. 겪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첫사랑의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는 영원히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피어난다. 덴지와 레제가 맺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애틋함의 감흥을 자아내는 것처럼, <체인소맨: 레제편>의 동력도 실사 영화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깔려 있다. 이것은 상하 혹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와 다르고 실사 영화가 될 수 없다. 그 구분을 전제로 하여 한없이 영화에 가깝게,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다르고자 할 때 여타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오리지널리티가 피어난다. <체인소맨: 레제편>의 오리지널리티는 노골적인 애정고백을 바탕으로 한 빽빽한 오마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덴지와 레제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타포인 이솝 우화의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는 덴지와 레제, 두 하이브리드(인간과 악마의 융합체)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시골 쥐의 평온하지만 배고픈 삶과 도시 쥐의 풍요롭지만 위협받는 삶. 덴지는 언제나 도시 쥐의 삶 속에 던져져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시골 쥐의 안온함을 갈구해왔다. 레제는 그런 덴지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고 싶으냐고. 이것은 ‘자유’와 ‘통제’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공안 대마특이과라는 시스템(도시) 안에서 사육되는 덴지와, 그 시스템을 파괴하러 온 외부의 존재 레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진영에 서 있는 듯하지만 실상 누군가의 도구로 쓰인다는 점에서는 거울상처럼 닮아있다. 레제는 마키마의 안티테제로 만들어진 캐릭터답게 첫사랑의 이상향을 응축시켜 놓았다. 진정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면 악마로 변하는 이들의 능력이 아니라 소녀가 소년을 만나는 상황 그 자체라고 해도 좋겠다. 레제가 덴지에게 가르쳐주는 수영법,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그들이 ‘무기’가 아닌 평범한 ‘소년소녀’로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다. 사진: IMDb( 1 , 2 ) 감독은 이 딜레마를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한다. 레제의 폭발은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묘사되는데, 그녀의 머리가 폭탄으로 변하고 사지가 터져 나가는 그로테스크한 변신 장면은, 혐오스럽기보다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준다. 화약(gunpowder)과 꽃(flower).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레제는 치명적이지만 끝내 질 수밖에 없는 꽃이다. 덴지가 그녀에게 건네려 했던 꽃다발, 그리고 마지막 카페 씬에서 들리지 않는 종소리는 이 영화가 결국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체인소 역시 피를 뒤집어쓸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존재다.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올 때의 카타르시스는 체인소의 소음과 겹쳐진다. 그들에게 사랑은 서로를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부수고 태워버림으로써 완성되는 파괴적인 제의(祭儀)와 같다. 그리하여 이들이 빗어내는 시끄러운 소음, 불협화음은 불쾌감 이면에 애잔함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폭탄의 악마가 터뜨리는 굉음은 청각을 마비시킬 듯 몰아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폭발의 순간이 아니라, 폭발 직전의 고요함, 혹은 폭발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재(ash)의 정적에 있다. 태풍이 지나가고 당신의 뇌리와 망막에 남는 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던 덴지가 레제와 함께 학교 수영장에 잠입해 밤의 유영을 즐기는 시퀀스이리라 믿는다. 물의 질감, 달빛이 부서지는 수면, 서로의 몸짓을 훔쳐보는 시선은 액션 장르의 문법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서정적인 이 장면에는 이뤄지지 못할 순수이기에 성립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 불꽃의 반짝임이 예뻐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위태로운 아름다움. 고백하자면 한동안 좋은 걸 그냥 좋다고 말하지 못했다. 의미를 찾아다니고 가치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강박의 저주에 빠진 것 같았다. 때론 있지도 않은 의미를 찾느라 아는 척, 감동 받은 척, 거짓된 취향을 무장한 적도 있다. 어떤 척을 하는 걸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건 갈망이자 방향이며 강렬한 에너지다. 스스로 정한 이상에 도달하려고 발버둥치는 사이 단련되는 부분도 있고, 때때론 그 과정과 행위 자체가 자신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너무 멀리 와버려 지금 어디에 떠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순간이 다가온다.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때 발견한 작은 등대 같은 작품이다. 직관적으로 재미있고, 익숙하고 빤해서 더 마음이 가는 쉼터. 재밌는 걸 그냥 재밌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되돌아보니 우리는 모두 한때 덴지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그저 눈앞의 다정함에 목을 맸던 시절.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때 레제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야만 내가 살 수 있었던, 거짓말로 진심을 감춰야 했던 시절. 굉음이 남긴 이명(耳鳴)은 꽤 오랫동안 귓가에 머물 것이다. 사진: IMDb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 씨네21 》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생물학, 북극의 얼음, 동물의 살점, 알프스의 풍광, 채식주의, 생과 사, 언데드. 당신은 메리 셸리의 소설이 이런 맛깔나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에, 이 작품에 대한 생태비평이 수백 편쯤 제출되었으리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티모시 모턴은 2016년 “『프랑켄슈타인』과 생태비평”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지난 20년간 발표된 약 2천 5백여 편에 달하는 관련 비평에서 생태학을 명시적으로 다루는 작업은 1%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주변적이라고 평가한다. 최근 ‘인류세’ 담론이 대중화되면서 이런 판도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이 위대한 고전에 대한 생태적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다. 어쩌면 가장 흥미로운 생태비평은 지면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구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 프랑켄슈타인 >(2025)을 떠올리고 있다. 2025년 겨울,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최신작에서 델 토로는 셸리의 원작에 내재되어 있는 생태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끌어내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여기서 생태적 관점이란 단순히 기후재난이나 생태위기 등의 문제를 다룬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문명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非)생명적인 것 사이에 그어져 있는 허구적 경계를 질문하고 폭로함으로써 문명적인 것의 폭력성을 성찰한다는 의미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잃고 한낮 물질로 ‘전락’한 시체의 생기 없는 신체 조각들로부터 ‘피조물’을 창조했다. 누더기처럼 짜깁기한 피조물의 몸은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체현하는데, 사실 그 자체가 생명에 대한 사실이다.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명확한 경계란 것은 없다. 예컨대 바이러스는 동물의 생을 가능하게 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바이러스는 생명인가 비생명인가? 모턴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모든 생명체는 이미 “좀비”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빅터가 피조물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피조물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드러내는 임계점, 즉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쾌한 골짜기 역시 인간과 비인간, 정신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근대적 사유가 빚어낸 허상이다. 이런 이분법적 세계관이야말로 인간이 ‘자연’, 즉 ‘대상’으로 규정한 것들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가능하게 한다. 모턴은 불쾌한 골짜기가 확장되면 비로소 ‘유령적 평원(spectral plain)’이 열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생태적으로 각성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 주제는 델 토로보다는 셸리가 더 잘 다루고 있다. 피조물에 대한 빅터의 혐오를 매우 세밀하게, 기이한 열정을 담아,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델 토로는 피조물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재창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를 숭배하게 만든다. 피조물의 피부는 유약을 바른 것처럼 반짝이고, 봉합선은 괴물성이 드러나는 벌어진 틈새라기보다는 공들여 세공한 예술작품 같다. 그는 선하고 서글픈 눈매를 한 패셔니스타다. 델 토로의 피조물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고귀한 타자로서 우리에게 불쾌함의 작은 조각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화려한 미장센에 접붙여진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지만, 생태비평의 관점에선 가장 큰 약점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생태비평의 관심을 견지하고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피조물은 단지 소외된 타자가 아니라, 인간이 인식과 통제의 대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끝내 실패한 어떤 생태적 실재에 대한 의인화로 읽히기도 한다. 이는 델 토로의 작품 목록 안에서 견지되어 온 파시즘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논해질 수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중 사진: “ The Shape of Water ”, “ Guillermo del Toro’s Pinocchio ”, IMDb (© 2017 Twentieth Century Fox Film Corporation / © 2022 Netflix, Inc.) 델 토로는 < 악마의 등뼈 >(2001)와 < 판의 미로 >(2006) 등의 인상적인 초기작에서부터 전쟁이 세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특히 아이들의 생을 어떻게 박탈하는지 강변해 왔다. < 셰이프 오브 워터 >(2017)와 <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2022)에서는 이 문제의식이 생태적인 것으로까지 확장된다. ‘물고기 인간’은 다른 어떤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말살당하고 있는 아마존의 생태적 타자성에 대한 은유로서 등장했고, ‘피노키오’는 숲의 정령의 생기를 나눠 받은 ‘기물(器物)’로서 인간의 얇고 가벼운 시간을 넘어 심원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였다. 이제 <프랑켄슈타인>에 이르면, 세계에 대한 이해를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세계에 대한 정복으로 이해했던 북반구 근대주의자들의 탐욕과 광기가 어떻게 전쟁 및 자연에 대한 식민화와 분리 불가능하게 연루되어 있는지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이 관심사는 엘리자베스 캐릭터를 통해서 다루어진다. 그는 강인하고 우아한 사마귀처럼 스크린을 활보하면서, 원작과 이 작품이 가장 극적으로 달라지는 부분을 담당한다. 셸리는 엘리자베스를 빅터의 고귀한 사촌이자 지고지순한 연인으로 묘사했다. 델 토로는 엘리자베스에게서 순정을 지우고 일종의 매개자(medium)로서의 자질을 더했다. 이성과 과학, 정복의 언어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자연’과 만날 수 없는 빅터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세상의 “가장 작은 것들,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존재들”의 다채로운 모양과 빛깔에 감응하는 자다. 그가 곤충학에 조예가 깊은 이유다. 피조물은 근대적 지식의 격자 속에서 탄생했으나, 그 격자로는 충분히 포착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의 스케일을 초과하는 생태성을 그 뿌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근대적 이성과 비인간적 감응 사이에서 진동하는 자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피조물의 동선을 따라 펼쳐지는 ‘유령적 평원’의 유일한 목격자다. <프랑켄슈타인> 중 엘리자베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엘리자베스는 확신에 찬 반전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생과 사를 정복하겠다는 꿈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것인지, 그것이 어떻게 세계를 파괴하는 전쟁과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고 있다. 빅터와의 첫 식사 자리에서 전쟁과 빅터의 야망을 비교하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이상을 품었을 때” 벌어지는 비극이며, “그 비극을 부추긴 자”들은 죽음 앞에서 “모르는 척한다”라고 분노하는 이유다. 델 토로의 피조물은 피노키오의 또 다른 판본이다. 인간(혹은 아버지)의 목적을 위해 조립되었지만, 그 총합은 인간의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만 델 토로는 언제나 이 ‘기물’들에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선한 마음을 부여한다. 델 토로의 아름다운 판타지 월드의 또 하나의 한계는 어쩌면 이런 선량한 마음일 지도 모른다. 자연이란 그렇게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제임스 러브록의 경고처럼 ‘가이아’는 자신의 시스템을 망치는 존재를 오작동으로 인식하는 냉정한 피드백 루프임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손희정(문화평론가) l 미디어 그룹 '프로젝트38' 멤버.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2024) 집필.
<그저 사고였을 뿐> 중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 Les Films Pelleas) 몇 해 전 한 시네필 커뮤니티에서 “영화, 어디까지 봤니(소위 ‘시네필력’ 테스트)”의 끝판왕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권역을 담당하는 프로그래머로서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론 묘한 민망함이 스쳤다. 같은 아시아 대륙에 속해 있지만, 우리에게 동남아시아나 서아시아 영화들은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심리적으로도 멀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 소개되는 편수 자체가 절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은 앞다퉈 아시아의 새로운 영화들에 주목하고 있다. 이곳이 지금 가장 역동적인 작가군이 형성되고 있는 흥미로운 화수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매해 주요 영화제 수상작 리스트에는 이 지역 감독들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산업적인 지형도 바뀌고 있다. 필리핀과 태국이라는 전통적인 영화 강국 외에도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신흥국들이 자국 상업영화로 박스오피스를 주도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탄탄해진 산업적 기반 위에서 작가주의 영화들이 칸, 베를린, 로테르담 등 서구권 영화제를 휩쓰는 현상은 이제 하나의 경향으로 굳어졌다. 한편, 검열이나 전쟁으로 억눌려 있던 서아시아권의 목소리 또한 잠재력을 폭발시키고 있다. 망명지에서 혹은 비공식적인 루트로 영화를 만들던 이들은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와 도하를 중심으로 한 공격적인 지원 정책에 힘입어 그들의 언어로 동시대의 서사를 드러내고 있다. 비슷한 역사적 상흔과 아시아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우리로서는 이 흐름을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 그 거대한 파도의 맨 앞자리에 선 젊은 작가들의 데뷔작들을 통해 아시아 영화의 현재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쓸모 있는 귀신>: 눈을 뜨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증거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 Best Friend Forever 불교 국가이자 뿌리 깊은 민간신앙의 전통을 가진 태국은 동남아의 오랜 영화 강국이다. 하지만 강력한 검열 탓에 근현대사나 사회적 이슈를 직설적으로 다루기는 어려웠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들이 몽환적인 숲과 은유로 점철된 것은 이러한 억압에 대한 미학적 응답이었을 것이다. 반면 < 쓸모 있는 귀신 >(랏차뿜 분번차초케, 2025)은 태국 주류 장르인 호러 코미디에 SF와 퀴어 코드를 뒤섞으며 노골적으로 장르를 융합하고 파괴하는 혁신적인 태도를 취한다. 진공청소기에 빙의한 귀신이 다른 귀신을 퇴마하고 살아있는 남편은 혼령의 기억을 붙들려 애쓴다는 설정은 자칫 난해하거나 신인 감독의 객기 어린 실험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놀라운 지점은, 그 황당한 설정 속에 태국 사회, 더 넓게는 국가 폭력의 은폐와 트라우마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심어놓았다는 데 있다. 영화는 기억을 저장하는 타임캡슐로서 매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하다. 교육 제도와 레거시 미디어가 철저히 은폐하려 했던 태국 민주화 과정의 잔혹한 상흔을 이토록 대담하고 환상적인 화법으로 직시한 영화가 또 있었던가. < 노란 누에고치 껍데기 속 >: 나비가 되기 위한 인고의 시간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베트남 영화는 강렬한 색감과 회화적인 구도에 강점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팜 티엔 안 감독은 이 시각적 유산을 능숙하게 다룰 뿐 아니라 편집이라는 시간의 리듬마저 훌륭하게 조율해낸다. 데뷔작이라고는 믿기 힘든 정교한 롱테이크는 단연 압권이다. 영화 속에서 때론 아름답게 때론 무심하게 스쳐 가는 풍경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기원전부터 수백 세대를 거쳐 ‘사람이 가꿔온’ 장소이자 척박한 정글을 일군 땀, 수천 년에 걸친 전쟁의 피와 외세의 침략을 물리친 눈물이 배어 있는 역사적 지층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 던져진 주인공의 삶 역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간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가족을 잃고 시골로 내려가 장례를 치르며 조카를 돌봐야 하는 현실은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오롯이 그의 몫에 달려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베트남 영화사에 이정표가 될 만한 지점은 그간 금기시되던 베트남 전쟁의 상흔을 무심한 듯 툭 건드리는 대목이다. 그것이 당국의 실수였든 의도치 않은 허용이었든 이 장면은 베트남 영화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 호랑이 소녀 >: 소녀의 해방이 선사하는 날 선 카타르시스 사진: IMDb , 부산국제영화제 이슬람 문화권인 말레이시아에서 소녀의 신체적 변화는 흔히 부끄럽고 감춰야 할 대상으로 치부된다. 아만다 넬 유 감독은 12세 소녀 자판을 통해 이 금기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자판은 초경을 불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의 몸이 겪는 변화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바디 호러’라는 장르는 사회적 억압을 찢고 나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 탁월한 선택이 된다. 영화를 견인하는 힘은 소녀들이 뿜어내는 야생적인 활력이다. 기성세대가 씌워놓은 차별과 억압의 프레임을 내면화하는 대신, 자판은 두려움마저 집어삼키고 사회가 경외하는 호랑이로 탈피한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긍정하는 것만큼 큰 자유가 어디 있을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정작 본국인 말레이시아에서는 검열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가진 전복적인 힘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자서전>: 깨지 않는 숙취 같은 독재의 그림자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 KawanKawan Media < 자서전 >(막불 무바락, 2022)은 독재 정권이 끝나면 곧 공정한 세상이 올 것이라 믿었던 청년의 순진한 믿음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수십 년간 이어진 독재의 잔재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의 미세한 틈새에서 악취를 풍긴다. 수감된 아버지를 대신해 은퇴한 장군의 저택에서 일하게 된 청년 라킵은 카리스마 넘치는 장군을 아버지처럼 따르며 냉혹한 어른의 세계를 학습한다. 그는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거짓을 덮고 우발적인 폭력을 묵인한다. 약육강식의 법칙 속에 새겨진 부패는 라킵의 내면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인도네시아의 신예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인 막불 무바락 감독은 자칫 관념적으로 흐를 수 있는 사회적 담론을 부자 관계를 연상시키는 개인의 서사로 치환하여 설득력을 얻는다. 과거의 유령이 현재의 청춘을 어떻게 잠식하는지 그 서늘한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이러한 표현이 허용된다는 사실 자체에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희망을 엿보게 된다. <대통령의 케이크>: 달콤한 케이크 위로 흐르는 씁쓸한 아이러니 사진: 토론토국제영화제(TIFF) 이웃 국가와의 전쟁과 강압적인 철권통치 아래 놓인 1990년대 이라크. < 대통령의 케이크 >(하산 하디, 2025)는 이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소녀의 험난한 여정을 그린다. 9살 소녀 라미아에게 떨어진 숙제는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할 케이크를 구해오는 것. 경제 제재로 당장 먹을 빵조차 부족하고 사기꾼이 들끓는 거리에서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다. 하지만 절대권력과도 같은 선생님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는 소녀는 길을 나선다. 시장과 검문소에서 마주친 어른들은 소녀를 도울 여력이 없거나 오히려 이용하려 든다. 그러나 라미아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전문적인 연기 수업을 받았을 리 만무한 비전문 배우가 보여주는 그 단단한 눈빛은 연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체득한 앙상한 강인함처럼 보여 마음을 울린다. 가장 달콤해야 할 케이크를 구하기 위해 가장 비정한 현실을 통과해야 하는 아이러니. 영화는 그 끝맛이 달콤함이 아닌 강렬한 메시지임을 담담히 보여준다. <그저 사고였을 뿐>: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외치는 진실 앞서 살펴본 데뷔작들과는 조금 결이 다르지만 올해 가장 주목받은 영화중에 하나인 < 그저 사고였을 뿐 >(자파르 파니히, 2025)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늦은 밤 운전 중에 발생한 로드킬로부터 시작된 영화는, 도입부 이후 자기의심과 복수심 사이에서 국가폭력 희생자들이 겪는 끊임없는 갈등이 고조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정부로부터 영화 제작 금지와 출국 금지라는 가혹한 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며 저항의 서사를 써 내려온 작가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그저 사고였을 뿐>은 제목이 주는 무심함과는 대조적으로, 이란 사회 내부에 깊게 뿌리 박힌 불신과 권위주의, 그리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집단적 심리를 이전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층 서늘해진 시각으로 해부한다. 국가적 트라우마가 개인의 일상을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묵직하게 웅변하고 있다. 사진: Cinema Galeries 스크린으로 목격하는 아시아의 오늘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전반적인 경향을 짚어보자면, 동남아시아는 적극적인 국제 공동 제작의 틀을 활용해 자본과 기술의 한계를 영리하게 극복하며 외연을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서아시아는 국가 정책의 기조가 과거의 통제에서 적극적인 지원으로 선회하며 산업 성장의 새로운 탄력을 받는 모양새다. 두 지역 모두 이전보다 압도적인 작품 수와 두터워진 작가군을 배출하며 영화 산업의 비약적인 고도화를 이뤄내고 있다. 물론 모든 곳이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이란과 같이 정부의 직접적인 검열과 통제가 오히려 강화되는 역행의 길을 걷는 국가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가장 날카로운 저항의 언어로 거듭난다. 억눌린 목소리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 기어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본래 영화는 소설이나 미술 등 인접 예술의 자양분을 섭취하며 성장해왔지만 동시에 대중과 가장 밀착된 예술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아 왔다. 과거에 금기시되었던 소재를 수면 위로 올리고 소외되었던 관점을 복원하는 이들의 시도는 단순한 미학적 성취를 넘어선다. 특히 초반에 열거한 다섯 편의 영화들은 각기 다른 국가, 장르,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하나의 거대한 맥락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바로 기억과 응시다. 이들은 국가가 감추고 싶어 하는 치부나 사회가 강요하는 금기를 외면하지 않고 장르적 상상력 혹은 집요한 리얼리즘을 통해 스크린 위로 기어이 끄집어낸다. 특히 이 작품들이 모두 신인 감독들의 데뷔작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윗세대가 남긴 부채와 상흔을 물려받았지만 그것을 자신들만의 새로운 문법으로 해석하고 기록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망각에 저항하는 기록이자 억압된 목소리들의 연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낯선 아시아 영화들을 보며 기시감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 또한 지난한 근현대사를 통해 비슷한 고통과 성장을 겪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대 아시아 작가들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단지 이국적인 풍광을 즐기는 취미를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의 고군분투에 보내는 가장 조용한 응원일지 모른다. 스크린 너머 그들의 치열한 오늘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박성호(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l 10년 이상 해외에 거주하며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영화를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A Million Years (2018) 등 다수의 단편 및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