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성어(四者性語)-하지, 마초사냥꾼, 바디, 원적외선
- 감독
- 김정구, 이송희일, 유상곤, 이지상
- 제작년도
- 2002
- 출연
- 최서연, 박재현, 최현, 박미현, 고수희, 우지니, 김영무, 윤기웅, 이나라, 최경록, 배용근, 노익현, 오현정, 김여원, 최인라, 김태성, 서용수, 정행심, 마창일, 김윤희, 이상노, 정성현, 이준영, 안은정, 유동숙, 김현수, 남경표, 서정오, 이석규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감독의 < 퍼스트 카우 >(2019)는 오프닝 타이틀 후 “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로 영화를 시작한다. “새에겐 새집이, 거미에겐 거미집이,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한국어 번역은 자연스럽지만, ‘man’은 한국어로 번역할 때 그 함의를 옮기기 위해 고심하게 하는 단어이다. man이 인간이라면 남성으로서(만) 인간이며, man이 남성이라면 인간 대표로서 남성(만)이다. <퍼스트 카우>는 블레이크에게,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20년대 서부 개척지라는 시공간에게 아무런 모순 없이 당연했을 인간-남성이라는 전제를 문제시하고 해체하는 시도를 한다. 규범적 남성성 외부의, 즉 ‘인간’ 밖의 남성의 우정이 전면화 되고, 그 우정은 (개, 도마뱀, 올빼미, 고양이, 소와 같은) 동물과 여성, 즉 비남성-비인간들과 관계를 맺는다. <퍼스트 카우>는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진술을 긍정하지만 동시에 의심한다. 쿠키의 첫 등장은 단순하지만 다정하고 경쾌한 선율의 피아노 소리와 함께 버섯을 채집하는 섬세한 손으로 제시된다. 노란 버섯들 사이로 몸이 뒤집혀 노란색 배를 드러낸 작은 도마뱀을 조심스럽고 친절한 손길로 도와준다. 이 다정하고 충만한 분위기는 곧 외부의 사운드에 의해 깨진다. 쿠키는 떠돌이 모피 사냥꾼들의 무리에 고용된 요리사다. 사냥꾼들은 쿠키가 정성스레 채집한 버섯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동물들을 잡아서 먹을 것을 만들어 달라고 위협하듯 말하거나 툭하면 주먹 다짐을 한다. 쿠키가 이 ‘남자’들의 세계에서 환영 받지 못 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쿠키 자신도 비규범적 남성으로서 자신을 비애적으로 대하거나 이 세계에 안달복달하며 적응하고자 하지 않는다. 우물쭈물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남자들을 대충 따돌리고 자신만의 텐트로 숨어들거나 도망가버린다.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 부츠를 장만해 신고 남자-인간들의 미개척지를 걷는다. 한편, 쿠키와 우정을 나누는 킹 루는 상승을 향한 도전에 불타는 기업가 기질로 충만해 있다. 개척지의 남성으로 손색이 없어 보이는 성정을 갖추고 있지만, 인종적으로 남성-인간의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 한다. 킹 루는 올빼미가 쿠키 일행의 텐트를 내려다 보는 날 밤 벌거벗은 채 나타나고, 쿠키로부터 온기와 먹을 것, 쉴 곳을 제공 받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연히 쿠키를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의 작은 집으로 초대한다. 한참 숲길을 걸어 도착한 오두막에서 둘은 술을 나눠 마시고 킹 루는 장작을 패러 나간다. 오두막에 남겨진 쿠키는 잠시 어색해하다가 곧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쓴다. 이불을 털고 꽃을 구해와 오두막을 장식한다. 이후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이 둘의 이러한 작은 일상들이다. 같이 먹을 것을 채집하고 집을 돌본다. 한 명이 빨래를 하면, 한 명은 낡은 옷을 기운다. 서부 개척 시대 백인-남성-인간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인간-남성성 구현의 실패나 그 폭력성과 야만성을 보여주는 영화는 이전에도 많다. 그러나 그 실패를 보여주는 과정은 종종 이상적 남성성에 대한 매혹이나 열렬한 열망, 그리고 실현될 수 없음에 대한 비애, 자기연민을 동시에 노출한다. <퍼스트 카우>는 결론적으로 실패든 비애든 그러한 이상적 인간-남성 규범을 통한 남성성 탐구에 관심이 없다. 영화는 이 두 남자의 이러한 필요에 의한 일상 노동으로 채운 시간을 보여주고, 애정 어린 다정함이 기반이 된 관계에 집중한다. 이 다정함의 관계는 인간- 남성의 규범적 관계를 전복하거나 감화시키기 보다, 즉 휴머니즘의 가치를 대체하기 보다 그 주변의 비인간적인 것들을 향한다. 쿠키는 ‘첫 번 째 소’(영화의 타이틀 롤!)의 우유를 자신의 필요를 위해 매일 밤 짜러 가지만, 소를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것이 아닌 의존하는 공존의 자세로 소를 대하고 둘 사이에 애착이 형성된다. 영화에서 관객이 제일 먼저 보는 생명체는 개이다. 그리고 그 개 옆에는 여자가 있다. 개가 가장 먼저, 그리고 다음으로 여자가 이 둘의 오래 된 과거의 물질적 증거를 발굴한다. 원작 소설에서는 소년들이었던 것이 (감독의 전작 <웬디와 루시>(2007)를 떠오르게 하는) 개와 여자로 바뀌었다. 영화는 종종 개와 소, 고양이, 올빼미와 같은 동물들이 무엇을 바라보는 눈이나 얼굴, 그리고 그들 시선의 반대편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진행과 전혀 상관은 없지만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의 원주민 여성들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얼굴도 종종 포착한다. 즉, <퍼스트 카우>에서 보여지는 풍경들에는 동물들과 원주민 (여성들)의 시점이 포함되어 있다. 쿠키와 루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는 않지만, 영화에는 원주민 말을 하는 여성 두 명이 등장한다. 원주민 촌장의 아내와 영국에서 온 지역 권력자이자 ‘퍼스트 카우’의 소유자인 팩터의 아내이다. 두 여성은 서로 긴장 관계인 남편들 사이에서 말을 전달하는 도구거나 이국적 장식품처럼 기능하다가, 남자들이 방에서 사라지자 마자 자리를 옮겨 가까이 앉고 긴장이 전혀 없는 친밀하고 즐거운 얼굴로 대화한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번역되지 않는다. 그 둘 사이의 공기는 짐짓 대접하는 척하지만 허세와 과시, 긴장으로 가득 찬 남자들 사이의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퍼스트 카우>는 이러한 다정함 관계와 비인간-남성적 시선들을 결코 이상화하지 않는다. 서부 개척 시대의 시간을 정복이 아니라 다정한 공존의 관계 비인간-남성적 시선들로 채우지만, 이것은 곧 부서지며, 영화의 시작부터 예정되어 있다. 1820년대로 가기 전, 영화는 현대를 경유한다. 관객은 두 주인공의 시체를 미리 보고서야 1820년대의 시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개가 시체를 발견하기 앞서, 제시되는 것은 넓은 강에 굉음을 내는 거대한 증기선이 지나가는 모습이다. 광활한 자연 속에 기차나 마차가 지나가던 풍경을 포착하는 오프닝은 감독의 전작들과 겹쳐지며, 또한 영화의 끝에 감독이 경의를 표했던 피터 허튼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이미지들은 자본주의 산업화에 의해 침범된, 조직된 자연이다. 그리고 ‘퍼스트 카우’가 배를 타고 지주 팩터의 소유지에 도착하는 모습은 이 증기선이 움직이는 모습과 겹친다. 쿠키가 공존과 애착의 관계를 소와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이 소는 등장할 때부터 개인의 사유재산, 가’축’으로만 의미를 가지며 소유권으로 통제된다. 킹 루의 동물과 자연에 대한 관점은 쿠키의 관점과는 달랐다. 비버를, 소의 우유를 가공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가공되지 않은 채로 있는 미개척 서부는 킹 루에게 아직 역사가 시작되지 않은 곳이다. 그렇지만 팩터를 비롯한 제국주의의 약탈권과 소유권은 보호되지만, 인종적 약자인 킹 루의 초기 자본축적을 위한 약탈은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 영토와 자원에 대한 독점 소유권과 강탈이 중요한 축을 이루는 초기 미국 개척 신화, 그리고 서부극과 다른 자리에서 서서 다른 시선들을 보여주지만, 역사의 진행에 대한 비관은 언제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종착점은 개와 함께 떠도는, 최종적으로는 그마저 함께 할 수 없는 <웬디와 루시>의 삶이다. 초기축적에 있어 불평등한 관계로 출발했던 자본주의는 소유권과 그 침탈에 있어서는 “모두에게 규칙이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웬디와 루시>에서 웬디의 좀도둑질에 대한 마트 직원의 대사)며 웬디의 삶을 인간의 룰에서의 안착보다는 비인간 개와의 관계에서 애착으로 향하게 한다.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늑대-여자들 어떤 영화로 리뷰를 쓸까 고민하며 올해 뽑은 나의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를 한참 노려보다 특정 형상이 떠올랐다. 그건 세대도, 국적도, 상황도 다른 ‘늑대-여자’의 형상이었다. 무정부주의적 에코 페미니스트인 노년의 늑대-여자, 수의대 신입생 통과의례로 날고기를 먹은 후 낯설지만 강력한 자신의 힘을 지각하게 된 식인 늑대-여자, 돌연변이 유전자 실험으로 태어나 초능력을 지닌 십 대의 늑대-여자. < 스푸어 >(아크네츠카 홀란드, 2017)의 두셰이코, < 로우 >(줄리아 듀콜뉴, 2016)의 쥐스틴, < 로건 >(제임스 맨골드, 2017)의 로라가 바로 그들이다(늑대가 아닌 다른 동물로 더 확장해 논의하면 <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일디코 엔예디, 2017)의 주인공으로, 소 도축장 품질검사관이자 사슴이 된 마리어까지 포함할 수 있겠지만 지면의 한계 상 제외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종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이접, 혼종, 합종하며 인간성,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제 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인간성에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인간은 이 상태로 존재해도 되는가?’이다. 그러나 두셰이코, 쥐스틴, 로라는 인간성을 질문하기 위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깊게 파고 들어가며 또다시 인간 중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방식을 비껴간다. 오히려 폭력적인 악당으로서의 인간은 캐리커처화되고 종을 횡단해 동물성을 탐험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동물성이 아니라 동물이 되어 감각하는 동물성이다. 인간은 그 스스로도 동물의 일부면서 특히 자신 내부의 야만성, 폭력성, 자기중심적 욕구충족, 비성찰성, 폐쇄성, 생존을 위한 이기심과 무한경쟁 등을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묘사하기 위해 ‘동물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왔다. 그러면서 인간을 동물에서 분리해 예외적 특권을 가진 존재로 가정한다. 이러한 위치선점은 인간의 지구 지배를 정당화하고 여타의 동물을 타자화한다. 그러나 < 스푸어 > < 로우 > < 로건 >의 늑대-여자들은 늑대와 혼종하며 동물성을 다르게 감각한다. 그녀들은 절대적 공감, 기존의 기표에 포섭되지 않는 소수자의 욕망, 경계와 고정관념을 흐리며 배치를 다르게 만드는 공동체, 자율과 야성성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소수자를 지지하는 연대를 특징으로 한다. 늑대-여자들은 아웃사이더이며 순응적이지 않고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고립되지 않고 불가능할 것 같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때문에 ‘짐승 같은 야만성’을 강조하는 남성들의 영화가 늘 떼로 몰려다녀도 결국은 반복적으로 ‘고독한 늑대’로 결론 맺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늑대-여자들이 주인공인 이 세 영화에서 기성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남성과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에 반격하는, 그래서 살인과 식인도 서슴지 않는 동물성은 소수자의 욕망이다. 두셰이코Duszejko “블랙코미디 요소를 지닌 무정부주의적인 페미니스트의 범죄 이야기”라고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이 스스로 정의내린 이 영화는 리벤지 스릴러, 미스터리, 액션,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어 때때로 영화가 덜컹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덜컹거림, 그 이종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의 혼종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이고 미학이며 즐거움이다. 그 혼종성은 이 영화의 포스터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늑대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한쪽 눈은 인간의 눈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재미를 위해 잔인하게 동물을 사냥하고, 제도, 법, 종교가 그 폭력을 승인하는 사회(법은 계절별로 사냥 가능한 동물을 지정하고, 종교는 사냥꾼을 축복한다)에 두셰이코는 늑대가 되어 복수를 감행한다. 사냥꾼들은 단지 동물만 죽이지 않는다. 여성과 아이 등 사회의 소수자들에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고 폭력을 가한다. 즉 사냥은 인간의 동물성이 아니라 권력과 위계의 문제다. 서사적으로 보면 이 복수는 사계절에 걸쳐 일어난다. 대부분의 리벤지 스릴러는 최종 보스를 만나는 장면에서 가장 스펙터클하게 액션을 감행하며 억압되어 있던 분노를 터트리는 식으로 진행되지만, 이 영화는 반대다. 복수는 천천히 이뤄진다. 이러한 서사는 동물과 여성에게 가해왔던 폭력이 그만큼 길고, 오래, 일상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속되어왔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폭력은 한 명의 남성 악당이 아니라 남성 중심 네트워크가 조직적이고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형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에서 동물을 보여주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동물은 단순히 풍경이 되지 않는다. 총성이 울릴 때 동물들이 도망치는 인서트에서 흔들리는 카메라는 사냥하는 쪽의 액션이나 스릴이 아니라 도망치는 쪽의 위급함과 다급함을 재현하며, 살인현장에 나타난 늑대와 사슴들은 그들의 시점 쇼트를 갖는다. 그것은 쇼트와 역쇼트의 형식에서 비가시적이었던 시점이다. 동물의 시점 쇼트는 늑대가 되어 복수를 감행했던 두셰이코와 마찬가지로 관객들로 하여금 종을 가로질러 사슴이나 늑대가 되게 하고 그들의 정념을 감각하게 한다. 쥐스틴Justine < 로우 >는 장르적으로 < 캐리 >나 < 진저스냅 > 같은 공포영화의 전통에 닿아 있다. 이 공포영화들은 10대 중후반 소녀의 섹슈얼리티를 위험하고 비규범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그 은유로 주인공 여성이 초능력이나 이질적인 정체성을 지각하게 한다. <로우>는 이 서브 장르를 차용하면서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혐오하는 클리셰를 반복하지 않고 가장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정치학으로 향한다. 부모, 언니가 모두 수의사이고 엄격한 채식주의자이자 모범생으로 자랐던 쥐스틴은 수의대 신입생 통과의례로 강제로 토끼의 생간을 먹게 된다. 그녀가 경험한 수의학과는 동물을 존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위계가 심한 남성 중심적인 문화로 가득한 곳이다. 여자들은 성적 희롱의 대상이 되고, 게이인 남성은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 와중에 이상한 허기 속에 쥐스틴은 날고기를 먹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충족감을 느낀다. 영화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사이의 경계와 금기를 거부하고 비체적인 피부 발진, 머리카락, 날고기, 물어뜯기, 오줌 싸기, 토하기 등을 보여주며, 여성의 몸에 대해 질문한다. 날씬한 몸을 위한 식이통제, 가랑이 털을 밀어버리는 비키니 왁싱(자매의 비키니 왁싱 장면은 공포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이다!)은 무엇을 위한 고통인가. 이것은 정말 인간적인가. 자신의 식인 욕망이 모계로부터 왔다는 것을 안 쥐스틴은 윤리적 선택에 직면한다. 엄마처럼 엄격한 채식주의자로 살 것인가, 언니처럼 자신의 욕망을 풀어놓고 사회의 심판을 받을 것인가. 그러나 부계 혈통의 < 늑대아이 >와는 달리 이 선택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쥐스틴은 여성으로서 어떠한 곳에 맞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감정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식인 정체성뿐만 아니라 여성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두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윤리적 선택도 가능하다. 쥐스틴과 같은 젊은 여성이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할 때 느끼게 되는 일상적 폭력, 불쾌함, 분노는 잔인한 유머와 함께 클로즈업과 롱테이크, 촬영 속도를 변화시키며 흐르는 듯한 움직임과 거리를 둔 으스스한 금욕적 설정 쇼트를 오가는 카메라를 통해 우아하게 구현된다. 로라Laura 전통적인 남성 장르로 여겨졌던 서부극과 슈퍼 영웅 액션의 혼종인 < 로건 >은 고독한 ‘늑대-남자’의 죽음이자 새로운 종(트렌시젠) ‘늑대-여자’의 시작을 그린다. 이 영화에서 로라를 비롯해 실험실에서 태어난 뮤턴트 아이들은 위의 두 영화에 등장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우리에 갇혔다. 이제 늙고 병든 울버린보다 힘이 센 로라는 포스트페미니즘 시대에 걸 파워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아빠 딸 Daddy’s Girl‘이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유지할 수 없는 남성들은 딸들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힘을 여전히 확인하는 방식은 그 딸의 힘이 엄마가 아닌 자신에게서 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건>이 흥미로운 슈퍼 영웅 액션 영화인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로라는 울버린이 포기하고 프로페서 엑스가 망쳐버린 뮤턴트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다. 여전히 ‘고독한 늑대’로 서부극의 남성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울버린과 달리, 그의 죽음 후 로라는 다른 뮤턴트 아이들을 이끌고 함께 떠난다. 모가장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두셰이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법을 고민하는 쥐스틴, 억압받는 이들의 공동체를 재건하는 로라, 늑대-여자들은 홀로 떠나지 않는다. 모계를 강조하고 부계와의 단절을 말하는 이 영화들은 사실 세 세대의 페미니즘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60대 여성인 두셰이코의 페미니즘은 급진적 변화를 원했던, 즉 혁명적 비전을 가졌던 이들의 것이다. 그녀들은 기성 시스템을 말 그대로 꺼버리고 무정부주의적 혁명을 원한다. 세계는 다시 변화할 것이고 새로운 사이클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기다린다. 그래서 < 스푸어 >에서 모든 버려지고 배제된 존재들이 모여 있는 환상적인 공동체는 사적인 소망성취라기보다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다. 쥐스틴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몸이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서 얼마나 억압되고 비인간적으로 통제되고 있는지를 비판하는 2세대 페미니즘의 전통에 있다. 가부장제, 규범성으로부터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해방시키는 것은 여성들에게 엄청난 힘을 돌려줄 것이다. 로라는 여성 또한 강한 힘을 갖고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보는 포스트페미니즘의 걸파워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거침이 없으며 타고난 재능과 힘을 주저하지 않고 발휘한다. 이 세 세대의 페미니즘은 연대기적이지 않다. 이 다양한 페미니즘은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 속에서 함께 공존한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동물 종을 가로지르며 그동안의 인간성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왔는지를 비판한다. 또한 부계의 전통하에 있던 장르들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모계화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폭력과 살인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소수자의 욕망을 위해 사용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영화가 시작되면, 박영규 의 눈이 익스트림 클로즈 업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흐르는 내레이션. “본시 제비란 봄과 따뜻함을 의미하는바, 외로운 여성에게 춤으로 위안을 주고 그 대가를 받는 직업인데 요즘 본질을 잃은 제비가 있어 가정파괴마저 불사하니 참으로 큰일입니다.” 익스트림 클로즈 업과 오프닝 타이틀 < 신사동제비 >가 개봉된 1989년 11월은, 1990년에 있을 노태우의 ‘범죄와의 전쟁’을 목전에 두던 때였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집창촌 집중 검문을 통해 실종 처리되었던 많은 여성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인신매매에 대한 괴담이 절정에 달하던 때였다. 남자는 봉고차에 끌려가 팔다리가 잘려 앵벌이가 된다는, 여자는 온갖 수모를 당하고 집창촌에 팔려간다는 등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들렸었는데, 결국 수사를 통해 괴담이 완전한 허구가 아니었음이 밝혀진 셈이다. 이러한 인신매매의 주범으로는 조직폭력배들이 주로 지목된 까닭에 그들을 소재로 하는 에로영화와 다찌마리 영화가 상당수 제작되었지만, 어릴 적부터 영화감독이 꿈이었다는 당시의 톱스타이자 영화광(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안봐도 비데옵니다’의 박세민은, ‘제비’를 소재로 한 인신매매 영화를 제작한다. 그것도 무려, 제비들을 질타하기 위해. 서두에 언급한 내레이션은 제비 도사 박영규 가 한 말이다. 그는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져 금품갈취와 인신매매를 일삼는 사파 제비들에게 진절머리가 나, 모든 것을 접어두고 산속에서 원숭이를 키우며 소일하는 은퇴한 제비왕이다. 아내( 원미경 )가 인신매매를 당해 실종된 상태에서 ‘아내는 제비에게 납치되었으니 제비가 되어야만 찾을 수 있다.’는 점쟁이의 말만 믿고 찾아온 동준( 강남길 )을 받아들여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던 댄스 중의 댄스, ‘세게하면 고통을 주고 살살하면 쾌락을 주는 급소댄스’를 가르친다. 제비 도사는 제비의 정도를 세우는 사업을 동준에게 맡기며 이를 위해 모아둔 ‘적금 통장’을 전달한다. “제비가 되기 위해선 신사가 되어야 한다. 신사가 곧 제비다. 신사동(同)제비니라. 자. 신사동에 가서 너의 실력을 뽐내 보거라.” 급소 댄스 전수 과정 적금 통장 전달 '실력을 뽐내 보거라' 이 부분은 이 영화의 제목이 왜 ‘ 신사동제비 ’인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1주년 결혼기념일 날 나이트클럽에서 파티를 연 동준과 미영 부부. 우연찮게 같은 클럽에 있던 제비들에게 타깃이 되어 납치된 미영(원미경)과 그녀를 찾기 위해 제비 도사를 찾아 ‘급소 댄스’를 전수받고 아내를 찾아 헤매는 동준( 강남길 )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나가고 있으니, 잠깐 열거를 해보자면 1. 미영을 납치한 제비들은 여자들이 쌓이자 ‘전국인매대회’(‘전국인신매매대회’의 준말이며, 식전 행사로 ‘먼저 간 제비 선배들에 대한 묵념’을 행하고 있다.)를 열고 전국의 포주들을 불러 경매를 한다. 2. 바다에 빠져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미영은 우연하게 잠수부들에게 구조되고, 도사의 외모를 가졌으나 스스로를 ‘이 시대 마지막 내시’라 칭하는 노인에게 ‘약간의 공격술’과 ‘폭발물 제조’를 배우게 된다. 미영은 묻는다. “할아버지는 취미가 뭐예요?” “오로지 폭발물 제조지. 내시가 된 것도 테스트를 하다가 그만...” 가엾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미영 3. 노인과 헤어진 미영은 람보 비슷한 옷을 입고 원수들의 사진을 아지트에 붙여놓고 하나씩 X표를 쳐가며 살해해 나가는데, 밑에는 붉은 페인트로 ‘여보! 용서해줘요!’라고 쓰여 있다. 4. 동준은 제비 도사가 키우는 원숭이를 약 올리다가 그를 원숭이로 오해한 사냥꾼들의 총에 얼굴을 맞게 된다. 위독한 상황에서 수술을 받게 되는데, 제비 도사의 집에 남아있던 유일한 사진인 나쁜 제비 보스, 박세민의 얼굴이 동준의 얼굴이라 오해 한 의사는 동준을 박세민의 얼굴로 성형해 버린다. 믿기지 않겠지만 동준은 원숭이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저 고릴라(!) 인형을 들고 원숭이 흉내를 내고 있었을 뿐인데, 사냥꾼들은 그를 원숭이로 오인해 사격해 버린 것이다. 이 정도만 봐도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아찔함이 몰려오지만, 일일이 열거할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인 개드립이 영화에 촘촘히 박혀있다. 당시 어린이 영화, 에로 영화에 대거 등장했던 개그맨들의 영화 진출로 기획되었던 탓인지, 정재환 , 정재윤 , 김상호 등 당시의 인기 개그맨들이 총출동하여 틈 나는 대로 본인의 유행어 캐릭터를 뽐내는 통에 이게 <유머 1번지> 녹화 본인지 영화를 보는 것인지 헷갈리기까지 할 지경이다. 영화가 이 모양인 까닭에, 과거의 자료를 뒤져본 들 이 영화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억지로 찾아보자면, “퇴폐조장 영화제목 여과장치 필요하다”라는 동아일보 기사에 언급되거나, “개그맨 탈 안방극장 러시”라는 제목의 경향신문 기사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사라져 가버릴 운명이었던 영화가 몇몇의 변태 영화팬들에게 알려진 것은, 하필 개봉 10주년인 1999년에 발표된 가수 유희열 의 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에 실린 한 편의 글 때문이었다. 스스로 비디오 가게의 협객이라 밝히고 있는 유희열은 어느 날 비디오 가게 아저씨에게 “제일 후진 걸로 주세요.” 라는 주문을 했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주인의 손에 들려있던 비디오 테잎이 바로... < 신사동제비 >였다는 것이다. 그는 인생의 영화로 < 토마토 공격대 >와 바로 이 <신사동제비>를 꼽았다. 과연 감성 변태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다. 유희열 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 재미있는 점은 또 있다.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사람은 ‘ 민성욱 ’이다. 민성욱...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싶어 찾아보니, 현재 전주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이며 백제예술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신 바로 그분이시다. 긴가민가할 것도 없다. 본인이 JIFF 블로그에 밝혀 놨으니까. 당시 인기몰이 중이던 ZAZ사단 (< 에어플레인 >, < 총알 탄 사나이 >)류의 코미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민성욱 (당시) 작가는 충무로 최고의 고료를 받고 < 신사동제비 >를 썼다고 한다. 제작사에서 내건 조건은 단 두 개. 아내가 인신매매 당해야 하며, 아내를 찾기 위해 남편이 제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본인의 우상(이라고 본인이 밝힌) 박세민 을 찾아가 감독직을 부탁했고... <신사동제비>는 완성된 것이다. (원글을 읽고 싶으신 분은 14회 JIFF 홈페이지를 가보시기 바란다.) http://goo.gl/1NopXM 이렇게 전사를 알아보니, < 신사동제비 >는 당대의 사회상을 베이스로 유행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버무려 최고의 흥행을 했어야 하는 영화였다. 하지만 검열과 제작사의 횡포로 영화 만들기의 어려움이 최고조에 달했던 80년대 말에 제작된 <신사동제비>는 해도 해도 너무한 몰골로 나타나, 그런 억압과 제한 속에서 비굴하게 타협하는 당대의 영화들을 의도적으로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괴작이 되고 만 것이다. 박세민 감독은 제비들에게 정도를 걸으라 영화로 일갈하고, 민성욱 (당시) 작가는 오우삼보다 무려 10년이 앞서 ‘페이스오프’라는 소재를 영화에 가져온 것으로 만족하며,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막 나가는 영화에 관객은 즐거우니 결국 제작사만 눈물을 흘린 것인가. 감독 박세민은 < 신사동제비 > 이후 에로영화 팬들 사이에 나름 회자되고 있는 조루증 환자의 고군분투기 <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 새벽까지 >를 2탄까지 찍고, 2000년 < 타가킹 >을 어려움 끝에 제작, 연출하지만 제작사에 뒤통수 맞고, 홍보사에 등짝스매싱 당한 뒤, 홀연히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개그맨 박세민은 최근 ‘냉장고를 녹이는 남자’라는 미묘한 수식어를 달고 재기의 청신호를 밝히고 있는 중이라 한다. 통장을 건내주는 제비왕의 자상한 눈빛 P.S : 올해 1월 박영규 는 영화 < 남자사용설명서> 출연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며 뜬금없이 “돈에 눈이 멀어 < 신사동제비 >에 출연했다. 후회한다.” 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가 알았으면 좋겠다. 강남길 에게 급소 댄스를 전수하던 당신의 강렬하면서도 온화한 그 눈빛과 제비들이 정도를 걷게 하는 사업에 쓰기 위해 초가집에 살며 어렵게 모은 적금 통장을 강남길에게 던져주던 그 알뜰한 자상함을 기억하는 팬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 글: 허경(정발산 영화거구) 강남길 원미경 박세민 박영규 감독 박세민 각본 민성욱 촬영 신옥현 개봉극장 서울극장, 롯데(서울) 개봉일 1989-11-04 관람인원 17,748(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