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보
- 감독
- 세르지오 그리에코
- 제작년도
- 1960
- 출연
- 쟌느 발레리, 자끄 세르나스, 에드먼드 퍼돔
복장전환(cross-dressing) 영화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1960년대에 정점을 찍는다. 복장전환 영화는 당대 성별성의 역동적 변화에 대한 신경증적 반응이자 퀴어적 놀이터로 작동했다. 이들 영화는 크게 남장여자와 여장남자 컨셉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체로 전자는 진지한 사극에서, 후자는 그보다는 가벼운 코미디에서 발전한다. < 별 >(1961)과 < 십오야(의 복수) >(1969)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 미인도 >(2008)와 < 도리화가 >(2015)처럼 남장여자 사극은 가부장제 비판과 남성동성애의 서브코드를 수반한다. 과거를 시대배경으로 하는 사극의 특성상 강력한 가부장제 체제에서 여성의 사회적 활동과 역할은 극도로 제약되고 여성 주인공은 남장을 하고 남성동성사회에 침투할 설득력을 얻는다. 특히 1960년대 남장여자 사극의 주인공은 남성성의 과시와 영웅적 모험을 스펙터클화하기 위해 무사로 성장하는 서사가 두드러졌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십오야(의 복수)>가 대표적이다. 적대적인 두 가문에서 동시에 태어난 남녀 아이가, 남아선호를 이유로 뒤바뀌고 여자아이는 상대방 가문의 아들로 키워져 복수의 칼을 간다. 이 과정에서 뒤바뀐 두 남녀는 사랑을 느끼지만, 남장여자인 매화(남정임)가 마지막에 남자의 부모가 자신의 친부모라는 비밀을 알고 나서도 살해를 감행하자 각자의 길을 떠난다. 성별뿐만 아니라 복수의 대상까지 전환된 상태에서 남아있는 감정을 해소하지 않은 채 끝나는 결말은 두 주인공과 관객 모두를 혼란과 당혹 속에 빠트린다. 매화는 그녀가 남자가 아닐 거라는 다른 남성들의 끊임없는 의심 속에서도 그리고 근친살해라는 도덕적 문제에도 끝내 남자의 자리를 고집한다. 마치 그녀의 목표는 사랑하는 남자도, 가문의 복수도 아닌 남성성의 획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매화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남장을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에게 특히 로맨스의 대상인 거목(남진)에게, 그가 진짜 남자인지를 의심받으며 패싱에 자주 실패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매화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그녀의 당황하는 표정과 여성스러운 외모를 스펙터클화한다. 즉 매화는 이성애 로맨스 대상으로서 그녀의 여성성을 해칠 정도로 남장이 충분치 않다. 여기서 타인의 의심스러운 시선에 남장이 벗겨지는 순간의 취약함의 노출과 여성성이 교묘하게 결합된다. 그녀의 남장은 지워지지 않는 강력하고 진정한 여성성을 강조하는 데 이용된다. 이렇게 대부분의 남장여자 사극이 ‘남성동성애’라는 방해물을 ‘극복’하고 최종적으로는 진정한 이성애적 결합을 목표로 달려가긴 하지만, 시각적으로 남성동성애적 환상이 순간적으로 무대화된다는 면에서 그리고 <십오야>처럼 자신의 남성성을 고집하는 서사처럼 퀴어적 실천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지정성별이 남성인 주인공이 여장하는 영화는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장르가 주를 이루며, 여성으로 패싱될 때 전환된 욕망, 관계, 직업유지 등을 생활밀착형 에피소드로 상세하게 묘사한다. 남자들이 여장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직업이나 생계다. < 남자는 안 팔려 >, < 내 것이 더 좋아 >, < 남자와 기생 >, < 신입사원 얄개 >, < 치마 입은 남자 >의 주인공은 모두 남자로서 직업을 찾거나 거주지를 찾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해 여장을 한다. 이 영화들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뤄지던 1960년대 도시는 여자들이 살기에 더 좋은 장소라고 주장한다. 영화에서도 묘사되다시피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여성 일자리가 증가했지만 주로 제조공장, 식모, 비서, 판매원, 공연, 미용, 버스 안내양, 성판매 등의 특정 직업에 국한되었다. 노동조건이 좋지 않아서 남성이 꺼리는 직업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직업에서는 남성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여장남자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자신이 취직을 못 하는 것을 여성의 탓으로 돌리고, 도시의 젊은 여성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침입자로 묘사한다. 산업 시스템이 변하고 도시의 구성이 달라질 때, 성 역할도 변할 수밖에 없다.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전통적 남성 주체성은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여장남자 코미디는 남성들이 자신의 남성성이 비난받는 이유를 여성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서사를 제공해 주는 동시에 근대 도시에 더 적합한 유연하고 '여성적인' 새로운 남성성을 연습할 수 있는 쿠션이 되어 준다. 변화에 대한 부적응 그 자체와 적응을 위한 고투로 인해 발생하는 고단함은 기존 규범에서 벗어난 신체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발생시킨다. 한편 여장남자 코미디는 근대화된 도시에서 여성의 노동시장의 진입에 대한 남성들의 두려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그것을 조정하고 협상하려는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영화들은 여장남자 주인공의 좌충우돌 해프닝을 통해 여성의 직업 세계에서 일어나는 갖은 차별과 혐오를 폭로하고, ‘여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또한 < 여자가 더 좋아 >나 <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 >, < 내 것이 더 좋아 >, < 남자와 기생 >, < 치마 입은 남자 >처럼 여장남자들은 이미 주류 남성들과는 이질적인 ‘여성적인’ 남성이다. 그들은 다른 남성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자신을 스펙터클화 하는 신체적 퍼포먼스에 능하며, 요리와 뜨개질을 좋아하고, 성적으로 여성에게 위협적이지 않고 잘 어울린다. 여장한 이후에는 실제로 ‘독특한’ ‘본 적 없는’ ‘다른 여자와는 다른’ 여자로 남자의 인기를 독차지 한다. 여장남자에 대한 다른 남자들의 성적 접근은 대부분 성폭력에 해당하지만 말이다.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는 앞서 말한 주제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퀴어적 관계를 가시화하는 영화다. 고향을 떠나 상경한 성춘(서영춘)은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봉수(구봉서)의 집에 얹혀살면서 그의 아내 노릇을 한다. 봉수는 헤어진 전 아내의 체구가 성춘과 비슷하다며 이미 내재해 있는 그의 여성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봉수의 전 ‘아내’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시스젠더인지 트랜스젠더인지, 혹은 크로스드레서인지 알 수 없다. 낯선 성춘을 거리낌 없이 집으로 데려오는 봉수의 태도나, 체격이 비슷했음을 강조하는 것을 봤을 때 봉수의 전 파트너 역시 ‘남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성춘은 주인집에 들키지 않기 위해 완벽한 ‘아내’ 역할을 하려 노력한다. 그러던 중 봉수는 그들의 집 건너편에 레즈비언 커플인 강자(이금희)와 분임(고은아)이 살고 있다고 알려준다. 성춘은 남성적인 ‘바지씨’ 강자와 여성적인 ‘치마씨’ 분임을 관찰하며 ‘아내’ 역할을 수행한다. 봉수와 성춘에게 이 레즈비언 커플은 전통적 성역할을 모범적으로 제시해주는 좋은 예이다. 이 영화는 오프닝부터 여성성은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눈, 입술, 코의 클로즈업은 주류 카메라가 여성성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시골에서 올라온 성춘의 무지를 드러내기 위해 삽입한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서울에 올라와 쇼윈도우 너머에 있는 마네킹을 처음 본 성춘은 ‘고운 여자가 갇혀 있다’고 착각한다. 여성성이라 것이 프레임, 즉 무대에서 수행되는 것이라는 것을 성춘의 순진함을 이용해 형식화한다. 또한 봉수와 성춘이 함께 데이트를 나간 장면에서 둘은 영화관을 지나가는데 간판에 구봉서와 서영춘이 주연한 ‘내 것이 더 좋아’라는 제목의 영화가 걸려 있다. 이 영화는 끊임없이 프레임 속의 프레임, 영화 속의 영화를 통해 젠더, 특히 여성성이 수행적이고 구성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든다. 이중 가장 중요한 프레임은 바로 강자와 분임이 사는 집의 창문이다. 봉수는 성춘이 다른 아내들과 달리 애교가 없다고 타박하고 성춘은 건너편 창문을 통해 분임의 얼굴표정, 제스처, 분임이 강자에게 하는 ‘애교’를 모방하고 학습한다. 성춘은 분임이 강자에게 회사에 잘 다녀오라고 키스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출근하는 봉수에게 키스를 해준다. 성춘과 분임이 동일하게 가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퍼포먼스가 강조되는 가수라는 꿈은 분임의 여성성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성 역할을 수행하고 노력한 결과라는 것을 드러낸다. 성춘이 옆집 창문에서 보이는 분임의 제스처와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고 따라할 때, 창틀로 프레이밍된 그리고 무대화된 여성성의 수행은 정확히 이중적으로 영화적인 것이 된다. 창문은 젠더의 표정을 드러내는 ‘얼굴’이 된다. 분임을 보는 성춘과 성춘을 보는 관객. ‘여성적인 남자’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을 학습하고 장착하는 과정은 충분히 퀴어적이다. 하지만 다른 복장전환 영화들처럼 이 영화도 성춘의 여장을 벗겨내고 이성애 관계로 짝을 교정하면서 퀴어적 실천과 욕망을 봉합하려 한다. 결말에서 성춘은 분임과, 봉수는 강자와 새롭게 맺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짝짓기는 이성애적 결합이나 ‘규범적 정상성’으로 보기에 매우 의심스럽다. 커플 스와핑이라는 실천과 이성애적 교정을 통해 오히려 동성애적 함의가 더 짙어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분임은 성춘을 여자로 알면서 좋아하게 되었다. 또한 성춘은 부부란 모름지기 아들 딸 낳고 살아야 한다며 ‘정상성’을 강조하고 공원에서 분임에게 해코지 하는 남자들을 물리치며 자신의 ‘규범적 남성성’을 과시한다. 하지만 분임을 괴롭힌 남자들은 성춘이 돈을 주고 산 사람들이다. 이 장면은 남성성 역시 수행되고 구성됨을 강조할 뿐이다. 한편 봉수와 강자는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내들’ 욕을 하며 친해지게 된다. 봉수는 수염 많은 집사람보다 피부도 부드러운 강자가 더 마음에 든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강자도 성춘처럼 봉수와 이어지기 위해 치마를 입고 귀걸이를 하며 자신의 여성성을 찾으려 하지만 이 역시 여장을 한 부치처럼 보일 뿐이다. 결국 강자는 봉수의 집에서, 성춘은 분임의 집에서 함께 산다. 마지막에 영화는 두 집의 창문을 번갈아 보여주며 끝난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규범적 정상성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의 창문을 통해 여전히 서로를 모사하고 구성하며 초월해 나가는 방식으로 젠더(적 관계)가 구성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동일하게 남성성을 수행하는 봉수와 강자, 여성성을 수행하는 성춘과 분임은 어느 커플보다도 더 동성애적이다.
나는 인간이며, 그것만으로도 비참하기에 충분하다 - 메난드로스 말할 곳을 찾다 인간이기에 그것만으로도 비참하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말이다. 기원전부터 인생이 이랬으니, 우리는 안심해도 될지 모른다. 현대는? 미국의 ‘흑인’ 사회학자, 시카고학파의 프랭클린 프래지어(Franklin Frazier)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문화 속에서) 살 만한 동기를 찾든지 죽든지.” 일단, 태어났다면 힘들다. 기본적으로 본인의 생로병사가 있고, 사랑하는 이들의 생로병사를 겪어내야 한다. 게다가 불평등, 부조리, 악의 승리, 차별, 미세 먼지, 양진호 같은 사람들……. 이제는 오래된 뉴스가 되었지만 브래드 피트가 제니퍼 애니스턴과 헤어지고 안젤리나 졸리와 ‘시끄러운’ 연애 중일 때였다. 그즈음 유명 잡지(<배니티 페어>라고 기억한다)가 애니스턴을 표지 모델로 실었다. 커버스토리의 제목은 “제가 외롭냐고요? 그래요! (Am I lonely? Yes!)” 그래, 나 당신들 생각처럼 외롭다, 그래서 어쩔래? 그런 말투 같았고, 나는 대중 매체가 잔인하다고 느꼈다. 누구나 슬퍼할 상황에다, 유명 여배우만이 겪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누구에게 고민을 말했을까? 인생에는, 배타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회로부터 혹은 구체적인 누군가에게 따돌림당하고 망신스러운 기분, 어딘가에 하소연하기에도 자존심 상하는 인간관계, 견뎌야만 하는 시간이 있는 법이다. 실연, 상실, 시련……. 이러한 상황이 아주 심할 때는 영화도 책도 음악도 잡히지 않는다. 오로지 이불 속이 우주다. 우울과는 다른 고립감(powerless)이 나를 휘감는다. 누구라도 손을 내밀어주었으면……. 내가 먼저 전화하기는 엄두가 안 나고 스팸 전화라도 왔으면 싶다. 남들 퇴근 시간 즈음에야 직장 생활을 하는 지인에게 “오늘 만날 수 있어(요)?”, 혹은 심야에 “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 이렇게 전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충분한 경청과 공감, 위로, 대안 제시까지 가능한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단언컨대, 세상에 이런 친구는 없다. 상담자도 없다. 있더라도 찾기 힘들다. 비용과 시간이 들고, 비밀 유지 걱정 등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아, SNS가 있다. 트위터를 공개하지 않고 일기장으로 삼는 이들도 있다. 좋은 기능이다. 나는 간혹 내 메일 주소로 일기를 보낸다. 실은, 그냥 끄적거리다 만다. 커서는 깜박이며 재촉하지만, 왠지 모니터 앞에서는 구체적으로 쓰기가 쉽지 않다. 페이스북에서 맺을 수 있는 친구가 최대 5천 명이라고 알고 있다. 온라인에서 5천 명을 ‘달성한’ 이들도 있지만, 지구상에서 진짜 친구가 5천 명인 사람은 없다. 인생에서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셋만 있어도 성공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한 명도 힘들다고 본다. 이야기를 들어줄 가장 좋은 대상 간혹 자신을 나의 “독자”라고 소개하는, 모르는 사람의 편지를 받는다. 내게 E메일을 하는 사람들의 글은 대개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 제가 힘든 상황입니다. 어디 말할 곳이 없어서 선생님께 씁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그들은 쓰고 나는 읽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그들의 사연을 잊는다. 편지가 오고 가거나 ‘현실에서’ 만나는 일은 없다. 나, 아니 나의 아이디는 익명의 수신처일 뿐이다. 타인에게 말하는 행위는 자기 마음의 가시를 돌보는 일과 비슷하다. 어떤 종류의 침묵은 마음속의 가시와 같아서 같이 살 수 없다. 가시가 움직일 때마다 몸을 찌른다. 말하기(speech)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 억압하는 문화에서는 자살률이 높다. ‘표현의 자유’가 표현의 폭력이 된 시대지만, 여전히 말하기는 중요하다. 주디스 버틀러는 우리 시대의 문제, 혐오 발화(ex/citable speech)를 일종의 주인 없는 퍼포먼스라고 본다. 혐오 발화는 말하기(citing)를 초과하고, 남용하고, 선을 넘어선(ex/citable) 상황이다. 말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할 때는 말의 초과는커녕, 하고 싶은 말의 용량에 미치지 못한다. 혐오 발화는 그렇지 않다. 넘친다. 차별주의자들은 그 상황을 즐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흔히 듣는 말이다. 고전 < 피고인 (The accused )>(조나단 카프란, 1988)은 지금 봐도 ‘교과서’다. 작품 자체로도,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방식과 시각에 있어서도. 조디 포스터. 조디 포스터. 조디 포스터와 페미니즘…… ‘나의 영웅 조디’(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그때는 몰랐다. 나는 20대 초반, 더러운 동시 상영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심지어 쥐가 돌아다녔다). 극장 간판은 선정적이었다. 시간 때우는 ‘싸구려 영화’인 줄 알았다. 조디 포스터가 ‘밑바닥 인생’을 사는 윤간(gang rape) 피해 여성으로, < 탑 건(Top gun) >(토니 스콧, 1986)의 캘리 맥길리스가 그를 돕는 변호사로 나온다. 작품 속 ‘조디’는 가난한 여성의 전형이다. 일찍 가출하여 거리를 전전한다. 술, 마약, 섹스, 길거리의 폭력을 감수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그녀는, 성폭력 피해 여성이 겪는 고통과 편견을 고스란히 뒤집어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젠더, 성폭력 이런 이슈들이 아니라 그녀의 외로움과 통화 장면이었다. 그녀 자신도 당하고서야 깨달은 이 상황. 자신도 정리가 안 되고 이해할 수 없고 분노로 미칠 것 같다. 누가 지금 자기 처지를 알아줄 것인가. 영화에서 주인공이 엄마나 지인, 가족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짧은 대화를 나누거나 울먹거리며 바로 끊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마음 둘 곳 없는 ‘우리의 조디’도 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방에서 오래전에 떠나온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의 삶도 고달플 것이다. 미국 대륙 내 시간 차, 그리고 갑작스런 딸의 전화에 엄마는 “웬일이니”, “잘 지내니”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조디는 눈물을 훔치며, “아니, 별일 아냐, 엄마 사랑해.” 정도의 대화를 나누고 끊는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기력도 없고, 말해봤자 엄마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두 모녀를 합친 몸만큼 상처도 두 배로 커질 것이다. 이럴 때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거나 그냥 아는 정도의 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무심한 사람, 무심한 관계가 낫다. 어차피 인생에 해결은 없으므로. 그저 들어주며,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내 걱정을 하지 않을 사람. 내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사람. 내 말을 잊어버릴 사람. 내가 가장 원하는 경청자는 내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다. 정리하면, 듣는 이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공감과 수용이 가능한 적극적 청자(active listener), 더 나아가 치유(talking cure)가 가능한 소위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대가가 따르고 찾기가 어렵다. ‘전문가’들과 비슷한 범주에서 안전한 사람들이 있다. 이해력과 인간애가 깊은 친구나 멘토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매번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민망하고,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빚을 진 느낌을 떨치기 힘들다. 아는 사이라면 여전히 비밀도 걱정되고, 완전하게 안전한 관계란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 기도는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그것이다. 기도가 그것이다. “주님은 내 안에.” “부처님은 온 천지에.” 벽에게 말하자 내 안의 무엇인가를 - 주로 괴로움 - 꺼내 놓으면, 짐이 덜어지고 상황도 객관화되고 안정이 된다. 쓰기도 마찬가지다. 고민, 고통, 외로움, 스트레스 같은 일일수록, 말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부정적’ 감정이 나쁜 것이 아니다. 괴로움은 삶의 조건이다. 문제는 그것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할 상황이고, 언제나 고민은 누구에게 말할까이다. 소통의 소중함이라느니, 대화를 통한 해법, 털어놓으라……. 나는 이런 말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어쨌든 아예 모르는 이에게 그리고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에게 말할 때가 상호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반응이 없는 것이 좋다. 나는 이 ‘반응 없음’이 훨씬 관계를 좋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자주 경험한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두 사람의 딸’이지만, 엄마와는 ‘여성으로서’ 관계였고 아빠는 그냥 ‘아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나와 겹치는 젠더 문제에다 개인적으로 극히 예민하신 분이고, 아빠는 그 반대다. 그래서 나는 아빠에게 전화하는 것이 편했다. 아빠는 내가 아무리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도 “그러냐.” 한 마디뿐이셨다. 그러고 나서 오로지 당신 일상, 당신 주장만 하셨다. 나는 아빠의 무반응과 철저한 이기주의가 좋았다. 아빠랑 통화하면, 내가 ‘문제’가 아니라 아빠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 위로받았다. 가족? 절친? 파트너? 그들은 나를 잘 아는 사람인가? 의외로, 대부분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벽창호’니 ‘벽하고 이야기하는 게 낫다’고 말하지만, 정말 벽에게 말하는 것은 효과가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축복이다. 말이 통하면 나중에 상대방에게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라는 공치사나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넌, 아직도...? 지겹다”는 핀잔을 들을 가능성이 많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는 ‘걱정거리’인 인간이 된다. 나는 매일 고민이 있을 뿐이지,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란 말이다! 조디 포스터가 <피고인>에서 엄마에게 전화할 때의 심정.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의 곤경에서 고립되어 있을 때, 타인과 연결 자체만으로 상황이 ‘정리된다’. 전화를 끊고, 세수를 하고, 마음을 다잡아본다. 화양연화 왕가위의 < 화양연화(花樣年華) >(왕가위, 2000). 쓸 자신이 없다. 포기. 다만 <피고인>과 <화양연화>는 무관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방식과 상대는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생의 고통, 고독, 고립, 말할 수 없음, 어쩔 수 없음……. 내 생각에 <화양연화>의 주제는, 인생의 본질인, ‘어쩔 수 없음’이다. 두 사람, 어쩌겠는가. <피고인>에서 조디 포스터는 타인과 다름없는 엄마에게, <화양연화>에서 양조위는 벽에 대고 말한다. 민폐도 없고, 누구에게도 부담 주지 않으면서 말하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앙코르와트에서. ‘들어 달라’가 아니라 ‘나는 말했다’가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국가 안보’ 문제여서 말하지 못하는 코미디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말하자면 복잡한” 이야기(미국 영화 대사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 하나가 “complicate”다), 말하면 안 되는 나의 불법 행위……. 진실에 목을 매는 상대방이 알면 안 되는 진실이 얼마나 많은가. 이때는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상대가 가장 좋다. 아는 사람보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낫다. 타인을 찾기보다 나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다. 사족이지만, 두 작품의 공통점이 또 있다. 모든 영화 감상은 자의적이고, 보는 이의 상황에 따라 감동도 크게 다르다. 둘 다 외롭고 아플 때 보면, 더 많이 보이는 영화다. 작품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더욱 좋다’. 난 동일시했다. <피고인>, <화양연화>를 보고 나는 머리가 흔들리도록 울었다. 인생에는 ‘안 되는 일’이 천지다. (어떤 말은) 말해서 무엇하리. 지금 나는 말할 사람을 찾기 전에 숨을 고르고 글을 쓰거나 청소를 한다.
배창호 감독은 잘나가던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에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로 불렸다. 당시의 배창호라면 < 꼬방동네 사람들 >(1982) < 적도의 꽃 >(1983)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1984) 등 사회성 짙은 영화의 감독이었는데 < 이티 >(1982) < 레이더스 >(1981) 등 오락 장르 영화를 만들던 스티븐 스필버그 와 같은 부류로 묶이다니, 이 무슨 꼬방동네 이티 같은 발상인가 말이다. 사연이 있다. 때는 1984년, 북미 개봉 2년 뒤에 한국에서 공개된 < 이티 >는 전국에 이티 열풍을 불러오며 청소년 관객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그해, 배창호 감독은 < 고래사냥 >으로 한국영화 전체 흥행 1위의 기록을 세우며 흥행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바로 ‘흥행’이라는 키워드가 배창호 감독을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로 명명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마케팅업자의 단순한 발상이었지만, 당대의 한국 영화 팬들은 <고래사냥>을 <이티>만큼 재밌게 보았다. 내가 < 고래사냥 >을 본 건 극장이 아니라 몇 년 후 TV를 통해서였다. 아마도 국민학교, 엇! 이렇게 연식이… 음, 초등학교 5, 6학년 때인 걸로 기억한다. 힘 약한 우리의 주인공들이 거구의 깡패와 벌이는 추격전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 이티 >에서 이티를 고향 별로 보내려고 마을 아이들이 정부 소속 요원들을 피해 접선 장소로 가는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로웠다고 쓰고 보니 나 역시 단순하네… 아무튼, 영화의 내용인즉, 소심한 병태( 김수철 )는 거지꼴의 민우( 안성기 )에게 끌려 창녀촌에 갔다가 말을 하지 못하는 춘자( 이미숙 )를 만난다. 춘자에게 한눈에 반한 병태는 엄마를 보고 싶다는 그녀의 바램을 이뤄주기로 한다. 병태는 민우의 도움으로 춘자를 창녀촌에서 구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깡패들( 이대근 이 이 무리의 두목을 연기했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걸핏하면 시각장애인 행세에, 시도 때도 없이 각설이 타령을 불러대는 민우의 매력에 빠져, 지금도 아름다우시지만, < 고래사냥 > 출연 당시에는 더 아름다우셨던 춘자 역의 이미숙 의 미모에 눈길을 뺏겨, <고래사냥>을 보고 있으면서도 불만이었던 하나는 “난 고래를 잡아 올 거예요” 병태의 뜬금없는 대사였다. 사실은 병태 얘가 한몫 잡으려고 춘자 핑계로 우도에 가서 민우의 도움을 받아 고래를 생포하나 보다, 어린 마음에 생각했더랬다. 근데 웬걸, 잡으라는 고래는 안 잡고 춘자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다준 후 민우가 병태에게 하는 말, “병태 너는 춘자의 마음속에 예쁜 고래로 남아 있을 거야” 그럼 병태가 사람으로 환생한 고래였던 거야? 깊은 충격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초등학생의 순진한(?) 상상력은 실제 고래가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로 < 고래사냥 >을 그냥 재밌었던 영화로만 기억에 남겼다. 2008년 5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렸던 배창호 감독의 특별전을 기념해 한때 기자로 재직했던 영화지에서 20페이지 대특집을 마련한 적이 있다. 그때 배창호 감독은 “영화가 치료이자 위로가 된다고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주고 싶은 위안은 당신 안에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진정한 힘이 있다는 것, 자연치유력이 있다는 것, 일깨우는 사랑이 있다는 것이고, 이를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은 거야. 그게 지금까지 내가 영화에 담아낸 것들이지” 이게 배창호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때 < 고래사냥 >은 그의 필모그래프에서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고래사냥>의 ‘고래’는 갖기 힘들지만, 손에 넣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어떤 가치의 상징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졌던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가 그랬다. <고래사냥>의 민우는 병태가 좋아하는 여자와 짝을 맺어주기 위해 대학교를 찾는다. 그때 민우를 보고 어느 교수가 아는 체를 하지만, 민우는 앞을 못 보는 척하며 자기 정체를 부정한다. 민주주의가 유린당하고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던 전두환 정권 당시에 많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이 느꼈을 절망감이 민우와 병태에게 투영되어 있다. 민우는 그런 시대의 검은 공기에 좌절하여 속세로부터 거리를 둔 인물처럼 보인다. 고래를 잡을 거라며 입버릇처럼 말하는 병태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그 어느 사람보다 크게 느껴진다. 춘자 역시 꽤 상징적인 인물처럼 보이는 건 말을 하지 못하는 설정 때문이다. 이는 마치 억압적인 정권 아래에서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민중의 상징으로 보이는데 민우가 부러 시각 장애인 행세를 하는 맥락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들은 서울을 떠나 찬 바람이 쌩쌩거리는 길을 걷고 또 걸어 따뜻한 남쪽 우도로 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손에 넣고 싶지만, 당장에 손에 넣을 방법이 없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계속해서 가야만 하는 운명. 병태를 연기한 김수철 은 이 영화에 출연하던 당시 아버지의 심한 반대로 음악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5개월 동안 촬영진과 함께하며 영화음악도 담당했던 김수철은 명곡 <나도야 간다>를 완성했다.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수 있나/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님 찾아 꿈 찾아 나도야 간다’ < 고래사냥 >을 오랜만에 보며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한국의 현대사 자체가 고래를 사냥해온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 직선제의 고래를 잡았다가 놓쳤던 아픔이 있고, 검열의 그물에 갇혀 허우적거리던 표현의 자유라는 고래를 구출한 경험도 했고, 전(前)대통령과 그 비선에 고래를 빼앗겨 다시 찾아 오기 위해 광장에 모였던 기억도 불과 얼마 전이었다. 배창호 감독은 <고래사냥>을 비롯해 자신의 영화에 대해 이런 얘기를 했다. “인간이라는 것이 어디 안주할 수 없다는 것, 참 존재, 가치를 찾을 때까지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런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로드무비도 몇 편 했고.” 그렇다, 병태와 춘자와 민우의 <고래사냥>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