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니와 준하
- 감독
- 김용균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김희선, 주진모, 조승우, 최강희, 김광림, 이혜숙, 최광일, 손세광, 박정환, 이삼우, 서자영, 김수진, 민윤재, 김승현, 양영정, 김홍파, 이정은, 최민금, 현숙희, 조덕제, 정경호, 송희연, 김영임, 구원영, 서영석, 강미연, 고주연, 고기범, 이동운, 이지미, 민난주, 백정림, 김준호, 나현진, 박찬유, 김희선, 김연희, 변창석, 김준영, 임현균, 송은혜, 임동혁, 송은현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1990)의 기록적인 흥행 탓인지 이명세 의 세 번째 영화 < 첫사랑 >(1993)에 대한 안팎의 기대는 높았다. 그러나 전작의 성공을 이을 것으로 점쳐졌던 이 영화는 그의 저주받은 데뷔작 < 개그맨 >을 능가하는 불운의 정점이었다. 당시 4만 명 정도의 관객이 보았다는 <개그맨>에 비해 <첫사랑>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냉대받았다. 이명세는 “알맹이 없는 스타일의 유희에 집착하는 자아도취적 영화 세계가 점차 퇴행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첫사랑>은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되풀이해 보아도 새로움을 느끼게 하는 역작이다. 영신( 김혜수 )은 대학 입학 후 뭔가 근사한 사건이 펼쳐지리라는 기대에 부푼 지방대학 미대 1학년생이다. 어느 날 영신의 연극반에 초빙 연출가로 서울남자 창욱( 송영창 )이 내려온다. 담배와 술에 절어 사는 늙다리 창욱은 무례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괴팍한 사내. 그러나 어쩐 일인지 영신은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이 남자에게 점점 눈길이 간다. 첫사랑의 환희에 눈이 멀어갈 즈음 창욱은 연극 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기 위해 영신은 용기를 내어 상경을 결심한다. 물어물어 찾아간 창욱의 집 앞에서 영신은 쓰디쓴 첫사랑의 실체를 알게 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첫사랑의 서사는 발에 챌 정도로 많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따위가 모두 첫사랑을 제재로 한 작품들이다. 그만큼 첫사랑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보편의 경험이자 감정이라는 것이다. 유치하고 퇴행적이 과거의 기억과 사랑이 끊임없이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는 까닭은 그 안에 인간이 잃어버린 것, 세계의 본질을 사고하도록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건 보편적인 경험이지만, 그 경험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에 대한 보편적 합의는 없다. 이명세 의 < 첫사랑 >은 바로 이 첫사랑의 비밀을 탐색한다. < 첫사랑 >은 인간 각자의 특별한 경험을 걸러내고 첫사랑에 대한 보편적 체험, 감정, 상황을 제시하면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달뜬 열정과 유치한 편지, 밤을 지새우게 만드는 불가사의한 정열, 그리고 종국에 찾아오는 참담한 실패. 어느 시인이 쓴 것처럼, “사랑은 도둑처럼 때론 섬광처럼 오는 것”,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되는 기적처럼 영신이 창욱을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세상은 달라진다.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각별하게 느껴지고 말은 노래가 되고 대화는 시가 되는 영묘한 경험. 설레는 연심을 담은 편지, 일기 삼아 끄적이는 노트는 온통 하트로 얼룩지고, 불끈 솟아오른 보고 싶다는 마음에 자전거를 달려 사랑하는 사람의 집 앞 담장을 넘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명세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첫사랑>의 영신 역시 필연적으로 실패 또는 좌절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 인물이다. 이 지점에서 <첫사랑>은 사랑과 추억, 죽음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다른 한편으로 < 첫사랑 >은 시원으로 거슬러가려는 욕망의 영화이다. 인간 본성의 시원, 최초의 순수한 감정 상태, 영화 예술의 기원으로 돌아가려는 열망이 곳곳에서 모습을 내민다. “첫사랑은 시간의 비밀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 이명세 의 말처럼 <첫사랑>은 시간의 비밀을 주제로 한다. 영화가 다루는 것은 ‘흘러가는 시간’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는 로케이션이 아니라 스튜디오 안에서 찍혀야 했다. 세트 촬영의 장인인 이명세는 스튜디오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이미지에 대한 통제를 통해 흘러가는 삶에 대한 감각을 표현한다. 사랑에 빠져드는 인간의 흥분과 열정, 혼란이 교차하는 인공적 세트의 이미지들은 관객의 정신 안에서 무엇이 우리를 첫사랑의 기억으로 이끄는가에 대한 창조적인 비주얼을 보여준다. 영신이 사는 동네 골목길에서 흐르는 시간을 시각화한 이미지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지나가는 시간과 계절감, 그 속에 담긴 삶, 일상, 사람들을 인상적으로 압축한다. < 첫사랑 >의 괄목상대한 성취는 이처럼 당대 한국영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표현의 영역을 확대했다는 사실에 있다. 당시까지 한국영화는 고답적인 리얼리즘의 계율에 사로잡혀 있었다. 관습화된 장르의 공식을 따르는 듯 보이는 <첫사랑>은 이 리얼리즘이라는 전형적 창작 모델을 초월하여 한국영화가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미학적 영토를 개간하겠다는 결기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런즉 대다수의 장면은 순수한 시청각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별의 아쉬움에 대취한 영신의 눈에 비친 두둥실 떠다니는 주전자나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되는 상황들, 사물에 투영된 감정이 생생함을 전한다. 시각적 아이디어에 기초한 <첫사랑>의 이미지의 세공은 편협한 한국영화의 미학적 지평을 큰 폭으로 넓혀 놓았다. 영화적 만듦새의 치밀함과 영화적 표현의 창의성, 한국영화계의 타성을 돌아보게 하는 가공스러운 디테일 묘사라는 측면에서 <첫사랑>의 가치는 오래도록 퇴색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