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믿습니까?
- 감독
- 조나단 M. 건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숀 애스틴, 테드 맥긴리, 미라 소르비노, 안드레아 로건 화이트, 리 메이저스, 알렉사 베가, 리암 매튜스, 시빌 쉐퍼드, 매디슨 페티스, 브라이언 보스워드, 조세프 줄리안 소리아, 매켄지 모스, 세뇨 아모아쿠, 델파노 윌스, 스웨이지
홍은원 (洪恩遠)은 영화계에서 그 본명과 예명 홍설아(洪雪娥)·홍진아(洪眞娥)만큼이나 여러 일에 종사했다. 그는 스크립터로 출발해 조감독을 거쳐 시나리오작가, 작사가, 감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능을 보인 충무로의 정통파였다. 두 예명에 예쁠 아(娥)자를 넣을 만큼 그는 눈처럼 아름답고 참되게 살려고 했던 것일까. 실제로 스튜디오에선 언니로 통할 만큼 영화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1950년대 중후반 그는 전창근 , 유두연 감독과 허백년 평론가 등 영화인들이 즐겨 찾던 명동 나일구 다방에 자주 나타났다. 명동에는 이 다방과 함께 김승호 , 김동원 , 장민호 와 같은 배우들이 드나든 동방살롱 등이 있었다.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에서 명동 방향 골목에 있던 예술인들의 찻집이었다. 충무로에 스타다방, 청맥다방과 같은 영화인들의 휴식 공간이 미처 생기기 전이었다. 아침에는 으레 날계란을 띄운 모닝커피가 나왔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이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창근 감독 일행과 한자리에 있던 한 여성이 담소 중에 크게 웃었다. 누군가가 야한 농담을 한 모양이었다. 궁금해서 돌아보니 바로 홍은원 씨였다. 작고 가냘픈 몸매였지만 베레모를 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정작 그와 알고 지내게 된 것은 훨씬 뒤였다. 자주 마주치다 보니 은연중에 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직접 만나고 보니 활달하고 정이 깊은 분이었다. 그의 두 번째 감독 작품 < 홀어머니 > (1964)가 개봉된 시기였다. <오해가 남긴 것> 촬영현장 홍은원은 명문가 출신이다. 구한말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홍철주(洪澈周)의 손녀로, 1922년 9월 24일 은행가인 홍우만(洪佑晩)의 2남2녀 중 둘째 딸로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교육자인 어머니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서울 재동국민학교를 거쳐 경기고녀(경기고등여학교, 現 경기여고)에 입학한 뒤에는 학과보다 오히려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광복 전 경기고녀를 졸업했으나 집안 형편이 나빠지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들어가게 된 것이 마루젠(丸善)주식회사였다. 다행히 서적부 소속이라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1년 3개월을 보내고 아버지를 따라 만주 신경(新京)의 반관반민의 직장으로 옮겼다. 1940년 초여름이었다. 그는 새 직장에서 합창단원으로 뽑히고 다시 1년 만에 신경음악단의 홍일점 가수가 된다. 그때 받은 월급이 120원, 웬만한 봉급자의 갑절이 넘는 고액이었다. 조선영화사에서 음악을 담당한 친지를 졸라 최인규 감독을 소개받은 것은 여름휴가를 얻고 경성(서울)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최 감독은 그에게 < 태양의 아이들 >이라는 시나리오를 건네주며 하고 싶은 역할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연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8·15 광복을 맞아 서울에 돌아온 것은 1946년 11월 초순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박계주 작가 일행을 따라 돈암동 최인규 감독 집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는 < 자유만세 >의 주인공인 전창근, 황려희 와 감독을 꿈꾸는 박남 옥도 와 있었다. 최 감독은 그에게 다음 작품인 < 죄 없는 죄인 >(1947)의 스크립터 일을 제의했다. 이때 그가 촬영 현장에서 터득한 것이 영화제작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홍은원은 이 일이 끝나자 다섯 살 아래인 극작가 이용찬과 결혼했다. 그러나 양가 부모의 반대 속에 이루어진 부부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딸(이희재 숙명여대 교수, 박물관장 역임)을 낳고 4년 8개월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여판사> 촬영현장 1953년 초가을 그는 전쟁이 할퀴고 간 서울의 한 모퉁이에서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촬영기사 한형모 였다. 그는 결혼에 실패한 후배를 위로하며 영화로 보람을 찾으라고 권유했다. 이에 힘입어 조정호 감독의 < 여군 >에 조감독 겸 스크립터로 들어가 현장 감각을 익히고, 잇따라 전창근 감독의 < 불사조의 언덕 >(1955), < 단종애사 >(1956)와 이강천 감독의 < 백치 아다다 >(1956), < 사랑 >(1957)의 스크립터 겸 조감독 일을 했다. 특히 “초여름 산들바람 고운 볼에 스칠 때/ 검은 머리 큰 비녀에 다홍치마 어여뻐라”로 시작되는 그의 작사곡 ‘백치 아다다’(김동진 작곡)는 여주인공인 가수 나애심이 불러 크게 히트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홍은원은 그사이 시나리오에도 손을 댔다. 신경균 감독의 < 유정무정 >(1959)과 유두연 감독의 < 젊은 설계도 >(1960) 등이 대표적인 예다. 영화계에 들어선 지 11년 만이다. 이후 시나리오작가 유두연 의 콘티뉴이티 담당 수석 조감독으로 들어가 그의 감독 데뷔작 < 조춘(早春) >(1959)과 < 사랑의 십자가 >(1959)를 완성시키고 윤봉춘 감독의 < 여인천하 >(1962), < 애정삼백년 >(1962) 등에 참여하며 시대물을 익혔다. 그에게 메가폰을 잡을 기회가 온 것은 이 무렵이다. 1962년 4월 <사랑의 십자가>를 찍은 장환(張煥) 기사가 원고 한 뭉치를 들고 찾아온 것이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어느 여판사의 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 여판사 >(1962, 명보극장 개봉)였다. 뜻밖에 화폐개혁이 단행되는 악조건 속에서 어렵게 완성한 문정숙 주연의 <여판사>는 “여감독다운 섬세한 플롯의 전개에 명확한 커팅은 몇 사람의 중견감독을 조감독으로서 오히려 길러낸 숨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새영화 ‘여판사’, 「경향신문」)는 호평을 받았다. 이어 조미령 주연의 < 홀어머니 > (1964, 아세아극장)와 김지미 주연의 < 오해가 남긴 것 >(1965)을 만들었다. 그런데 세 작품 이후 그에게 좀처럼 연출의 기회가 오지 않았다. “홍은원은 환갑이 지나도 다람쥐처럼 영화계를 누비고 다닐 것”이라던 유두연의 예상과 달리 그는 스스로 표현했듯 “환갑은커녕 50세도 못 돼서”(여류감독의 비애, 「세대」 1976년 1월호) 영화 현장에서 물러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앓다가 1999년 1월 5일 세브란스병원에서 76세의 생애를 마쳤다. 37년 전인 1981년 늦은 봄, 첫 여감독과 함께 셋이 커피를 마시며 추억의 영화를 얘기하던 서울 서대문 근처의 다방 정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김영희 편집기사와 홍은원 감독
영화배우 김석훈 . 요즘 젊은이들이라면 흔히 TV드라마 <홍길동>에 출연, 스타덤에 오른젊은 탤런트 김석훈을 얘기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이들 둘은 아주 다른 남남이다. 이를테면 동명이인. 탤런트 김석훈 은 20대이지만 원로배우 김석훈은 70대이다. 본명 김영현. 호적나이 78세(24년 생)로 되어있으나 본인말로는 잘못된 것으로 74세라는 것. 청주사범 출신으로 서울지방 법원서기로 근무하다가 촬영기사출신인 유재원 감독의 < 잊을 수 없는 사람들 >(1957)로 데뷔했다. 박 암 과 요즘은 활동을 안 하는 하연남 과 함께 주연한 작품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하연남 과 결혼한 신혼남편이었으나 6.25로 우여곡절을 겪다가 하연남이 박 암 과 재 결혼한 후 다시 나타나 박 암을 살해하는 비극적 내용이다. 유재원 감독의 유려한 화면과 빠른 템포, 거기에 적당한 신파조가 물려 대 히트했다. 이제까지의 출연작은 주연이 2백 30여 편. 여기에 조연을 포함하면 2백 50편 정도 된다. 묘하게도 부드러운 이미지의 그가 히트시킨 영화를 보면 거의가 액션이다. 특히 정창화 감독과 김묵 감독 작품이 대부분이다. 58년 금고수리공으로 홍콩에 갔다가 악당들에게 몰려 온갖 고생 끝에 탈출하는 < 망향 >(1958, 정창화) 전창근 감독, 이용민 촬영의 < 수정탑 >(1958). 신상옥 감독의 < 춘희 >(1959) < 지상에서 맺지 못할 사랑 >(1960) < 대지여 말해다오 >(1962, 정창화 ) < 슬픔은 없다 >(1962, 김묵) < 대평원 >(1963, 정창화) < 싸우는 사람들 >(62, 김묵) 등 부지기수이다. 특히, 최관두 씨 제작에 정창화 감독, 김지미 , 황해 와 함께 주연했던 < 햇빛 쏟아지는 벌판 >(1960)은 대 히트했다. 이 여세를 몰아 역시 최관두 씨 제작에 임권택 감독이 데뷔한 < 두만강아 잘 있거라 >(1962)에서 톱스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김씨는 당시 < 햇빛 쏟아지는 벌판 >이나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와 같은 전쟁영화에서는 총격전 장면을 진짜 총으로 실탄을 쏴 죽음을 놓고 영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흔히 경찰사격 특등사수들이 M1소총을 들고 나와 동료들이 있는 부근의 바위나 건물벽 또는 땅에다가 직접 쏴 댔어요. 연기는커녕 혼비백산했었지요." 김석훈 씨는 그러면서도 '잊혀져 가는 것은 아름답지 않느냐' 반문했다. 당시 콤비였던 여배우는 최은희 , 엄앵란 , 김지미 . 남자는 형제처럼 지낸 황해 , 박노식 , 장동휘 를 꼽는다. 그렇다고 김석훈이 액션영화만 한 것은 아니다. < 고개를 넘으며 >( 이용민 ), < 내 사랑 그대에게 >( 하한수 ) < 동심초 >(1958, 신상옥 ) < 사랑의 십자가 >(1959) < 슬픔은 없다 >(1961, 김묵 ) <어디로 갈까>(1960) < 내 마음의 노래 >(1960) 등 멜로도 수두룩하다. 대표작이라면 장일호 감독, 신영균 과 공연한 < 일지매 >다이내믹한 템포와 유려한 화면에 비록 흑백영화라도 높이 평가받았다. 기억하고 싶은 영화는 < 자매의 화원 >(1959, 신상옥) < 독립협회와 청년이승만 >(1959, 신상옥)에서의 서재필 역. < 슬픈 목가 >(1959, 김기영 ) < 로멘스빠빠 >(1960, 신상옥)에서의 선생역할 등. 김석훈 하면 지금도 행적을 잘 알 수 없을 정도로 혼자 떠돌며 식도락을 즐기는 '나홀로'파이다. 전성기 때였으니 어땠으랴, 이 퇴계 영화가 있다면 딱 어울릴만한 지성미와 어진 이미지가 주무기였다. 그러면서도 남성적 마스크를 지녔으니 금상첨화였지 않을까. 흔한 악극단 연극배우 출신도 아니면서 연기에 뛰어 들어 「기린아」취급을 받았다. 데뷔영화 <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에 그가 뽑힌 것은 행운중의 행운. 당시 유재원 감독은 신인모집을 해서 다른 사람을 당선시켰는데 우연히 길에서 그를 보고 대뜸 주연으로 픽업, 화제가 됐었다. 그때 받은 개런티는 엄청나서 5∼6년 동안 돈걱정 없이 실컷 썼다고 자랑한다. 김석훈 하면 당시 육체파로 유명했던 김의향 과의 러브스토리가 유명하다. 김씨의 부리부리하고 깔끔한 남성미에 불타는 듯한 마스크와 육감적인 몸매의 김의향은 명콤비였다. 이들 둘은 결국 결혼, 숱한 부러움 속에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2∼3년 두고 후배인 이택권, 강숙희 콤비와 비슷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영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두 커플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각각 서로 헤어졌지만 당시 영화계에서는 대단한 인물들로 평가받았다. 김석훈 하면 유명한 미식가에 멋쟁이. 당시 명동 사보이 호텔 일식 집에서 회를 먹는 단골이었으며 주량도 정종1병이 다반사였다. 언제나 혼자 다니던 그는 청진동 칠복이네 집에서도 저녁이면 술잔을 혼자 놓고 상념에 젖은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당시 자가용은 50년대 말의 윌리스 지프. 60년대와 70년대는 영국산 모리스 세단을 모는 몇 안 되는 멋쟁이였다. 명동에서 식사하고 커피를 마신 후 모리스를 타고 촬영장으로 떠나던 그의 모습은 당연히 '명동신사'그것이었다. 제 17회 대종상에서 < 이순신 >으로 특별상을 받은 게 그의 유일한 수상경력. '옛것은 아름답다'는 말이 있듯이 김석훈도 80년대 들어 뜸하다가 93년 < 비오는 날의 수채화2 >이후 화면에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70년대 영화를 보면 월남전을 로케 했던 이만희 감독의 < 얼룩무늬 사나이 >(1970) < 요화배정자 > < 삼일천하김옥균 >(1972, 신상옥 ) < 이 생명 다하도록 >(1972, 신상옥) < 불꽃 >(1975, 유현목 ) < 짝 >(1976) < 비목 >(1977, 고영남 ) < 세종대왕 >(1978, 최인현 ) < 팔만대장경 >(1978) < 장마 >(1978, 유현목) 등. 80년대 들어서는 < 사람의 아들 >(1980, 유현목) <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 >(1982, 정지영 ) 등이 손꼽을만하다. 김석훈 은 흔히 프랑스 배우 쟝가방의 눈매와 타이론 파워의 몸을 지닌 한국배우로 당시에 평가했었다. 또는 한국의 캐리그랜트라고 불리기도 했다. 해맑은 눈매, 꽉 다문 입매무새, 날렵한 몸맵시, 지성미등이 합쳐져서 그랬으리라. 결국 잰틀맨 뉘앙스가 오늘까지 그를 살게끔 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화려하게 시대를 풍미했던 그도 요즘은 조용히 은둔한다. 지긋한 연세 때문인가. 그는 김포공항 넘어 방화동 인근에서 2남1녀를 두고 산다. 부인은 김연식 씨. 큰아들은 컴퓨터 전문가, 둘째 아들은 요즘 한창 영화계에서 뛰는 젊은이, 외동딸은 막 태어난 탤런트이다. 얼마전이다. 그는 후덥한 분위기지만 약속시간이나 매너는 칼같이 지키는 사람., 필자가 교통사정으로 20분 늦었더니 10분 기다리다가 훌쩍 가버려 이틀 후에 다시 만나는 일이 있었다. 만나는 날도 아니나 다를까 회색빛 베레모, 검정코트를 목까지 잠그고 벨트를 꽉 맨 채 떡벌어진 매무새가 여전히 당당해 보였다. 우연히 나도 검정 베레모를 쓰고나와 커피 숍에서 숱한 이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자리를 이동해 간 곳은 광화문 뒷골목, 일본식 목로주점. 이 날 마신 술은 각각 정종대포5잔과 메추리구이와 닭꼬치구이 각각4개. '옛날 젊은 시절 같은 분위기'라며 반가워하던 그는 결국 옆 음식점에서 2차로 소주 2병을 비우고 '내일 지방에 가야한다'며 일어났다. 맥주로 입가심은 절대 사절. '도수가 약한술은 절대 안 마신다'는 신조를 밝혔다. "김형, 요즘 영화는 너무 따분해. 템포는 빠르고 애기꺼리도 있는 것 같은데, 너무 가볍다는 느낌이 들어."... 역시 세월이 가도 노배우는 아직까지 우리영화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고 있었다. 김량삼 (영화감독) / 2002년 <프로필> 본 명 : 김영현 출 생 : 1929년 6월 8일, 경기도 이천 학 력 : 청주사범대학교 졸업 데 뷔 : 1957년 유재원 감독 <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수상경력 : 대종상(17회) 특별상 등 다수 주요작품 : < 춘희 >, < 햇빛 쏟아지는 벌판 >, < 지평선 >, < 의적 일지매 >, < 두만강아 잘 있거라 >, < 열풍 > 등 20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