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2500년의 여행
- 제작년도
- 2007
1989년, 나는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다. 동급생 누군가가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비디오테이프를 공수해왔다면서 방과 후에 또 다른 누군가의 집으로 모이라고 했다. 그 영화는 에밀 아돌리노의 1987년 작 <더티 댄싱>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그냥 보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하던 좁은 방 안에서 영화를 본 그 100분의 시간이 굉장히 많은 것을 바꿔놓았던 것 같다. 열네 살의 나는 <더티 댄싱> 속 열일곱 살 프랜시스(‘베이비’라고 더 자주 불리는)와 다를 바 없었다. 그때까지 내가 TV ‘주말의 명화’에서, 혹은 부모님이 가끔 극장에서 보여주었던 ‘감동 대작’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격렬한 에너지와 성적 흥분을 처음으로, 지직거리는 화질의 비디오테이프로부터 느꼈던 것 같다. 그 감정이 너무 낯설고 격렬해서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댄스 영화에서 그때에 비견할 충격을 느낀 건 이후 고등학교 때 피카디리 극장에서 봤던 바즈 루어만의 <댄싱 히어로>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1963년 여름, 베이비는 가족들과 함께 호화로운 산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낸다. 나이 많은 어른들 위주의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에 억지로 참여하다가, 우연히 밤중에 외딴 별채에서 펼쳐지는 댄스파티를 목격하고 그에 매료된다. 산장에서 일하는 청춘남녀가 모여든 이 파티장의 주인공은, 리조트의 춤 선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댄서 자니와 페니 듀오다. 베이비는 페니가 여름 방학 동안 산장에서 일하던 예일대 학생 로비와의 관계 때문에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낙태 수술 비용 때문에 난감해한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베이비는 의사인 아빠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며 돈을 빌려 페니에게 건네고, 그가 수술을 무사히 마칠 때까지 자니의 댄스 파트너 역을 대신 하기로 한다. 춤을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던 순진한 소녀 베이비가 자니와 함께 하루 종일 춤 연습을 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성인이 되어서, <더티 댄싱>을 몇 번 더 봤다(가장 최근의 시청 경험은 영화가 왓챠에 올라왔을 때다). 어린 시절에는 순전히 ‘나쁜 소년’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하이틴 로맨스 영화처럼 받았들였지만, 좀더 성장하고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쌓였을 때 다시 본 <더티 댄싱>은 또 달랐다. 일단 산장 주인은 아르바이트생을 두 종류로 나눠서 고용했다. 예일대 및 하버드대 학생들은 접객 웨이터로 일하고, 여름에 이곳을 찾는 부유한 가족들에게 ‘미래의 예비 사위’처럼 선보이면서 그 가족의 ‘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임무가 제시된다. 반대로 나머지 오락 담당 직원들(자니는 이쪽에 속했다)은 그 ‘딸들’에게 절대로 손가락 하나도 터치하면 안 된다고 금지당한다. 넘보지 못할 나무라는 것이다. 섹스에도, 심지어 휴가 기분을 내기 위한 가벼운 수작질에도 계급의 공고한 벽은 일상적으로 작동한다. 과연 이곳에 놀러온 사람들과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 사이의 교류가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라인딩이라든가 더티 댄싱은 하층 계급이 지하실에서 추고, 위층의 부유층은 가족들과 폭스트롯을 추지요.”(<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중 ‘더티 댄싱’ 편)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화학 작용이 일어난다. 얌전한 ‘아빠딸’ 베이비가 직원들 중 최고의 인기남인 자니에게 매혹되면서 그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자니의 육체의 압도적 매력 때문에, 베이비는 지금껏 이런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욕망의 세계로 곧장 이끌려 들어가버린 것이다. 책으로도, 그리고 가족들이 속한 안온한 세계 인근에서도 접한 적 없던 색정적인 에너지. 물론 그 에너지가 가슴 아픈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더티 댄싱>이 1987년 미국에서 개봉했을 당시 ‘낙태’라는 주요 설정 때문에 광고주였던 여드름 연고 회사 측에서 난색을 표했던 것처럼, 원치 않는 임신을 수술로 중단하려 한다는 설정이 비교적 가까운 과거인 1980년대에조차 ‘대중’ 영화에서 등장하긴 쉽지 않았다(하물며 <더티 댄싱>의 배경은 1963년 1) 이다). 하지만 각본가 엘리노어 버그스틴은 그 설정을 삭제하거나 돌려 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중적인 영화일수록 도덕에 관련된 문제를 겁내지 않고 다뤄야 한다고 봐요. 그 영화가 관객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중 ‘더티 댄싱’ 편) <더티 댄싱>은 춤을 못 추던 소녀가 사랑의 힘으로 춤을 매우 잘 추게 되는 이야기, 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상주의자였던 소녀가 현실에서 어떤 한계선들을 맞닥뜨리고 자기 방식대로 그것에 맞서며 넘어서는 이야기기도 하다. 극 중에서 가장 슬픈 대사 중의 하나는 베이비가 “아빠를 실망시켜서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아빠도 저를 실망시켰어요”라고 울면서 선언하는 장면이다. 이는 페니의 임신과 낙태에 관여하게 된 베이비가 그로 인해 다정한 가부장이었던 아버지의 편견과 맞닥뜨렸고, 가부장의 세계에 머물 것인지 자니의 세계를 변호할 것인지의 갈림길에서 가부장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공개적인 선택을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에서 언급되는 또 다른 한계선은 베이비 자신의 편견에서 비롯된다. 베이비의 언니 리사는 외모 치장에 신경을 많이 쓰고 부모님이 정해주는 결혼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다. 아빠가 산장 주인에게 베이비를 두고 “세상을 바꿀 아이”라고 소개하는 초반 장면에서, 베이비는 정치에 관심 많은 책벌레인 자신에 대해, 언니 같은 또래 여자들과는 다른 자신에 대해 살짝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숨기지 못한다(아빠의 소개말을 들은 산장 주인이 리사를 향해 “아가씨는 뭘 할 거지?”라고 묻자 베이비는 “언니는 세상을 장식할 거예요”라고 대꾸하고 그 순간 리사의 얼굴은 살짝 굳는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자니의 세계에 들어서고, 지금까지 접한 적 없던 이들과 교류하고, 가끔은 거짓말과 불법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몸에 대한, 삶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베이비의 시각은 크게 달라진다. 언니 리사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은연중에 자신보다 어리석다고 생각하던 리사의 성정을 다정한 공감과 따뜻한 연민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언니가 건네는 위로를 거절하지 않고 그 어깨에 기대는 변화를 보인다. 넷플릭스에서 <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시즌 1이 공개됐을 때 주저없이 ‘더티댄싱’ 편부터 시청했다. 두 명의 여성, 각본가와 프로듀서가 의기투합하여 (멱살 잡고) 완성시킨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잔뼈 굵은 거물로부터 “돈 낭비 하지 말고 필름 태워버리쇼”라는 평을 받았지만, 일반 관객 1000명을 대상으로 연 시사회에서 “모두가 발을 구르며 환호를 질러대는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개봉 직후부터 무려 “19주 동안 박스오피스를 지배했고, 그때까지 나왔던 미국 독립영화 중 최대의 흥행 수익을 만든 영화”가 되었다. 제작 과정에서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과 음악과 사랑과 성장에 대한 “백만불짜리 제목”의 이 영화에 대한 애정과 믿음만으로, 초저예산의 한계를 뚫고 완성해낸 제작진 모두 그 유명한 주제가처럼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I've Had) The Time Of My Life)을 만끽했음을 알려준다. <더티 댄싱>을 본 이들이라면, 이 50분가량의 다큐멘터리도 꼭 관람하시길 간곡하게 권한다. 대중영화가 성취하는 멋진 지점,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닐지라도 대중들이 원하는 어떤 간지러운 지점과 딱 맞아떨어졌을 때 폭발하는 시대정신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다. *** 1) 여기서 아니 에르노의 짧은 책 <사건>(윤석헌 옮김, 민음사 펴냄)이 떠오른다. 1963년 여름 미국에서 베이비가 산장에 도착하고 페니가 원치 않는 임신 때문에 괴로워할 때, 불과 몇 달 뒤인 10월 프랑스에선 대학생 아니 에르노가 불법인 임신 중절 수술을 받기 위해 울음을 참으면서 여기저기 수소문하는 굴욕적인 기억이 세세하게 펼쳐진다.
“아름다움도 두려움도 모두 경험하라. 그저 걸어가라. 생이 계속되는 한,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끝’은 없으니.”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추운 겨울, 독일 베를린의 한 광장. 파스텔빛 집들이 하얀 입김을 포근하게 둘러싼다. 어린 소년은 여느 날처럼 넉넉지 않게 먹을거리를 사오다가 ‘파란빛’으로 반짝이는 나비를 본다. 그 날갯짓이 유난히 예쁘게 마음에 들어온 탓에, 소년은 미소를 짓고 쪼그려 앉아 나비를 바라본다. 저 멀리 날갯짓이 사라지고 나서야 일어선 소년의 옆, 낯익은 구두가 허공에 떠있다. 그렇게 소년은 광장 한가운데서 엄마의 죽음을 마주한다. 반나치 활동으로 교수형을 당한 엄마의 죽음을.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차디찬 엄마의 발을 부둥켜안고 우는 일밖에 없다. 한없이 따뜻해 보였던 집들은 서늘한 눈이 되어 소년을 응시한다. 광장엔 매일같이 사람들이 매달리고, 아이들이 장난감 대신 총을 드는 비정한 거리. 제2차 세계대전 시대였다. <조조 래빗>은 신발 끈을 혼자 고쳐매지 못했던 소년이 신발 끈을 매어주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영화다. 엄마 ‘로지’(스칼렛 요한슨)와 단둘이 사는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열살 아이가 겪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겪는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조조는 어린 마음에 소속감이 갖고 싶어 나치 소년단인 유겐트에 입단하지만 작은 토끼조차 쉽게 죽이지 못해 겁쟁이 토끼라 놀림당한다. 상상 속 친구 ‘히틀러’(타이카 와이티티) 외에는 줄곧 혼자였던 조조에게 몰래 숨어 있던 소녀 ‘엘사’(토마신 맥켄지)가 우연히 나타난다. 그리고 소년은 소녀를 만나며 조금씩 변해간다. 엄마 손에 이끌려, 엄마가 매준 신발로 문밖을 나섰던 조조는 엘사의 신발 끈을 고쳐매 주고, 직접 문을 열어 세상을 마주한다. 안아주고 싶은 각색, 연출, 음악 <조커>, <아이리시맨>처럼 어마어마한 ‘어른들’을 제치고 <조조 래빗>은 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했다. 72회 미국 작가 조합상, 73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이어 각색상 부문에서만 세 번째 수상이었다. <인생은 아름다워>부터 <피아니스트>까지 전쟁의 비극을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끔찍한 제2차 세계대전의 이야기를 새롭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조조 래빗>을 선보였다. 원작인 크리스틴 루넨스의 소설 ‘갇힌 하늘(Caging Skies)’이 제국주의와 마초적 본성, 소유의 집착을 들이댄다면, 영화는 어린 소년의 얼굴에 난 상처로 전쟁의 비극을 그린다. 부디 마음만큼은 덧나지 않길 바라며 연고를 발라 주고 싶게끔. 동화적인 상상력과 따뜻한 색감이 돋보이는 연출도 원작의 어두움을 걷어낸다. 조조가 엄마와 함께 자전거로 꽃밭을 달리는 장면,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뱃속에 나비가 가득한’ 모습으로 비유한 장면, 그리고 쓰이지 않은 편지를 진심으로 읽는 장면에서 특히나. 이렇게 어린 조조의 순수함은 마이클 지아치노 음악감독의 넘버로 울려 퍼진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인크레더블>, <코코>, <인사이드 아웃>으로 전 세계 어린이, 어른이 마음을 빼앗았던 지아치노 음악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20명 규모의 작은 오케스트라와 협업했다. “오케스트라 규모가 작을수록 감정선을 잘 살려주는 사운드가 나온다”는 그의 말처럼 영화 속 넘버는 정서적인 울림을 더한다. 혐오를 물리치는 풍자 <조조 래빗> 음반 커버에 ‘혐오를 물리치는 풍자(An Anti-hate Satire)’가 적힌 건 우연이 아니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블랙 코미디’가 관통하기 때문. “‘하일 히틀러’는 생각 없이 뱉어야 제맛”이라는 꾸지람(?)에서 시작된 풍자는 비밀경찰인 게슈타포가 ‘하일 히틀러’를 티키타카 주고받는 영화 후반부에서 극대화된다. 이렇듯 <조조 래빗>은 80년 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진 비극을 재치있게 담아낸다. 전쟁과 폭력, 차별과 혐오, 가짜뉴스와 프로파간다는 우리 가까이 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직도 진행형이다. 영화 속에서 두드러지는 여성과 성소수자의 역할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사랑의 힘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말을 행동으로 증명한 엄마 ‘로지’, 조조의 세뇌된 공포를 거둬준 ‘엘사’의 존재감은 극단으로 치우친 전쟁 상황에서 여성의 용기와 강인함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은 바로 ‘클렌첸도르프’(샘 록웰)다.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훈련 교관 ‘클렌첸도르프’는 미친 세상에 술이 유일한 답인 양 매일 취해있다. 후배 병사인 ‘핀켈’(알피 알렌)과 있을 때면 왠지 모르게 묘한 기류가 감도는 그는 위급한 순간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조조를 보호해준다. 요란한 총성이 광장까지 울려 퍼질 때, 클렌첸도르프는 화려하게 커스텀된 전투복을 입고 등장한다. 어깨에는 빨간 망토를, 허리춤에는 커다란 스피커를, 가슴팍에는 분홍색 역삼각형 뱃지를 달고. 동성애자 홀로코스트가 만연했던 역사를 되돌아보면 클렌첸도르프의 장식은 ‘그냥’ 장식이 아니다. 캐릭터의 성격을 녹여내는 듯 유난히 돋보인다. 코드 연출이나 역할론에서 아쉬움은 남지만, 애초에 싸우려고 입을 전투복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입을 ‘상복’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장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군복’부터 벗어던질 수 있길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보이듯, 신발 끈을 고쳐맬 수 있다고 모두 바람직한 어른이진 않다. 또 다른 교관인 ‘람’(레벨 윌슨)은 죽은 독일 병사의 군복을 벗겨 조조에게 입히고는 총을 들고 싸우게 한다.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옷 중에서도 ‘군복’은 계급을 드러내고 이념을 드러낸다. 군복에 담긴 정체성을 생각하면 ‘꼬마 병정’처럼 무서운 단어도 없다. 이때 영화의 첫 장면에서 조조는 군복을 입고, 마지막 장면에서 군복을 벗는다. “나치가 아닌 나치의 상징에 열광하는, 웃기게 생긴 제복을 입고 무리에 어울리고 싶어하는 꼬마애”라며 팩트 폭격을 날린 엘사의 대사는 조조뿐 아니라 지금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춤이 전쟁을 비롯한 모든 비극으로부터의 탈출이라면 우리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몸에 걸치고 있는 군복은 무엇일지. 엔딩 크레딧이 오르면 신발 끈을 고쳐매고 춤출 준비를 해보자. ‘군복’부터 벗고.
1970년대 대중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깊이 기억된 세 여성의 이름은 < 별들의 고향 >( 이장호 , 1974)의 경아, < 영자의 전성시대 >( 김호선 , 1975)의 영자, 그리고 < 겨울여자 >(김호선, 1977)의 이화다. 세 작품은 공히 소설로 먼저 성공을 거두고 영화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별들의 고향>과 <겨울여자>는 소설로 발간되기 전 신문에 연재된 바 있다). 1) 그리고 당대의 영화는 물론 1980년대까지 여성영화의 어떤 기준을 만들어냈다. 혹자는 호스티스 장르에 무슨 여성영화냐고 물을 테지만, 그건 1980년대의 변질된 장르에 들이댈 질문이다. 특히 <겨울여자>는 호스티스 장르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한 인식은 안타깝게도 당대의 대중영화를 경험하지 않은 채 당연히 그러리라고 짐작하는, 그리고 쉽사리 범주화하는 데서 기인한다. 세 영화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1970년대 여성의 어둡고 외면당한 부분을 대중적으로 각색한 경우이며, 비록 한계는 분명할지언정 당시 여성의 삶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유의미하다. 잘못된 선입견을 또 하나 말하자면 현재 관객들이 1970, 80년대 한국영화의 수준이 낮을 거라고 여긴다는 거다. 조금 유치한 영화에 “요즘이 1980년대도 아니고” 라는 반응하는 걸 볼 때마다 과연 그 시대의 영화를 제대로 경험했는지 의심스럽다. 표현 기법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 걸 감안하지 않고 냉소와 비웃음으로 예전 영화를 보는 관객이 적지 않다. <겨울여자>도 그런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임이 예상된다. 성우가 맡은 이화의 목소리, 순진한 건지 판단지 서지 않는 인물의 태도 등에 헛웃음을 터뜨릴 관객이 빤히 그려진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성공을 재연하려던 김호선과 당시의 제작진이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 억울한 일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전성기에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원작을 바탕으로 윌리엄 포크너가 각본을 썼듯이, 한국에도 그런 자세로 영화를 대하던 때가 있었다. <겨울여자>의 원작은 조해일이며,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김호선과 호흡을 맞췄던 김승옥이 각본을 썼다. 본격적인 사운드트랙의 출발점인 <별들의 고향>의 음반이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 터라 <겨울여자>도 이에 부응했다. 김승옥처럼 김호선과 다시 작업한 음악가 정성조는 영화의 흐름에 맞춰 음악을 구상했고, 조해일, 김승옥이 직접 작사에 참여한 노래들도 대중의 사랑을 얻었다. 전체적인 톤은 프란시스 레이 풍의 유러피안 경음악이었으나, 익숙한 고전음악과 오리지널 사운드를 영화 전체에 펼쳐놓은 것은 인정할 만한 시도였다. 김호선은 여자 주인공을 ‘갇힌 존재’로 파악했다. 철조망을 근경으로, 서울의 고급 주택가를 바라보는 시점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주택 중 하나의 계단을 오르면, 굳게 닫힌 철문 너머에 이화가 산다. 김호선은 그런 인상으로 이화의 공간을 그렸다. 그녀는 보호받고 있음과 동시에 폐쇄된 공간에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인상은 이후 영화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전제 조건을 형성한다. 그녀가 어떻게 변하는가, 그것이 <겨울여자>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여고생 이화는 누군가가 보낸 편지를 엄마에게 ‘고발’한다. 그녀는 자신의 행실이 단정하지 못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여기며, 편지를 보낸 누군가를 불편한 감정으로 대한다. 임예진 의 ‘진짜진짜 시리즈’ - < 진짜 진짜 잊지 마 >(1976), < 진짜 진짜 미안해 >(1976), < 진짜 진짜 좋아해 >(1977) - 가 나올 때임을 감안하면 이화의 태도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혼자 뾰로퉁한 표정을 지으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영화는 그녀가 어떻게 자라 왔는지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서 폐쇄성을 사회적인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영화는 이화가 갇혀 있는 상황을 사회적인 조건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딸의 태도에 웃음을 지으며 ‘이런 편지는 혼자 간직하는 것이’라 일러두는 엄마의 태도에서 보듯, 이화가 지닌 도덕, 윤리관은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그녀 스스로 지키고 세운다는 느낌을 준다. 그 시기의 다른 여성 영화와 비교해, 이화라는 인물에게 바깥 상황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얕다. 이것은 이화라는 인물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가 제작된 시기 탓이기도 하다. 이화에게 영향을 끼치는 두 인물 – 요섭과 석기가 아버지와 맺는 관계는 사회적으로 읽을 여지가 다분하다. 요섭 부의 폭력성과 석기 부의 죽음은 1970년대의 사회정치적 특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만, 영화에 가해질 검열을 의식해 영화화 과정에서 삭제되었을 확률이 높다. 특히 이화의 의식에 깊은 영향을 주는 석기의 경우, 그가 하는 대사의 많은 부분은 ‘묵음’으로 처리돼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도록 처리되었다. 정학을 당했다는 부분에서는 소리가 거칠게 튀고, 강제로 징집을 당한 부분도 스스로 입대하는 것으로 알게끔 했다. 외출 중 교통사고로 죽은 것에도 의문사의 의혹이 끼어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원작에서 이화가 형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광준이란 인물을 영화에서 아예 제거함으로써 그녀의 사회적 변신을 읽지 못하게 만들었다. 영화에서는 이화가 군인인 석기에게 보내는 편지에 “석기씨 덕분에 훌륭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어요. 이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꼭 알아야 할 것을 모른 채 대학을 졸업하고 말았을 거에요”라고 쓰는 것이 다다. ‘꼭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시대를 반영한 이러한 각색으로 인해, 원작에서 드러나는 이화의 수동성이 오히려 상쇄되고 그녀의 내면과 자립적인 부분이 두드러지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화의 청춘 시대가 몇몇 남자를 거치면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겨울여자>는 얼핏, 남자들 사이를 전전하는 여성을 그린 당대 여성영화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고등학생이었던 이화는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반에 이를 동안 요섭, 석기, 민이란 남자를 만나게 된다. 별장으로 초대한 요섭이 육체적으로 접근하자 당황한 그녀는 “이게 뭐예요”라고 말하며 뛰쳐나간다. 그 일로 상처를 입은 요섭은 자살하고, 이듬해 이화는 석기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운동권 학생이었던 그는 입대 후 죽음을 맞는다. 다시 이 년 뒤 이화는 고등학교 은사였던 민과 조우하는데, 이혼 후 혼자 살던 그는 이화의 등장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남자를 거치는 과정은 다를 게 없으나, 여성을 착취하는 남성은 이 영화에 없으며 영화 또한 그들의 시선 아래 이화를 두지 않는다. 거꾸로 영화는 이화의 시선으로 남성을 바라보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전개는 상당 부분 이화의 출신 계급과 상관이 있다. <별들의 고향>의 경아는 좋은 남자를 만나 아이를 키우고 싶었으나 육체적으로 착취당하고 벼려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는 기술을 배워 돈을 벌고 싶었는데, 버스 안내원을 하다 팔을 잃은 뒤 뒷골목에서 몸을 팔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비극적 삶이 되풀이 되거나 비극적 삶에서 벗어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과 달리, 이화는 과잉 보호를 받으며 자랐으나 자기 삶의 결정권을 지닌 인물이다. 두 명의 남자가 맞는 죽음도 그녀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을 오히려 삶과 사회를 깨닫고 성숙해지는 계기로 삼는다. 기실 세 남자 - 미성숙한 요섭, 삶의 열정이 넘치지만 아직 젊은 석기, 그리고 상처를 맛보고 중년을 앞둔 민 – 의 구성은 이화의 내면이 점자 성숙해지는 단계를 은유하는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자가 아닌 이화 자신이다. 이화는 과연 독립적인 여성인가. 최소한 이전의 여성영화에서 보던 편한 상대는 아니다. “난 남자가 곁에 없으면 잠시도 살 수가 없어요, 난 그래요. 난 그런 여자에요.“라던 경아는 요즘 여성 관객에게 ’속 터지는‘ 인물로 비칠 것이며, 남자들은 그런 경아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만 찾다 버린다. 이화는 그 시대의 영화가 꾀할 수 있는 나름의 방책이 아니었을까. <겨울여자>는 멜로드라마 장르의 특성 상 어쩔 수 없는 강요된 슬픔과 비극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화의 위대한 점은, 사랑의 상처로 인해 뒤로 후퇴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녀는 매번 더 큰 사랑의 힘을 얻어 앞으로 나아간다. 한국 멜로드라마로선 아주 드문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이다. 웹을 둘러보다 한 관객이 ’<겨울여자>의 장르가 대체 뭔가요‘라고 질문한 것을 읽었다. 그만큼 전통적인 멜로와는 다른 영화다. 사실 <겨울여자>가 1970년대 관객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았다는 게 신기한 일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건 좀 이상한 멜로다. 세 남자와의 관계는 기능적으로 연결된 느낌이 강하다. 그녀가 새로운 관계로 진입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일종의 의식처럼 누드 신을 삽입한 것도 그러하다. 인물 사이에 깃든 애정의 촉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자신은 가부장제를 거부해 결혼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민의 재결합을 도모한다는 설정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거기에서 역으로 이화의 정체를 더듬어야 할 것 같다. <겨울여자>는 세 남자와의 관계가 진행될 때마다 전혀 다른 톤으로 바뀌는 영화다. 흡사 세 편의 영화를 붙여놓은 듯하다. 그건 그 사이에 이화라는 인물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화는 성숙의 다른 이름이다. 그녀는 지속적인 성숙의 단계를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이화는 대담한 존재이며 자신이 믿는 바를 의심하지 않는다. 죽음과 상처에 주눅들지 않으며 남의 시선 같은 게 선택을 가로막지 못한다. 첫 외박을 한 다음 날, 이해심을 갖추었으나 목사로서 보수적인 인물인 아버지가 충고를 하려고 하자 이화는 “친구 집에서 자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사람이 자면 안 되는 곳에서 잔 건 아니에요.”라고 답한다. 성인이 돼 만난 옛 선생이 친구가 되자고 해도 서슴지 않는다. 당황해 거리를 두려는 건 도리어 선생 쪽이다. 그녀는 윤리나 도덕을 따르기보다 진실을 발견해 직시하기를 원한다. 여기서 윤리나 도덕은 관습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데, 인간다움을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는 그녀에게 그건 때론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그런즉, 가족 이기주의를 이유로 결혼 제도에 거부감을 표현한다. 21세기의 관객의 시선으로 보기에, 이화는 빈 구석이 많은 인물이다. 그러나 요즘 만들어지는 한국영화의 여성과 비교해 봐도 그녀의 독립적인 기질은 신선하다. <겨울여자>가 한때 사랑받았던 옛날 영화가 아니라 여전히 흥미로운 텍스트인 건 그래서다. 1) 기록에 따르면 서울에서 세 영화가 거둔 관객의 수는 <별들의 고향>이 46만명, <영자의 전성시대>가 40만명, <겨울여자>가 58만명이다. 전산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임을 감안하면 실제 관객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 겨울여자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