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의 꿈
- 감독
- 정지숙
- 제작년도
- 2005
서영춘(1928~1986)은 구봉서, 김희갑 보다 다소 늦게 연예계에 등장했다. 서영춘은 국도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다가 악극단의 유명 작곡가였던 형 서영은의 도움으로 1952년에 데뷔했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쇼 무대의 사회자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백금녀를 만나 코미디 콤비를 이루면서 ‘뚱순이와 갈비씨’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얻었고 이후 라디오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를 누리게 되었다. 코믹한 연기력과 뛰어난 순발력, 거침없는 언변으로 수많은 유행어를 만들어냈던 서영춘은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이었다. 서영춘은 1961년 <인생갑을병>으로 영화에 데뷔한 뒤,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로 스타덤에 올랐다. 1965년 6월 개봉한 <여자가 더 좋아>는 이례적으로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상영되면서 19만의 관객을 동원, 그 해 최고의 인기작이 되었고 이 영화의 인기를 바탕으로 서영춘은 명실공히 원톱 주연이 가능한 최고의 코미디 스타가 되었다. 뒤이어 각종 라디오와 영화에서 서영춘의 겹치기 출연이 이어졌다. 이 시기부터 서영춘은 라디오, 영화, TV와 각종 무대에서 존재감을 발하며 1986년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사진1)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 포스터. 서영춘을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영화로, 여장을 한 뒤 우여곡절 끝에 성정체성을 발견하게 된 서영춘이 성전환 수술을 받는다는 다소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965년 최고의 인기작이자 서영춘의 대표작이 되었다. 한편, 서영춘은 ‘저질 코미디’ 논란에 시달리는 대표적인 코미디언이기도 했다. 일례로, 1965년 12월 27일, 중앙라디오방송의 <다이아몬드 스테이지>라는 프로그램 중 한 코너인 ‘하꼬바꼬 요리강습’에서 서영춘은 파리로 국을 끓이는 법을 소개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1966년 1월에 열린 방송윤리위원회의 정례위원회는 서영춘의 출연정지 1개월을 의결했다. 저속하고 품위 없는 코미디를 했다는 이유였는데, 중앙라디오방송에서는 그것이 서영춘의 탓이 아니라 각본을 쓴 작가 최휘로의 문제였다고 변명하며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각본과 코미디 실연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서영춘의 출연 정지를 재가결했다. 이듬해 9월 서영춘은 또 다시 경고처분을 받았다. <다이아몬드 스테이지>에서 품위 없는 언동의 저속한 코미디를 했다는 것이었다. 1967년에도 역시 같은 방송에서 “우리말을 일본식으로 발음하여 언어순화에 역행”하고 “청소년들에게 저속한 유행어를 전파”시키는 품위 없는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경고처분을 받았다. 이처럼 서영춘은 활동 기간 내내 라디오와 영화, 방송에 걸쳐 각종 감시와 제재에 시달렸다. 사생활에서도 서영춘은 공권력과 잦은 마찰을 빚곤 했다. 애초에 서영춘은 구봉서처럼 전형적인 ‘가부장’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거나 얌전하고 모범적인 이미지를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방송 이외에도 여러 차례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그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1965년 10월 경찰의 날 행사를 둘러싼 소동이었다. 이 날 사회자로 섭외되었던 서영춘은 40여 분을 지각했다. 각급 경찰 간부를 비롯하여 내무부 장관까지 참석하는 행사에 서영춘이 나타나지 않자 30분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긴급수배가 내려졌다. 다행히 그로부터 10분 뒤 도착하여 무사히 행사를 마치고 나자 이번에는 화가 난 종로 경찰서장이 그를 사기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서영춘은 형제까지 연루된 폭행사건 및 경찰 치사 사건 등 다양한 사건사고로 가십거리를 제공하곤 했다. 이처럼 서영춘의 통제 되지 않는 성격, 금기를 깨는 막말과 눈치 보지 않는 코미디 스타일 등은 1960년대 후반 <팔도강산>의 아버지의 페르소나 그 자체가 되어버린 김희갑이나 그 자신 ‘건실한 사회인’이자 ‘가부장’으로의 이미지를 일찌감치 획득했던 구봉서의 코미디 스타일과 같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서영춘 코미디에 대한 제재가 지속되던 시기,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코미디의 저속함을 비판하고 나섰다. 먼저 1964년 방송국에서 코미디언 전속제가 시행되면서, 코미디의 수준이 점점 저하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코미디는 방송을 건전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 별로 보탬이 되지 않고 청취자의 말초신경이나 허파를 자극하는 걸로 만족해온 실정”인데, 코미디언 역시 “영화, 무대, 방송 등을 누비면서 같은 소재를 재탕삼탕 울거먹는다”는 것이었다. 1965년 5월 신아일보의 기사는 코미디언들이 때를 만나 TV, 라디오, 영화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지만 “저급한 대사가 아니라 독창성으로” 웃음을 줘야한다면서 작금의 코미디가 수준 이하의 것이 많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66년 9월 15일 《서울신문》 기사에서는 방송의 저속화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코미디라고 단언하면서, 코미디가 청취자의 “가치판단과 생활 윤리까지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또한 “어느 프로보다도 청취자들에게 강렬한 자극과 영향력을 끼치는” 코미디 프로의 정화가 이루어져야 방송 전체의 정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가 요약하는 라디오 코미디프로그램의 특징은 “조잡한 말의 나열과 불순한 상상력의 동원”, “저속하고 무가치한 언어”의 나열, “쓴 웃음을 자아내는 애드립”, “기성(奇聲)의 연속”, “아이디어의 빈곤”, “위트 이하” 등이었다. 기사는 더 나아가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장기적으로는 신진 코미디언을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응급조치로는 “저속의 낙인이 찍힌” 코미디언을 퇴출해야하며 코미디프로 역시 정지되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했다. 라디오스타 서영춘의 코미디는 이처럼 초기부터 저속논란에 시달렸다. 그러나 “저속”하고 “무가치”하며 “조잡”하다고 혹평 받는 서영춘의 코미디는 점차 팬덤을 형성했고 서영춘은 이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라디오와 악극 무대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코미디 배우들이 영화로 진출하면서부터 대부분 비중 있는 조연이나 주연을 맡았던 것과 달리, 영화에서 서영춘은 거의 단역에 가까운 역할부터 시작했다. 그의 데뷔작이었던 <인생 갑을병>부터 서영춘은 <싸우는 사자들>(김묵, 1962), <안개낀 거리>(강범구, 1963), <어머니 울지 마세요>(전홍직, 1964), <눈물의 자장가>(최훈, 1965)에 이르기까지 20여 편에 가까운 극영화에서 엑스트라급 조연을 맡았다. 이 시기에는 코미디영화보다는 여타 장르 영화에서 단역 혹은 조연을 맡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당시 인기 코미디 배우였던 구봉서가 주연을 맡았던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박종호, 1964)와 로맨틱 코미디 <총각김치>(장일호, 1964) 정도가 서영춘이 출연했던 코미디영화였다. <여자가 더 좋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까지, 영화에서 서영춘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사진2) <여자가 더 좋아>(심우섭, 1983) 스틸.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를 리메이크한 심우섭 감독의 1983년 영화에서 서영춘은 여장남자 식모인 강태기를 짝사랑하는 노인 역으로 출연했다.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며 위반의 쾌락을 선사했던 1965년의 영화와 달리 1983년의 영화는 그야말로 ‘건전’하고 ‘상식’적인 교훈극에 가까웠다. 서영춘이 영화 스타로 거듭났던 것은 <여자가 더 좋아>의 흥행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라디오스타’로서 서영춘의 인기가 한층 성장했던 시기도 1965년이었는데, 영화에서도 서영춘은 비중 없는 단역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유난히 영화에서 늦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서영춘은 1965년을 기점으로 전성기에 접어들어 한 해에만 35편의 영화에 주, 조연으로 출연했다. 물론, 더 이상 단역이 아닌 ‘비중 있는 조연’ 혹은 당당한 주연으로서였다. 그 중에서 단연 서영춘의 주가를 올렸던 것은 <여자가 더 좋아>였다. 이 영화는 1965년 최고의 화제작이자 그해 흥행 순위 1위를 차지하면서 ‘여장남자’ 코미디의 붐을 일으켰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서영춘의 영화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진3) <큰 사위 작은 사위>(이봉래, 1965) 포스터. 1964년까지 주로 조연을 맡았던 서영춘은 포스터에 얼굴이 실린 적이 없었다. 1965년부터 비로소 포스터에 서영춘의 얼굴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 영화의 주연배우들과 함께 큰 비중 없는 조연을 맡았던 서영춘의 얼굴이 포스터 한 켠에 그려져 있다. (사진4)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김화랑, 1965) 포스터. 정면을 바라보는 서영춘 고유의 코믹한 표정, 연민이 느껴지는 표정의 김희갑의 살짝 옆으로 돌려진 얼굴, 김희갑 얼굴 옆 제목의 배치 등으로 인해 조연이었던 서영춘이 주연 김희갑보다 조금 더 중심 인물로 보인다. <여자가 더 좋아>의 성공으로 서영춘은 영화계에서도 원톱 주연이 가능한 스타 배우가 되었다. 스타덤에 오른 코미디 배우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성공담을 가상의 이야기와 함께 엮어 보여주는 영화들이 제작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김희갑의 <김희갑의 청춘고백>(최경옥, 1964), 배삼룡의 <나의 인생고백>(심우섭, 1974), 이후 이주일의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등이 이런 계열의 영화들이었다. 서영춘의 경우에는 1965년에,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대부분 악극단 출신이었던 이 코미디 배우들의 성공담은 시골 출신의 코미디언들이 우연히 악극단에 들어가게 되고 갖은 고생 끝에 스타가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코미디 배우들은 자신들의 특기와 코미디 레퍼토리들을 마음껏 선보일 수 있었고,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구성을 통해 한층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사진5)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 1965) 포스터. 화려한 악극단의 뒷모습, 시골 출신 코미디 배우의 인생 역전, 각 코미디 배우들의 장기를 한층 살린 ‘스펙터클’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 등이 이 ‘가상의 전기 영화’들이 가진 특징이었다. 서영춘의 ‘성공담’을 엮은 <출세해서 남주나> 역시 이런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렇게 성공한 코미디 배우의 대명사가 된 서영춘은 1966년부터 1971년까지 6년 동안 8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이 시기에 서영춘은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들에 출연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외화 <007> 첩보 시리즈를 패러디한 <살사리 몰랐지>(일명 <007 폭소판 살살이 몰랐지>(김화랑, 1966)), <요절복통 007>(김대희, 1966), <기상천외>(김대희, 1967) 등이었다. 서영춘은 이 영화들의 주연을 맡아, 한국 코미디 첩보물을 개척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6)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 포스터 (사진7)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의 서영춘 (사진8)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의 한 장면. 탐정소설 매니아인 보석점 직원 서영춘이 우연한 기회에 007처럼 첩보원이 되어 마약밀매법 일당을 소탕한다는 줄거리의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자신의 유행어인 ‘살사리 몰랐지?’를 매 에피소드마다 연발하며, 자신의 코미디 레퍼토리인 여장하기, 권투 시합 등의 장면을 통해 웃음을 이끌어냈다. 한편, <살사리 몰랐지>에서처럼, <여자가 더 좋아>의 성공 이후 서영춘이 주연인 코미디영화들에서는 서영춘의 여장이 주된 플롯의 장치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김화랑, 1966)이나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가 대표적인 영화였다.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은 일종의 <시집가는 날>의 패러디로,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부잣집 바보 도령(김희갑)에게 시집가게 된 주인댁 딸을 대신해서 결혼하는 머슴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김희갑과 서영춘의 결혼생활이 유발하는 웃음의 코드는 <내 것이 더 좋아>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 <내 것이 더 좋아>는 가수가 되고자 하는 꿈을 안고 시골에서 상경한 성춘(서영춘)이 우연히 만난 봉수(구봉서)의 집에 얹혀 살게 되면서 부부 행세를 하고 각종 소동을 벌이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세 차례에 걸친 시나리오 검열과 실사검열 이후의 (조건부) 상영허가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개봉한 영화로, 서영춘 코미디의 ‘불온함’이 잘 드러난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사진9)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김화랑, 1966) 포스터 (사진10) <내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의 한 장면. 목욕탕에서 쫓겨난 서영춘 (사진11) <내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의 한 장면. 미용체조를 하는 서영춘.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혼자 있을 때도 풀메이크업의 여장을 하고 몸매를 가꾸기 위한 미용체조에 열중하는 등 성적 혼란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후반에 서영춘은 주로 구봉서 주연의 코미디영화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영춘은 구봉서와 짝을 이루어 ‘남자 시리즈’나 ‘팔푼이 시리즈’ 등에서 조연으로 등장하여,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 과제에 서민 대중의 욕망을 투사했다. 구봉서가 항상 성공적으로 취업과 결혼이라는 임무를 완수하고 ‘정상적’인 중산층 가정의 윤리를 구현하는 ‘가부장’으로 거듭나는 인물을 연기할 때, 서영춘은 그의 곁에서 좌절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성실하고 우직한 구봉서에 비해, 한결 약삭빠르고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서영춘은 그럼에도 과히 밉지 않은, 평범하면서도 속물스러운 서민 대중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했다. <단벌신사>(김기풍, 1968)에서 친구 구봉서의 복권을 탐내는 도어맨,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에서 또 다른 가짜 미용사로 변장해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되돌리려다 결국 결혼식장에서 버림받는 세탁소 직원, <번지수가 틀렸네요>(심우섭, 1968)에서 사장 딸인 줄 알고 접근하여 결혼을 약속하게 되지만 사실은 식모였음을 알게 된 수위(물론, 사장 딸은 구봉서와 결혼하게 된다.), <요절검객 팔도검풍>(김기풍, 1969)에서 생계가 어려워 가짜 장군을 사칭하고 다니다 우여 곡절 끝에 진짜 산적을 잡게 되고 진사 댁의 식모와 맺어지는 검객(물론, 여기서도 진사 딸은 구봉서와 결혼한다.) 등 서영춘의 캐릭터들은 성공의 ‘일보직전’에서 약간의 패배와 함께 약간의 좌절을 맛보는 인물이었다. (사진12) <단벌신사>(김기풍, 1968) 포스터. 구봉서의 단벌양복과 복권을 탐내는 친구 서영춘 (사진13)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에서 가짜 앙드레로 변장한 구봉서와 서영춘(오른쪽), 그리고 진짜 앙드레 곽규석(가운데) (사진14) <번지수가 틀렸네요>(심우섭, 1968)에서 사장 딸 행세를 하는 식모에게 속아 넘어간 수위 서영춘 (사진15) <요절검객 팔도검풍>(김기풍, 1969) 포스터. 가짜 검객 구봉서와 서영춘의 억울한 민중 구하기가 펼쳐진다. 1960년대 후반 근대화의 뒷길에 놓인 서영춘의 캐릭터는 혹독한 삶의 조건 속에서, 여장이나 변장과 같은 속임수가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도시 변두리의 떠돌이들이었다. 구봉서와는 달리, 처음부터 서영춘은 지켜야 할 가족이나 도와야 할 동생이 있는 ‘가부장’의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좀 더 가벼운 몸놀림으로 제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불타는 생존욕구로,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변장을 하는 것은 그에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영춘 캐릭터의 실패는, ‘정상성’이나 ‘사회적 규범’을 포기한 데 따른 일종의 징벌과 같은 것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죄책감 없이 ‘가학’적 쾌감을 만끽하게 했다. 그런 한편, 서영춘의 거침없는 언변,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애드립, 기괴하고 과장된 표정과 슬랩스틱에 적합한 신체는, 점차 경직되어 가던 사회적 분위기와 국가의 규율 안에서 ‘해방감’을 주는 위반의 쾌락을 선사했다. 이런 점에서, 잘 짜여진 스토리와 닫힌 결말, 교훈을 주는 메시지를 선호했던 한국의 코미디영화 안에서 서영춘은 주연보다는 조연에 더 어울리는 배우였다. 코미디영화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당시에도, 서영춘은 항상 좋은 악극 무대를 기획하는 것이 꿈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악극단 시절부터 쇼와 만담, 사회 등 단편적이고 버라이어티한 구성에서 강점을 보였던 서영춘은 1960년대 말, 코미디언으로는 처음으로 시민회관에서 단독 리사이틀을 기획하여 코미디 쇼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소비되었던 ‘서영춘’이라는 캐릭터 안에서는 다 담을 수 없었던 코미디로, 그 자신만이 주연인 쇼를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대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코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서영춘 역시 텔레비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1년 8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이 마지막 다작으로, 1972년 이후부터 1979년까지 총 8편, 1980년대에는 총 4편에 출연했다. 이 시기에 서영춘은 <팔도강산>의 아류작이라 할 수 있는 국책영화 <노래 실은 관광여행>(박희준, 1973), <팔도유람>(이명식, 1974)를 비롯하여 여전히 1960년대의 향수를 안고 있는 심우섭 감독의 영화들 <마음 약해서>(심우섭, 1979), <형님먼저 아우먼저>(심우섭, 1980), <82 바보들의 청춘>(심우섭, 1982), <여자가 더 좋아>(심우섭, 1983)에 잇따라 출연했으나, 그 웃음의 질이 예전 같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텔레비전의 시대가 도래하자, 단편적이고 감각적이며 속도감 있는 웃음을 추구했던 텔레비전 코미디에서 서영춘의 코미디는 더욱 빛을 발했다. 코미디영화들은 여전히 제작되었지만, 서영춘의 코미디는 이미 한껏 순화되어 텔레비전으로 넘어가고 난 뒤였다. <참고문헌> 박선영, 『코미디언 전성시대- 한국코미디영화의 역사와 정치미학』, 소명출판, 2018.
영화에서 사라진 위대한 전통 중 하나는 변사(辯士)일 것이다. 물론 인간문화재처럼 기예를 갖추고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기회가 되어가고 있다. 토키영화는 그들을 무대에서 쫓아냈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영화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나는 그걸 늘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그건 슬프게도 일제강점하 식민지의 유산이기도 하다. 영화와 함께 일본에서 건너온 변사는 일본영화의 발명 중 하나이다. 일본에서는 변사라는 말 대신 가쓰벤(活辯)이라고 불렀다. 일본에서 가쓰벤이 언제 나타났는지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가쓰벤은 그 전통이 17세기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때 그림과 이야기를 하나의 화폭에 담는 에도키(繪解)의 전통이 나타났고(전문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일본 불교화의 전통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런 다음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에도키를 읽어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읽기만 했지만 점점 더 거기에 감정을 담고 심지어 자기가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에도키가 곧장 영화로 넘어온 것은 아니다. 분라쿠 인형극이 진행될 때 그 곁에 사미센 연주자들과 함께 해설자들이 앉았다. 그들은 단지 인형의 대사만을 낭송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여러 명의 해설자가 앉기도 했지만 진정한 대가는 혼자서 여러 인형의 목소리를 번갈아가면서 낭송했다. 이 전통의 섬세한 구분이 좀 더 필요하지만 내가 다시 만나고 싶은 영화사의 순간은 가쓰벤의 고고학이 아니다. 어쩌면 활동사진을 구경하러 온 20세기 초의 일본 관객들에게 가쓰벤의 존재는 너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일본에서 상영될 때부터 가쓰벤은 무대에 함께 올라왔다. 심지어 일부 극장에서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입담 좋은 가쓰벤들이 일종의 여흥으로 재담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게다가 가쓰벤의 존재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입한 영화의 자막을 구태여 번역할 필요 없게 만들면서 경제적인 기능도 수행했다. 영화가 점점 대중의 관심을 모으자 점점 더 많은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점점 더 많은 가쓰벤이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부 열렬한 관객들은 같은 영화를 다른 가쓰벤의 공연으로 보기 위해 구태여 찾아가기도 했다. 일본 영화사는 위대한 가쓰벤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공연(!)은 1912년 요코다상회(橫田商會)에서 제작한 <곤자키야샤(金色夜叉)>를 혼자서 낭송한 가쓰벤 쓰치야 쇼토(土屋松濤)의 무대라는 데 일본영화사 연구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곤자키야사>는 말 그대로 ‘돈 귀신’이라는 뜻인데, 오자키 고요가 요미우리신문에 1897년 1월 1일부터 1902년 5월 11일까지 연재한 대중소설이 원작이다. 이 소설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당시 식민지 조선에도 조중환이 번안해 「장한몽」으로 소개했다. 좀 더 간단한 설명이 있다. 우리에게는 ‘이수일과 심순애’로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수일이 사랑하는 여인 심순애가 돈 많은 김중배에게 시집을 가자 “김중배의 다이야 반지가 그렇게도 좋더냐”라고 한 다음 고리대금업자로 변신해 복수하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전형적인 신파. <곤자키야샤>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가쓰벤 쓰치야 쇼토는 “칠색음(七色音)이라는 그의 명성에 걸맞게 인물들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그 감미로운 음성으로 관객의 넋을 빼놓다가 하지마 간이치(말하자면 이수일)가 비통하게 죽어가는 연인 시가사와 미야(말하자면 심순애)에게 후회를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객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절찬을 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쓰치야 쇼토의 공연을 담은 기록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토키영화의 등장으로 가쓰벤은 설 자리를 잃었지만 아직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여성 가쓰벤 아소코야타(麻生子八咫, 사진2)와 그의 아버지 야소야타 (麻生八咫, 사진1) 의 공연 모습 일본에서 가쓰벤은 점점 더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첫 번째 토키영화 < 재즈싱어 The Jazz Singer >(앨런 크로슬랜드)가 미국에 등장한 1927년에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가쓰벤이 6,818명이었며, 그중 180명이 여성 가쓰벤이었다고 한다. 영화는 계속해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발명하면서 한편으로 그 자신의 역사를 살해했다. 영화사의 순간들은 언제나 그렇게 섬광처럼 지나갔다. (계속)
그대는 천벌받은 자를 사랑하는가? 말하라, 용서받지 못할 것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 -샤를 보들레르 자식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한 가족이 있다. 어느 작은 소도시에서 인테리어가게를 운영하면서 살아가는 성철과 미숙 부부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외아들 은찬을 잃는다. 은찬은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러 갔다가 물에 빠진 기현을 구하고는 의롭게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영화 는 은찬이 겪은 사고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시간이 흘러 망자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껴안고 살아가는 성철, 미숙, 그리고 기현의 일상을 관조적으로 그려나가면서 이야기의 포문을 연다.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 그 이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이 영화 속 세계의 지반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는 죽음이라는 고통이 일으키는 파장을 쫓아가면서 그것에 대한 긴 주석을 남기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핵심적인 인물인 성철과 미숙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은찬을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미숙의 경우, 평소 은찬과 친하게 지냈던 한 아이에게 다가가 그의 모습에서 죽은 아들의 흔적을 찾는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 현기증 >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자 그녀를 찾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과 겹친다. 미숙은 아들을 잃은 결핍을 아들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다른 아이를 통해서 극복해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슬픔은 잠식되지 못하고 도리어 그녀의 내면의 고통이 외부로 드러나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 성철은 은찬의 예기치 않은 죽음을 사회적으로 선한 죽음으로 기념하는 일에 동참한다. 그는 은찬을 의사자로 지정하는 소방청의 일에 묵묵히 협조한다. 게다가 그는 은찬에게 주어지는 보상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로 약속한다. 이는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유가족인 아버지가 할 수 있는 마땅한 처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죽은 자를 사회적으로 애도하는 이 일련의 과정은 죽음의 덧없음과 허망함을 극복하기 위한 또 다른 시도로 보인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망자의 지난 삶을 도덕적이고, 명예로우며, 영웅적인 것으로 기념하려는 이상주의적인 실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녕 죽음의 고통은 명예와 같은 이상이나 금전적인 보상 등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영화는 성철의 선택과 관련하여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공을 들이지 않으며, 성철 또한 자석에 끌린 것처럼 무의지적으로 그 일련의 과정에 동참한다. 감정이 보이지 않는 그의 차가운 얼굴과 활력이 휘발된 그의 몸짓들은 다소 기계적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무기력한 성철의 모습은 그가 아직 아들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성철과 미숙의 일상을 통해서 우리는 망자의 부재가 남긴 고통과 슬픔은 그 어떤 개인적 혹은 사회적 노력으로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영화는 성철과 미숙이 아들을 잊기 위해 선택했던 행위들, 즉 그들의 희망이 현실과 충돌하는 순간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비극을 희망으로 극복해보려는 몸부림이 다시 현실에 부닥쳐 좌초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현실이라는 것은 죽은 자는 결코 되살려 낼 수 없다는 단순하고 자명한 사실에 기초한다. 그러한 현실 인식은 한 번 무너져 버린 삶은 원상태로 복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준다. 삶의 고통을 애써 무마하려는 우리의 모든 몸부림은 삶에 대한 고통, 회의, 비관을 덮어버리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이 의식적인 실천으로 옮겨간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심은 기현의 등장을 통해 증폭된다. 기현은 이 영화 전체를 비관적인 색채로 물들이는 탁한 염료와 같은 인물이다. 성철은 우연히 기현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지르던 것을 본 이후에 그를 찾아간다. 아들이 죽어가면서 살린 아이, 그런 기현을 바라보는 성철의 내면이 어떠할지에 대해 영화는 직접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기현의 심리도 섣불리 묘사하려 들지 않는다. 단계적으로 영화는 찰나의 희망과 그것을 짓밟아버리는 양심적 고백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순서대로 보자면 희망이 먼저 온다. 성철은 기현을 자신의 가게에 수습생으로 들인다. 이 과정에서 성철과 기현은 사장과 수습생 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관계는 형제애, 동료애, 가족애, 부성애와 같은 휴머니즘적인 코드를 품을 수 있을 정도로 깊어진다. 마찬가지로 미숙과 기현 또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마침내 성철, 미숙, 기현은 유사 가족을 형성한다. 이 세 사람이 모두 은찬이라는 인물의 부재로 괴로워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임시로 만들어낸 유사 가족은 희망과 고통이 교차해가면서 만들어낸 하나의 직물과 같다. 이 영화의 전반부가 비극을 희망으로 상쇄시키는 것이라면 이 영화의 후반부는 그 희망에 철퇴를 놓는 것이다. 희망은 찰나적이고 비극은 지속적인 탓에 잠시나마 스쳐 지나가는 희망은 다시금 비극으로 추락한다. 비극이 지속되면서 누적된 힘들이 일시적으로 솟아나는 희망을 쉬이 제압할 수 있었던 탓이리라. 또한, 이 영화는 은찬의 사고가 일어나던 그 시간을 봉인해 놓은 다음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 따라서 과거를 서서히 드러내는 서사적 전략을 택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희망이 자랄 수 있는 적합한 조건이 아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기현의 입을 통해 은찬에 관한 은폐된 진실이 밝혀지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이 벌어진다. 기현은 자신의 작은 주먹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내리치듯이 자책하고, 성철과 미숙은 그런 기현을 바라보면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른다. 기현의 양심 고백은 한때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을 거짓으로 만들고, 이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 세운다. 그 결과 현실의 모든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지반은 완벽하게 붕괴된다. 지반에 금이 간 상태로 시작해 끝끝내 그것이 붕괴되는 세계. 그 폐허의 자리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안정적인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 기현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죄와 벌에 관한 이야기, 성철과 미숙이 자식을 잃은 아픔을 감내하지 못하고 고통의 수렁에 빠지는 이야기, 그리고 이웃과 조물주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죄와 벌, 상실의 아픔, 붕괴된 세계를 압축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이 죽었고 여러 사람이 살아남았다. 누군가는 망자의 부재에 따른 상실감에 고통스러워하고 다른 누군가는 망자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영화는 모든 사람이 고통 받는 세계 속에서 고통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또한, 그러한 지옥과 같은 곳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를 보인다. 대신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에도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성철, 미숙, 기현이 필사적으로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면서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즉 자신들이 여전히 현실을 감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 모습은 흡사 멸망해가는 세계 속에서도 삶의 의지는 남아 있다는 강력한 증거와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금 살아남았다는 것을 웅변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