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에게
- 감독
- 와드 알-카팁, 에드워드 와츠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함자 알-카테아브, 사마 알-카테아브, 와드 알-카팁
올해는 13편을 골랐다. 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영화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빈 폴 , 사마에게 인데, 이들은 모두 작년 영화라고 한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빼면 내 리스트는 허망해질 것이고, 사마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금 러시아에서 공장생산되는 것처럼 쏟아져 나오는 회고조의 제2차 세계대전 영화들이 걱정되는 관객들은 빈 폴이 이 상황에서 얼마나 강력한 치료제인지 알 것이다.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을 보자. 남매의 여름밤 은 벌새 의 뒤를 잇는 올해의 한국 영화이다. 하지만 극장 바깥을 보면 난폭하고 정신없고, 충무로 내부에서는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보건교사 안은영 이 질주하고 있다. 인비저블 맨 은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한 할리우드의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지, 이를 벗어나면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레디 오어 낫 은 호러 영화가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다고 해서 뻔뻔스러운 장르적 즐거움을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보여준다. 소년시절의 너 는 동아시아 교육 시스템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공감과 공포를 모두 느낄 수밖에 없는 폭탄 같은 멜로드라마다. 월드 오브 투모로우 에피소드 3: 앱센트 데스티네이션스 오브 데이비드 프라임 을 만들면서 돈 허츠펠트는 21세기의 가장 훌륭한 SF 삼부작 영화를 완성했다. 작은 아씨들 을 빼먹고 오래된 고전의 새로운 재해석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 딕 존슨 이즈 데드 에서 영화 만들기의 작업은 감독의 가족사와 아름답고 유쾌한 조화를 이룬다. 퀸스 갬빗 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이전엔 아카데미를 노리고 만들어졌던 훌륭한 드라마들이 넷플릭스로 옮겨가고 있는 것 같다. 반쪽의 이야기 를 해보자. 이 작품은 올해 본 영화들 중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 될 텐데, 그건 내 어린 시절 덕질과 관련있다. 어렸을 때 나는 요새 중고등학생들이 아이돌을 파듯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팠다. 실존 인물을 판 게 아니라 에드몽 로스탕이 자신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서 재창조한 코쟁이 시인을 판 것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길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건 좀 무의미한 일이다. 어린 시절은 아무 것에나 심장이 찔리기 마련이고 그 상흔은 꽤 오래간다. 그냥 그랬다고 할 수밖에. 반쪽의 이야기는 내가 본 시라노 각색물과 파생물 중 최고다. 그리고 나는 꽤 많은 작품들을 보았다. 장 폴 라프노가 감독하고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나오는 시라노 는 많이들 결정판으로 여기고 있지만 둔중하고 맥빠진 영화라 영 별로다. 호세 페러가 아카데미 상을 받은 마이클 고든의 할리우드 영화는 그보다 낫지만 좀 녹화된 연극 같다. 프레드 셰피시가 감독하고 스티브 마틴이 코쟁이 소방서장으로 나오는 록산느 가 오히려 괜찮다. 마이클 레만의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 은 성별을 뒤집은 사랑스러운 영화이다. 시라노 연애조작단 은 잘 만든 로맨틱 코미디지만 편지 대필이라는 설정만 남고 캐릭터가 빠져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오페라, 뮤지컬, 텔레비전 드라마, 라디오 각색물들이 있고 이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멈추기로 하자. 훌륭한 시라노 영화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약만 읽으면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구식 설정을 영화의 현대적인 설정 속에서 이치에 맞아 보일 수 있도록 개조하고 그 안에서 세 주인공들을 바보스럽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시라노를 만들어야 한다. 원작은 큰 문제가 없다. 원작이 나왔을 무렵에도 과거였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무대극, 심지어 대사 대부분이 시인 운문극을 보면서 설정의 사실성을 따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새 시리노 이야기의 배경이 21세기 미국 고등학교라면 사정이 다르다. 사실 반쪽의 이야기에서도 시라노의 설정은 아주 잘 맞지 않는다. 일단 지금은 아무도 종이 편지를 쓰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이건 영화가 대사를 통해 직접 언급하고 넘어가는 내용이다. 하지만 21세기의 변화한 사회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설득력 있는 시라노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의 새 시라노는 편지를 대신 쓰기도 하지만 모바일 문자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 시라노를 만들어야 한다. 로스탕의 시라노는 코가 지나치게 컸다. (실존 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우린 외모지상주의 사회를 살고 있으니 외모의 핸디캡은 여전히 먹힌다. 하지만 원작이 백년 넘게 써온 소재 안에서 경쟁하기는 쉽지 않다. 반쪽의 이야기가 택한 것은 인종과 성별이다. 이 영화의 시라노는 중국계 동성애자 여성이다. 조금 뒤에 역시 넷플릭스에서 풀린 블라이 저택의 유령과 비교할 만 하다. 모두가 아는 고전 이야기의 주인공을 현대 또는 가까운 과거로 데려와 새로운 핸드캡을 주기 위해 퀴어 설정이 도입된 것이다. 단지 여기서 ‘선택’이라는 단어는 잘못 쓰였다. 이 영화를 쓰고 감독한 앨리스 우는 새로운 시라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인종과 성별을 선택한 게 아니라 인종과 성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라노를 선택한 것이다. 미국에 사는 중국계 퀴어 여성인 감독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알마나 쉽게 시라노가 되는지 알고 있다. 반쪽의 이야기는 아무도 믿지 못할 어처구니 없는 설정이 자연스러울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조된 상황을 보자. 엘리 추는 사교성 없는 중국계 학생이다. 동양인은 자신과 아버지밖에 없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다. 모범생인 엘리에게 학교 미식축구 선수인 폴 먼스키가 접근해 온다. 폴은 엘리가 자기 대신 짝사랑하는 애스터 플로레스에게 편지를 써주길 바란다. 엘리는 이전부터 돈을 받고 다른 학생들의 숙제를 대신 해주고 있으니 이건 또다른 아르바이트에 불과하다: 폴이 모르는 건 엘리 역시 애스터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설정을 수정하면서 반쪽의 이야기는 원작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간다. 시라노는 자신의 아바타로 잘생긴 크리스티앙을 내세웠다. 둘은 모두 백인 남자로 그들의 차이는 당시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 않다. 시라노의 정신과 크리스티앙의 외모의 결합이라는 비유도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 엘리는 시라노처럼 ‘자신과 같은 부류지만 더 잘생긴 누군가’를 내세우지 못한다. 반쪽의 이야기는 자신 또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자판으로 ‘나’라고 칠 때 그 ‘나’가 고의적으로 실제 자신을 비껴가는 사람들.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전시하지 못하고 아바타를 빌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대신 아바타로 등장하는 건 이성애자 백인남자다. 자신이 아닌 것의 총집합. 이건 굉징히 잔인하고 날카로운 코미디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쪽의 이야기는 그런 영화가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길을 간다. 영화는 나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이 이야기에는 어리석은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글도 못쓰고 말도 못하며 생각이 단순한 폴도 어리석지는 않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의 좁은 생각 안에 갇혀 있다. 하지만 폴은 늘 자기 바깥으로 나간다. 처음엔 그냥 대필작가로 머리를 빌리려 했던 엘리와 친구가 되고 결국엔 엘리의 입장을 이해한다. 사기의 희생자로 그려지기 쉬운 록산느 역할의 애스터도 마찬가지다. 후반 설정을 잘 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엘리와 애스터의 대화에는 진짜 소울메이트를 만난 사람들의 흥분이 느껴진다. 디지털 시대가 일방적인 시라노의 편지 공격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로스탕의 시라노는 백인 남자 예술가의 자뻑 이야기다. 아무리 오랜 덕질 대상이라고 해도 그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시라노의 이야기는 비극적인 예술가자 자의로 감추고 있던 비밀이 죽음 직전에 밝혀지면서, 그 자뻑이 하늘을 찌를 때 끝이 난다. 하지만 남자 예술가의 일방적인 편지가 아닌 세 청소년의 열린 대화를 다룬 반쪽의 이야기는 더 성숙하다. 시라노와는 달리 이들에겐 미래가 열려있다. 그들은 이 소동이 끝난 뒤에도 계속 성장하면서 아직 어디로 흐를 지 알 수 없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엘리 추는 ‘나’가 자기자신인 글을 쓸 것이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 올해 많은 주목을 받았던 다큐멘터리는 시리아 내전, 그 중에서도 알레포 봉쇄작전을 아이를 둔 엄마의 시선과 극적인 스토리로 담아내며 큰 화제를 모았던 < 사마에게 >(와드 알-카테아브 , 에드워드 왓츠, 2019)와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 카불, 바람에 흔들리는 도시 >(아부자르 아미니, 2018)일 것이다. 중동의 석유와 패권을 노리는 강대국들의 복잡한 셈법과 종교적 갈등이 겹치면서 늘 혼돈과 부침을 겪고 있는 지역이지만, 특히 미국과 소련(러시아)의 대립,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득세로 혼전의 양상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시차를 두고 유사한 진행과정을 거쳐온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의 최근 상황을 다룬 두 편의 다큐멘터리가 주목을 받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카불, 바람에 흔들리는 도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아프가니스탄 출신 감독이 연출한 아프간에 대한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에서 1979년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특히 1979년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오랜 혼돈의 중동역사에서도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해로 기록된다. 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동정세와 정치적 격변의 시발점이 되는데, 당시 미국이 중동의 교두보로 삼고 있던 이란의 친미정권이 혁명으로 무너지자 중동의 패권을 노리던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시작된다. 하지만 소련에 맞선 이슬람 무장세력 ‘무자헤딘’의 전면적 항전으로 10년 동안 전쟁을 치르게 되고, 이 기간 동안 소련에 맞서는 탈레반을 비롯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미국이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가 이후 이 세력들과 적으로 만나면서 다시 맞서게 된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는 잘 알려진 사실. 당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이슬람 원리주의와 무장투쟁의 확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1996년부터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기도 했는데, 역사적으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들의 침략을 겪어온 아프가니스탄은 19세기 영국과의 전쟁에 이어 소련, 그리고 미국으로 이어지는 강대국들의 침략과 항전으로 늘 부침을 겪어왔다. <카불, 바람에 흔들리는 도시>이 보여주는 카불은 총성과 포탄으로 가득한 지옥도가 아니다. 자살폭탄의 위협이 상존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늘 가까이 있는 곳이지만 사람들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는 일상을 살아간다. 영화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우선 낡은 버스를 몰며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버스운전사 아사드. 할부로 버스를 구매한 아사드는 고장 난 버스를 수리하기 위해 낡은 부품을 구하러 다니고 여기저기 돈을 빌리는 처지. 빨리 버스운전으로 돈을 벌어 할부금을 갚아야 하는 처지지만 고장 난 버스를 수리할 제대로 된 부품을 구매할 자금이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낙천적인 성격이기도 하다. 살아오는 동안 10% 정도가 평화로운 시절이었다고 말하는 아사드에게 자살폭탄과 전쟁보다 더 위협적인 건 생활고. 하지만 적당히 비열하고 잔머리를 굴리는 아사드의 면모는 아내에게 숨겨둔 돈이 없는지 떠보고 친정으로부터 돈을 구해올 수 없는지 은근히 강요하는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히 영화의 중반, 중도금을 지불하지 못하자 버스를 돌려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일부러 버스엔진을 망가뜨렸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영화의 압권으로,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여전한 인간적인 욕망과 이해타산을 잘 보여주는 인간미 넘치는 장면이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카불을 떠나야 하는 아버지로부터 가장의 역할을 떠안게 되는 소년 아프신과 동생. 일상이 된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소년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2018년 화제를 모았던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와 공유하는 정서가 있다. <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시몬 레렝 빌몽, 2017)는 2014년 크림반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이 촉발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 성향의 분리주의자들이 벌인 내전의 주전장이 되었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총성과 폭발음 속에서 살아가는 소년들의 일상과 공포를 다룬 영화. 공간은 다르지만 소년들이 감내해야 하는 일상의 공포와 척박한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절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지 말 것’과 ‘꼭 나무에 물을 줄 것’을 당부하고 떠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아프신은 동생과 놀아주고 아버지를 대신해 사회봉사에 참여하고, 어머니를 대신해 시장에 나가 설탕을 사오곤 한다. 그래서 클로즈업으로 담아내는 어린 아프신 형제의 꿈과 공포에 대한 독백은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영화의 마지막. 자연의 순환을 따라, 겨울이 다가오고 내린 눈은 카불을 뒤덮는다. 결국 버스를 고치지 못한 아사드는 버스 안내원이 되었고, 아프신과 동생은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운다. 그렇게 또 한 계절이 지나가고 그들은 여전히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영화는 늘 존재하는 자살폭탄과 위험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인 장면을 전혀 담아내지 않는다. 다만 2016년 발생한 ‘데 마장 광장 자살테러사건’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무덤과 그들에 대한 친구들과 가족들의 기억이 간간히 언급될 뿐이다. 최근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 아프간 내부의 상황을 2015년부터 카메라에 담던 감독은 2016년 ‘데 마장 광장 자살테러사건’을 목격한 후, 폭력적인 장면을 영화에 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중국계로 네덜란드에서 활동중인 프로듀서 지아 자오와 팀을 이루며 제작초반단계부터 주목을 받았던 프로젝트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로부터 제작 초반단계에서 지원을 받았고 이후 유럽에서도 상당한 관심과 제작지원을 받으며 완성되었다. 2018년 11월 2018년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으로 공개되었다.
시리아는 우리에게 낯선 나라다. 내전 중이고 폭격으로 도심이 폐허가 됐으며 일부 지역은 IS가 장악했다는 정도가 흔히 알고 있는 정보의 대부분이다. CNN이나 BBC의 국제 뉴스가 매주 전하는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그걸 보는 시청자는 가끔 이런 안도를 한다. 저런 지옥 같은 곳에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야, 라고.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팔레스타인 등 전쟁과 테러로 안전한 일상이 불가능한 곳들이 있고 대부분 방송 카메라는 그곳의 참상을 전하느라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오늘은 어디에서 테러가 났고 어제는 폭격으로 수 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들. 가해자를 비난하는 국제사회의 입장을 전하기도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는 일은 별로 없다. 정해진 질문과 답변만을 맴돌고 그 이상을 알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연히 이런 질문들은 설 자리가 없다. 저런 곳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을 느끼는가? 그들은 왜 이곳을 떠나지 않고 지키려 했는가? 죽음 앞에서도 그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 < 사마에게 >(와드 알-카테아브, 에드워드 왓츠, 2019)라는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한번도 떠올려보지 않았을 생각들이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이다. 시작엔 아랍의 봄이 있었다. 사람들이 연일 시위를 벌이고 규탄을 하면서 권위주의 정권을 무너트리고자 했다. 시리아에서도 그랬다.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대학생 와드는 시리아에서 민주주의의 희망이 싹트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와드의 할아버지가 10살 때 대통령을 하던 그 사람이 아직도 대통령이니, 사람들이 들고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2011년 시리아, 1980년 광주가 그랬듯 정권은 잔인하게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진압했다. 많은 사람들이 학살 당했고 민주화 세력이 차지한 북부 도시 알레포는 포위된 채 폭격을 맞았다. 와드는 이곳에 남아서 시리아 민주주의를 지키는 사람들을 찍었다. 대학 시절부터 친구였던 의사 함자도 그중 하나다. 함자의 아내는 알레포를 떠났지만 함자는 이곳에 남아 환자를 돌봤다. 폭격은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사지가 찢긴 희생자를 만들어냈고, 턱없이 부족한 의료장비를 갖고도 그는 최선을 다해 부상자를 살렸다. 그러면서 함자는 와드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한다. 연일 계속되는 폭격과 무너지는 건물 속에서 그들은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사마. <사마에게>는 어머니 와드가 갓 태어난 딸인 사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의 형식에 맞춘 제목이다. 어머니는 딸에게 5년 동안 시리아의 도시 알레포에서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일들을 들려준다. 전쟁의 참상을 다룬 영화들은 많지만 <사마에게>의 관점은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군인들의 시점이 아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지금 외신이 전하듯 시리아 내전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가해자의 시점이나 가해자와 피해자를 중재하는 객관적 시점이 없고 액션과 리액션의 균형이 없다. 중립적인 자세를 취할 어떤 이유도 의지도 없이 그들은 일방적인 공격을 당하는 사람들, 그렇지만 그 속에서 버티려는 사람들을 찍는다. 그들은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언제 어디서 터질 지 모르는 폭탄의 공포에 휩싸인다. 폭탄이 터지는 굉음은 방송국 뉴스화면에서 보여주는 것과 달리 바로 옆에서 예고도 없이 터져 나온다. 이라크 전쟁을 중계하는 화면이 번쩍이는 불빛만으로 표현하던 그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린 소년들은 자다가 집과 부모를 잃고 숨을 멈춘 동생을 업고 병원으로 달려온다. 얼굴에 하얗게 흙먼지를 뒤집어 쓴 아이들은 겁에 질려 말문을 잃고 의사도 그냥 죽은 어린이를 시트로 감싸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어떤 어머니는 죽은 아이를 안고 나오면서 반쯤 넋이 나가 아무도 아이에게 손을 못 대게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공습이 이뤄지고 병원은 사방에 피를 흘리는 환자들로 아비규환이다. 정부군은 병원 마저 폭격의 타겟으로 삼는다. 알레포 동부의 9개 병원 가운데 8개가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함자는 정부군이 모르는 위치에 임시 병원을 차린다. 그들은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 애를 쓸 뿐이다. 잊을 수 없는 한 장면. 폭격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한 여자가 병원에 실려온다. 배 속엔 아이가 있고 여자는 의식이 없다. 의사들은 여자와 아이를 살리려 한다. 그대로 두면 아이가 함께 위험한 상황, 의사들은 아이를 꺼내 인공호흡을 한다. 숨을 쉬지 않는 아이, 저 아이는 과연 죽은 걸까? 함께 숨을 죽이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본다. 그리고 아이의 울음이 터져 나온다. 이것은 극적 재미를 위해 조작된 장면이 아니기에 진짜 기적을 목격한 느낌이 든다. 시리아 내전의 참상을 다룬 영화야 <사마에게> 외에도 많겠지만 이런 기적을 담은 영화는 또 없을 것이다. <사마에게>는 TV 뉴스에서 볼 수 없던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지만 고발 자체가 목적인 영화가 아니다. 딸에게 쓰는 어머니의 편지라는 형식은 이 영화에 시적인 아름다움을 더한다. 천진난만한 사마의 얼굴 자체가 이 잔인무도한 전쟁과 완벽한 대비를 이룬다. 어머니는 갓난 딸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의 얼굴을 찍는다. 아무 의식이 없을 아이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말에 반응하며 천사의 미소를 짓는다. 와드는 사마를 낳기까지 함자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도 고백한다. 어린 아이를 수술하는 모습을 보며 울고 있던 와드에게 의사 함자는 “울지 말고 당장 수술실에서 나가라”고 야단을 쳤고 수술이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 당신을 사랑해, 나와 결혼해줘”라고. 그들은 새 집을 구하고 아이와 함께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현실은 잔인했지만 그 속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는 더 깊어갔다. 와드의 친구인 어느 부부의 이야기도 그런 면에서 인상 깊다. 포위로 인해 더 이상 채소나 과일을 구할 수 없던 어느 날, 남편은 아내에게 감 하나를 선물한다. 세상 어떤 보석보다 값진 물건을 받은 듯한 아내의 표정은 이 영화가 담으려는 또다른 면모를 엿보게 한다. 일상이 무너진 곳에서 사소한 일상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가 드러난다. 와드는 인터뷰를 통해 폭격으로 친구 한 명이 죽은 뒤에 이 모든 일의 기록을 남기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어제까지 함께 웃고 즐기던 친구가 죽자 그전에 그 친구를 찍은 장면을 다시 보게 됐고 영상을 촬영해 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5년간 찍은 수 많은 장면들을 와드는 알레포를 탈출한 뒤 공동감독 에드워드 왓츠와 함께 고르고 편집해 영화로 만들었다. <사마에게>의 엔딩은 알레포를 탈출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함자는 외신 인터뷰에 등장해 얼굴이 알려진 인물이기에 정부군의 검문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알레포를 떠난다. 칸영화제 특별상영작으로 이 영화를 본 날, 와드와 함자 부부와 딸 사마까지 모두가 칸의 상영관을 방문했다. 관객 모두가 일어나서 그들의 생환을 축하하는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보며 나는 페이스북에 “2018년에 < 가버나움 >이 있었다면 2019년엔 <사마에게>가 있다”고 썼다. 물론 두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는 전혀 다르지만 그만큼 화제가 될 영화라는 뜻이다. 미국의 SXSW영화제에서 관객상과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영화인데 칸영화제에서 특별상영을 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했는데 과연 그럴만한 영화였다. <사마에게>는 그 뒤로도 수많은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2019년의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지옥과 같은 시리아의 폐허 속에서 이렇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나리라 예상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P.S. 올해 북유럽과 동유럽 담당 프로그래머를 하면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한 작품들 가운데 < 빈폴 > < 아이들을 주의하라 > < 성체축일 > < 올렉 > 등을 사사로운 리스트에 올렸다. 리스트에 있으나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영화로 < 아이- 다큐멘터리 오브 더 저널리스트 >가 있는데 최근 도쿄국제영화제 저패니스 스플래쉬 섹션의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심은경이 주연을 맡은 영화 < 신문기자 >의 실제 주인공인 모츠즈키 이소코 기자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현재 일본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일목요연하게 꿰뚫는 영화다. 아베와 극우정권이 지배하는 일본이 지금 얼마나 암담한지 한눈에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