事由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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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에 기반한 외교 정책은 부재했고 식민지배의 역사적 책임은 온전히 제기되지도 못한 채 ‘경제난 해결’이라는 미명으로 ‘경제협력자금’ 3억 달러에 협상은 서둘러 종결되었다.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태평양 냉전 질서 아래서 종용된 화해였고 굴복이었다. 그 결과 국민적 반발은 극에 달했고, 1964년 4월에는 박정희 정권을 탄생시킨 ‘민족적 민주주의’가 기만적인 구호였음을 폭로하는 ‘화형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6.3 학생운동으로 확대된 시민적 저항은 결국 위수령과 계엄령이 발동되면서 진압되었는데, 협정이 체결된 7차 한일회담은 그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열린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한일협정은 ‘굴욕외교’, ‘구걸협상’으로 표상되었다. 식민지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이 가질법한 분노와 울분이 투영된 현실인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신(新) 식민지적 종속 관계를 예기하는 모종의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지점은 일본에 대한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정서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잉여, 혹은 복합적이고 양가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식적인 민족 서사의 문법과 달리 대중문화를 매개로 사적영역에서 작동하는 일본에 대한 정서는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식민지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의 근본적인 비극은 헤게모니를 지닌 식민국의 문화적 감성을 향수(享受/鄕愁)하게 된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장은 이러한 대중의 부인된(disavowed) 욕망을 기민하게 포착해냈다. 거리의 가판대를 메운 ‘왜색잡지’와 다방에서 들려오는 일본 대중가요는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일본을 우선 알고 거기에 대처할 민족적 주체성 확립해야 한다”는 논리는 “노도처럼 밀려들어와 우리의 말초신경을 간지럽히는” 1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금기와 선망이 착종된 양가감정의 표현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영화계에서는 한일친선과 문화교류 문제가 적극적으로 논의된다. 물론, 일본영화 수입과 한일 합작영화에 기대를 거는 측은 외국영화 수입업자들이었다. 방화제작자들은 일본과의 합작영화는 미끼일 뿐이며, 이를 통해 일본 자본이 국내 영화제작계에 유입되면 한국영화는 일본의 영화산업에 종속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정책당국의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국민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민족주의 정서에 기대어 일본대중문화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1965년에 내려진 <동백 아가씨> 방송금지 조치는 단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수입업자의 입장에서는 일본영화 수입이 개방되면 그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이 분명했기에 자신들의 뜻을 인적교류에서부터 단계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했다. <잊지 못할 모정(Typhon sur Nagasaki, 1957)>를 수입 배급했던 세기상사는 누구보다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행위 주체였다. ‘한국영화’ 최초로 일본배우가 캐스팅되어 논란이 되었던 <총독의 딸>(1965)은 세기상사가 제작한 영화로 제작단계에서부터 공보부와 마찰을 빚었다. 세기상사는 공보부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촬영을 진행했고, 결국 영화는 상영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있다고 하여 정책당국이 일본문화를 전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었다. 일본과의 수교를 맺은 박정희 정부로서는 자유아시아의 우방이자 이웃으로서 일본과의 친선과 우호를 강조해야 했기에 한편으로는 교류의 방식과 정도를 제시해야 했다 2 . 이와 같이 일관된 원칙이 작동될 수 없는 틈으로 일본영화계와의 교류를 시도하려는 기획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는데, 제작의 측면에서는 일본과의 인적 교류와 로케이션 촬영을 확대해나갔다면, 외화수입의 측면에서는 일본인 배우가 출연한 서구 영화를 수입 상영함으로써 일본을 금지하는 제도적 기준을 완화시키려 노력했다. 일본영화에 대한 문화적 금기의 핵심은 배우였다. “제작신고에는 일본에서 필요한 장면만 찍겠다”고 로케이션 촬영 승인을 받은 뒤 현지에서 일본 배우를 출연시킴에 따라 촬영중지를 통보 받은 <고안>(최무룡, 1966) 3 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의 공보부의 입장은 “로케와 일본인의 기술지도는 무방하나 일본배우의 출연은 아직 허가할 수 없다” 4 는 것이었다. 일본 배우의 출연은 외국영화를 수입하는 데도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1965년 MGM에서 제작한 <8월15야(夜)의 찻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1956)>의 경우,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 출연하여 국제적인 인지를 얻은 교 마치코(京マチ子)를 비롯하여 다수의 일본 배우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수입추천을 승인 받지 못했다. 이후 세기상사는 진정서를 제출하며 지속적인 민원을 통해 수입 및 상영 허가를 취득하게 된다. <잊지 못할 모정>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경우인데, 심의 서류에는 세기상사가 자신들의 기획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일수교의 논리와 검열행정의 내적인 일관성 그리고 상영보류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거론하여 행정당국을 압박하는 정황들이 담겨 있다. 사실, 이브 샴피(Yves Ciampi)가 연출한 <잊지 못할 모정>은 1957년에 제작된 영화로 나가사키의 조선소에서 일하는 선박 기사 말샤크(Jean Marais)와 노리코(기시 게이코, 岸 惠子)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어 왜색시비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세기상사는 1964년 9월 영화를 수입한 뒤 1966년에 상영 허가 신청을 접수한다. 1966년 시점에서 외화 수입과 상영 과정은 크게 1. 외국영화 수입추천허가 절차, 2. 상영허가 승인 절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하에서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 중인 <잊지 못할 모정>의 심의 서류를 중심으로 수입과 상영 과정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1. 외국영화수입추천허가 1962년 1월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영화업자는 외국영화를 수입‧상영하기 위해서 공보부에 ‘외국영화 수입추천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뒤 승인을 얻어야 했다. 영화 시장에서 외국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았고, 이들 영화가 야기하는 사상과 풍속의 문제 또한 컸기에 영화검열 행정에서 외화수입을 통제, 관리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1956년 문교부에서 영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우수영화 포상제도로 외국영화수입 쿼터를 배정하면서 정부는 보다 효율적으로 외화 관리를 할 수 있었는데, 5.16 이후 검열권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추천허가절차’가 신설되었다 5 . 이는 수입된 외화가 상영되지 못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는 의미가 있으나 수입업자들은 사전검열의 형태로 ‘수입추천허가’를 받아야 했다 6 . 수입추천을 받기 위해 영화수업업체는 영화 제명 및 원제, 제작주체, 필름종별 및 규격, 권수, 판권대금과 같은 영화에 대한 제반 정보를 담은 ‘허가신청서’를 비롯하여, 영화의 원문 대본 1통과 국문 대본 3통, 그리고 수입면장 및 기타 요청 서류들을 구비하여 공보부에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정적 절차가 제한과 통제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국영화 수입과정은 외환관리법을 비롯하여 통관절차에 따른 관계 법령을 준수해야 했기에, 공보부는 상공부, 서울세관, 외환은행과 긴밀히 협력하며 통상에 필요한 절차를 일원화하여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검열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근본적으로 통치 합리성을 제고하려는 국가 이성의 산물인 만큼, 개별 텍스트에 대한 검열과정은 일반 행정업무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수입추천단계와 관련된 서류들은 아래와 같다. 1) 외국영화 수입추천 허가신청서 제출(1964.9.10.) <잊지 못할 모정> 수입추천 허가신청서 영화 <잊지 못할 모정>의 수입사인 세기상사는 1964년 9월 10일 공보부에게 영화수입추천 허가를 위한 신청서를 제출한다. 신청인은 한국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 유성엽이며,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1964.9.14.)하여 공보부의 승인을 받았다.(1964,9.15.) 신청서에는 영화의 제작 정보만이 아니라 종별(천연색, 와이드스크린)과 규격(35mm, 12권, 3편) 및 판권대금(US $4,000)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영화필름과 원문 대본 1통(번역문 포함), 국문 대본 3통 그리고 수입면장 및 기타자료를 첨부했음을 알 수 있다. 기타자료에는 리버티상사와 체결한 계약서 사본과 영문으로 된 전신(cable), 그리고 외화수입쿼터 배정서와 각서가 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전신을 통해서는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는데, 한국에서 통용되는 라이센스 기한은 10년이며 신용장 개설 은행 정보를 비롯한 결제 기한(1964.9.30.)이 명시되어 있다. 공보부에서 외환은행 기관장에게 보낸 배정서에는 외화수입권을 배정받은 대한영화주식회사의 외화수입업무를 세기상사가 대행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잊지 못할 모정> 수입 추천 신청 단계에서 세기상사가 제출한 각서 수입추천 단계에서 눈에 띄는 것이 각서인데, 총 두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세기상사 대표이사 이기동의 이름으로 공보부에 보내는 것으로서, 각서에는 “영화의 왜색 및 감독의 사상관계나 기타 귀부의 심사 기준에 저촉되는 경우에는 하시든지”(언제든지) 공보부의 지시대로 따르겠다 내용을 담고 있다. 수기로 작성된 다른 종류의 각서는 모두 2통인데, 모두 한국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작성된 것으로서, “필름이 도착 즉시 실사고사를 받을 것”이며 “고사규정에 저촉되거나 상영이 불허가 되는 경우에는” “신용장 개설을 비롯한 제반 책임을 본인이 부담”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후 상영 허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참조해볼 때, 책임을 소재를 정하는 각서가 강력한 구속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기타자료에는 수기로 작성한 영화 해설과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다. 동일한 양식의 서류가 3부인 점을 미루어보아, 외화수입 절차를 담당하는 주무부처인 상공부와 서울세관 그리고 외환은행에게 각각 보낸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담은 해설인데,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악의 결산>으로 발란서의 제일선 감독으로 각광을 받은 바 있는 “이브 샴피” 감독이 처음으로 시도한 동양색체가 짙은 감명 깊은 명화 이다. 이 영화제작을 위해 제작기간 2년, 구상에 3년, 광대한 오픈 세트 등 영화사상 공전의 스케일의 획기적 거작이다. 특기할 것은 일본 나가사키시를 방불케 하는 광대한 오픈세트를 건조했다는 사실이다. 출연인 너무나 유명한 불란서의 일급 배우 “장 마레-”와 상대역인 세기의 미녀 “다니엘 다류-”, 조연엔 일본의 인기 여우 “기시 게이코”가 각각 출연하여 초연을 보여주고 있다. (강조는 인용자) 영화가 일본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일본인 여성과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에서 드러나는 ‘일본색체’는 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입사는 이를 “동양색체”로 설명하고 있는데,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나가사키’도 사실 “일본 나가사키를 방불케 하는 광대한 오픈 세트”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 영화가 프랑스 감독과 배우가 주축을 이룬 작품임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수입대행사인 세기상사는 서류심사만으로 수입 추천을 승인해야 하는 행정절차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영화 <잊지 못할 모정> 수입추천 통지 본 영화는 불란서 파테시네마 델라필름사가 1956년도 제작한 작품으로서 선박소에 근무하는 우수한 청년 기사 말사크는 친구의 소개로 '노리'라는 처녀를 알게 되어 사랑하는 중 우연히 그의 옛 애인 후란스와즈가 나타나 고민하게 된다. 말사크는 후란스와즈를 잊기 위해 출장을 떠난다. 돌아오는 날 밤, 나가사끼엔 심한 태풍이 불어 ‘노리’를 염려하며 그녀를 찾았으나 건물에 깔려 이미 숨을 거두고 이러한 사실을 본 후란스와즈는 그를 단념하고 나가사끼를 떠난다는 내용. (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영화사에서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공보부에서는 유관 부처로 협조 공문을 보내는데, 참고 항목으로 부기된 내용에서는 영화에서 기시 게이코가 분한 노리코의 이름이 ‘노리’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세기상사가 제출한 자료에 근거한 것인데, ‘노리코’의 이름을 ‘노리’로 명명함으로써 왜색 시비를 비켜가고자 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관계기관에 수입추천 서류를 발송한 다음날인 1964년 10월 2일, 공보부에서는 한국영화주식회사 유성엽 앞으로 ‘외국영화 수입추천’ 건에 대해 관계 기관에서 추천을 하였다는 공문을 보낸다. 본편에 대한 수입추천 허가승인 절차가 완료된 후, 1964년 12월 11일 대한영화사는 예고편 통관을 위한 품의서를 공보부에 제출한다. 예고편은 총 10권으로 한 편당 1권임을 감안해볼 때, 10편의 예고편이 들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보부는 12월 22일자로 서울세관에 협조공문을 제출하면서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수입추천 허가절차가 마무리된다. 2. 상영허가 승인 절차 1966년 1월 6일, 세기영화사는 수입한 영화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한다. 영화가 수입된 절차가 완료된 시기가 1964년 12월 22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영화가 수입된 지 1년이 지난 시점까지 상영허가는 신청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추론컨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일협정을 둘러싼 시민적 저항이 극에 달했기에 상황의 변화를 지켜봤던 것이라 생각된다. 아니면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정 체결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 일본영화 수입개방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가늠해보고자 논란이 될 만한 영화를 수입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영화 수입을 주도한 것은 한국영화주식회사라기보다 세기상사라 할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세기상사는 12월 9일자로 외국영화 수입추천 명의변경 신청서를 양도증 사본과 함께 공보부에 제출한다. 이로써 세기상사는 수입대행업무가 아닌 영화를 수입, 배급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상영허가를 둘러싸고 공보부와 세기상사는 마찰을 빚게 된다. 공보부의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민족주의 정서가 반정부적인 방향으로 표출되는 데 대한 부담감으로 영화 상영을 보류할 필요성이 있었다. 반면 세기상사의 입장에서는 공보부의 수입추천허가에 의해 수입된 영화를 공보부가 상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절차의 합리성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했다. 다음은 4차에 걸친 상영허가 신청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다. 1) 제1차 시도 (1)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서 제출(1966.1.6.) 1966년 1월 6일 세기상사는 공보부에 <잊지 못할 모정>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해당 서류에는 수입신청허가 시와 동일하게 영화에 대한 제반 정보와 영화필름, 대본 및 별첨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시세완납증명서를 비롯하여 필름 입고증, 문화영화수속필증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는 1966년 12월 2차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지기 이전 시점이어서 62년 영화법의 시행령을 따르는데, 문화영화수속필증은 일반 극영화 상영 시 문화영화의 의무상영 조항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점은 <고래>라는 제명의 문화영화의 제작사가 세기상사주식회사라는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문화영화는 정부가 제공하는 공보영화 차원을 넘어 계몽성을 핵심적인 속성으로 갖춘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아우르는 역사적 개념인데, 문화영화의 의무상영이 제도화되면서 문화영화를 제작하는 민간회사가 생겨나기도 했다 7 . (2) 외국영화 상영허가 보류(1966.1.11.) <잊지 못할 모정> 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보류 통보 서류 발신: 공보부 장관 수신: 세기상사주식회사 우기동 제목: 외국영화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보류통보 위하가 66.1.10자로 제출한 외국영화 <잊지 못할 모정>의 상영허가 신청은 동 영화를 심사 결과 당부 방침에 의하여 상영허가가 보류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끝. 부내 참고: 본 영화는 왜색이 농후한 영화임 . 세기상사는 상영허가 신청 당시 연소자 관람 신청서도 함께 제출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수입 추천까지 받은 영화가 상영보류 통보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3) 중앙정보부에서의 재심의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의견 통보 검열서류에는 없지만, 1월 11일자로 상영보류를 통보받은 세기영화사는 재심을 청구한 것으로 보인다. 위 서류에서 알 수 있듯이, 1966년 1월 29일 중앙정보부에서는 “65년 1월 12일(66년의 오기)”자로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해 재심을 진행하였다. 중앙정보부가 심의에 참여하여 의견서를 보내는 경우는 일반적인 절차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즉, 공보부가 당시의 정세를 고려하여 정무적인 판단을 내림에 있어 중앙정보부의 의견을 요청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4) 외국영화 상영보류 최종 통보(1966.3.28.) 중앙정보부는 해당 영화가 “보안상 지장이 없음으로 공보부 장관이 적의 판단 조치”할 것을 주문하는데, 공보부에서는 1966년 3월 28일자로 세기상사에게 다시 한 번 상영보류 통보를 내린다. 이유는 1차와 동일하다. 2) 제2차 시도 (1) 진정서 제출(1966.3.29.) <잊지 못할 모정> 수입 관련 세기상사가 공보부 장관에게 보낸 진정서 첫 페이지 진정서 수신: 공보부장관 귀하/ 제목: 진정서 귀부의 1966년 3월 28일 자 공보영 1733.2~2959에 의한 외국영화 상영허가신청에 대한 불허가 통보는 감사히 복송하였읍니다. 취송(就悚) 본건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귀부의 정책상 이유로 당분간 허가할 수 없다는 통보취지에 대하여는 폐사(弊社)로서도 타의 없이 충분히 이해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폐사로서 본건 "잊지 못할 모정"에 관하여 국내상영예정하에 (1) 서기 1964년 10월 2일 자로 귀부의 수입추천을 받고 (2) 동시에 신용장을 개설하고 (3) 서기 1966년 1월 6일 자로 통관절차를 필하여 서기 1966년 1월 10일 자로 귀부에 상영허가신청에 이르기까지 막중한 자금을 투입하여 동 필름은 완전 국내물품으로 되어 있는 즉 상영치 않으면 안 될 불가피한 고충에 직면하고 있는 실상 을 보살펴 주시고 더욱 본건과 견연(牽連)지어서 기왕 국내에서 상영한 바 있는 소위 왜색영화의 경우를 대조적인 면에서 돌이켜보시더라도 국교정상화 이전에 있어 한 때 한일 간의 격앙된 국민감정에 아무런 자극됨이 없이 (1) <흑선>, <전장과 영원히>, <8.15의 찻집>, <해병에 동경에 가다>, <벽안의 나비 부인>, <카이강의 다리>, <원한의 도곡리 철교> 등을 상영한 선례 를 상기하시와 보살펴주시고, 특히 본건 "잊지 못할 모정"의 경우는 문화교류의 성과면에서 보더라도 음악 및 미술과 문학 등이 불란서의 문화적 지반을 기조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2차 대전 당시 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일본 장기(인용자: 나가사키) 등을 배경으로 하여 본 영화를 제작함에 이른 불일 간 국민감정의 순화는 목하 한일 국교정상화가 실현된 차제에 있어 무형의 정책적 PR에 도움이 되는 좋은 하나의 선도적 동인이 됨에 족할 것이며 , 더욱 한일국교 정상화의 당면한 중요 과정에 비추어보더라도 한일 간 문화교류의 계단적인(인용자: 단계적인의 오기) 일책으로써 이상 진정들인 수단에 정황을 현찰하시와 본건 영화 "잊지 못할 모정"이 상영되도록 허가하여 주시압기 바라옵고 자이 진정서를 올리나이다. 세기상사주식회사 대표이사 우기동 (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2번에 걸친 상영보류 통보를 받은 세기상사는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공보부 장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한다. 진정의 핵심은 공보부가 고시한 행정 절차에 따라 수입추천을 받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고, 일본인이 출연하거나 참여한 영화가 상영된 선례가 이미 있고, 국교 정상화가 실현된 시점에 해당 영화가 정책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홍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진정에 대한 회신(1966.4.4.) 공보부는 1966년 3월 30일자로 제출된 진정서에 대해서 1966년 3월 28일에 통보한 바와 같이 당분간 허가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간략하게 통보한다. 세기상사가 상영불허가 판단의 불합리성을 조목조목 짚은 것과 대조적으로, 공보부에서는 별다른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당분간 허락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한 것이다. 3) 제3차 시도 (1) 외국영화 산영허가 신청 사유서(1966.8.4.) 세기상사는 공보부의 보류 통보를 일단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본 동보가 제작한 작품으로 특히 감독 및 기타 기술진영 전원이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제작된 동경 올림픽 영화가 상영허가”를 받게 되자 세기상사는 다시금 상영허가를 신청한다. 반려 이유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영화 상영허가를 보류했다면, ‘동경 올림픽 영화’ 또한 개봉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진정에 대한 회신(1966.9.12.) 공보부는 별다른 이유 없이 다시금 진정 내용에 대해 불가 통보를 한다. 다만, 달라진 점은 “당부정책 상” 허가할 수 없다는 부분을 수정하여 “당부정책이 변경될 때가지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영화 상영 허가를 보류한 것은 기관의 정책적 일관성에 의해서라기보다 당시의 정무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세기상사의 입장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4) 제4차 시도 (1)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서 두 번의 진정이 묵살되지 세기상사는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를 다시금 신청하게 된다. 서류상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류 작성일은 1966년 8월 3일이나, 이를 접수한 시점은 9월 14일이라는 사실이다. 즉, 두 번째 진정을 통해 해법을 찾으려 했던 시도가 어그러지자 행정 당국의 비일관적인 처사를 비판하는 ‘신청사유서’와 함께 상영허가 절차를 새롭게 밟음으로써 공보부를 압박하는 전략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회신(1966.10.10.) <잊지 못할 모정> 수입에 대한 방침을 밝힌 공보부 내부 메모 반복된 진정과 신청사유서를 통해 공보부의 행정적 실책을 지목함으로써 공보부는 그에 대한 해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1966년 10월 10일자로 세기상사로 통보된 상영허가 보류 판정은 이전과는 달리 그 이유가 상세히 부가되어 있다. 판정이 핵심 이유를 요약한 메모의 내용을 보면 해당 영화가 “불란서 제작이라고 하나 일본 가요(歌謠), 민속(民俗), 무용(舞踊) 등이 처음서 끝까지 강하게 나타나 일부분을 삭제(削除)할 수도 없는 영화이므로 한일 영화교류가 시작(始作)될 때까지 상영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5) 제5차 시도 1966년 12월 20일, 세기상사는 다시금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해당 서류 또한 앞서와 동일하게 8월 3일에 작성된 것이지만, 접수는 4개월 뒤인 12월 20일이 이루어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세기상사는 별도의 진정서나 사유서 없이 영화의 상영허가를 신청하는데, 공보부에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이를 승인한다. 공보부의 <잊지 못할 모정> 상영 허가 통보 서류 결국 5번째 상영허가 신청을 낸 끝에 공보부에서는 해당 영화에 대한 상영허가를 통보한다. 그러나 내부결재 문서에는 국내상영이 무방하다고 판단한 근거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해당 영화의 줄거리만을 요약해놓았다. 다만 실사 검열을 통해 화면 6개처, 녹음 9개처를 삭제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를 통해 유추해본다면 공보부가 문제 삼았던 ‘왜색시비’는 정책 당국의 입장에서는 정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영화가 프랑스에서 제작되었던 만큼 일본에 대한 서구의 이국적 취향을 충족시킬 요소들이 과도하여 왜색이 매우 짙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세기상사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 영화를 개봉하였는데, 심의 서류를 토대로 이를 재구성해 볼 때 검열 당국과 시장 주체들 사이의 권력 관계가 일방적으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민족의 자주성(4) - 영화, 음악」, 《경향신문》, 1965.12.22. 2. 이화진, 「‘65년 체제’의 시각 정치와 <총독의 딸>」, 『한국근대문학연구』 18(1), 2017, 282-283쪽. - 이 논문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65년 체제’ 아래서 일본을 특정한 방식으로 (비)가시화하는 시각장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극장에 상영된 적도 없이 영화사의 서술로부터 배제된 <총독의 딸>의 제작 과정과 심의 단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3. 서울방송국 연속극 <동경 나그네>의 영화화한 작품으로 최무룡이 제작 및 감독을 맡았으나, 결국 촬영이 무산되어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 여파로 최무룡은 김지미와 이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4. 「TBC의 〈동경 나그네〉 일본 현지 촬영 중지령」, 《중앙일보》 1966.12.03. 5. 우수영화 제작에 대한 포상으로 외국영화수입쿼터 배분과 영화법 개정에 대한 논의는 조준형, 「지배하는 국가와 교활한 시장」, 이순진, 이승희 편, 『한국영화와 민주주의』, 선인, 2011, 311-346쪽 참조. 6. 수입추천허가신청 단계에서 제한을 두는 경우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심의 서류 해제」(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를 참조할 것. 7. 1960년대 문화영화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조준형, 「문화영화의 제도화 과정: 1960~70년대 영화법과 관련 정책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지워진 한국영화사 – 문화영화의 안과 밖』, 한국영상자료원, 2014, 75~114쪽 참조.
1. 영화검열이 선택한 ‘한국’영화의 풍경 1980년 개봉한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오프닝 시퀀스는 한국영화의 분명한 변화를 감지하게 한다. 애니메이션으로 시작된 오프닝 타이틀을 지나 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차량 내부의 시점으로 높이 솟아오른 빌딩들을 보여주던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카메라는 곧 그 시선을 낮추어 빌딩들 사이, 좁고 낮은 곳에 펼쳐진 난잡한 시장을 비춘다. 이후에도 이 작품은 도시로 상경한 세 청년이 도심 속 이 비루함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일하다 엉덩이를 맞으며 괴로워하는 춘식(이영호), 골목 구석 좁은 공간에서 꾀죄죄한 모습으로 불을 피우며 연신 땀을 닦아대는 길남(김성찬), 위험한 가스통을 뒤로 하고 쪼그려 앉아 망치질을 바라보다 비명을 지르는 덕배(안성기)의 얼굴에서 멈춘 카메라는 그들이 현재 도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한국영화사에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사회(비판)적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바로 이 장면들에서 기인할 것이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나오기 전인 1970년대, 빈부격차가 극에 달한 시기였지만 한국영화에서 가난은 철저하게 가려져야 하는 것이었고 검열은 강박적으로 성장의 지표들을 영화에 등장시키도록 강요함으로써 이를 수행하고자 했다. 1970년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의 검열관들은 검열 시 법적 근거를 지닌 「영화법 시행규칙 제 9조 영화검열기준」뿐만 아니라 부수적으로 제공된 「국산영화제작권장방향」까지를 참고해야 했는데, 「국산영화제작권장방향」이 기본 방향의 첫 번째로 꼽는 것은 ‘한국의 국위를 선양하고 약진하는 한국의 발전상을 부각시킬 수 있는 내용’으로 영화를 구성하라는 것이었다. 그 세부방향으로 제안된 것은 ‘가급적 고속도로, 웅장한 공장, 새로운 주택가 등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배경으로’하며 농촌을 소재로 하더라도 ‘가급적 농업의 기계화, 새로운 농지정리 및 지하수 개발’의 적극적인 노출이었다. 고향이 변화한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애잔함과 절망이 교차하던 정씨(김진규)의 얼굴에서 갑작스레 바다 위 거대한 다리를 건너는 버스의 줌아웃으로 넘어가 마무리되는 그 유명한 <삼포 가는 길>(1975)의 기형적인 엔딩은 1970년대의 성장에 대한 강박이 영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1970년대를 지나 도달한 1980년의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오프닝은 그래서 의미를 지닌다. 무작정 상경한 세 청년이 도시에서 겪어내야 했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 <바람 불어 좋은 날>은 그만큼 상징적인 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불러일으킨 변화는 사실 이 작품에 한정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돌출된 것이었다. 1980년으로 진입하면서 영화법 자체의 개정이나 검열의 기준이 바뀐 것은 아니었으며 검열의 방식 역시 이전과 동일한 상황에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이 가난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예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서술되는 영화사와 마찬가지로 검열 역시 한 시대를 묶어 범박하게 설명되는 경향이 크지만 갑작스런 정치·사회적 전복의 순간들은 검열의 탄성(彈性)에 변화를 일으키며 흥미로운 흔적을 남긴다. 이 글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너무도 짧았던 ‘서울의 봄’과 함께 움직였던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은 검열에 있어 1980년대‘적’이라기보다 1980년대 ‘찰나의 균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 짧았던 ‘서울의 봄,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이장호 감독이 1975년 말 대마초 파동 후 재기하여 제작한 작품으로 이장호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기존 한국영화의 문제점에 대해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이장호 감독은 활동이 어려웠던 4년 동안 연극계와 문학계 등의 인사들을 만나면서 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 즉 한국영화가 현실을 그리지 못하고 정권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리얼리즘의 회복에 대해 고민했다고 이야기 한다. 1 이 시간을 보낸 이장호 감독이 1980년에 들어 착수하는 작품이 급격한 도시화와 그 안에서 황폐해지는 청년들을 다룬 최일남의 중편소설 「우리들의 넝쿨」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이었다. <바보들의 행진>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정확한 일시가 적혀 있지는 않지만, 제작신고 전 이루어졌을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의 의견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청춘물’로 분류되어 있으며 ‘底邊靑春(저변청춘)을 不條理(부조리)하게 描寫(묘사)한 것은 아니므로 크게 問題(문제)될 点(점)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별첨으로 추가된 지적사항은 문틈으로 보이는 정사 장면이나 신음소리, 인물들의 상상 속 정사 장면 등의 외설적이라 판단한 부분들에 대한 것이었다. 검열관은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도심 속 밑바닥 청춘들의 모습이 사회 비판적이지 않다고 판단, 시나리오 심의를 통과시킨 것임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제작사는 1980년 3월 27일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하고 4월 19일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제작신고가 수리, 영화는 제작에 들어간다. 영화가 완성된 후 제출된 「예고편 영화 검열신청서」와 「영화 검열신청서」에서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 작품의 예고편 심의에서도 가난에 관한 언급보다는 외설적인 부분에 치중했다는 것과 시나리오가 아닌 영화 필름의 검열이 문공부가 아닌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라는 민간심의기구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먼저 예고편의 영화검열을 위해 제출된 영화예고편 대본을 보면 안마하는 장면이나 안마하는 이를 만지는 장면 등에 삭제 표시가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대우받지 못하는 젊은이들. 그들이 이 도시에 뿌리내리려는 몸부림’, ‘사회부 기자의 눈으로 바라본 밑바닥 인생의 삶’, ‘한 판 즐겁게 놀아보자 그러나 이 놀이판에 깔려 있는 슬픔과 한을 잊지 말자’ 등의 자막에는 어떠한 제재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가난’, ‘밑바닥 인생’, ‘슬픔과 한’과 같은 정서가 걸러내야 하는 감정으로 자리했던 1970년대와 비교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우울함보다 중요한 것이 외설적인 장면의 삭제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라 할 수 있다. <바람불어 좋은 날> 영화 검열신청서 위의 서류의 좌측 하단에 찍힌 파란 도장은 1979년부터 바뀐 영화시책의 시행을 방증한다. 정부는 문공부에서 맡았던 영화검열을 1979년 4월 10일부터 민간단체인 공윤으로 이관하고, 영화관계자와 각계 인사들로 영화검열심의위원회를 구성, 이들이 영화검열을 진행토록 했는데 2 , 이러한 계획은 그해 2월 대통령 연두순시에서 정부주관 문화행사를 조금씩 민간기구로 넘길 것을 검토하겠다고 보고한 문공부의 첫 번째 실천이었다 3 . 하단의 도장은 영화검열심의 대본과 필름이 공윤 쪽으로 접수 완료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1979년 이후 이 시책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작사에게 영화검열이 늦어진다는 회신을 보내거나 영화검열의 합격을 통보하는 공문을 내리는 일 등은 문공부에서 진행, 1970년대 영화 실사 검열을 직접 진행하던 문공부가 1979년의 시책 변화 이후 제작사측에 결과를 통보하는 행정적인 일을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공윤’의 심의를 거친 <바람 불어 좋은 날>은 1980년 8월 22일 영화검열에 합격하는데 어떠한 제한사항도 없이, 그러니까 영화 실사검열에서 단 한 군데의 화면 삭제나 단축 없이 심의위원 8명의 전원 찬성으로 검열에 합격한다. 이장호는 당시의 검열 상황을 술회하면서 이러한 결과는 ‘서울의 봄’ 시기에 구성된 전향적인 심사위원 중 소설가 박완서의 강력한 주장에서 비롯되었다며 박완서가 <바람 불어 좋은 날>을 검열에 통과시키기 위해 열 시간에 걸친 회의를 하며 애를 썼다고 이야기한다 4 . 여기에서 주목해 볼 것은 민간 심의기구의 한 심사위원이 ‘가난’과 ‘밑바닥 인생’과 ‘슬픔과 한’이 담긴 이 영화의 무삭제 통과를 강력히 주장할 수 있었다는 그 자체와 그것이 수용될 수 있었던 ‘서울의 봄’ 시기에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이 정확하게 맞물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5 . 3. 다시 ‘고발성 우려’로 삭제되는 서민의 현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1980년 3월 27일 제작신고서를 제출, 약 5개월 후인 8월 22일 영화 검열 합격증을 받았다. 민간 심의기구로 심의가 이관된 지 약 1년여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 그 사이 벌어진 10.26과 12.12 직후의 혼란과 무엇보다 아직 군사정권이 공식적으로 정치에 가담하지 않았던 최규하 대통령의 짧은 재임기간에 절묘하게도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때문에 <바람 불어 좋은 날>을 예로 들어 민감 심의기구로 심의가 이관된 후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여주는 흐름을 설명한다거나 1980년대에 들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검열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정말 짧았던 ‘서울의 봄’의 훈기를 탄 예외적인 작품이었다. 물론 <바람불어 좋은 날> 이후, <어둠의 자식들>(1981),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꼬방동네 사람들>(1982)와 같이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 가난한 이들을 전면에 내세워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줄줄이 제작·개봉되었다. 이러한 작품의 등장 자체가 이전 시기와는 다른 1980년대의 분위기의 예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의 작품들이 원작과는 분명한 차이를 지니며 6 영화 자체의 분위기나 설정이 어색하고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 작품들이 의도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예상컨대 이전에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이러한 작품들의 등장은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리얼한’ 소재가 무리 없는 검열을 지나 개봉한 전례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혼란스럽게 들어선 1980년대이지만 1970년대에 비해 자유로울 것이라는 믿음이 사회적으로 넘치고 있었고,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이를 잘 보여준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의 검열과정을 살펴보면 1981년으로 들어서면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1980년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보궐선거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 남은 임기를 채우고 다시금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해 1981년 2월 25일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사회는 급격하게 경색되었고, 검열 역시 태도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 한 눈에 포착된다. <바람 불어 좋은 날>과 다르게 위의 작품들은 각종 사유서와 각서로 원작과는 다른 의도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증명해보이고 난 후에야 영화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했던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개작사유서 가령 1981년 7월 21일자로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시나리오 심의가 통과되지 않아 개작의 개작을 거듭하고 유의사항까지 통보 받은 후에야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심의 의견서의 심의의견 첫 번째에 주목해보자. 심의위원은 이 작품이 ‘1970년대 중반을 시대 배경으로 명시하기는 했으나 가난하고 절박한 서민들의 생활상과 애환이 짙게 깔려 있어 많은 사회적 문제’의 가능성을 지녔다는 점을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로 꼽고 있다. ‘1970년대 중반’이라는 설정이 현재가 아니라고는 하나 철거의 문제, 빈부의 격차 등은 ‘현재’에도 분명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노출되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제작사는 ‘원 대본에서 완전히 탈피 현 사회에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기업의 공해문제로 사회 계도성 주제 설정을 내용으로 하는 계몽영화로 개작’하여 대본과 사유서를 제출한 후에야 영화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영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심 속 철거민, 난장이의 이야기가 아닌 염전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로 바뀌어 버린다. 1981년 12월 10일자로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했던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도 사정이 다르진 않다. <꼬방동네 사람들> 극영화 제작신고에 대한 회신 「<꼬방동네 사람들> 검토의견」에는 ‘서민촌 시민생활의 직설적인 표현으로 사회질서 문란과 사회일면의 고발성 우려가 있음’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7 . ‘무허가 건물의 철거로 인해 쫓겨날 형편’을 불법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서민생활의 직설적인 표현’이 ‘고발’로 보인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이 있다 해도 감추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 작품 역시 ‘사회악적인’ 장면을 삭제하고, ‘서민층의 비관적인 삶의 묘사를 피하’며, ‘의지로 환경을 극복’, ‘가난한 판자촌의 애틋한 이야기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밝은 얼굴로 볼 수 있도록 서정적인 영상’을 활용하겠다는 개작 내용을 제출했고, 여러 번의 개작 끝에 엄격하게 실사검열을 진행하겠다, 문제가 생겼을 시 모든 책임을 제작사 측에 묻겠다와 같은 협박에 가까운 경고를 들은 후에야 영화를 제작·완성할 수 있었다. 이 영화들은 모두 1981년을 지나 제작신고서를 제출하면서 영화화를 시도한 작품들로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 진행과는 1년도 채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류들에서는 민간 심의위원들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은 찾아볼 수 없으며, 무엇보다 문공부와 내무부 등이 나서 이 작품이 품고 있을 위험성에 대해 직접적인 수정을 요구하는 장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잠시 동안 꿈꾸었던 자유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는지 이 검열서류들이 너무도 명징하게 보여준 셈이다. 이후 가난을 그리는 작품들은 1987년을 지날 때까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옥외 광고탑에서 외치던 세상을 향한 목소리가 제 멋대로 해석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1980년대의 진실에 대해 풍자했던 가난한 청년들의 영화 <칠수와 만수>가 1988년 개봉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바람 불어 좋은 날>과 여타의 영화들이 놓인 시기적 차이와 함께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4. 검열의 탄성(彈性)을 결정짓는 것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갑작스레 밝은 노래로 마무리 되지만, 이 엔딩송이 흘러나오기 전 덕배는 좁은 사각 링 안에서 긴 시간 얻어맞는다. 이 장면에 깔리는 덕배의 내레이션은 희망찬 엔딩송과는 전혀 다른 편에 서 있다. 덕배는 이야기한다. 서울에 올라와 2년을 사는 동안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줄 곧 맞아온 것처럼 생각된다고. 누가 때리는 것인지는 모른 채 2년 동안 맞아온 상경한 청년의 이야기는 그렇게 잠시 스크린에 자리할 수 있었다. 1980년대를 설명할 때의 위 작품들은 시대의 변화에 등장한 하나의 경향으로 묶여 설명되곤 한다. 리얼리즘의 회복이라 설명되는 <바람 불어 좋은 날>과 그 이후 나온 작품들은 ‘현실’을 묘사한 작품들로 동등한 층위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 만들어진 작품이었기에 영화에서 묘사하는 꾀죄죄함과 비루함에는 무수한 균열들이 도사린다. 그리고 이후 ‘서민’의 삶이 다시금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스크린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긴 시간이 지나야했다. 1. 김상민 엮음, 『박정희 시대와 한국 대중문화』, 선인, 2012, 34-48면. 2. 신문기사에 따르면 영화검열의 민간 이양은 4월 1일부터로 명시되어 있지만( 「영화검열 민간 단체에 이관」, 《경향신문》, 1979.3.9.) 당시 실제 영화검열 사무를 담당했던 공윤의 월보 『공연윤리』에서는 4월 10일자로 업무가 이관된 것으로 적고 있다(「영화의 검열 심의업무 공윤 민간 기구로 이관: 심의위원은 각계 인사 17명으로」, 『공연윤리』, 1979.4.(32호), 1면. 신문은 기사에 따라 민간이양 일자를 4월1일이나 4월 2일로 각기 다르게 적기도 하며, 실제 업무를 담당하던 공윤에서 명시한 날짜가 더욱 신빙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 영화업무의 민관이양 일자는 1979년 4월 10일로 서술하였다. 3. 「영화검열의 민간 이양」, 《경향신문》, 1979.3.24. 4. 김영진, 『이장호vs 배창호』, 한국영상자료원, 2007, 50-51면. 이 글에서 이장호는 몇 장면은 끝내 통과되지 못한 채 삭제되었다고 기억한다. 이장호는 영화에 삽입되어 있던 노래 가사가 문제가 되어 가사 부분의 사운드 트랙을 늘려 문제점을 해결했다고 이야기하는데 서류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서류와 구술이 서로 차이가 나는 경우, 그 상황은 구술자의 기억의 오류 등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서류에는 남아 있지 않는 심의위원과 창작자 간의 협상이나 검열의 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는 좀 더 다각적인 접근과 확인이 필요하다. 5. 이장호는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완성될 무렵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고, 유신정권 못지않게 억압적인 독재체제가 수립, 1980년대의 말과 상황이 달라져 있다고 술회하지만(김영진, 위의 책, 50면)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완성, 그 후 검열의 신청과 진행은 최규하의 하야(1980.8.16.) 이전이다. 이때에도 실세는 이미 군부로 넘어가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공식적으로 정권이 교체되기 이전과 그 후는 사회적 분위기면에서도, 영화 내부로 들어온다면 영화 검열 서류상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6.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은 이동철의 동명의 소설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조세희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7. 서류에 적힌 ‘직절적인’은 ‘직설적인’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