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충이가 준 약 (인형영화)
- 감독
- 조재광
- 제작년도
- 1996
- 출연
- 미상, 미상, 미상, 미상
김수용 감독은 1965년에 아동영화 < 저 하늘에도 슬픔이 >로 그해 방화 흥행 1위를 기록하고,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곧 이어 개봉한 < 갯마을 >은 평단의 호평과 함께 흥행도 성공하고, 서울시문화상을 비롯하여 여러 영화상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 전까지 코미디와 멜로를 주로 만들던 김수용은 1965년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계속해서 시도하게 된다. 일명 ‘문예영화’의 시대는 김수용과 함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당시 문예영화는 예술성이 높고 격조가 있다고 인식된 데에다 소설이나 연극으로 인지도가 높아 관객에게 호소하기가 좋은 장점이 있었다. 김수용이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준 1967년은 문예영화의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문예영화는 전체 한국영화 제작편수의 20%에 달했고, 대중에게 예술영화로 유통되었던 문예영화가 대중성도 있다는 것을 <갯마을>로 확인한 김수용은 1967년 한 해에만 10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1966년부터 우수영화를 선정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외화 쿼터를 지급하는 제도가 문예영화의 붐을 이끈 측면이 있지만, 당시 문예영화 현상에는 수익성이라는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 한해 10편이라는 한국영화 사상 신화적 기록의 시작은 1967년 1월에 개봉한 < 만선 >이다. 그런데 한해 10편이 그저 그런 작품들의 나열이 아니라는 점이 김수용 신화에서 더욱 놀라운 점이다. < 산불 >, < 빙점 >, < 안개 >, < 까치소리 >로 이어지는 스토리의 완결성에 중점을 둔 김수용 문예영화가 한 해에 만들어졌다. 김수용 영화세계에게 1965년이 전환과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1967년은 방향설정과 완숙기라고 볼 수 있다. <만선>과 <안개>는 그런 점에서 김수용 영화세계의 두 방향타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바로 농어촌 리얼리즘과 도시 모더니즘, 두 개의 방향이다. <만선>은 천승세 작가가 1964년에 발표한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자연과 대결하는 한 어민 가족의 굳건한 의지와 비극적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자연주의 연극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만선>은 어부 곰치가 장남과 막내아들에 이어 딸마저 자살해버리면서 세 자녀를 한꺼번에 잃고, 아내까지 정신이상이 되어가는 것을 마주하고 바다로 사라져 버리는 참담한 가족 비극을 각색하면서 엔딩을 바뀌었다. 영화에서는 딸 슬슬이( 남정임 분)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포문을 열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 목소리는 일련의 사건 이후 바다를 떠나지 않고 일상으로 되돌아간 심경을 전한다. 이로 인해 숙명과 도전, 집착과 벗어남이라는 큰 주제적 갈등 요소가 모호하게 정의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여러 형태의 대립 요소들을 가지고 인간사회의 상징적 축소판으로서 섬마을을 묘사한다. 박정희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끝나고 민정 2기가 시작되는 시점이 1967년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영화 내부로 가지고 와서 살펴보면, 젊음과 방황이 있는 청춘영화 유행이 서서히 저물고 다시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에 빠진 신파적 감성으로 무장한 멜로드라마들이 60년대 중후반부터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국근대화라는 떠들썩한 국가적 이벤트에서 밀려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과거로 회귀하는 보다 보수적인 양태를 취했다. 다시 말하면, 계층상승의 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박탈감이 대중문화에서 연민과 우울의 형태로 표현되는 신파적 감수성의 전면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영화는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아무리 고생해봤자 평생 빚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곰치( 김승호 분)가 다시 바다로 나갔다가 아들 도삼( 남궁원 분)을 잃어버리고, 연쇄적으로 비극을 맞이하는 곰치 가족 구성원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다.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 변기종 분)는 과거의 빚을 이유로 몫을 나눠주지 않는다. 곰치의 딸 슬슬이는 어부를 천직으로 알고 성실히 살아가는 연철( 신영균 분)과 사랑하는 사이인데, 여기에 뭍으로 나가 큰돈을 벌어 온 범쇠( 박노식 분)가 끼어든다.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곰치 아내 구포댁( 주증녀 분)은 늘 육지로 나가길 간청했지만 남편의 고집 때문에 물러섰다. 그녀는 장남이 사망하자 아직 갓난아기인 막내아들을 배에 띄워 뭍으로 보내려고 하고, 곰치는 아기를 구하려다가 바다에 빠지고 만다. 아버지와 두 형제,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어머니마저 미쳐버린 상황에서 어촌마을을 지키는 자는 슬슬이뿐이다. 하지만 가난한 어촌마을에서 이런 비극을 마주하는 이는 슬슬이만이 아닐 것이다. 이겨낼 수 없는 좌절의 연속에서도 인물들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이 있을까. 어머니의 품처럼 다시 고요해진 바다를 칭송하는 슬슬이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가득하다. 아들들이 사라진 어촌마을에 남은 어머니와 딸, 그리고 인간이 자연에 맞설 수 없음을 경고하는 무당의 모습이 프레임에 채워지는데, 일상으로 다시 복귀한 이들의 광경은 숭고함을 전하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인간과 자연의 대결, 빈부간의 갈등, 숙명을 받아들이려는 자와 이겨내려는 자의 갈등 등 묵직한 갈등들이 극단적인 사건들과 함께 펼쳐지다가 서둘러 평화로운 엔딩으로 향하는 것은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지지만, 당대의 박탈감과 절망감을 생각하자면 이해가 된다. 바다의 생명력을 자양분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 말고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사랑이 가득한 어머니에서 두 아들을 잃고 미쳐버린 여인을 연기한 주증녀는 이 영화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그리고 김수용의 또 다른 걸작인 <산불>로 청룡상 여우주연상을 한 해에 수상했다. 영화는 바다를 벗어날 수도,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던 이들의 서글픈 기록이다. 그리고 이들의 고단한 순간의 풍경은 조국 근대화라는 절체절명의 대의 아래 숨죽이고 있어야 했던 수많은 민초들에게 보내는 연민의 그림이다. >> 만선 고화질 VOD 보러가기 <<
데뷔와 함께 세 편에 출연 황정순은 해방 전 불과 열다섯 나이에 <그대와 나>(허영, 1941)의 단역으로 스크린에 처음 얼굴을 비췄다. 이향이나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어쩌다 불려나온 반짝 출연이었다. 그러나 배우로서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49년 봄 우리나라 최초의 16밀리 천연색 극영화 <여성일기>(홍성기)부터였다. 친구의 오빠(송재로)를 사랑했으나 그에게 본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속세를 떠나 사회사업에 헌신하는 한국보육원 원장 황온순의 반생기이다. 그의 뒷얘기는 1.4후퇴 때 미공군 헤스 대령의 도움을 받아 전쟁고아들을 제주도로 실어 날은 록 허드슨 주연의 영화 <전송가>(1957)로 이어지지만, 황정순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황온순(주증녀)이 아닌 그의 친구로 나왔다. 이런 그녀에게 주연의 기회를 준 것은 장황연 감독의 <청춘행로>(1949)였다. 시댁의 학대에 시달리면서도 참고 견뎌내 끝내 행복을 얻는 며느리의 이야기로, 주선태(시아버지 역)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여성일기>에 나온 지 4개월 만이었다. 다음에는 최인규 감독의 흑산도 올 로케이션 영화 <파시(波市)>(1949)가 기다렸다. 어촌의 사내들이 즐겨 찾는 선술집 작부 김홍도 역이었다. 후배 작부(최지애)를 친동생처럼 여기면서도 돈에 팔려 다른 파시로 옮겨 가야 하는 조연급, <청춘행로>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다. [사진] <청춘행로>의 한 장면 생필름을 구하기 어려워 제작비가 뛰어 오르고 여름부터 퍼진 뇌염 때문에 극장 문까지 닫히던 시기였다. 한국영화 초창기의 변사이자 배우, 해방 후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1948)의 원작자이기도 한 김조성(金肇聲, 예명 춘광)도 이해 6월에 뇌염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황정순은 나라의 재난 속에서도 세 편이나 출연하는 행운을 얻었다. 30대 중반부터 시작된 노역의 멍에 하지만 불의에 닥친 6.25전란으로 그녀의 활동은 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재개되었다.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을 비롯한 <숙영낭자전>(신현호, 1956), <사랑>(이강천, 1957), <김삿갓>(이만흥, 1957), <봄은 다시 오려나>(이만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인생차압>(유현목, 1958), <청춘극장>(홍성기, 1959) <육체의 길>(조긍하, 1959), <대원군과 민비>(유진식, 1959) 등 20여편이 그 산물이다. 이 시기에 <사랑>으로 제1회 한국평론가협회상 최우수여우상을 받았다. 영화계에 들어와 처음 받은 상이었다. 잇따라 <인생차압>의 이중생(김승호) 부인 우씨 역으로 제2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사진] 황정순이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인생차압>의 한 장면, 중앙이 배우 최남현, 우편이 유계선 <귀거래(歸去來)>(이용민)와 <박서방>(강대진)으로 시작된 1960년대는 그녀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지평선>(정창화, 1960), <주마등>(이만희, 1961), <마부>(강대진, 1961), <삼등과장>(이봉래,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2), <한 많은 미아리고개>(엄심호, 1962), <한석봉>(이만희, 1963), <굴비>(김수용, 1963), <외아들>(정진우, 1963), <혈맥>(김수용, 1963), <성난 능금>(김묵, 1963), <잉여인간>(유현목, 1964),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 <대석굴암>(홍성기, 1964), <삭발의 모정>(강대진, 1965), <이 땅에도 저 별빛을>(김기덕, 1965), <갯마을>(김수용, 1965), <친정어머니>(김기덕, 1966), <팔도강산>(배석인, 1967), <산불>(김수용, 1967), <대원군>(신상옥, 1968), <화산댁>(장일호, 1968), <저 언덕을 넘어서>(강찬우, 1968), <부인행차>(문여송, 1969) 등 120여편이라는 양이나 질적으로 그러하다. 황정순은 이미 서른세 살 때부터 머리에 흰 칠을 하고 얼굴에 주름살을 그리며 카메라 앞에 섰다. 그보다 한 살 위인 박암의 장모 역(<인생차압>)이 그 시작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그녀의 노역 행진은 특히 <마부>, <굴비>, <혈맥>, <갯마을>, <육체의 고백>, <산불> 등에서 빛을 내며 자신의 대표작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사진] <외아들>에 출연한 황정순, 왼편 아역 배우는 박종화(사진제공: 김종원) <마부>의 경우는 식모(수원댁)에서 마부(김승호)의 재취로, <굴비>에서는 분가한 자식들의 냉대에도 보듬어 안는 농사꾼의 아내로, <외아들>에서는 자식을 위해 온갖 역경을 견디며 살아가는 어촌 어머니로, <혈맥>에서는 과년한 딸을 술집에 보내려 ‘신고산타령’을 가르치는 노점의 주모로, <갯마을>에서는 재가한 며느리를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과부 시어머니로, <잉여인간>에서는 무직인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마른 동태에 바람을 불어넣는 억척스런 아내로, <육체의 고백>에서는 환락가에 군림하는 나이트클럽의 마담으로, <산불>에서는 마을에 숨어든 공비(신영균)와 통정하는 바람난 과부(도금봉)의 어머니로, <삭발의 모정>에서는 휴가 온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이기 위해 머리를 잘라 파는 가난한 군인 어머니로, <화산댁>에서는 처가살이하는 아들에게 냉대 받으면서도 사업 빚을 갚아주는 농촌 어머니로 각기 나타난다. [사진] <굴비>의 한 장면, 중앙이 배우 이빈화, 우편이 김승호(사진제공: 김종원) 초기에는 <촌색씨>, <자식복 돈복>(윤대룡, 1959), <모상>(박상호, 1960) 등의 경우처럼 연극 연기가 몸에 밴 오버액션의 경향이 있었지만, 60년대 초반 <혈맥>, <잉여인간> 등 일련의 문예영화에 출연하면서 한층 여과된 디테일 연기로 다듬어졌다. 일찍이 황정순을 <월급봉투>, <산불> 등 여러 영화에 출연시켜 그의 필모그래피를 빛나게 한 김수용 감독의 말처럼 ‘연기인에게 젊은 역과 노역의 구별이 있을 수 없지만 젊은 날 무대의 여왕이 은막의 노파로 전향’ (『주부생활』, 1969년 9월호 부록, 「영화와 스타 스토리」) 한 것은 의도와는 다른 운명이었을 것이다.
[사진] 영화 <물망초>에서 주증녀 남편 유지 이은 <조국의 어머니> 주증녀는 1950년대를 눈앞에 둔 1949년 3월 윤대룡 감독의 <조국의 어머니>로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이 일본 헌병에 체포돼 모진 고문으로 죽자 아내가 그 유지를 이어 싸우다가 광복을 맞게 되는, 이른바 이 시기의 특징인 항일 영화이다. 잇따라 황정순, 주선태, 황해, 최남현, 이민 등 신인이 몇 달 사이에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이름을 알린 주증녀는 16밀리로 찍은 최초의 천연색 극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 이어 <여인애사>(신경균, 1950), <흥부와 놀부><이경선, 1950) 두 편에 출연한다. [사진] <여성일기> 현장 사진(앞열 왼쪽이 주증녀, 오른쪽이 황정순) 하지만 6.25 전란 후 주증녀가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전쟁으로 헤어졌던 연인이 재회하는 김성민 감독의 <애원(哀怨)의 향토>(1954)부터였다. 잇따라 <자유전선>(김홍, 1955), <인생역마차>(김성민, 1956), <애인>(홍성기, 1956), <처와 애인>(김성민, 1957), <실낙원의 별>(홍성기, 1957), <청실홍실>(정일택, 1957), <인생화보>(이창근, 1957), <별아 내가슴에>(홍성기, 1958), <실낙원의 별 후편)(홍성기, 1958), <모녀>(최훈, 1958), <별만이 아는 비밀>(이선경, 1958), <마도의 향불>(신경균, 1958) 등 11편에 기용된다. 대부분이 당시 작고한 김내성의 「애인」, 「실낙원의 별」 류의 인기 통속소설과 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었다. [사진] <실낙원의 별> 스틸 사진(중앙이 노경희, 우측이 김동원) ‘국산 갱스터 ’(「영화주평」. 『한국일보』, 1956.09.16) 를 지향한 <인생역마차>는 신문기자와 암흑가의 두목(이향, 1인2역) 사이에서 사랑을 선택해야 하는 비운의 여성을 보여 주는가 하면, <처와 애인>에서는 월남한 남편의 외면 속에 참고 견뎌야 하는 실향민의 비애를, <실낙원의 별>과 <실낙원의 별 후편>에서는 애독자(노경희)와 사랑에 빠진 인기 작가 아내(옥영)의 좌절과 반전의 삶을, <청실홍실>과 <별만이 아는 비밀>에서는 전쟁미망인과 딸의 행복을 위해 참고 견디는 애틋한 모성애를 각기 표출해 낸다. 주증녀는 특히 <실낙원의 별>의 호연으로 보다 더 좋은 의미의 대중성을 갖게 되었다. (유동준, 「영화로 보는 실낙원의 별」, 『경향신문』, 1957.09.28.). [사진] <청실홍실>의 한 장면, 좌측은 영화배우 엄앵란(사진제공 김종원) 그 이후 <낭만열차>(박상호, 1959),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송국, 1959), <아내>(김묵, 1959) 등 주로 여성 멜로물에 출연했으나 자신이 제작한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기획 허영)의 흥행 실패와 잇따른 언론계 종사자와의 스캔들로 인해 이미지에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고려장>(1963)에 이어 김수용 감독의 <만선>(1967)과 <산불>(1967) 등 1960년대의 출연작에 이르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상투적인 내용과 도식적인 인물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작품 선택에 변화가 온 것이다. 재봉틀 일로 가계를 도우며 두 자녀와 가정부의 유혹에 빠진 남편(김진규)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하녀>의 아내, 잘못된 효행의 악습에 따라 산채로 버려져야할 운명에 처한 <고려장>의 할머니, 바다에 나간 두 아들을 잃고, 실성해버린 <만선>의 어머니(곰치 아내), 마을에 숨어들어온 인민군 탈영자를 사이에 두고 다른 과부와 성적 비밀을 공유해야 하는 <산불>의 과부 점례 등 다양한 캐릭터가 그런 예이다. 이 같은 질적 성취는 결국 제5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과 제11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 그리고 제6회 대종상 여우조연상(만선) 등 세 개의 큰 상을 받게 되는 경사로 나타난다. [사진] <하녀>의 한 장면 [사진] <고려장>의 한 장면 여덟 살 연극소녀에서 은막의 유망주로 강렬한 눈매와 우수의 그늘을 드리운 독특한 마스크로 팬들에게 사랑받은 주증녀는 1925년 2월10일 함경남도 영흥군 엄기면 덕하리에서 태어났다. 부농의 무남독녀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함남여고를 졸업하자 동경하던 극단 고협(高協)에 들어갔다. 1943년 열여덟 살 때였다. 그녀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무영탑>(연출 유치진)의 단역인 시녀 구슬아기 역이었다. 이후 <청춘의 윤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다졌다. 이 무렵 그녀는 극단 예원좌(藝苑座)에서 고협(高協)으로 옮겨온 배우 허영(許影)과 눈이 맞아 혼인하고, 대건사(大建社)의 직속극단 청탑(1946년 11월23일~)의 첫 연극 <보검>(3막4장)에 김승호, 허영 등과 함께 출연했다. (『자유신문』, 1946.11,09) 조용하고 섬세하면서도 선이 뚜렷한 그녀의 연기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런 그의 재능은 얼마 못가 새 얼굴을 찾는 윤대룡 감독에 의해 발견된다. 허영 외에 손전과 권일천이 공연한 <조국의 어머니>였다. [사진] <만선>의 한 장면(사진제공 김종원) 이렇게 은막에 진출한 주증녀는 1950년대까지 ‘잘 나가는 배우’로, 60년대 이후에는 ‘연기파 배우’로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그 사이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다. 허영과 헤어지고 가십에 오르내리던 언론계 종사자 윤호중과 재혼한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초반부터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상적인 연기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1974년 검객영화 <철면객>(이형표, 장청천)에 출연할 무렵이었다. 종합 진단 결과 뇌종양이었다. 수술을 포기한 채 스스로 육체를 갉아먹는 고통 속에서 약물 치료만 계속했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열일곱 살 큰 딸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추석이 며칠 안 남았구나. 추석빔을 마련해야 할 텐데…” 유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주증녀는 1980년 9월18일 동트는 새벽 6시30분 남편과 1남 1녀, 정들여 가꾼 정원의 나무와 마지막 작품 <청색시대>(1976, 정인엽) 등 3백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25년에 이르는 연기생활을 마쳤다. 당시 56세였다. “예술인마을에 정착한지 벌써 5년이 돼간다. 시골도 아닌 서울의 주택가에 무슨 마을이냐고 하겠지만 기실 이 마을이란 어휘에 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정감과 향수를 느끼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어쩌면 유일한 안식처가 될지도 모르는 이곳 예술인마을- 이름처럼 황토색 짙은 옛날의 마을은 아닐지라도 서울에서 유일한 ‘마을’이라는 희소가치가 있다.” 이는 주증녀가 뇌종양을 앓을 무렵 영화진흥공사 발행 월간 《영화》(1974년 5월호)에 발표한 수필 「예술인마을 우거기(寓居記)」의 한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