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화
- 감독
- 박종호
- 제작년도
- 1966
- 출연
- 신영균, 주연, 고은아, 한은진, 유주용, 안명근, 최길호, 송욱, 최삼, 이수련, 유계선, 박신재, 강계식, 임생출, 김경란, 김수미, 강기숙, 김옥경, 박예숙, 임성포
한국영화사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 이용민 감독''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 살인마 >라는 공포 영화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것이다.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1960~70년대에 < 악의 꽃 >(1961), <살인마>(1965), < 목 없는 미녀 >(1966), < 공포의 이중인간 >(1974) 등 제목만 듣고도 그 장르를 꼭 집어낼 수 있는 공포, 괴기 흥행작들을 연출한 감독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 경력이 감독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언론이 그를 소개하며 사용하는 수식어들을 살펴보자. ''카메라맨의 제1인자'', ''촬영계의 거장'', ''색채촬영의 권위자''로서 ''특수촬영기술''을 ''전매특허''로 삼고 있는 능력 있는 촬영 감독이기도 했으며, 극영화뿐만 아니라 < 제주도 풍토기 >(1946), <신라의 고분>(1946), < 산업시찰 >(1969) 등 기록영화를 만든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하다. 이처럼 극영화/다큐멘터리 감독, 촬영감독인 동시에, 1960년대 초반까지는 현상, 편집 등 후반 작업에까지 참여한 이용민 감독은 1916년에 태어나, 니혼대학교 예술과 영화부에서 영화를 공부한다. 이후, 일본에 머물며 새, 자연을 소재로 한 교육 다큐멘터리를 촬영, 감독하다가 해방 후인 1946년 < 제주도 풍토기 >라는 장편 다큐멘터리를 감독하며 한국영화계에 데뷔한다. 감독 경력 가운데 초기에 해당하는 1950년대에는 < 서울의 휴일 >(1956), < 포화속의 십자가 >(1956), < 산유화 >(1957), < 고개를 넘으면 >(1959) 등 전후의 상황이나 엇갈린 애정관계를 소재로 삼는 멜로드라마를 주로 연출하다가, 1961년 흡혈 식물을 소재로 삼은 < 악의 꽃 >에서부터 후일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괴기 영화 연출이 시작된다. 이용민 감독은 동시대의 다른 인기 감독들이 유행에 따라 여러 장르를 오가며, 많게는 1년에 10여 편을 연출했던 것에 비해, 30여 년 동안의 감독 경력 동안 20여 편의 극영화만을, 그 중에서도 1960년대 이후로는 괴기 영화만을 중점적으로 연출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경력의 감독이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작이라 할 < 살인마 >의 도입부는 매우 인상적이다. 현대적 양식으로 지어진 크고 텅 빈 미술관에 양복 차림을 하고, 검은 우산을 든 주인공이 들어가는 장면은 모던하면서도 고딕 소설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이후 전개될, 고부갈등으로 비롯된 한을 푸는 며느리 귀신이라는 다소 전통적이고 익숙한 기둥 줄거리에서는 예상하기 힘든 도입부이다. 서양화풍의 초상화가 녹는 듯 흘러내리는 것에 화들짝 놀라서, 도망치듯 올라 탄 택시의 운전사가 “오늘은 원한을 못 푼 귀신들이 득실거리는 날입니다”라고 말하며 가리키는 택시 밖에는 희끄무레한 소복 귀신들이 숲 속을 활보하고 있다. 특별한 사건도 효과음도 없이 이계(異界)의 귀신들이 현실의 세계를 돌아다니는 이 장면은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것들이 특별히 위화감 없이 섞여 있는 <살인마>의 특징을 규정짓는다. 예컨대, 한국 어느 고장이든 하나씩은 있을 법한 민담, 전설로서 ‘시어머니에게 원한이 맺힌 소복 귀신’이 드라큘라 마냥 ‘흡혈’을 하고, 그러한 원한을 실어 나르는 매개체로 일본 괴담 영화에서 차용한 괴묘(怪猫)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영화 속에서 그렇게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용민 영화에서 이러한 이질적인 것들은 그들이 유래한 서로 다른 역사와 전통 사이의 충돌이나 균열로 나아가지 않는다. 비록 고양이의 영혼이 깃들어 있어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는 설정이 있긴 하지만 어머니 살해 역시 머뭇거림이나 죄책감이 없다. 즉, 이용민 영화에는 당대의 영화적 지식과 기술이 허락하는 것들을 모아 놓고 재미있어 하는 낙천성이 있다. 미륵보살의 도움으로 맞이하는 다소 어리둥절한 결론은 어떤 봉합될 수 없는 균열에서 비롯한다기 보다 그러한 낙천성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이듬 해 연출한 <목 없는 미녀>에서도 이용민은 당시 자신의 기술적 트릭으로 재현할 수 있는 동서양의 기괴하고 무서운, 또 재미난 것들을 잔뜩 모아 놓는다. 극 중에서 목 없는 미녀는 소복에 집착하는 여자 귀신이 아닌 서양식의 투명인간이다. (서구의) 옛 식민지 어디에선가 가져왔을 법한 독거미와 황산이 흐르는 도랑, 2층과 지하실이 있는 삐걱거리는 서양식 목조 건물, 숨겨진 보물과 암호, 그리고 여기에 모성과 일제 말기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식민(과 식민 이후)의 기억이 한데 섞여 작동한다. 투명인간과 벌이는 카체이스 시퀀스와 독거미, 뱀을 헤치며 보물이 숨겨진 장소의 암호를 찾아내는 시퀀스는 무시무시한 공포를 자아내기보다는 보물을 찾아 헤매는 신나는 어드벤처물로 보이게 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낙천성은 1960년대 이후의 괴기 영화 시기 이전의 연출작에서도 엿보이는데, 우선 이병일 의 < 시집가는 날 >(1956)을 리메이크한 < 맹진사댁 경사 >(1962)를 생각해보자. 원작과 비교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론 컬러 영화로 전환되며 나타나는, 세심히 조율된 압도적인 색채감각이겠으나, 영화의 플롯은 거의 동일하다. 다만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서럽게 우는 이쁜이와 갑분이의 눈물로 끝나는 이병일의 영화와 달리 이용민 영화에서는 행복하게 떠나는 이쁜이(최은희)와 영화에서 코믹한 참견을 담당하는 삼돌이(구봉서)로 끝난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용민의 첫 극영화인 < 서울의 휴일 >(1956)에는 도시 범죄와 빈민, 정신분열, 불륜이 등장하지만 시종일관 낙관적인 기운이 흐른다. 같은 해 한형모 감독의 < 자유부인 >에서는 한없이 심각하고 비장했던 ‘방종한 여성’과 ‘소홀함 속에 내버려진 남편/가정’이 이용민의 영화에서는 새로운 가정 풍속도 속에 누구 하나 상처 받거나 소외되지 않는 조화로운 방식으로 보여 진다. 남자 주인공의 동료기자들이 여자 주인공에게 호텔 야외 바에서 마시는 맥주 값을 뜯어내기 위해 걸었던 속임수가 조금 얄궂지만 눈 흘기는 것으로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장난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낙천성은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동시대의 이질적이고, 균질하지 못한 것들을 포착하지만 그것들이 결국 잘 조화될 것이라는 믿음, 자신이 맞이한 새로운 시대와 그것이 약속하는 미래에 대한 낙관이다. 촬영감독으로서, 특수효과 개발이 필수였던 공포영화 감독으로서 이용민 을 생각해본다면 기계장치와 기술력을 가능하게 한 근대와 그 근대 이후의 미래에 대한 낙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낙관적인 태도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시나리오로만 남아 있는 마지막 작품 < 흑귀 >(1976) 이전의 마지막 연출작인 < 공포의 이중인간 >(1974)은 일제 시대에 숨겨진 보물 이야기가 프랑켄슈타인과 결합된다. 미친 과학자는 모험을 즐기기에는 너무 간악하고 탐욕스러우며, 그가 만들어 낸 것들 또한 그로테스크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신의 기술력으로 만들어 낸 실험대상에 의해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는 갑작스레 결론을 지어야 되겠다는 듯, 가까스로 권선징악과 가까운 결말에 이르지만 매우 불안정한 여운을 남긴다. 이러한 변화는 1960년대의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근대와 기술에 대한 낙관이 국가주도의 산업화, 후기 자본주의에 가까운 모습으로 전개되며 형성되었던 1970년대식 근대성에 대해 그 스스로의 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글: 전민성
'최고급품을 주시요' 퉁퉁한 몸매에 느물거리는 미소를 얼굴에 담은 백광진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사업가지만 속은 바람난 유부녀들 등치는 건달이다. 요즘으로 치면 중년의 ''제비'' 쯤에 해당하는 것이겠는데, 6.25 전쟁이 직후의 가난하고 거친 세상을 어떻게든 헤쳐가야 하는 백수의 음흉한 허풍을 상징하는 대사였다. 더불어 그 말은 급격하게 밀어닥치는 서양 풍조 속에서 실속없는 멋과 허세를 부리고 싶어하는 당대의 풍조와 어울리면서 세태를 드러내는 유행어가 되었다. 영화가 유행어를 만들어낼 정도라면 그 역할을 맡은 배우 또한 유명세를 타는 것은 당연한 일. 사기꾼 건달 역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주선태 였다. 오랫동안 연극배우로 활동했고, 영화계에도 새롭게 활동 영역을 넓힌그가 비로소 개성있는 연기자로 주목받을 수 있었다. 영화 < 자유부인 >(1956년, 한형모 감독)은 50년대 한국영화 중에서 가장 선정적이며 호기심이 컸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신문 연재소설로 발표되는 동안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릴만큼 선풍을 일으켰고, 급격하게 밀려드는 서양식 자유 연애 풍조가 성도덕에 관한 논란으로 확산되면서 뜨거운 화제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역시 소설이 묘사하고 있는 에로틱한 탈선의 긴장과 호기심을 가득 담았다. 여러 인물들이 저마다 쾌락을 좇는 틈새에서 백광진은 빈손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다. ''최고급품''은 빗나간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미끼이자 바람든 세태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50-60년대 한국영화계에는 다양한 캐릭터를 가진 남자 배우들이 많았지만 크게 보면 선량한 이미지의 호남 형과 개성 강한 악역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김승호 , 김진규 , 최무룡 , 신성일 , 신영균 , 남궁원 같은 배우들이 호남 형 주연의 길을 걸었다면 허장강 , 이예춘 , 박노식 , 독고성 , 장혁 같은 배우들은 악역을 주로 맡았다. 주선태 의 위치도 개성 강한 조연급 악역의 이미지가 강했다. < 운명의 손 >(1954년, 한형모 감독)에서 맡은 역할이 밀수단 두목이었는데다 < 자유부인 >에서 맡은 역할 또한 세상을 속이며 살아가려는 사기꾼의 모습을 보이게 되면서 그는 악역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각인시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맡은 악역은 모질고 잔혹한 망나니의 모습이 아니라 유들유들하면서도 인간적인 여유가 있는 ''선량한 악당''에 가깝다. 다소 비만해 보이는 그의 몸집과 모나지 않은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이 그만큼 넉넉해 보이기 때문이다. 1921년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난 그가 영화계에 들어오기 까지 역정을 돌아보면 기구하기까지 할 정도다. 일제시대의 가난과 방황을 고스란히 겪으며 자란 그는 세상 물정에 눈뜰만한 나이때부터는 떠돌이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주선태 는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자랐으나 지독한 가난에 찌들었다. 어머니는 행상을 하며 살림을 꾸렸지만 하루하루 먹는 일을 해결하기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주기호는 술로 세월을 보내며 가족을 부양하는 일에는 먼산 보듯 했으니 그 속앓이를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의 심사나 그것을 지켜보는 아들의 심사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도 술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외아들 키우며 살아야 하는 젊은 과부의 한숨은 오죽했을까. 남편복 없는 여자는 아들 복도 없다고 했던 옛말이 맞기라도 한것일까. 젊은 과부는 아들과도 영영 이별을 하고 만다. 아들 주선태는 또래들과 어울리다 싸움을 벌여 숨어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더 이상 고향에 있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단신으로 서울로 떠났다. 열아홉살 시절이었다. 떠날 때는 잠시 몸을 피하는 것이고, 사정이 웬만하면 다시 돌아오겠다며 떠난 길이었지만 세월은 모자의 상봉을 허락치 않았다.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는 생이별이 되고 만 것이다. 훗날 주선태가 가슴에 한처럼 묻고 산 이별의 사연이다. 연고도 없이 홀홀 단신, 서울로 떠난 주선태 는 일거리가 될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해야 했다. 그러다가 구한 일이 어느 양복점의 허드렛일을 하는 막일꾼 자리. 아는 사람도 없는 서울에서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무슨 일이든 성심껏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던지, 주선태는 최선을 다했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알몸신세였지만 주위로부터 싹싹하고 성실한 청년이란 평판은 받았다. 그 덕분이었는지, 남편의 양복을 맞추러 왔던 어느 부인 네의 눈에 띠었다. 훗날 그의 장모가 된 인물이었다. 주선태 청년이 마음에 든 그녀는 남편과 함께 와서는 주선태의 사람 됨됨을 거듭 살폈고, 썩 괜찮은 청년이라고 믿고는 사위로 삼았다. 아내 원점옥과는 그렇게 결혼했다. 주선태의 나이 스물한살 때, 아내는 열아홉 꽃다운 나이였다. 고향을 떠나온 그로서는 비로소 안정을 찾는 계기가 된 것이지만, 그러나 그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새신랑은 징용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이후 닥친 시대적 광풍이 소박한 젊은 부부에게까지 닥친 것이다. 오키나와의 광산으로 간 그는 너무도 힘든 작업을 견디지 못하고 몰래 집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집에서 숨어 지내던 그는 악극단 성군(星群)에 들어갔다. 가까이 알고 지내던 배우 김승호 (金勝鎬)의 도움이 컸다. 주선태 의 배우 인생이 시작되는 계기였다. 이후 해방 때까지 극단 배우로 활동하며 극계 인물들과 교류를 넓혀 나가며 연기의 기초를 다졌다. 자유극장(1945), 신청년(1947), 신협(1950) 등의 극단을 거치며 관록을 쌓았다. 영화에 데뷰한 것은 1949년 < 청춘행로 >에 출연하면서부터. 정운용프로덕션 제작, 장황연 감독의 이 영화는 역경을 극복하고 사랑을 완성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그린 멜로드라마. 주선태 는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의 친구 역을 맡았다. 지금의 눈으로 그의 연기가 어땠는가를 돌아보기에는 어렵지만 영화배우로서 입지를 세우는데까지는 미치지 못한 듯 하다. 영화 자체가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극 무대에서 닦은 그의 연기는 영화에서도 그대로 통할만큼 기초가 탄탄했고, 6.25 전쟁이 끝난 후의 한국영화는 새로운 부흥의 과정을 맞고 있을 때여서 다양한 캐릭터가 필요했다. 그가 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만큼 컸다. < 운명의 손 >이나 < 자유부인 > 같은 영화들에 잇따라 출연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중에서도 <자유부인>은 ''영화배우 주선태''의 입지를 다지는 징검다리나 다름 없었다. 이어 < 비류 >(1956년, 이만흥 감독), < 산유화 >(1957년, 이용민 감독), < 찔레 꽃 >(1957년, 신경균 감독), < 선화공주 >(1957년, 최성관 감독), < (속) 자유부인 >(1957년, 김화랑 감독), < 망향 >(1958년, 정창화 감독), < 어느 여대생의 고백 >(1958년, 신상옥 감독), < 산넘어 바다건너 >(1958년, 홍성기 감독) 등의 영화에 계속 등장했다. 그가 영화계에서 배우로서 순항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영화 배우로서의 그의 활동은 1979년, 고영남 감독의 < 영원한 관계 >에까지 이어진다. 활동 후반기 영화중에서 < 족보 >(1978년, 임권택 감독)는 그의 연기 인생을 집대성하는 기념비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 시절, 창씨 개명의 압박에 직면한 수원 설(薛)씨 가문의 장손 역할을 장엄한 모습으로 그려냈다.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닥치는 변화의 위협에 맞서 가문의 현실적 생존을 지켜야 하는 문제와 면면한 자존과 명예를 지켜야 하는 책임 사이에서 고뇌하는 양반의 후손을 명연기로 보여준 것이다. 무대 배우로 시작한 주선태 의 연기는 영화는 물론 텔레비전 방송으로까지 이어갔다. 70년대 초반부터 동양방송(TBC)에서 시작한 텔레비전 연기에서 그는 새로운 이미지로 연기세계를 넓혀 나갔다. 영화에서의 인상이 주로 악역이었던 것에 비해 텔레비전에서는 외모만큼이나 넉넉하고 따뜻한 인상의 아버지 역할을 주로 맡았다. < 아씨 > < 마부 > 같은 드라마에서 그의 연기는 영화와는 또 다른 인상을 보여주면서 방송 배우로서의 성공을 만들었다. 주변에서는 그를 가리켜 ''방송의 김승호 ''라고 평가했다. 영화에서 김승호가 보여주었던 그 푸근하고 속깊은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주선태가 방송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였고, 그만큼 성공적이라는 표현이기도 했다. 극단 신협의 대표(1971-1978)를 맡는 것을 비롯하여 영화와 방송에서 의욕적인 활동을 보이던 그는 1989년 8월 22일,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병인 당뇨병으로 10여년 가까이 무진 고생을 하다 배우로서의 인생을 마친 것이다. 영화계에서 주선태 는 김승호 와 남다른 인연을 가졌다. 징용에서 도망쳐 숨어 살다가 악극단 배우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 바로 김승호였고, 영화계에 나오는 과정에서도 김승호는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었다. 두사람은 의형제를 맺어 남다른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다. 영화계는 물론 방송계에서도 소문난 애주가로 알려진 그는 술자리라면 사양하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나친 과음이 결국 당뇨병을 불러 들이고 말았지만 술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그는 모범적인 가장이었고,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식두들에게 상처를 줄만한 스캔들 한 번 없었고, 배우로 얻은 수입은 착실하게 관리해 생활 걱정을 하지않아도 될만큼 재산을 모으기도 했다. 도움이 필요한 주변 동료들에게 따뜻한 대접을 마다하지 않았던 부분도 그의 인간성을 드러내는 부분으로 남아있다.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주용만은 그의 2남5녀 중 다섯째이며, 부인 원점옥씨는 미국 뉴욕에서 자식들과 여생을 보내고 있다. 조희문 (영화평론가, 상명대교수) / 2002년 <프로필> 1921년 함경도 길주 출생 1989년 8. 21 사망 데 뷔 : 1949년 장황연 감독 < 청춘행로 > 주요 작품 : < 운명의 손 >, < 산유화 >, < 화랑도 >, < 족보 >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