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키드 웨폰 - 적라특공
- 감독
- 정소동
- 제작년도
- 2002
- 출연
- 다니엘 우, 매기 큐, 이행지
최근 개봉한 몇몇 한국영화에서는 전에 없던 주인공들이 발견된다. 이제껏 영화가 비극을 소재로 삼는 경우, 자주 인물은 가해자 아니면 피해자로 분류되었는데, 범죄 사건을 다루는 경우에는 가해자를 추적하고 처벌하여 정의질서를 확립하거나 혹은 가부장적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이 영화의 골격을 이뤘다. 그에 비하면 피해자는 구원자의 대활약을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에 가까워서, 무력하고 무고해서 더 가엾은 인물로 묘사되며 관객들의 동정과 연민을 샀다.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는 재해나 전쟁과 같은 특수 상황이 배경이 될 때에는 고통에 시달리던 피해자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용기 내자고 독려한다. 결국 시간이 약이다, 그만 울고 어서 상처를 털고 다시 일어서자, 라는 식의 서사는 고통과 상처의 기억을 서둘러 과거의 미담으로 얼버무렸고, 그 와중에 절망과 우울을 극복하지 못한 소수의 인물들은 도태되기 일쑤였다. 가해자가 되었건 피해자가 되었건 비현실적으로 강렬한 의지와 낙천성을 가진 주체적 인간들이 약하고 여린 인물들을 내치고 내내 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던 셈이다. 그동안 사건의 1인칭 당사자가 아닌 주변 인물들 혹은 상실과 애도를 견뎌내야 하는 물리적 시간은 자주 이야기의 외부로 밀려나거나 아예 삭제되곤 했다. 그런데 이제 한국영화는 서사의 바깥에서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던 그들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들의 시간을 담기 시작한 것 같다. <생일>, <살아남은 아이>, <봄은 가고> 그리고 박근영 감독의 < 한강에게 >(2018)는 이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처럼 한 몸이 된 죄책감을 품은 채, 상실감의 고통으로 얼룩진 현재의 시간을 묵묵히 견디고 있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조심스럽게 그들의 고통을 헤아리고, 슬픔에 공감하려는 시도는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 혹은 한국영화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대와 공명하려는 방식일 것이다. 진아에게는 10년을 사귄 연인 길우가 있고, 그는 알 수 없는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놓여있다. 이별의 순간은 유보되고 있지만 피할 수 없는 비극은 이미 진행중이다. 진아의 얕은 꿈에는 길우와 함께 했던 행복한 추억들이 끊임없이 출몰하고, 현실은 괜찮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괜찮다고 대답을 반복하며, 내내 길우의 빈자리와 침묵을 마주해야 하는 일상의 연속이다. 시인인 진아는 일상의 무게와 속도를 핑계로 현실을 외면하는 대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관찰하고,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공들여 단어를 골라 생각과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몫이 된 죄책감과 상실의 고통을 온몸으로 오롯이 견뎌내야 하는 그녀에게 예전에 썼던 시들은 이제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길우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진아에게 한강은 그 물결의 반짝임이 ‘간질간질하여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공간이었지만, 길우의 사고를 경계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상징하는 것이 된다.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의 존재는 진아의 일상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고, 한강에서 연상되는 생생한 고통과 슬픔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진아는 자기 연민을 토로하거나, 소리내 통곡하지 않는다. 차마 시를 쓸 수 없는 그녀의 무기력, 걸핏하면 잠에 빠져드는 일상이 실은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 담담한 애도의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한강에게>에는 감독이 직접 연출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장면들이 섞여 있다. 광화문 거리에서, 시 낭독회에서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영화 속 인물이 아니라 현실에서 숨쉬고 있는 배우의 얼굴이다. 시나리오의 대사를 외우는 대신, 본인의 이름을 딴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즉흥적인 대사에는 온기와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전고운 , 이요섭 감독 부부가 등장하는 장면에는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을 진실로, 진심으로 믿어버리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영화의 말미, 마침내 진아는 ‘한강에게’ 라는 제목의 시를 완성한다. 자신의 죄책감과 슬픔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말을 건네는 셈이다. 한강 혹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라면, 시를 쓴다는 것은 기억과 감정이 흘러가지 않도록 단단히 포박하는 결연하고 적극적인 행위다. 흘러가는 것들은 이내 엷어 지겠지만, 상실의 슬픔과 고통 같은 묵직한 감정은 아마도 강물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을 것이다. <한강에게>는 수면에 뜬 작지만 선명한 부표처럼, 드러나지 않는 감정들이 흘러가지 않은 채 여전히 여기 있다고, 버티는 삶에 대한 응원을 보낸다.
‘시네마테크 KOFA가 주목한 2018년 한국영화’의 리스트가 발표됐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이 리스트에 참여한 초기에는 열 편의 작품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다. 10편에 다 넣지 못한 작품의 수가 항상 대여섯 편 이상이 되었다. 그래서 매번 깊은 고심 끝에 그만큼의 작품을 제외시켜야 했다. 그런데 근래 몇 해에는 그런 작품의 수가 한두 편 정도밖에 안 된다. 글쎄다, 정확한 이유는 나 자신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계속 참여하다 보니 내 결정 기준이 단호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사이에 한국영화가 빈곤해진 탓인지 좀 더 생각해볼 문제다. 후자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말했듯이 올해도 10편을 선택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고, 내가 선택한 작품과 전체 결과는 언제나처럼 적당한 선에서 사무송(使無訟)한 모양새다.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해 아쉬운 작품의 리뷰를 의뢰받고 고민했다. 개인의 리스트를 별도로 발표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작품을 골라야 할지가 그 이유였다. 내 리스트와 상관없이 우선 몇몇 작품의 제목을 (ㄱㄴㄷ 순으로) 언급만 하자면 < 1급기밀 >( 홍기선 ), < 곤지암 >( 정범식 ), < 누에치던 방 >( 이완민 ), < 인랑 >( 김지운 ), < 춘천, 춘천 >( 장우진 ), < 파란입이 달린 얼굴 >(김수정)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독립영화, 상업영화의 구분과 별개로 각자의 영역에서 제 역할을 했고 또렷한 목소리를 낸 작품들이다. 위 작품들은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작년 한국영화를 풍성하게 만든 이름들임을 확신한다. 리뷰 대상으로 선택한 작품은 < 홈 >이다. 신인 감독 김종우 의 데뷔작인 <홈>은 작년 5월 30일에 개봉해 8천 명 정도의 관객을 모았다. 비평적인 수난은 더욱 심해서 이 영화를 제대로 조명한 글을 거의 보지 못했다. 연말에 발표된 리스트에서 이 영화가 언급조차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청소년 인물, 가족과 사회를 다루는 점잖은 태도나 영화가 이야기하는 소중한 주제를 감안하면 이 영화가 감내해야 했을 외면의 정도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나는 작년에 정부 정책을 다루는 매체에 이 영화에 관한 칼럼을 보낸 적이 있다. 리뷰는 아니었고, 영화가 다루는 이런저런 문제를 놓고 정책적인 해결책 등을 물어보는 글이었다. <홈>의 특성은 그러한 데 있다. 눈물을 흘리거나 감동을 받는 선에서 영화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런 경험이 실제 생활로 넘어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주인공 소년에게 닥친 환경의 안타까움이 질문으로 이어지고 해결 방안은 없을까, 라고 생각하는 데 이르는 것이다. 변화를 초래하는 경험을 보통 다큐멘터리로부터 얻곤 하던 나로선 각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줄거리를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홈>은 졸지에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년의 이야기다. 고아는 아닌데 고아보다 더한 상황이 준호( 이효제 분)에게 일어난다. 소년의 가족 관계는 조금 복잡하다. 준호의 어머니는 준호의 아빠와 이혼한 상황에서 다른 유부남 강원재( 허준석 분)와 관계를 맺었고 그들 사이에서 성호( 임태풍 분)가 태어났다. 원재는 부인과의 사이에 딸 지영( 김하나 분)을 두었다. 어느 날 아침, 원재의 부인이 준호의 엄마를 찾아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교통사고가 발생해, 두 여인은 의식불명의 상태로 나란히 병실에 누워 있게 된다. 원재가 아들 성호를 데려가면서 준호는 홀로 집에 남는다. 소년의 처지를 가엽게 여긴 원재는 준호에게 두 동생과 함께 살 기회를 만들어 주는데, 원재의 착한 결정은 상황을 알아차린 처가의 분을 사고 만다. 청소년이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이 종종 범하는 실수는 아이와 성인 사이를 이분법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 아이들은 지나치게 순수하고, 때가 묻은 폭력적인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파괴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더 이상 고전적이지도 않고 별다른 감동도 주지 못한다. 영화가 두 개의 세계 사이로 선명하게 그어놓은 선이 작위적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어른들의 시선 아래 만들어진 영화는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왜곡하기도 한다. 하지만 근래 만들어진 어린이 혹은 청소년의 성장영화는 영화의 시선을 인물의 눈높이에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홈>의 제작사인 ‘아토’는 이 영화 외에도 < 우리들 >(2016, 윤가은), < 용순 >(2016, 신준), < 살아남은 아이 >(2017, 신동석) 등의 작품을 연이어 제작해왔다. 내면적으로 충실한 작품을 통해 한국영화의 경계를 확장하는 방식은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중학생인 준호의 나이로 치면 <홈>은 <우리들>과 <용순> 사이에 놓인다. 두 동생 앞에서는 어른스러워 보이는 준호는 아직 성인의 세계가 낯설고 두려운 소년이다. 무엇보다 성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다. 그런 준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곧 <홈>의 태도다. 엄마가 병실에 누운 후, 준호가 처한 상황은 급변한다. 영화는 덜컹거리는 상황을 곱게 포장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영화의 태도가 불편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소년의 시선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극중 복잡한 어른들의 관계, 어른들의 처지가 상세하게 그려지지 않은 건, 그것을 대하는 소년에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친부는 딱한 상황에 처한 아들을 거두지 않으며, 원재는 처가와의 갈등을 소년에게 설명할 길이 없다. 준호가 주변 상황에 대처하는 수준은 더욱 어수룩할 수밖에 없다. 어찌하지 못할 때마다 소년의 어깨는 자꾸 움츠러든다. 원재의 호의에 보답한답시고 편의점 물건을 훔쳐간 아이들과 싸움을 벌이고 끝내 물건을 되찾아온 장면에서는 눈물을 감추기 힘들다. 소년은 상처투성이의 입으로 온 힘을 다해 “같이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아니라 소년의 마음을 따라가다 얻게 되는 그런 출렁거림이 <홈>의 미덕이다. 소년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행복하게 사는 일은 <홈>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후반부에서 소년은 아주 어두운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소년에게 어마어마한 시련이 닥치는 것으로 끝맺지도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로 전개되는 과정은 얼핏, 준호라는 어린 존재가 세상에서 홀로 서는 성장담을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도입부로 돌아가 보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준호는 패스를 하지 않고 홀로 골을 시도하려다 실책을 범해 친구들로부터 책망을 받는다. 엔딩에 앞서 영화는 소년이 거쳐온 공간들을 한 번씩 마주한다. 그 공간을 거치며 보낸 시간 속에서 소년은 성장했을까. 영화의 엔딩, 다시 운동장에서 선 준호는 별 무리 없이 친구들과 함께 호흡을 나눈다. 표정도 밝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만 하면 되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일순간의 응원에 스스로 만족하고 떠나려던 나를 돌려세우고 만다. 카메라는 줄곧 소년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으나, 문득 나를 향한 시선을 느끼게 된다. <홈>은 ‘함께 사는 것’을 박탈당한 소년의 외로움에 관한 영화다, 소년에게 그런 세계를 던져주고도 담담하게 지내는 나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하는 영화다. 끝으로 소년 준호를 아름답게 연기한 배우 이효제가 연기상의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은, 이 영화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묻힌 것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글을 다 쓴 뒤 김종우 감독이 「씨네21」과 나눈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8살 때 형과 헤어졌다. 형은 영천 시골에 있었고 나는 부산으로 이사왔다. 형이 고등학생 때였는데, 그때부터 형은 혼자 살았다. 왜 형이랑 떨어져 사는지 몰랐는데, 중학생 때 어머니가 우리 가족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돌이켜보면 그때 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족관계를 떠나 당시 형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너무 힘들고 아팠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밝혔다. 영화에서 유달리 진실함이 느껴졌는데, 감독 자신에게서 출발한 이야기라 더 그랬던 모양이다.
그대는 천벌받은 자를 사랑하는가? 말하라, 용서받지 못할 것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 -샤를 보들레르 자식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한 가족이 있다. 어느 작은 소도시에서 인테리어가게를 운영하면서 살아가는 성철과 미숙 부부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외아들 은찬을 잃는다. 은찬은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러 갔다가 물에 빠진 기현을 구하고는 의롭게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영화 는 은찬이 겪은 사고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시간이 흘러 망자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껴안고 살아가는 성철, 미숙, 그리고 기현의 일상을 관조적으로 그려나가면서 이야기의 포문을 연다.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 그 이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이 영화 속 세계의 지반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는 죽음이라는 고통이 일으키는 파장을 쫓아가면서 그것에 대한 긴 주석을 남기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핵심적인 인물인 성철과 미숙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은찬을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미숙의 경우, 평소 은찬과 친하게 지냈던 한 아이에게 다가가 그의 모습에서 죽은 아들의 흔적을 찾는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 현기증 >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자 그녀를 찾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과 겹친다. 미숙은 아들을 잃은 결핍을 아들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다른 아이를 통해서 극복해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슬픔은 잠식되지 못하고 도리어 그녀의 내면의 고통이 외부로 드러나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 성철은 은찬의 예기치 않은 죽음을 사회적으로 선한 죽음으로 기념하는 일에 동참한다. 그는 은찬을 의사자로 지정하는 소방청의 일에 묵묵히 협조한다. 게다가 그는 은찬에게 주어지는 보상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로 약속한다. 이는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유가족인 아버지가 할 수 있는 마땅한 처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죽은 자를 사회적으로 애도하는 이 일련의 과정은 죽음의 덧없음과 허망함을 극복하기 위한 또 다른 시도로 보인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망자의 지난 삶을 도덕적이고, 명예로우며, 영웅적인 것으로 기념하려는 이상주의적인 실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녕 죽음의 고통은 명예와 같은 이상이나 금전적인 보상 등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영화는 성철의 선택과 관련하여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공을 들이지 않으며, 성철 또한 자석에 끌린 것처럼 무의지적으로 그 일련의 과정에 동참한다. 감정이 보이지 않는 그의 차가운 얼굴과 활력이 휘발된 그의 몸짓들은 다소 기계적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무기력한 성철의 모습은 그가 아직 아들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성철과 미숙의 일상을 통해서 우리는 망자의 부재가 남긴 고통과 슬픔은 그 어떤 개인적 혹은 사회적 노력으로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영화는 성철과 미숙이 아들을 잊기 위해 선택했던 행위들, 즉 그들의 희망이 현실과 충돌하는 순간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비극을 희망으로 극복해보려는 몸부림이 다시 현실에 부닥쳐 좌초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현실이라는 것은 죽은 자는 결코 되살려 낼 수 없다는 단순하고 자명한 사실에 기초한다. 그러한 현실 인식은 한 번 무너져 버린 삶은 원상태로 복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준다. 삶의 고통을 애써 무마하려는 우리의 모든 몸부림은 삶에 대한 고통, 회의, 비관을 덮어버리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이 의식적인 실천으로 옮겨간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심은 기현의 등장을 통해 증폭된다. 기현은 이 영화 전체를 비관적인 색채로 물들이는 탁한 염료와 같은 인물이다. 성철은 우연히 기현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지르던 것을 본 이후에 그를 찾아간다. 아들이 죽어가면서 살린 아이, 그런 기현을 바라보는 성철의 내면이 어떠할지에 대해 영화는 직접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기현의 심리도 섣불리 묘사하려 들지 않는다. 단계적으로 영화는 찰나의 희망과 그것을 짓밟아버리는 양심적 고백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순서대로 보자면 희망이 먼저 온다. 성철은 기현을 자신의 가게에 수습생으로 들인다. 이 과정에서 성철과 기현은 사장과 수습생 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관계는 형제애, 동료애, 가족애, 부성애와 같은 휴머니즘적인 코드를 품을 수 있을 정도로 깊어진다. 마찬가지로 미숙과 기현 또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마침내 성철, 미숙, 기현은 유사 가족을 형성한다. 이 세 사람이 모두 은찬이라는 인물의 부재로 괴로워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임시로 만들어낸 유사 가족은 희망과 고통이 교차해가면서 만들어낸 하나의 직물과 같다. 이 영화의 전반부가 비극을 희망으로 상쇄시키는 것이라면 이 영화의 후반부는 그 희망에 철퇴를 놓는 것이다. 희망은 찰나적이고 비극은 지속적인 탓에 잠시나마 스쳐 지나가는 희망은 다시금 비극으로 추락한다. 비극이 지속되면서 누적된 힘들이 일시적으로 솟아나는 희망을 쉬이 제압할 수 있었던 탓이리라. 또한, 이 영화는 은찬의 사고가 일어나던 그 시간을 봉인해 놓은 다음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 따라서 과거를 서서히 드러내는 서사적 전략을 택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희망이 자랄 수 있는 적합한 조건이 아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기현의 입을 통해 은찬에 관한 은폐된 진실이 밝혀지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이 벌어진다. 기현은 자신의 작은 주먹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내리치듯이 자책하고, 성철과 미숙은 그런 기현을 바라보면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른다. 기현의 양심 고백은 한때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을 거짓으로 만들고, 이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 세운다. 그 결과 현실의 모든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지반은 완벽하게 붕괴된다. 지반에 금이 간 상태로 시작해 끝끝내 그것이 붕괴되는 세계. 그 폐허의 자리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안정적인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 기현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죄와 벌에 관한 이야기, 성철과 미숙이 자식을 잃은 아픔을 감내하지 못하고 고통의 수렁에 빠지는 이야기, 그리고 이웃과 조물주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죄와 벌, 상실의 아픔, 붕괴된 세계를 압축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이 죽었고 여러 사람이 살아남았다. 누군가는 망자의 부재에 따른 상실감에 고통스러워하고 다른 누군가는 망자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영화는 모든 사람이 고통 받는 세계 속에서 고통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또한, 그러한 지옥과 같은 곳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를 보인다. 대신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에도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성철, 미숙, 기현이 필사적으로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면서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즉 자신들이 여전히 현실을 감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 모습은 흡사 멸망해가는 세계 속에서도 삶의 의지는 남아 있다는 강력한 증거와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금 살아남았다는 것을 웅변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