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
- 감독
- 김동우
- 제작년도
- 2002
1. 2016년 12월 16일. 마르코 벨로치오는 가족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향인 이탈리아 북부 피아첸차로 전 가족들을 불러 모은다. 레티치아, 조르조, 마리아, 알베르토 등 생존해 있는 그의 형제자매들이 배우자와 아들딸, 손주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마르코의 형제자매들은 다들 정정해 보이지만 나이들은 80줄을 훌쩍 넘겼으니 어쩌면 살아생전에 모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벨로치오 감독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가족영화를 찍겠다고 했지만 뭘 하고 싶은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토로하고는 곧 “천사였다는 카밀로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우리에게 알린다. 그러니 그의 말은 카밀로에 관한 영화를 찍으려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죄책감, 후회, 회한이라는 단어를 꺼내기에는 이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는 그의 쓰라린 탄식에는 이 가족의 비극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은 그간의 시간이, 그 오랜 회피가, 그 질긴 침묵이 내포되어 있다. 카밀로에 관해, 카밀로가 품은 깊은 우울과 고통에 관해 몰랐던 이는 마르코만이 아니다. 지식인인 조르조 형도 아무것도 이해 못 했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도 몰랐고, 가여운 누이들도 아는 게 없었다. 여든 한살의 노감독은 ‘죽기 전에 이 일을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가족의 비극을 재현하고 결국 기억하기”로. 그 결심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카밀로는 누구인가. 그는 마르코 벨로치오의 쌍둥이 동생이다. 1939년 2차 대전이 발발한 해에 카밀로는 마르코가 태어나고 3시간 뒤에 거의 질식 상태로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1968년 12월 26일, 카밀로는 29살의 나이에 스스로 목을 맸다. 그 사이의 시간, <마르크스 캔 웨이트>가 탐문하는 시간은 카밀로가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29년의 시간이다. 마르코 벨로치오는 그의 쌍둥이 동생을 세상으로 불러내기 위해 최대한 많은 이미지들을 끌어 모은다. 8mm 카메라로 찍은 홈 비디오 영상과 가족사진들, 당시 이탈리아의 사회정치사를 담은 아카이브 푸티지, 그리고 벨로치오의 극영화 클립들. 그 이미지들이 가족과 지인의 대화 장면과 인터뷰 영상에 픽션영화 같은 드라마틱한 활력과 논픽션의 운명적 생기를 덧입힌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이미지는 카밀로의 얼굴이다. 부드러움과 우울이 깃든 그의 얼굴은 부서질 듯한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음미하게 하는 매혹의 이미지지만 동시에 옅은 통증을 불러오는 슬픔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물론 그 인상은 그가 살아남아 쌍둥이 형제 마르코의 나이에 이르렀다면 결코 얻지 못할 것이기도 하다. 카밀로의 부서질 듯한 연약한 아름다움은 너무 이른 때에, 자신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세상을 스스로 따돌리며 불시에 사그라졌다. 그러나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이 영화의 목표가 아니다. 관객인 우리는 물론, 벨로치오 형제자매들이 자신들의 모든 기억을 끄집어내고서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지점. 어떤 언어로도, 어떤 지성으로도, 어떤 예술로도, 한 인간에 관한 온전한 이해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 실패는 필연적이고 근원적이다. 이 영화의 저 깊은 하부에 내재된 어떤 쓰라린 느낌은 우리 존재의 근원적 비극을 희미하게 지시하고 있다. 마르코 벨로치오가 이들 가족의 비극을 보편적인 차원의 이야기로 환원하여 한 개인의 후회와 죄책감을 희석시키려 했다는 뜻이 아니다. 차라리 그는 카밀로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고백하고 거기서 자신이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것, 듣고도 흘려버린 것을 여기 기록해 두기로 한다. 그가 지금, 이제서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재현하고 기억하는 것 외에 뭐가 있을까. 벨로치오 감독은 마음을 기울여,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끌어 모아 카밀로를 둘러싼 벨로치오 가족의 비극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한다. 여기에는 잊기 힘든, 실은 가장 가슴 아픈 두 개의 순간,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벨로치오 감독의 기억에 없고 두 번째 이야기는 그가 아주 잘 기억하고 있는 대목인데, 이 영화가 카밀로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마르코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전환점이 이쯤인 것 같다. 벨로치오 감독은 영화의 오프닝에서 그의 가족과 이 가족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긴 내레이션 이후에 한동안 가족의 증언을 듣는 성실한 청자의 위치를 고수한다. 그러다 형 알베르토가 카밀로가 죽기 몇 년 전에 마르코에게 쓴 편지 얘기를 꺼내자 벨로치오 감독이 즉각적으로 프레임 안으로 소환된다. “나한테 쓴 편지라고?” 감독은 편지 내용은커녕 그 편지를 받은 기억조차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알베르토 형은 자신에게 온 편지도 아닌데 그 편지 사본을 갖고 있다(알베르토는 이 영화에서 카밀로에 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이다.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인 형 파올로나 청각장애를 가진 누이 레티치아처럼 돌봐줘야 할 존재도 아니고 존경받는 좌파 지식인인 조르조 형이나 유명한 영화감독인 마르코처럼 선망의 대상도 아니었던, 오히려 카밀로와 가장 비슷하게, 평범해서 덜 관심 받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다음 씬에서 벨로치오 감독은 카밀로가 죽은 방에서 50여 년 전에 그가 보내온 편지(사본)를 꺼내 소리 내어 읽는다. 너무 늦어버린 수신, 마르코의 목소리로 듣는 카밀로의 절박한 요청이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불러온다. 비극적 결말이 아니라면, 어쩌면 범상하게 읽힐 짧은 편지. “사랑하는 마르코. 서로 못 만난 지 1년이 다 됐네. 나 입대하기 전에 둘이서 길게 얘기했지. 제대한 다음에 뭘 하면 좋을지 말이야.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 여전히 불확실하고 혼란스럽기만 해. 미래에 대해 고민해도 해답이 안 나와. 그날 저녁에 내가 꺼낸 말 있잖아. 나도 영화계에서 일해 보면 어떨까 하고. 정말로 어떻게 생각해? 말도 안 되는 생각일까, 아니면 고려해 봐도 될까? 답장 보낼 때 네 생각을 확실하게 말해주면 좋겠어. 그럼 이만 줄일게. 보고 싶다. 잘 지내. 사랑을 담아, 카밀로가.” 이 씬 다음에 벨로치오 감독의 딸 엘레나의 쇼트가 곧장 붙는다. “그래서 답장하셨어요?” 아버지의 답변이 두렵다는 눈빛으로 엘레나가 묻자 벨로치오 감독은 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잘 기억이 안 나. 54년이나 지난 일인걸.” “답장 안 하셨군요.” 아들 피에르 조르조가 아버지의 대답에 이렇게 응답하자 벨로치오 감독도 “그랬던 것 같아”라고 시인한다. 이 장면이 지켜보기 괴로운 이유는 자식들이 느낄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느끼고 있을, 모든 면에서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에서 오는 허망한 감정이 우리에게도 절절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리라. 응답하지 않은 죄,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죄. 이후 벨로치오 감독은 그 점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고 신부님께 털어놓는데, 그의 그런 고백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본 이들은 누구라도 알아챌 것이다. 그럼에도 반문해 보고 싶다.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죄책감에 관한 영화인가. 확신 없이 일단 말해보자면, 벨로치오 감독은 자신의 죄책감을 고백하기 위해 카밀로를 영화로 불러낸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너무나 늦어버렸지만 이제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물론 그건 영화를 만드는 일이다. 이 생각은 마지막 시퀀스에 가서야 들었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 카밀로에 관한 이야기들이 쌓여갈수록 자꾸만 그의 편지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이 이야기는 마지막 시퀀스에 가서 다시 말하기로 하자). 강력하게 각인된 두 번째 순간은 쌍둥이 형제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의 대화에서 나오는데, 벨로치오 감독의 기억 속에 선명한 그 순간은 일찍이 <그 눈, 그 입>(1982)에서 재현된 바 있다. 1968년, 그러니까 카밀로가 죽던 그 해에 마르코는 제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카밀로에게 민중들의 투쟁에 동참하기를 권한다. 하필 1968년이다. 유럽 대륙에 혁명의 돌풍이 불기 시작한 해. 이 영화의 제목이 된 “마르크스는 나중에”(<Marx can Wait>)라는 대사는 마르코의 제안에 대한 카밀로의 대답이다. 말하자면 “내 문제부터 해결하고, 혁명은 나중에…….” 196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도 손꼽히는 좌파 감독으로 경력을 시작한 마르코 벨로치오가 강력한 정치 영화에 헌신하며 공산당에 가입한 해가 1968년이다. 벨로치오 감독은 카밀로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나눈 이 대화 역시 아들딸에게 들려준다. “카밀로가 꺼내는 힘든 얘기를 피하고 싶은 생각에 난 혁명 어쩌고 하는 헛소리만 늘어놨어.” 정치가 개인보다, 혁명이 가족보다 앞설 수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간에, “널 불행하게 만든 것은 부르주아이니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라는 이 흔해빠진 선동은 피상적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얼마나 무감하고 무성의한가. 2002년 벨로치오는 「더 인디펜던트 리뷰」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마르크시즘과 별 관련이 없는 내 생각들뿐이다. (...) 예술가로서 내게 변혁은 더 이상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2.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올해 칸영화제의 신설 섹션인 ‘칸 프리미어’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그리고 칸은 폐막식에서 그에게 명예 황금종려상을 안겼다. 이 영화로 상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 수상에는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 마르코 벨로치오는 사실상 데뷔작부터 줄기차게 가족의 문제를 다뤄왔고, 그 문제란 그 자신의 가족 이야기이기도 해서 그것을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총결산한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 캔 웨이트>에는 그의 픽션영화의 일부가 논픽션의 진술들 사이에 정확히 자기 자리를 찾아 이음매 없이 제시된다. 이를테면 벨로치오 형제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장남 파올로의 광기를 말할 때, <리프 인 더 다크>(1980)에서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소리 지르는 광인 시퀀스로 연결된다. 거기서 하얀 잠옷을 입은 천사 같은 꼬마들은 형의 광기를 피해 귀를 막고 테이블 아래로 숨어들거나 미친 듯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벨로치오의 형제자매들은 말한다. “우리 모두 파올로 형이 차라리 죽어버리길 바랬지만 누구도 그 광인과 한 방을 쓰는 카밀로 걱정은 안 했다.” 아, 가여운 카밀로. <호주머니 속의 주먹>(1965), <그 눈, 그 입>(1982), <내 어머니의 미소>(2002)도 그런 방식으로 벨로치오의 가족사와 재접속한다. 하지만 픽션은 픽션일 뿐, <마르크스 캔 웨이트>가 없었다면, 그 견고한 픽션의 세계는 그 자체로 온전히 남을 것이다.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그 세계에 균열을 낸다. 그 틈새로 가장 많이 노출되고 가장 큰 혼란을 겪는 것은 마르코 벨로치오 그 자신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벨로치오가 평생 탐구해온 가족의 비극상이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면,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픽션의 세계 뒤에 안전하게 몸을 숨겼던 그가 그 세계의 실재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겪는 자기발견의 과정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여든에 접어든 대가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을까 싶다가도 종종 말을 잇지 못하거나 더듬거리고 시선을 마주 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목격하면 우리에게도 얼마간의 두려움이 생겨난다. 이 비극을 감당할 수 있을까. 마르코와 그의 형제자매들은 그런 순간들조차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데, 대신 외상은 기이한 방식으로 깊이 남는다. 그들은 이 죽음을 어찌 받아들였던가. 당시 카밀로의 사망 소식을 들은 모든 이들은 하나같이 어떤 불의의 사고를 떠올렸고, 심지어 현장에서 그의 시신을 수습했던 누이들은 지금도 그 죽음을 ‘실수’나 ‘사고’라고 믿는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자살한 아들이 지옥 불에 떨어질까 패닉에 빠진 신앙심 깊은 어머니를 위로하느라 마치 사고였다는 듯 자식들이 모두 연극을 꾸며댄 탓인데 이 선하고 가련한 누이들은 어쩌다 그 연극에 영원히 갇혀버리게 되었다. 아직도 카밀로의 죽음을 실수거나 사고라고 믿는 누이들은 유서가 있었다고 해도 “난 본 적이 없어”라는 말로 일축한다. 그들이 기억하는 카밀로는 어떤 사람이던가.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수영을 할라치면 팔을 휘저을 때마다 물에 가라앉았고, 학업에서는 날이 갈수록 쌍둥이 형과 엄청난 격차가 벌어져 낙제를 거듭하고, 군대에 가서는 변방으로 자꾸만 밀려났다. 형제 중 그를 가장 총애했던 아버지는 카밀로가 측량사가 되어 떼돈을 벌어 최신식 자동차를 타고 나타나는 것으로 라틴어와 그리스 철학을 공부한 그 잘난 형들에게 복수하기를 바랐지만 그건 그의 뜻과는 달랐다. 암으로 이르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장례에서 홀로 펑펑 울었던 그는 세상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느꼈다. 언제나 우스갯소리를 해대서 그 농담과 웃음 탓에 아무도 그의 내면의 고통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이가 있고 누구는 언제나 우울한 느낌이 드리워진 청년이라고도 했다. 소극적이고 불행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형들과의 끊임없는 비교에서 스스로를 실패자라 자책했던 그는 무엇보다 ‘애정의 관점에서 사막 같은 불모지’였던 가정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화초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더 많은 얘기들이 더해진대도 우리가 이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느끼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보다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문득 벨로치오가 이 영화로 무언가 다른 걸 시도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졌다. 가족 모임을 단체 사진 촬영으로 마무리한 다음, 에필로그처럼 덧붙은 단 하나의 쇼트 탓인가. 영화적 톤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도드라진 이 쇼트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유일한 픽션영화 쇼트라고 해도 될 법한데, 그래서인지 픽션의 상상력을 부추긴다.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 속에 저 멀리 돌다리를 걸어 전경으로 다가오는 벨로치오 감독이 보이고 곧 전경에서 프레임 인하여 아침조깅을 하는 청년의 뒷모습이 보인다. 청년은 카밀로가 죽기 직전에 다녔던 체육교육원의 이니셜 ISEF이 등 뒤에 박힌 운동복을 입고 있다. 청년이 감독의 곁을 스쳐 후경으로 달려가자 벨로치오는 돌아서서 그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는데, 이 광경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이 감정적 기습에 아름다운 선율의 배경음악도 가세하면서 내가 본 것 이상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돌다리 쇼트로 시작하여 크고 붉은 글씨체의 <마르크스 캔 웨이트>라는 영화 제목이 뜨고 카밀로와 마르코의 사진이 대화하듯 이어지다가 엔딩 타이틀에 이르는 그 (불)연속 편집이 저 깊은 감정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만 같다. 뒤돌아보는 벨로치오의 몸짓과 시선, 68년 그 뜨거운 거리를 메웠던 선명하게 붉은 구호를 아니러니하게 역전시킨 카밀로의 대답 ‘마르크스는 나중에’(“그래, 정치는 나중에”라는 마르코의 수긍이기도 한), 교차로 이어지는 카밀로와 마르코의 사진들.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에는 카밀로를 바라보는 마르코의 모습이 있고, 이십대인 카밀로의 흑백 사진들 위에 나이 들어가는 마르코의 컬러 사진이 쇼트와 역쇼트처럼 마치 대화처럼 배열된다. 이 쇼트의 연결 속에서 나는 앞서 마르코가 까마득히 잊어버린, 응답하지 않은 편지를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사랑하는 카밀로에게’로 시작되는(그리고 ‘사랑을 담아, 마르코가’로 끝나는), 벨로치오 감독의 뒤늦은 답장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자신의 쌍둥이 형제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던 그가 여기서는 카밀로를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그렇다면 결국 이 영화는 살아남은 자들의 자기위안을 위한 것 아닌가. 어쩌면 그럴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어라 말해도, <마르크스 캔 웨이트>가 품은 그 무거운 탄식과 이 영화가 안긴 깊은 감동은 조금도 희석되지는 않는다.
아마 긴 이야기를 할 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단순하게 말할 생각이다. 이미 오랜전부터 왕빙은 < 사령혼: 죽은 넋(Dead souls) >(2018)을 찍고 있었지만 그걸 알게 된 것은 작년이었다. < 팡슈잉(Mrs. Fang) >(2017)이 작년 부산영화제에 초대되었지만 왕빙은 오지 않았다. 대신 그 영화의 프로듀서와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내게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이 약간 주변을 둘러본 다음 조심스럽게 지금 왕빙이 파리에서 다음 영화를 편집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런 다음 짧게 질문했다. 왕빙의 유일한 극영화인 < 자볜거 우(The ditch) >(2010)를 보셨지요? (이 영화는 부산영화제에 <바람과 모래>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었다. 왜 이런 제목을 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물론이지요. 그러자 대답했다. 지금 거기서, 자볜거우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한 영화를 편집하고 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두 개의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이다. 나는 새 영화가 아마도 왕빙의 두 번째 영화 < 허펑밍; 중국 여인의 연대기 (Fengming, a Chinese memoir) >(2007)과 같은 방법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예감했다. 어느 눈 내린 겨울날, DV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왕빙은 허펑밍 할머니를 찾아간다. 그리고 요청한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그러면 허펑밍은 그녀가 17살이었던 1949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화면자료도 없고, 어떤 설명도 없으며, 어떤 자막도 없고, 어떤 움직임도 없다, 카메라는 멈추어 섰고, 왕빙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 그저 듣는다. 이 전례 없는 청취(聽取)의 방법론. 그저 한참을 듣다가 지나치게 방 안이 어두워지자 죄송하지만 불을 켜도 될까요, 가 전부이다. 그렇게 3시간 8분 동안 고작 6개의 쇼트만으로 이루어진 영화. 왕빙은 자기가 듣기 원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면 어떤 실용적인 방법도 거절할 것이며, 경제적인 선택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항상 그렇게 찍었다. 다른 하나. 왕빙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의 집은 집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아무 것도 없었다. 침대와 아주 간단한 취사도구, 몇 권의 책. 편집을 위한 컴퓨터 모니터 두 대. 마치 창고처럼 쌓아 올려진 (아마도 이제까지 촬영된 여러 영화의) 테이프들. 아주 간소한 책장. 그게 전부였다. 그때 내 눈길을 끈 것은 한 권의 책과 네 장의 DVD였다. 그 책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쓴 영화론인 『시간 안에서 조각하기(Sculpting in Time)』, 우리말로 『봉인된 시간』이라고 번역된 그 책의 중국어판이었다. 그리고 DVD는 클로드 란츠만의 < 쇼아(Shoah) >(1985)였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유대인들, 그리고 그들을 감시했던 나치 SS대원들, 그들을 바라보았던 사람들, 어떤 화면자료도 없이 그들의 인터뷰만으로 진행되는 증언의 영화. 나는 DVD를 보면서 이미 내가 본 <허펑밍; 중국 여인의 연대기>의 참고가 되었던 영화였구나, 라고 멋대로 짐작했다. 프로듀서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틀렸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약간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그러면 왕빙의 새 영화는 21세기의 <쇼아>가 될까요? 그녀가 대답했다. 정확하게 그렇습니다. <사령혼: 죽은 넋>을 영화 안에서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상영 시간 8시간 27분. 이따금 왕빙은 자볜거우에 가까이 자리한 밍수이의 풍경을 찍지만 거듭 되풀이해서 인터뷰한다. 모두 15명 혹은 16명. 이건 대답을 한 사람. 혹은 거절한 사람. 그 곁에 있었던 사람. 그들을 어떻게 셈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다. 왕빙은 방법론적으로 단순하게 찍었다. 인터뷰하고 그들은 대답한다. 그게 전부이다. 화면자료도 없고, 다른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으며, 그걸 설명하는 목소리(voice_over_narration)도 없고, 왕빙이 가끔 질문을 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누군가는 아마 이걸 본 다음 대답하는 육체를 찍었다고 근사하게 대답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이 영화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왕빙은 이 영화를 하나의 미학으로 찍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대상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할 지 모르겠다. 그런 설명만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더 난처한 것은 왕빙이 그들의 배경에 대해서 영화가 시작하면 그저 단 세줄, “1957년 중국 정부는 반(反)정부적이라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반우파(反右派) 운동을 벌였다. 5만 5천명에서 13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되었으며,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1957년에서 1958년 사이, 약 3,200명의 극우분자들이 노동을 통한 사상재교육을 받기 위해 간쑤성 고비사막 근처의 자볜거우 농장수용소로 보내졌다”라고 상황을 설명한 게 전부이다. 물론 중국 근대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진행된 대약진의 시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사령혼: 죽은 넋>은 그 지식을, 그 배경의 이해를, 그 상황의 설명을, 그 역사의 전개 과정에 관한 앎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영화이다. 마치 <쇼아>를 보기 전에 아우슈비츠의 역사를, 그 역사를 둘러싼 역사학자들의 논쟁을, 그 논쟁 속에서 아우슈비츠가 다루어진 방식을, 그 방식 속에서 모든 것의 망각을 목표로 한 저 소각의 무자비한 시도와 그 안에서 실낱같은 생명을 유일한 증거로 들고 간신히, 가까스로, 겨우, 거의 부서져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증언의 맥락을 근거로 한 이의제기를 이해해야 하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그러므로 <사령혼: 죽은 넋>의 첫 장면이 시작하기 전을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955년 가을. 마오쩌둥은 중국이 사회주의 블록 안에서 경제성장을 이룩할 필요를 느꼈다. 그건 단지 (이제는 러시아가 된) 소비에트와의 사회주의 지도자의 자리를 놓고 벌인 경쟁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이 끝난 상태에서 자신과 함께했던 혁명 동지들이 이제부터는 정치적인 정적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지도력을 한편으로는 인민들에게 증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치적인 경쟁자들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공산당 내 서열을 정해졌지만, 그는 그들이 종종 도전해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농촌의 집산화 운동을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철강 증산을 요구하였다. ‘사회주의의 물결을 높이 끌어올리자(社會主義高潮)’는 구호 아래 (훗날 불리게 된) 소약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내에서 저우언라이를 중심으로 1956년 봄 이 운동은 기근을 초래했으며 지나치게 목표를 높이 잡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전개되었다. 마오쩌둥은 이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1957년 2월 마오쩌둥은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마치 자아비판을 하듯이 “인민 내부의 모순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하여” 이제 인민들로부터의 비판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은 덩샤오핑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 숙청이 이렇게 대규모로 전개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공산당은 인민들에게 당을 비판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말하는 자에게는 죄가 없다(言者無罪)‘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처음에는 침묵하였지만, 곧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마오쩌둥은 기다렸다. 1957년 6월, 인민일보에 우파보수주의자들이 혁명을 위협한다는 사설이 실렸다. 마오쩌둥은 우파분자들의 색출작업을 자신의 계획을 눈치 챈 덩샤오핑에게 맡겼다. 한편으로 마오쩌둥은 그 과정에서 당내 경쟁자들 사이의 분열을 가져왔다. 그들에게 당내 2인자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유도했으며, 공산당 내 유물변증법의 최고 이론가였던 류소치는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당내 투쟁의 과정을 진행하면서 인민들에게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1957년 겨울, 중국 전역에서 마을마다. 동네마다, 지역마다, 마오쩌둥의 교시에 따라 우피분자 색출에 나섰으며, 그들은 밤마다 자아비판을 요구했고, 낮에는 경제개혁 운동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유물론의 기초를 잠시 잊었다. 그들은 토대를 미처 마련하지 않았고, 개혁 운동은 전 국토의 파괴를 가져왔다. 농지의 파괴와 공장의 폐수와 공해, 그리고 제방이 무너지고 쥐 떼와 메뚜기 떼가 휩쓸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기근이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경제개혁 운동이 강행되었다. 마오쩌둥은 대답했다. “인민 절반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을 수도 있다” 불만이 쏟아져 나왔고, 도둑이 들끓기 시작했다. 베이징의 대답은 간단했다. 더 강력하게 개혁 운동을 진행하고, 반대하는 우파분자들을 가차 없이 숙청하라. 여기저기 강제노동수용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가 간쑤성 고비사막에 자리 잡은 자볜거우 강제노동 수용소이다. 상황에 대한 간단한 통계자료를 제시하겠다. 1957년 12월에 자볜거우 강제노동 수용소에 첫 재소자 2,300명이 도착했다. 1960년 9월, 일부 재소자를 다른 노동수용소에 옮길 때 이미 이 중 1,000명 이상이 죽었다. 간쑤성 전체에서 12월 한 달 동안에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약 4천 명이 수용소에서 죽었다. 6월에 8만 2천 명이었던 재소자는 반년 사이에 7만 2천 명으로 줄었다. 이 시기를 연구한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1958년에서 1962년까지 대약진 기간 동안 중국 전역에서 약 4,500만 명이 죽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시기에 자행된 파괴의 규모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체의 파괴 규모를 넘어선다고 한다. 이게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비로소 첫 장면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왕빙 카메라 앞에 앉아있는 이 노인들은 거기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면 왜 그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해졌는가, 라고 반문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1981년 중국 공산당 11기 6중 전회에서 문화혁명의 과오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대약진 시대의 역사에 대해서 공산당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것은 이 시기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이 시기를 찍은 영화는 온통 찬양뿐이며, 선전 프로파간다이며, 살아남은 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는 중이다. 심지어 촬영 중에 누군가는 병석에 누워있으며, 누군가는 아직도 말을 꺼내 들기를 두려워한다. 대답하는 그들이 누구이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역사로부터 버려진 삶.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삶. 그들이 모두 죽으면 역사는 함께 땅속에 묻힐 것이다. 왕빙은 살아남은 자들의 말, 그 말의 실존을 영화에 남겨놓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임무라고 받아들인다. <사령혼: 죽은 넋>은 거기서 시작하는 영화이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미처 찍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몫이 아니다. <사령혼: 죽은 넋>은 미처 찍지 못했던 그것에 다가가기 위해서 악착같이 찍고 또 찍은 영화이다. 나는 여기서 영화가 해야 할 일을 본다. 말 그대로 영화의 윤리.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마 긴 이야기를 할 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대는 천벌받은 자를 사랑하는가? 말하라, 용서받지 못할 것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 -샤를 보들레르 자식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한 가족이 있다. 어느 작은 소도시에서 인테리어가게를 운영하면서 살아가는 성철과 미숙 부부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외아들 은찬을 잃는다. 은찬은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러 갔다가 물에 빠진 기현을 구하고는 의롭게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영화 는 은찬이 겪은 사고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시간이 흘러 망자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껴안고 살아가는 성철, 미숙, 그리고 기현의 일상을 관조적으로 그려나가면서 이야기의 포문을 연다.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 그 이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이 영화 속 세계의 지반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는 죽음이라는 고통이 일으키는 파장을 쫓아가면서 그것에 대한 긴 주석을 남기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핵심적인 인물인 성철과 미숙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은찬을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미숙의 경우, 평소 은찬과 친하게 지냈던 한 아이에게 다가가 그의 모습에서 죽은 아들의 흔적을 찾는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 현기증 >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자 그녀를 찾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과 겹친다. 미숙은 아들을 잃은 결핍을 아들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다른 아이를 통해서 극복해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슬픔은 잠식되지 못하고 도리어 그녀의 내면의 고통이 외부로 드러나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 성철은 은찬의 예기치 않은 죽음을 사회적으로 선한 죽음으로 기념하는 일에 동참한다. 그는 은찬을 의사자로 지정하는 소방청의 일에 묵묵히 협조한다. 게다가 그는 은찬에게 주어지는 보상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로 약속한다. 이는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유가족인 아버지가 할 수 있는 마땅한 처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죽은 자를 사회적으로 애도하는 이 일련의 과정은 죽음의 덧없음과 허망함을 극복하기 위한 또 다른 시도로 보인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망자의 지난 삶을 도덕적이고, 명예로우며, 영웅적인 것으로 기념하려는 이상주의적인 실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녕 죽음의 고통은 명예와 같은 이상이나 금전적인 보상 등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영화는 성철의 선택과 관련하여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공을 들이지 않으며, 성철 또한 자석에 끌린 것처럼 무의지적으로 그 일련의 과정에 동참한다. 감정이 보이지 않는 그의 차가운 얼굴과 활력이 휘발된 그의 몸짓들은 다소 기계적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무기력한 성철의 모습은 그가 아직 아들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성철과 미숙의 일상을 통해서 우리는 망자의 부재가 남긴 고통과 슬픔은 그 어떤 개인적 혹은 사회적 노력으로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영화는 성철과 미숙이 아들을 잊기 위해 선택했던 행위들, 즉 그들의 희망이 현실과 충돌하는 순간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비극을 희망으로 극복해보려는 몸부림이 다시 현실에 부닥쳐 좌초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현실이라는 것은 죽은 자는 결코 되살려 낼 수 없다는 단순하고 자명한 사실에 기초한다. 그러한 현실 인식은 한 번 무너져 버린 삶은 원상태로 복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준다. 삶의 고통을 애써 무마하려는 우리의 모든 몸부림은 삶에 대한 고통, 회의, 비관을 덮어버리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이 의식적인 실천으로 옮겨간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심은 기현의 등장을 통해 증폭된다. 기현은 이 영화 전체를 비관적인 색채로 물들이는 탁한 염료와 같은 인물이다. 성철은 우연히 기현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지르던 것을 본 이후에 그를 찾아간다. 아들이 죽어가면서 살린 아이, 그런 기현을 바라보는 성철의 내면이 어떠할지에 대해 영화는 직접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기현의 심리도 섣불리 묘사하려 들지 않는다. 단계적으로 영화는 찰나의 희망과 그것을 짓밟아버리는 양심적 고백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순서대로 보자면 희망이 먼저 온다. 성철은 기현을 자신의 가게에 수습생으로 들인다. 이 과정에서 성철과 기현은 사장과 수습생 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관계는 형제애, 동료애, 가족애, 부성애와 같은 휴머니즘적인 코드를 품을 수 있을 정도로 깊어진다. 마찬가지로 미숙과 기현 또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마침내 성철, 미숙, 기현은 유사 가족을 형성한다. 이 세 사람이 모두 은찬이라는 인물의 부재로 괴로워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임시로 만들어낸 유사 가족은 희망과 고통이 교차해가면서 만들어낸 하나의 직물과 같다. 이 영화의 전반부가 비극을 희망으로 상쇄시키는 것이라면 이 영화의 후반부는 그 희망에 철퇴를 놓는 것이다. 희망은 찰나적이고 비극은 지속적인 탓에 잠시나마 스쳐 지나가는 희망은 다시금 비극으로 추락한다. 비극이 지속되면서 누적된 힘들이 일시적으로 솟아나는 희망을 쉬이 제압할 수 있었던 탓이리라. 또한, 이 영화는 은찬의 사고가 일어나던 그 시간을 봉인해 놓은 다음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 따라서 과거를 서서히 드러내는 서사적 전략을 택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희망이 자랄 수 있는 적합한 조건이 아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기현의 입을 통해 은찬에 관한 은폐된 진실이 밝혀지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이 벌어진다. 기현은 자신의 작은 주먹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내리치듯이 자책하고, 성철과 미숙은 그런 기현을 바라보면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른다. 기현의 양심 고백은 한때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을 거짓으로 만들고, 이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 세운다. 그 결과 현실의 모든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지반은 완벽하게 붕괴된다. 지반에 금이 간 상태로 시작해 끝끝내 그것이 붕괴되는 세계. 그 폐허의 자리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안정적인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 기현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죄와 벌에 관한 이야기, 성철과 미숙이 자식을 잃은 아픔을 감내하지 못하고 고통의 수렁에 빠지는 이야기, 그리고 이웃과 조물주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죄와 벌, 상실의 아픔, 붕괴된 세계를 압축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이 죽었고 여러 사람이 살아남았다. 누군가는 망자의 부재에 따른 상실감에 고통스러워하고 다른 누군가는 망자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영화는 모든 사람이 고통 받는 세계 속에서 고통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또한, 그러한 지옥과 같은 곳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를 보인다. 대신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에도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성철, 미숙, 기현이 필사적으로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면서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즉 자신들이 여전히 현실을 감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 모습은 흡사 멸망해가는 세계 속에서도 삶의 의지는 남아 있다는 강력한 증거와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금 살아남았다는 것을 웅변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