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된다-미등록 이주노동자 기록되다
- 감독
- 주현숙
- 제작년도
- 2004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장면을 선택하고 버려야 하는지는 언제나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장면마다 미묘하게 다른 표현과 뉘앙스가 영화 전체에 무슨 효과를 가져올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튀르키예의 여성감독 펠린 에스메르의 2017년 작품인 < 유용한 것 >에 이끌린 것은 이런 이유와 맞닿아 있다. ‘유용한 것’이라는 제목은 과거에 시인이자 변호사로 일하는 주인공 라우라의 삶의 태도에 걸쳐 있는 실존적 질문을 가리키지만, 범위를 넓혀 생각해본다면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선별하고 삭제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영화 작업에 대한 지시적인 자문(自問)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적 경험에 있어 무엇이 유용한 것이고 무용한지 규정하는 기준은 분명치 않다(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복수형의 기준과 판단이 있다는 식으로 회피하기란 쉽지만, 장면은 언제나 하나의 오케이컷만을 요구한다). 어떤 장면은 의미와 상징을 과시하지만, 어떤 장면은 선뜻 유용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쓸모없는 요소들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순간들로만 이루어진 장면에도 관객이 받아들이는 쓸모와 의미는 불쑥 생성되어 영화적 경험에 남겨진다. 영화는 무의미와 의미가 끊임없이 긴장을 이루며 충돌하는 장소다. 영화 주변을 맴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 확신 없는 장소에서 모든 순간 결정을 거듭해야 하는 조건 앞에서 흥분을 느끼거나 불안에 몸서리쳐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감독의 전작인 <연극>과 <망루>를 인상적으로 보았지만, 그것 말고는 별다른 정보 없이 보게 된 작품이었다. 시작하자마자 영화에 사로잡혔다. 일견 산만하게 느껴지는 첫 장면에서부터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역에 도착한 변호사 라일라의 예기치 않은 여행을 다루는 이 영화는, 플랫폼 문 앞에서 결혼사진을 찍는 커플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잠시 뒤에 문밖에서 서성이는 라일라의 모습이 보이고 카메라는 화면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라일라를 담아내기 위해 그녀의 걸음에 맞춰 좌우로 이동한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는 화면 바깥의 목소리는 라일라의 복합적인 성격을 말해준다(“그녀는 낭만적이고, 내향적이었으며, 조금은 사회성이 부족했다”). 짧지 않은 롱테이크로 구성된 첫 장면은 중심적인 영역에서 또 다른 영역으로 시각적/청각적 차원의 초점을 계속해서 움직인다. 이 영화에서 롱테이크의 지속은 하나의 움직임에서 다른 움직임을 불러들이고 여러 가지의 활동을 결합하는 형식이다. 그것은 영화의 화면을 지속적으로 변형하고, 한 인물의 내면을 다른 사람의 얼굴과 대면케 한다. 망설이듯 우왕좌왕하던 라일라가 문을 열고 나선다. 그녀가 문을 열고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데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그러므로 화면을 개방하는 다양한 시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라일라는 고개를 돌려 결혼사진을 촬영 중인 커플을 바라본다. 이 순간에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커플뿐만이 아니라 우연히 그들 옆에서 촬영에 필요한 액자를 들어주던 카난이라는 어린 여성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는 어렵지만, 다음 장면에 카난의 아버지가 라일라에게 혼자 오디션을 보러 간 어린 딸을 돌봐달라고 부탁하면서 두 사람은 여행의 경로에서 만나게 된다. 그들은 다른 목적지로 향하지만, 생각지 않게 같은 곳을 경유하고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 별다른 말 없이 헤어진 두 사람이 다시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곳은 야간열차의 내부에서다. 여러 형태의 문으로 형성된 다양한 ‘틈’의 장소다. 라일라는 한밤의 창문을 거울처럼 관찰하면서,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카난과 맞닥뜨린다. 창문의 반영과 문틈의 개방은 그렇게 서로 다른 얼굴들을 만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특별한 순간은 야간열차의 식당칸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초반부의 장면에 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던 라일라와 카난의 옆자리로 우연히 두 여인이 합석하게 된다. 화면에는 라일라와 카난의 대화와 더불어, 합석한 두 여인의 몸짓이 붙잡힌다. 카난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화는 테이블에 남겨진 세 사람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라일라는 합석한 이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연인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기차 칸 뒤편에서 심각한 얼굴로 통화하는 카난에게 시선을 던진다. 보고 듣고 만지고 먹는 일상의 감각들이 통일성 없이 쏟아지는 순간이다. 서로 다른 몸짓과 목소리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면서 이전까지 진행되던 대화가 중단되고 타인의 반응이 화면 내부로 침범하는 것이다. 쓸모 있고 유용한 인물과 대화를 중심에 두고 그 밖의 나머지 것들을 배제하는 구성이 아니라 중심과 주변을 산만하게 뒤섞고 얼굴과 말의 위계를 배척하는 방식이다. 어쩌면 다큐멘터리의 방법을 픽션에 가져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스메르는 다큐멘터리로 경력을 시작한 작가이고 주목할 만한 작업인 <연극>은 농촌에 사는 아홉 명의 여자들이 자기 삶에서 가져온 소재로 연극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었다. 에스메르가 그리는 삶은 다성적이고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의 권리로 구성되어 있다. 열차가 전하는 매혹은 내부와 외부를 통과하며 무작위로 형성되는 만남에 있다. 누군가 자리를 비우고, 누군가는 우연히 도착하는 장소다. 그런 장소에서라면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무용하거나 비밀스러운 말을 주고받는 낯선 친밀함을 형성할 수 있다. 그것은 영화관에 가는 행위와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라일라와 카난이 탑승한 야간열차는 이따금 이런저런 이유로 불이 꺼진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잠기고 창밖의 풍경과 눈앞에 있는 상대방의 얼굴만이 간신히 보인다. 그런 공간적 조건에서 카난은 처음 만난 라일라에게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배우를 꿈꾸는 지망생이자 간호사인 그녀는 친구를 대신해 죽음을 원하는 남자의 조력 자살을 도와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바로 이런 면모로 인해 <유용한 것>은 의도치 않게 코로나 이후 시기의 영화의 유용함을 생각하게 하는 작업이면서, 고다르의 죽음 이후에 삶의 유용성을 고려하는 영화가 되기도 한다). 그녀의 아버지조차 알지 못했을 카난의 비밀을 듣게 된 라일라의 여행에는 예상치 못한 방향과 성질이 덧붙는다. 그들의 여행은 밤에 속해 있다. 밤의 어둠이 드리운 내밀한 무대는 한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진다. 인물 뒤편의 유리창 너머로는 아름다운 밤거리의 풍경이 지나가고 있다. 이 시간이 지나간다면, 라일라는 자살을 택하는 남자(그는 라일라와 만나 그녀가 쓴 시집의 독자라는 사실을 고백한다)와 대화를 나누고, 오랜만에 재회한 동창들과 기나긴 말을 주고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밤의 야간열차에서 속삭여지는 말과 다른 성질의 대화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열차의 풍경들에서 이런 우연한 마주침과 내밀한 대화는 사라져가고 있다. 크리스티안의 펫졸트의 < 트랜짓 >의 마르세유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게오로그는 상처 입은 동승객이 고통 끝에 죽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미코 레베레자의 <노 데이터 플랜>에서 기차 내부의 이민자들은 얼굴을 숨기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목소리로만 나타나고 있다. 카말 알자파리의 <암피옥서스는 멀어요>에서 기차는 도착하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 대기실에서 잠들어 있을 뿐이다. 열차는 정치적 망명의 얼룩진 기록으로, 불법 체류자들과 난민들의 피로한 기억이 새겨진 장소로 재편되고 있다. 풍경을 바라보고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는 장소의 기능은 희미해진다. 그것은 코로나 시기를 통과한 영화관의 곤경과 유사한 맥락을 갖는다는 점에서, 우리를 다시 영화의 장소라는 문제와 만나게 한다. <유용한 것>에서 변모하는 여행자의 ‘무용한’ 상태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삶과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건네는 조건이 된다. 그런 얼굴과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여행하는 영화가 제안하는 삶의 조건일 것이다. 의도를 갖지 않는 무작위에 의한 만남 속에서 영화는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만남을 전제하는 장소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디서 영화를 나타나게 할 수 있을까?
이 리스트를 빌어 최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접했던 현대 중국영화의 성취에 관해 언급하고 싶다. 기술과 물질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정신과 제도의 불모성에서 비롯된 사회, 정치적 문제들을 의제화한 과거 중국영화의 흐름과 결별하려는 시도들이 최근 등장한 몇몇 젊은 작가들에게서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2018년 이 리스트에 올린 < 지구 최후의 밤 >(2018)의 필감, 중국 현대영화의 지배적인 조류로부터 벗어나 장르의 스타일로 세공된 < 백일염화 >(2016), <더 와일드 구스 레이크>(2019)의 디아오 이난, 강력한 스토리텔링의 위업을 보여주는 <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2018)의 후보 등이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였다. 이들의 뒤를 이어 올해 등장한 저우타오의 < 오스모시스 >, 주셩저의 < 프레젠트.퍼펙트 >, 우 린펑, 이반 마르코비치의 < 내일부터 나는 >이 돋보인다. <오스모시스> 위에 거론한 세 편의 영화는 해석적이고 의미지향적인 중국영화의 과거 경향으로부터 이탈하려 한다는 점에서 한 맥락을 형성한다. 현대 미술가로 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저우타오의 <오스모시스>는 의심할 여지없이 올해 가장 눈에 띄는 중국영화 중 한 편이었다. 디지털 기술의 도입 이후 예술 장르 간 융합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현대미술 분야에서 활동해 온 저우타오의 이 영화는 ‘무빙 어헤드 Moving Ahead' 라고 이름 붙여진, 올해 로카르노국제영화제의 신설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었다.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이 결합된 저우타오의 작품들은 국내에서도 비엔날레나 각종 기획전을 통해 간간이 소개되었다. 중국 서부의 위구르를 배경으로 한 <오스모시스>는 원시적 삶의 조건이 온존하는 마을에서 공생하는 인간과 동물들을, 서사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제시한다. 이 영화의 설정은 문명사회에 사는 우리들이 한낱 동물과 다름이 없고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고 있음을 일깨우려는 것 같다. 저우타오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 침투하면서 그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경관을 묘사하면서 현실과 초현실이 중첩된 이미지를 통해 리얼리티를 재구성한다. <오스모시스>는 먼지와 눈보라, 변화하는 계절 같은 자연 경관들과 그 속의 인간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생존을 위해 싸우는 다른 종족(동물)들을 교차하며 풍부한 이미지의 레퍼토리를 쌓아간다. 이야기의 계율을 따르지 않는 이미지의 흐름 안에서 인간, 동물 및 자연과 같은 일상적인 대상들을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충격을 준다. 광대하고 숭고한 자연 환경조차도 인간의 흔적에 의해 새롭게 변형된 이미지로 나타날 수 있다. 동물에 대한 일부 묘사는 가학적이고 따라서 논쟁을 야기할 수도 있지만 이미지의 외설성을 강조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높은 해상도의 카메라로 촬영한 <오스모시스>의 이미지는 영화 기술을 생태화하려는 작가의 일관된 관심이 나타난 것으로, 지각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재고(再考)하기 위해 기술에 의해 매개되는 세계를 수정한다. 촬영, 구도 및 프레임은 엄격한 형식적 고려로 선택되었고 이미지의 서술은 서사에 종속되기보다 의식의 움직임을 따른다. 이미지를 만드는 모든 행위는 현실과 직접적인 접촉이고, 촬영 과정에 연루된 지각, 느낌, 기억은 이미지를 통해 개조될 수 있다는 신념을 이 영화는 품고 있다. 영화를 포함한 시청각 미디어의 진화로 인한 감각과 반응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영화 표현이 도달할 수 있는 극점에 가닿는 작품이다. <프레젠트.퍼펙트> 주셩저의 세 번째 장편영화 <프레젠트.퍼펙트>는 현대적인 인간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는 라이브 스트리밍의 세계에 초점을 맞춘 독창적인 다큐멘터리이다. 감독의 전작 <또 다른 해>(2017)의 정적인 스타일과는 대조적으로 대다수의 이미지가 픽셀화 되어 나타나고, 흑백 화면과 총천연색 텍스트의 대비가 선명하다. 800시간에 달하는 라이브 스트리밍 영상으로부터 추출한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개인방송 진행자들이다. 노동의 공간을 엔터테인먼트의 장소로 전환시키는 공장 여공과 건설 노동자, 익명의 거리 퍼포먼스로 존재감을 어필하려는 댄서, 끔찍한 화재사고로 화상을 입은 남자, 성장 호르몬에 문제가 있는 왜소증 사내,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에게 연신 감사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소녀 등 다면적 인물들의 사연을 배치한다. 현대 중국 사회에 관한 인상적인 초상화를 만들기 위해 채택된 삽화들은 오래 지속되는 쇼트와 관찰적인 접근방식을 통해 일상적 세계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에 대한 이 감독의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프레젠트.퍼펙트>는 미학과 양식, 윤리의 관점에서 강력한 논쟁을 야기하는 영화이다. 정형화된 다큐멘터리의 문법으로부터 멀리 나아간 이 영화는 중국의 사회, 경제, 문화, 정치적 지형을 가상공간의 변화로 지도 그린다. 라이브 스트리밍은 오늘날 중국 사회 안에서도 위력적인 엔터테인먼트의 보고(寶庫)일 뿐 아니라 이 새로운 관계의 네트워크에 매달리는 이들에게는 거대한 기회이고, 수입원이다. 이 영화는 그들의 퍼포먼스가 돈이나 영향력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다루면서, 라이브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수집한 다채로운 장면들을 편집하였다. 직접 접촉이 아닌 가상의 네트워크에 의해 운항되는 관계라는 사안을 다루는 관점과 태도, 탐구의 스타일, 형식의 긴장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주셩저는 10개월 동안 12명의 주요 등장인물들과 관계하면서 그들이 온라인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욕망을 수집하였다. 다 보고 나면 시공간의 리얼리티, 실재성에 기초한 다큐멘터리의 기록적 특성이 이러한 대상을 다룰 때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라는 본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내일부터 우리> 다네 콤렌의 <북쪽의 모든 도시들>(2016), 앙겔라 샤넬렉의 <나는 집에 있었지만>(2019)의 촬영감독이자 영화감독인 이반 마르코비치와 중국의 독립영화 감독 우 린펑이 공동 연출한 <내일부터 우리>의 주인공은 거대 도시 ‘베이징’이다. 놀랄만한 이미지의 조형과 세공으로 도시의 구성요소들을 탐구하는 이 영화는 베이징 교외에 거주하는 노동자의 일상을 추적한다. 내면을 읽기 힘든 주인공 리의 욕망과 기대는 삶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면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시대의 조류에 몸을 실은 리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반복적인 일상의 루틴에 갇힌다. 다른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리는 지하의 작은 방에 산다. 후미진 지하실에서 그는 친구로 짐작되는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다. 현실에 좌절하거나 또는 항복하여 리는 도시가 요구하는 반복 작업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빠르게 팽창하는 도시는 그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미스터리를 품고 있어서 이 도시를 완전히 탐험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모든 등장인물을 비전문 배우로 채운 <내일부터 나는>은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요소를 혼합하여 도시화의 맥락 안에서 개인과 군중, 그들과 건축물 간의 관계를 기록한다. 달리 말할 것도 없이, 영화의 테마는 도시와 건축, 그 앞에서 위축되어 가는 인간 존재의 미미함이다. 도시는 현대화되었지만, 이 현대화에 기여한 사람들은 성장의 과실로부터 배제되어 그 이후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이반 마르코비치와 우 린펑 감독은 베이징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리듬과 빠르게 현대화되어 가는 그곳의 경관을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카메라에 담는다. 일견, 도시의 역사를 탈각하고 외경에 밀착하여 다루는 이러한 태도는 이방인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시장, 거리, 건물, 장막, 창문, 거울, 스마트폰 등의 장치를 활용하여 캐릭터를 격리하면서 억류된 존재의 조건을 형상화하는 영화는 도시 환경의 축소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밀려나는 소외감을 전달한다. 사회적인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루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기운이 전편을 장악한다. 이 세 편의 영화를 통일된 경향으로 묶기는 곤란하다. 정치적, 문화적 동류의식에 기초한 이전 세대를 거스르면서 개개인의 개성을 분방하게 표출하는 반(反) 세대 영화들이라고 해야 할까. 출신성분과 세계관, 주제, 미학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는 젊은 작가들이 과거 중국영화에서 무시되거나, 강조되지 않은 요소를 조명함으로써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 앨라니스 >는 제 19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이다. 전주에서만 상영되었을 뿐 국내 개봉 계획이 없다. 2005년에 <사랑없는 일년 A year without love>로 베를린 국제영화제를 통해 데뷔했고 <앨라니스>가 다섯 번째 장편영화인 여성감독 아나이 베르네리는 그간 베를린, 토론토, 산세바스찬 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국제적 명망을 얻었다. 올해 전주영화제 준비를 하면서 한국경쟁영화를 선정하는 작업을 막 마치고 다른 프로그래머들이 고른 해외 출품작들을 점검하면서 보게 된 이 영화는 내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주로 젊은이들의 박탈감에 주목하며 출구 없는 삶과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담는 대다수 한국독립영화와는 달리 <앨라니스>는 황폐한 삶의 조건에 포위당해있으면서도 끝내 굴하지 않는 인간상을 담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 마리아는 ‘앨라니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매춘부이며 18개월 된 단테라는 아들을 둔 싱글맘이다. 마리아는 친구이자 동료인 매춘부 지젤라와 함께 사는데 거주지에서 매춘하는 것이 적발되자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옷가게를 하는 숙모 집에 잠시 머무르면서 매춘 일을 계속하지만 사는 게 녹녹치 않다. 일단 마리아는 다른 매춘부들이 이미 영역을 점유하고 있는 거리에서 영업을 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몰래 고객을 유인해 자동차 등에서 일을 계속하지만 보는 사람도 끔찍한 상황만 계속 이어질 뿐이다. (이를테면 발기하지 않는 늙은이를 상대로 차에서 영업하는 장면이 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 마리아가 일하러 나갔을 때 단테를 봐주는 숙모는 마리아를 안쓰러워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마리아를 비난한다. 네가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는 게 아니냐, 어린 아들을 생각하라고 그녀는 다그친다. 숙부는 그런 숙모를 말리지만 내심 숙모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하다. 임시로 숙모 집에서 얹혀살 처지의 마리아는 당장 항변하지는 않는다. 대신 매춘 혐의로 경찰에 출두해 심문을 받는 상황에서 마리아는 더 좋은 삶을 찾으라고 훈계하는 담당 경찰에게 거세게 쏘아붙인다. 함께 아이를 책임져야 할 남자친구는 마리아가 임신을 하자 도망친 상태에서 일자리가 없는 고향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이래 자신이 얼마나 살기 위해 처절히 일했는지, 매춘 외에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게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인지를 말하면서 마리아는 어떤 동정도, 이해도 필요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앨라니스>는 점점 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공간으로 들어가 때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일하는 마리아의 생활을 보여준다. 그녀는 잠깐 숙모 집에서 쪽잠을 잔 후 거리로 나와 일을 하고 거주할 곳을 찾다가 애타게 엄마를 찾는 아이에게 돌아와 젖을 물리고 잠시 쉰 후 잔소리하는 숙모를 피해 다시 일하러 나가며 심지어 모두 잠이 든 심야에 옷을 챙겨 입고 거리로 나가 다른 매춘부들의 구박을 받으며 몰래 일을 한다. 어디를 가던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공간을 통제할 수 없다. 이는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쓰이는 거울, 유리창 등의 반사면을 이용한 복합적인 장면 설계로 인해 점층적으로 아이러니 효과를 만들어낸다. 영화 초중반까지 이런 반사면 활용에 기초한 미장센은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그녀의 여신 같은 외형이 주는 위엄을 강조한다. 아이에게 젖을 물린 마리아가 비스듬히 누워 있을 때 반사면의 미장센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이중 삼중으로 화면에 배치하며 우리는 그 공간의 볼륨에 압도당한다. 반면 그녀가 거리를 헤매며 필사적으로 푼돈을 버는 중반부 이후의 화면들에서 유사한 장치의 프레임들은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그녀의 연약한 삶의 환경을 냉정하게 증거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마리아는 심야의 거리에서 호객을 하고 다른 매춘부들을 피해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다가 뭐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남자의 선택을 받아 그의 집에 가서 매춘을 하는데 관객은 잘못하면 그녀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인상을 받는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유사 변태적 행위를 강요당한 끝에 겨우 돈을 받아낸 마리아가 다시 거리에 나섰을 때 근처의 매춘부들은 그녀가 자기 영역을 침범했다며 그녀를 붙잡고 단체로 린치를 가한다. 설상가상 상황은 더 악화된다. 이튿날 숙모는 더러운 일을 하는 마리아에게 아이를 맡길 수 없다며 아이를 빼앗으려 들고 마리아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집을 나온다. 결말은 일시적인 해피엔딩이다. 마리아는 어느 매춘숙에 들어가고 동료들은 마리아와 마리아의 어린 아들 단테를 가족처럼 대해준다. 단테는 이 여자, 저 여자의 품에 안겨 보살핌을 받는다. 마리아는 쫓겨날 걱정 없이, 먹을 게 떨어질 걱정 없이, 아기를 모르는 사람에게 맡길 불안감 없이 당분간 살 수 있다. 모던 록 가수 앨라니스 모리셋에서 예명을 딴 마리아는 자기 앞에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도 저 홀로 자립하기 위해 분투하며 허튼 동정이나 이해도 거부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 외부인이 어떤 식으로 정의하는 것을 그녀는 거부한다. 네 삶은 이러하니 저러 해야 해, 라고 누군가 말하는 순간 그녀는 그 상대방과 절교하는 것이다. 그녀의 존엄은 그녀가 하는 일로 측량될 수 없다. 그녀는 스스로 존엄하다. 그녀는 항상 불행하지 않으며 적지 않은 순간에 행복하고 대체로 먹고살기 위해 초조하다. 어떤 때에도 그녀는 자기 자세를 잃지 않는다. 실제 아들과 함께 이 영화에 출연한 마리아 역의 소피아 갈라는 바위 같은 당당함을 화면에서 표상하는데 극단적인 삶의 남루함을 전시하는 사건들 사이에서도 끝까지 기운을 잃지 않는다. <앨라니스>의 여주인공 마리아가 드러내는 불굴의 기운과 비슷한 에너지를 한국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수상작인 정형석 의 < 성혜의 나라 >가 그렇다. (후일담이지만, 이 영화는 한국경쟁부문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인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출신 줄리에타 시첼의 열렬한 지지를 업고 대상을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국내에서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고 서울독립영화제의 초청도 받지 못했다.) 이 영화는 러닝 타임의 상당 부분 스물아홉 여성 성혜의 고단한 일상을 좇는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인턴사원으로 들어갔으나 성희롱을 당하고 항의가 묵살 당하자 인권위원회에 신고하고 회사를 나온 그는 다른 곳에 취업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파트타임 일들로 생계를 꾸린다. 아버지는 병원에 있고 식당 일을 하는 어머니는 곧잘 성혜에게 돈 융통을 부탁한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성혜의 남자친구는 무능한 데다 눈치도 없다. 사방이 무심한 공기로 차 있는 숨쉬기 힘든 상황에서 묵묵히 견디며 노동하는 성혜의 모습은 별다른 극적 주름이 없는데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성혜의 나라 성혜는 자기 삶에 벌써 지쳐있지만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관성처럼 그녀의 노동일과는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이뤄진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지만 기적 같은 사건이 후반에 발생한다. 아직 개봉하기 전 영화이므로 그 전말을 자세히 쓸 수 없지만, 영화는 급격하게 화면의 공기를 바꾼다. 굳은 표정으로 일상의 노동에 전념하던 성혜는 삶의 반전을 맞아 아무도 예상하기 힘든 선택을 한다. 그녀의 표정과 행동은 관성적이고 기계적이던 반복적 굴레를 벗어나 예측 불가능한 생기를 띠고 화면에서 튕겨 나올 듯 발랄해진다. 영화의 2/3까지 애인을 포함하여 찌질하고 저렴하고 대면하기 싫었던 인간 군상들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던 성혜는 어떤 명시적인 희망도 품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듯한 결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성추행의 전말을 알고 있었으나 침묵했던 동료의 사과를 대신한 친절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부모의 의존적인 태도를 무시한다. 대책 없는 관성적 희망으로 자신을 속이면서도 관계에 미련을 갖는 애인에게도 고기와 술을 사준 뒤 이별을 통보한다. 곧 그녀는 삶의 대단원의 반전을 맞이하기 전에도 이미 기존 관계의 관성, 그에 따른 행동 양식과는 선을 그은 채 홀로 감당할 삶에 대해 결전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성혜는 주변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거짓 희망을 품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자립과 존엄을 위해 산다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육체적 한계와 씨름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은 불행과 행운을 동시에 경험한다. 이를 통해 삶의 전기를 마련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기성 삶의 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선택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