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
- 감독
- 주동진
- 제작년도
- 1974
- 출연
- 우연정, 신일용, 김진규, 도금봉, 이기동, 트위스트 김, 백일섭, 쓰리보이, 고강일, 임해림, 최무웅, 최석, 임생출, 임성포, 윤일주, 손전, 태일, 지계순, 김경란, 양춘, 석인수, 유브라더즈, 양일민, 이영호, 박병기, 최재호, 김소제
작게 열려진 방문 틈새로 누군가가 거실을 엿보고 있다. 나이프와 크리스탈 같은 식기류부터 식탁까지 온갖 가구들을 둘러보며 품평하는 여자와 그에 응대하는 여자가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놓치지 않으려 고집스럽게 염탐하는 이 주관적 시점은 시선을 통해 대상을 소유하는 힘을 갖기보다는 지극히 두렵고 불안해 보인다. 심지어 이 시선은 곧 손님을 응대하던 여자에게 들켜 차단당한다. 이 주관적 시점의 주인은 첼라이고, 문을 닫은 이는 그녀의 오래된 연인 치키타이다. 여성 주인공에 의해 서사가 추동될 뿐만 아니라 단역까지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여성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엄청난 밀도감으로 그려낸 파라과이 영화, <상속녀>는 이 첫 장면을 통해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이는 자, 그리고 그것의 권력 관계의 이분법을 내파하고 새롭게 창조하며 시작한다. 훔쳐보는 첼라의 시선은 왜 힘을 갖지 못하고 불안한가, 그녀의 시선을 차단하는 손은 보호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통제와 지배를 위한 것인가? 여성들의 세계에서 권력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50대 중반의 레즈비언 커플, 첼라와 치키타는 부유한 엘리트였지만 현재는 빚더미에 올라 갖고 있는 물건을 팔아야 하는 치욕적인 상황에 처한다. 더 이상 구겨질 자존심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대외적 관계와 재정을 책임져 왔던 치키타가 은행과의 소송에 휘말려 감옥에 가게 된다. 치키타는 특유의 적극성과 사교성으로 감옥에 금세 잘 적응한다. 반면 수줍고 내성적인데다 치키타 덕분에 세상물정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첼라는 그 존재감을 더 잃어가는 듯 보인다. 여전히 철없는 부잣집 소녀 같은 첼라는 그저 방안에서 아침마다 마시는 차의 찻잔의 위치와 쟁반 종류를 트집 잡으며 탐미주의적인 일상을 보존하는 데 집착한다. 현재에 마주한 재난-늙음, 시들시들한 연인관계, 다 써버린 재산-을 인정할 수 없는 그녀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과거의 어느 시간에 고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젊은 시절의 사진에 눈을 돌린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견고한 치키타의 보호막이 사라지자 오히려 첼라에게 마법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차를 갖고 첼라는 운전기사 노릇을 하며 생전 처음 돈을 벌어 보고, 젊고 매력적인 앤지에게 강렬한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너무나 오랜만에 살아있음을 느끼며 자기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저 나이든 한 여자의 성적 욕망에 대한 영화만은 아니다. 또한 계급, 노동, 정치 혹은 자기 삶의 통제력에 대한 사회적 풍자이기도 하다. 파라과이의 독재가 오래 지속되는 동안 첼라와 치키타는 오히려 안온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만의 오랜 친구와 공동체 속에서 레즈비언 연인들은 어떤 동성애 혐오도 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그녀들이 상속받은 부와 계급 덕택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가능했던 우정마저도 치키타의 것이지 첼라의 것은 아니다. 사실 치키타가 큰 잘못을 했다기보다는 오랜 관계가 그들의 역할을 고정시키고 서로의 모든 것을 안다고 확신하며 서로의 잠재성을 갉아먹고 녹슬게 만들었을 것이다. 부, 계급, 오랜 연인 등 모든 방어막이 사라지자마자 첼라는 바로 도전을 맞닥뜨린다. 그것은 가려놓았던 혐오와 계급의 재위치화이며, 사회적 역할과 위치의 재조정은 그녀에게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여겼던 새로운 욕망과 열정을 불 지핀다. 옆집에 사는 부자 노부인 피투카는 치키타가 어디에 갔는지를 캐물으며 카드게임 모임에 자신을 데려달라고 부탁한다. 사실상 그건 자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안 좋은 소문을 내겠다는 은근하지만 공공연한 위협이다. 그렇게 평생 부모, 연인, 하녀 등에 의해 돌봄을 받던 첼라는 생전 처음 자신 스스로를 포함해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과 운전을 하는 것은 자신의 성적 역할의 재조정이자 계급의 추락이다. 그녀는 받는 자에서 주는 자로, 소비하는 자에서 노동하고 생산하는 자로, 욕망 받는 자에서 욕망하는 자로 이동한다. 그녀는 피투카 뿐만 아니라 함께 카드를 치는 다른 노부인들을 차로 데려다주고 돈을 받으며, 고속도로를 달려 앤지와 앤지의 엄마를 병원에 데려다준다. 점점 더 자신감을 얻게 된 첼라는 앤지에 대한 마음도 함께 키워간다. 과거에서 현재로, 고립된 방 안에서 외부 세계로, 이자 관계에서 다자 관계로 나아가는 전진의 서사는 어떤 면에선 고립되고 무기력하고 위선적이었던 파라과이의 엘리트를 풍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기 삶의 통제력의 회복이든, 꺼져가던 욕망의 부활이든, 아니면 엘리트 계층에 대한 사회적 풍자든 이 전진의 서사는 강렬한 영화적 쾌감을 선사한다. 마르셀로 마르티네시 감독은 이 전진의 서사를 그려내기 위해 첼라의 주관적 시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초반에는 프레임 대부분이 문으로 가려져 있고 종종 완전히 차단당하던 첼라의 시선은 운전을 하고 자신감을 얻어가면서 점점 넓어진다. 식기와 가구를 둘러보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을 훔쳐보기 위해 열어두었던 방문의 틈은 점점 더 넓어지다 마침내는 방에서 나와 하녀 대신 직접 가격 협상을 한다. 식탁을 비싼 값에 판 첼라는 급기야는 자신의 취향을 포기하고 보기 싫다고 버렸던 식탁을 들인다. 단순히 방 밖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과 취향에 이질적인 것을 들이며 자신의 계급성을 흩트린다. 한편 초반에 첼라의 시점으로 보이는 앤지는 얼굴이 프레임에서 잘린 채 몸만 보였다. 그러나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부끄러워하던 첼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선글라스를 찾아 끼고 자신을 숨기기보다 타인의 시선을 적극적으로 초대한다. 앤지를 향한 그녀의 욕망이 강해질수록 그녀의 시선과 공간은 바람이 부는 베란다로, 밤거리로 점점 더 열리고 확장된다. < 상속녀 >는 첼라의 주관적 시선 폭의 확장, 이동성의 확대, 서사의 진전을 정교하게 연계한다. 나는 마음의 문제든, 뇌 속의 작동이든, 내장이 뒤흔들어지는 감각이든, 내적인 것을 외화하는 능력은 영화라는 기계의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라고 믿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화의 그러한 역량을 잘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상속녀>는 다른 이에게는 감지되지 않을 수도 있는 한 인간의 휘몰아치는 내적 변화-모멸감, 슬픔, 수치심, 우울감, 이기심, 활력, 욕정, 사랑 등-와 모험을 회피하지 않고 전진하는 운동성을 당사자의 시점과 구도를 통해 드러낸다. 그건 굉장한 영화적 쾌감이다. 거울을 비추거나 대립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녀만의 시점과 운동성을 통해 만들어 내는 내적 변화의 시청각화는 한 나이든 레즈비언 여자를 하나의 우주로 만들어 버린다. 갑작스럽게 치키타가 돌아와 다시 그녀의 삶을 지배하려 하자 첼라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녀는 치키타가 팔아버리려 했던 차를 갖고 떠나버린다. 치키타가 첼라를 찾지만 그녀는 더 이상 프레임에 있지 않다. 시선을 좁히거나 떨어뜨리며 자기 주변의 공간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던 첼라는 아예 프레임 밖으로 나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갔던 그 영화적 우주를 폭파하고 확장한다.
일흔을 바라보던 존 포드는 존 웨인과 함께 영화사상 가장 정교한 실내 서부극이라 부를만한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를 찍은 뒤, 웨인을 < 말없는 사나이 >의 이니스프리를 닮은 또 다른 샹그릴라로 데리고 간다. 그곳은 ‘할레아칼로아’(Haleakaloa)라는 허구의 지명이 주어진 폴리네시아의 한 섬이다. 실제 촬영 장소는 하와이의 카우아이이며, 할레아칼로아는 하와이어로 ‘웃음과 사랑의 집’이라고 한다. 이니스프리보다 이상향에 더 가까운 이 아름다운 섬에서 존 웨인이 분한 ‘건즈(Guns) 도노반’은 한 때 전쟁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몇 척의 배를 거느리고 ‘도노반의 산호초’라는 술집을 운영하며 풍요와 게으름을 만끽한다. 서부극 만들기를 직업적 책무로 여기던 전후의 포드가 이 외딴 섬에서의 촬영을 일종의 휴식으로 여겼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 도노반의 산호초 >는 정말로 휴식과도 같은 영화다. 사건에의 무관심이 많은 포드 영화들의 숨겨진 태도라고 해도, 또한 후기로 갈수록 그 태도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해도, <도노반의 산호초>보다 더 무관심할 수는 없다. 제거해야 할 악은 물론 공동체나 개인을 위기로 몰아넣는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거구의 폭력적인 사내가 이 ‘웃음과 사랑의 집’에서 할 일은 말 그대로 우스꽝스러운 소동과 사랑 외엔 없다. 계급과 성향이 다른 남녀의 결합이 주된 테마라는 점에서 이 영화를 포드의 드문 스크루볼 코미디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 말없는 사나이 >에서처럼 사랑의 성취를 위해 주인공이 애써야 할 일도 없다. 사소한 결핍과 결함들이 무기력과 지루함을 방지하는 유쾌한 오점이 되는 세상, 어떤 긴급한 행동도 요청되지 않는, 그러니 행동 대신 활동만 난무하는 세상. 포드 영화는 결국 이런 곳을 향해 긴 항해를 해왔을 것이다. 서부극 외엔 포드 영화의 상업적 잠재력을 미심쩍어하던 메이저 스튜디오가 이런 한가한 세계를 좋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1962년 7월, 포드가 이 영화의 촬영을 위해 하와이에 도착한 직후 파라마운트는 투자 보류 결정을 내린다. 포드는 철수하지 않고 자신이 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파라마운트는 배급만 맡고 ‘존 포드 프로덕션’이 제작 크레디트에 오른다. 누구의 간섭도 없는 한가롭고 아름다운 섬에서, 완성된 시나리오도 없이 촬영을 시작한 포드는 매일 밤 다음날 촬영 분량을 구상하는, 즉흥 연출에 가까운 작업을 시도했다. 고령의 포드가 ‘액션’을 외치고 나서야 아직 대사가 완성되지 않았음을 깨닫는 날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제작 환경은 이 영화의 느슨함, 불균질성 그리고 활력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개봉 직후 앤드루 새리스가 「빌리지 보이스」(1963. 8. 1.)에 기고한 평은 “<풀밭 위의 오찬>이 장 르누아르의 <폭풍우>이듯, < 도노반의 산호초 >는 존 포드의 <풀밭 위의 오찬>이다.”라는 흥미로운 문장으로 시작된다. 포드의 <도노반의 산호초>와 르누아르의 <풀밭 위의 오찬>이라는 영화,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폭풍우>라는 희곡은 공히 “노예술가의 평정심과 지혜의 궁극적 정수”라는 것이다. 새리스는 이 작품들에서 “(창작자의) 활달한 사적 비전이 유동하며 캐릭터들의 윤곽을 지워간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노예술가의 작품을 ‘평정심과 지혜’의 산물로 보는 건 너무 상투적인 단정이 아닐까. 오히려 만년의 포드라면, 실은 만년의 르누아르도 마찬가지이지만,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에서 아도르노의 논의를 빌려 베토벤의 후기작을 두고 말했던 “달관, 체념, 이해, 화해, 포용, 조화, 종합이 아닌 파국, 파열, 흠집, 모순”의 궤적, 그러니까 “죽음 앞에서 또 한 번의 혁명이며 창조적 몸부림”의 표현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지는 않다. 돌이켜보면, 전부는 아니라 해도, 젊은 날의 포드 영화를 포함해 많은 포드 영화가 “파국, 파열, 흠집, 모순”의 표현이 아니었는가. 우리는 이미 < 굽이도는 증기선 >이나 < 젊은 날의 링컨 > 같은 포드의 1930년대 작품에서조차 소란과 난장의 디오니소스적 활력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또한 ‘영예의 시기’에 난데없이 튀어나온 낮도깨비 같은 영화 < 타바코 로드 >에서 속수무책의 파국과 파열의 소요를 만나지 않았는가. 포드의 마지막 작품이 더없이 엄격하고 운명론적인 <일곱 여인>이라는 사실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포드 세계의 여행자인 우리로선 아직은 어떤 부류의 단계론이나 양식화도 보류하고, 개별 작품을 하나의 독립된 전체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이다. #1 #2 #3 #4 #5 < 도노반의 산호초 >의 첫 장면도 < 말없는 사나이 >만큼이나 사랑스럽다. 배우 리 마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분한 ‘보츠(Boats) 길훌리’가 섬에 도착하는 첫 시퀀스를 좋아하지 않기 힘들 것이다. 할레아칼로아 연안을 지나는 해군 함정에서 갑판 청소를 하던 길훌리(중년이며 전쟁영웅인데도 여전히 사역을 하는 사병이다)는 선장이 섬에 정박하지 않을 거라고 낄낄거리며 심술궂게 말하자 같이 낄낄거리다 선장을 막대 걸레로 내려친 다음 경례까지 하고 바다로 뛰어든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멀리서 헤엄치며 일으키는 물보라만으로 섬사람들은 그가 길훌리임을 알아보고, 모두 항구에 몰려나와 춤추며 환영 퍼포먼스를 벌인다. 곧이어 도노반이 도착하고 예정된 주먹다짐을 시작한다.(#1~#5 ) 같은 날에 태어나 22년째 자신들의 생일만 되면 주먹다짐을 벌이는 전통을 이어온 전쟁 동료인 두 사내의 대결은 섬 최고의 이벤트이지만, < 말없는 사나이 >에서 폭발 직전까지 압축된 갈등의 유일한 해결책이자 대단원이었던 두 사내의 대결과는 다르게, 아무런 서사적 기능이 없는 그저 구경거리일 뿐이다. 마을의 정신적 지도자인 윌리엄 데드햄 박사가 치고받고 있던 두 사람을 꾸짖자 대결은 영화 초반에 끝나버린다. 그토록 인상적으로 등장한 리 마빈의 역할도 이후엔, 그의 팬이라면 섭섭한 일이지만, 코믹한 조연의 역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리 마빈은 촬영장에 매일 술에 취해 나타났기 때문에, 포드가 그의 역할을 축소시켰을 가능성도 크다). 두 사내의 대결은 싱겁게 끝났지만, 이 섬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곧 보스톤의 부유한 상속녀 아멜리아가 길훌리에 이어 섬에 도착한다. 그녀의 임무는 이곳의 유일한 의사이며 원주민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진,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 윌리엄 데드햄 박사를 만나 유산 양도 동의를 받아내는 것이다. 여기엔 가족을 버리고 떠도는 미지의 아버지와 독립적인 여인으로 성장한 딸의 갈등과 화해라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오래된 테마가 있다. 또한 도시적이고 세련된 여성 아멜리아와 전근대적이고 마초적인 남성 건즈 도노반의 대립과 결합이라는 스크루볼 코미디적인 테마도 있다. 이 부녀(아멜리아-데드햄 박사)와 남녀(아멜리아-도노반)의 대립적 관계는 개인주의적이고 문명화된 동부와 공동체적이고 야성적인 서부의 갈등이라는 서부극 테마의 변주다. 무엇보다 이곳은 원주민, 일본인 하인과 중국인 상인과 노동자, 프랑스인 지사와 목사 및 간호사, 미국인 유지와 의사,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이 뒤섞인 인종 전시장이다. 인종주의는 특히 아멜리아와 배다른 혼혈 동생과의 대면이 낳을 수 있는 또 다른 테마다. 하지만 포드는 이 테마들을 다루는 데 많은 숏을 할애하진 않는다. 데드햄 박사는 모든 면에서 존경받을만한 인물이니 부녀의 화해에는 별다른 장치가 필요하지 않고, 도노반과 아멜리아는 처음부터 매력적인 남녀로 설정되어 있어 이들의 결합도 시간문제다. 인종주의는 뒤에 말하겠지만 서사의 주제가 아니라 퍼포먼스의 주제로 다뤄진다. < 도노반의 산호초 >의 포드에게, 테마처럼 보이는 것들은 제재들이다. 서사적으로 탐구될 주제의식이 아니라 일종의 상황 혹은 조건에 가깝다. 유사 테마를 던져놓고 포드는 그 상황 아래 놓인 인물들과 유희한다. <도노반의 산호초>는 더도 덜도 아닌 영화적 놀이다. 그런데 놀고 있는 건 인물이 아니라 포드 자신이다. 우리를 매혹시키는 건 그 유희의 물리적 운동감과 활력이다. 아멜리아의 도착과 그에 이어지는 시퀀스들에서 보는 이를 사로잡는 것도 이런 것이다. #6 #7 #8 #9 #10 #11 아멜리아를 해안으로 무사히 안내하기 위해 도노반이 카누로 마중을 나오지만, 두 남녀는 모두 물에 빠진다. 그러자 원주민으로 보이는 선원들이 줄이어 바다로 뛰어든다. 그녀가 지갑이 바다 속에 빠졌다고 말하자 도노반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그도 곧바로 뛰어든다. 깔끔한 안내는 실패하고 두 남녀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다. 이 시퀀스의 마지막은 바닷가에서 도노반의 손에 끌려가던 아멜리아의 엉덩방아와 작은 물보라다.(#6~#11) #12 #13 # 14 #15 #16 아멜리아를 태운 지프는 출발하자마자 엔진 폭발음을 내며 달린다. 폭발음은 데드햄 박사 집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날 밤 폭풍우와 천둥 번개가 몰아친다. 문소리에 깨어 1층에 내려간 아멜리아는 집에 들어온 아이와 뒤따라온 도노반, 그리고 들이닥치는 비바람을 만난다. 아이를 비바람 부는 밤에 데리고 다닌다고 아멜리아가 도노반을 비난하자 도노반이 문을 박차고 나가고, 다시 거센 비바람이 실내로 몰아치며, 문을 닫던 아멜리아는 엉덩방아를 찧는다.(#12~16) 물보라, 엔진 폭발음, 폭풍우. 이 셋의 의미론적인 연관은 없다. 이들은 이야기와는 이질적인 영역의 잉여들이다. 굳이 찾자면 공통점이 없지 않은데, 그것은 낯선 여인과 접촉한 이 섬의 물리적 반응이라는 것이다. 아멜리아의 바닷물과의 접촉, 자동차와 접촉, 대기와의 접촉에 대한 반응이 각각 물보라, 엔진 폭발음, 폭풍우인 셈이다. 주민들은 환대하고 있지만 원시의 섬 할레아칼로아는 지금 대도시에서 온 방문자에게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 없이도 이 장면들은 우리를 사로잡는데, 물보라가 다른 물보라를 불러내고, 엔진 폭발음이 물보라의 시각적 소란을 이어받으며, 폭풍우와 천둥 번개가 물보라와 폭발음에 대답하는 역동적 연쇄의 박력 때문이다. 아멜리아의 도착에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들에서 활동하는 건 어떤 서사적 기능도 없이 역동하는 이 잉여들이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연쇄적 소란이 화면에 무의미의 활력과 리듬감을 빚어내는 것이다. 섬의 고장 난 소품들도 잉여들의 소란에 가세한다. 작동하지 않는 축음기, 6년째 고장인 슬롯머신은 소음을 뱉어낼 뿐이며, 뚫린 교회 지붕의 구멍으로 비가 쏟아져 예배자들을 적신다. 서사는 진전을 잊고 소음들이 제멋대로 떠들며 소란을 합주한다. 이곳은 그런 잉여들과 소음들의 축제다. #17 #18 #19 #20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축제가 우리를 홀린다 해도, 이런 영화적 놀이가 과연 칭송받고 존중받아 마땅한가. 왜 우리는 이야기를 잊고 활개 치는 잉여의 숏들에 종종 매혹되는가. 잉여의 숏으로 충분하다면 이야기는 왜 필요한가. 가능한 대답 하나는 이야기의 구속이야말로 잉여의 숏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 안에 있으면서 이야기와 긴장하고 있지 않다면 잉여라고 불릴 이유도 없다. 위대한 숏이 심미적인 구도의 이미지이거나 이야기에 충실히 봉사하는 이미지가 아님은 물론이지만, 이야기로부터 독립적인 자기 완결적 이미지도 아닌, 이야기와 교섭하고 긴장하며 이야기를 넘어서려는 하나의 운동이다. 위대한 숏은 아무리 유희적으로 비치더라도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이라는 역설의 구현이다. < 도노반의 산호초 >가 유독 유희적으로 보인다면, 포드가 어떤 영화에서보다 이야기를 느슨하고 허술하게 만들어 곳곳의 틈새들을 잉여들의 놀이터로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술집에서의 난투극처럼 쓸데없는 장면도 드물 것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도노반의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게 된 길훌리는 술 마시러 온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하사관 셋을 경멸 투로 ‘수병(limey)’이라 부르며 내쫓으려 한다. 싸움이 붙으려는 찰나에 도노반이 뜯어말린다. “우린 전우였잖아”라는 도노반의 말에 수긍하고 웃으며 화해의 악수까지 나눈 뒤 ‘수병’은 뒤따라온 사병에게 “넌 저 양키 두 놈과 한패 먹어. 이제 3대3이지?”라며 사병의 얼굴을 갈긴다. 갑자기 싸움판이 벌어지자마자 길훌리는 수병이 아니라 도노반을 때려눕힌다. 몰려온 수병들까지 가세하지만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알 수 없는 난장판이 벌어진다. 그 와중에도 도노반은 길훌리가 일어설 때마다 때려눕힌다. 클라이맥스는 그다음이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길훌리가 난데없이 슬롯머신에 동전을 넣자, 6년째 고장이던 기계가 동전을 폭포수처럼 뱉어낸다. (#17 ~ #20) 이치에 닿지 않고 어리석으며 유치하고 폭력적인 본능의 퍼포먼스가 벌어진 뒤 갑자기 축복이 쏟아진다. 슬롯머신의 동전 세례는 말 그대로 하늘의 축복이다. 이 돈으로 비로소 교회의 지붕을 고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섬에선 그리고 < 도노반의 산호초 >에선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진지한 이야기가 다룰만한 심각한 문제란 존재하지 않고, 선의의 인간들은 게으른 시간을 누리며, 바다와 하늘과 사물들은 이유 없이 삐걱거리며 소음을 연주하고, 작은 구원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온다. 고장 난 사물, 심술궂은 대기의 변덕스러운 작동, 하지만 난데없이 되찾아지는 균형과 해결되는 갈등. <도노반의 산호초>가 장 르누아르의 <풀밭 위의 오찬>과 공유하는 게 있다면 인간의 서사를 오작동시키는 정령의 서사라는 점이다. 이건 존 포드의 전적으로 새로운 이야기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포드의 많은 서부극들은 이미 인간의 서사를 왜소하게 만드는 초월적 풍경의 서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21 또 다른 시퀀스 하나를 빠트리고 갈 수는 없다. 지붕이 수리되지 않은 교회에서 섬 주민들이 모여 성탄 미사를 시작한다. 프랑스인 지사가 내레이션을 시작하고 아이들과 몇몇 어른들이 이에 맞춰 기발한 퍼포먼스를 벌인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가 탄생한 다윗의 도시를 베들레헴이라 불렀다. 저 하늘의 별을 보라. 그때 동방에서 세 현자가 찾아왔다. 세 왕들은 선물을 들고 아기 예수 앞에 무릎 꿇고 경배했노라. 그중 한 명은...” 이때 섬의 원주민 경찰서장이 열대과일을 잔뜩 들고 등장한다. “폴리네시아 왕이었고...”(#21 ) #22 내레이션은 이렇게 이어진다. “중국의 황제도 왔으며...”. 이번에 지사의 비서이자 책사인 중국인 미스터 유가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등장한다. (#22 ) #23 “또 한 명은...” 이어지는 내레이션을 읽던 지사가 잠시 멈칫한다. “...또 한 명은 미국의 왕이었다.” 어이없게도 풀잎 면류관을 쓴 길훌리가 고장 난 축음기를 들고 등장한다. (#23) #24 이 순간 폭우가 쏟아진다. 모두 예상한 듯 우산을 꺼내 들지만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과 ‘미국의 왕’ 길훌리는 물세례를 받는다.(#24 ) 이것이 이 영화에서 인종주의를 다루는 포드의 방식이다. 서사의 기술이 아니라 액자화된 퍼포먼스로 인종 간의 화해를 노래하기. 포드는 이야기꾼이 아니다. 그는 서사의 정교한 장치를 채택하지 않는다. 허구로서의 서사적 해결을 설득하는 대신 그는 인종주의를 다룬 하위 서사를 과장되고 날조된 퍼포먼스로 제시한다. 과장과 날조를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이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에 영화에서 이야기의 지위, 인간의 서사를 다루는 포드의 중요한 태도가 담겨 있다. 그는 여전히 대지의 감독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