映畵上映許可申請書(再上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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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는 유현목 영화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기독교반공문예영화다. ‘기독교·반공·문예’는 당시 정권과 순치되고 나아가 권장되었던 요소들이어서 일견 검열에서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상영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공보부의 공식적인 검열 단계는 비교적 수월히 통과했지만 국방부, 중앙정보부, 내무부, 문교부의 개입이 이어졌다. 어떤 면에서는 국책과 순치되는 영화였기 때문에 관계기관들이 더 간섭하려는 면도 있었다. 또한 이 영화는 <7인의 여포로> 이후 국가가 영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통제하려던 분위기와 맞물려 있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엘리트들의 의견 역시 중요한 벡터로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순교자>를 둘러싼 논란과 검열 과정은 검열 관계기관들의 역학을 비롯해 <7인의 여포로> 이후 검열의 변화, 그리고 이로 인한 갈등이 당대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계층을 통해 봉합되는 국면을 드러낸다. <순교자>의 검열과정: 상영허가증 발급 이후 국방부, 정보부, 문교부, 내무부가 개입하다 1965년 3월5일 제작사(극동흥업)는 공보부에 <순교자> 영화 제작을 신고한다. 3월 20일에 “정부시책과의 관계-저촉 사항 없음”이라는 전제 하에 시정사항 4개가 지적되며 제작신고가 수리된다. 이후 영화가 완성되어 중도에 제작권한을 양도받은 합동영화주식회사 명의로 6월 10일 ‘영화상영허가신청서’가 제출된다. 6월 15일에 “보안상 유해로운 점 없음”이라는 검열의견서가 작성되고, 대사 1개처를 삭제하는 조건으로 6월 16일에 ‘영화상영허가증’이 발부된다. 그런데 상영이 허가된 6월 16일에 국방부에서 화면 1개처를 삭제하고 대사 1개처를 수정하라는 전언통신문을 보내온다. 공보부에서는 이미 영화상영허가증을 발부한 상태에서 내부적으로 고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월 18일 공보부 영화과 계장이 기안한 내부 결재 서류에 의하면 화면 1개처 삭제를 추가 제한사항으로 승인하지만, 이미 녹음이 끝난 뒤라 대사 수정은 불가능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방화 <순교자> 심사 의견 처리”라는 제목의 부전지에는 <순교자>는 “군사극영화가 아니고 종교극영화”로 “국방부 후원은 군장비 후원”이었고 공보부에서 “국방부에 심사 요청한 바가 없”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에 결국 6월 18일 공보부는 국방부에 직접 “수정사항을 업자 측에 통보하시고 수정토록 조치”하라는 전언통신문을 보낸다. 공보부와 국방부 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그림 1) 전언통신문: 국산극영화 “순교자” 심사의견 처리 검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순교자>가 아카데미극장에서 상영중이던 6월 22일에 중앙정보부는 “보안상 유해로운 것이 내포되어 있음을 발견”하였으므로 “삭제 후 상영토록” 하라고 공보부에 통보한다. 그 내용은 화면 3개처와 대사 3개처를 삭제하라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의 지적에 대해서는 공보부가 보다 긴장하는 기색이 서류에서도 감지된다. 6월23일 ‘방화 <순교자> 제한조치의견 처리’라는 제목의 서류에서 중앙정보부를 CIA라고 칭하며 “토의가 요하다고 사료되옵기 공람하고 회신은 추후 기안”하는 것으로 처리한다. 그러면서 ‘참고사항’으로 “검열 당시 CIA 파견 검열관”이 “보안상 유해로운 점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내용을 부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6월 15일 합동검열에 중앙정보부가 참여하여 “보안상 유해로운 점 없다”는데 동의해 놓고 뒤늦게 다른 소리를 하는 것에 대한 난감함이 묻어난다. 1964년 중앙정보부의 입장 번복으로 감독이 구속되었던 <7인의 여포로> 사건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냥 반공영화가 아니라 ‘기독교반공문예영화’였다. 6월 26일에 공보부는 이 영화가 “세계 각국에서 다량 발매된 재미교포” 작가의 소설에 충실하였다는 점과 “당초 귀부와의 합동검열 당시 합의된 바” 있으며, “귀부 추가제한요구를 집행하는 경우에 예견되는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는 점을 들어 “현행대로 상영토록” 하겠다는 의견을 중앙정보부에 통보한다. (그림 2) 방화 “순교자” 제한조치 요청에 대한 회신 이로써 국방부와 중앙정보부의 사후 검열은 일단락된 듯한데, 아직 등급을 정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6월 17일에 합동영화주식회사가 ‘학생관람허가신청서’를 공보부에 접수한 뒤 6월 26일에 문교부 측에서 제한사항 없이 ‘고등학생 이상’에 관람을 허용해도 된다는 의견을 공보부에 통보한다. 그런데 7월 2일에 문교부가 입장을 바꾸어 군인의 방에 걸린 태극기가 표준형이 아니므로 표준형 태극기로 화면을 수정해야 고등학교 이상 관람을 허용한다는 의견을 보낸다. 그리고 7월 6일에 내무부 치안국 보안과에서 ‘학생관람불가’ 의견을 공보부에 보낸다. 7월8일 공보부에서는 문교부와 내무부의 의견을 종합하여, 등급은 ‘미성년자관람불가’로, 문제가 된 태극기 화면은 표준형 태극기로 수정하여 필름과 대본까지 다시 제출하라고 제작사에 통보한다. <7인의 여포로> 사건, 유현목, 그리고 <순교자> 당시 정부의 정책 방향에 거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영화가 이렇게 수난을 겪게 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영화 한 편을 두고 문화 담당 기관은 물론 국가안보, 치안, 교육을 담당하는 복수의 행정기관들이 검열에 참여하였다는 데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해 국책에 부응하는 영화라고 해서 검열을 덜 받은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간섭하려는 기관이 많았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또한 <7인의 여포로> 사태 이후 중앙정보부가 영화 통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5.16쿠데타 직후에 설립된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정권 내내 전방위적으로 권력을 강화해간다. <7인의 여포로> 사태는 영화계에서 하나의 변곡점이 된 사건이었고 <순교자>는 그 여파 속에서 검열을 받은 것이었다. 여기에 당시 기독교계의 반응은 또 하나의 중요한 변수였다. 유현목 감독은 자서전에서 <순교자> 개봉 당시 상영을 앞두고 기독교계가 반발했다고 회고한다. 목사들이 문공부장관을 찾아가 영화에서 신목사(김진규)가 ‘신은 없다’고 말하는 대목을 문제 삼으며 상영금지를 호소했다는 것이다. 개봉한 이후에도 기독교계의 반대는 계속되어서 지방 상영극장 앞에서는 신자들이 입장을 막기도 했다고 말한다. 1) 당시 신문을 보면 기독교계가 일방적으로 반대만 한 것은 아니고 찬반이 있었다. 그리고 문제가 된 것은 영화만이 아니라 원작소설부터였다. 1964년 영문으로 출간된 『순교자』(The Martyred) 2) 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남한에도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소설 속 목사들의 죽음이 거룩한 순교로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국내 일부 기독교계에서는 김은국 작가를 “20세기의 가롯 유다”라고까지 비난했다. 유현목 감독이 이 소설을 영화화하자 큰 화제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에 대한 비난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목사들이 공산당 앞에서 신을 부정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것을 증언하는 인물이 북한군 소좌라는 것이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분단 이후 남한 개신교와 반공 이념의 강력한 결속이 ‘배교와 이단’의 판단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도 “현대 기독교의 문제를 제시하고 기독교적인 고민을 심화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목사들―문익환(한국신학교), 변선환(이화여고 교목), 김광우 목사 등―이 있었다. 3) 또한 언론에서도 “성직자의 고독을 묘파” 4) 한 “중량감 넘치는 역작” 5) 이라는 호평이 이어졌다. 그러던 7월 13일에 유현목 감독은 돌연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다. 1965년 3월 23일에 ‘은막의 자유’ 6) 라는 주제로 열린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본부 세미나에서 발제한 내용이 뒤늦게 말썽이 된 것이었다. 7) 공안 검찰은 <순교자>뿐만 아니라 <오발탄>(1961)과 <잉여인간>(1964)도 용공적이라고 판단하여 유현목 감독을 소환했다고 전한다. 8) <7인의 여포로>의 이만희 감독에 이어 또 다시 영화감독이 반공법으로 입건되는 데 대해 영화계는 물론 보수언론에서도 우려스러워했다. 9) 이와 같은 논란 속에서 <순교자>는 더욱이 문제작이 되었고, 영화에 대한 평가는 높아졌다. 1965년에 베니스영화제에 처음으로 5편을 출품했는데, 그 맨 앞에 <순교자>가 놓였다. 10) 1965년 『실버스크린』 6월호에서는 “세계명작을 영화화한 영화예술의 극치”로 <순교자>를 소개한다. 11) 그리고 9월호에서는 종전에 영화학도들을 위해 연재해오던 학술적인 코너 3개를 합쳐 “내일의 영화인을 위한 쎄미너”라는 지면을 만들고 개봉된 영화 중에서 문제작 한 편을 골라 집중적으로 분석 검토하는데, 그 첫 번째 텍스트로 <순교자>를 선정한다. 1965년 말에 가면 <순교자>에 대한 문화예술계의 평가는 “종교논쟁까지 불러일으켰던 작품”으로 “테마는 휴머니즘”으로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유현목 감독은 공보부에서 주관하는 대종상 감독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유현목 감독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계속되어 1966년 1월 서울지검은 반공법 위반에 음화제조 혐의(<춘몽>)를 더해 유현목 감독을 불구속 기소한다. 1967년 3월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고, 음화제조에 대해서는 벌금 3만원 형이 확정되기까지 법적 논란은 계속된다. 일련의 과정은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검찰이 중앙정보부와 함께 문화예술까지 재단할 수 있는 상위의 공권력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해 둘 것은 이런 가운데 <순교자>는 미국에 첫 수출되어 상영된 영화 13) 가 되었다는 점이다. 기독교를 매개로 한국전쟁과 인권 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 속에서 국내 공권력의 역학 밖에서 움직이는 힘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로 인한 박정희 정권과 기독교계의 충돌은 1970년대에 들어서며 본격화된다. 1) 유현목, 《영화인생》, 혜화당, 1995, 151-152쪽. 2) Richard E. Kim, The Martyred, George Braziier Inc., N.Y.C., 1964. 3) <기독교계에 순교자 파문>, 《동아일보》, 1965.6.29. 4) <[새영화] 성직자의 고독을 묘파>, 《경향신문》, 1965.6.19. 5) <[영화평] 중량감 넘치는 역작>, 《조선일보》, 1965.6.20. 6) <은막의 자유>, 《경향신문》, 1965.3.24.; <은막의 자유」, 《조선일보》, 1965.3.25. 7) <영화감독 유현목 씨 입건>, 《경향신문》, 1965.7.13. 8)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말썽>, 《조선일보》, 1965.7.14. 9) <만물상>, 《조선일보》, 1965.7.15. 10) <<순교자> 등 다섯 작품 베니스영화제에 출품>, 《동아일보》, 1965.9.14. 11) <[이달의 문제작] 세계명작을 영화화한 영화예술의 극치>, 《실버스크린》, 1965년 6월호, 114쪽. 12) <[지상콘테스트 200자 시리즈(완)] 청룡상에 출품된 영화들-순교자>, 《조선일보》, 1965.11.28. 13) <영화 <순교자> 미에 첫 수출>, 《동아일보》, 1966.7.21.; <미주 등서 일제상영>, 《조선일보》, 1966.7.21.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에 기반한 외교 정책은 부재했고 식민지배의 역사적 책임은 온전히 제기되지도 못한 채 ‘경제난 해결’이라는 미명으로 ‘경제협력자금’ 3억 달러에 협상은 서둘러 종결되었다.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태평양 냉전 질서 아래서 종용된 화해였고 굴복이었다. 그 결과 국민적 반발은 극에 달했고, 1964년 4월에는 박정희 정권을 탄생시킨 ‘민족적 민주주의’가 기만적인 구호였음을 폭로하는 ‘화형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6.3 학생운동으로 확대된 시민적 저항은 결국 위수령과 계엄령이 발동되면서 진압되었는데, 협정이 체결된 7차 한일회담은 그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열린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한일협정은 ‘굴욕외교’, ‘구걸협상’으로 표상되었다. 식민지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이 가질법한 분노와 울분이 투영된 현실인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신(新) 식민지적 종속 관계를 예기하는 모종의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지점은 일본에 대한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정서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잉여, 혹은 복합적이고 양가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식적인 민족 서사의 문법과 달리 대중문화를 매개로 사적영역에서 작동하는 일본에 대한 정서는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식민지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의 근본적인 비극은 헤게모니를 지닌 식민국의 문화적 감성을 향수(享受/鄕愁)하게 된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장은 이러한 대중의 부인된(disavowed) 욕망을 기민하게 포착해냈다. 거리의 가판대를 메운 ‘왜색잡지’와 다방에서 들려오는 일본 대중가요는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일본을 우선 알고 거기에 대처할 민족적 주체성 확립해야 한다”는 논리는 “노도처럼 밀려들어와 우리의 말초신경을 간지럽히는” 1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금기와 선망이 착종된 양가감정의 표현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영화계에서는 한일친선과 문화교류 문제가 적극적으로 논의된다. 물론, 일본영화 수입과 한일 합작영화에 기대를 거는 측은 외국영화 수입업자들이었다. 방화제작자들은 일본과의 합작영화는 미끼일 뿐이며, 이를 통해 일본 자본이 국내 영화제작계에 유입되면 한국영화는 일본의 영화산업에 종속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정책당국의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국민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민족주의 정서에 기대어 일본대중문화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1965년에 내려진 <동백 아가씨> 방송금지 조치는 단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수입업자의 입장에서는 일본영화 수입이 개방되면 그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이 분명했기에 자신들의 뜻을 인적교류에서부터 단계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했다. <잊지 못할 모정(Typhon sur Nagasaki, 1957)>를 수입 배급했던 세기상사는 누구보다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행위 주체였다. ‘한국영화’ 최초로 일본배우가 캐스팅되어 논란이 되었던 <총독의 딸>(1965)은 세기상사가 제작한 영화로 제작단계에서부터 공보부와 마찰을 빚었다. 세기상사는 공보부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촬영을 진행했고, 결국 영화는 상영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있다고 하여 정책당국이 일본문화를 전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었다. 일본과의 수교를 맺은 박정희 정부로서는 자유아시아의 우방이자 이웃으로서 일본과의 친선과 우호를 강조해야 했기에 한편으로는 교류의 방식과 정도를 제시해야 했다 2 . 이와 같이 일관된 원칙이 작동될 수 없는 틈으로 일본영화계와의 교류를 시도하려는 기획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는데, 제작의 측면에서는 일본과의 인적 교류와 로케이션 촬영을 확대해나갔다면, 외화수입의 측면에서는 일본인 배우가 출연한 서구 영화를 수입 상영함으로써 일본을 금지하는 제도적 기준을 완화시키려 노력했다. 일본영화에 대한 문화적 금기의 핵심은 배우였다. “제작신고에는 일본에서 필요한 장면만 찍겠다”고 로케이션 촬영 승인을 받은 뒤 현지에서 일본 배우를 출연시킴에 따라 촬영중지를 통보 받은 <고안>(최무룡, 1966) 3 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의 공보부의 입장은 “로케와 일본인의 기술지도는 무방하나 일본배우의 출연은 아직 허가할 수 없다” 4 는 것이었다. 일본 배우의 출연은 외국영화를 수입하는 데도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1965년 MGM에서 제작한 <8월15야(夜)의 찻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1956)>의 경우,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 출연하여 국제적인 인지를 얻은 교 마치코(京マチ子)를 비롯하여 다수의 일본 배우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수입추천을 승인 받지 못했다. 이후 세기상사는 진정서를 제출하며 지속적인 민원을 통해 수입 및 상영 허가를 취득하게 된다. <잊지 못할 모정>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경우인데, 심의 서류에는 세기상사가 자신들의 기획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일수교의 논리와 검열행정의 내적인 일관성 그리고 상영보류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거론하여 행정당국을 압박하는 정황들이 담겨 있다. 사실, 이브 샴피(Yves Ciampi)가 연출한 <잊지 못할 모정>은 1957년에 제작된 영화로 나가사키의 조선소에서 일하는 선박 기사 말샤크(Jean Marais)와 노리코(기시 게이코, 岸 惠子)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어 왜색시비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세기상사는 1964년 9월 영화를 수입한 뒤 1966년에 상영 허가 신청을 접수한다. 1966년 시점에서 외화 수입과 상영 과정은 크게 1. 외국영화 수입추천허가 절차, 2. 상영허가 승인 절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하에서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 중인 <잊지 못할 모정>의 심의 서류를 중심으로 수입과 상영 과정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1. 외국영화수입추천허가 1962년 1월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영화업자는 외국영화를 수입‧상영하기 위해서 공보부에 ‘외국영화 수입추천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뒤 승인을 얻어야 했다. 영화 시장에서 외국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았고, 이들 영화가 야기하는 사상과 풍속의 문제 또한 컸기에 영화검열 행정에서 외화수입을 통제, 관리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1956년 문교부에서 영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우수영화 포상제도로 외국영화수입 쿼터를 배정하면서 정부는 보다 효율적으로 외화 관리를 할 수 있었는데, 5.16 이후 검열권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추천허가절차’가 신설되었다 5 . 이는 수입된 외화가 상영되지 못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는 의미가 있으나 수입업자들은 사전검열의 형태로 ‘수입추천허가’를 받아야 했다 6 . 수입추천을 받기 위해 영화수업업체는 영화 제명 및 원제, 제작주체, 필름종별 및 규격, 권수, 판권대금과 같은 영화에 대한 제반 정보를 담은 ‘허가신청서’를 비롯하여, 영화의 원문 대본 1통과 국문 대본 3통, 그리고 수입면장 및 기타 요청 서류들을 구비하여 공보부에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정적 절차가 제한과 통제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국영화 수입과정은 외환관리법을 비롯하여 통관절차에 따른 관계 법령을 준수해야 했기에, 공보부는 상공부, 서울세관, 외환은행과 긴밀히 협력하며 통상에 필요한 절차를 일원화하여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검열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근본적으로 통치 합리성을 제고하려는 국가 이성의 산물인 만큼, 개별 텍스트에 대한 검열과정은 일반 행정업무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수입추천단계와 관련된 서류들은 아래와 같다. 1) 외국영화 수입추천 허가신청서 제출(1964.9.10.) <잊지 못할 모정> 수입추천 허가신청서 영화 <잊지 못할 모정>의 수입사인 세기상사는 1964년 9월 10일 공보부에게 영화수입추천 허가를 위한 신청서를 제출한다. 신청인은 한국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 유성엽이며,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1964.9.14.)하여 공보부의 승인을 받았다.(1964,9.15.) 신청서에는 영화의 제작 정보만이 아니라 종별(천연색, 와이드스크린)과 규격(35mm, 12권, 3편) 및 판권대금(US $4,000)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영화필름과 원문 대본 1통(번역문 포함), 국문 대본 3통 그리고 수입면장 및 기타자료를 첨부했음을 알 수 있다. 기타자료에는 리버티상사와 체결한 계약서 사본과 영문으로 된 전신(cable), 그리고 외화수입쿼터 배정서와 각서가 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전신을 통해서는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는데, 한국에서 통용되는 라이센스 기한은 10년이며 신용장 개설 은행 정보를 비롯한 결제 기한(1964.9.30.)이 명시되어 있다. 공보부에서 외환은행 기관장에게 보낸 배정서에는 외화수입권을 배정받은 대한영화주식회사의 외화수입업무를 세기상사가 대행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잊지 못할 모정> 수입 추천 신청 단계에서 세기상사가 제출한 각서 수입추천 단계에서 눈에 띄는 것이 각서인데, 총 두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세기상사 대표이사 이기동의 이름으로 공보부에 보내는 것으로서, 각서에는 “영화의 왜색 및 감독의 사상관계나 기타 귀부의 심사 기준에 저촉되는 경우에는 하시든지”(언제든지) 공보부의 지시대로 따르겠다 내용을 담고 있다. 수기로 작성된 다른 종류의 각서는 모두 2통인데, 모두 한국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작성된 것으로서, “필름이 도착 즉시 실사고사를 받을 것”이며 “고사규정에 저촉되거나 상영이 불허가 되는 경우에는” “신용장 개설을 비롯한 제반 책임을 본인이 부담”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후 상영 허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참조해볼 때, 책임을 소재를 정하는 각서가 강력한 구속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기타자료에는 수기로 작성한 영화 해설과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다. 동일한 양식의 서류가 3부인 점을 미루어보아, 외화수입 절차를 담당하는 주무부처인 상공부와 서울세관 그리고 외환은행에게 각각 보낸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담은 해설인데,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악의 결산>으로 발란서의 제일선 감독으로 각광을 받은 바 있는 “이브 샴피” 감독이 처음으로 시도한 동양색체가 짙은 감명 깊은 명화 이다. 이 영화제작을 위해 제작기간 2년, 구상에 3년, 광대한 오픈 세트 등 영화사상 공전의 스케일의 획기적 거작이다. 특기할 것은 일본 나가사키시를 방불케 하는 광대한 오픈세트를 건조했다는 사실이다. 출연인 너무나 유명한 불란서의 일급 배우 “장 마레-”와 상대역인 세기의 미녀 “다니엘 다류-”, 조연엔 일본의 인기 여우 “기시 게이코”가 각각 출연하여 초연을 보여주고 있다. (강조는 인용자) 영화가 일본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일본인 여성과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에서 드러나는 ‘일본색체’는 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입사는 이를 “동양색체”로 설명하고 있는데,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나가사키’도 사실 “일본 나가사키를 방불케 하는 광대한 오픈 세트”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 영화가 프랑스 감독과 배우가 주축을 이룬 작품임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수입대행사인 세기상사는 서류심사만으로 수입 추천을 승인해야 하는 행정절차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영화 <잊지 못할 모정> 수입추천 통지 본 영화는 불란서 파테시네마 델라필름사가 1956년도 제작한 작품으로서 선박소에 근무하는 우수한 청년 기사 말사크는 친구의 소개로 '노리'라는 처녀를 알게 되어 사랑하는 중 우연히 그의 옛 애인 후란스와즈가 나타나 고민하게 된다. 말사크는 후란스와즈를 잊기 위해 출장을 떠난다. 돌아오는 날 밤, 나가사끼엔 심한 태풍이 불어 ‘노리’를 염려하며 그녀를 찾았으나 건물에 깔려 이미 숨을 거두고 이러한 사실을 본 후란스와즈는 그를 단념하고 나가사끼를 떠난다는 내용. (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영화사에서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공보부에서는 유관 부처로 협조 공문을 보내는데, 참고 항목으로 부기된 내용에서는 영화에서 기시 게이코가 분한 노리코의 이름이 ‘노리’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세기상사가 제출한 자료에 근거한 것인데, ‘노리코’의 이름을 ‘노리’로 명명함으로써 왜색 시비를 비켜가고자 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관계기관에 수입추천 서류를 발송한 다음날인 1964년 10월 2일, 공보부에서는 한국영화주식회사 유성엽 앞으로 ‘외국영화 수입추천’ 건에 대해 관계 기관에서 추천을 하였다는 공문을 보낸다. 본편에 대한 수입추천 허가승인 절차가 완료된 후, 1964년 12월 11일 대한영화사는 예고편 통관을 위한 품의서를 공보부에 제출한다. 예고편은 총 10권으로 한 편당 1권임을 감안해볼 때, 10편의 예고편이 들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보부는 12월 22일자로 서울세관에 협조공문을 제출하면서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수입추천 허가절차가 마무리된다. 2. 상영허가 승인 절차 1966년 1월 6일, 세기영화사는 수입한 영화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한다. 영화가 수입된 절차가 완료된 시기가 1964년 12월 22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영화가 수입된 지 1년이 지난 시점까지 상영허가는 신청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추론컨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일협정을 둘러싼 시민적 저항이 극에 달했기에 상황의 변화를 지켜봤던 것이라 생각된다. 아니면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정 체결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 일본영화 수입개방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가늠해보고자 논란이 될 만한 영화를 수입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영화 수입을 주도한 것은 한국영화주식회사라기보다 세기상사라 할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세기상사는 12월 9일자로 외국영화 수입추천 명의변경 신청서를 양도증 사본과 함께 공보부에 제출한다. 이로써 세기상사는 수입대행업무가 아닌 영화를 수입, 배급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상영허가를 둘러싸고 공보부와 세기상사는 마찰을 빚게 된다. 공보부의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민족주의 정서가 반정부적인 방향으로 표출되는 데 대한 부담감으로 영화 상영을 보류할 필요성이 있었다. 반면 세기상사의 입장에서는 공보부의 수입추천허가에 의해 수입된 영화를 공보부가 상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절차의 합리성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했다. 다음은 4차에 걸친 상영허가 신청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다. 1) 제1차 시도 (1)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서 제출(1966.1.6.) 1966년 1월 6일 세기상사는 공보부에 <잊지 못할 모정>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해당 서류에는 수입신청허가 시와 동일하게 영화에 대한 제반 정보와 영화필름, 대본 및 별첨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시세완납증명서를 비롯하여 필름 입고증, 문화영화수속필증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는 1966년 12월 2차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지기 이전 시점이어서 62년 영화법의 시행령을 따르는데, 문화영화수속필증은 일반 극영화 상영 시 문화영화의 의무상영 조항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점은 <고래>라는 제명의 문화영화의 제작사가 세기상사주식회사라는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문화영화는 정부가 제공하는 공보영화 차원을 넘어 계몽성을 핵심적인 속성으로 갖춘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아우르는 역사적 개념인데, 문화영화의 의무상영이 제도화되면서 문화영화를 제작하는 민간회사가 생겨나기도 했다 7 . (2) 외국영화 상영허가 보류(1966.1.11.) <잊지 못할 모정> 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보류 통보 서류 발신: 공보부 장관 수신: 세기상사주식회사 우기동 제목: 외국영화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보류통보 위하가 66.1.10자로 제출한 외국영화 <잊지 못할 모정>의 상영허가 신청은 동 영화를 심사 결과 당부 방침에 의하여 상영허가가 보류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끝. 부내 참고: 본 영화는 왜색이 농후한 영화임 . 세기상사는 상영허가 신청 당시 연소자 관람 신청서도 함께 제출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수입 추천까지 받은 영화가 상영보류 통보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3) 중앙정보부에서의 재심의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의견 통보 검열서류에는 없지만, 1월 11일자로 상영보류를 통보받은 세기영화사는 재심을 청구한 것으로 보인다. 위 서류에서 알 수 있듯이, 1966년 1월 29일 중앙정보부에서는 “65년 1월 12일(66년의 오기)”자로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해 재심을 진행하였다. 중앙정보부가 심의에 참여하여 의견서를 보내는 경우는 일반적인 절차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즉, 공보부가 당시의 정세를 고려하여 정무적인 판단을 내림에 있어 중앙정보부의 의견을 요청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4) 외국영화 상영보류 최종 통보(1966.3.28.) 중앙정보부는 해당 영화가 “보안상 지장이 없음으로 공보부 장관이 적의 판단 조치”할 것을 주문하는데, 공보부에서는 1966년 3월 28일자로 세기상사에게 다시 한 번 상영보류 통보를 내린다. 이유는 1차와 동일하다. 2) 제2차 시도 (1) 진정서 제출(1966.3.29.) <잊지 못할 모정> 수입 관련 세기상사가 공보부 장관에게 보낸 진정서 첫 페이지 진정서 수신: 공보부장관 귀하/ 제목: 진정서 귀부의 1966년 3월 28일 자 공보영 1733.2~2959에 의한 외국영화 상영허가신청에 대한 불허가 통보는 감사히 복송하였읍니다. 취송(就悚) 본건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귀부의 정책상 이유로 당분간 허가할 수 없다는 통보취지에 대하여는 폐사(弊社)로서도 타의 없이 충분히 이해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폐사로서 본건 "잊지 못할 모정"에 관하여 국내상영예정하에 (1) 서기 1964년 10월 2일 자로 귀부의 수입추천을 받고 (2) 동시에 신용장을 개설하고 (3) 서기 1966년 1월 6일 자로 통관절차를 필하여 서기 1966년 1월 10일 자로 귀부에 상영허가신청에 이르기까지 막중한 자금을 투입하여 동 필름은 완전 국내물품으로 되어 있는 즉 상영치 않으면 안 될 불가피한 고충에 직면하고 있는 실상 을 보살펴 주시고 더욱 본건과 견연(牽連)지어서 기왕 국내에서 상영한 바 있는 소위 왜색영화의 경우를 대조적인 면에서 돌이켜보시더라도 국교정상화 이전에 있어 한 때 한일 간의 격앙된 국민감정에 아무런 자극됨이 없이 (1) <흑선>, <전장과 영원히>, <8.15의 찻집>, <해병에 동경에 가다>, <벽안의 나비 부인>, <카이강의 다리>, <원한의 도곡리 철교> 등을 상영한 선례 를 상기하시와 보살펴주시고, 특히 본건 "잊지 못할 모정"의 경우는 문화교류의 성과면에서 보더라도 음악 및 미술과 문학 등이 불란서의 문화적 지반을 기조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2차 대전 당시 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일본 장기(인용자: 나가사키) 등을 배경으로 하여 본 영화를 제작함에 이른 불일 간 국민감정의 순화는 목하 한일 국교정상화가 실현된 차제에 있어 무형의 정책적 PR에 도움이 되는 좋은 하나의 선도적 동인이 됨에 족할 것이며 , 더욱 한일국교 정상화의 당면한 중요 과정에 비추어보더라도 한일 간 문화교류의 계단적인(인용자: 단계적인의 오기) 일책으로써 이상 진정들인 수단에 정황을 현찰하시와 본건 영화 "잊지 못할 모정"이 상영되도록 허가하여 주시압기 바라옵고 자이 진정서를 올리나이다. 세기상사주식회사 대표이사 우기동 (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2번에 걸친 상영보류 통보를 받은 세기상사는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공보부 장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한다. 진정의 핵심은 공보부가 고시한 행정 절차에 따라 수입추천을 받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고, 일본인이 출연하거나 참여한 영화가 상영된 선례가 이미 있고, 국교 정상화가 실현된 시점에 해당 영화가 정책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홍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진정에 대한 회신(1966.4.4.) 공보부는 1966년 3월 30일자로 제출된 진정서에 대해서 1966년 3월 28일에 통보한 바와 같이 당분간 허가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간략하게 통보한다. 세기상사가 상영불허가 판단의 불합리성을 조목조목 짚은 것과 대조적으로, 공보부에서는 별다른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당분간 허락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한 것이다. 3) 제3차 시도 (1) 외국영화 산영허가 신청 사유서(1966.8.4.) 세기상사는 공보부의 보류 통보를 일단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본 동보가 제작한 작품으로 특히 감독 및 기타 기술진영 전원이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제작된 동경 올림픽 영화가 상영허가”를 받게 되자 세기상사는 다시금 상영허가를 신청한다. 반려 이유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영화 상영허가를 보류했다면, ‘동경 올림픽 영화’ 또한 개봉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진정에 대한 회신(1966.9.12.) 공보부는 별다른 이유 없이 다시금 진정 내용에 대해 불가 통보를 한다. 다만, 달라진 점은 “당부정책 상” 허가할 수 없다는 부분을 수정하여 “당부정책이 변경될 때가지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영화 상영 허가를 보류한 것은 기관의 정책적 일관성에 의해서라기보다 당시의 정무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세기상사의 입장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4) 제4차 시도 (1)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서 두 번의 진정이 묵살되지 세기상사는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를 다시금 신청하게 된다. 서류상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류 작성일은 1966년 8월 3일이나, 이를 접수한 시점은 9월 14일이라는 사실이다. 즉, 두 번째 진정을 통해 해법을 찾으려 했던 시도가 어그러지자 행정 당국의 비일관적인 처사를 비판하는 ‘신청사유서’와 함께 상영허가 절차를 새롭게 밟음으로써 공보부를 압박하는 전략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회신(1966.10.10.) <잊지 못할 모정> 수입에 대한 방침을 밝힌 공보부 내부 메모 반복된 진정과 신청사유서를 통해 공보부의 행정적 실책을 지목함으로써 공보부는 그에 대한 해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1966년 10월 10일자로 세기상사로 통보된 상영허가 보류 판정은 이전과는 달리 그 이유가 상세히 부가되어 있다. 판정이 핵심 이유를 요약한 메모의 내용을 보면 해당 영화가 “불란서 제작이라고 하나 일본 가요(歌謠), 민속(民俗), 무용(舞踊) 등이 처음서 끝까지 강하게 나타나 일부분을 삭제(削除)할 수도 없는 영화이므로 한일 영화교류가 시작(始作)될 때까지 상영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5) 제5차 시도 1966년 12월 20일, 세기상사는 다시금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해당 서류 또한 앞서와 동일하게 8월 3일에 작성된 것이지만, 접수는 4개월 뒤인 12월 20일이 이루어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세기상사는 별도의 진정서나 사유서 없이 영화의 상영허가를 신청하는데, 공보부에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이를 승인한다. 공보부의 <잊지 못할 모정> 상영 허가 통보 서류 결국 5번째 상영허가 신청을 낸 끝에 공보부에서는 해당 영화에 대한 상영허가를 통보한다. 그러나 내부결재 문서에는 국내상영이 무방하다고 판단한 근거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해당 영화의 줄거리만을 요약해놓았다. 다만 실사 검열을 통해 화면 6개처, 녹음 9개처를 삭제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를 통해 유추해본다면 공보부가 문제 삼았던 ‘왜색시비’는 정책 당국의 입장에서는 정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영화가 프랑스에서 제작되었던 만큼 일본에 대한 서구의 이국적 취향을 충족시킬 요소들이 과도하여 왜색이 매우 짙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세기상사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 영화를 개봉하였는데, 심의 서류를 토대로 이를 재구성해 볼 때 검열 당국과 시장 주체들 사이의 권력 관계가 일방적으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민족의 자주성(4) - 영화, 음악」, 《경향신문》, 1965.12.22. 2. 이화진, 「‘65년 체제’의 시각 정치와 <총독의 딸>」, 『한국근대문학연구』 18(1), 2017, 282-283쪽. - 이 논문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65년 체제’ 아래서 일본을 특정한 방식으로 (비)가시화하는 시각장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극장에 상영된 적도 없이 영화사의 서술로부터 배제된 <총독의 딸>의 제작 과정과 심의 단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3. 서울방송국 연속극 <동경 나그네>의 영화화한 작품으로 최무룡이 제작 및 감독을 맡았으나, 결국 촬영이 무산되어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 여파로 최무룡은 김지미와 이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4. 「TBC의 〈동경 나그네〉 일본 현지 촬영 중지령」, 《중앙일보》 1966.12.03. 5. 우수영화 제작에 대한 포상으로 외국영화수입쿼터 배분과 영화법 개정에 대한 논의는 조준형, 「지배하는 국가와 교활한 시장」, 이순진, 이승희 편, 『한국영화와 민주주의』, 선인, 2011, 311-346쪽 참조. 6. 수입추천허가신청 단계에서 제한을 두는 경우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심의 서류 해제」(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를 참조할 것. 7. 1960년대 문화영화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조준형, 「문화영화의 제도화 과정: 1960~70년대 영화법과 관련 정책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지워진 한국영화사 – 문화영화의 안과 밖』, 한국영상자료원, 2014, 75~114쪽 참조.
1967년 <청춘극장>(강대진)과 검열의 체계화 검열이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때는 검열에서 위반사항이 발견되지 않을 때이다. 1967년 <청춘극장>은 바로 이러한 역설의 증거인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1965년 이후 왜색에 대한 검열은 강화되었음에도 1967년 <청춘극장> 검열에서는 왜색 문제가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제작자가 미리 검열 기준을 의식하여 검열에서 문제가 될 만한 왜색을 노출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별 문제 없이 검열을 통과한다. 그런데 1967년 <청춘극장> 검열 과정을 들여다보면 왜색의 사전 삭제와 같이 제작자로 하여금 미리 자체 검열을 통해 제한사항을 최소화하게 만들도록 검열이 체계적으로 강고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영화법 제2차 개정(1966년 8월3일 개정)과 시행(1967년 4월4일 시행)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검열제도의 변화가 보다 잘 드러나기도 한다. 1966년 6월29일에 <청춘극장>의 제작신고서가 공보부 1) 영화과에 제출된다. 1966년 3월4일에 사단법인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한 것으로 되어 있고, 별첨되어 있는 공연권취득증명서가 3월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제작사는 3월부터 이 영화의 제작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7월7일에 공보부에서는 영화제작사인 합동영화주식회사가 시나리오와 전속출연자 활용각서를 첨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극영화 제작신고에 따르는 미비서류 보완 통보>를 제작사에 보낸다. 8월3일자로 개정된 영화법 에 의해 시나리오 검열은 법제화되는 반면 전속제는 폐지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요구는 과도기적인 중복으로 보인다. 제작사는 영화법이 개정되고 난 10월이 되어서야 공보부에서 요구한 보완서류를 제출한다. 그리고 2개월 후인 12월6일에 공보부 영화과에서는 ‘시정사항 없음’으로 시나리오 검열 의견서가 기안된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행정 절차가 상당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림 1) <영화제작신고서> (그림 2) <극영화 제작신고에 따르는 미비서류 보완 통보> (그림 3) <극영화 시나리오 내용 검토> 2차 영화법 개정 이후 신규영화허가신청서에 구비해야 하는 서류는 영화시나리오를 비롯해 납세완납증명서, 자립저축필증, 동시상영문화영화복사수속필증 등 13가지로 보다 복잡해졌다. 이를 통해 보건대 개정된 영화법의 시행은 1967년 4월3일이라고 하나 제출 서류에 대한 관리가 보다 엄격해짐으로써 실제로는 이미 개정된 영화법에 준하는 행정 검열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공보부 측의 미비서류를 제출해달라는 요청과 그에 따른 제작사의 보완 제출이 있은 끝에 1966년 12월29일자로 <영화검열합격증>이 발부된다. (그림 4) <신규 영화상영허가신청서(구비서류목록)> (그림 5) <국산영화 “청춘극장” 상영허가>와 별첨 <영화검열합격증> 위 서류에 의하면 <청춘극장>은 “원작인 『청춘극장』을 영화화한 것으로서, 때는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무렵, 우리나라 젊은 학도 백영민, 장일수, 신성호 등은 각자 풍운의 꿈을 안고 항일투사로 일본유학생으로 또는 국내에서 애국활동을 하던 청춘상을 그린 극영화”로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은 1959년의 것(“가혹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한국청년들과 여성들의 활약상과 이들 젊은이들의 애정 문제를 묘사한 내용”)에 비해 항일운동과 애국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일한 제한사항이 백영민이 학병으로 출전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일본 군가를 단축하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강화된 왜색 검열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이 항일 애국주의의 강화와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영화에 대한 미성년자 관람 심사에서는 보다 많은 제한이 이루어졌다. 우선 등급은 중학생 이상 관람가가 되었는데, 그에 비례하여 겁탈 장면, 캬바레에서 무희가 춤추는 장면, 영민이와 유경의 정사가 암시되는 장면, 임신을 알리는 대사 등 주로 성적인 장면들이 삭제 대상이 되었다. 1965년 <춘몽>을 둘러싼 음화 논란 이후 공안에 가려져 있던 외설이 검열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부상한다. <청춘극장>의 관람 등급 심사에서 제한된 내용은 성적인 표현에서도 검열이 보다 엄혹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6) <영화 미성년자 관람심사 결과 통보> 1975년 <청춘극장>(변장호)과 무너지는 검열 1975년 <청춘극장>은 사회가 유신체제로 이행되고 제4차 영화법 개정(1973년 2월16일)이 이루어진 이후, 게다가 긴급조치 이후에 제작된 영화다. 제4차 영화법 개정의 골자는 영화 표현 영역에서 유신체제의 기조를 관철하는 것이었으므로 표현의 자유는 더욱 통제되고 억압되었다. 통제와 억압의 강도는 긴급조치 이후에 나날이 심해졌으며, 그에 따라 영화 검열기준 또한 강고해졌다. 1975년 <청춘극장>의 검열 서류는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1975년 <청춘극장>에 대한 시나리오 검열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 이전 <청춘극장>의 검열 서류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의 등장이다. 예륜은 1970년부터 극영화 시나리오 검열을 전담한 기관이다. 제작사는 우선 예륜의 시나리오 검열을 거친 뒤에야 검열 담당 부처(공보부, 문화공보부 등)에 제작신고를 할 수 있었다. 이에 1975년 <청춘극장>의 시나리오 검열도 ‘예륜’에서 수행한 후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청춘극장>의 제작사는 1975년 6월17일자로 시나리오 검열을 예륜에 신청하고, 예륜은 6월20일에 검열을 수행하여 공보부에 보고한 것이다.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에는 이 영화의 내용이 “꼬마 신랑 백영민과 장일수, 신성호는 동창생이었다. 이들이 일제 치하에 겪는 수난을 묘사하여 식민지 치하의 형극의 길을 걸었던 민족의 불운을 되돌아보는 광복 3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라고 요약되어 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점은 ‘수난’, ‘형극’과 같은 국가의 위기를 상기시키는 표현이 쓰이고 있고 ‘민족’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 시국과 결부하여 생각할 때”라는 전제 하에 “비록 일제 때 있었던 학병 강제 동원 등[이라 하더라도] 일반에게 전쟁기피증과 반전사상을 주입시키는 악영향을 주지 않도록 세심 유의”하라는 의견이 첫 번째로 명시되어 있다. 당시는 남북한 모두 정권 유지를 위한 이념이 강화되며 남북한 관계가 경색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고조시켜 사회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는 한편 언제든지 국민을 전쟁에 강제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 검열에서 항일정신의 구현을 영화의 미덕으로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식민지 시대의 전쟁이라 하더라도 반전의식을 고취시켜서는 안된다는 모순적인 제한조치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7)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그림 8) <종합의견 보충설명 및 부분시정사항> 예륜의 시나리오 검열 단계를 통과한 제작사는 제작에 착수하겠다는 신고서를 1975년 7월1일자로 문화공보부에 제출한다. 문화공보부에서는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에 의거하여 시나리오를 개작하라고 7월7일자로 제작사에 통보한다. 이에 7월12일 제작사는 문화공보부의 개작 요구에 따라 충실히 수정하겠다는 보고서와 함께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한다. 문화공보부 영화과에서는 개작된 시나리오에 대한 내용을 검토하여 상부에 보고하면서 제작사에 수리 통보를 한다. 이때 “본 작품은 제작과정에서 사계 권위자의 고중을 받아 시대적 배경으로 뚜렷이 하여 전쟁기피증 및 반전사상과 대일 굴욕감정이 유발되지 않도록 특히 유의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에 대한 적대의식은 고양하되 염전(厭戰)의식은 지양하라는 지침이 다시금 강조된다. (그림 9) <국산극영화 “청춘극장” 대본 개작 통보> (그림 10) <국산극영화 “청춘극장” 대본 개작 보고의 건> (그림 11) <극영화 “청춘극장” 제작신고 수리 통보> 그리고 두 달 후인 9월18일에 제작사는 방대한 제작규모에 비해 제작시일이 촉박하여 시나리오 검열에서 시정이 요구된 사항을 다 고치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사죄하는 내용의 각서와 경위서를 제출한다. 이에 대한 별다른 조치 없이 이튿날인 9월19일에 이 영화는 검열에 합격한다. 이는 늘어나는 제한조치에 비해 그것을 위반했을 시의 조치는 의외로 탄력적이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영화 검열 의견서에서는 “백영민과 장일수, 신성호는 학교 동창생으로서 이들이 일제 치하에 겪는 수난을 묘사하여 식민지 치하의 형극을 걸었던 민족의 수난사를 되돌아보는 내용”이라고 하면서도 또 다시 꽤 많은 제한사항을 통보하고 있다. ‘학생이 선생에게 대드는 장면’, ‘대통령 모독’, ‘성적인 표현’ 등이 주로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제한사항은 중학생 이상 관람할 수 있게 한 관람 등급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2) <국산영화 “청춘극장” 검열합격> (그림 13) <영화검열 의견서> 1975년 <청춘극장>에서는 그 이전에 없었던 예고편에 대한 검열까지 이루어진다. 본편이 검열에 합격한 지 일주일 뒤인 9월25일에 제작사는 <예고편 검열신청서>를 제출한다. 이때에도 납세증명서가 첨부된다. 그리고 9월27일에 예고편 검열 합격이 통보된다. 여기에서도 주요인물의 별칭에 해당하는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삭제하라는 제한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림 14) <예고편 영화검열 신청서> (그림 15) <국산 영화 예고편 “청춘극장” 검열합격> (그림 16) <청춘극장 예고편 검열대본> 중 마지막 페이지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1975년 <청춘극장>은 대본 검열에서부터 예고편 검열에 이르기까지 보다 많은 검열 단계를 거치며 또 그만큼 많은 시정을 명령받았다. 한 마디로 1959년, 1967년보다 매우 엄격한 제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대통령’이나 ‘장군’과 같이 군부와 관련된 표현에 대해서는 히스테릭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과민한 검열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드는 것에 대해 대단히 엄격했음이 드러난다. 설사 그것이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선생의 관계라 하더라도 ‘하극상’은 용납될 수 없다는 식이었다. 이러한 사항들은 당시 사회가 얼마나 위계적이고 경직되어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이러한 경직성은 ‘왜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일본 복색이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일본어도 허용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설사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일본어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는 1960년대 중반 이후에 규제되었던 것인데 이 시기에 이르면 민족주의가 강화되며 그 일환으로 국가 주도로 국어순화운동이 일어나면서 그 규제가 더욱 강화된다. 한편 “동경 가면 예쁜 여자를 소개해주겠다.”는 표현도 퇴폐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삭제된 것은 주목을 요한다. 이는 당시 남한보다 사상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발전한 일본은 영화 표현에서 경계의 대상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정도가 과하다고밖에 할 수 없어서 이러한 조치를 통해 오히려 당시 정권의 불안이 엿보이기도 한다. 앞서 검열이 효과적으로 수행될 때는 오히려 검열 과정에서 제한 사항이 없을 때라고 말했다. 반대로 검열에서 제한 조치가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검열의 기준이 제작 과정에 관철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1975년에 이르면 시나리오가 예륜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반려되는 비율이 80%에 이르게 된다. 이미 1960년대 말부터 국가의 영화 통제는 영화산업과 회복할 수 없는 괴리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유신체제 이후 그 괴리는 점점 더 심해졌다. 그리고 1975년 이후에는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게 된다. 금지하고 제한해도 검열에서 문제가 될 영화가 계속 기획되었다는 것은 검열이 무너지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1975년 <청춘극장>은 바로 그러한 변곡점에 놓인 영화였다. 1) 영화 검열 업무는 1961년 10월2일 이후 문교부에서 공보부로 이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