映畵上映許可申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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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에 기반한 외교 정책은 부재했고 식민지배의 역사적 책임은 온전히 제기되지도 못한 채 ‘경제난 해결’이라는 미명으로 ‘경제협력자금’ 3억 달러에 협상은 서둘러 종결되었다.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태평양 냉전 질서 아래서 종용된 화해였고 굴복이었다. 그 결과 국민적 반발은 극에 달했고, 1964년 4월에는 박정희 정권을 탄생시킨 ‘민족적 민주주의’가 기만적인 구호였음을 폭로하는 ‘화형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6.3 학생운동으로 확대된 시민적 저항은 결국 위수령과 계엄령이 발동되면서 진압되었는데, 협정이 체결된 7차 한일회담은 그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열린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한일협정은 ‘굴욕외교’, ‘구걸협상’으로 표상되었다. 식민지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이 가질법한 분노와 울분이 투영된 현실인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신(新) 식민지적 종속 관계를 예기하는 모종의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지점은 일본에 대한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정서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잉여, 혹은 복합적이고 양가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식적인 민족 서사의 문법과 달리 대중문화를 매개로 사적영역에서 작동하는 일본에 대한 정서는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식민지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의 근본적인 비극은 헤게모니를 지닌 식민국의 문화적 감성을 향수(享受/鄕愁)하게 된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장은 이러한 대중의 부인된(disavowed) 욕망을 기민하게 포착해냈다. 거리의 가판대를 메운 ‘왜색잡지’와 다방에서 들려오는 일본 대중가요는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일본을 우선 알고 거기에 대처할 민족적 주체성 확립해야 한다”는 논리는 “노도처럼 밀려들어와 우리의 말초신경을 간지럽히는” 1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금기와 선망이 착종된 양가감정의 표현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영화계에서는 한일친선과 문화교류 문제가 적극적으로 논의된다. 물론, 일본영화 수입과 한일 합작영화에 기대를 거는 측은 외국영화 수입업자들이었다. 방화제작자들은 일본과의 합작영화는 미끼일 뿐이며, 이를 통해 일본 자본이 국내 영화제작계에 유입되면 한국영화는 일본의 영화산업에 종속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정책당국의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국민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민족주의 정서에 기대어 일본대중문화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1965년에 내려진 <동백 아가씨> 방송금지 조치는 단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수입업자의 입장에서는 일본영화 수입이 개방되면 그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이 분명했기에 자신들의 뜻을 인적교류에서부터 단계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했다. <잊지 못할 모정(Typhon sur Nagasaki, 1957)>를 수입 배급했던 세기상사는 누구보다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행위 주체였다. ‘한국영화’ 최초로 일본배우가 캐스팅되어 논란이 되었던 <총독의 딸>(1965)은 세기상사가 제작한 영화로 제작단계에서부터 공보부와 마찰을 빚었다. 세기상사는 공보부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촬영을 진행했고, 결국 영화는 상영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있다고 하여 정책당국이 일본문화를 전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었다. 일본과의 수교를 맺은 박정희 정부로서는 자유아시아의 우방이자 이웃으로서 일본과의 친선과 우호를 강조해야 했기에 한편으로는 교류의 방식과 정도를 제시해야 했다 2 . 이와 같이 일관된 원칙이 작동될 수 없는 틈으로 일본영화계와의 교류를 시도하려는 기획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는데, 제작의 측면에서는 일본과의 인적 교류와 로케이션 촬영을 확대해나갔다면, 외화수입의 측면에서는 일본인 배우가 출연한 서구 영화를 수입 상영함으로써 일본을 금지하는 제도적 기준을 완화시키려 노력했다. 일본영화에 대한 문화적 금기의 핵심은 배우였다. “제작신고에는 일본에서 필요한 장면만 찍겠다”고 로케이션 촬영 승인을 받은 뒤 현지에서 일본 배우를 출연시킴에 따라 촬영중지를 통보 받은 <고안>(최무룡, 1966) 3 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의 공보부의 입장은 “로케와 일본인의 기술지도는 무방하나 일본배우의 출연은 아직 허가할 수 없다” 4 는 것이었다. 일본 배우의 출연은 외국영화를 수입하는 데도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1965년 MGM에서 제작한 <8월15야(夜)의 찻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1956)>의 경우,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 출연하여 국제적인 인지를 얻은 교 마치코(京マチ子)를 비롯하여 다수의 일본 배우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수입추천을 승인 받지 못했다. 이후 세기상사는 진정서를 제출하며 지속적인 민원을 통해 수입 및 상영 허가를 취득하게 된다. <잊지 못할 모정>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경우인데, 심의 서류에는 세기상사가 자신들의 기획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일수교의 논리와 검열행정의 내적인 일관성 그리고 상영보류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거론하여 행정당국을 압박하는 정황들이 담겨 있다. 사실, 이브 샴피(Yves Ciampi)가 연출한 <잊지 못할 모정>은 1957년에 제작된 영화로 나가사키의 조선소에서 일하는 선박 기사 말샤크(Jean Marais)와 노리코(기시 게이코, 岸 惠子)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어 왜색시비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세기상사는 1964년 9월 영화를 수입한 뒤 1966년에 상영 허가 신청을 접수한다. 1966년 시점에서 외화 수입과 상영 과정은 크게 1. 외국영화 수입추천허가 절차, 2. 상영허가 승인 절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하에서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 중인 <잊지 못할 모정>의 심의 서류를 중심으로 수입과 상영 과정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1. 외국영화수입추천허가 1962년 1월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영화업자는 외국영화를 수입‧상영하기 위해서 공보부에 ‘외국영화 수입추천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뒤 승인을 얻어야 했다. 영화 시장에서 외국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았고, 이들 영화가 야기하는 사상과 풍속의 문제 또한 컸기에 영화검열 행정에서 외화수입을 통제, 관리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1956년 문교부에서 영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우수영화 포상제도로 외국영화수입 쿼터를 배정하면서 정부는 보다 효율적으로 외화 관리를 할 수 있었는데, 5.16 이후 검열권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추천허가절차’가 신설되었다 5 . 이는 수입된 외화가 상영되지 못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는 의미가 있으나 수입업자들은 사전검열의 형태로 ‘수입추천허가’를 받아야 했다 6 . 수입추천을 받기 위해 영화수업업체는 영화 제명 및 원제, 제작주체, 필름종별 및 규격, 권수, 판권대금과 같은 영화에 대한 제반 정보를 담은 ‘허가신청서’를 비롯하여, 영화의 원문 대본 1통과 국문 대본 3통, 그리고 수입면장 및 기타 요청 서류들을 구비하여 공보부에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정적 절차가 제한과 통제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국영화 수입과정은 외환관리법을 비롯하여 통관절차에 따른 관계 법령을 준수해야 했기에, 공보부는 상공부, 서울세관, 외환은행과 긴밀히 협력하며 통상에 필요한 절차를 일원화하여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검열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근본적으로 통치 합리성을 제고하려는 국가 이성의 산물인 만큼, 개별 텍스트에 대한 검열과정은 일반 행정업무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수입추천단계와 관련된 서류들은 아래와 같다. 1) 외국영화 수입추천 허가신청서 제출(1964.9.10.) <잊지 못할 모정> 수입추천 허가신청서 영화 <잊지 못할 모정>의 수입사인 세기상사는 1964년 9월 10일 공보부에게 영화수입추천 허가를 위한 신청서를 제출한다. 신청인은 한국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 유성엽이며,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1964.9.14.)하여 공보부의 승인을 받았다.(1964,9.15.) 신청서에는 영화의 제작 정보만이 아니라 종별(천연색, 와이드스크린)과 규격(35mm, 12권, 3편) 및 판권대금(US $4,000)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영화필름과 원문 대본 1통(번역문 포함), 국문 대본 3통 그리고 수입면장 및 기타자료를 첨부했음을 알 수 있다. 기타자료에는 리버티상사와 체결한 계약서 사본과 영문으로 된 전신(cable), 그리고 외화수입쿼터 배정서와 각서가 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전신을 통해서는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는데, 한국에서 통용되는 라이센스 기한은 10년이며 신용장 개설 은행 정보를 비롯한 결제 기한(1964.9.30.)이 명시되어 있다. 공보부에서 외환은행 기관장에게 보낸 배정서에는 외화수입권을 배정받은 대한영화주식회사의 외화수입업무를 세기상사가 대행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잊지 못할 모정> 수입 추천 신청 단계에서 세기상사가 제출한 각서 수입추천 단계에서 눈에 띄는 것이 각서인데, 총 두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세기상사 대표이사 이기동의 이름으로 공보부에 보내는 것으로서, 각서에는 “영화의 왜색 및 감독의 사상관계나 기타 귀부의 심사 기준에 저촉되는 경우에는 하시든지”(언제든지) 공보부의 지시대로 따르겠다 내용을 담고 있다. 수기로 작성된 다른 종류의 각서는 모두 2통인데, 모두 한국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작성된 것으로서, “필름이 도착 즉시 실사고사를 받을 것”이며 “고사규정에 저촉되거나 상영이 불허가 되는 경우에는” “신용장 개설을 비롯한 제반 책임을 본인이 부담”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후 상영 허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참조해볼 때, 책임을 소재를 정하는 각서가 강력한 구속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기타자료에는 수기로 작성한 영화 해설과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다. 동일한 양식의 서류가 3부인 점을 미루어보아, 외화수입 절차를 담당하는 주무부처인 상공부와 서울세관 그리고 외환은행에게 각각 보낸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담은 해설인데,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악의 결산>으로 발란서의 제일선 감독으로 각광을 받은 바 있는 “이브 샴피” 감독이 처음으로 시도한 동양색체가 짙은 감명 깊은 명화 이다. 이 영화제작을 위해 제작기간 2년, 구상에 3년, 광대한 오픈 세트 등 영화사상 공전의 스케일의 획기적 거작이다. 특기할 것은 일본 나가사키시를 방불케 하는 광대한 오픈세트를 건조했다는 사실이다. 출연인 너무나 유명한 불란서의 일급 배우 “장 마레-”와 상대역인 세기의 미녀 “다니엘 다류-”, 조연엔 일본의 인기 여우 “기시 게이코”가 각각 출연하여 초연을 보여주고 있다. (강조는 인용자) 영화가 일본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일본인 여성과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에서 드러나는 ‘일본색체’는 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입사는 이를 “동양색체”로 설명하고 있는데,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나가사키’도 사실 “일본 나가사키를 방불케 하는 광대한 오픈 세트”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 영화가 프랑스 감독과 배우가 주축을 이룬 작품임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수입대행사인 세기상사는 서류심사만으로 수입 추천을 승인해야 하는 행정절차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영화 <잊지 못할 모정> 수입추천 통지 본 영화는 불란서 파테시네마 델라필름사가 1956년도 제작한 작품으로서 선박소에 근무하는 우수한 청년 기사 말사크는 친구의 소개로 '노리'라는 처녀를 알게 되어 사랑하는 중 우연히 그의 옛 애인 후란스와즈가 나타나 고민하게 된다. 말사크는 후란스와즈를 잊기 위해 출장을 떠난다. 돌아오는 날 밤, 나가사끼엔 심한 태풍이 불어 ‘노리’를 염려하며 그녀를 찾았으나 건물에 깔려 이미 숨을 거두고 이러한 사실을 본 후란스와즈는 그를 단념하고 나가사끼를 떠난다는 내용. (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영화사에서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공보부에서는 유관 부처로 협조 공문을 보내는데, 참고 항목으로 부기된 내용에서는 영화에서 기시 게이코가 분한 노리코의 이름이 ‘노리’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세기상사가 제출한 자료에 근거한 것인데, ‘노리코’의 이름을 ‘노리’로 명명함으로써 왜색 시비를 비켜가고자 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관계기관에 수입추천 서류를 발송한 다음날인 1964년 10월 2일, 공보부에서는 한국영화주식회사 유성엽 앞으로 ‘외국영화 수입추천’ 건에 대해 관계 기관에서 추천을 하였다는 공문을 보낸다. 본편에 대한 수입추천 허가승인 절차가 완료된 후, 1964년 12월 11일 대한영화사는 예고편 통관을 위한 품의서를 공보부에 제출한다. 예고편은 총 10권으로 한 편당 1권임을 감안해볼 때, 10편의 예고편이 들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보부는 12월 22일자로 서울세관에 협조공문을 제출하면서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수입추천 허가절차가 마무리된다. 2. 상영허가 승인 절차 1966년 1월 6일, 세기영화사는 수입한 영화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한다. 영화가 수입된 절차가 완료된 시기가 1964년 12월 22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영화가 수입된 지 1년이 지난 시점까지 상영허가는 신청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추론컨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일협정을 둘러싼 시민적 저항이 극에 달했기에 상황의 변화를 지켜봤던 것이라 생각된다. 아니면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정 체결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 일본영화 수입개방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가늠해보고자 논란이 될 만한 영화를 수입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영화 수입을 주도한 것은 한국영화주식회사라기보다 세기상사라 할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세기상사는 12월 9일자로 외국영화 수입추천 명의변경 신청서를 양도증 사본과 함께 공보부에 제출한다. 이로써 세기상사는 수입대행업무가 아닌 영화를 수입, 배급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상영허가를 둘러싸고 공보부와 세기상사는 마찰을 빚게 된다. 공보부의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민족주의 정서가 반정부적인 방향으로 표출되는 데 대한 부담감으로 영화 상영을 보류할 필요성이 있었다. 반면 세기상사의 입장에서는 공보부의 수입추천허가에 의해 수입된 영화를 공보부가 상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절차의 합리성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했다. 다음은 4차에 걸친 상영허가 신청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다. 1) 제1차 시도 (1)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서 제출(1966.1.6.) 1966년 1월 6일 세기상사는 공보부에 <잊지 못할 모정>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해당 서류에는 수입신청허가 시와 동일하게 영화에 대한 제반 정보와 영화필름, 대본 및 별첨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시세완납증명서를 비롯하여 필름 입고증, 문화영화수속필증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는 1966년 12월 2차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지기 이전 시점이어서 62년 영화법의 시행령을 따르는데, 문화영화수속필증은 일반 극영화 상영 시 문화영화의 의무상영 조항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점은 <고래>라는 제명의 문화영화의 제작사가 세기상사주식회사라는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문화영화는 정부가 제공하는 공보영화 차원을 넘어 계몽성을 핵심적인 속성으로 갖춘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아우르는 역사적 개념인데, 문화영화의 의무상영이 제도화되면서 문화영화를 제작하는 민간회사가 생겨나기도 했다 7 . (2) 외국영화 상영허가 보류(1966.1.11.) <잊지 못할 모정> 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보류 통보 서류 발신: 공보부 장관 수신: 세기상사주식회사 우기동 제목: 외국영화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보류통보 위하가 66.1.10자로 제출한 외국영화 <잊지 못할 모정>의 상영허가 신청은 동 영화를 심사 결과 당부 방침에 의하여 상영허가가 보류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끝. 부내 참고: 본 영화는 왜색이 농후한 영화임 . 세기상사는 상영허가 신청 당시 연소자 관람 신청서도 함께 제출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수입 추천까지 받은 영화가 상영보류 통보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3) 중앙정보부에서의 재심의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의견 통보 검열서류에는 없지만, 1월 11일자로 상영보류를 통보받은 세기영화사는 재심을 청구한 것으로 보인다. 위 서류에서 알 수 있듯이, 1966년 1월 29일 중앙정보부에서는 “65년 1월 12일(66년의 오기)”자로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해 재심을 진행하였다. 중앙정보부가 심의에 참여하여 의견서를 보내는 경우는 일반적인 절차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즉, 공보부가 당시의 정세를 고려하여 정무적인 판단을 내림에 있어 중앙정보부의 의견을 요청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4) 외국영화 상영보류 최종 통보(1966.3.28.) 중앙정보부는 해당 영화가 “보안상 지장이 없음으로 공보부 장관이 적의 판단 조치”할 것을 주문하는데, 공보부에서는 1966년 3월 28일자로 세기상사에게 다시 한 번 상영보류 통보를 내린다. 이유는 1차와 동일하다. 2) 제2차 시도 (1) 진정서 제출(1966.3.29.) <잊지 못할 모정> 수입 관련 세기상사가 공보부 장관에게 보낸 진정서 첫 페이지 진정서 수신: 공보부장관 귀하/ 제목: 진정서 귀부의 1966년 3월 28일 자 공보영 1733.2~2959에 의한 외국영화 상영허가신청에 대한 불허가 통보는 감사히 복송하였읍니다. 취송(就悚) 본건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귀부의 정책상 이유로 당분간 허가할 수 없다는 통보취지에 대하여는 폐사(弊社)로서도 타의 없이 충분히 이해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폐사로서 본건 "잊지 못할 모정"에 관하여 국내상영예정하에 (1) 서기 1964년 10월 2일 자로 귀부의 수입추천을 받고 (2) 동시에 신용장을 개설하고 (3) 서기 1966년 1월 6일 자로 통관절차를 필하여 서기 1966년 1월 10일 자로 귀부에 상영허가신청에 이르기까지 막중한 자금을 투입하여 동 필름은 완전 국내물품으로 되어 있는 즉 상영치 않으면 안 될 불가피한 고충에 직면하고 있는 실상 을 보살펴 주시고 더욱 본건과 견연(牽連)지어서 기왕 국내에서 상영한 바 있는 소위 왜색영화의 경우를 대조적인 면에서 돌이켜보시더라도 국교정상화 이전에 있어 한 때 한일 간의 격앙된 국민감정에 아무런 자극됨이 없이 (1) <흑선>, <전장과 영원히>, <8.15의 찻집>, <해병에 동경에 가다>, <벽안의 나비 부인>, <카이강의 다리>, <원한의 도곡리 철교> 등을 상영한 선례 를 상기하시와 보살펴주시고, 특히 본건 "잊지 못할 모정"의 경우는 문화교류의 성과면에서 보더라도 음악 및 미술과 문학 등이 불란서의 문화적 지반을 기조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2차 대전 당시 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일본 장기(인용자: 나가사키) 등을 배경으로 하여 본 영화를 제작함에 이른 불일 간 국민감정의 순화는 목하 한일 국교정상화가 실현된 차제에 있어 무형의 정책적 PR에 도움이 되는 좋은 하나의 선도적 동인이 됨에 족할 것이며 , 더욱 한일국교 정상화의 당면한 중요 과정에 비추어보더라도 한일 간 문화교류의 계단적인(인용자: 단계적인의 오기) 일책으로써 이상 진정들인 수단에 정황을 현찰하시와 본건 영화 "잊지 못할 모정"이 상영되도록 허가하여 주시압기 바라옵고 자이 진정서를 올리나이다. 세기상사주식회사 대표이사 우기동 (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2번에 걸친 상영보류 통보를 받은 세기상사는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공보부 장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한다. 진정의 핵심은 공보부가 고시한 행정 절차에 따라 수입추천을 받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고, 일본인이 출연하거나 참여한 영화가 상영된 선례가 이미 있고, 국교 정상화가 실현된 시점에 해당 영화가 정책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홍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진정에 대한 회신(1966.4.4.) 공보부는 1966년 3월 30일자로 제출된 진정서에 대해서 1966년 3월 28일에 통보한 바와 같이 당분간 허가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간략하게 통보한다. 세기상사가 상영불허가 판단의 불합리성을 조목조목 짚은 것과 대조적으로, 공보부에서는 별다른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당분간 허락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한 것이다. 3) 제3차 시도 (1) 외국영화 산영허가 신청 사유서(1966.8.4.) 세기상사는 공보부의 보류 통보를 일단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본 동보가 제작한 작품으로 특히 감독 및 기타 기술진영 전원이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제작된 동경 올림픽 영화가 상영허가”를 받게 되자 세기상사는 다시금 상영허가를 신청한다. 반려 이유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영화 상영허가를 보류했다면, ‘동경 올림픽 영화’ 또한 개봉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진정에 대한 회신(1966.9.12.) 공보부는 별다른 이유 없이 다시금 진정 내용에 대해 불가 통보를 한다. 다만, 달라진 점은 “당부정책 상” 허가할 수 없다는 부분을 수정하여 “당부정책이 변경될 때가지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영화 상영 허가를 보류한 것은 기관의 정책적 일관성에 의해서라기보다 당시의 정무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세기상사의 입장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4) 제4차 시도 (1)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서 두 번의 진정이 묵살되지 세기상사는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를 다시금 신청하게 된다. 서류상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류 작성일은 1966년 8월 3일이나, 이를 접수한 시점은 9월 14일이라는 사실이다. 즉, 두 번째 진정을 통해 해법을 찾으려 했던 시도가 어그러지자 행정 당국의 비일관적인 처사를 비판하는 ‘신청사유서’와 함께 상영허가 절차를 새롭게 밟음으로써 공보부를 압박하는 전략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회신(1966.10.10.) <잊지 못할 모정> 수입에 대한 방침을 밝힌 공보부 내부 메모 반복된 진정과 신청사유서를 통해 공보부의 행정적 실책을 지목함으로써 공보부는 그에 대한 해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1966년 10월 10일자로 세기상사로 통보된 상영허가 보류 판정은 이전과는 달리 그 이유가 상세히 부가되어 있다. 판정이 핵심 이유를 요약한 메모의 내용을 보면 해당 영화가 “불란서 제작이라고 하나 일본 가요(歌謠), 민속(民俗), 무용(舞踊) 등이 처음서 끝까지 강하게 나타나 일부분을 삭제(削除)할 수도 없는 영화이므로 한일 영화교류가 시작(始作)될 때까지 상영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5) 제5차 시도 1966년 12월 20일, 세기상사는 다시금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해당 서류 또한 앞서와 동일하게 8월 3일에 작성된 것이지만, 접수는 4개월 뒤인 12월 20일이 이루어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세기상사는 별도의 진정서나 사유서 없이 영화의 상영허가를 신청하는데, 공보부에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이를 승인한다. 공보부의 <잊지 못할 모정> 상영 허가 통보 서류 결국 5번째 상영허가 신청을 낸 끝에 공보부에서는 해당 영화에 대한 상영허가를 통보한다. 그러나 내부결재 문서에는 국내상영이 무방하다고 판단한 근거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해당 영화의 줄거리만을 요약해놓았다. 다만 실사 검열을 통해 화면 6개처, 녹음 9개처를 삭제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를 통해 유추해본다면 공보부가 문제 삼았던 ‘왜색시비’는 정책 당국의 입장에서는 정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영화가 프랑스에서 제작되었던 만큼 일본에 대한 서구의 이국적 취향을 충족시킬 요소들이 과도하여 왜색이 매우 짙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세기상사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 영화를 개봉하였는데, 심의 서류를 토대로 이를 재구성해 볼 때 검열 당국과 시장 주체들 사이의 권력 관계가 일방적으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민족의 자주성(4) - 영화, 음악」, 《경향신문》, 1965.12.22. 2. 이화진, 「‘65년 체제’의 시각 정치와 <총독의 딸>」, 『한국근대문학연구』 18(1), 2017, 282-283쪽. - 이 논문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65년 체제’ 아래서 일본을 특정한 방식으로 (비)가시화하는 시각장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극장에 상영된 적도 없이 영화사의 서술로부터 배제된 <총독의 딸>의 제작 과정과 심의 단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3. 서울방송국 연속극 <동경 나그네>의 영화화한 작품으로 최무룡이 제작 및 감독을 맡았으나, 결국 촬영이 무산되어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 여파로 최무룡은 김지미와 이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4. 「TBC의 〈동경 나그네〉 일본 현지 촬영 중지령」, 《중앙일보》 1966.12.03. 5. 우수영화 제작에 대한 포상으로 외국영화수입쿼터 배분과 영화법 개정에 대한 논의는 조준형, 「지배하는 국가와 교활한 시장」, 이순진, 이승희 편, 『한국영화와 민주주의』, 선인, 2011, 311-346쪽 참조. 6. 수입추천허가신청 단계에서 제한을 두는 경우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심의 서류 해제」(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를 참조할 것. 7. 1960년대 문화영화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조준형, 「문화영화의 제도화 과정: 1960~70년대 영화법과 관련 정책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지워진 한국영화사 – 문화영화의 안과 밖』, 한국영상자료원, 2014, 75~114쪽 참조.
영화 <철조망> 검열 사례의 역사적 의미 영화 <철조망>의 검열 서류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첫째는 이 작품이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검열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던 4월혁명의 국면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철조망>의 상영허가 신청서가 접수된 것은 1960년 3월 29일, 우여곡절 끝에 상영을 허가받은 것은 5월 19일의 일이다. 요컨대 이 영화의 검열과정은 4월혁명 발발 직전에 시작되었고 이승만정권이 붕괴한 후에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4월혁명과 함께 영화계에서는 구악의 청산과 새로운 제도의 구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정권의 영화계 장악에 앞장섰던 임화수 등을 징치하는 것과 더불어 관권에 의한 영화검열을 폐지하고 민간의 자율적인 영화심의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하지만 영화계 내부의 이권 다툼 때문에 새로운 영화 심의제도를 마련하는 일은 계속 미루어졌고, 결국 1960년 9월이 되어서야 민간자율을 표방한 영화심의기구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4월혁명 발발에서 9월 이전까지 영화검열은 여전히 문교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영화 <철조망>의 검열서류는 바로 이와 같은 과도기에 개별 영화의 검열이 어떻게 실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기존의 관행이 엄존하는 가운데 새로이 도래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의 규범을 둘러싼 혼선이 계속되었던 이 과도적 시기에 개별 영화에 대한 규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4월혁명 발발 직전에 상영허가 신청이 접수된 <철조망>에 대해서 검열의 주무부서인 문교부는 기존의 관행대로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 공보실, 대검찰청의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합동검열을 실시했다.(4월 15일 검열시사) (그림 1) 국산영화 <철조망> 검열의견서 (4월 15일 검열시사) (그림 2) 검열위원 위촉의 건,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불허가의 건 (5월 9일 상영불허 결정) 여기서 국방부는 제한허가, 법무부는 불허가, 외무부는 “우방의 우호관계를 해칠 우려가 있음”, 공보실은 제한허가, 내무부는 “상영의 시기가 상조”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후인 5월 6일에 문교부는 관권 검열에 대한 비판여론을 의식한 탓인지 민간인들(김은우, 유호, 원경수, 성인기, 천관우, 권순영)을 중심으로 검열위원회를 다시 구성하고 <철조망>에 대한 재검열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4월혁명 이후의 완화된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민간 검열위원들은 1차 검열 당시 당국의 의견을 대부분 그대로 수용하였으며, 따라서 영화 <철조망>의 상영은 허가되지 않았다(5월 9일 상영불허 결정). 주로 언론인들(그들은 이후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의 핵심 구성원이 된다.)로 구성된 검열위원회의 견해가 과거 정부 부처가 표명했던 입장과 대동소이했다는 사실은, 이후 출범한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의 이른바 “민간 자율심의”가 근본적으로는 혁신적이지 못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었다. 제작자는 검열에서 지적받은 사항을 반영하여 총 27개 처를 수정, 재편집한 후에 5월 11일에 다시 상영허가를 신청했다. 이에 문교부는 원경수와 권순영을 검열위원으로 위촉하고 5월 18일에 재검열을 실시하여 “반공사상 및 우방 유엔군과의 우호관계에 유해한 장면을 대폭 삭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영을 허가하기로 한다. 서류 상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관련 서류가 누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제작자가 검열신청 취하 요청서를 접수(4월 8일)하고 자진 수정 후 재검열을 요청(4월 9일)한 것으로 보아 5월 11일 이전에도 이미 한 번의 자진 개작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영화 <철조망>은 총 세 차례에 걸친 검열과 개작을 거친 후에야 상영이 허가되었고 1960년 7월 21일에 개봉되었다. 현재 <철조망>의 필름은 유실되었고 녹음대본만이 남아 있는데, 이 마지막 검열에서 지적된 사항을 수정한 흔적이 녹음대본에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 이 영화의 검열사례는 유엔군으로 표상되는 이른바 자유우방을 어떻게 재현해야 하느냐의 문제에 있어서 일종의 기준점을 제시했다. 일찍이 <피아골>을 둘러싼 논란이 한국영화에서 공산주의자와 관련한 재현의 한계를 획정지은 바 있었다. 냉전체제가 피아(彼我)의 적대적 관계로 구조화되어 있고 영화를 비롯한 시청각 미디어들이 이와 같은 적대적 관계를 구축하고 공고화하기 위한 심리전의 도구로 동원되어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냉전체제 하에서 상대편(공산주의자)과 우리 편(자유우방)의 재현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피아골>이나 <7인의 여포로> 등의 사례를 통해서, 한국의 영화검열이 공산주의(자)의 재현 문제를 어떻게 다뤄왔는지는 비교적 자주 거론되었던 반면에 그와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자유우방’의 재현에서 표현의 한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크게 주목받은 적이 없었다. 영화 <철조망>의 검열사례는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우방의 재현 문제를 시험대에 올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철조망>이 한국영화에서 자유우방을 재현한 최초의 영화는 아니다. 1950년대 중반에 제작된 한국전쟁 관련 영화들에서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한국군의 이른바 ‘혈맹’으로서, 또는 구원자로서 재현되곤 했다. <자유부인>을 비롯한 1950년대 후반의 멜로드라마들에서는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젠더의 문제와 결합되면서 부정적인 양상으로 재현되었다. 요컨대 1950년대에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은 정치, 군사적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문화적으로는(또는 풍속의 차원에서는) 부정적으로 재현되는 것이 대체적인 경향이었다. 1950년대에는 <지옥화>처럼 기지촌과 양공주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조차도 검열에서 별다른 제재를 받았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데, 양공주와 미군 장면을 대폭 삭제한 <오발탄>(1961)의 검열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1960년대 들어와서 이와 같은 양상은 크게 변화한다. 영화 <철조망>은 <오발탄>보다 앞서 양공주와 유엔군(미군)의 장면이 문제가 되었던 영화로서 그와 같은 변화의 시작 지점에 위치한 셈이었다. <철조망>과 <오발탄>의 검열과 더불어, 1960년대 한국전쟁 영화의 전환은 이후 한국영화에서 자유우방의 재현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5인의 해병>으로 시작되고 <돌아오지 않는 해병>으로 정점을 찍은 1960년대의 한국전쟁 영화에서 유엔군의 존재감은 현저히 약화되는 대신 민족주의적 남성 영웅으로서의 한국 군인이 전쟁 수행의 주체로서 위치지어졌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을 전후해서 강화된 사회 전반의 (군사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적 분위기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 영화에서 유엔군의 존재가 사라지거나 약화되었기 때문에, 자유우방의 재현이 전면화될 수 있는 무대 또한 축소되었다. 박정희정권이 검열을 명문화한 영화법을 제정(1962)하고 검열시행세칙에서 “국제 간의 우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영화”를 금한다는 것을 명시하기는 했지만, 1960년대 이후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은 정치적,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대체로 비가시적인 존재였다. 영화 <철조망>의 검열사례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해방 이후 한반도에 미친 미국(과 서방진영)의 강력한 영향력이 가시화되는 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재현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영화 <철조망> 검열의 쟁점과 자유우방의 형상화 문제 사실 <철조망>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상황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이미 문제적이었다. 포로수용소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을 때, 한국인은 모두(그들이 공산주의자건 반공주의자건 간에) 유엔군(미군)의 관리 아래 놓인 포로로서만 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공포로들의 능동성을 아무리 강조한다 하더라도, 한국전쟁 당시 한국인들이 처한 근본적인 존재조건을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영화는 중립 포로인 신도람 깡(주선태 분)의 대사(“뚜렷이 내 나라 땅이면서도 외국사람이 감시하는 이 철조망 속에서 이렇게 또 같이 우리들이 싸우고 죽어야 하니”[S#3])를 통해서 바로 그와 같은 인식을 분명히 드러낸다. 또 한편으로 영화에서 치열한 반공투쟁으로 형상화되었던 포로수용소 내의 유혈폭력사태는, 사실상 유엔의 수용소 관리가 근본적으로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와 같은 폭력사태를 두고 국제적인 비판여론이 비등했음을 감안했을 때 검열관들이 특히 이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법무부는 “그와 같은 무질서한 관리는 국제신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고, 외무부는 “우방 및 유엔군과의 우호관계에 자미롭지 못한 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 포로의 송환이 냉전체제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모두 수렴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쟁점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포로 송환에 있어서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제네바협정에 따라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유지했던 ‘적색 포로’와 남한에 남기를 희망하는 ‘백색 포로’를 구분하는 일종의 사상검증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가혹한 고문과 (전향의) 강요, 그리고 적색, 백색 포로 간의 유혈폭력사태가 벌어졌다. 반공영화를 표방했던 <철조망>은 백색 포로와 적색 포로를 각각 선과 악을 표상하는 것으로 그리고 양자 간의 폭력사태를 공산세력에 맞서는 반공포로들의 투쟁으로 위치짓고자 했지만, 한국전쟁에서 포로 송환이라는 쟁점은 그와 같은 이분법적 구도로 포섭되지 않는 미묘한 지점들을 갖고 있었다. 첫째, 이승만정권은 포로 송환 문제를, 공산세력과의 협상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유엔(미국)의 방침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결국에는 일방적으로 백색 포로를 석방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비난을 초래했다. 이승만이 백색 포로의 석방을 지시하는 <철조망>의 마지막 부분이 대폭 삭제된 것은 이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이승만의 독단적인 반공포로 석방이 국제사회에 던진 파문을 축소하고 그같은 이승만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제작자는 영화의 마지막을 “석방되는 포로들의 화면에 장엄한 배달민족을 상징하는 태극기”를 겹쳐놓은 화면에 대통령이 “단신 책임을 지시고 애국 방공포로를 석방하는 용단”을 내렸다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삽입하는 것으로 바꿨다. <철조망>이 다루는 포로송환 문제는 ‘혈맹’이어야 할 자유우방과 한국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검열관들은 그와 같은 균열이 어떤 형태로든 가시화되는 것을 금하고자 했다. 또 한편으로 한때 공산주의에 부역했으나 이제는 자유 대한의 품으로 돌아오는 이들(반공포로) 위에 태극기를 겹쳐놓는 결말은, 일찌기 <피아골>이 취했던 해법을 가져온 것이었다. 보도연맹원의 대량학살이나 전쟁 기간 중의 부역전력자들에 대한 가혹한 처사에서 보듯이, 대한민국은 한때 공산주의를 위해 복무했던 이들(그것이 자의건 타의건 간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끊임없는 의심과 사상검증, 부역 전력자들에 대한 물리적 폭력과 협박이 횡행하던 한국사회에서, “자유 대한의 품으로 돌아온 이들”의 진정성에 한 치의 의심도 깃들지 않도록 재현할 것이 요구되었다. 돌아오는 이들과 태극기 이미지의 중첩은 검열제도가 만들어낸 일종의 클리셰로서, 사상검증에 대한 한국사회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반영한 것이었다. 둘째는 본인의 의사에 따른 송환이라는 원칙이 북한 또는 공산주의를 가능한 ‘선택지’로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한 적색 포로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부에 인공기를 게양하고 일종의 해방구를 구축하는데, 영화의 서사적 장치들이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공기가 펄럭이고 적색 포로들의 역사인식과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이 대사로써 피력되는 것은 허용되기 어려웠다. 1960년 4월 19일자 국방부의 검열의견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제작자는 국방부의 의견에 따라 인공기가 나오는 화면을 전면 삭제하고 강삼수를 비롯한 적색 포로들의 대사를 대폭 삭제했다. 선택의 가능성이라는 문제는 또한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는 포로의 존재를 통해서 더욱 부각된다. 195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의 바람이 한국에도 상륙했고 4월혁명의 분위기 아래서 동서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 노선이 가능한 선택지로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요컨대 본인 의사에 따른 포로 송환이라는 문제는 동과 서, 또는 이도저도 아닌 제3지대가 선택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형상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4월혁명의 자장 안에 놓인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1)에서 포로가 된 주인공 명준이 남과 북 어느 쪽도 아닌 중립국 인도를 선택하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철조망>은 적색, 백색 포로 외에 중립 포로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이와 같은 당시의 흐름을 반명하고 있지만 중립 포로로 설정된 “신도람 깡”(주선태 분)의 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영화 초반부에 그는 “이런 병신같은 새끼들. 인공기는 뭐구 태극기는 뭐냔 말야. 아 그렇게 말을 해도 모르겠니? 응? 여기 붓들려온 뜻을 아직도 모르느냔 말야. 패전해서 붓잡혀온 못난 쌔끼들이 무슨 국기 투쟁이냔 말야 응”(S#3)같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분명히 드러내지만 S#53 이후에 갑자기 영화에서 사라진다. 이것이 단순히 형상화의 실패인지, 아니면 다른 힘이 작용한 결과인지는 남아 있는 서류와 녹음대본만으로는 단언하기 어렵다. 영화 <철조망> 검열서류의 구성 영화 <철조망>의 검열서류는 크게 세 묶음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1960년 3월 29일자 상영허가 신청서에서부터 문교부의 주관으로 국방부, 법무부, 외무부, 공보실, 내무부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1차 검열시사(4월 15일) 및 김은우(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 및 이화여대 교수), 유호(경향신문사 문화부장), 원경수(연합신문사 기획국장), 성인기(조선일보사 부사장), 천관우(한국일보사 논설위원), 권순영(서울지방법원 소년부 지원장) 등 민간인들을 중심으로 한 검열위원회의 2차 검열시사(5월 7일)를 거친 후에 최종 상영불허가 판정을 내리기(5월 9일)까지의 과정을 담은 서류이다. 제작사인 홍기영화사에서는 최초의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이후에 영화를 자진 개작하고 상영허가를 재신청했다. 그 과정에서의 서류는 일부만 남아 있는데, 3월 29일에서 4월 5일 사이에 검열의 주무부처인 문교부와 제작사 사이에서 모종의 조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때 자진 개작한 부분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남아 있는 서류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정부 각 부처의 관계자들에 의한 1차 검열시사와 민간 위원들에 의한 2차 검열시사가 이루어졌던 것은 이례적이다. 이는 4월혁명과 그 여파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 듯한데, 민간의 검열위원들 또한 상영 불허가 의견을 견지했다. 4월혁명 이후 풍속 차원에서의 검열은 상당히 완화되었으나, 사상검열의 기준은 여전히 강고하게 존속하고 있었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둘째, 5월 9일자 공문서(문화 제1540호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 불허가의 건”)에서 지적된 사항을 토대로 홍기영화사 대표 이봉근은 영화를 대폭 수정하여 5월 11일에 재검열을 신청한다. 이에 문교부는 2차 검열시사에 참석했던 6인을 재차 검열위원에 위촉했다.(“검열위원 위촉의 건”, 1960년 5월 17일)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5월 18일에 실시된 검열시사에 참여한 민간 검열위원은 원경수, 권순영 두 사람 뿐이며, 그 외 문교부 관료인 변시민(문화국장), 유성열(예술과장) 두 사람이 배석했다. 재검열 결과 총 7개 처의 화면 및 대사를 삭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영이 허가되었다.(문화 제1540호,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허가의 건”, 1960년 5월 19일) 7개 처 가운데 6개 처가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지시를 다루는 영화의 결말 부분(S#126~137)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작자는 이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는 대대적인 수정을 했다. 셋째는, 개봉 이후에 이봉근으로부터 홍기영화사의 대표직을 물려받은 정병준이 16mm 판본으로 <철조망>의 흥행을 하기 위해 복사판의 상영허가를 신청했던 1962년의 서류들이다. (“국산영화복사판 상영허가 신청서”) 당시에는 35mm 판본으로 극장 개봉을 마친 후에 16mm로 복사판을 만들어 흥행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으며, 이 시기 영화들의 검열서류들 상당수는 16mm 판본의 상영허가서 관련 서류를 포함하고 있다.
한국영화를 둘러싼 검열의 기록들을 살펴본다면, ‘1964년 겨울’은 매우 중요한 시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7인의 여포로>(검열후 <돌아온 여군>으로 제명 변경)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이 감상적 민족주의를 내세워 북괴를 찬양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던 일련의 사건은 1964년 12월 11일부터 이듬해 7월까지 지속되었으며,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권력을 독점한 국가 권력의 존재를 민감하게 감지할 수밖에 없게 된 것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서였다. 물론, 박정희 정권이 이만희를 구속시켰던 법률적 근거는 ‘검열법’이 아니라 ‘반공법’이었다. 하지만 검열이 단지 법률 조항의 위반 문제만이 아니라 상상의 범위를 제한하고 실천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권력 효과의 문제라고 봤을 때, 1964년 겨울, 이만희 감독의 반공법 위반 사건은 국민과 비국민의 경계 감각을 설정하는 동시에, 영화의 재현 가능성의 범위를 규정한 문제적인 검열 사건이었다. 중요한 점은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검열이 단선적이거나 일관된 논리로 점철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4.19 혁명의 정치적 열망을 일부나마 군부 정권의 통치성 내부로 포섭하려했던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반공영화’라 할지라도 체제의 우월성을 기계적으로 선전하는 차원을 넘어 이념 대립 상황 자체를 문제 삼고, 나아가 냉전 체제의 모순을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장소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1) 그러나 1964년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민적 저항(6.3 학생운동)을 법질서를 중단하는 계엄령을 통해 무화시키는 순간은 박정희 체제의 통치 전략이 근본적으로 수정된 시점이었다. 영화를 둘러싼 검열의 내적인 논리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데, <7인의 여포로>(1965)와 <남과 북>(1964)의 검열 과정은 그 분기점을 세밀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고찰될 필요가 있다. 김기덕 감독의 <남과 북>은 영화 검열을 둘러싼 기존의 논의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이 작품은 <7인의 여포로>와 함께 반공영화의 가능성과 표현의 임계를 보여주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관객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던 해당 영화는 이념을 초월한 사랑을 서사의 중심축으로 삼는데, 신파적인 감성으로 넘쳐나는 영화 속에서 ‘공산주의자’가 재현되는 방식은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기존의 반공영화에서 공산주의자가 인격이 소거된 채 성격화되지 않은 인물로서 그려졌다면, <남과 북>에서는 사랑을 찾아 전선을 넘어온 공산주의자 장일구 소좌(신영균)의 내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공산주의자를 재현하는 방식 또한 매우 극적으로 전환되게 되는데, 이는 이산 멜로드라마의 문법이 반공영화에도 적용됨으로써 공산주의자에 대한 영화적 표상이 달라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전환의 과정은 북한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북한에 대한 발화를 금기시했던 이전 시기와 달리 “북한에 대한 유동적인 지식 일반의 흐름을 관장하고 주시하는 가운데 최종적인 유통 여부와 진위를 판별하여 해석의 권위를 독점하는” 2) 방식으로 체제가 변화된 상황과 맞물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림 1] 영화상영 허가신청서 어찌 보면 매우 불온한 영화가 어떻게 검열에 통과될 수 있었을까. 그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검열 문서철을 보면, <남과 북>은 극동흥업 주식회사의 이름으로 1964년 11월 11일 ‘영화 제작 신고서’와 ‘배역 명단’ 및 전속배우 활용에 관한 요강을 준수한다는 ‘서약서’가 공보부에 제출되면서 제작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원작자인 한운사가 직접 각색을 하고, 극동흥업의 사장인 차태진이 제작을 맡아 만들어진 영화는 1964년 12월 8일에 상영을 위해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제작 기간은 약 한 달이 못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사 검열을 위해 제출된 필름은 총 35미리 12권 8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검열을 위해 원본 네거티브가 제출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복사본을 모두 포함하여 8편의 필름이 제출되었다는 점은 해당 영화에 대한 제작사의 흥행 기대가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서철을 통해 볼 때, 상영 허가를 위해 실사 검열이 신청된 일자는 1964년 12월 29일이고, 검열이 완료된 시점은 12월 31일이었다. 상영허가가 유효한 기간은 검열이 완료된 시점으로부터 1년이기에, 영화는 1965년 12월 30일까지 8편의 복사본에 대해 상영 권한을 갖게 된다. 박정희 체제의 검열 권력을 사유하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화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이념을 초과한 사랑이 서사의 중심으로 제시되면서 북한과 공산주의자가 재현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특히, 영화를 이끌어가는 신영균(장일구 역)의 스타 페르소나는 스크린의 안팎에서 민족계몽을 이끄는 지도자이자 개발주의적 근대화를 이끄는 실천가, 영웅적인 국군이자 미성숙한 군인들을 남성의 세계로 편입시키는 아버지의 형상으로 소비되었던 만큼, <남과 북>의 공산주의자 형상은 문제가 될 소지가 많은 것이었다. 그런데 특기할만한 점은 이와 같은 영화적 표현이 당대의 검열 과정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림 2] 영화검열 기안지 #1 기안지(1964년 12월 31일) 기안자 : 공보부 영화과 행정주사 이달형 기안년월일 : 1964년 12월 31일 (중략) 제한사항: 화면 2개처, 대사 6개처 [그림 3] 전언통신문 #2 전언통신문(1964년 12월 31일) 송화자 : 중앙정보부 5국 보안과 김 조정관 수화자 : 영화과 행정사무관 이영희 국산극영화 <남과 북> 검열의견 통보 극동흥업주식회사 제작 <남과 북>에 관한 검열 의견을 다음과 같이 통보하오니 허가에 반영조치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제한 요청사항 가. 보초가 “신세한탄”하는 대사 삭제 나. 장일구 대사 중 “목숨 걸고 애인 찾는다.” 삭제 다. 이 대위 대사 중 “어떤 …38선” 삭제 라. 미군대위 나오는 화면 전체 삭제 마. 장일구 대사 중 “북녘하늘 어머니 돌려보내주시요” 삭제 바. 장일구와 이 대위가 “어깨동무하고 술 먹는 장면” 화면 삭제 검열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해당 영화는 대사 6개 처와 화면 2개 처를 삭제하는 것으로 검열에 통과된다. 기안지와 전언통신문 사이에 조금의 차이는 있으나, 이는 문서 작성 과정에서의 실수로 보인다. 제한 요청 사항을 분석해보면, 감정의 과잉으로 인한 해석상의 문제가 야기되는 부분은 대사가 삭제되나, 미국이 등장하는 장면과 장일구와 이대위(최무룡 분)가 어깨동무를 하고 술을 마시는 장면은 화면이 전체적으로 삭제된다. 이는 ‘감상적 민족주의’라는 틀 속에서 민족 개념을 분화하고 전유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통치 전략이 검열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라 생각된다. 이후 영화는 관람등급 신청에서도 별다른 제한 사항 없이 ‘국민학교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는다. 즉,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적 규범 아래서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좇는 한 인간으로서 공산주의자를 그리는 방식은 당대의 검열 기준에서 충분히 수용 가능한 것이었다. 영화는 1965년 1월 1일에 개봉한 후 11일 만에 6만 관객을 돌파하여 1965년 1월 21일에 복사판 상영 허가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영화가 상영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에 해당 영화는 갑작스럽게 문제적인 작품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림 4] 내무부 의견서 <남과 북> 내무부 의견서 수신처 : 공보부(1965.2.5)/결재(2.8) 치안국장 귀하 영화에 대한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남과 북”(아카데미 극장 상영 중) 줄거리 38선에서 괴뢰 소좌가 애인을 찾아 투강하여 왔으나 그녀는 이미 국군 대위와 결혼한 처가 되고 말았으며 이 사실로 인하여 국군 대위는 전투에서 전사하고 소좌는 자살하고 국군 사단에서는 소좌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사단장 이하 뒤흔들리는 설명 영화임. 영화 감상 후 나의 의견 1. 괴뢰 소좌는 자유를 동경하여 투강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애정관계로 투강하였으며 동괴뢰 소좌는 남성적이고도 용감하며 국가관이 투철하고 사상의 동요가 없는 훌륭한 남 성으로 묘사되었고. 2. 투강장교 1명으로 말미암아 전 사단이 휘둘리는 것은 국군의 위신에도 관계가 있고 3. 괴뢰 소좌에 비하여 국군대위는 연약성이 엿보이고 있음. 결론 본 영화 괴뢰 소좌를 동 영화의 주연으로 등장시켜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영웅화한 스토리임으로 수준이 얕은 대중 에게는 결과적으로 괴뢰군의 훌륭한 것만을 남기게 될 우려가 있고 또한 쏘련을 위시한 공산국가에서 예술공세에 있어 노골적으로 공산주의를 선전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찬양시키는 데에 부합되는 느낌이 있었음 . - <남과 북>, 검열 문서철.(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1965년 2월 5일, 내무부에서는 공보부 치안국장에게 <남과 북>과 관련하여 의견서를 제출한다. 의견서에는 해당 영화가 “쏘련을 위시한 공산국가에서” 사용하는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찬양시키는” 영화라는 “느낌”이 든다는 소견을 담고 있다. 문서 작성자는 전선을 넘어 온 “괴뢰소좌”가 “사상의 동요가 없는 훌륭한 남성”이라는 점과 “투강 장교 1인에 전 사단이 휘둘리게” 묘사한 점 그리고 괴뢰소좌에 비해 국군대위가 연약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을 그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다. 이는 중앙정보부에서 검열을 실시한 이후 명기한 ‘제한 요청사항’과도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부분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화 전체의 구도와 배우의 페르소나 자체를 의구심에 부치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였다. 당시 영화가 상영허가를 받고 활발히 상영 중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남과 북>은 1965년 2월 5일에 이르러 ‘불온한 텍스트’로서 발견되었던 것인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의 불온성이 누구에게 소구되는가라는 문제와 남성성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는 “수준이 얕은 대중”에게 “연약성을 엿보이는” 국군과 대조적으로 “사상의 동요가 없는 훌륭한 남성”인 “괴뢰소좌”를 부각시킴으로써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내무부에서 갑작스러운 의견서를 공보부에 보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965년 2월 5일은 이만희 감독에 대한 검찰의 공소장이 제출된 날이기도 하다. 영화에 각인된 성별화된 이미지의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법률적인 문제로 전환시킨 해당 공소장으로 이만희는 긴급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례적인 내부무 의견서는 그래서 단순한 요식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내무부 의견서가 상당한 수준의 의혹을 제기함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에 대한 추가적인 제한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미 상영 중인 작품의 제작자들에게 용공 혐의를 덮어씌우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지 않았나하는 추측은 가능하다. 이후 1965년 4월 22일, 제작사는 영화의 추가 상영을 위한 16미리 복사판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그에 따른 검열 당국의 입장은 해당 영화가 “1964년자 당부 허가번호 제3595호로 신규상영 허가된 바 있는 영화”이기에, “상영을 허가하고 별첨 허가증을 교부”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린다. 영화를 둘러싼 이적성 혹은 용공성 시비는 일단락된 듯 보이나, 4년이 지난 1969년 1월 13일, 정익진이라는 사람의 탄원서가 제출되면서 또 다시 시비에 휩쓸리게 된다. 영화는 1968년 5월 29일 재상영을 위해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하게 되는데, 신청자는 합동영화주식회사의 곽정환으로 되어 있다. 검열 후 제한사항은 “본편 영화 신규 검열시와 같음(화면 단축 2, 대사 삭제 6)”이라는 판정을 받고 상영이 허가 된다. 그러나 영화가 재상영되는 국면에서는 해당 영화가 홍보 수단으로 삼은 ‘전장 실화에 기반한 영화’라는 문구가 문제로 부각되게 된다. [그림 5] 영화상영허가확인의뢰, 국방부 문서, 극영화 “남과 북” 검열 합격에 관한 확인 통보 국방부 1969.1.13. 수신 정익진(서울시 용산구 *****) 제목 전장 실화 전사 확인 건 귀하가 1968. 12. 30부로 제출한 육군 제 9사단 전장실화 확인 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회신함. 질문: 1953. 4. 18 중부 전선 제9사단에 괴뢰군 소좌 장일구가 자기 사단의 총공격 작전 명령지도와 보급창고의 위치도를 가지고 귀순한 사실 여부에 대한 전사기록상의 확인. 장익진이라는 이가 제기한 탄원에 대하여 국방부는 전사기록상에 그와 같은 기록이 없음을 확인 후 이를 통보해준다. 이후 그는 “이 영화가 1965~1969년 현재까지 전국에 상영 중인데 내용상 ‘1953. 4. 18. 휴전 전 제 9사단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자막(S#4)에 크게 박아 선전하고 있는데 공보부 검열 허가 시 이 허위조작 여부를 어떻게 검토하여 허가하였는지”를 밝힐 것을 요구한다. 또한 “국방부 검열관계는 어떻게 행정처리가 됐는지 여부”를 회부해주기를 요구하면서 행정 당국의 검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근거로 검열 합격을 취소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대해 검열 당국이었던 공보부에서는 “영화의 소재가 실화를 근거로 하여 극화된 것이거나 순전한 픽션으로 구성된 것인가의 여부”는 개의치 않고 “영화 제작자가 영화법에 제정한 절차에 따른 요식행위를 구비하여 검열 신청한 경우 그 내용이 관계 규정(검열기준)에 저촉되는가를 검토하여 검열합격 여부를 결정, 시행”함을 밝히며, 검열 과정에는 문제가 없음을 알린다. 그러나 해당 소원은 영화가 전사(戰史)를 위조하여 제작되었음으로 이를 제작한 자들이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용공 행위를 하였다는 이유로 검열 합격 취소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사건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해당 사건은 1970년 6월 12일에 이르러 소원의 취지가 불분명하고 소원의 기한이 말소되어 허무하게 기각된다. 한 개인의 탄원으로부터 시작된 1969년의 용공시비는 해프닝으로 끝이 났으나 이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한 개인이 이를 전유하여 국가의 검열 절차를 문제 삼음으로써 국가의 의도를 초과하여 구성된 과잉된 반공적 주체성의 곤란함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1. 이에 대한 논의는 졸고, 「반공의 감각과 불화의 양식 – 박정희 체제 하의 ‘반공영화’를 읽는 방법론에 대한 고찰」, 2015년 1월 극예술학회 발표자료집 참조. 2. 4.19와 5.16 이후의 시간 속에서 북한에 관한 언설들에 가해진 극단의 공포정치(조용수의 필화사건)와 달리 북한에 대한 논의 자체는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이를 통해 볼 때, 박정희 체제는 “북한이라는 정체에 대해 적어도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접근을 요청”했으며, 북한에 대한 지식과 표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관리하는 전략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 장세진, 「원한, 노스텔지어, 과학」, 『사이』 제17호, 도서출판 역락, 2014, 147-1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