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댁의 응큼한외출
- 감독
- 타다시 쿄야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호시노 미유, 오카다 토모히로, 이시카와 유아
춘사 나운규 의 28주기 추모작품 신상옥 감독의 < 벙어리 삼룡 (1964)>은 “춘사 나운규의 28주기 추모작품”이라고 홍보되었다. < 오몽녀 >를 유작으로 남기고 1937년에 영면한 나운규는 1929년에 < 벙어리 삼룡 >을 감독하고 또 그 자신 삼룡 역을 맡아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당시 리뷰에서는 한결같이 마지막의 화재 장면에 1,000여명의 비(非)전문배우(엑스트라)가 동원되어 공들여 촬영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출세작 < 아리랑 (나운규, 1926)>에서부터 광인, 부랑아, 떠돌이 등 방외인 연기로 자신의 페르소나를 구축한 배우 나운규에게는 계급적 원한에 사로잡힌 벙어리 캐릭터가 꼭 맞는 옷처럼 어울렸을 것이고, 역시 <아리랑>에서부터 수백, 수천명 농민이 등장하는 몹씬 촬영을 시도했던 감독 나운규에게는 원작에 나오는 화재 장면이 탐나는 스펙터클이었을 것이다. 나운규의 <벙어리 삼룡> 프린트가 유실되어 신상옥의 <벙어리 삼룡>이 얼마나 그에 대한 오마쥬를 표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일단 위의 화재 장면에서 신상옥이 공을 들인 것은 수많은 엑스트라 촬영이 아니라 순덕아씨에 대한 삼룡의 ‘헌신’이었던 걸로 보인다. 나도향의 원작소설(1925)에는 불타는 집에 뛰어든 삼룡이 제일 먼저 오생원을 구해내고 다음으로는 자기 몸이 불에 상하는 것도 잊은 채 순덕아씨를 구하면서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즐거운 쾌감,” “이제 처음으로 살아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숨이 끊어지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씨를 구해냈다는 사실에 “평화롭고 행복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띄우면서 죽어가는 삼룡의 사랑과 헌신이 클라이막스가 되는 셈이다. 나운규의 <벙어리 삼룡>이 원작의 결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반면, 신상옥의 작품에서는 삼룡의 손에 구출된 순덕아씨가 삼룡에게 ‘서방님(광식)’도 구해달라고 청하자 삼룡이 마지못해 다시 불속에 뛰어들어 광식을 구해내다가 둘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걸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그 마지막 순간 과연 삼룡이 “평화롭고 행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피터팬 콤플렉스 왜 원작이나 나운규의 버전과 달리 신상옥의 작품에서는 삼룡이 광식과 같이 불속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설정되었을까. 영화에서 내내 순덕아씨와 삼룡의 관계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처럼 그려지기 때문에, 마지막에 삼룡에게 남편도 구해달라며 간청하던 순덕아씨는 결국 화마(火魔)에 남편과 아들을 동시에 잃은 셈이 된다. 원작에서 삼룡은 살려달라는 광식을 불구덩이에 남겨두고 순덕아씨만을 구한 후 숨을 거두기 때문에 삼룡과 광식 둘 다 사라지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신상옥 버전에서는 순덕아씨의 청 ‘때문에’ 삼룡이 광식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순덕아씨는 아들을 남편이 있는 사지로 몰아넣은 여자처럼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루나무 강가를 거닐며 삼룡이 어리광부리던 모습을 회고하는 순덕아씨의 모습은 자신을 성가시게 하던 남성 가족들을 다 ‘처리’하고 홀가분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던 봉건주의자 남편과 성장을 멈춘(삼룡의 장애는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피터팬 콤플렉스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들 없이 이제 홀로 서게 된 몰락양반 가문의 딸. 당시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였던 정병욱은 이 영화에서 삼룡과 순덕아씨를 학대하는 광식의 행태가 “지나치게 지루하고 참혹”하다며 이를 “악의 과장된 표현”이라 비판한 바 있다. 박노식 이 연기한 광식은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삼룡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것은 물론, 양반의 예법을 운운하는 순덕아씨를 고까와하며 결혼 첫날부터 폭행한다. 정병욱은 “삼룡을 뭇매질을 하고 쇠스랑으로 마구 찍어대고 새댁을 걷어차고 할 적마다 곁 좌석에서 혀를 차고 비명을 올리고 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며 악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전통에 어긋나는 표현이나 수법”을 쓰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1) 삼룡의 지고지순함과 대비시키기 위해 광식의 악함을 부각시키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장인인 신상옥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광식의 폭력성은 삼룡처럼 피터팬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성장을 거부하는 아들이 지니는 철없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작에는 없던 식모 범실( 도금봉 분)의 “품에서 사내가 됐”던 광식이 그녀와 맺는 육체적 관계는 삼룡이 순덕아씨와 맺는 지순한 관계와는 얼핏 대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커플의 투샷이 모두 모자(母子)처럼 그려진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향토색짙은 문예작품 2) 물론 이런 현재적 해석과 무관하게, 당시 언론과 평단의 관심은 <벙어리 삼룡>이 1964년의 “최우수 영화,” “예술성을 살린 작품”으로서 아시아영화제, 샌프란시스코영화제, 베니스영화제 등에서 본선에 진출하거나 수상을 했다는 점, 국적불명의 “청춘영화”가 판치는 국내 극장계에서 관객 21만명을 모아 흥행에도 성공했다는 점에 쏠려 있었다. 비록 “테마와 감각에서는 낡았”지만 “스타일면에서는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3) , 무엇보다 벙어리 삼룡 역을 평소 반듯한 지식인 캐릭터에 어울리던 김진규 가 맡았다는 점이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가 각종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과 더불어 남우주연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1) 정병욱, “영화수상: 학대 속에 피어난 인간미,” <동아일보> 1964.12.17. 2) 진(振)의 <벙어리 삼룡> 리뷰(경향신문 1964.11.16.) 제목. 3) R, “베니스 영화제에서 장려상을 탄 <벙어리 삼룡>,” <영화예술> 1966.4. >> 벙어리 삼룡 고화질 VOD 보러가기 <<
침체 속에 거둔 70년대 이후의 수확 1970년대 이후의 양상은 1960년대와 비교할 때 양이나 질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점은 황정순이 <팔도강산>(배석인, 1967) 류의 국책영화에 기용되면서 그동안 호흡을 맞춰온 김승호 대신 희극배우 김희갑이 그 자리를 메웠다는 사실이다.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김수용, 1970),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등이 그런 예다. 노부부가 일본에 사는 아들의 초청을 받아 엑스포70 세계박람회를 관람(<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하거나, 전국 각지에 있는 자식들을 찾아 유람 여행하는 동안 변화된 한국의 발전상을 에피소드에 끼워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이렇게 달라진 제작 환경 아래서 황정순은 1970년대에 비극적인 수절의 이면을 그린 <홍살문>(변장호, 1972) 등 60여 편에 출연했다. 60년대에 비해 절반가량 줄어든 실적이다. 속편 등 유사 기획으로 작품성보다는 흥행 위주의 영화가 대세인 가운데 아들을 국가대표 골게터로 키웠으나 신장염을 앓게 되자 콩팥까지 이식해 주는 <어머니의 영광>(김기, 1973)의 생선장수, 벙어리 청소부 아들과 4남 2녀의 손자, 손녀들까지 돌보는 <슬픔이 파도를 넘을 때>(조문진, 1978)의 헌신적인 할머니, 동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불목의 위기를 화해로 풀어내는 <장마>(유현목, 1979)의 외할머니 등 여러 형태의 모성애를 보여 주었다. 이 가운데 연기력이 가장 돋보인 것이 유현목 감독의 <장마>였다. 화면을 줄곧 적시는 지루한 장맛비 속에 외손자와 나누는 콩깍지의 교감, 설움조차도 발효시킨 푸념 조의 독백은 선율처럼 느끼게 했다. 황정순 최고의 연기라 할 수 있다. [사진] 영화 <장마>에서 황정순과 김신재(오른쪽) 1980년대 이후의 출연작은 <피막>(이두용, 1980),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여자의 함정>(이경태, 1982), <가고파>(곽정환, 1984), <88 짝궁들>(서윤모, 1984), <장남>(이두용, 1984) 등 10여 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이두용 감독의 <피막>과 <장남>에서의 연기가 관심을 끈다. <피막>에서는 장손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무당을 불러 굿을 하게 하는 강인한 노마님의 모습이, <장남>은 핵가족시대 노인의 소외감이 묻어나는 표정연기가 일품이었다. [사진] 영화 <장남>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김일해 황정순은 이렇게 연극무대에서 다듬은 특유의 발성과 응집력을 무기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열녀문>(신상옥, 1962)으로 대표되는 한은진과 쌍벽을 이루며 1960년대 전후의 한국영화계에 대들보 역할을 했다. ‘탱크’라는 말을 들으며 다진 연기력 황정순은 1925년 8월 20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에서 난산 끝에 10남매 중 일곱 번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산모는 몸이 약한 마흔이 넘은 고령자였다. 딸이 백일이 지나 건강을 되찾자 황씨 일가는 시흥을 떠나 외가가 있는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정순이 세 살 때, 바다로 나간 아버지가 익사체가 되어 돌아오는 큰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긴 채무까지 짊어지고 험한 품팔이 일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어렵게 들어간 인천 박문여자중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정순은 이 무렵 프랑스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탐정소설 <아르센 뤼팡>에 빠졌다. 신출귀몰하는 괴도신사의 이야기다. 그러나 열네 살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본 ‘타잔’ 영화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황정순은 어느새 배우지망생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울에 사는 사촌 언니(황금순)를 믿고 가출한 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로 찾아갔다. 무턱대고 졸라 얻어낸 것이 대사 없이 처녀들 사이에 끼어 낄낄거리며 지나가는 <산송장>의 행인 역이었다. 1940년이었다. 그동안 딸의 ‘광대 짓’을 극구 말리던 노모도 제물에 지쳤는지 묵인했다. 그 사이 2차세계대전이 터졌다. 극단 ‘호화선’(1941년)의 연구생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못가 해체되는 불운을 겪었다. 해방 후에는 중앙방송국 전속 성우(1945년)가 되었다. 그녀의 본격적인 활동은 6.25 직전 극단 ‘신협’의 <뇌우(雷雨)> 공연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물꼬를 튼 연극 활동은 6,25 때 대구로 피란 온 ‘신협’의 <자명고>(1951. 1, 대구)와 <햄릿>(1951. 9, 대구), <맥베드>(1951. 10, 마산) 등에 출연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뒤이어 <은장도>(1953, 시공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5, 시공관) 등의 무대에 섰고, 56년에는 중앙국립극단 전속 단원이 되었다. 이즈음에 출연한 작품이 제1회 공연작 <원술랑>과 제2회 공연작 <뇌우(雷雨)>였다. 두 연극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5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150만명(1955년 기준)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는 두 연극에서 김유신 장군의 아내 지소 부인과, 노씨 집안의 하녀로 들어간 사봉 역을 맡았다. 특히 젊은 나이로 노파 역까지 소화한 <원술랑>의 지소 부인 역은 관객들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햄릿>(1957, 시공관) 등 여러 작품에서 공연한 바 있는 김동원은 몸을 아끼지 않은 그녀의 열정을 보고 단원들은 ‘탱크’라는 별명을 붙였다 (김동원, 『미수의 커튼콜』 2003, 태학사, 188쪽) 고 했다. 황정순이 1949년 영화 <파시>에 출연한 후 6년 동안 스크린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기 그녀는 이미 신접살림을 하는 새댁이었다. 1953년 3년의 열애 끝에 의사 이영복과 결혼했다. 이와 함께 이날 한꺼번에 두 딸과 아들 하나를 얻었다. 스물일곱 살 때였다. 하지만 결혼 30년 만에 남편이 먼저 가버렸다. 그의 연기를 받쳐준 것은 무대 경험을 통해 축적한 발성법과 육체언어로 인식한 연기동작, 투철한 직업의식에 따른 작품해석과 성격분석이었다. 이례적으로 현대적인 풍모와 카리스마를 보여준 <육체의 고백>의 서구적인 ‘밤의 여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삶의 질곡과 모진 풍상을 겪은 억척스런 아내이거나 엄격하면서도 인자한 어머니, 가난하지만 건강하게 살아가는 서민적인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사진]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황정순 황정순은 영화계에서 은퇴한 후 2006년 여배우로서는 처음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으나 이후 발병한 치매로 고생하다가 2014년 2월 17일 아흔 살의 나이로 400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46년에 이르는 영화의 삶을 거두었다. * 연도별 출연 편수는 통계에서 빠진 부분이 있을 것으로 판단돼 증가될 수 있음.
1953년에 발표된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신봉승의 각색을 거쳐 김수용 감독이 1965년에 장편으로 완성한 영화다. 1965년 11월에 개봉한 < 갯마을 >( 김수용 , 1965)은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신상옥 , 1961), < 벙어리 삼룡 >(신상옥, 1964)과 더불어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예술영화로까지 의미가 확장된 ‘문예영화’의 기준을 확립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흥행과 비평 면에서 모두 성공적이었고, 이후 1967년까지 폭발적으로 이어진 문예영화 전성기를 연 기념비적인 영화다. 장편영화만 109편을 연출한 김수용 감독은 이 영화의 성공으로 문예영화의 기수로 떠오르게 되는데, 한국 문예영화의 전성기는 김수용의 영화 활동의 전성기와 대략 일치한다. 예술성 있는 문예영화가 수익성도 있다는 것을 입증한 이 영화의 경험으로 김수용 감독은 소설의 영화화에 더욱 매진하였던 것이다. < 까치소리 >(1967), < 안개 >(1967), < 산불 >(1967) 등 그의 대표작은 거의 문예영화였던 점이 이를 잘 나타내준다. 짧은 단편소설을 장편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원작에 없는 캐릭터와 에피소드들을 더하여 좀 더 스토리라인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 해순과 시어머니, 상수, 그리고 동네 아낙들로 이루어진 원작의 단순한 캐릭터 구성 위에 영화에서는 시동생을 주요 캐릭터로 더하였다. 그리고 남편의 죽음 이후, 해순이 상수와 함께 하는 육지 생활과 산속 생활이 새롭게 추가되어 구체적으로 묘사됨으로써 영화의 드라마적 구성이 더 풍부해졌다. 결혼한 지 이제 열흘이 된 새댁 해순( 고은아 )의 남편 성구( 조용수 )가 고깃배를 타고 출항한 후 거센 폭풍우로 인해 사망하고, 그녀는 시어머니( 황정순 ), 시동생 성칠( 이낙훈 )과 함께 살아간다. 바닷가 갯마을은 과부가 많은 동네로 시어머니도 일찍 남편과 사별했다. 경제적 토대와 일상적 생활이 서로 한데 엮인 연대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갯마을 과부들은 끊임없는 성적 농담으로 자신의 척박한 처지를 이겨낸다. 그러던 중 아름답고 해맑은 해순을 쫒아 다니는 건장한 상수( 신영균 )는 그녀와 새출발하고 싶어 하고, 도망 다니던 해순은 결국 그와 관계를 맺게 된다. 성칠과 어머니는 해순과 상수 사이를 눈치 채고 해순을 설득하여 보내기로 한다. 원작은 상수가 징용에 끌려가자 홀로 산에 남은 해순이 바다를 그리워 하다가 병이 나서 갯마을로 돌아가는 결말이다. 이에 반해 영화는 서사적 확장을 꾀하기 위해 에피소드들을 추가한다. 채석장에서 행복하게 일하던 두 사람이 살인사건에 연루되자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살던 중, 지나가던 사냥꾼이 해순을 겁탈하려 한다. 그러자 상수가 사냥꾼을 죽이고, 해순은 기절한다. 상수는 약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다가 산으로 뛰어오던 중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는다. 정성스럽게 남편의 장례를 지낸 해순은 그리운 갯마을로 돌아온다. 시어머니와 마을 아낙들은 해순을 반갑게 맞이하고, 해순은 다시는 바다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원작이 해순과 상수의 해후를 열린 결말로 놓았다면, 영화는 두 번이나 사별한 해순이 운명에 순응하면서 다시 갯마을에서 갈아가기로 결심하는 닫힌 결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말은 운명의 비정함과 삶의 건강한 활력이 뒤섞이는 보다 풍부한 마무리를 생산해낸다. <갯마을>은 <벙어리 삼룡>처럼 향토색 짙은 서정성의 로컬 컬러 경향의 영화로 보이지만, 이전 향토성 문예영화들과 다른 면이 많다. 갯마을은 시대성이나 외부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원형적인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과부들로 구성된 여성 공동체에서는 성적 욕망을 마음껏 발산해도 된다. 남편 없는 이들이 섹스를 그리워하는 직설적인 농담을 나누거나, 서로의 맨 다리를 베고 누워 서로의 육체를 찬양하거나, 여성들끼리 진하게 포옹하고 키스하며 뒹구는 장면은 에로틱하면서도 건강한 생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갯마을이라는 원형적인 공간은 원초적인 삶의 양태들로 가득 채워져 생동하는 삶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표현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삶의 원초적 건강성이 뿜어내는 매혹은 비관적인 신파성과 거리를 둔다. 이 위에 1960년대 한국 감독들이 의식하고 있었던 유럽 모더니즘 영화의 영향이 더해진다. 캐릭터들의 농담과 태도에서 보여지는 보다 건조한 표현은 영화적 품격으로 나타난다. 해순이 상수를 받아들이던 날 클로즈업의 투 쇼트를 보자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나 루이 말의 영화처럼 내면의 환희와 갈등이라는 복잡한 감정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카메라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이처럼 분열된 의식세계가 감각적인 서구의 예술영화적 기법으로 표현된다. 바다와 갯벌, 이 속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성적 욕망은 원초성의 자연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유교적인 사회적 규범이 깨어지는 장면들은 어색하지 않다. 남편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 이제 막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며느리를 재가시키는 것, 다시 돌아온 며느리를 가족의 일원으로 환영하는 것과 같은 장면들은 이전 영화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진보적인 애티튜드다. 굿과 성황당 또한 원초성의 상징으로 기능하는데, 이전 영화들에서 무속이 전근대성의 표상으로 타파해야 할 구습으로 비춰지는 면이 있었다면, <갯마을>의 무속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삶과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순응하는 갯마을 사람들에게 무속은 또 하나의 자연의 일부다. 해순이 남편의 혼백을 건져내는 푸닥거리 장면, 그리고 아들의 넋을 건져내 정성스레 품에 안고 집으로 데려오는 어머니의 행동은 기이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사람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일상적 제의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갯마을>은 신파성에서 한걸음 나아가며 모더니즘 영화언어에 대한 갈망을 그려내는 전환기적인 작품이며 문예영화의 기준이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영화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진보적인 이상적 여성 공동체는 지금 봐도 놀랍다.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과 동시대적 이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계속해서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 갯마을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