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출발
- 감독
- 용유수
- 제작년도
- 1971
어렸을 때 작은 외삼촌과 함께 < 빨간 마후라 >( 신상옥 , 1964)를 봤다. 마포 극장에서 리바이벌 상영이었다. 극장은 입추의 여지없이 만원이었다. 나관중 소령( 신영균 )이 부상을 입은 채 불타는 비행기를 몰아 다리 폭파의 임무를 완수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애가 닳았다. 전쟁이 끝난 후 에필로그, 시민들 앞에서 전투기들이 쉭 쉭 소리를 내며 곡예를 할 때 어린아이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나는 공군이 될 거야요. 이 다음에 커다랗게 자라면...”으로 시작하는, 육군, 해군, 공군으로 번갈아 바꿔 당시 아이들이 자주 불렀던 노랫말처럼. 다시 본 <빨간 마후라>는 클리셰 덩어리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불쑥 뚫고 튀어나오는 감독이자 제작자 신상옥의 기개가 화면에 넘친다. < 성춘향 >(1961)의 기록적인 흥행 성공 이래 충무로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굳힌 신상옥의 영화사 신필림은 작은 방송국과 맞먹는 규모였지만 <빨간 마후라>가 극장에서 흥행할 때 부도를 맞을 만큼 경영상태는 오락가락했다. 신상옥의 그릇은 할리우드식 스튜디오를 지향했으나 한국영화산업의 형편은 영세했고 전근대적이었다. 생전의 사석에서 신상옥 감독을 뵈었을 때 그는 지방 극장들에서 수금액이 제때 올라오지 않아 늘 자금난에 시달렸다고 회고했다. 그런데도 <빨간 마후라>는 한운사 집필의 원작료만으로 당시 영화 한 편의 제작비에 준하는 금액을 썼고 공중전 촬영에 세 대의 카메라를 동원했으며 당시 한국영화 표준이 흑백이었던데 반해 화려한 색채 필름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2년. 전투기들이 사천 기지에서 강릉 제10 전투 비행대로 향한다. 씩씩한 음악은 휘파람 소리로 바뀌고 묵직한 남성 중창의 주제가 ‘빨간 마후라’가 흐른다. 배대봉 중위( 최무룡 )를 비롯한 아홉 명의 젊은 조종사가 전대장에게 신고를 한다. 홍길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전대장은 모두에게 빨간 마후라를 나누어주면서 말한다. “전투나 사랑이나 비겁하지 말아라!” <빨간 마후라>에는 오글거리는 대사가 많다. 인간이라기보다는 군인이 하는 대사가 많고 인간의 정념이 드러나는 대목에선 예외 없이 감상주의가 튀어나온다. 그러면서도 그 감상주의를 있는 힘껏 부정하는 또 다른 감상으로 틀어막는다. 이를테면 조종사와 벼락 결혼했다가 과부가 된 지선( 최은희 )를 연모하는 조종사 배대봉은 실의에 빠져 지내다 새 출발을 결심한 지선의 이사를 도와주는 장면에서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저희들 조종사들은 오늘만을 생각합니다. 내일은 알 수 없는 거고 오늘을 충실히 살기 위해서는 어제를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살기로 했었는데 이젠 자신이 없어졌어요.” “그럼 죽어야겠죠.” “네?” “그러나 살아 주십쇼. 제발. 슬픔은 누구에게나 있는 겁니다. 자기만이 비극의 주인공인 것처럼 제발 생각지 말아 주십쇼.” 이런 장면 다음엔 가차 없이 출격에 나선 전투 비행단의 장면이 이어지고 화면엔 전투기 굉음과 그들이 창공을 횡단하는 수평과 수직의 움직임이 빠른 속도로 교차 된다. 매번 전투는 예상치 못한 질곡에 빠지고 누군가는 전투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며 누군가는 구사일생의 기회로 살아난다. 신상옥의 회고에 따르면 이 영화는 공군의 비협조로 애를 먹으며 찍었다. 비행기 조종간에 카메라를 설치해 전투 장면의 박력을 담아내려 했던 시도가 웬만한 장편영화 한 편 분량의 필름만 소모하고 실패하면서 신상옥이 직접 잡은 카메라는 정교한 사전 계획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순발력과 임기응변으로 대다수 전투 장면을 담아낸다. 화면에는 하늘에서 선회해 지상으로 다가오는 전투기들을 마치 실제 전투에서 맞닥뜨린 것처럼 다급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절박함이 담겨 있고 예전 기록 필름에서 가져온 듯한 북한군의 사격장면조차도 그 절박함에 응대하는 느낌을 준다. 위험을 무릅쓰고 공군 편대를 하늘에서 쫓아다니며 황망하게 찍어낸 듯한 숏들이 기록영화적 질감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이 하늘의 드라마와 병치되는 지상의 드라마는 급박한 전투 장면의 리듬만큼이나 빠르고 느닷없다. 나관중은 동료 고도원이 이북 출신 여성 지선과 벼락 결혼을 한 뒤 전투에서 사망한 걸 가슴 아파하며 지선의 안위를 위해 후배 배대봉 중위가 지선과 사귈 것을 권유한다. 고도원과 지선, 배대봉과 지선의 사랑이 지상의 드라마로 전개될 때 나관중은 그들의 보호자, 나아가 모든 후임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정작 그 자신은 전투에서 죽어야 할 운명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가 죽은 뒤 그가 생전에 쓴 유서에는 “나는 전쟁에만 필요한 놈이다. 나 같이 무식하고 더럽고 쓸모없는 인간은 빨리 없어지고, 순수한 너희들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너희들은 자라나라, 나는 그 밑에 깔릴 재다, 거름이다.”라고 적혀 있다. 신상옥은 자신의 대표작인 이 영화를 ‘반전영화’라고 자평했으나 거기에는 카레이싱에 임하는 카레이서의 심정에 준하는, 죽음의 경계에 임박해서야 삶의 절박함을 느끼는 살아 있는 자들의 흥분과 절망이 있다. 그것은 여자들의 보호자를 자임하면서도 여자들의 보호를 원하는 남성들의 이중적인 욕망과 겹쳐 있는데 이 모순을 헤집는 것은 창공을 가르는 비행기들의 거침없는 속도와 에너지일 것이다. >> 빨간 마후라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신상옥 감독은 < 코리아 >(1954)를 만들면서 영화를 “온 몸으로 배웠다”고 썼다. 석굴암을 촬영하러 올라가다가 지프가 굴러 떨어져 죽을 뻔하기도 했고 추운 창고 건물에서 벌벌 떨면서 포터블 편집기로 편집을 하는 동안 “영화의 흐름과 감각”을 “몸의 한 부분으로 체화”했다는 것이다. 전후의 폐허에서 가산을 털어 만든 이 가난한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신상옥은 뒷날의 많은 “역사극과 문예영화의 기초”가 된 작품이라고 술회한다. 특히 < 무영탑 >(1957)과 < 성춘향 >(1961)은 <코리아>에서 다룬 이야기의 일부를 독립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신상옥, 『난, 영화였다』, 랜덤하우스, 2007, 53~54쪽) 1960년대 초까지 신필름 기술력의 핵심이자 평생의 친구였던 이형표 를 만난 것도 <코리아>의 후반작업을 하면서였다. 최은희 와의 스캔들로 선배 영화인들이 신상옥의 작품에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도움을 주었던 이가 바로 공보처 산하 대한영화사의 사무장이었던 이형표였던 것이다. 당시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이었던 두 청년(신상옥은 1926년 생, 이형표는 1922년 생)은 공통점이 많았다. 식민 말기의 전시체제 아래서 예술에 심취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해방 후에 영화에 입문했다는 점이 일단 그렇다. 10대의 신상옥과 이형표는 둘 다 그림에 몰두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도피주의적 성향과 관련해서 보자면,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탐독하며 유럽의 관념철학에 빠졌던 이형표 쪽이 더 분명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아름다운 것을 쫓아 예술에 탐닉하는 것으로 험악한 세월을 견뎌내기로는 신상옥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유미주의적 성향은 1920년대에 태어나 10대와 20대 대부분을 전쟁 통에서 보냈던, 그럼으로써 일찍부터 삶의 허무를 체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세대 예술가들이 어느 정도는 공유하고 있던 것이다. 영화계에서의 처지 또한 비슷했다. 집단 따돌림을 당했던 신상옥 만큼은 아니지만, 이형표도 선배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영어에 능통했던 이형표는 1950년을 전후한 시기에 미공보원(USIS)에서 일했는데, 이때 이필우 휘하의 기술 인력들은 미공보원의 하청을 받아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미공보원이 영화를 직접 제작하는 조직개편을 하면서 일자리를 잃게 된 영화인들은 그것이 통역을 했던 이형표 탓이라고 생각했고 이형표의 부역 전력을 발고했다. 이로 인해 이형표는 부산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미공보원에서도 해고되었다. 영어 능력을 바탕으로 영향력 있는 미국인들과 교류를 쌓았던 덕에 그 이후에도 커리어를 쌓는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도 그는 선배 영화인들의 미움을 샀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배들과 선을 그으며 활동했던 것은 오히려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전후 한국영화의 새 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보인다. 식민 말기에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영화 만들기를 익혔던 선배들은 도제제도의 강력한 위계관계에 얽매어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기자재에도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전후 원조의 일부로 미국의 아시아재단이 한국에 들여와 설치한 휴스턴 자동현상기가 영화인들의 거부감 때문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던 것은 단적인 예다. <꿈>(1955) 아시아재단의 한국영화 원조 프로젝트를 입안하고 실행했던 존 밀러(John Miller)는 ‘일거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구세대 영화인들 일부가 퍼뜨린 근거 없는 악소문 때문에’ 한국 영화인들 사이에는 자동현상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다고 아시아재단 본부에 보고했다. 영어로 소통할 수 있고 영화계의 낡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새로운 기자재에 훨씬 개방적이었던 젊은 영화인들에게 이 미국인 조력자가 더 호의적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존 밀러는 전후 한국영화 중흥의 신호탄이 되었다고 평가받은 이규환 의 < 춘향전 >(1955)이 아니라, 열악한 환경에서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신상옥의 < 꿈 >(1955)에서 한국영화의 미래를 보았다. 탈식민의 과제를 안은 채 냉전체제로 편입되어갔던 1950년대의 시대적 성격을 고려해본다면, 존 밀러가 이규환보다는 신상옥에 주목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신상옥과 이형표 또한 냉전의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에서 미래를 보았다. 멜로드라마로 대중영화의 흥행감각을 익히는 한편으로 영화사를 운영하며 기업적 발전을 모색했던 신상옥이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이형표는 테드 코넌트 (Theodore Conant)와 함께 휴대용 자기녹음기로 다이렉트 시네마 스타일의 < 위기의 아이들 >(1955)을 만들거나 파라마운트사의 <휴전 Cease the Fire)> 촬영에 참여하여 입체영화 기술을 경험하고, 16mm 코다크롬으로 컬러영화를 시도하면서 미국 발(發) 신기술을 통해 시각적 체험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신상옥이 제작, 감독하고 이형표가 촬영한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 <성춘향>(1961)의 성공은 개인적 수준에서는 그들이 각자 1950년대 동안 쌓아온 역량이 결합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좀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식민지 문화로부터 냉전문화로의 변화가 극적으로 발현된 사건이었고 영화계 내부에서는 중심 인력의 세대가 교체되고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모델로 한 새로운 산업 시스템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화기술의 유력한 출처이자 표준으로서 미국영화가 부상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당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상옥- 최은희 의 <성춘향>과 홍성기 - 김지미 의 < 춘향전 >간의 대결이 <성춘향>의 승리로 귀결된 것은, 한국영화사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홍성기는 1924년 생으로 신상옥과 비슷한 연배였지만 일제 말에 만주영화협회에서 영화를 배웠고 선배 영화인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경작(競作) 소동이 영화계의 신구파 대결로 표출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춘향전>을 옹호하는 구파와 <성춘향>의 편에 선 신파의 대결은 신파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며, 이는 곧 신필름이 이끌어갈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구세대의 지원을 받았던 홍성기는 젊은 신상옥에게서 발견되는, 산업과 기술 그리고 영화미학에 대한 진취적인 비전과 모험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고전 ‘춘향전’을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만든다는 기획 자체가 애초에 신필름의 것이었거니와, 뒤늦게 제작에 뛰어든 홍성기 팀은 새로운 미학적 경지를 보여줄 만큼 신기술을 구사하는데 능숙하지 못했다. <춘향전>이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는지 처음부터 산업적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1950년대 말 최고의 흥행감독이었던 홍성기는 한국영화가 새롭게 도약하는 1960년대 초에 영화계의 주도적 위치에서 밀려났다. 거의 테크니컬러에 육박하는, 현재까지도 퇴색하지 않은 <성춘향>의 아름다운 색감이 얼마나 대단한 기술적 성취였는지는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일반화된 1960년대 말 이후의 한국영화들과 견주어보았을 때 더욱 분명해진다. 그것은 1950년대 동안 미국영화의 신기술을 탐구해왔던 이형표가 영어로 된 기술서적을 열독하면서 장면마다 일일이 색온도를 재어가며 공들여 찍은 결과였지만, <성춘향>의 기술적 성공은 단지 아름다운 색감으로만 설명될 수는 없다. 유려한 카메라워크와 배우의 매력을 십분 살리는 효율적인 나눠찍기, 깊이 있는 공간구성은, 마치 초기 영화나 발성영화 초기의 작품들처럼 정면 롱 쇼트(tableaux)의 롱 테이크 위주로 구성된 <춘향전>과 현격히 구별된다. 기술이 예술적 표현을 제약하는, 신기술 도입 직후의 일반적인 상황을 뛰어넘은 <성춘향>의 성취는 기술이 예술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비용, 재능과 노력을 과감히 투여한 결과였다. 컬러 시네마스코프는 많은 조명 장비가 요구될 뿐 아니라, <성춘향>에서처럼 커트를 자주 나눌 경우에는 그때마다 현장을 다시 세팅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신상옥은 촬영에 필요한 코닥필름을 미국으로부터 직수입하여 사용했는데 여기에도 많은 돈이 들었다. (당시 많은 한국영화들이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미군부대 주변의 암시장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자투리 필름을 구입해 썼다. 홍성기의 <춘향전> 또한 그와 같은 경로를 통해 필름의 많은 부분을 조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감한 투자는, 결과적으로 서울 개봉관에서 관객 38만 명을 동원한 유례 없는 흥행 성공으로 보답 받았지만, 당시 한국영화의 시장 규모를 가늠했을 때 이는 무모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성춘향> 이전에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은 서울 개봉관에서 불과 10만 명을 동원한 이규환의 <춘향전>이었다. 기존 시장에서는 회수할 수 없는 제작비를 투여한 <성춘향>은 한국영화의 시장규모 자체를 확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마치 할리우드의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를 만들 때 그러했듯이, 신상옥은 <성춘향>으로써 영화시장의 한계에 도전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결과적으로는 시장의 혁신적 성장을 이끌었다. (실제로 셀즈닉은 신상옥이 모델로 삼았던 할리우드의 창의적인 제작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모험을 불사하는 진취적인 기업가 정신이 신상옥의 추동력이 되었음은 분명하지만, 대작 <성춘향>의 기획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성장해온 흥행산업의 잠재력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승산 없는 도박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전쟁 시기와 전후 얼마 동안은 기술과 자본이 아니라 사람의 힘에 의존하는 공연예술이 대중오락의 중심을 이루었다. 1930년대부터 이미 융성했고 전쟁 기간 동안에도 선무공작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공연되었던 악극과 여성국극은 형편없는 기자재와 낮은 기술력, 자본의 빈곤으로 조악한 만듦새를 보여주었던 한국영화를 압도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전후 복구에 투여된 미국 원조자금의 일부가 영화계로 들어오면서 기자재가 갖춰지고 서울의 개봉관과 지방 극장들을 잇는 배급망이 확보됨에 따라 영화산업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악극과 여성국극의 작가와 레퍼토리, 배우들과 그들이 무대에서 발전시켜온 캐릭터들, 조명, 미술, 의상 분야의 스태프들을 흡수하면서 1950년대 말 한국영화는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흥행시장의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었던 <성춘향>의 대중적 흡인력은 기술적 완성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1950년대 동안 대중과 교감하며 쌓아온 공연예술의 자산들을 효과적으로 영화에 끌어들인 결과이기도 했다. 두 주인공 최은희와 김진규는 나이가 많아서 적역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극을 이끌면서 조연들이 마음껏 개성을 펼칠 수 있는 마당을 만든다. 능청스럽고 익살맞은 악역(변학도)을 맛깔나게 소화한 이예춘 을 비롯하여 방자의 허장강 , 향단의 도금봉 , 그리고 양훈 , 김희갑 , 구봉서 같은 배우들은 악극에서부터 구축해온 캐릭터를 끌어와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고전 ‘춘향전’ 자체가 영화 뿐 아니라 공연예술을 통해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레퍼토리였는데, 특히 여성국극이 그려낸 화려하고 웅장한 스펙터클의 세계는 민족의 과거를 판타지의 무대로 만들곤 했다. 1950년대 후반의 사극영화들 대부분이 레퍼토리와 시각적 효과에서 여성국극에 빚지고 있거니와 특히 화려한 색감과 넓은 화면의 <성춘향>은 여성국극이 보여준 전통의 스펙터클과 판타지로서의 역사를 영화로 가져온 최고의 성공사례라고 할 만하다. 전통의 스펙터클을 통해 역사를 판타지로 구성하는 것은 민족의 역사를 문화의 차원으로 회수하면서 특정한 미의식과 연관시키는 문화민족주의의 소산이다. 독립의 전망이 희미해져갔던 1930년대 이후에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정체성 확보를 주권의 회복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지역의 전통문화로부터 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신상옥이 말했듯이 그는 “일제 치하에서 일본 역사는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한국의 역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났”던 세대, 다시 말해 민족국가의 학교제도 안에서 역사교육을 받는 대신 전통을 미적 대상으로 삼는 문화민족주의를 통해 역사에 대한 초월적인 감각을 습득한 세대에 속했다. 그와 같은 감각은 로컬리즘 담론과 그에 기반한 문학, 영화, 공연예술들을 통해 재생산되었으며, 신상옥이 말했던 것처럼 해방 이후까지도 “역사극과 문예영화의 기초”가 되었다. <성춘향>은 미적 대상으로서 전통이라는 문화민족주의가 미국영화의 테크놀로지를 만남으로써 만개한 작품이었고 그런 점에서 냉전시대의 한국영화가 새롭게 출발하는데 식민의 문화적 유산이 어떻게 전유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탁월한 사례였다. <성춘향> VOD 보러가기
“어쩌면 세상은 자기가 바라는 남자는 멀어져만 가고 대수롭게 생각 않는 남자는 눈앞에 귀찮게 서성거릴까. 여자는 자기 배우자를 찾는 거로 인생이 정해진다. 정해진 남자에게 육체를 제공하고 동화돼서 그 사람의 자손을 이어주는 일로, 여자의 전부가 끝나니까 말이다. 그러나 젊은 여자에게 남자의 선택의 자유가 있었던가. 또는 그런 긴 안목이 구비되어 있단 말인가. 어느 시대건 여자는 장님처럼 눈을 못 보고 남자를 골라 왔다.” 젊은 여자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기로는 남자를 고를 때만은 아니었다. 직업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권유받는 일자리는 다방 레지. 막무가내로 선물을 안겨주고 그녀를 호텔로 끌고 가려는 남자에게 “싫어, 싫어, 나 안 갈래, 싫단 말이야” 라고 분명하게 거절해도, “내 육체를 들뜨게 했으면 가라앉혀줘야지, 이 도둑년아”라는 말과 함께 따귀를 맞는다. 이후 이어지는 강간 장면에서 그녀의 몸을 손에 넣고자 하는 남자들 사이에 거래가 있었음이 밝혀진다. 기차에 앉아 고통뿐인 과거를 회상하는 이 여인은 누구인가. 그녀는 왜 여수로 향하는가.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거의 플래시백뿐인 이 영화에서, 여러 시간대의 과거를 액자처럼 늘어놓는 기억의 주체는 숙영( 김지미 )으로 보인다. 그녀가 열차에 타 과거를 회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내레이션 역시 그녀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숙영이 알 도리가 없는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다. 가장 긴 플래시백으로 거의 영화 본편이라 해도 좋을 3년 전 상황이 중요한 것은 현재의 숙영이 기다리는 사람과의 사연이 거기 있으며, 그녀가 살고자 하는 현재의 선체험과도 같은 시간여서다. 3년 전, 숙영은 다른 여성( 박정자 )과 함께 기차를 타고 여수로 가고 있다. 옆자리의 여성은 숙영에게 사탕을 먹이고 그녀는 그것을 무력하게 받아먹는다. 맞은편 자리에는 훈( 이정길 )이 타고 있는데 그는 숙영에게 수작을 부린다. 숙영과 그 옆 여성의 관계는 곧 밝혀지는데, 옆자리의 여성이 훈을 따로 불러내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은 교도관이며, 숙영은 죄수라는 것이다. 교도관이 훈을 설득하기를, 숙영이 자꾸 자살하고자 하니 내일 교도소로 돌아갈 때까지 “남은 시간 내에 여자는 남자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 세상에 믿음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이 말은 숙영이 없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왜 훈이 숙영에게 애초에 접근했는지를 숙영이 추측한 것에 가까워 보이는데, 그런 장면은 또 있다. 여수에 가서 그녀는 묘비도 없는 무덤에서 울부짖고, 그런 그녀에게 훈이 다시 접근해 다짜고짜 혼인을 올리자고 한다. 그러고는 남은 시간 동안 관광이라도 하자며 저녁에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데 여기서 숙영이 알 수 없는 사건이 하나 더 등장한다. 훈은 친구를 만나 빌려준 돈을 돌려받고자 한다. 그의 친구는 택시 강도로 그 빚을 갚으려 하고, 훈이 기겁하자 자살해버린다. 칼에 찔린 택시기사도 도망친 상황, 약속시간으로부터 5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훈은 이전의 여유 많고 껄렁하던 태도와 달리 뭔가에 쫓기고 좌절한 모습이다. 왜 훈의 태도가 바뀌었는지, 숙영이 그 공백을 채워 넣고 있다. 숙영은 본 적 없으나 이 긴 플래시백에 등장하는 장면 마지막은, 결국 세 사람이 다시 서울역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 있다. 교도관은 화장실을 간다고 자리를 비우는데, 그때 세 남자가 숙영을 따라붙는다. 자신들은 형사이며 훈을 잡으러 왔다고 말한다. 그 자리에서 교도관은 그들을 설득한다. 서울에 갈 때까지 시간을 달라고. 이 설득하는 내용은 이후 교도관의 말을 듣고 숙영이 상상한 것에 가깝다. 본 적 없는 이 세 장면은 결국 그녀가 끊임없이 시도하던 자살을 포기하고 삶의 의지를 갖기까지, 타인들의 선의를 상상해낸 것들이다. 그녀의 수난이 다른 남성들로 인한 것이었다면 그녀의 남은 삶 역시 다른 남성의 희생(훈이 붙잡혀갈 것을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숙영의 교도소 앞까지 동행한)으로 인해 가능해진다. 그의 희생을 알고 나서야 숙영은 그를 “여보”라고 부르며, 사기당해도 매 맞고 그래도 믿음을 다시 가져보겠다며 “여보, 당신 이름 뭐야. 이름 말이야. 내 이름은 효순이, 효순이란 말이야.”라고 울부짖는다. 매년 그 날짜 여수의 그 벤치에서 기다릴 테니 그곳에서 만나자고. 교도소 문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절박한 마지막 만남 이후 훈은 사복형사들에게 끌려가는데 정작 그는 “저렇게 사느니 차라리 자살을 해버리겠어.”라며 반항한다. 훈 앞에서 자살한 친구가 “넌 감상적인 것이 실수야”라고 그를 비난했던 것을 떠올려보라. 플래시백이 전부 마무리되면 영화의 첫 대목, 특징 없는 한 남자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숙영을 서울역에 데려다주는 부분에서 이어지는 현재 그녀의 삶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숙영은 이제 새 출발을 하려 한다. 첫 대목에 잠시 등장한 남자는 이제 그녀가 신뢰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다. 이 기나긴 플래시백은 마지막으로 훈을 기다려보기 위해 여수로 향하는 그녀가 떠올리는 마지막 작별 의식이었다. 자살을 몇 번이고 기도한 그녀가 살아보기로 마음먹기까지, 훈이 그녀에게 직접 보여준 행동은 사려 깊다기 보다는 그간 그녀를 착취해 온 다른 남성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앙탈을 부리는 건 봐줄 수 있지만 남자를 조롱하는 것은 못 참아!” 성관계가 강간의 형태로만 존재하며, 성욕과 고통을 구분하기 어려운 그녀의 세계에서, 그녀가 훈을 믿는 결정적 이유는 교도소 입소의 마지막 순간에 교도관이 하는 설득(그 젊은 남자가 이제 사형대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과 숙영이 직접 기억의 빈틈을 상상으로 채워 넣은 훈과 관련된 사연이다. 숙영은 이제 자신의 서사를 완성한다. 플래시백의 시간은 이제 끝났다. 그녀는 여수에 왜 갔을까. 재회하기 위해 갔을까, 완전히 이별하기 위해 갔을까. <육체의 약속>은 후자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숙영을 품평하고 학대하는 남성들의 언어가 전시되는 방식은 조롱에 가깝다. 그들의 권력은 이제 그 플래시백 안에 봉인되었으며, 이제 그녀는 그 시간에 이별을 고한다.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1975)은 이만희의 <만추>(1966)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만추>를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지금 <육체의 약속>은 <만추>가 (실물 없이) 상징적으로 갖고 있는 오리지널의 위치를 영화라는 육체로 대신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같은 작품을 원작으로 한 김태용 감독의 <만추>(2011)와 비교해보면 인물과 감정을 설명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다. 스산한 풍경으로 애나(탕웨이)의 내면을 외부에 전시하며 많은 부분을 상상에 맡기는 김태용의 <만추>와 달리, 김기영의 <육체의 약속>은 상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흔히 <만추>와 그 리메이크 영화들의 여자 주인공을 설명할 때 ‘남성 혐오에 빠진’이라는 설명이 이어지곤 하는데, 김기영 감독은 그러지 않는 게 이상해 보일 정도의 과정을 전부 펼쳐 보인다. 쥐어뜯듯 선물의 포장을 벗겨내고 한번 가지고 놀면 흥미를 잃는 아이처럼, 남자들은 그녀를 갖고 버린다. 그녀는 그렇게 여러 남자에게 이용당했고, 낙태도 여러 번 경험한 듯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살인을 저질러 교도소에 가게 되었고, 죄인의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교도관은 그녀의 입에 계속 사탕을 물린다. 입에 넣어주는 사탕을 수동적으로 받아먹던 퇴행적인 모습의 숙영이 마지막 순간, 훈의 희생을 알고 나서 스스로 사탕을 뱉는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사탕을 뱉으라는 말을 해 준 이가 훈이었음을 떠올려보라. 그녀가 플래시백을 통해 회고하고자 하는 기억은 적나라한 수난사와 훈이 개입된 구원의 순간뿐이다. 그녀가 교도소에 가게 된 살인 장면은 아예 플래시백에 등장하지 않는다. 일인칭 시점의 역사인 플래시백이 갖는 자기 기만성을 잘 보여주는 셈이기도 하다. <만추>와의 연관성 외에도 1970~80년대에 많이 만들어진 호스티스 영화의 계보에서 <육체의 약속>을 살펴보는 일도 가능하다. 그래서 <육체의 약속>의 숙영은 김지미가 그 전에 맡았던 영화 속 주인공들의 연장선에 있는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남자 때문에 팔자를 망친, 하지만 남자 없이 살 수 없는’ 여성의 전형으로 그려지는 숙영은 남자를 죽이고서야 남자가 없는 곳(여자 교도소)으로 갈 수 있었지만, 결국 남자가 그녀를 살게 한다. 그런 이야기를 숙영은 플래시백을 통해 완성해낸다. 기다리는 이야기가 아닌, 이별하는 이야기. <육체의 약속>의 흥미로운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