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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TETV][인간 개극장]6회) 인간+개 로시의 생일날! 생일선물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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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2019)은 이젠 거의 멸종위기라고 전해지는 ‘시네필’의 영화다. 시네필은 영화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순간, 장소, 인물, 움직임, 빛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에 빠질 만한 영화적 이미지와 조우하면 흘러가는 그것을 소유하고자 절박한 몸짓으로 반복적으로 관람하는 물신주의자다. 실제로 영화를 재생해볼 뿐만 아니라 기억에 각인된 강렬한 이미지를 꺼내 가상적으로 돌려보기도 한다. 시네필의 반복강박을 야기하는 영화적 이미지들은 파편적이고 비인과적이며 그래서 자주 서사와는 상관없이 떠오른다. 영화학자 로라 멀비는 그의 저서 『1초에/24번의 죽음』에서 이러한 시네필을 ‘소유적 관객(possessive spectator)’이라 칭한다. 필름 시대를 지나 디지털 환경에서도 시네필은 돌려보고, 뜯어보고, 반복해 보는 매체의 특징을 맘껏 누리며 “텍스트 본래의 응집력을 공격하면서 예상치 못한 감정으로 열리는 즐거운 회상을”(35) 가져오고 그 과정에서 사색의 여지를 마련한다. <남매의 여름밤> 역시 인과적이고 극적인 서사보다는 여름밤의 빛과 공기, 냄새와 소리를 감각하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아빠(양흥주)는 살던 집을 빼고 옥주(최정운), 동주(박승준) 남매와 함께 할아버지의 오래된 이층 양옥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곧이어 부부 갈등 때문에 집을 나온 고모가 이들에 합류한다. 옥주와 동주, 아빠와 고모,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는 그렇게 여름 한 계절을 함께 보내게 된다. <남매의 여름밤>은 캐릭터에 대한 서사적 정보를 거의 주지 않는다. 아빠와 고모가 겪고 있는 경제적 곤란과 부부 갈등이 무엇인지, 왜 옥주는 엄마를 미워하는지, 할아버지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옥주는 남자친구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의 사연은 극도로 절제된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공감각적이고 중첩적인 감각과 단편적 기억의 환기를 통한 다중적 시간성이다. 관객들은 여러 겹으로 이뤄진 감각과 시간의 미장아빔(mise en abym)에 포획된다. 그러면서 감각과 시간은 공간화 되고 관객은 남매와 함께 ‘영화-집’에 머물게 된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빛은 소리가 되고, 소리는 빛이 된다. 한낮의 뜨거운 빛은 끈적이는 장판에서 맨발이 떨어지는 소리가 되고,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는 밤공기는 오래된 이층 양옥집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냄새가 되며, 환하게 열어젖힌 창으로 흘러나오는 저녁밥 냄새는 안팎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와 섞이고, 마당의 풀벌레 소리는 어두운 밤 잠 못 드는 할아버지가 켜놓은 낡은 전축 스위치의 초록색 전구불빛이 되고,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옛날 노래 소리는 할아버지의 삶과 그 삶이 가꾸고 거주해온 집이 된다. 그리고 커다란 마루 창문 덕택에 안이 훤히 다 보이는 집, 시시각각 다르게 빛이 들어오며 변신하는 집은 그 자체로 네모난 프레임의 영화가 된다. 그 ‘영화-집’에서 옥주와 동주 남매가 보낸 여름방학은 아빠와 고모의 지난 추억과 중첩되고, 그 시간이 옥주와 동주 남매가 성장해서 기억하게 될 특별한 순간이 될 것이라는 암시로 이어진다. 심지어 아빠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장난(방학인데도 학교 갈 시간이라고 깨우기)을 동주에게 반복하고,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모실 요양원을 알아보고 오는 길에 옥주 남매가 자신이 병이 들면 동일하게 처리할까봐 걱정한다. 엄마가 보고 싶어 꾸었다던 고모의 꿈은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만난 옥주의 꿈으로 반복되며 옥주의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연극처럼 상연된다. 시간의 반복 속에서 차이를 각인하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처럼 <남매의 여름밤>은 삶의 시간을 담담히 관조한다. 하지만 시간의 반복을 통달하고 희미한 회한만 남은 노년의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즈의 영화와 달리, <남매의 여름밤>에는 그 시간의 초입에서 허우적대는 생경함과 혼란스러움이 공존한다. 그 시간을 경험하고 바라보는 주체가 사춘기 소녀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흔한 짝패인 장난기 많고 철없는 어린 남자 아이가 아닌, 사춘기 소녀의 시선으로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보게 한다. 이제 막 인생을 진지하게 성찰하기 시작한 옥주와 인생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들어선 할아버지는 삶의 주기에서 가장 사색적인 시기를 살고 있는 이들이다. 옥주는 자신의 정체성뿐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시공간에 대해 고민한다. 독립적이고 자존심이 센 옥주는 자기 영역이 중요하다. 그래서 모기장으로 자기 영역을 확실히 주장하는 만큼, 할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을 허락받았는지 아빠한테 반복해 확인하고 할아버지의 집을 아빠와 고모가 자신들의 편의대로 처리해버리려는 것에 반발한다. 옥주는 할아버지에게 호기심이 있고 도움을 주고 싶지만 독립된 개체로서의 그의 삶에 무례하게 침입하기를 원치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옥주 자신에게도 그렇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옥주는 할아버지의 시간이 깃들여 있는 공간을 존중하고 그의 존엄을 지켜주고 싶다. 그 집을 포함해 맨들맨들해진 재봉틀, 오래된 사진첩과 담금주, 사용하기 편하게 나무에 묶어둔 정원용 가위와 물뿌리개, 방울토마토와 포도나무, 낡은 액자와 전축은 그와 함께 나이 들어 온 것이다. 아빠와 고모는 나이가 많고 병든 할아버지의 시간을 앞서 계산한다. 할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계산하는 순간, 그의 현재는 덤이 된다. 하지만 옥주는 다르다. 현재 자기의 시간과 공간이 소중하듯이, 할아버지도 그렇다. 할아버지가 어색하고 낯설지만 잘 해드리고 싶은 옥주는 가족 중 유일하게 생일선물을 준비한다. 옥주는 할아버지가 생일선물인 모자를 쓸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옥주의 태도는 할아버지가 한밤중에 나와 홀로 낡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미련>을 듣고 있는 장면에서 특별한 순간을 만든다. 노래 소리를 듣고 이층에서 내려온 옥주는 거의 말이 없고 가족에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할아버지가 순수한 즐거움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여행을 하며 노래를 감상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러나 옥주는 더 다가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을 이층 계단으로 올라와 앉는다. 옥주는 그 노래를 함께 듣지만 그의 시간과 공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삶에 대한 존중이다. 할아버지가 소파에서 맥주 한 병을 탁자에 놓고 음악을 즐기는 방식은 그야말로 시네필적인 태도다. 앞뒤의 시간(서사적 맥락)을 계산하지 않고 그 순간을 즐기고 몰입하기, 타자가 들어올 여지를 주면서도 자기만의 이미지를 소유하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 없는 시간을 만들기. 그것들은 설명이 필요 없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재생해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내게 <미련>의 노래 소리는 전축에 켜진 작은 초록색 전구불빛과 전기 연장선 스위치의 주홍색 불빛으로 각인되어 있다. 나도 그 장면을 보지만, 그 불빛들도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여름밤의 공기를 전한다. 옥주가 자기 공간을 고집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고모와 동주에게 공유했던 것처럼 그리고 할아버지의 노래를 같이 들으면서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던 것처럼, <남매의 여름밤>은 여름의 개방성과 투명성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소유적이면서도 공유적인 체험을 사색하게 한다. 낯선 거리를 두고 타인을 존중하면서도 그의 내밀하고 사적인 시공간을 경험하게 해주는 영화 그리고 영화관이 새삼 그리워진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초이스]버스데이 보이
흑곰아, 내 쉴 곳은 어디메뇨? 박세종 의 < 버스데이 보이(Birthday Boy) >는 2004년 프랑스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Annecy International Animated Film Festival)에서 첫 상영을 하였다. 당시 단편 경쟁 작품을 보면서 익숙한 캐릭터와 배경 때문에 드디어 한국에도 제대로 된 작가가 나왔구나, 이렇게 잘 짜인 작품을 누가 만들었을까, 하고 카탈로그에서 작품정보를 찾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작품은 호주 국립영상학교 것이었다. 나는 분명 주요 상을 받을 거로 생각했다. 그만큼 애니메이션의 동작과 구성이 탄탄하고 뛰어났으며 영화적 장치와 주제가 돋보였다. 작품은 2004년 안시(Annecy)의 신인상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서 34개의 상을 받았고 아카데미 단편부분 후보작으로도 올랐다. 그때 박세종 감독과 나는 안시에 같이 있었다. 그러나 만난 건 박 감독이 아닌 그의 호주인 아내와 어린아들 그리고 시누이였다. 그때 나는 스위스에 갔다 오려고 버스터미널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벽안의 여자가 우리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어린 아이는 이리저리 장난을 치며 엄마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남편의 작품에 대해 강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 버스데이 보이 >는 1951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애니메이션에서 실제 전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기찻길이 있는 어느 마을, 사람들이라곤 보이지 않는 폐허를 보여준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마을은 고적하지만 따뜻해 보이기까지 한다. 기와지붕의 추녀마루에 앉은 잠자리가 쇠 부딪는 날카로운 소리에 놀라 날아가고 카메라의 시선이 지상으로 내려오면 집을 뚫고 추락한 전투기의 잔해 안에서 “흑곰아, 내 쉴 곳은 어디냐”는 노랫소리와 볼트와 너트를 주워 모으는 어린 주인공이 보인다. 이렇게 첫 시퀀스(sequence)를 통해 영화의 배경과 스토리 세계, 주인공 소개와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첫 시퀀스를 통해 전쟁을 통해 파괴된 가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번째 시퀀스에서 주인공 만욱은 전투기 부품인 볼트를 철로 위에 올려놓는다. 이윽고 기적소리와 함께 기차가 빠르게 지나고 지켜보던 만욱의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만욱이 만들려던 장난감 탱크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탱크가 기차에는 실려 있다. 만욱의 눈빛은 환하게 빛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기차의 굉음이 압도적이다. 이에 비해 정적 속의 마을에서 혼자 상상의 전쟁놀이를 하는 주인공, 그의 상상은 아빠와 함께 전쟁을 하는 것이다. 폐허의 마을에서 혼자 전쟁놀이를 하는 어린 소년 만욱의 가슴 리본에는 한자로 ‘祝生日’이라 쓰여 있다. 오늘이 만욱의 생일인가 보다. 만욱이 돌아온 집 마루에는 군사우편으로 온 소포가 놓여있다. 만욱은 그것이 아버지가 보내온 자신의 생일 선물이라 여긴다. 소포는 아버지의 유품인 지갑, 군번줄과 군화다. 소포의 의미를 모르는 만욱은 자신의 발보다 큰 군화를 신고 군번줄을 목에 걸고 군인 흉내를 낸다. 햇살이 들이치는 방안에는 만욱이 볼트로 만든 탱크와 무기들이 즐비하다. 새로 만들어온 볼트로 탱크를 만들다 잠든 아이, 그리고 벽에는 가족사진이 보이고 암전되며 아들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죽은 아버지의 유품을 생일 선물로 생각하는 어린 소년은 전쟁놀이하다 잠든다. 전쟁영화에서는 전쟁의 가혹함을 드러내기 위해 어린 소년 소녀들이 종종 캐스팅된다. 그만큼 흔한 주제여서 전쟁을 다루기는 여간 까다롭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뻔한 결말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소년은 전쟁의 의미를 잘 몰라야 하고 그것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와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것이 이런 영화의 전략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서 주제를 증폭시키는 방법에 주목했다. < 버스데이 보이 >의 스토리는 위에 보여주었다시피 아주 간단하다. 만욱이 전쟁의 폭력, 즉 자신에게 다가온 폭력의 실체를 모른 채 아이러니하게 전쟁 기계들을 끊임없이 복제한다는 것이다. 첫 시퀀스에 집을 관통하여 추락한 전투기는 가정을 파괴한 전쟁의 상징이다. 그리고 친구와 어울려야 할 만욱은 전투기의 부품으로 혼자 전쟁놀이를 한다. 세상을 모르는 순수함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전쟁의 폭력과 상처는 미래 세대에게 대물림되고 있다. 그럼에도 작품은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냥 만욱의 상황만을 보여줄 뿐이다. 나머지는 관객의 몫이다. 애니메이션이 이렇게만 끝났다면 어딘가 싱겁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디테일을 담고 있다. 바로 햇살에 대한 표현이다. 영화의 전반에 충만하게 차 있는 것이 햇살이다. 첫 장면부터 끝 장면까지 영화 속에는 너무도 밝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린다. 어린 ‘만욱’이 혼자 전쟁놀이하는 폐허의 골목길은 물론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유품을 자신의 선물로 오해하는 장면에도 어머니를 기다리다 잠이 든 방안에도 햇살은 애니메이션이 주는 무거움에도 역설적으로 밝게 빛나고 있다. 감독은 생일 선물의 아이러니를 통해 전쟁의 폭력을 배치하고 햇살이라는 하나의 장치를 가지고 주제를 무한 증폭시킨다. 어쩌면 애니메이션은 햇살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작품의 무거운 주제와 상반되게 표현된 햇살에 관객은 따스한 마음을 얻는다. 따라서 아버지의 죽음조차 모르는 천진난만한 만욱과 아버지의 유품을 자신의 생일선물로 착각하는 만욱의 고통은 햇살에 의해 무한 증폭된다. 제목은 아버지의 죽음과 중첩하여 축복받지 못하는 탄생이라는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엔딩은 전쟁놀이에 지쳐 잠든 만욱의 모습에서 페이드 아웃되지만 정적을 깨며 들려오는 어머니의 밝은 목소리 하나로, 집으로 돌아오는 가족이라는 상징을 완성한다. 어쨌든 돌아올 사람이 있어서 그의 생일은 축복받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가슴에 ‘祝生日’이라는 리본을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그건 사족으로 보인다. 제목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 대한민국은 60년 전 시작된 전쟁이 끝나려 하고 있다. 그때 시작된 전쟁으로 현재까지도 850만 명의 이산가족이 아픔을 겪고 있다. 더 이상 전쟁은 없어야 한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나는 살리라」(1949)를 변용하여 결론을 대신한다. 일촉즉발의 공포 가득한 오늘 / 난 민중을 향해, 삶을 향해 떠난다, / 총잡이들이 옆구리에 미국문화를 / 끼고 어슬렁거리는 오늘, / 나 여기 굳은 결의 되새긴다. / 중동에서 살육을 자행하는 손들 /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교수대 / 한국을 지배하는 치욕 / 나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리라 / 나 여기에 머물리라. / 또다시 나를 기다릴, 별처럼 빛나는 / 손으로 나의 문을 두드릴 / 말과 민중, 그리고 길과 더불어.
베이징에서 첫 번째 중국영화를 상영하다
나는 영화사의 순간을 찾아서 할리우드와 유럽을 기웃거렸다. 영화는 거기서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턴가 아시아 영화를 건드려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한국영화를 말하지 않겠다고 이미 말했다. 한 페이지만 넘기면 정종화 연구원의 ‘한국영화사 100년’ 연재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연대기적으로 일본영화를 먼저 말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공식적인 역사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내게 섬광처럼 느껴지는 영화사의 순간만을 따라갈 것이다. 지금 나를 이끄는 것은 첫 번째 중국영화 <정군산 定軍山, The Battle of Dingjunshan>(런칭타이, 1905)이다. 물론 중국에는 뤼미에르가 첫 번째 영화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상영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영화가 도착했다. 린드버그가 비행기로 대서양을 횡단하기 30년 전의 일이다. 당연히 배를 타고 영화는 중국에 도착했을 것이다. 아편전쟁으로 나라는 쑥밭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서구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역사 속에서 도착한 서양문물은 두려운 것이자 신비로운 것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본 적이 없는 세계의 이미지들이 담겨 있었다. 중국에서 영화가 처음 상영된 곳은 홍콩을 거쳐 도착한 상하이였다. 아마 내륙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영화에 유리하지 않았다. 영국 공사가 서태후의 칠순 생일선물로 보낸 영화는 그 면전에서 상영 도중 화재를 일으켰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위험한 화학물질이었다. 게다가 중국인들은 사진이 영혼을 훔쳐간다고 믿었다. 그러니 이 ‘전기 그림자’(電影, 중국에서 영화를 부르는 말. 처음에는 ‘電戱’라고 불렀다. ‘전기(로 찍는) 연극’이라는 의미에서였다)는 불길한 ‘활동사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호기심 넘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런칭타이(任慶泰)는 사진에 완전히 매혹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베이징에 펑타이(豊天) 사진 스튜디오를 차렸다. 아마 사진이 ‘활동’을 하는 이 신기한 발명품에 그는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을 것이다. 그래서 베이징에서 상영되는 서양의 영화를 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직접 찍기로 했다. 그때 런칭타이는 (뤼미에르처럼) 베이징의 길거리를 찍는 대신 베이징 오페라 가수인 탄신페이(譚培)를 모셔다가 「삼국지연의」에서 황충 장군이 정군산에서 조조의 군대와 맞서 싸우면서 공명의 꾀에 따라 하후연을 물리치는 대목을 찍었다. 물론 무성영화였기 때문에 노래를 담을 수 없었고 연주가 담긴 것도 아니다. 다만 탄신페이가 무대에서 하던 몇 가지 퍼포먼스를 카메라 앞에서 실연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베이징 오페라는 (오직 중국인들에게)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그저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거기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연주가 들렸을 것이다. 촬영은 펑타이 사진 스튜디오 뒤뜰정원에서 했고, 탄신페이는 무대 의상 그대로 입고 연기했다. 기록에 따르면 촬영은 런칭타이가 직접 했다고 한다. 런칭타이가 영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거나 영화의 미래를 내다보았을 리가 없다. 아직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그는 호기심을 안고 그걸 찍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영화가 베이징 오페라를 찍는 데서 시작했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로 내게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지아장커에게 이걸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약간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길을 잃을 때마다 어디서 시작했는지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때 영화는 예술을 찍었고, 우리 마음속의 역사를 찍었고, (서방세계에서 가져온 기계로) 우리 자신을 찍은 거지요.” 그들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항상 다시 시작했다. 그것이 배움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