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게임
- 감독
- Roberta Findlay
- 제작년도
- 1985
- 출연
- Mina Bern, Corinne Chateau, 앤절 데이비드, Joe Lynn
< 지옥만세 >는 십대 소녀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의 로드무비다. 학교폭력 피해자인 둘은 사는 게 지옥 같다. 가족도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 힘들다고 토로해봤자 약해빠졌다거나 너보다 더 힘든 동생을 배려하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결국 학교 폭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 둘은 지옥 같은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몇 번이나 자살에 실패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을 받고, 선우도 나미의 뒤를 따르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자살기도 중 나미는 따돌림을 주도했던 채린(정이주)이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복수를 위해 선우와 함께 서울로 향한다. 학교폭력, 자살기도, 납치와 그루밍, 사이비 종교집단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는 반전처럼 경쾌하고 엉뚱하며 발랄한 톤을 갖고 있다. 초성만 쓰면서 가볍게 주고받는 문자, 싸이키델릭한 록 스타일의 음악, 뮤직 비디오 같은 회상 몽타주씬들은 그러한 톤을 뒷받침한다. 그렇다고 앞의 나열된 소재를 표피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나미와 선우의 예상을 엇나가는 반응과 엉뚱한 선택들은 십대 소녀들이 자신의 고통의 기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관되게 해결책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제시한다. 지옥 같은 현실이 압도해 올 때 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은 왜 자신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언제 어떻게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서로가 있고, 그렇기에 두 소녀는 지옥에 살면서도 생동감이 넘칠 수 있다. 자살에 성공할 방법을 역동적으로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들을 이해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둘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들이 처한 파국의 풍경은 자살 장소로 대변된다. 나미와 선우가 사는 곳은 온천 관광지로 유명했던 수안보이다. 한때 인산인해를 이루던 관광지는 그 영광을 잃어 점차 쇠락했다. 이제 이곳은 문 닫은 대중목욕탕들로 가득하다. 더 이상 사람들이 찾지 않는 버려진 대중목욕탕은 자살하기에 좋은 장소다. 엄마에게 들켜 자살에 실패하곤 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으로 진짜 자살에 성공하기 직전까지 간다. 하지만 자꾸 자살 도구를 트집 잡고 왕따 주동자인 채린의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미의 태도는 그가 정말로 죽기를 원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죽을 만큼 괴로워하고 있으며,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무력감에 놓여 있을 뿐이다. 선우에게 유서를 건네며 “그냥 아무 우체통에다 넣어줘. 운명처럼 어디든 닿겠지”라고 말하는 나미 대사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이고 낙관적이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 종로에 도착한 나미와 선우는 어이없을 정도의 우연으로 채린과 마주친다. 무작정 종로를 헤매자던 나미의 전략이 성공에 이르게 된다. 잘나가던 채린의 아버지 사업은 부도가 났고 엄마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낙원’이라 불리는 해외의 종교 집단 거주지로 떠나버렸다. 홀로 남은 채린은 엄마를 따라가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나미와 선우는 채린의 얼굴에 ‘기스’를 내어 살아있는 지옥을 맞보게 해주기로 결심하지만 채린은 이미 가해자가 아닌 회개자의 얼굴로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채린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있다며 나미와 선우에게 용서를 빈다. 나미는 채린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선우는 채린이 여전히 종교 집단에서 함께 살며 낙원을 가기 위해 경쟁하는 아이들 안에서 ‘여왕벌’ 노릇을 하며 따돌림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따돌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겉으로는 다정다감해 보이는 명호(박성훈)다. 명호는 사이비 종교 교주인 목사가 교도소에 수감된 뒤 조직을 이끌어 가고 있다. ‘낙원’으로 가려면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피해자에게 받는 용서’의 점수가 가장 높기 때문에 채린은 이 점수를 받기 위해 나미와 선우에게 자신을 용서해 구원해달라고 애걸한다. 영화는 어떤 존재와 사건이든 하나의 얼굴만 갖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채린은 학교 폭력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며 종교집단의 납치폭력과 그루밍을 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나미는 가해자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채린과의 관계에 있어선 피해자이지만 가해자 무리에 속해 선우를 향한 괴롭힘에 동조하고 외면해왔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선우는 피해자이고 다른 피해자를 잘 알아차리며 보호하려는 태도를 취하지만 나미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미 엄마 식당에 대한 악플을 올렸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나미와 선우는 피해자이지만 마냥 착하거나 약한 자들은 아니다. 취약한 상황에서 이상한 신념에 빠진 이들과 달리 나미와 선우는 그들의 친절함에 고마워하면서도 경계심을 놓지 않는다. 둘은 채린을 향한 복수의 여정에서 자신들뿐만 아니라 채린을 구해 나올 정도로 용기 있는 이들이다. 또한 나미는 선우와의 관계에서 회개했다는 채린에게 더 동일시하며 그의 위선을 알아채지 못해 선우에게 상처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할 정도로 자신을 성찰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때서야 영화는 회상 장면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피해자와 가해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여준다. 영화의 오프닝은 ‘황구라’라고 불리는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또래 무리들이 촬영한 것 같은 친밀한 카메라를 시뮬레이션 한다. 하지만 생일을 맞은 아이와 함께 즐겁게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던 장면은 곧 지옥으로 변한다. 이 영상이 사실은 학교폭력 피해자를 괴롭히는 영상 푸티지라는 것이 밝혀진다. 피해자인 아이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얼굴에 케이크를 맞고 괴로워하는 뒷모습만을 비춘다. 한 아이가 쓰러진 아이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지만 곧 무리의 부름에 그를 버리고 가버린다. 선우가 채린에게 연민을 보이고 공감하는 나미에게 실망할 때 나미의 회상 속에서 이 오프닝 장면이 다시 반복된다. 이번에는 피해자 아이와 동정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배신하고 가버린 아이의 얼굴이 모두 정확히 보인다. 피해자는 선우이고 버리고 가버린 아이는 나미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그 얼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더불어 나미는 자신이 선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외면했음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피해자든 가해자든 다양하고 복잡한 얼굴을 갖고 있다고 해서 한 얼굴이 다른 얼굴로 상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한다. 채린이 피해자의 얼굴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갖고 있는 가해자의 얼굴이 사라지거나 면죄 받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채린이 가길 바라는 낙원은 이미 지옥이 된지 오래일 것이다. 명호가 돌보고 이끄는 아이들 공동체도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를 돌보는 따뜻한 분위기에 선행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낙원행 티켓을 타기 위한 생존게임에 불과하다. 명호는 친절하고 관대한 젊은 종교 지도자처럼 보이지만 그 스스로 사기공모 범죄자이며 사기 피해자이다. 지옥과 낙원은 동전의 양면이다. 나미와 선우의 여행은 어쩌면 고립된 이상향으로서의 낙원은 부재하고 도처에 지옥의 면모가 있기에 지옥탈출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선 지옥 역시 낙원의 일면이 잠재해 있을 수 있다. 고통을 알아봐 준 서로가 있다면 조금은 지옥을 견딜 수도 있을지 모른다. 친절해 보였던 어른들의 광기와 납치폭력에서 탈출하고 명호의 자살을 실제로 목격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꽂혀 있던 ‘낙원’ 엽서는 꽤 직접적인 은유가 된다. 현실은 바뀌지 않은 채 여지없이 돌아오자마자 괴롭힘을 당한다. 이번에는 서로가 있고 더 이상 죽고 싶어 하지 않으며, 가해자들을 무서워하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는 차이가 있다. 극복, 해방, 낙원 이런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방과 낙원은 곧 지옥이 될 것이기에. 죽지 않기 위해선 지옥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가볍게 인정하며 “오키 오키”라고 답할 수 있는 태도, 적어도 죽지 말고 “지옥을 견뎌내는” 마음이 필요하다. 자기들만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서로의 집으로 향하는 엔딩씬에서 나미는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 가는 선우를 응시한다. 망원렌즈 촬영으로 거리와 초점이 왜곡된 쇼트에서 얼마 안가 선우의 뒷모습은 포커스가 나가 흐릿해지다 못해 빛 속으로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나미는 선우의 생존을 확인이라도 해보듯 다급하게 부른다. 가해자들이 별칭으로 부르던 ‘황구라’가 아닌 ‘선우’라고 분명하게 부른다. 포커스가 나가 있기 때문에 선우가 나미의 부름을 들었는지, 그가 되돌아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선우는 그의 부름에 응답하며 되돌아온다. 드디어 초점이 맞춰져 선명하게 마주하게 된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에 나미는 웃으며 “웰컴 백 투 더 헬, X발”이라 말한다. 다시 각자의 집으로 가는 나미와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이 교차한다. 오늘은 그의 이름을 불러 지옥을 살아내고 있음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똑바로 보자. 파국이 아니라 난국이다. < 기생충 >(봉준호, 2019)의 기택(송강호)과 충숙(장혜진) 가족은 지배계급에 제대로 손상을 입히지도 못하고 폐허의 잿더미에 올라서 미래를 볼 용기도 없다.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다시 말하면 재현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상태로, 순간적으로 출현했던 계급의식을 계급상승 욕망과 부유층 선망으로 다시 환원하며 건축가 남궁현자의 집을 떠나지 못한다. 유령은 애도를 가능하게 하며 마침내 무엇이 끝났는지 역사로부터 어떤 유산을 물려받을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한다. 파국은 과거를 파괴하는 폭력적 힘을 갖고 있지만 그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기택은 햄릿의 아버지처럼 유령이 되지도 못하며, 이 모든 연극의 조종자를 노출시키고 완전한 파국을 이끌어 낼 저력도 없다. 결말에서 기택은 박사장(이선균)을 죽인 후 방공호에서 근세(박명훈)가 있던 자리를 문자 그대로 대신한다. 기택은 자기 가족들한테 ‘친절했던’ 박사장에 미안함을 느끼고, 근세처럼 고장 난 복도의 센서등을 자신의 몸으로 대신 켜고 끈다. 한편 장남 기우(최우식)는 아버지가 실패한 신분상승의 꿈을 꾼다. <기생충>의 난국을 응시해보자. 이 영화에서 각 계급이 처한 환경에 대한 묘사는 매우 디테일하다. 계급의 물질성을 드러내기 위해 온갖 '감각의 클로즈업'을 동원한다. 촉각, 후각, 시각, 운동감각 등 다채로운 감각을 동원해 부유층의 대저택과 다가구 반 지하 생활을 생생하게 시뮬레이션 한다. 햇빛과 비 같은 자연적 현상마저도 계급화된다. 햇빛이 안 들어오는 반 지하는 늘 축축해 빨래가 잘 마르지 않으며 수압이 낮아 변기에 역류현상이 일어나고 하룻밤 비에도 집이 물에 잠긴다. 하지만 큰 통창과 완벽한 배수시설을 갖춘 언덕 위의 대저택에서 비는 가족캠핑을 취소하게 만든 정도의 가벼운 방해꾼이자 다음날 미세먼지를 날려주고 상쾌한 공기를 안겨주는 고마운 자연현상이며 운치있는 풍경이 된다. 이러한 디테일 묘사는 부자와 빈자들의 생활세계에 대한 정확한 묘사로 승인되고, 관객들은 '맞아. 진짜 저렇지.'라고 존재하는 것을 승인하는 구조를 취한다. 이것은 기존의 것의 인정형식이다. 이러한 감각의 클로즈업은 계급화된 얼굴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사실 각 계급, 직업, 세대, 거주지역 등에 따른 특징들을 추출해 그 디테일을 적확하게 묘사해 내는 표현물은 최근 <피식대학> 같은 유튜브 기반의 코미디 프로그램들에서 유행하고 있는 특정 집단 시뮬레이션이 더 뛰어나다. <기생충>은 시뮬레이션을 넘어 오늘날 계급의식의 발현 계기를 목도하고, 그를 통해 누가 적대계급인지를 파악하며, 어떻게 적대계급을 무너트리거나 혹은 좌절하게 되는지 까지 가려 한다. 문제는 <기생충>이 그 목표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난국에 빠졌다는 데 있다. 그 난국은 단순히 오늘날 계급구조가 극심한 양극화,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불안정한 새로운 계급의 출현, 생존게임에 가까운 경쟁사회, 지배계층에 대한 선망의식에만 있지는 않다. 사실 재현 그 자체의 난국도 있다. 봉준호 감독은 이미 계급의식의 출현과 혁명, 그리고 실패 및 대안에 대해 진지한 우화를 만든 적이 있다. 전작 < 설국열차 >에서 기후재난으로 빙하기에 접어든 지구에서 꼬리칸에 있던 잉여 취급받던 사람들은 영구엔진을 가진 기차에서 지배계층이 있는 앞 칸으로 직선적인 전진운동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미 이 움직임을 예측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기획하고 혁명 그 자체를 이용하는 시스템 내에서 '단순하고 뻔한' 전진운동의 계급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존의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영구엔진의 신화, 즉 시스템을 멈추고 아시아 소녀, 흑인 소년, 백곰으로 은유화된 소수자들은 탈출을 시도한다. 직선운동의 실패는 고전적인 진보서사의 몰락을 의미한다. <기생충>도 <설국열차>처럼 양극화 현상과 계층의 이동 사다리를 알레고리화 하기 위해 수직운동을 부각시킨다. 언덕 위의 부유한 단독주택과 저지대의 다가구 반지하 주택, 반지하 주택과 아예 보이지 않는 지하의 방공호, 실내외의 오르내리는 계단들, 하강하는 비, 산수경석은 모두 계급의 위계화와 계층이동을 알레고리화 한다. 여기에 수직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운동(pedestal down)은 그러한 수직운동을 더 부각시킨다. <설국열차>가 전진운동에서 탈출해 체제 바꾸기의 희망을 엿보는 것으로 끝났다면, <기생충>은 계층이동을 시도하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더 깊은 곳으로 추락하는 비극을 제시한다. 그 비극의 심연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기생충>은 계급재현의 곤란함을 자기 반영적으로 시각화하고 서사화한다. 기택(송강호) 가족은 몰락한 중산층으로 프레카리아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다양한 알바를 전전하며 안정된 직장 없이 살아간다. 영화 초반 그들은 전원 백수로 묘사된다. 그들의 유일한 자산은 가족 네트워크이다. 장남 기우(최우식)는 명문대생 친구 민혁(박서준)이 연결시켜준 고액 과외자리를 소개받고 학력을 위조해 IT 기업 CEO인 박사장의 딸 다혜(정지소)를 가르치게 된다. 기우는 박사장의 아내인 연교(조여정)의 의심을 받지만 수업참관 이후 신뢰를 얻고 동생 기정(박소담)을 아들 다송의 미술심리치료교사로 소개한다. 이후 기우와 기정은 계략을 세워 원래 근무하던 문광(이정은)과 윤기사(박근록)를 쫓아내고 아버지 기택과 어머니 충숙(장혜진)을 각각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로 채용시킨다. 모두가 불안정한 생존게임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유사계급에 속한 이들을 가차 없이 사다리에서 밀어낸 기택(가족)은 당연하게도 계급의식을 가질 수 없다. 그런 기택이 마침내 계급의식을 갖게 된 것은 이성적 논리나 도덕률이 아닌 '냄새' 때문이다. 기택은 자기를 고용해주고 매너도 좋은 박사장에게 고마워한다. 심지어 같은 가장으로서 동일시를 한다. 그러나 근세가 다송의 생일 파티에 난입하고 박사장이 더러운 냄새가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자 기택은 즉각적으로 분노하고 그제야 계급의식을 갖게 된다. 그 "(지하철 타는 사람들의) 냄새"는 이전에 박사장이 기택에게서 유일하게 선을 넘어 오는 것이라고 했던 것으로 언어화되기 이전에 신체적으로 환기되는 즉각적인 혐오다. 기택은 근세와 구별 지으려 했지만, 박사장은 냄새로 그들을 같은 계급으로 묶는다. 그에 반응해 기택은 박사장을 적대적 계급으로 파악하고 그를 살해한다. <설국열차>의 '혁명을 위한 직선운동'처럼 <기생충>에 나온 수많은 계급적 상징과 알레고리는 체제 균열을 가져올 행동이나 사유를 촉발하지 못한다. 그것은 산수경석처럼 낡고 닳았기 때문이다. 직선적인 전진이나 수직운동과 구도는 이미 영화사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기호이고 지나치게 자명하다. 그것은 적극적인 의미독해를 요청하며 수많은 약호해독의 비평들을 양산해내지만 비판적 힘을 갖지 못한다. 오늘날의 '웰메이드'영화는 좁은 의미의 미스터리 장르가 아닐 때조차도 관객들의 문제해결을 기다리는 미스터리가 된다. 이것은 또한 비판이론과 비평이 처한 난국이다. 이론과 비평은 결코 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양과 접근성의 측면에서는 흥하고 있지만, 그것이 정보제공 혹은 연쇄적인 동어반복의 재승인과 서사풀이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어쩌면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봉준호 감독이 정교하게 여러 기호들을 흩뿌려 계급의 의미작용을 설계하면 할수록 암호해독의 쾌락만 커질 뿐 그 비판적 힘은 더 약화된다. 이미 <기생충>은 텍스트 내에서 비평을 초청하고 있으며 그 쾌락은 텍스트 가장자리의 안쪽을 끊임없이 맴돌도록 설계되어 있다. 봉준호 감독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는 “상징”이라는 말이 기우의 입을 통해 두 번 언급된다. 기우는 영화 초반 민혁에게서 할아버지가 수집하고 있다는 수석을 선물로 받고 말한다. “민혁아, 이거 진짜 상징적이다.” 클로즈업된 수석은 영화 전체를 은유화 하는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안이 이미 텅 비어 있고 믿음만으로 유지되는 물신(fetish)에 불과하다. 가부장제와 계층이동을 통한 계급상승은 여전히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가능성을 잃은 오래다. 기우는 수석 선물을 받고 집 앞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행인에 대적할 용기를 얻는다. 그 싸움은 슬로우모션으로 스펙터클하게 그려지지만 그래봤자 오줌을 뿌리는 순간일 뿐이며, 이미지의 스펙터클화는 기우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 뿐이다. 수석은 자명하게 계층상승과 출세의 욕망 그리고 가부장의 힘을 ‘상징’한다. 기택을 원망하는 충숙이나 기정과 달리 기우는 장남으로서 자기가 앞으로 물려받을 가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택을 존중하고 보호하고자 한다. 하지만 대책 없는 기택처럼 그 수석은 텅 비어있는 기호다. 심지어 기우가 빗물에 잠긴 집에 돌아왔을 때 수석은 말 그대로 물에 뜬다. 기우는 수석이 자신을 따라온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텅 비어있기 때문에 가벼워 물에 떴을 뿐이다. 유기성과 총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상징은 더 이상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그 의미의 무게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봉준호 감독이 시각적 기호와 의미가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꽉 짜여 있는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와 <기생충>에서 반복했던 모티브, 상징, 알레고리를 통한 의미화(signification) 작업 자체에 회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계급혁명이든 계급의식이든 문화재현의 정치학으로는 비판적인 무게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것이 정교하게 구체적 공간과 소품들을 통해 은유화 되고 시뮬레이션 될수록 오히려 모방과 복제의 과정을 거치며 온라인에 빠르게 퍼져나가는 ‘밈(meme)’이 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수석처럼 말이다. 한국에서 수석은 낡은 자명한 상징이지만 외국인들에게 수석은 미스터리하고 동양적이며 아름다운 소품으로, 수수께끼 같은 재밌는 밈이 된다. 한국인들은 소셜 미디어에서 외국인 관객에게 산수경석의 의미를 해석해 주며 문화적 우위도 가질 수 있다. <기생충>은 위에서 기술한 계급 재현의 곤란함을 모두 반영하고 의미화하면서도 물에 뜬 수석처럼 그 의미의 정치적 힘은 텅 비어 있다. 텅 빈 수석은 정치적 힘과는 전혀 상관없이 생산되는 관객의 암호해독 쾌락을 응시한다. <기생충>은 문화재현의 정치학의 아포리아를 수석에 이입시킨다. 재현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난국이다. 기우는 다송의 그림을 처음 볼 때 또 다시 "상징"을 언급한다. 기우는 벽에 걸린 다송의 그림을 보고 “진짜 상징적이다”라고 말한다. 기우는 기정을 미술교사로 데려오기 위해 다송의 그림 뒤에 해석할 많은 것이 있는 것처럼 과장한다. 기정 역시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로 연교에게 다송의 그림이 정신분열과 트라우마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해석해 준다. 사실 다송의 그림은 어떠한 것도 상징하지 않는다. 그 그림은 다송이 밤에 목격한 근세를 그린 것이다. 기호 해독의 과장되고 과잉된 의미화는 타자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린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기호가 더 이상 의미작용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완전히 엉뚱한 것을 가리킬 때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으며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은, 무게를 갖고 중력에 영향을 받으며 물리적으로 그곳에 존재하는 자연과 신체이다. 기정이 살해당했을 때에도 계급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던 기택은 박사장이 근세에게 불결한 냄새가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자 곧 자신이 적대해야할 계급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를 깨닫는다. 비판적 의식은 기호화하기 어려운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신체성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박사장의 태도는 근세의 신체와 기택의 신체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들고 즉각적으로 계급 정체성과 집단성을 구성한다. 냄새가 유발하는 구분 없음은 언어적이고 의식적인 기호를 초과한다. 그리고 드디어 행동을 할 힘을 얻게 된다. 비, 돌, 냄새 같은 자연적인 것의 사용은 유사한 맥락에서 고려될 수 있다. 계급의식은 계단과 산수경석처럼 의미화 되자마자 즉자적으로 가벼워지고 '밈'화 되는 기호 이전의 원초적인 기호들, 즉 보다 자연적이고 감각적이고 신체적인 이미지 기호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영겨진다. 기우가 기택이 박사장을 죽이고 사라진 후 텅 빈 기호가 된 산수경석을 다시 산 속 시냇가, 즉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그런 이유다. 하지만 역으로 홍수나 냄새와 같은 자연적이고 신체적인 단위가 아니면 계급의식은 형성될 수 없다는 뜻이며, 이러한 자연화 된 기호화의 반복은 저소득층 혹은 가난한 자들을 문명과 대립되는 비체적 존재로 낙인을 찍는다. 냄새로 엮인 그들은 개별적 존재로 구분할 수 없다. 계급화된 얼굴의 자연화는 계급재현의 실패와 계급의식에 대한 냉소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재현 실패의 원인은 오히려 과잉될 정도로 스펙터클하고 세련된 스타일, 디테일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클로즈업된 감각들, 정합적이고 정교한 의미작용으로 인한 약호해독의 '쾌락' 그 자체의 몰두와 네트워크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는 정보화된 영화 이미지에 근거한다. 기택은 근세와의 계급적 친화성을 신체적으로 자각한 후 방공호에 기거했던 근세의 자리를 차지한다. 근세의 자리를 차지한 후에는 박사장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근세와 구분되지 않는 비체적 상태의 기택은 순응적인 근세의 의식을 받아들인다. 근세와 기택의 몸은 그 자체로 센서등을 대신 작동하며 자본에 복종하는 부품이자 모스부호를 보내는 몸-기호가 된다. 몸이 아니면 의미화가 불가능하다. 기우는 산수경석의 상징, 즉 가부장의 자리와 신분상승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언어와 가시화된 재현을 포기하고 얻은 센서등을 통한 몸-기호로 주고받는 그들의 대화는 생존 신호 정도에 국한되며 계급의식이나 체제균열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어떤 면에서 <기생충>은 오마주한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와 봉준호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 보다도 퇴행적이다. <하녀>에서 하녀 명숙(이은심)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중산층 가족에 불길함을 불어넣고 그들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인지를 폭로하게 만들며 마지막까지도 그 불온함을 거두지 않는다. <설국열차>는 미미하지만 체제 바깥으로의 운동을 시도한다. 반면 <기생충>에서 봉준호 감독은 계급 상징과 알레고리가 더 이상 정치적 언어로서 작동하지 않는 재현의 난국을 회피하기 위해 하층계급을 자연화하며 생존만이 겨우 가능한 방공호로 추락시킨다. 의미의 무게를 만들고 물질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들은 몸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계급의식은 개별 신체가 구분되지 않는 자연적이고 비체적인 상태가 되어서야 가능하고 그마저도 지속되지 못한다. <기생충>은 결국 계급화된 얼굴을 재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설국열차>에서 '멈춤'이라는 다른 속도를 상상했던 것처럼, 수직 사다리를 흔들어 놓는, 전혀 다른 계급을 창안하고 호출해야 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