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
- 감독
- 스탠리 큐브릭
- 제작년도
- 1980
- 출연
- 잭 니콜슨, 샐리 뒤발, 대니 로이드, 스캣맨 크로더스, 베리 넬슨
앞서 소개한 <THE OA> <키딩>이 집에서 보기 좋은 작품이었다면 이번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극장에서 꼭 보고 싶어서 준비한 영화다. 아마존 프라임에서 볼 수 있는 <사운드 오브 메탈>.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나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을 극장에서 즐기고픈 욕망에 흽싸일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듣고 싶은’ 본능을 채우고 싶어진다. <사운드 오브 메탈>을 보고 나면, 결국 우리에게 남는 건 시작과 끝에서 나는 소리다. 고막까지 울리는 쇳소리와 정적. 먼저 우리의 주인공 루벤을 만나보자. 헤비메탈 그룹 블랙하몬의 드러머 루벤은 자신의 연인이자 보컬 루이즈와 공연을 하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예전엔 약물 중독자였지만 지금은 약을 끊었다. 불행 끝, 행복 시작. 이제 그에겐 열정을 쏟아낼 드럼이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해피엔딩에서 시작한다. 음악으로 약물 중독을 이겨낸 주인공의 화끈한 공연. 어느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어울리지 않는가? 그런데 행복한 주인공 루벤은 갑자기, 이렇게 밖에 설명이 안된다. 정말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청력을 상실한다. 간혹 영화는 ‘개연성’이란 항목으로 그 이유를 찾고자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사고는 대부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발생한다. 청력을 잃은 루벤은 자신이 듣지도 못하는 드럼을 쳐보지만 무의미하다. 영화를 보는 우리도, 더는 드럼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루 아침에 청력을 상실한 루벤에게 의사는 말한다. “잃은 청력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여기까지가 영화 시작 후, 18분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 뒤로 150분 동안, 소리를 되찾기 위한 루벤의 사투가 이어진다. 현재, 이 영화는 아마존 프라임, 구글 무비, 네이버 시리즈온 등에서 지금 바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이 글을 통해, 극장 상영 추진 시위를 벌이는 이유는 딱 하나다. 소리가 듣고 싶어서. 미치도록 극장에서 <사운드 오브 메탈>의 소리를 듣고 싶다. 아니, 루벤이 청력을 잃은 이유로 영화 대부분이 조용하게 유지되는 이 영화를 굳이 듣기 위해서 극장 상영을 원한다고? 초반에 쨍하게 울리는 드럼 소리가 전부인데? 이해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거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영화로 쌓아올린 영화사를 들여다봐야할 것 같다. 알다시피 1927년 10월, 소리가 들리는 영화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가 개봉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자막으로 상황과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던 영화가 이젠 말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세상이 내는 소리를 담게 됐다. 그때만 해도 일부 영화인들은 소리(Sound)가 생긴 영화가, 결국엔 영화를 망치게 될 것이라 말했지만 현대 영화에서 소리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영화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가끔 이미지보다 소리로 그 영화를 기억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 샤이닝 > 메인 타이틀곡을 들으면 구불진 길을 따라 오버룩 호텔로 향하는 한 가족이 떠오르고 < E.T .> Flying 테마곡을 들으면 자전거에 외계인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꼬마가 생각난다. 더 강조하지 않아도 소리는 영화에서 매우 중요해졌다. 그런데, 어떤 영화들은 일부러 소리를 줄인다. 그것을 우린 무음 또는 정적이라 부른다. 그 중에서도 또 어떤 영화들은 귀에 들리지 않지만 머리에는 ‘들리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영화가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그걸 영화에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사운드 오브 메탈>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강렬하게 퍼지는 드럼의 쇳소리로 시작한 영화가, 10분 즈음 고장 난 헤드폰을 낀 것처럼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루벤은 귀를 두드려보지만 들리는 건 삐--- 소리뿐이다. 나 역시 이어폰이 고장 났는지 확인해 보기도 하고, 귀를 손바닥으로 때려보기도 했는데, 실은 영화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순간, 느껴지는 싸늘함. 그 고요함이 만드는 공포. 루벤은 정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됐다. 이제 영화를 보는 우리도 이 들리지 않는 소리에 적응해야만 한다. 근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이 소리에 적응하지 못한 루벤은 아는 사람 소개로 ‘청각 장애 공동체’가 사는 마을로 향한다. 루벤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수화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웃고 떠드는 곳. 루벤은 연인 루이즈와 다시 만난 날을 기약하며 머물게 됐지만,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걸 알게 하는 건 루벤의 표정과 행동에 더해지는, ’정적’이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이 영화에서 ’정적’은 두 종류다. 하나는 웅웅거리는 소음과 함께 희미하게 들리는 일상의 소리. 다른 하나는 루벤을 제외한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다. 한마디로, 첫 번째 정적은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두 번째 정적’을 어떻게라도 들으려고 하는 루벤의 사투가 만들어낸 정적이다. 그래서일까? 루벤이 청각 장애 공동체에 적응할수록 영화는 첫 번째 정적이 아닌 두 번째 정적을 들려준다. 하지만, 두 번째 정적은 다르게 말해서 루벤이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루벤은 들리지도 않는 드럼을 치기 시작하고, 영화에선 다시 첫 번째 정적이 들려온다. 그 말은 루벤이 그곳을 떠난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모두가 알아챈다. 영화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소리(Sound)는 루벤 그 자체라고. 자연스럽게 영화명이 ‘사운드 오브 메탈’인 비밀도 풀리게 된다. 메탈 음악처럼 단단한 루벤이 여러 일을 겪게 되면서 나는 내면의 울림을 소리를 담았기 때문. 그렇게 생각하고 직역하면 영화명은 ‘루벤의 소리’가 된다. 하지만, 아직 소개하지 않은 루벤의 진짜 소리가 남았다. 내가 극장에서 듣고 싶은 소리. 공동체에서 나온 뒤, 영화는 굉음을 내며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메탈 음악처럼 질주한다. 로벤은 소리를 듣게 해준다는 임플란트를 심고, 연인 루이즈를 찾아간다. 약 끊고 해피엔딩을 맞이했듯, 소리를 되찾으면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거라 믿었지만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심지어 소리마저도 불완전하다. 의사 말에 따르면, 그건 진짜 듣는 게 아니라 기계를 통해 뇌가 듣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루벤, 그에게 남은 건 뒤통수와 귀에 어설프게 걸쳐진 기계뿐이다. 이제 루벤은 어떤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는 걸까? 루벤은 어느 ‘정적’도 선택하지 못한다. 두 번째 정적인 일상의 소리는 들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임플란트를 심어 기계음까지 섞인 첫 번째 정적도 듣고 싶지 않다. 루벤은 짜증 섞인 감정을 담아 귀에서 기계를 뽑아 버린다. 갑자기 이어지는 무음에 가까운 정적. 그런데? 앞서 경험한 공포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귀로 들리진 않지만, 느껴지는 무언가. 그때부터 영화가 들려준 것은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매우 특별한 소리다. 들을 수 없는데 더 잘 들리는 소리. 이게 착각이라도 좋다. 분명 루벤과 우린 뭔가를 듣고 있다. 이 부분을 다시 듣고 싶다. 실망한 루벤은 공원에 위치한 의자에 힘없이 앉아있다. 그의 눈앞엔 스케이트보드를 가지고 노는 두 명의 아이가 보인다. 그가 듣는 정적은 기계음으로 표현되는 괴이한 소리다. 사실상 소음에 가까운 정적. 그때! 기계를 벗자 사실상 무음 상태가 된다. 완전한 정적. 그 공허함 속에서 루벤은 다시 두 아이를 바라본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난 들었다. 한 아이가 보드 위에 올라가자 다른 아이가 치는 박수소리를, 하늘에 뜬 해를 가린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루벤의 표정도 뭔가를 들은 느낌이다. 아마도 내가 들은 것과 비슷한 걸까. 물리적으로 들을 수 없는걸, 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개연성 없는 설명인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유성영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현실에서 들리는 소리를 표현해서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소리를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운드 오브 메탈>은 들리지 않지만 들리는 소리를 보여준다.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 순간 루벤 주변을 채운 정적을, 그건 영화가 제시한 하나의 소리였다. 그의 마지막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웃고 있지 않았을까? 나처럼 당신도, 영화의 시작을 알린 거친 메탈 음악처럼 끝에서 흘러나온 강렬한 정적의 울림도 들었으면 좋겠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해줬기 때문일까, <사운드 오브 메탈>은 93회 아카데미에서 음향편집상과 음향효과상이 합쳐진 최초의 음향상을 수상했다. 나는 극장에서 <사운드 오브 메탈>을 들을 날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아리 애스터 감독의 < 미드소마 >(2019)의 굿즈는 뱃지 2종이다. <미드소마>의 주인공 대니가 비명을 지르는 얼굴과 감독의 전작인 < 유전 >(2017)의 주인공 애니가 비명을 지르는 얼굴을 일러스트해 만든 디자인이다. 굿즈가 기발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미드소마>를 보는 중에는 문제의 비명 장면에서 충격을 받았다. 플로렌스 퓨가 연기하는 대니는 여동생과 부모님이 함께 세상을 떠난 이후로 수시로 울음이, 슬픔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끅끅거리며 참아내곤 한다.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은 그녀를 위로하는 제스처는 취하지만 슬픔을 이해하거나 나눠갖는데는 실패하는 듯 보인다. 대니는 자신이 호소하는 가족 문제에 질린 남자친구가 이별을 고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데, 어느날 그들은 크리스티안의 친구들과 스웨덴 호르가 마을의 ‘미드소마’라는 하지축제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대니는 비로소 오열할 수 있게 되는데, 그 직접적인 계기는 남자친구가 다른 여성과 섹스하는 광경이었다. 대니는 그제야 자기가 남자친구를 지겹게 만들지 않을까 근심하는 대신 이전의 울음까지 울어버린다. 큰 소리로. 호르가 마을의 여자들이 대니와 함께 울어준다. 같이 큰 소리로, 같이 얼굴을 맞대고, 한 호흡으로. 죽은 가족과도, 불충실한 남자와도 이별이다. 그런데 그 광경이, ‘얼굴을 (아름다운 방식으로 슬프게) 만들지 않고’ 입을 한껏 벌리고 엉망으로 찌푸린 얼굴을 하고 큰 소리로 울어버리는 모습이 기괴하게까지 느껴졌다. 여자들이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유사한 ‘집단 곡성’이라면 한국에서 상중에 소리 내는 울음인 ‘곡’인 듯하다. 여성의 비명은 영화가 사랑하는 사운드 중 하나다. ‘호러퀸’이라는 말은 한국에서 여름시즌에 개봉하는 공포영화의 여자 주인공을 일컫는 표현인데, 호러퀸의 첫째 요건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살인귀에게 쫓기며 높은 하이톤의 “꺄~!” 하는 비명을 지른다. 도망가기도 쉽지 않아보이는 몸에 붙는 찢어진 스커트나 단추가 두어개 날아간 티셔츠 차림에 높은 굽의 신발을 신게 한다는 점도 빼놓을 순 없겠다. <미드소마>의 대니가 들려준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낮고 큰 소리의 오열은 쉽게 들을 수 없다. 벌쳐닷컴(vulture.com)의 레이첼 핸들러는 ‘메릴 스트립과 플로렌스 가 들려준 카타르시스를 주는 비명에 바치는 송가’(An Ode to Meryl Streep and Florence Pugh’s Catharsis Screams)라는 7월10일자 기사에서 여성 배우들의 비명 연기에 대해 논했다. 호텔의 혼령에 사로잡힌 남편을 피해 도망쳐야 했던 < 샤이닝 >(1980)의 셸리 듀발이나 < 사이코 >(1960)에서 알몸으로 칼에 찔린 재닛 리, 거대 고릴라의 손가락으로 가슴을 쿡쿡 찔린 < 킹콩 >(1933)의 페이 레이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여자들이 죽으면서도 섹시했다며, 최근 두 작품에 등장한 ‘섹시하지도 백설공주같지도 않은’ 시네마틱한 비명이 있다는 것이다. <미드소마>의 플로렌스 퓨와 <빅 리틀 라이즈>의 메릴 스트립이 보여준. ‘백설공주같은’이라는 말은 소리 죽여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섹시한’이라는 표현은 교성과 오인이 가능한 높은 하이톤의 비명 혹은 신음성을 뜻한다. 낮은 음성으로 짜증과 화, 놀람을 섞어 욕설과 함께 지르는 비명은 영화나 드라마 속 여성들에게는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드소마>와 <빅 리틀 라이즈>의 오열이 주목받은 이유는 ‘사운드’만의 문제는 아니고, 다른 사람들 시선은 아랑곳않고 온전히 자신의 슬픔에 집중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라는 ‘얼굴의 스펙터클’에도 있다. < 박하사탕 >(1999)의 그 유명한 ‘나 지금 돌아갈래’ 장면에서 설경구 배우가 보여주는 고통받는 인간의 얼굴 그 자체를 클로즈업하는, 그 순간을 아무와도 나눠갖지 않고 관객과 직접 대면하는 순간이 주는 힘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런 클로즈업이 여성들에게도 허용되었던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박하사탕>의 이창동 감독이 만든 또 다른 영화 < 밀양 >(2007)에서 전도연 배우가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을 교회에서 소리내 우는 것으로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참지 않은 소리’로서의 곡성은 분명히 전달되지만 그때 카메라는 클로즈업 대신 뒤쪽에 앉아 그런 그녀를 보고 있는 송강호 배우를 흐릿하게 함께 잡아낸다. 극중 다른 인물의 시선으로부터도 영화를 보는 우리로부터도 자유로운, 홀로 화면 한가운데를 장악하는 슬픔의 스펙타클. 여성의 오열. <미드소마>가 보여준 플로렌스 퓨의 특별함은 거기 있었다. 너희들은 압도당하라, 이것은 나의 것이다.
< 쇼생크 탈출 > < 미져리 > < 미스트 > < 캐리 > < 돌로레스 클레이븐 > < 하트 인 아틀란티스 > < 그린 마일 > <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Apt Pupil > < 샤이닝 > < 스탠 바이 미 >... 스티븐 킹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중 보편적으로 관객들의 지지를 받았거나 상업적 성공, 혹은 비평적 성과를 얻어낸 작품을 대략 생각나는 대로 적어 봤다. 10편이다. 셰익스피어를 제외하고 어느 소설가가 10편 이상의 ‘성공적 영화화’라는 결실을 얻어 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킹에게는 ‘망한 영화가 많은 원작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물론 그렇다. 비교적 근래에는 < 셀: 인류 최후의 날 >과 사이파이 채널의 드라마 <헤이븐>이 있었고 <공포의 별장>이라는 제목 등으로 세 번이나 만들어진 「세일럼스 롯 Salem’s Lot」들도 신통치 않았다. 더 옛날로 가 보면 수많은 똥망작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 옥수수밭의 아이들 > 시리즈 중 1편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이 그러하며 < 괴물 Graveyard Shift > 등 온갖 희한 야릇한 영화들로 필모그래피가 더럽혀져 있다. 이건 다작을 하는 작가의 숙명이다.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거나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작품들 중에서도 스티븐 킹의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은 적지 않다. < 초능력 소녀의 분노 Firestarter >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초능력 소녀의 분노>라는, 시놉시스를 제목화 해버린 번역제의 1984년 영화 < Firestarter >가 있다. < 캐리 >를 감명 깊게 본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는 ‘유년판 과학 소설 풍 캐리’라는 측면에서 박수를 보낼 수 있다. 특히 번역제에 나와 있는 바로 그 ‘분노’ 시퀀스가 지니고 있는 후련함과 은근한 공포는 나에게 30년 이상 뚜렷하게 각인 돼 있다. 사실 스티븐 킹 원작 영화들이 독특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대부분 베스트셀러임에도 불구하고 B급 상상력으로 도배돼 있는 바람에 B무비로 직행한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지금은 거장이 돼 버린 크로넨버그의 < 초인지대 Dead Zone >가 그랬고 메리 램버트의 < 공포의 묘지 Pet Sematary >라던가 호러의 제왕 존 카펜터의 < 크리스틴 > 역시 1980년대 B무비를 사랑한 이들이라면 꼭 거쳐 간 작품이기도 하다. 스티븐 킹 자신 역시 B무비의 광팬이라는 사실은 「죽음의 무도」만 읽어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킹은 꾸준히 B무비와 어울리는 스토리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생물의 반란’이다. < 맥시멈 오버드라이브 >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들 중 대중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소재들이 예의 ‘무생물의 반란’이다. 그중에서도 기계들이 인간을 해친다는 내용의 영화들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 써스펙트 >라는 제목으로 국내 출시됐던 1995년 작 <맹글러 The Mangler>에서는 세탁 공장의 대형 프레스 다리미를 비롯한 기계가 인간을 학살한다. 2016년작 < 셀: 인류 최후의 날 >은 핸드폰의 전자파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설정이었고, < 크리스틴 >은 저주받은 자동차의 이야기다. 이렇게 하드웨어가 인간을 공격한다는 소재는 그야말로 B급 영화를 위해 최적화돼 있다. 진짜 사물을 배치하고 약간의 장치만 하면 되니까 아트 디렉션에서도 큰돈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단편 「트럭」은 1980년대와 90년대에 두 번이나 영화화됐는데 그중 먼저 만들어진 < 맥시멈 오버드라이브 >는 킹이 직접 각본과 감독을 맡았고, 전문가 평가와 박스오피스 성적 모두 실패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이클 크라이튼이 < 웨스트월드 >나 < 코마 > 등에서 감독으로서의 재능 역시 증명한 것과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언제나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들의 안정적 간택을 받을만한 정서로 무장했던 마이클 크라이튼에 비해 스티븐 킹은 스스로 B급 정서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맥시멈 오버드라이브>는 한마디로 러스 마이어의 그라인드하우스 영화들, 로저 코먼이나 조지 A 로메로의 저예산 호러들과 그 맥락을 함께 한다. 그 유명한 콜라 자판기의 공격 신이라던가 신체 절단 장면들은 스티븐 킹이 이 영화를 어떤 태도로 만들었는지 증명하는 부분이다. 충격적인 장면을 무표정하게, 때로 잔혹 유머로 버무리는 애티튜드는 킹이 소설을 집필하는 자세와도 동기를 이룬다. <맥시멈 오버드라이브>의 가장 후련한 부분은 바로 음악이다. 작가들만으로 이뤄진 밴드 ‘Rock Bottom Remainders’의 멤버이기도 한 스티븐 킹은 AC/DC의 노래들로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채웠다. 특히 주제곡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Who Made Who’의 호방함은 이 영화가 지닌 자세와 격을 함께 한다. 그렇게 할리우드의 평범한 감독이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은 대단했지만 안타깝게도 배우를 보는 눈과 다루는 방법에서 미숙함을 드러내는 바람에 이 작품은 나 같은 변태들만 좋아하는 컬트영화가 돼 버렸다. 스티븐 킹의 영화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의 원작으로 누구나 좋아하는 영화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좋아하지는 않는 영화도 만들 수 있고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영화가 나온다고 해도 하나도 놀랍거나 안타깝지 않다. 그 무한한 의외성. 그래서 언제나 스티븐 킹의 영화를 기다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