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인 어 라이트
- 감독
- 마틴 스코세이지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믹 재거, 찰리 왓츠, 론 우드, 키스 리차드,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마틴 스코세이지, 빌 클린턴
순전히 당나귀 때문이다. 내가 다른 선택지들을 제치고 < 이니셰린의 밴시 >(마틴 맥도나, 2022)를 보게 된 이유 말이다. 물론 당나귀 때문이라면 < EO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2022)를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EO>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동물을 재현해온 관행을 넘어서 당나귀가 인간의 자리에 놓인 실사 영화라는 점에서 궁극의 동물 영화였다. <이니셰린의 밴시>와 비교해도 <EO> 쪽이 옳고 급진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당나귀 영화에서 보고 싶었던 건 액션 배우나 로드무비 주인공이 당나귀로 대체된 모습은 아니었다. 고된 여정에 오른 캐릭터를 공동으로 연기한 당나귀 배우들을 보면서 이들에게 평범한 가축으로 남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심경이 되었다. 동물의 욕망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동물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하든 그것이 명백히 인간의 욕망에 의한 산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당근 메달을 우걱우걱 먹는 모습만은 귀여웠다. 관계에 관한 몇 가지 가정 <이니셰린의 밴시>의 주인공인 두 친구 패드릭(콜린 패럴)과 콤(브렌던 글리슨)은 각각 당나귀와 개를 반려동물로 기른다. 반려동물이 영화의 중심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중요한 방점을 찍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는 패드릭과 콤이 친밀했던 시간을 굳이 재연하지 않는다. 도리어 내내 반목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관객은 늘 있는 일과처럼 친구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패드릭의 걸음걸이와 눈썹 양 끝을 최대한 아래로 비스듬히 기울인 패드릭의 순진무구한 표정에서 그의 진실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패드릭과 콤은 늘 붙어 다니며 교류하는 일상을 나눠왔으나 그렇게 이어오던 시간의 관성이 갑자기 중단된다. 펍의 주인은 홀로 나타난 패드릭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인물과 주변인들의 반응을 통해 일상적 관계를 깨뜨리는 사건이 일어났음을 짐작하게 된다. 반면 콤의 태도를 보면 두 사람이 절친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나아가 친구라고 하기에는 둘은 대조적이며, 무엇보다 콤이 패드릭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인다. (실제 두 배우의 나이 차이는 21살이다) 물론 나이를 뛰어넘어 교류하고 친구로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다. 두 친구는 지금 서로 다른 시간 속에 놓여 있다고 말이다. 패드릭은 나이가 들지 않은 채 특정 시간에 멈춰있고, 콤은 시간의 순리대로 나이가 들어버렸다. 콤은 패드릭이 실제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연기를 하면서 맞춰오고 있었지만, 이제는 한계에 다다라 그와의 교류를 끊기로 작정한다. 패드릭과 콤은 각각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축을 담당한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던 시간 속에서 여전히 헤매는 패드릭은 과거의 인간이고, 패드릭과의 교류를 중단하고 새로운 관계로 뻗어나가는 콤은 미래의 인간이다. 두 사람의 부딪힘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맞붙은 채 벌이는 치열한 다툼과도 같다. 미래에서 온 콤은 말한다. 결국 역사에 기록되고 시간을 뛰어넘는 것은 모종의 위대함이라고. 모차르트를 비롯해 위대한 작곡가의 음악은 현재에도 후대에도 기억된다. 반면 두 친구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나눈 다정한 시간은 후대에 기억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미래의 시선에서 그것은 다 사라져 없어질 것에 불과하다. 반면 과거의 인간 패드릭은 인간적인 선의를 지키며 가족과 이웃에게 다정함을 베푼다. 경찰관인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는 소년 도미닉(베리 키오건)을 돕고, 동생 시오반(케리 콘돈)과 당나귀 제니를 아낀다. 그가 발휘한 다정함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다. 두 친구의 이야기는 미셸 공드리가 < 이터널 선샤인 >(2004)에서 전개한 이야기와 유사한 지점이 있다. <이터널 선샤인>은 특정 기억을 도려내는 것이 가능해진 상황을 그린다. 사랑에 실패한 인물은 연인과의 기억을 통째로 삭제하길 원하지만, 기억을 지우는 여정은 곧 기억을 소생하는 여정이 되어 과거의 시간을 긍정하게 만든다. 기억을 삭제하는 기술을 통해 <이니셰린의 밴시>를 관통하면, 콤만 기억을 삭제한 상황이라 말할 수 있다. <이터널 선샤인>의 인물은 실패의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과거를 반복하기를 선택하지만,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콤은 두 사람의 우정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관계를 끝내려 한다. 이를 알지 못하는 패드릭은 교류의 중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대로 패드릭이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이라는 가정도 어느 정도 말이 된다. 플로리안 젤러의 < 더 파더 >(2021)에서 치매 환자인 안소니(안소니 홉킨스)의 시점을 체감하게 만든 것과 유사하게 <이니셰린의 밴시>는 거의 패드릭의 시점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패드릭은 기억 상실증에 걸려 콤과 절연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채 계속 콤에게 다가간다. 이를 받아주던 콤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이제까지 해오던 연극을 끝내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영화를 두고 이런저런 해석을 덧붙여보게 되는 건 콤의 갑작스런 절연은 패드릭에게도 관객에게도 납득하기 힘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전쟁과 이야기 전쟁은 단지 바다 건너편에서 희미하게 비쳐오는 사건이 아니다. 패드릭과 콤의 절연 역시 전쟁이다. 각각이 기르는 반려동물은 전쟁의 정찰병이다. 콤의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패드릭에게 콤은 만약 자신에게 말을 건다면 그 때마다 자기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를 망설임 없이 실행한다. 패드릭이 규칙을 어기고 술에 취해 말을 걸어온 다음 날 콤은 집에서 손가락 하나를 잘라 패드릭의 나무문을 향해 던지고는 말없이 떠난다. 잘린 손가락이 문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 잘린 손가락은 광적인 자해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갈기는 총알처럼 여겨진다. 그 이후에도 패드릭은 무심결에 콤에게 말을 걸고 손가락은 가차 없이 잘리며 콤은 더 이상 바이올린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두 친구의 절교가 초래한 가장 잔혹한 결과는 잘린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당나귀 제니가 죽음을 맞은 사건이다. 영화에서 사람이나 동물의 죽음이 묘사될 때 이것이 주인공의 변화를 위한 도구이거나 하나의 상징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당나귀의 죽음이 패드릭을 각성하게 함에도 그것이 도구이거나 상징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패드릭의 복수 방식에 있다. 패드릭은 더는 콤의 총알(손가락)을 외면하지 않고 콤을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패드릭은 복수를 위해 콤의 반려견을 해치는 식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을 쓰지 않는다. 패드릭은 콤의 반려견이 주인을 구하려다 화마에 휩쓸리지 않도록 따로 보호해준다. 반려동물을 상실하는 슬픔을 똑같이 되돌려주지 않는 것은 거꾸로 반려동물에 대한 패드릭의 사랑을 드러낸다. 패드릭의 복수에는 그가 품어온 다정함이 최소한의 경계선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위대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감정이다. 콤 역시 패드릭의 당나귀가 죽게 된 상황에 충격을 받으며 복수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두 친구가 사는 마을은 커다란 바다와 맞닿아 있고, 바다 건너 본토에는 장기전이 벌어지는 중이다.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음악만이 아니라 전쟁도 있다. 전쟁은 역사에 기록되지만, 전쟁 이후 평화라면 모를까 지속하는 평화는 보통 역사로 기록되거나 회자되지 않는다. 이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인간의 기억에 깊이 각인되는 것은 좋았던 순간보다는 누군가와 갈등하거나 괴로운 순간인 경우가 많다. 콤이 패드릭과 절연한 이유는 패드릭과의 지속하는 일상을 보존하기 위해서 일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뚝 하고 두뇌 회로 하나가 잘린 것처럼 관계를 끊어내지 않는 한 일상은 여간해서는 각인되지 않는다. 전쟁은 역사에 기록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중요한 소재가 되어 이야기의 세계에도 영향을 준다. 실제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만이 아니라 영화의 소재가 평화보다는 충돌과 갈등이 많은 것도 전쟁의 역사가 이야기의 세계에 미친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친구의 이야기는 영화화될만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으로 이끈다. <이니셰린의 밴시>의 세계는 켈리 레이카트의 < 퍼스트 카우 >(2019)가 서부극의 세계 속에서 나란히 죽음을 맞은 두 친구의 우정을 그려낸 것과 통한다. <퍼스트 카우>에서 주인공의 우정은 활극으로 기억된 세계 안에 새로운 리듬을 새긴다. <퍼스트 카우>가 보여준 것이 정공법이라면, <이니셰린의 밴시>는 반어법을 쓴다. 영화에서 타인이 타인에게 혹은 타자에게 발휘한 선의가 무가치하다고 말할수록 어쩐지 선의와 일상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하여 바다를 마주한 채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기묘한 결합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사회의 불균형을 이장하다 “장남도 없이 (어떻게) 무덤을 파냐!” 큰아버지( 유순웅 )의 불호령에 아버지 묘 이장을 하러 고향 마을에 막 도착한 네 자매들은 연락이 되지 않은 남동생을 찾아 다시 발길을 돌린다. 그들이 찾아야 하는 장남, 그 이름이 하필 ‘승락’이다. 혜영( 장리우 ), 금옥( 이선희 ), 금희( 공민정 ), 혜연( 윤금선아 ). 승락의 위로 줄줄이 누나들이 모두 왔는데도, 승락의 승낙 없이는 이장이 불가능한 사회. 승락이 아니라 혜연이 사정상 못 왔다면 이장은 진행되었을, 이곳은 뿌리 깊은 가부장제로 여전히 갈등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딸 넷에 막내아들. 이 집은 말 그대로 아들 낳으려 계속 출산을 했을, 오남매는 구성 자체가 딱 가부장제 가족이다. 이쯤 되면 막내딸 이름이 ‘다음 아이는 아들을 얻겠다’는 염원을 담아 딸 이름은 희생되는 ‘후남’ ‘차남’ ‘필남’이 아닌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어쨌든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등 온갖 방법을 다해 찾아낸 승락이 화면에 등장하는 건 영화가 시작된 지 44분 36초 만의 일이다. 전체 러닝타임 94분 중 거의 절반이 지나서야, 카메라는 노트북 앞에 앉은 승락의 뒤통수를 필두로 그의 손가락을 훑어 간신히 그 얼굴을 드러낸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이 모든 상황에 잔뜩 열 받은 첫째 혜영이 승락이 있는 반지하 창문에 돌을 던지면서다. 여자친구 윤화( 송희준 )의 임신에 책임회피 중인 승락은 여러모로 비난받을 여지가 충분하지만, 그럼에도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는 발언권을 가진 중요 인물로 치부된다. 그러니까 그게 남성이 집안의 통솔권을 가지는 이 사회의 가부장제! 사실 큰아버지가 승낙을 데려올 것을 ‘명령’한 건 재개발로 이장을 하게 된 지금, 자신 동생의 묘를 매장 대신 화장하려 하는 조카 딸들의 결정을 번복하기 위해서다. 그는 같은 남자인 장남 만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 믿으며, 또 그런 이유로 장남인 승락에게 더 큰 권위를 부여해 주려 한다. 가령 이미 죽은 오남매의 아버지는 혜영의 말대로 ‘그 인간 죽어서까지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문제를 회피하기 급급한 승락은 ‘우리가 (언제까지) 걔 엄마야?’라는 누나 금희의 독설을 받는 대상이다. 영화는 가부장제 아래 집안의 권위를 부여받은 남자들의 치부를 거침없이 드러내는데, 그래서 이 영화의 남자들은 한편으로는 귀엽거나 사랑스럽게 그려지기도 하지만, 겉으로 볼 때 무섭거나(큰아버지), 비겁하거나(승락), 말 안 듣거나(혜영의 아들 동민) 지질(금희의 남친) 해서 여자들을 자주 괴롭힌다. 물론 아버지 묘의 이장 문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기존 사회 질서에 부합해 흘러가지 않는다.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지만, 남매는 변화하는 현재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들이며, 그래서 지금 심하게 이 사회와 부대끼는 중이다. <이장>의 여성인 네 자매는 그래서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균형을 찾아가려는 이 사회 여성들의 표본을 보는 것 같다. 첫째 혜영은 싱글맘이라는 상황으로 인사 가산점이 깎여 육아휴직 이후 퇴사를 권고받았으며, 둘째 금옥은 남편의 외도를 알고도 떳떳하게 판을 뒤집지 못하는 평범한 주부다. 두 언니의 ‘실패한’ 결혼 생활에도 셋째 금희는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철없는 남친에 갑갑한 채로 N포 세대의 곤궁은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청춘이다. 여성 인권을 외치는 막내 혜연은 학내에 자신이 애써 붙여놓은 대자보 위에 ‘너도 결국 한남의 씨에 불과한 종족이다’라는 테러성 반응에 맞서야 한다.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 단절되어 우울증을 겪는 < 82년생 김지영 >(2019)의 ‘김지영’이 이들의 사촌자매 쯤이라고 해도 어울릴 것 같다. 결국 육아휴직, 남편의 외도, 결혼 문제, 페미니즘 등 대한민국 여성이 겪는 고충의 총합이 이 자매 안에 다 보인다. 정승오 감독은 이장을 하러 오랜만에 모인 남매를 혜영의 미니밴에 탑승시킨다. ‘이장 후 받게 될 500만 원을 누가 갖게 될 것인가’의 문제가 시종 묘한 긴장감을 형성하며 남매간에 그동안 쌓여 있던 갈등을 점화시킨다. 티격태격 가족 로드무비의 원조 격인 < 미스 리틀 선샤인 >(2006)의 ‘미니밴 버전’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네 자매와 혜영의 아들인 초등학생 동민( 강민준 ), 승낙의 전 여자친구 희준도 한 차에 타고 내리고 해서, 차 안은 시종 구성원이 바뀌고 복닥복닥 거린다. 시동이 걸리고 출발을 한 이상 도로 안에서 쉬이 내리는 건 불가능하고, 앉아있는 자리에 따라 맞붙는 ‘말싸움’ ‘몸싸움’의 조합도 새롭게 재편된다. ‘제한된 상황’ ‘다양한 인물’들이 이렇게 새로운 조합으로 영화의 액션과 리듬, 코믹과 드라마를 만드는 재미들이 모여 <이장>의 미니밴을 굴러가게 만든다. <이장>의 이 오밀조밀 갈등이 폭발하는 공간 구성은 사실 정승오 감독의 주특기다. 전작인 단편 <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 >(2016)은 <이장>의 프리퀄 격인데, 입원한 엄마의 병문안을 간 딸들이 모두 엄마의 침대 위에 올라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씬은 가족의 갈등과 화해를 그리는 탁월한 장면 연출이다. 이같은 구성이 독립영화계의 ‘어벤저스급’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가 제대로 빛을 발하는 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 자신 역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라 청년 세대를 거친 남성으로서 정승오는 <이장>의 가족들이, 더 나아가 이 사회가 기울어진 관습과 제도에서 벗어나 모두가 동등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이 역시 새벽녘 오남매가 함께 걸터앉은 좁은 툇마루 씬에 말갛고 기분 좋은 장면으로 연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승낙의 전 여자친구가 승낙의 사과에 보인 일격은 영화를 보는 이들을 위해 남겨둔다. 각자의 가족 깊숙이 공기처럼 스며든 가부장제 사회는 이제 변화하고 있다. 그 관습의 이장을 제안해 주는 영화 <이장>의 질문이 반갑다.
“귀하의 나라에 백정은 살 수 있습니까, 노비는 살 수 있습니까?” 류승완 감독은 < 군함도 > 개봉 초기, ‘친일영화’라는 여론에 부딪혔을 때 이렇게 말했다. “대중의 반일 감정에 기대지 않겠다.” 나는 살짝 감동받았다. 대규모 자본과 스타들... ‘천만 관객’까지 생각했을 시스템에서 일하는 영화감독이, 이런 소신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워낙 그의 팬이었으나(< 짝패 >!) 그를 다시 ‘봤다’. 그러다가 최근 김은숙 작가의 24부작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 <군함도>의 기시감이 되살아났다. 정확하게는 대중의 반응에 대한 기시감이다. 방영 초기, <미스터 션샤인>이 “역사를 왜곡했다”며 28,481명이 한 달 동안 청와대에 이 드라마를 막아 달라는 청원을 낸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청와대나 문화체육관광부가 TV 드라마의 스토리를 바꿀 수 있는가? 나는 창작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위 기관들은 그럴 권한이 없다. 지면 등 사회적 문제 제기를 통한 ‘역사 왜곡’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드라마에 대한 불만을 청와대에 호소하다니... 발상이 놀라울 뿐이다. 청원인들의 주장은 이렇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피해국과 가해국 입장이 묘하게 전복되어 있습니다. 극에서 연출된 악역들의 대부분이 조선인이며, 자기 장인(도공)의 제자가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등장하고, 조선의 문화가 ‘미개’하다는 연출이 계속해서 보입니다. 극을 끌고 나가는 주축, 주·조연들이 여주인공 고애신을 제외하면 일본인들이며 그들 개개인에게 부여된 서사 역시 ‘조선’이라는 나라를 피해국이 아닌 그것을 ‘자초한 쪽’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서구로부터 시작된 근대와 자본주의는 ‘원인이 없다.’. ‘자본의 운동’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갔고, 한반도의 고통스러운 현대사는 그들의 대리전, 후폭풍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지금 우리는 ‘한류’를 무기로 삼아 아류 제국주의를 꿈꾸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미스터 션샤인>도 그 ‘무기’ 중의 하나로 기획되었다. 식민 지배에, “우리의 자초”나 “저들의 의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의미한 얘기다. 약육강식론도 한탄일 뿐, 원인이 아니다. 서구가 비서구를 점령했을 때, ‘우리’ 입장에서는 침략이지만 ‘그들’은 야만인에 대한 문명화 사명에 고뇌했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를 젠더 혹은 계급으로 비유해보자. 남성 중에서 부자 중에서, 자신이 여성과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오히려 “역차별”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 계기는 <미스터 션샤인>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조선 명문가를 대표하는 고사홍( 이호재 )은, 미국인 유진 초이( 이병헌 )가 “조선은 귀댁을 보호하지 못하니, 원하신다면 저희가 보호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다음과 같이 위엄을 내세운다. “양이(서양 오랑캐)의 보호를 받느니, 차라리 조선이 나를 보호하지 못하는 그 뜻을 헤아리겠노라.” 물론, 유진 초이의 목적은 고사홍 집안의 손녀인 고애신( 김태리 )을 친일파 낭인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사적인 마음’의 발로였다. “조선이 나를 보호하지 못하는 그 뜻을 헤아리겠다.” 이 말에, 나는 표현력을 잃었다. 연인 사이의 대사로 바꿔보자. “사랑하는 그대가 나를 죽이더라도 그 뜻을 헤아리겠다?” 이 무슨 노예근성 혹은 피학증인가.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 주인이 바뀌었을 뿐 고사홍 대감이 미군의 보호를 거절한 이유는 조선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국심 때문이 아니다. 그 자신이 조선 왕조 500년의 기득권자이기 때문이다. 애국심은 애국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처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인격적인 양반이나 근대적 낭만으로 “불꽃으로 살고 싶은 자”(고애신) 혹은 ‘사명감’ 같은 이데올로기를 간직한 자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러나 사리사욕이 앞선 자, 원래 핍박받았던 자들은 공동체의 운명에 관심이 없다.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조선이든 대한민국이든 국가를 비롯해서 어느 공동체나 그 구성원들은 평등하지 않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 역시 신분 사회지만, 조선은 아예 그것이 법으로 규정된 사회였다. 노비의 입장에서, 백정의 입장에서, 여성의 입장에서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주인이 바뀔 뿐이다. 군 ‘위안부’ 동원도 그녀들의 아버지, 한국인 업자 등 한국 남성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피해 경험을 들어보면, 일본군을 상대하는 일보다 한국에 돌아와서 가족과 남편에게 구타당한 것이 더 억울하고 몸을 상했다는 증언이 꽤 나온다. 국가 내부에서 모든 사람이 국민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국민이기보다는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지방 사람이다.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봉합될 뿐이다. 이 봉합은 일상적으로 찢어지고 다시 꿰매지고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터져서 혁명이 일어날 수도 주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 비록 서구와 달리, 나라의 사정은 근대와 식민 지배와 함께 찾아온 자신도 모를 운명의 비극을 맞았지만, 구한말 개인들의 사정은 모두 달랐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가 성립될 가능성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노비 유진 초이와 백정( 유연석 ), 이양자( 김민정 )의 신분은 바뀌었다. 낮은 계층의 여성들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집 밖으로 나와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원래 국가 내부의 차이가 국가 내외부와의 차이보다 큰 법이고 격동기에는 더욱 그렇다. 드라마에서 이 문제는 경어체 여부로 드러난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대사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고도의 한국적 맥락이 필요하다. “외국인에게는 어렵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다. 김은숙 작가의 대사와 스토리 전개 방식은 이제까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듯하다(예를 들어, “통성명, 악수, 포옹 그다음은 그리움이더이다” 이 말, 정말 맞다). 이 드라마의 설정상, 반말과 존대어가 뒤섞어 어떨 때는 정신이 없다. ‘원래 신분’과 외국(미국과 일본)에 다녀와서 바뀐 신분, 장 포수와 고애신처럼 반상과 사제 관계가 겹친 경우, 나이, 성별 등에 따라 서로 주고받는 말투가 다 다르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구한말을 총체적으로 본다. 유관순 누나? 민족의 대표가 여성일 때 윤종찬 감독의 < 청연 (靑燕, Blue Swallow)>(2005)은 그의 걸작인 < 소름 > 이후 나를 실망시키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역시 친일 문제로 고난을 겪었다.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알려진 박경원을 다룬 <청연>의 첫 장면은 남루한 옷을 입은 조선의 소녀들이 들판에서 뛰쳐나오는 데서 시작한다. 내게 이 장면은 영화의 주제처럼 보였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소녀들의 힘찬 달리기. 그들의 꿈을 재현한 듯 한 그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영화는 조선인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민족주의’ 영화다. 다만, 민족의 대표가 기존과 달리 남성이 아니라 여성일 뿐이다. 그 한 가지 이유로, 이 영화는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 한국 사회에서 늘 재연되는 장면. 맹목적 대중 심리가 배타적 국가주의와 만나 ‘생각 정지’ 상태에 이르고, ‘일본 앞에 우리는 공동 운명’이라는 퇴행적 민족주의가 저항적 민족주의로 둔갑한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 사이의 차이(이 경우는 성차별)는 은폐되고, 시선은 모두 ‘외부의 적’을 향하게 된다. 여성이 자아실현을 하는 데 일본인의 도움을 받으면 ‘친일 행적’이고 ‘친일 영화’인가? <청연>은 여성에게 ‘친일’과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여성은 민족의 주체가 아니라 민족을 재현하는 대상일 때만 유용하다. 유관순은 종종 ‘열사’로 불리기도 하지만, ‘윤봉근 열사’에 비해서는 그 경우가 훨씬 적다. 그것도 “유관순 누나”다. (나는 “유관순 언니”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떤 남성이 “레즈비언이세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우리가 ‘대표 친일파’로 기억하는 이광수나 김활란에게 ‘반민족행위자’라고 하면, 두 사람 모두 억울해서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강하게 정체화했으며, 친일을 함으로써(‘근대를 지향함으로써’) 민족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민족을 살리는 길’은 사람마다 이렇게 다양하다. 창씨개명이나 단발령 등 일제의 정책을 거부한 이들 중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유교 규범을 수호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았다. 친일이 불가피했다거나, 사소하다거나, 모든 민족주의는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친일 청산은 절대 선, 당위적인 진실이 아니라 경합하는 언설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친일파닷!” 이 한마디가 경합해야 할 담론장의 다른 목소리를 모두 내쫓는다는 데 있다.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 결혼하면 국적을 잃는데 여성에게 국가가 어디 있나. 아직까지도 남자가 ‘출세’하면 여자가 따르고 남자들은 그에게 아부하지만, 여자가 ‘성공’하면 남자는 떠나고 여자들은 그녀를 시기한다. <청연>은 기존의 이성애 법칙에 도전한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김주혁 )이 박경원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녀가 ‘똑똑하고 야망에 불타며 고집이 센’ 데다가, 특히 “너를 통해 세상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연>에서 남성은 여성을 통해 공적 영역에 진출하며, 여성의 꿈을 지원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주인공 박경원( 장진영 )과 비슷한 시대를 산 퀴리 부인은 노벨상을 수상한 뒤에도, 남편 연구실에서 더부살이했고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핵분열을 발견하여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첫 여성회원이 된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는, 연구소에 여성이 출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남성들 때문에 정문을 사용하지 못하고 청소부용 반지하 뒷문으로 다녀야 했다. 우리는 < 히든 피겨스 >에서 비슷한 장면을 보았다. 당시는 무려 1960년대.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히든 피겨스 박경원은 어땠을까? 일제 강점기 너무 가난했던 한 소녀가 현모양처 + 독립운동가 + 훌륭한 비행사… 이것이 가능했을까? 아니면, 관객의 바람 대로 위 모든 것을 다해 내거나 ‘독립운동가의 아내로만’ 헌신해야만 했을까. 개인의 삶도 복잡한데, 국제 정세가 얽힌 나라를 되찾는 일은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탈식민주의 이론의 시원(始原)인 프란츠 파농은 말했다. “민족해방투쟁(독립운동)은, 빼앗기기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탈식민주의, 즉 포스트콜로니얼(post colonial, 후기식민주의)은 형식상의 주권은 되찾았지만 여전히 이전의 식민 국가들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문화적, 사회적으로 가해국에 대한 피해의식, 동일시 욕망, 경쟁심, 원한 등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 가장 ‘웃긴’ 사례가 영연방 경기 대회(英聯邦 競技大會, Commonwealth Games)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예전에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이 무슨 정체성인가? 같은 주인을 모신 나라들의 운동 경기? 사족 - 우연일까, <청연>의 두 주인공 장진영과 김주혁은 지금 우리 곁에 없다.